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린 애들에게 미사일을 쏘아 죽이려 하는 거죠? 정말 불공정합니다.”(팔레스타인 소녀 나딘 압델 타이프가 지난 15일 중동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점점 팔레스타인의 숙명에 익숙해지고/ 우리 삶이 감옥이 되어 갔다는 것/(....)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아요/ 이미 그때 내 삶은 죽음과 손잡고 있었으니까"(2011년 출간된 정한용 시인의 『유령들』에 실린 시 '레퀴엠' 중에서) "이 무지막지한 이스라엘 군인 놈들아/ 내 자식 내 남편 내놓아라./ 이 갈갈이 찢어 죽일 아브람, 모세, 다윗, 솔로몬의 새끼들아/ 통곡의 벽 안쪽은 그 벽 밖의/ 통곡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이 외신은 울음의 전도체인가, 아닌가"(1983년 출간된 황지우 시인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실린 시 '베이루트여, 베이루트여' 중에서) 2021년, 2011년, 1983년. 팔레스타인 소녀와 한국의 두 시인이 40년이라는 시간 격차 안에서 절규한 이 연도들은 무엇을 뜻할까? 너무 명백해서 묻는 것 자체가 부질없다. 팔레스타인 상황은 그만큼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가 지난 20일(현지 시각) 휴전하기로 합의했지만 합의서는 두루마리 화장지
나는 내 앞의 그녀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이러저러한 자신의 증상을 호소한후에 잠을 계속 잘 못자서 그런가. 하는 혼잣말을 하는 그녀에게 말이다. 5일전부터 소변이 1,2시간에 한번씩 자주나와서 모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미세한 혈뇨가 보인다고 간단한 처방을 받았는데 남편이 한의원가서 보약지어먹고 빨리 회복하라고 성화여서 한의원에 들른 차였다. 나는 혈뇨가 나타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에 대해 말하며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혈뇨일지라도 지금부터 몸을 잘 돌볼 것을 일렀다. 어느식당에서 서빙을 하는일을 하루 종일 소변생각도 잊을 만큼 바쁘고 고되다. 열심히 해서인지 손님들이 많이 좋아해줘서 일할 때는 힘든줄 모르다가 밤이 되면 넘 피곤하데 밤에는 편치 않아 잠을 잘 못잤다고 하였다. 검은 흙빛의 얼굴로 이런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표정은 밝은 그녀다. “그래요. 잠이 보약입니다. 지금 필요한 한약을 복용하면서 제가 안내하는데로 일상생활을 관리하면 점점 좋아질거예요. 잠을 잘 못잤던 분들은 몸이 회복될때까지는 잠이 많아진답니다. 몸이 이제까지 쌓인 피로를 풀려고 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니 잠이 오면 주무세요. 한달 쉴 수 있어 정말 다행이예요. ” 수면장애의 대표적 증상인
신약성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전도자 바울이 드로아에 왔다. 드로아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항구 도시로, 트라야누스 황제가 만든 도수교(導水橋)가 명물이었다. 초대교회 풍경이 대개 그러하듯, 이곳에서도 아무개의 집에서 일요모임이 열렸다. 밤이 깊도록 바울의 강론이 이어지는데, 한 청년이 3층 창문에 걸터앉아 몹시 졸다가 그만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강론이 중단된 건 당연지사.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가 청년을 일으키려 하지만, 아뿔싸, 숨을 쉬지 않는다. 어쩌자고 이 청년은 그토록 위험한 장소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을까? 좀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서 일찌감치 모임에 왔더라면 안전한 자리를 선점할 수 있지 않았을까? 늦게 온 탓에 창문턱에 걸터앉은 것까지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쳐도, 얼마나 정신없이 졸았기에 땅으로 떨어지는가? 이 청년의 이름은 유두고. ‘유두고’는 헬라어로 ‘행운’이라는 뜻이다. 그 시절 노예들에게 흔한 이름이었다고 하니, 소름이 돋는다. 노예를 행운이라고 부르는 건 철저히 자본가의 시각일 터. 그러니까 유두고는 일요일에도 쉬지 못하게 붙들어둔 욕심 사나운 주인 밑에서 온종일 일한 뒤, 느지막이 모임에 참석했으리라.…
석유 수출국 이란은 부자다. 그러나 이란엔 가난한 사람들이 참 많다. 아이러니다. 토크빌이 1833년 영국을 방문하고 부자 나라에 웬 가난한 사람들이 이리 많냐며 깜짝 놀랐던 장면을 떠올리면 이 상황이 좀 이해가 갈까. 아무튼 이란의 불평등은 정책의 실패. 국가의 책임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인구 8500만 명, 이 중 3분의 2는 도시에 거주한다. 인플레이션도 늘 존재한다. 이란정부는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지 않았다. 그러니 국가의 원조를 받지 못하고 소외된 채 사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공적원조는 대부분 에너지, 밀가루, 우유, 식용유, 설탕을 사는 데 필요한 보조금 정도. 이 중 에너지 비용은 보조금의 약 90%. 국내 총생산의 30%였다. 이는 과도한 에너지 사용과 밀수를 조장했다. 게다가 에너지 보조금의 70%는 상위 30%에게 돌아갔다. 1인당 식량 소비는 모두 비슷한데 에너지 소비는 상위 10분위가 하위 10분위보다 5배 더 많았다. 이란 정치인들은 이러한 불합리한 정책을 바로잡아야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지도자도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다행이 라프산자니(Rafsanjani) 정부(1989–97)와 하타미(Khata
오마이뉴스와 조선일보가 오랜만에 동행했다. 오마이뉴스가 5월 14일 '산림청이 저지른 엄청난 사건, 국민생명이 위험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2050년까지 30년간 30억 그루의 나무를 심어 탄소 3400만톤을 흡수하겠다”는 산림청의 초대형 프로젝트에 대한 맹렬한 비판이 골자였다. 드론으로 촬영한 2분 36초짜리 동영상을 포함해 18장의 사진이 곁들여진 기사였다. 그 충실도는 대단히 높았다. 오프라인 언론은 시도하기 어려운 장문의 심층고발 물이었다. 3000건이 넘는 댓글(포털 다음 기준)로 독자의 관심도 뜨거웠다. 조선은 다음날 15일(토)자 2면 톱기사로 '탈원전 文정부, 멀쩡한 산 밀어버렸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보도를 시작했다. 이틀 후 월요일자(16일 신문 일요일자 신문 휴간)에선 '산으로 가는 文정부 탄소정책'이란 제목의 1면톱 기사로 강도를 높였다. 아울러 3면 전체를 할애해 비판했다. 이후 금요일까지 매일 기사를 내보냈다. 근래에 보기 드문 1주일간 계속된 집요한 비판기사였다. 두 언론의 기사는 독자들의 분노를 자극했다. 코로나 이후 부쩍 는 등산 인구의 공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산림청의 ‘30년 이상된 나무가 탄소흡수량이 떨어
죽어가는 자의 말과 태도는 주위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은 그에 못지 않게 매우 중요하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추한 죽음은 잘 살아온 자신의 삶에 상처를 내고, 깨달음을 얻은 의연한 죽음은 이전의 나쁜 삶을 보상해준다. 무대장치가 한 장면에서 다른 장면으로 완전히 바뀔 때, 우리가 그때까지 현실 속의 장면처럼 생각했던 것이 한탙 장치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너는 죽음의 순간,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무대장치였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데, 그것은 그가 그 순간 이해력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뭔가 다른 것을, 살아 있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뭔가를 알게 되어, 그것에 영혼이 사로잡혀버렸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죽는 순간, 그가 그때까지 그 아래에서 불안과 기만과 슬픔과 악으로 가득 찬 책을 읽어 왔던 촛불이, 그 어느 때보다 밝게 타올라 지금까지 어둠 속에 있던 모든 것을 비추어낸 뒤, 이윽고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두워지면서 영원히 꺼지는 것이다. (아미엘) 죽어가는 사람은 어느 정도 이미 영원한 세계에 발을 들여
제1야당 국민의힘에서 시작된 ‘젊은 피’ 돌풍이 심상치 않다. 한 번도 총선에서 당선된 적이 없는 만 36세의 이준석 전 최고위원을 비롯해 초선의원들이 국민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고 새 바람의 기수로 등장했다. 보수를 표방하는 정당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권 전반에 시사하는 바가 만만치 않다. 중요한 것은 바람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내세울 변화의 지향점이다. 어떤 콘텐츠로 국민이 원하는 시대 정신을 구현할 것인가가 핵심이다. 제대로 된 지표가 세워지지 않고 국민으로부터 박수를 받지 못한다면 결국 한바탕 헛바람으로 끝날 가능성도 있다. 제1야당에서 먼저 이 같은 흐름이 나타난 것은 철저하게 절박한 필요성에 의해서이다. 4·7 재보선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는 결코 내부혁신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정부·여당에 대한 민심이반에 다른 반사이익으로 읽는 것이 옳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정권을 잃고 난 이후에도 국민의힘은 당명만 바꿨을 따름 한 번도 제대로 된 환골탈태를 일궈낸 적이 없다. 국민의힘 내의 권력 구도에서 여전히 이른바 ‘태극기 부대’에 이념의 뿌리를 둔 수구꼴통 근성을 지닌 무리가 핵심으로 온존한다. 완승으
비슷한 시기 20대 초반 두 청년이 사망했다. 한 명은 지난달 25일 서울 반포 한강공원에서 실종됐다가 닷새 만에 발견된 22살 손씨다. 또 다른 한 명은 22일 경기도 평택항에서 300kg의 개방형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숨진 23살 이씨다. 날벼락 같고 허망한 두 죽음 앞에서 슬픔의 무게는 가늠조차 어렵다. 다만 언론을 통해 매개된 세상이 사회의 애도 방식을 결정 짓게 한다는 점에서 비교의 이유를 두고자 한다. 이씨는 아버지와 1년 4개월간 출퇴근을 함께했다. 군대를 제대한 후 복학했지만 코로나로 등교가 어려워지면서 틈틈이 아버지가 일하는 인력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평택항 현장에서 원청인 물류업체가 요청하는 작업에 필요한 사람을 연결해주고 인력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사건이 발생했던 날도 원청의 현장 관리자가 개방형 컨테이너 해체 작업에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이씨는 해체 작업을 도울 인력과 함께 현장에 갔다. 지게차 기사는 컨테이너 날개 근처에 있던 나뭇가지를 치우라는 지시를 반복했다. 이씨가 나뭇가지를 치우러 올라선 사이 컨테이너 한쪽 날개가 넘어지면서 사고가 발생했다. 지게차와 같은 중장비가 사용되는 현장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