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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 발굴은 곧 역사를 쓰는 작업이죠”

[Job & Life] 고고학자 서길덕 씨

 

경기문화재단 부설 기전문화재연구원 서길덕 연구원이 1일 화성 남양 도시개발사업지구내 유적 발굴조사 현장에서 발굴작업을 하고 있다./변승희기자 captain@

정시에 출퇴근 하는 기계적인 일은 싫다. 늘 생각하면서 손에는 언제나 호미와 붓이 들려있다. 한 움큼 한 움큼 호미로 긁어내거나 붓으로 흙을 털어낼때마다 유구한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역사의 숨결을 느낀다. 언제나 흙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 우리는 그들을 고고학자 라고 한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기쁨을 누리며 손에서 흙이 마를날 없는 기전문화재연구원 서길덕(35) 연구원을 1일 화성 남양 도시개발사업지구내 유적 발굴조사 현장에서 만났다. 유적 발굴 현장을 찾지 못해 현장 부근에서 헤매고 있을때 서 연구원은 개발현장 입구까지 마중을 나왔다. 흰색 티셔츠에 체크무늬 남방을 걸쳐 입은 모습에서 영락없는 연구원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발굴조사 현장을 지켜야 하는 업무 특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 연구원은 고고학의 매력에 대해 언제나 짜여진 틀 안에서 맡겨진 업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유물과 유적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생각해야 하며 발굴된 유물·유적으로 논문을 내면서 큰 보람을 느끼고, 그렇게 만들어진 논문이 교과서가 되고 다시 역사를 수정하는 엄청난 중책이라고 소개했다.
경상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그는 군복무를 마치고 3학년에 복학하면서 돈을 벌어 학비를 대야 하는 상황이어서 처음 발굴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선배 조교가 발굴현장을 소개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 유물·유적을 발굴하는 고고학에 뛰어든 계기가 됐다.

대학시절 밥주고 술주는 아르바이트 자리


당시에는 돈을 받지는 못했지만 발굴현장에 가면 밥도 주고 술도 줘서 단순히 배를 채울 수 있다는데 만족했을 뿐인데 발굴 아르바이트를 하다보니 점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7~8개월 발굴현장을 뛰어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했고 학문적인 것 보다는 그저 발굴 현장이 재미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발굴에 대한 재미를 느낄 즈음 서 연구원은 딜레마에 빠졌다. 대학 학부 시절에는 단순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이재에 눈이 띄이면서 턱없이 적은 연봉에 갈등을 겪었단다.
‘땅 파는 쟁이’로 전락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매일 매일을 땅을 파는 ‘일벌’이 되어간다는 생각에 빠져 들었다. 더이상 땅을 파는 재미를 느끼는 것 보다 연구 결과물에 대한 재미를 느껴야 되는데 돈도 벌지 못하고 학문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회의가 엄습해 왔다.

 

직장인이라기 보다는 농사 짓는 마음으로


그때부터 땅 파는 일을 접고 백수 생활을 하면서 그저 막노동판에 뛰어들어 막일을 하면서 방황하기 시작했다. 결국 서 연구원은 다른 길로 외도를 했다. 98년 일반 회사에 들어가면서 그렇게 싫어하던 기계적인 일을 했다.
그러던 중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또다시 공무원시험을 준비했다. 방황은 계속됐다. 때마침 어느 선배가 다시 발굴아르바이트를 소개해줘 잠깐 해볼 생각으로 발굴현장에 다시 발을 들여 놓았다.
“다시 발굴을 시작하면서 엄청난 매력이 있었는데 내가 그동안 너무 욕심을 낸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생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연구원에 대한 욕심도 없었고, 그저 발굴현장에서 일을 하다가 때되면 죽는게 내 운명인것 같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마음이 편했습니다.” 서 연구원은 다시 발굴현장에 뛰어든 순간을 이렇게 기억했다.
무임금에서 일당 4만5천원의 특수인부 활동이 그렇게 시작됐다. 이후 2001년 안양 관양동 발굴현장에 투입되면서 그해 여름 위촉 조사원이 됐고, 이듬해인 2002년 정식 연구원이 됐다.
그의 전문 분야는 청동기시대 후기와 초기 철기시대다. 처음 아르바이트를 하던 경남지역에서 발굴할때 처음 접한 것이 그 시기 유물이었던 것이다. 청동기시대 유물·유적은 사천늑도, 합천영창리 시굴현장에서부터 수원율전지구까지 서 연구원을 따라 붙었다.
청동기시대 유물이 가장 많이 발굴된 합천 옥정고분군에서 처음 발굴을 했던게 청동기시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었다.
그때부터 서 연구원은 자신이 직접 역사적 유물을 찾았다는 사실에 너무 기분이 좋았단다. “지금도 직장인이라는 생각은 안해요. 마치 발굴현장에서 농사짓는 느낌으로 살아요.”
서 연구원은 “힘겹게 숱한 나날을 호미로 긁고, 붓으로 털고 하면서 현장에서 날밤을 새다가 발굴을 마치고 쫑파티를 할때는 씁쓸해요. 그리고 발굴작업이 끝나자마자 포크레인이 발굴현장을 밀고 들어가면 그렇게 마음이 찡 할 수 없어요”라며 발굴현장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또 구제발굴(개발현장)을 하다보면 발굴 일정을 앞당겨 달라는 시공사측과 잦은 실랑이를 하기 일쑤고, 발굴 작업을 하다가 좋은 유구가 나오면 발굴조사팀은 삽겹살에 파티를 여는데 시공사측은 땅을 치고 막막해 한단다.

 

 

3D업종 인식 전공자 점차 줄어들어 아쉬워


뿐만 아니라 발굴 과정에서 유물발견 신고를 하고 공사중지를 요청하면 공사 담당자들이 심한 욕설을 퍼붓는 단다. “유적발굴 비용도 개발자가 부담해야 하는 상황에서 유적 때문에 공사까지 지연돼 어려움을 겪게 되는 중소기업의 안타까운 현실을 알지만, 역사를 보존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는한 자료를 확보하고 유적을 발굴하는게 최선이다”고 말한다.
그는 고고학 전공자가 많지 않은 현실을 안타까워 했다. 대학 학부생들이 뙤약볕에서 땅을 파는 고고학을 3D 업종으로 기피하고 있는 것이 아쉽고 답답하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그는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서도 일갈했다. 역사를 보존하지 않으면 말살되는게 현실인데 꼭 뒤늦게 매스컴에서 문제를 지적하고 나면 그때서야 정부가 관심을 갖는게 못마땅하고 정부 지원 또한 턱없이 부족하다며 성토했다.
서 연구원은 “50~60세가 되더라도 현장에서 조사하고 공부하면서 늙고 싶다”며 “현장에서 일하면 일반적으로 낮게 보는 시각이 있는데 현장에서 호미잡고 관찰하는게 좋다”고 말해 유물과 유적을 발굴하는 일이 그에게는 천직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길덕 연구원은 끝으로 고고학자가 적은 현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힘들고 어려워도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버텨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학자가 된 뒤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것은 적지 않은 매력이며 인생을 올인해 보아도 보람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라며 고고학을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당부하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변승희기자 captain@k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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