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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대 축성기술 집약 6개월 만에 산성 완공 지형 활용 독창성 갖춰

세계문화유산으로 가는 북한산성 재조명
<3> 지형을 활용하고 축성기술을 총동원하라

 

약11.6㎞ 중 성벽쌓은 구간 8.6㎞
18세기 동아시아에서 볼 수 없는
독창적인 토목건축기술 선보여

패장·편수 등 전문가 조직 구성
공사실명제로 철저한 책임시공
화포공격 대비 무거운 성돌 사용

 

면석 무게만으로 성벽 지탱 가능
습식쌓기로 쌓은 여장 등 세심

빈틈없는 견고한 축성기술 ‘우수’
300년 지나도 원형 대부분 유지

 

 

 

◇18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정세가 반영된 독특한 방어시설

북한산성은 규모와 입지에서 볼 수 있듯이, 반정이나 내전(內戰)에 대비해 쌓은 성이 아니라 국가적인 전쟁으로부터 도성을 지켜내기 위해 쌓은 성이다.

한양도성(漢陽都城)은 평지와 산지를 아우르는 평산성(平山城)이므로 평상시 도성의 위용을 잘 보여줄 수는 있으나, 둘레가 18.6㎞에 달하고 평지구간이 많아 적을 방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때문에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 국가적인 전쟁이 일어나면 왕은 도성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어 외침시(外侵時) 임금이 도성을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줄 상징적인 방어시스템의 구축이 필요했다.

이에 보완책으로 구축된 것이 북한산성이다. 구조적으로도 북한산성은 18세기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토목구조물이자 방어시설이다.



◇조선시대 토목건축기술의 우수성 입증

축성(築城)은 많은 인력과 물자를 필요로 하는 대규모 토목공사였으므로, 어느 시대나 성을 쌓는 일은 매우 신중하게 결정됐다. 북한산성도 축성과정에서 많은 찬반논의가 있었으며, 지루한 논쟁을 거친 후 숙종 37년(1711) 드디어 축성에 이르게 됐다.

북한산성의 전체 둘레는 약 11.6㎞이고, 성벽을 쌓은 구간만도 약 8.6㎞에 달하고 있다.

남한산성의 경우 비슷한 규모의 성을 쌓는데 2년이 소요됐지만, 북한산성은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축성을 완료했다. 이처럼 짧은 기간에 성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토목건축기술이 뒷받침됐기 때문이었다.

숙종임금은 즉위하자마자 성주 독용산성을 시작으로 강화산성, 문수산성, 한양도성, 북한산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축성사업을 전개했다. 따라서 북한산성은 숙종 대에 발달한 축성기술의 최종단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치밀한 현장조사와 대상지 비교검토를 통한 입지선정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방어체제는 도성을 포기하고 강화도로 피난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도성을 사수하는 쪽으로 변경됐다.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도성 가까운 곳에 방어용 산성을 쌓아야 했으며, 그 후보지로는 양주 홍복산(洪福山)과 북한산이 유력한 곳으로 검토됐다.

두 후보지에 대한 장·단점을 치밀하게 검토한 결과, 북한산이 험준하고 방어가 용이했다. 또 홍복산에 비해 축성에 필요한 돌이 많고, 나무와 돌이 많아 취사가 용이하다는 점이 부각돼 북한산성 축성이 결정됐다.


 

 

 


◇작업공정별 감독과 전문가에 의한 책임시공

북한산성은 전체구간을 3개로 구획해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의 삼군문에서 축성을 분담하도록 했다.

각 구문에는 책임 감독관으로 낭청과 내응책, 외응책, 독역장 등을 두는 한편, 작업공정별로 부석패장, 축성패장, 수구패장, 운석패장, 치도패장, 이장편수, 야장편수, 목수편수, 석수편수 등의 전문가 조직을 구성했다.

패장은 축성공정별 감독관이었으며, 편수는 전문분야별 업무공정책임을 맡은 현장 책임자의 기능을 했다. 패장과 편수의 작업내용은 철저하게 기록으로 남겼으며 구간별 경쟁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로써 공기(工期)를 앞당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철저한 책임시공이 가능하도록 했다.



◇4만 명 정도의 인력 동원, 구간별 공사실명제에 의한 견고한 성벽 축성

전문기술자를 제외한 축성에 참여한 노역자는 삼군문의 군사는 물론 도성에 사는 경상가 이하 각 호에서 각자 식량을 가지고 부역에 참여토록 했다.

또 노임을 받는 노역군과 각종 공장(工匠)도 참석했으며, 전라도 화엄사의 승려 성능이 휘하의 승군(僧軍)을 이끌고 축성에 참여하기도 했다. 북한산성 축성에는 대략 4만 명 정도의 인력이 동원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군문은 축성구간을 다시 세분화해 각 구역마다 담당 인력을 배치했으며, 담당자와 담당구간을 성돌에 새겨 놓는 등 공사실명제를 통한 책임 시공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장인들의 혼이 담긴 아름다운 성벽

성곽은 시대성을 반영한다. 각 시대의 축성기술과 전쟁의 양상에 따라 성의 형태와 규모, 축성법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숙종 대의 산성은 규모가 대형화돼 기본적으로 여러 개의 작은 봉우리를 이어서 쌓았으며, 축성기저부는 능선 정상부에 위치하도록 했다.

성돌의 크기는 너비와 뒷길이가 모두 40~60㎝ 정도로 커지고 직육면체에 가까운 사각추 형태로 가공해 면석의 무게만으로 성벽이 지탱될 수 있도록 했다.

이 시기의 성돌 무게는 대략 300~500㎏으로 삼국시대 성돌에 비해 무게가 10배 정도 커지게 된다. 이는 화포공격을 받아도 성벽이 쉽게 무너지지 않기 위함이었다.

성 쌓을 곳이 암반인 경우 성돌이 밀려나지 않도록 바닥을 정으로 쪼아서 턱을 만들거나 계단상으로 조성했으며, 할석(깬돌)을 쌓아 기단부를 조성하거나 토사를 다졌다.

체성벽 하단에는 바깥으로 20㎝ 정도 돌출되도록 대형의 지대석을 먼저 쌓아 성벽의 하중이 분산되도록 했다. 성벽기저부가 빗물에 파여 나가지 않도록 지대석 앞에는 일정한 너비로 퇴박석을 까기도 했다.

체성벽을 쌓을 때는 바른층 쌓기(돌의 면 높이를 같게 해 쌓는 방법)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경사가 급한 곳을 아래쪽에 큰 성돌을 쌓아 역경사 줄눈이 되도록 해 성돌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했다.

성돌은 먼저 놓은 성돌과 나중의 성돌 사이에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그렝이기법을 적극 활용해 성돌과 성돌의 상하좌우가 서로 꼭 맞물리도록 함으로써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북한산성을 포함한 숙종 대의 성벽은 견고하면서도 마치 크고 작은 천조각을 이어붙인 조각보를 보는 것처럼 아름답고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축성입지에 따라 다르게 했으며, 산지구간은 2~3m를 넘지 않도록 함으로써 성돌을 6~10단만 쌓아도 성벽이 구축될 수 있도록 했다. 삼국시대의 성벽에 비해 성벽의 뒤채움부는 매우 약화됐으나, 점토로 내탁을 조성함으로써 포탄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했다.

◇습식공법으로 쌓은 견고한 자연석 여장

체성 위에는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공격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여장(女墻)을 쌓았다.

여장은 성첩, 여담 성가퀴라고도 하는데, 적의 공격에 대한 방어기능과 함께 공격이 용이하도록 여장에는 타구와 원총안, 근총안을 설치했다. 건식(乾式)쌓기로 쌓은 체성벽과 달리 여장은 점토에 강회를 섞은 몰탈을 사용해 습식(濕式)쌓기를 했다.

여장은 체성벽에 비해 작은 할석으로 쌓고 빈틈을 다시 강회몰탈로 마감했다. 또 옥개부에는 얇고 넓게 가공한 판석을 몇 겹으로 덮어 빗물이 여장 내부로 스며드는 것을 방지했다.

여장에는 한타마다 중앙에 근총안 1개와 좌우에 원총안 2개를 배치했으며, 여장은 경사여장을 기본으로 했으나 경사가 급한 곳은 층단식 여장으로 구축하기도 했다. 북한산성 성문 문루 앞에는 통돌 여장이 사용됐다.

 

 

 



◇축성기법을 달리하는 고려시대 중흥산성(中興山城) 유구 확인

최근 청수동 암문에 인접한 구간에 대한 발굴조사 도중, 숙종 대 성벽의 아래쪽에서 축성기법을 달리하는 성벽이 확인됐다. 숙종 대 성벽의 진행방향과 축을 달리하고 있으며, 지대석 위에 작은 할석으로 쌓은 축성기법으로 볼 때 이 성벽은 고려시대에 축성된 중흥산성의 유구로 추정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에는 산영루 좌우편에 중흥산성의 유지가 남아 있으며, 성의 둘레는 9천317척이라 했다. 이를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2천950m로 북한산성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중흥산성은 대규모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원형이 잘 남아 있는 숙종 대의 성벽, 진정성 회복 노력 필요

북한산성은 숙종 대에 축성된 성곽 중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어 발달된 조선후기 축성기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숙종 37년(1711) 축성 이후, 정조 대와 순조 대에 일부 수축된 것을 제외하면 북한산성은 숙종 대에 축성된 성벽의 원형이 대부분 잘 유지되고 있다. 축성 이후 3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처럼 체성벽이 온전하게 잘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은 북한산성의 축성기술이 그만큼 우수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산성에 대한 정비사업은 1980년대 후반부터 추진돼 왔다. 그러나 원형 고증 없이 한양도성처럼 복원된 여장 구간은 향후 원상으로 복구돼야 할 것이다.

또 나무를 베는 것에 대해 환경단체에서 반대의사를 표시하고 있지만, 문화유산의 보호를 위해서는 성벽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는 잡초와 잡목의 조속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심광주 문화재청 세계유산분과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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