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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소리' 따라 1만 2천km 미국 대륙횡단

 

“마음의 소리 따라 1만 2천km 미국 대륙횡단, 불타는 사막에서 만난 자유로움.”
깊은 물이다. 저 깊은 아래 검고 큰 소용돌이를 품었으면서도 수면은 평온하기만 한 깊은 물이다.
안양지역 빈민활동가이자 작가인 최창남(52)씨. 그가 지난 6월부터 이달 초까지 미국 대륙을 횡단하고 돌아왔다. 빈털터리로 시작한 여행, 워싱턴 DC를 시작으로 캘리포니아를 되돌아 오는 1만 2천km를 달리는 동안 그의 행색은 더욱 초라해졌지만 마음만큼은 더욱 ‘큰 물’을 품고 돌아왔다. 지난 6월 18일 설교를 마지막으로 그는 목회의 길을 접었다. 그리곤 홀연히 미국 횡단 길에 올랐다. 이후 그가 본 대륙의 황량함과 그 속의 생명력들은 그의 ‘마음의 소리’들을 더욱 선명하게 듣게 해주는 ‘확성기’가 돼 주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목표들, 생각들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습니다. ‘옳은 뜻’, ‘옳은 목표와 신념’이었을지는 몰라도 그 안에 ‘내 마음의 소리’는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최 선생은 이번 여행의 결론을 ‘깊은 물’ 한 마디로 요약했다. 여행기간 두툼한 노트 한 권을 자박자박 채워 내려가면서 생명력이 깃 든 꽃과 돌, 나무 등 1천여 장의 사진을 찍으면서 마음을 새롭게 했다. 시간 반대편의 황량한 대륙 한 가운데에서 그가 얻은 것은 ‘마음의 소리’를 듣는 방법이었다. “마음과 사랑이 없는 신념은 칼과 같아서, 그저 휘두르면 살인을 저지르는 무기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마음의 자유로움, 마음의 소리를 듣는 방법이 중요한 이유다.
그가 여행 중 들은 ‘마음의 소리’는 가난한 이웃과 나눠온 그간의 시간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 ‘뜻에 묶였던, 그래서 이루지 못했을 때의 슬픔’들에서 보다 자유로워졌다는 것 뿐이다. ‘마음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그가 느끼는 자유로움은 ‘살아있다’는 감사함으로 이어졌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2천년, 3천년을 버티고 서 있는 대륙 한 가운데의 ‘세콰이어’ 나무들, 살이 트고 뒤틀리면서 ‘다만 그 자리에서 살아나가고 있을 뿐이라고 말해주는’ 사막의 나무들. 인디언 원주민들의 신성한 숲에 세워진 그들을 죽인 미국 대통령의 흉상들, ‘돈이 신과 다름없어진’ 요즘 세상. 여행 중 최 선생이 들은 ‘마음의 소리’는 목회보다 더 많은 것을 ‘이웃 사랑’에 쏟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돈으로 교회 짓는 돌덩어리를 사는 대신, 주변의 불우한 이웃에게 쌀 한 말을 베푸는 것이 낫다”고,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지금 좋은 차를 갖고 정치인이 돼 있는 걸 보면 세상은 또 그렇게 아이러니”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는 어떤 ‘격분’이 나타나지 않으면서도, ‘깊은 물처럼’ 큰 소용돌이를 품고 있다.
최 선생은 향후 글 쓰는 일들과, 작곡, 뮤지컬 ‘예수를 만난 사람들’을 비롯해 다양한 문예활동에 한동안 몰두할 예정이다. 25일에는 그간 단 한 번도 선보이지 않았던 노래실력을 평촌 아트홀 무대에서 선보인다. “지역예술운동이라고 하면 거창해지겠지만, 그저 내 마음의 소리를 따라 이웃에게 무언가를 베풀 수 있는 자유로움이 향후 새로운 활동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최 선생은 이야기한다. 여행기간 빼곡히 써내려간 일기 속, 조용히 흐르는 ‘마음의 소리들’은 최 선생 자신과 이웃, 자연을 젓줄처럼 휘감고 있다.
유양희기자 y9921@kgnews.co.kr

최창남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신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금천구 시흥2동 산동네에 새봄교회를 세웠다. 탁아소와 야학과 부업 알선과 주말 진료 활동 등 빈민운동을 하면서 30대를 시작했다. 1984년 목회자로서의 한계를 느끼고 교회를 떠나 노동자가 되었다. 그 후 다시 목회자의 삶을 시작하기 전까지 대구와 안양에서 노동운동과 예술운동에 전념했다. 이 시기에 ‘노동의 새벽’, ‘저 놀부 두 손에 떡 들고’, ‘모두들 여기 모여 있구나’, ‘살아온 이야기’, ‘떠다니냐’, ‘누이의 서신’, ‘노동해방가 2’ 등 지금은 고전이 된 많은 노래들을 발표했다.‘우리 동네 아이들 1.2’, ‘말썽꾸러기’ 등의 동요 음반을 발표했으며, 뮤지컬 ‘예수를 만난 사람들’, ‘너 푸른 솔아’(노래극) 등의 작업을 했다. 1992년 가을 ‘빛된교회’와 복지단체인 ‘빚진자들의 집’을 설립했다.

돌아오기 위한 떠남

최 창 남 동화작가

여름이 지나고 있다. 여름이 지난다.
떠날 것 같지 않던 무성하고 무더웠던 여름날이 지나고 가을이 온다. 결코 떠날 것 같지 않던 여름이 그렇게 지나 듯 내 젊은 날도 그렇게 지났다. 그리고 어느 날 새벽 선뜻한 바람에 옷깃을 여미듯이 오십이라는 나이를 맞았다. 그리고 나는 십 수 년을 함께 했던 목회현장을 떠났다. 먹고 살아가는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하는 삶이되기 전에 말이다. 교회를 떠날 때 사람들이 내게 묻곤 하던 질문이 있다. 대체 무엇을 하고 지내실 거냐는 것이었다. 이 질문은 늘 나를 조금은 당혹스럽게 하였다. 왜냐하면, 나도 무엇을 하고 지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내일의 일이 오늘 내 삶의 생각과 행동, 삶을 규제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나도 잘 모릅니다. 그저 마음 길 따라 흘러갈 뿐입니다.’하고 정성스럽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삶이란 마음 길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삶이란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 길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젊은 날의 나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언제나 내 삶은 내 뜻에 의해 규제되고 결정되었다. 그 뜻이 나의 삶을 노동운동가로 예술운동가로 목사로 이끌었다. 나는 참 둔한 사람이다. 깨달음에 대한 일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삶이 마음 길을 따라 사는 것이라는 것을 오십이 거의 다 되어서야 깨달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 평범한 깨달음이 나를 새로운 인연으로 인도했다. 외국이라고는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는 내가 미 대륙을 자동차로 횡단하는 여행길에 나선 것이다. 그것도 운전면허를 획득한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은 초보 운전자가 말이다. 21일 간 약 1만2천Km를 달렸다. 서울에서 부산을 14번 왕복 할 수 있는 거리이다. 달리고 먹고 달리고 보고 달리며 잤다. 단순함과 지루함이 항상 따라다닌 여행이었다. 그러나 그래서 늘 새로워진 여행이기도 했다. 서남부의 사막 지대를 지날 때처럼 말이다. 기온은 섭씨 48도를 넘나들었다. 열풍이다. 옷과 피부가 타들어가는 듯하다. 열풍 속에서 차에 기름을 넣으며 나는 늘 생각하곤 하였다. 듬성듬성 나있는 키 작은 나무들을 보며 생각하곤 하였다. 이 여행이 내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이 여행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살아 있는 존재라는 깨달음이었다. 세상이 가르친 뜻이나 세워 놓은 제도에 얽매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내 마음 길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이다. 내 삶을 내가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정해 놓은 길이 아니라 마음 길 따라 걸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깨달음이라고 할 수도 없는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깨달음이 나를 설레게 하고 새롭게 한 여행이었다. 행복하게 한 여행이었다.
떠남은 돌아옴이다. 돌아오지 않는 떠남이란 없다. 아무리 긴 여행을 떠나도 떠난 곳으로 돌아온다. 해 지면 누구나 제 집으로 돌아가듯이 말이다. 인생길에서 만나는 짧은 여행들도 그것대로 제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인생 그 자체인 인생길이라는 긴 여행도 그것대로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떠남이란 돌아옴이다. 그래서 떠남은 늘 거기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일까. 떠남으로 인한 별리의 슬픔은 없다. 마음 가득 그리움을 품은 설렘만이 있을 뿐이다. 그 설렘이 항상 나를 행복하게 한다. 길을 떠나게 한다. 새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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