인생의 의의를 결정하는 것은, 사람이 신을 향해 무엇 때문에 자기를 이 세상에 보냈느냐고 물을 때는 매우 난처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가 되지만, 자기 스스로를 향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을 때는 매우 간단해진다. 자신의 장례식에서 비참한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삶의 의미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영원한 상대적 위대함과 왜소함을 인정하는 것, 신에 다다를 힘은 없지만 신의 뜻을 찾아 실천하는 삶에 만족하는 것, 자기보다 낮은 생명체를 사랑과 자비로 대하면서, 그 동물적 욕망을 가지지 않고 그것을 모방하지 않는 것, 그것이 신에 대해서는 경건함이고 그 생명체에 대해서는 선량함이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현명함이다. 삶의 의의를 외면한 채 살고 싶다면 딱 한 가지 길이 있다. 술과 아편에 절어 육체적 마비상태 속에서 살거나, 갖가지 유혹과 소비 오락에 빠져 감성적 마비상태 속에서 살면 된다. 이 세계는 결코 허구의 세계가 아니다. 단순한 시련을 위한 속세도 아니고, 더 나은 영원한 세계로 안내하기 위한 속세도 아니다. 우리가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우리 뒤에 살게 될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즐거운 지구 환경이 되도록 하는 세계, 아니
84년 즈음 한 친구가 읽어보라며 책 한 권을 건넸다. 책 제목이 ‘황강에서 북악까지’였는데 표지의 사람 얼굴이 낯익었다. 9시를 알리는 땡소리만 나면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뉴스를 시작했던 ‘땡전뉴스’의 주인공이었다. 그를 ‘전대갈’이라 부르며 이를 갈았던 우리는 지피지기라며 책을 펼쳤지만 차마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어릴 때 사과서리를 하다가 들켜서 거짓말을 했는데 이때 부끄러움 때문에 평생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거나, 아버지가 악질순사를 강에 처박고 만주로 도망갔다면서(실상은 노름빛 때문이라는데..) ‘행패를 부리는 순사 놈을 보는 소년 두환의 주먹이 불끈’ 운운하며 시작하는데 80년대 피끓는 청춘들이 완독하기에는 보통 어려운 미션이 아니었다. 작가 천금성은 당시 권력핵심이자 서울대 농대 2년 선배인 허문도의 권유로 전기를 창작(?)했다. 문단의 평가는 혹독했으나 작가는 글을 판 댜가로 문화방송 편집위원이라는 달콤한 자리까지 거쳤다. 책 제목대로 경남 합천 황강변에서 태어나 서울 북악산까지 탱크를 몰고 접수했던 전두환이 죽었다. 그는 국민들을 자기가 통솔하던 군대의 졸로 여겼다. 오월 광주를 비롯해 수많은 청춘들이 그의 군홧발 아래 피어보지도 못하고
난데없이 떠오른 음률. 그런데 언제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가려운 곳을 긁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하루 종일 기억의 재를 뒤지다 아하! 하는 탄성을 내뱉는다. 영화 속 음악이었다.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탈리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사랑(The Sheltering Sky, 1990)’. 데보라 윙거가 나왔을 거야. 사막이 무대였어. 줄거리가 어떻게 됐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일본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가 작곡한 장엄한 주제곡, 처연한 느낌의 아프리카 음악들의 가슴을 적신 기억은 선연하다. 그 기억이 오래전 영화를 호출해 다시 보게 만든다. 영화 ‘마지막 사랑’의 무대는 아프리카 모로코다. 부부관계 권태와 작품 창작의 벽을 만나 여행길에 오른 작곡가, 작가 부부 포터와 키트. 그들 곁에는 부유하고 잘생긴 동행자가 있어 삼각관계를 예상하게 했는데 돌연 동행자는 다른 길로 새 버린다. 일단 러브 스토리는 아니라는 이야기. 영화 첫 장면부터 나와 심장을 강타하더니 중간중간 배경에 흘러 감정을 뒤흔들던 아프리카 토속 목소리들이 있었다. 가장 강렬했던 목소리에 대해 영화 속에서도 대화가 나온다. 부부에게 비극의 광풍이…
포퓰리즘, 그 진실은? 정치에서 “포퓰리즘(populism)”은 비하(卑下)의 언어다. 이 말은 가치나 원칙없이 대중들의 욕망에 영합해서 표를 모으는 행위를 지탄할 때 등장한다. 그렇게 인기에만 기대는 정치인은 “포퓰리스트(populist)”라는 공격을 받는다. 사실이 아니라도 정적(政敵)을 모함하기 위해 쓰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시대마다 같은 단어라도 그 의미가 달라지긴 하나, 사실 “포퓰리즘”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 정치의 근본이다. 이 단어는 “피플(people)”에서 나온 것이자 미국의 내전(Civil War)인 남북전쟁 당시인 1863년 에이브라함 링컨이 게티즈버그에서 행한 연설로 더욱 분명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민주정치의 주체를 확정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데 ‘people’은 ‘국민(the nation)’이 아니라 ‘인민(人民)’이다. 링컨의 말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와 일치한다. 이 인민을 앞세우는 사상과 태도가 “포퓰리즘”이다. 그 정확한 번역은 “인민주의”가 되는데
반도체 산업이 글로벌 패권 경쟁의 첨병으로 부상했지만 한 해가 저무는 한국은 경이로울 만큼 여유롭다. 미국 중국 일본 등 주요국은 자국 및 동맹을 중심으로 한 반도체 자체 공급망 확보를 위해 혈투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정부가 올해 약속했던 반도체 산업 지원을 위한 특별법 조차 국회에서 해를 넘길지 모르는 상황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EIP)은 미국과 대만 등 각국 정부가 국립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고 있다며 정부의 시급한 대응을 경고하고 나섰다. 지난해 기준으로 반도체 제조 공정에 필요한 웨이퍼 제조장비는 일본 의존도가 63.2%에 달했다. 또 집적회로 반도체 부품은 미국으로부터 수입해오는 비율이 70.6%다. 일본·중국·미국·대만·베트남 등 상위 5개국이 전체 수입액의 82.8%를 차지한다. 한번 공급망이 흔들리면 어떻게 되는지 최근 요소수 사태에서 지켜봤다. 일본은 미국·대만과의 동맹을 통해 한국 반도체 산업을 끊임없이 견제 도전하고 있다. 한국은 반도체 매출 세계 2위, 메모리 1위 강국이다. 하지만 소재‧부품‧장비 등에서 여전히 추격자이고 이를 위한 연구·개발(R&D)이나 고급 인력은 갈 길이 멀다. 반도체가
실업자가 넘쳐났던 경제 대공황 시기,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산업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노동은 남성의 것”이라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에 대한 부정적 분위기를 공고화시키는 도구였지요. 하지만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상황이 급변합니다. 독일의 경우 “여성의 본분은 아이와 부엌과 교회에 있다”는 나치즘 이데올로기 탓에 여성 노동력 차출이 상대적으로 저조했습니다. 하지만 그 외 모든 참전국에서는 대대적 여성노동력 동원이 실행됩니다. 미국이 대표적이었지요.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1년 만에 18세에서 39세 사이 수백만 명의 남성들이 전쟁에 투입되었습니다. 당연히 산업 전반에 걸쳐 극심한 노동력 부족이 발생했고, 이것이 여성노동의 불가피한 확대를 요구한 겁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가부장적 편견에 순응하여 집안에 머물러 있던 여성들을 산업 현장으로 이끌어내는 것은 쉬운 과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때 광고와 프로파간다 캠페인이 지대한 역할을 합니다. 여성의 노동 참여를 애국시민의 미덕으로 칭송하는 대대적 캠페인을 펼친 거지요. 노동하는 여성에 대한 긍정적 이데올로기가 전 방위적으로 유포된 겁니다. 이에 따라 여성노동…
일반 사람들은 특권층의 사람들이 자기식대로 행동하고 지배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이에 길들어져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방식은 자유로운 사람들 사이에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 민주주의 기본 원칙인 대의제(代議制)에 의한 통치의 목적은 큰 사회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쁜 지배에 굴종하면서 그것을 불평할 권리를 가지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다. 헌법 조문 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것은 주인과 노예의 계약서이다. 우리의 목표는 노예의 지위 향상이 아니라 노예제를 폐지하는 것이다. (게르센)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지배할 권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한 사람을 지배할 권리도 없다.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 진리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진짜처럼 보이지만, 이는 찬반 투표로 결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칼라일) 투표수의 많고 적음이 정의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 (쉴러) 우리는 총칼을 고문도구가 놓여 있는 박물관의 선반에 진열하는 것은 물론, 곧 경찰기구와 투표함도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임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어니스트 크로스비) 이곳의 바닷가에 앉아 절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나는 내가 모든 의무에서 해
크리스마스 이틀 전인 12월 23일에 올해의 처음이자 마지막 체험학습을 가게 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2년 동안 학교 밖 활동은 꿈도 꾸지 못했던 6학년 친구들인데 졸업하기 전에 문화 공연 관람으로 한 해를 마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이 바라던 수학여행과는 거리가 먼 클래식 공연 관람이지만 이것만으로도 학교 밖 활동에 대한 아이들이 갈망이 조금은 사그라들 것 같다. 작년에 처음 코로나를 맞닥뜨렸을 땐 이렇게 오래 코로나 때문에 학교가 멈춰있을 줄 몰랐다. 다들 평소처럼 이런저런 체험학습 계획을 잡아뒀다가 모두 취소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코로나 2년 차에는 우리 학년을 제외한 전체 학년에서 체험학습을 안 가기로 결정했다. 학교 운영 위원회에서도 올해 체험학습은 없는 걸로 동의했다. 내가 속한 6학년은 교육청에서 제공하는 문화 사업 예산을 받을 기회가 생겨서 2학기 말쯤에 문화 공연을 관람하기로 계획했었다. 연말 정도면 코로나가 괜찮아지지 않았을까 기대하면서 받은 예산이었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2학기 중반 넘어서까지도 코로나가 기승이라 정확한 일정을 잡기가 어려웠다. 다른 소규모 학교는 이미 올해 초부터 전면 등교를 하고 있고 어떤 학교는 체험학습까지 간
최근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기사의 제목은 ‘이재명을 몰라서’였다. 기사의 내용은 《인간 이재명》 읽기가 국회의원회관에서 유행이라는 것이다. 물론 민주당 국회의원과 보좌관들이다. 그만큼 민주당 국회의원들조차도 이재명이란 사람을 몰랐다는 얘기다. 어쨌든 반가운 기사였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윤석열의 진심》이란 책을 읽고 있다는 기사도 나왔으면 좋겠다. 샴푸 한 통을 파는 판매원도 상품을 팔려면 그 상품의 성분과 효능, 임상결과를 정확히 알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 근거도 없이 ‘이 상품 좋으니까 사세요’라고만 줄기차게 외치는 판매원은 빵점짜리다. ‘우리 상품이 좋진 않지만 그래도 저 상품 사면 안 돼요’라고 떠드는 판매원은 없는 것만 못하다. 더구나 자신이 마케팅하려는 상품이 나라의 살림을 5년이나 맡길 대통령 후보라면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이재명을 모르고 국민의힘은 윤석열을 모른다. 몰라도 아주 많이 모른다.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알 것이다. 이재명이 정말 훌륭하다고 믿어서 이재명을 지지하고, 선택을 호소하는가. 윤석열이 정말 잘할 것이라고 믿어서 윤석열을 지지하고, 줄을 서는가. 윤석열이 싫어서, 이재명이 싫어서가 아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