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한 잔 밖에 /유미애 외로울 때 나는 나에게 기댑니다 오른 팔을 뻗어 얼굴을 누이면 또 한 계절을 건너는 심장소리 덜컹덜컹, 뺨 붉은 봄날이 가고 푸른 소나기 넘어 흰 눈 오네요 외롭다는 말은 곧, 아프다는 말 참았던 상처가 울먹울먹 위태로울 때 꽃씨를 뿌린 기억마저 희미할 때는 까마득히 잊고 있던 내 몸 아름다운 오지(奧地)들을 만지며 고백합니다 미련한 나를 끌고 와주어 고맙다고 비단길 보다 진흙길 많아 미안하다고 소주 한 잔의 뜨거움 밖에 나눌게 없지만 키득키득, 아웅다웅, 또 함께 가보자고 ■ 유미애 1961년 경북 문경 출생. 2004년 《시인세계》로 등단해 시집 『손톱』, 『분홍당나귀』가 있다.
별건 뉴스로 /황경식 입속에서 머리칼이 뭉텅뭉텅 튀어나왔다 금단의 봉인을 뜯어버린 걸까 정색하고 본색을 드러내며 어떤 조치나 치료도 밀어내고 꾸역꾸역 목구멍을 열고 나왔다 오래된 불만을 노래하듯 리드미컬하게 춤추며, 검은 털뭉치가 유유장장한 흐름으로 쏟아졌다 끝에서 끝까지 긴 행렬을 이루었고 아주 세상을 휘감아버릴 기세였다 공전의 막장 대하드라마를 꿈꾸며 오래된 금지곡처럼 압도적인 거짓 뉴스처럼 시종 거침없고 막힘이 없었다 쉴 새 없이 머리칼이 몰려나왔고 처음부터 제대로 준비된 각본 같았다 ■ 황경식 1946년 경북 의성 출생. 1994년 1월 『현대시학』으로 등단해 시집 『실은, 누드가 된 유리컵』이 있다.
그리운 분수 /정민나 주머니에 손을 넣고 빙빙 도는 해 분수는 꼭지를 잠그고 휴가를 가 버렸다 물안개를 뿜어내며 탄성을 지르던 분수는 현관이 조용하다 과부화된 심장을 식히러 멀리서 왔는데 여기까지 오느라 다리도 아프고 가슴도 뻐근한데 일 년 동안의 물줄기를 다 쏟아내고 사라진 분수대 앞에서 파업하는 대로를 바라본다 상처를 잘 낫게 하는 법은 트램을 타고 파리 외곽을 돌고 있다. 프래카드는 어지럽게 펄럭이고 사이렌은 ‘청결’이라는 이름의 분수를 지나가며 운다 내가 떠나온 마을의 복잡하게 얽힌 지도는 사방으로 뚫린 도로와 폐활량이 넉넉한 분수를 잇지 못하고 꼭 있어야 할 크리스마스 마켓을 감추고 있다. 불협화음의 시계를 꺼내 손바닥에 얹어본다 볼록한 심장을 지그시 누르면 채칵채칵 거침 숨을 쉰다 눈꺼풀이 무거운 분수대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면 속시원한 해법의 물줄기 청결의 분수가 돌아올까 ■ 정민나 1960년 화성 출생.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해 『꿈꾸는 애벌레』, 『E 입국장, 12번 출구』, 『협상의 즐거움』, 『파동이 신체를 주파한다』 등을 펴냈으며 시론집 『점자용 이야기가 있는 시창작 교실』, 『정지용 시의 리듬양상』이 있다. 현재 인하대학교 프
퇴근길 /이철경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은 출근 거리보다 서너 배 길다 가도 가도 끝없는 황톳길 발가락이 썩어 들어가듯 발목 아래로 흘러내리는 삶의 무게가 자꾸만 자꾸만 땅속으로 끌어당긴다 전철이 덜컹거릴 때마다 울대에 고여 있는 울음이 울컥거린다 모두가 하나씩 꿈을 슬며시 놓고 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 속에 우울한 허밍을 듣는다 어찌하여 산다는 건 이리 힘들고 어쩌다가 자꾸만 오그라드는 가. 때로는 음악에 리듬을 타려 하지만 한없이 늘어지는 노래가 심연의 나락으로 끌어당긴다. 갑자기 억누른 꿈들이 팡팡 터진다 아! 내 것이 아닌 열망이여 고독한 삶이여 방랑자여 ■ 이철경 1966년 순창 출생. 2011년 『발견』 시, 2012 『포엠포엠』 평론으로 등단했다. 시집 『단 한 명뿐인 세상의 모든 그녀』, 『죽은 사회의 시인들』, e북 『더없이 투명한 블랙』이 있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으며 『목포문학상』 평론 본상을 수상했다.
비슬산 참꽃 /이유환 비슬산 참꽃은 어머니다 오랜 목마름이 참꽃 다발로 피어나 하늘 밖의 하늘을 열어가고 있다 칼바람 꽁꽁 얼어붙었던 산을 녹이고 핀 꽃 천왕봉에서 팔공산 비로봉으로 흐르고 있다 작은 신음 소리에도 귀를 씻으며 땅 끝에서 들려오는 아가 울음소리 들으며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꽃망울 어루만지며 종일 너의 몸살을 듣는다 발뒤꿈치 쩍쩍 갈라지신 어머니 꺾인 허리 번쩍 들어 바다를 이고 가신다 비슬산 참꽃은 어머니다 ■ 이유환 1952년 대구 출생. 『현대시학(現代詩學)』 추천으로 등단해 시집 『異邦人의 강』, 『용지봉 뻐꾸기』가 있다. 화원고·동문고 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원, 대구시인협회 이사, 전 대구문인협회 부회장으로 있다.
어느 청개구리의 일기 /김추인 도움닿기를 꿈꾼다 찰나를 잡고 장대를 넘는 꿈 백년 모래의 길일지라도 그곳, 누룩 뱀 아가릴 지라도 높이 오르기 위해 포복을 마다 않았다 밤 그 너머 개벽할 새벽이 있다는 거 아는데 누구냐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놈 게아재비냐 장구애비냐 올챙이 시절은 잊어 다오 몇 번의 변복 후 솟구쳐 오르는 생 초록, 밀리터리 룩을 보라 ■ 김추인 1947년 경남 함양출생, 연세대학교 대학원졸 (현대문학 전공). 198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해 시집 『모든 하루는 낯설다』, 『행성의 아이들』, 『오브제를 사랑한』 등을 펴냈다. 만해‘님‘문학상 작품상, 한국의 예술상, 질마재 문학상, 자랑스러운 숙명인상 등을 수상했다.
사과의 벌겅 꿈 /이철수 둥그렇게 토실거리는 시간이 마트 상자 속에 멈춰있다. 가끔 저물녘 허기질 때면 서산을 바라보곤 한다. 붉어가는 구름이 뭉실뭉실 하트 모양으로 보여 질 때는 새콤한 사과 맛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에도 아니 새봄이 와도 심심한 허기에 벌겅 사과를 먹던 그 맛. 사과는 몸에 지워지지 않는 하트를 꿈같이 품고 있다. 본성이 사랑을 꿈속에 담아 숙성시키는 것일까? 누구에게든 뻘겋게 환한 표정으로 새콤한 사랑의 맛을 주고 싶어 하고 있지 아니한가. ■ 이철수 1952년 전북 군산 출생. 《문학공간》으로 등단해 시집 『섬 하나 걸어두자』, 공저『자전거를 타고 온 봄』 등 다수의 시집이 있으며 문학공간 신인상, 경기도문학상우수상, 수원문학인상을 수상했다. 수원문인협회 사무국장·낭송분과장·감사, 시샘문학회회장 역임, 용주사 템플스테이 진행, 정조대왕문화 진흥원교육연구소 실장을 역임했다. 한국문인협회·경기도문인협회 회원, 수원문인협회 이사로 있다.
조팝꽃 /김이대 소리 없이 봄이 다가 오는데 문득 이 눈물은 다 무엇이냐 외진 산밭 가에 하얀 조팝꽃 작년에도 피었는데 그냥 보냈습니다 꼭 잡지 못하고 떠나 간 손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이 모두 문 밖으로 나왔습니다 하얗게 아파 옵니다 하얀 것은 다 눈물입니다 ■ 김이대 1938년 경북 안동 출생. 『자유문예』 신인상, 『문학세계』 문학상 시 부문 본상을 수상했다.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 협회 회원이자 계간문예 작가협회 이사로 있다. 동해남부시 동인이자 시집 『구절초 필때』가 있다.
괜찮아 /안영희 흙마당을 그려 수유리 산언덕에 연립주택을 사 올라 간 그가 말했다 _요즈음 참 행복해요, 낼도 또 갈 거예요, 종로 나무시장엘. 입원실에서 풀려나왔을 땐 3월의 바람 끝이 매웠으나 유리창으로 깃드는 짧은 한낮의 햇살은 영혼의 바닥까지 부시게 투사해주는 행복의 예고편, 순정 신약제였다 창호지 새하얀 전지만큼의 양지를 찾아 붕대에 감긴 발 눕히다가 아 아아! 대중없이 터져나가던 탄성 나숭게소루쟁이씀바귀… 저리 여린 목숨들 어느새 비집고 올라와 주검자리 같은 허접의 땅에 깃발깃발 연초록을 팔락대고 있음에 애초에 내가 실린 기차의 종착역이 죽음이라 해도 뭐 괜찮아, 위대한 저 어머니 관장하시는 일이라면 다 맡겨두어도 괜, 찮아 싶었다 ■ 안영희 1943년 광주 출신. 1990년 시집 『멀어지는 것은 아름답다』로 등단해 시집 『내마음의 습지』, 『어쩌자고 제비꽃』 등 6권을 펴냈다. 지난 2005년 경인미술관에서 『흙과 불로 빚은 詩』 도예개인전을 열었으며 현재 계간 『문예바다』 편집위원으로 있다.
복수초 /고순례 겨울의 끝자락 복수초 꽃 피었네 봄의 전령사 노란 꽃송이 그녀의 몸속에 간직한 활쏘기로 칼을 갈았다면 얼음을 향해 겨누는 과녁에 초점을 맞추고 겹쳐진 꽃잎 울타리를 만들어 여린 미소로 길을 내던 날 뚫린 하늘의 햇살 노란 기억의 산실에』 찬란한 세상에 수놓은 꽃송이 추운 하늘을 감싸는 아름다운 빛 그 겨울의 외투를 벗어 던지고 낙엽이불 들썩 이며 그녀의 너울 사이로 때를 기다려 움트는 꿈결 같은 봄의 향기. ■ 고순례 1954년 전북 군산출생, 『한국문학예술』, 『문예사조』를 통해 문단에 나왔다. 『서해문단』 금상, 경기수필문학상, 자랑스런 수원문학인상을 수상했다. 시집 『완성의 시간』이 있으며 바탕시 동인,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회원, 수원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