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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군사 요새’로 본 英美 선교사들 여름 피서지로 애용

세계문화유산으로 가는 북한산성 재조명
<9> 파란 눈에 비친 북한산성

 

영조 4년 이인좌의 난 이후
산성의 군사적 기능 대폭 축소
19세기말 고종, 수비 강화 계획
미국공사관에 요새화 방안 요청
 

 

퍼시빌 로웰·찰스 첼레-롱 등
북한산성 첫 방문 여행기 발표
멋진 풍경·친철한 승려 큰 인상


중흥사를 한국 最高사찰로 이해
美개신교 선교사들 소풍 가거나
자녀 출산 후 산후조리 하기도
1890년부터 내한한 英성공회
행궁을 피정지로 10년간 대여
1915년 산사태 파손현장 목격



19세기 말 서양인들이 본 북한산성은 버려진 군사 요새였다. 대신 봄과 가을의 산행 소풍과 여름 피서지, 그리고 태어날 아이와 산모를 위한 해산처로 애용됐다.

고종은 외침과 국난이 거듭되자, 1882년 한미조약 이후 북한산성을 근대적 요새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미국의 원조를 요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북한산성은 불승들과 은둔 수도자들의 명상처였으나, 1890년대부터 영미 개신교 선교사들의 휴식처 겸 명상처가 됐으며, 행궁(行宮)은 1912년부터 10년간 영국 성공회 한국 선교회가 대여해 피정지로 사용했다.

 



◇서울의 군사 지리와 북한산성

한국을 소개한 그리피스(W. Griffis)의 Corea, The Hermit Nation(1882년)은 서울을 군사 지리적으로 송도(북), 수원(남), 광주(동남), 강화(서) 네 도성이 지키는 형세로 그렸다.

조선 정부는 임란 후 숙종 때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삼군문으로 도성을 수비하고, 1711년 삼군문은 유사시 피난처인 북한산성을 축성해 수도 방위 체제를 완성했다.

왕실은 산성의 수비와 관리를 위해 11개의 승영사찰(僧營寺刹)을 설치하고, 350명의 승군을 배치했다. 그 중심 사찰은 중흥사(重興寺)로 팔도도총섭이 11개의 사찰과 승군을 관할했다.

삼존불이 봉안된 중흥사 대웅전 왼쪽에 만세루와 나한전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산신당이 있었다. 중국이나 한국에서 선승들은 무사처럼 정신 집중을 위해 명상 수련했으므로, 선승이 승군이 되는 군-종(軍宗) 공존의 오랜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영조 4년(1728년) 이인좌의 난 이후 산성으로 도피한 후 방어하는 체제에서 관민이 함께 도성(서울)을 수호하는 체제로 전환됐다. 산성의 군사적 기능은 대폭 축소됐고 군량미 저장이나 승병 임명도 점차 폐지됐다.

행궁도 본래 기능은 감소하고, 왕실의 족보인 어보, 어제, 어책, 의궤, 승록 등을 보관하는 왕실 서고 기능이 추가됐으며, 소수의 위병만이 성문과 행궁을 수비했다. 따라서 산성의 주요 관리는 1년에 몇 차례 맑은 날 그늘에서 책을 넘기며 바람을 쏘여 습기를 제거하는 서책들의 포쇄 행사였다.

군사와 종교가 만나는 요새 북한산성이 다시 중요하게 된 것은 고종 대였다. 1866년 병인양요에서 1875년 운요호사건까지 열강의 침략을 경험한 고종은 1882년 한미조약 이후, 미국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근대화하고 강화도와 북한산성 수비를 강화하고자 했다.

고종은 먼저 행궁에 사고(史庫)를 설치하고, 족보 138책 등 다량의 왕실 서적과 역사서를 보관하게 했다. 예를 들면 1892년 10월 25일 김익경이 산성의 보각에 가서 서적들을 포쇄했다고 선교사들이 발행하는 Korean Repository는 기록한다.

고종과 세자가 며칠 후 북한산성 소속 군인들의 검열식에 참관했을 때도 그 잡지는 이를 언급했다. 사고의 책들은 1909년 종친부로 이관할 때 목록을 작성했는데, ‘정조실록’ 1책도 있었다. 서고가 설치되면서 북한산성은 군사와 종교에 이어 학문과 역사 기능이 강화됐다.
 

 

 

 


1883년 조선 대미사절단을 미국에 안내하고 한양으로 돌아온 퍼시빌 로웰(P. Lowell)은 두 달 간 서울에 머물면서,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북한산성을 방문하고 Choson, The Land of Morning Calm(1883년)에 방문기를 썼다.

그에게 북한산과 산성은 멋진 바위와 아름다운 숲으로 이뤄진 절경의 장소였다. 특히 그는 잘 보존된 사찰들과 선명한 색채의 벽화들과 친절한 승려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행궁은 이미 퇴락해 있었다. 작은 건물의 지붕 기와는 곳곳에 떨어져 나갔고, 행궁의 외전과 내전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로웰은 중흥사를 방문했으나, 500 나한상에 가득한 거미줄만 확인했다.

고종은 1882년 한미조약 이후 미국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근대화하고 강화도와 북한산성 수비를 강화할 계획을 세웠다. 따라서 로웰이 북한산성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고종의 이런 계획과 연관된 탐사였다.

1884년 고종은 미국공사관의 포크(G. C. Foulk) 해군 중위에게 북한산성을 조사한 후 근대적 요새로 만들 방안을 세워줄 것을 정식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무성의 관심 부족과 정부의 재정 부족과 갑신정변 이후 서울에서 세력을 확대한 청군(이홍장)과 보수파의 반대로 미군 교관에 의한 한국군의 근대화와 북한산성 요새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고종은 슈펠트, 포크, 메이슨 등에게 차례로 교관이 돼 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들은 모두 거절했다.

1887년 미국 남북전쟁에 참전했고 이집트 원정 경험이 있는 찰스 첼레-롱(C. Chaille-Long) 이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오자, 고종은 그에게 교관 자리를 제의했다. 그 역시 거절했다.

다만 롱은 1888년 5월 북한산성을 방문하고, 그 여행기를 미국의 대중지인 Frank Leslie’s Popular Monthly 1889년 1월호에 발표했다.

롱은 외국인의 북한산 등반이 금지돼 있었고, 외부대신 조병식의 주선으로 등산했기 때문에 자신이 북한산을 탐험한 첫 외국인이라고 자부했다.
 

 

 

 


그는 편한 서대문 길로 하인들에게 짐을 보내고 가파른 창의문 길을 택해 북한산성을 방문했다. 그는 1875년 빅토리아 나일을 탐험하고 미국지리학회로부터 메달을 받은 적이 있는 베테랑 여행가요 탐험가였다.

롱은 하인이 들고 온 무거운 카메라로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것은 북한산성에 대한 첫 사진들이었다. 산에 은둔하며 암벽 앞에서 기도하는 수도자나 멋진 풍경에 큰 인상을 받았다.

그는 아네로이드 기압계로 고도를 재면서 등산했는데, 첫 봉우리의 높이는 1천350피트(약 411m)였다. 중흥사 주지는 롱을 친절하게 대접했고, 그는 이틀 밤을 묵으면서 중흥사와 산성의 남문과 서문을 방문하고 촬영했다. 롱 서기관은 이듬 해 거문도를 거쳐 제주도를 방문하고, 몽고 문화의 영향력을 강조하기도 했다.



◇선교사들의 소풍과 피서지, 1888년부터

서양인 외교관들과 선교사들이 한양에 거주하기 시작한 1880년대에 산성에는 대포 한 대 없는 버려진 요새였다. 외국인들은 산성의 중앙에 있는 중흥사를 왕실이 운영하는 한국 최고(最高)의 사찰로 이해했다.

서울과 인천에서 활동한 존스(G. H. Jones)는 1915년 쓴 글에서 한국 불교의 3대 중심지를 금강산의 장안사, 북한산의 중흥사, 강화도의 전등사로 보았고, 중흥사는 주지는 한국 불교에서 서열상 최상위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북한산성에 갈 때는 반드시 중흥사를 방문했다.

롱 서기관이 북한산에 갔던 1888년 5월에 호튼 여의사(곧 언더우드와 결혼)와 몇 명의 서울 주재 개신교 선교사들이 허락을 얻어 북한산성에 말을 타고 소풍을 갔다.

호튼은 이 산행에서 왕궁에서 북한산성까지 산 밑으로 굴이 있어서 왕은 쉽게 피난을 갈 수 있다는 소문을 듣기도 했다. 5월의 북한산은 세계 어느 곳보다 아름답다고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1904년)에 소개했다.

1886년 육영공원 교사로 온 길모어(G. W. Gilmore)는 미국에 돌아간 후 Corea of Today(1894년)를 출간했다.

그는 북문인 숙정문이 비밀스럽게 북한산성으로 연결돼 있으며, 왕이 피난하면 길을 신속히 폐쇄할 수 있으므로 적군이 추적할 수 없다고 썼다. 당시 사람들은 산성 안 사찰들에 종교적 확신이 있는 승려는 없으며, 다만 왕실이 주는 쌀에만 관심이 많다고 비판했다.

미국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사들은 봄에는 북한산성에 소풍을 가거나 여름철 피서지로 이용했다. 사찰에서는 손님으로 방문한 선교사들에게 친절히 거처를 제공했다.

선교사들이 며칠에서 한 달 정도 산성의 사찰에 머물면, 매일 몇 명에서 수 십 명의 사람들이 찾아와서 종교적인 대화를 나누고 기독교 소책자나 쪽복음을 샀다. 선교사들은 절의 비구나 비구니들에게도 책을 설명해 주며, 대화를 통해 한국어를 배웠다.

특히 선교사들은 위생적으로 안전한 중흥사에 와서 자녀를 출산하고 산후 조리를 했다. 제중원이나 보구여관의 의사가 와서 도와주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1893년 7월말 한국에 온 지 1년이 되지 않았던 장로회 선교사 무어(S. F. Moore, 1860-1906) 부부였다.

무어는 해산할 날이 찬 부인을 데리고 중흥사에 갔다. 이때 빈턴(C. C. Vinton) 의사와 몇 명의 선교사들도 동행했다. 8월 8일 무어의 첫 아들(John Ely)이 태어났다. 무어는 열흘간 절에 머물면서 주지와 친해졌고, 주지의 동생과 다른 승려들에게 전도했다.

그런데 주지가 나한전의 불상들이 낡아서 버린다는 말을 듣고, 무어는 석고상에 생명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버리는 나한상 한 개를 가볍게 쳐서 넘어뜨렸다. 손상은 없었다. 그런데 얼마 후 주지의 동생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절을 떠나 서울로 가버리자, 주지는 미국 선교사가 절에 와서 불상을 마구 파괴했다는 소문을 냈다.
 

 

 

 


아무튼 허락을 받고 한 행동이지만 우상임을 보여주려고 불상을 쳐서 넘어뜨린 것은 손님으로서 예의가 아니었다. 경험이 없는 젊은 선교사의 지나친 전도열과 미신 타파를 내세운 서구의 이성주의와 기독교 승리주의가 복합돼 나타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가 불상을 마구 파괴한 것은 주지의 소문 때문에 와전된 것이었다.



◇1894~1922년 영국성공회 선교사들의 여름 피서지

중흥사와 북한산성을 가장 애용한 집단은 1890년부터 내한한 영국성공회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독신으로서 수도원 공동체 생활을 했기 때문에 여름에는 한국 불교의 여러 사찰을 방문하며, 불교를 공부하고 한국 종교와 문화를 이해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그들은 금강산 장안사나 북한산 중흥사 등 사찰과 승려 사진들을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던 월간지 ‘朝鮮(The Morning Calm)’에 자주 실었다. 중흥사 사진이 1895~1896년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청일전쟁 이후에 북한산성을 피서지로 삼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이후 행궁의 기능이 완전 중지되자, 1912년 행궁을 여름 피정지로 세를 내어 10년간 사용했다. 최근 행궁 발굴 때 그들이 사용하던 서양램프 등이 나왔다.

1915년 7월 행궁에서 피서 중이던 트롤로프(M. N. Trollope) 주교 일행은 집중 호우로 산사태가 발생해 행궁이 파손된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결국 1922년 대형 산사태로 행궁은 완전히 흙에 묻히게 되면서 세간으로부터 잊혀지게 됐다.

중흥사는 이처럼 1888년부터 미국 장로회 선교사들이 주로 이용하다가 점차 영국 성공회 선교사들이 여름 피서지로 사용하게 됐다. 불교 사찰이 영미 선교사들의 산행 휴식처, 산후 조리처, 여름 피정지로 이용된 특이한 경우였다.

군사 요새, 불교 성지, 왕실 사고의 북한산성이 100년 전 푸른 눈을 가진 영미 선교사들의 지친 몸을 쉬게 하고 영성을 회복하게 하는 피정지가 됐다. 동과 서가 만나고, 불교와 기독교가 만나는 대화의 장소로 거듭 태어나는 북한산성이 되기를 꿈꿔 본다.

/옥성득 UCLA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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