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늦은 시간 큰아들 친구 두 명이 찾아왔다. 예고 없이 찾아온 녀석들이 아들과 함께 거실에서 술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으니 집안이 꽉 찬 느낌이었다. 이들은 큰아들과 함께 코 흘릴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실컷 놀면서 다져온 우정이기에 반가움이 넘쳐났다. 큰아들은 외국에서 사업을 하다 코로나로 귀국했다. 그런데 그 길로 발목과 삶이 함께 묶여 세월을 허비하고 있다. 그래 저래 두 친구가 위로하겠다는 마음으로 찾아왔는데 나 또한 뵙고 싶어 들렸다고 한다. 녀석들은 이야기 도중 모두 아버지를 잃었다고 하면서 내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는데 마음이 짠했다. 녀석들은 50대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이 아이들 나이 때는 오직 직장과 직업에만 몰두했다. 그 일이 최우선이요 전부였다. 부모님 모시며 세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 있어 딴생각할 겨를도 여유도 경제적 물기도 없었다. 그런 마음으로 녀석들을 쳐다보니 ‘너희들도 힘들겠구나.’ 싶어졌다. 녀석들은 술이 몇 순배 돌자 내가 고향에서 교원 생활을 할 때 우리 집에서 기르던 개 이야기를 했다. 어려서부터 혼자 자란 나는 주인에게 충성도 높은 개를 좋아하며 기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얀 털이 눈부신 스피츠를 다음은 포인
뉴스가 무엇을 말하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촘촘하게 제시된 팩트 앞에서 사실과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적잖이 있다. 기성 미디어에 SNS에 기반한 1인 미디어의 가세로 그 어느 때보다 뉴스가 풍부해졌지만 뉴스 문맹률은 오히려 높아진 것 같다. 가짜뉴스의 범람을 이유로 꼽는 전문가들이 많다. 그러나 기성 언론의 가짜뉴스는 언제나 상수였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테면 군사정권 시절 한국 언론은 정권의 보도 자료에 아첨이라는 양념을 더해 시청자·독자 앞에 뉴스랍시고 내놓곤 했다. 거기에 사실 여부를 가리기 위한 치열한 뉴스 정신이 들어있을 리 없다. 대통령의 인사권을 휴지조각으로 만든 윤석열 사태에서 보았듯이 이른바 언론의 받아쓰기는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팩트 왜곡과 조작 등 전통적인 수법이 더욱 교묘해지고 있는 이즈음이다. 그렇다고 그게 다는 아니다. 육하원칙에 입각한 사실 전달이 뉴스의 속성이자 생명이기 때문이다. 모든 언론은 운명적으로 사실을 전달할 수밖에 없다. 그다음은 독자의 몫이다. 일차적으로 제시된 사실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여기서 필요한 덕목은 판단 유보일 것이다. 헷갈리면 거부하거
죽음조차도 온 힘을 다해 정의를 위해 싸우는 자의 승리를 방해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싸워라. 굽힐 줄 모르는 올바른 마음이여, 결과를 생각하지 말고 전진하라. 그리고 네가 그것을 위해 싸우는 정의를 승리를 확신하라. 파멸하는 것은 오직 부정이며, 옳은 것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신의 법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라일) ‘최후까지 인내하는 자는 구원받으리라.’ 우리는 왜 이렇게 조금만 더 노력하면 목적이 달성되는 곳에서 절망하고, 주저앉고, 심지어는 뒷걸음질까지 치는 것인지! 마찰이 모든 노동의 긴장도를 나타내듯, 외면적인 고뇌의 정도는 예수에 대한 우리의 추종의 정도를 나타낸다. 사람들의 사랑을 구하지 말라. 그들이 미워한다 해도 두려워하지 말라. 사람들은 종종 악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선이기 때문에 미워한다. 인간이 아니라 신의 칭찬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라. 나라란 무엇입니까? 악과 싸워가자는 것입니다. 국민의 생명재산이라 안녕질서라 하지만 그 생명이라 재산이라 안녕질서라 하는 것은 그저 가만히 먹고 살아가는 것만 아닙니다. 악과 싸우는 생명이요, 재산이요, 안녕이요, 질서입니다. 악
경기도와 경기주택도시공사(GH)가 아동복지시설(보육원)을 떠나야 하는 ‘보호 종료 아동’들에게 공공임대주택 공급물량 중 약 100호를 우선 배정한다고 밝혔다. 보호 종료 아동은 아동복지법에 따라 만 18세가 돼 아동양육시설의 보호가 종료되는 청소년이다. 지난달 28일 국토교통부는 ‘소년소녀가정 등 전세주택 지원 업무처리지침’ 개정안을 공포했다. 내용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로 한정한 보호종료아동 주거안정지원사업 시행자에 지방공사를 추가한다는 것이다. 지침이 개정된 것은 경기도가 보호종료아동에게 공공임대주택 물량 공급이 필요하다는 건의를 정부가 수용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도는 최근 GH와 보호종료아동 공급물량 배정 협의를 마쳤다. 앞으로 도는 공공임대주택 100호를 공급한 후에도 배정물량을 점차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도에 따르면 매년 전국에서 2500여 명, 도내에선 400여 명이 만 18세에 아동양육시설 등에서 퇴소하지만 절반가량이 거주할 곳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단다. 따라서 이들의 자립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보육시설에서 나온 청년들에겐 1인당 500만 원 정도의 자립정착금이 한번 지급되고, 3년 동안 지방정부가 월 30만 원 정도를 지급한다.
한탄강은 큰 바위 하나를 일으켜 의적 임꺽정을 숨어 살게 하였다. 꺽정은 바위 동굴 속에서 한탄강 하류를 바라보며 서울을 도모하였다. 전곡 문산 장단 지나 임진과 합수하여 탄현에서 곧장 좌로 들어 한강을 치고 올라가면, 거기 백성의 나라가 눈물겹게 펼쳐져 있었으니, 백성의 왕보다 강한 권력을 가진 사대부를 모조리 참살하여 광화문 높이 걸고자 한 꿈. 사대부 우두머리 피 흐르는 모가지를 들고 어전에 뛰어들어가 왕의 무릎 아래 통곡하려던 꿈. 그리하여 임꺽정의 한탄강은 지금도 흐르고 있느니.
사람은 타인에 대한 아첨과 허영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신을 섬기기가 수월해지고, 그 반대의 경우 역시 진실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마음을 졸이며 살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도록 살라. (류시 말로리) 남의 결점에 대해서는 불쾌하게 느끼면서도, 자신 속의 결점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법이다. 남의 얘기를 할 때, 그 사람을 흉보는 사람은 그게 바로 자신에 대한 얘기임을 알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것보다 빨리 우리의 결점을 바로잡아 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떨어진 거리에서 우리의 결점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당연히 그 결점이 싫어지기 때문이다. (라 브뤼에르) 선한 사람들이 편히 쉬는 곳은 그들의 양심이지 결코 다른 사람들의 입술이 아니다. 입을 다물고 있어도 비난하고 말이 많아도 비난하며 또한 말이 적어도 비난한다. 세상에 비난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법구경) 절대로 변명하지 말라. 진리를 존중하지 않는 친척보다 진리를 사랑하는 남이 더 낫다. 아무리 선량한 행위에도 어느 정도는 허영과 세상 사람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경찰이 동네북 신세다. 국민으로부터 연일 질타가 쏟아지고 있다. 나타난 현상을 보면 경찰이 이런 처지가 된 건 남 탓할 형편이 못 된다. 범법자의 위협 앞에 목숨이 위태로운 시민을 제때에 효과적으로 구출해내지 못하는 경찰에 대한 민심은 사납기 그지없다. 차제에 경찰의 내외적 문제 핵심을 올바로 짚어내어 효과적인 대책을 강구해내야 할 것이다. 위상이 막강해진 우리 경찰이 이렇게 무능한 모습으로 질타받는다는 게 말이 되나. 문재인 대통령은 인천에서 발생한 ‘층간소음 흉기 난동 사건’의 경찰 부실 대응에 대해 “이는 남경·여경 문제가 아닌, 현장에 출동한 경찰의 기본자세와 관련한 사안”이라고 지난 22일 지적했다. 지난 15일 오후 4시 50분쯤 인천 남동구 서창동 한 빌라에서 층간소음 문제를 시비하다가 벌어진 흉기 난동에 테이저건과 삼단봉 등 장비를 갖고 있던 여경이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는커녕 현장에서 도망치는 일이 벌어져 젠더 갈등 논란으로까지 번지며 시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사고 당시 여경은 흉기를 든 가해자 A씨의 난동에 대응하지 않고 지원을 요청하겠다며 1층으로 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결국, 피해자 남편이 칼에 베여가며 몸싸움을 벌여 가해자를 제압했지만
사람들은 ‘송파구 세 모녀 사건’이라고 불렀다. “서울 송파경찰서는 지난 26일 오후 9시 20분께 송파구 석촌동의 한 주택 지하 1층에서 이 집에 살던 박 모(60)씨와 두 딸 A(35) 씨, B(32) 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고 밝혔다. (…) 현장에서는 현금 70만 원이 든 봉투와 함께 '주인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메모가 나와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나는 왜 이 세 모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장애인 가족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머니가 노령연금을 받을 수 있는 나이도 아니고, 국민연금이 나올 시기도 아니고, 마땅한 직장조차 없었을 것이다. 차라리 기초생활 수급자였으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국가에서 생계비 보조를 받았을 텐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생활을 책임질 수 있는 성장한 두 딸이 있었는데 두 딸도 직장을 다닐 수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 혼자 식당일로 겨우 생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세 모녀를 살릴 수 있는 대책이 없었나? 이 세 모녀는 왜 삶을 놓아버린 것일까?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수치스럽게 했을까? 정말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나? 나는 만일 기본소득이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