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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준한 산세 속 원형 온전히 간직… 북한산성 세계유산 등재 가치 충분

 

세계문화유산으로 가는 북한산성 재조명

<프롤로그> 이천년의 성채 북한산성, 사람들은 다시 그 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경기신문은 경기문화재단 문화유산본부 북산산성문화사업팀과 공동으로 10회에 걸쳐 북한산성이 지닌 역사, 문화, 환경, 생태, 관광 등 각 분야별 특성과 가치를 전문가 10명의 글을 통해 재조명함으로써 북한산성의 세계유산적 가치를 널리 확산시키고자 한다. 특히 북한산성에 대해 그동안 몰랐던 다양한 콘텐츠와 스토리를 이번 사업을 통해 일반 독자들에게 알림으로써 향후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밑거름이 되려고 한다./편집자주


숙종 37년 11.6㎞ 철옹성 구축
암벽·능선 등 성곽으로 활용

사라졌던 행궁터 발굴조사
원래 모습 남아있어 복원 가능

국가 보장처로서 행궁 갖춘 점,
승군이 관리·수비 담당한 점 등
남한산성 가치와 별 차이 없어

 



우리나라에서 택지 개발이 가장 급격하게 이뤄진 수도권 복판에 원래의 모습을 가장 온전하게 간직한 유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아픔을 딛고 힘차게 부활하는 조선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산성, 11.6㎞의 산성을 단 6개월 만에 축성한 축성기술의 결정체를 보여주는 산성, 조선 후기 불교문화와 기행문학의 보고(寶庫), 그곳이 바로 북한산성이다.

북한산성은 고양시와 서울시에 걸쳐있는 북한산(北漢山)에 축조된 조선 후기의 산성으로, 화포에 맞서기 위해 낮고 견고하게 축성한 새로운 구조의 관방유적이다. 외침에 대비해 수도 외곽에 화포에 대비해 견고하게 쌓은 성곽이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란 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강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조선 후기 사회의 열망이 담긴 방위시설이다.

조선 후기의 중흥시대를 이끈 숙종(肅宗, 재위 1674~1720)과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정조(正祖, 재위 1776~1800)가 북한산성에 올라 부국강병의 의지를 다졌던 역사의 흔적이 담긴 산성이기도 하다.

특히 영조는 왕세자 시절을 포함해 북한산성에 세 번이나 행차해 산성 관리에 힘을 쏟았고, 정조는 왕세손 시절에 영조를 호위하며 북한산성의 동장대(東將臺)에 올라 기상을 다졌다.

북한산성의 역사를 삼국시대로 소급하기도 하는데, ‘삼국사기’에 “백제 개루왕 5년(132년)에 북한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후에도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고 백제의 수도를 방어하는 군사 요충지로서의 북한산성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만, 삼국시대의 이 북한산성이 지금의 북한산성 자리에 있었던 성곽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시대에는 지금의 북한산성 터에 중흥산성(重興山城)이라 불리는 성곽시설이 있었고, 고려 말인 우왕(禑王, 재위 1374~1388) 대에 성곽을 개축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최근 발굴조사에서 그 일부가 확인됐다.

병자호란의 굴욕을 당한 조선 정부는 유사시 왕실이 바로 피난할 수 있는 보장처가 절박했고, 그리하여 숙종 37년(1711년)에 지금의 북한산성을 쌓게 된다. 원효봉·증취봉·백운대·만경대·용암봉·시단봉·보현봉·문수봉·나한봉·용혈봉·의상봉 등 북한산 주요 봉우리의 능선과 골을 따라 그야말로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철옹성을 구축한다.

험준한 암산에 축성했기에 따로 성벽을 쌓지 않고 암벽이나 가파른 능선 등 자연 지세를 성곽으로 활용한 구간이 3㎞나 된다. 실제로 성벽을 쌓은 8.6㎞의 성벽도 쌓을 곳의 고도와 경사도에 따라 높이를 달리했는데, 산지가 낮은 곳에서는 성벽을 높이 쌓고, 산지가 높아지면 성벽 높이를 낮췄다. 높고 험준한 능선 정상부에는 아예 성벽을 쌓지 않고 방어용 담인 성가퀴만 쌓기도 했다. 성벽의 몸체인 체성(體城)의 높이는 대체로 평지의 높은 곳이 4m 내외이며, 산기슭은 3m, 능선의 경우는 2m 내외다. 산 정상 가까운 곳은 이보다 더 낮았다. 산성 북측의 일부 구간엔 10m에 이르는 높은 성벽을 쌓기도 했다.

산성으로 접근하는 요로(要路)에는 모두 16개의 성문(城門)을 뒀다. 동서남북 사방에 대서문(大西門)·대동문(大東門)·대남문(大南門)·북문(北門)·대성문(大成門) 등의 큰 문을 배치하고, 그 사이에 비상시 병기나 식량을 반입하고 때로는 구원병의 출입로로 활용되는 일종의 비밀통로인 암문(暗門)을 설치했다.

서암문(西暗門)·백운봉암문(白雲峯暗門)·용암암문(龍巖暗門)·동암문[東暗門: 보국문(輔國門)]·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가사당암문(伽沙堂暗門)이 암문에 해당한다.
 

 

 

 


그 외, 산성 내의 물을 외부로 흘려보내는 수문(水門)을 설치했고, 북한산성의 내성(內城)에 해당하는 중성(重城)에 중성문(中城門)을 뒀다. 중성을 쌓을 때 중성문 외에 소규모 암문(暗門)과 수문을 하나씩 설치했다.

전시나 군사훈련 때 지휘소로 사용되는 장대(將臺)도 두었다. 시단봉(柴丹峰) 정상에 동장대(東將臺), 나한봉(羅漢峰) 동북쪽에 남장대(南將臺), 중성문(中城門) 서북쪽에 북장대(北將臺) 등 3개소의 장대가 있었는데,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동장대만 복원된 상태다.

성곽을 지키는 초소 건물이자 병사들의 거처이기도 한 성랑(城廊) 143개소가 있었는데, 최근의 발굴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기와건물임이 밝혀졌다. 산성 수비와 관리를 맡은 훈련도감(訓練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 등 군영(軍營)의 산성 내 지휘부인 유영(留營) 3개소가 설치됐다. 북한산성의 수비와 관리는 군영의 병사들 외에 승려 병사인 승군(僧軍)이 함께 맡았는데, 이를 위해 산성 내에 중흥사(重興寺)·태고사(太古寺)·상운사(祥雲寺) 등 11개의 사찰과 원효암(元曉庵)·봉성암(奉聖庵) 등 2개의 암자를 지었다. 지금은 중흥사, 태고사, 상운사, 진국사(鎭國寺, 지금의 노적사), 원효암, 봉성암 등이 남아 있다.

북한산성 내외에 식량과 무기를 보관하는 창고인 군창(軍倉)을 설치했다. 산성 내에 상창(上倉)·중창(中倉)·하창(下倉)·호조창(戶曹倉)·훈창(訓倉)·어창(御倉)·금창(禁倉) 등 7개소를 두었고, 산성 밖의 세검정 지역에 평창(平倉)을 설치했다. 아울러 식수(食水)와 용수(用水) 확보를 위한 우물과 저수시설도 마련했는데, 99개의 우물과 26개의 못(池, 저수지)을 조성했다. 식수와 군량이 떨어지면 장기 항전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왕실 보존을 위해 축성된 성곽이었으니,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을 조성했다. 왕과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인 내전(內殿)과 업무 공간인 외전(外殿)을 중심으로 모두 124칸 규모였다.

북한산성 행궁은 왕실 족보와 귀중품, 왕조실록 등을 보관하는 왕실서고의 역할을 겸하기도 했는데,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에 일본의 훼손과 자연재해로 없어지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2012년부터 경기문화재연구원이 연차 발굴조사를 실시해 현재는 그 전모가 거의 드러났는데, 원래의 모습이 잘 남아 있어 원형 복원을 가능케 하고 있다.

지난해 6월, 남한산성이 우리나라에서 11번째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남한산성은 종묘·사직·행궁을 갖춘 임시수도였으며, 조선 후기 도성과 그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됐던 5군영의 하나인 수어청의 근거지였다. 아울러 시대별 축성술의 표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성곽축성의 야외전시장이며, 승영사찰을 중심으로 승군이 300년 이상 축성과 관리 보수를 맡았던 곳이다.

북한산성도 남한산성의 문화유산적 가치와 크게 차이가 없다. 국난을 대비해 축성된 ‘국가의 보장처’라는 점, 임시수도의 기능을 갖춘 행궁이 있었던 점, 승군이 축성에 크게 기여했고 이후 산성의 보수·유지·관리·수비에 일익을 담당한 점 등이 그러하다.

 

 

 

 


또 행정부서인 경리청이 현지에 있었고 5군영에 속한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직할부대가 현지에 주둔한 점도 똑같다. 이와 함께 북한산성은 연 1천만 명 이상이 찾는 북한산의 절경 속에 자리하고 있으며, 일찍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원형이 아주 잘 보존된 곳이다.

이에 북한산성도 세계문화유산의 자격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북한산성은 남한산성과 화성을 잇는 가교적 축성기술이 적용된 곳이며 이들과 함께 한양 도성을 지키는 간성(干城)이었다. 이런 사실들을 감안하면 북한산성이 ‘남한산성의 연속 유산’으로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이유는 충분하다.

/김성태 경기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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