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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프랑스 예술기행] 장 프랑수아 밀레와 바르비종

 

노을이 채색된 들판에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감자를 캐던 젊은 농부는 모자를 벗어든 채 묵상을 하고, 두건을 쓴 그의 아내는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한다. 한 때 전 세계를 휩쓸었던 그 유명한 그림 ‘밀레의 만종’이다. 이 그림은 농촌의 목가적 풍경을 그린 밀레의 걸작으로 원제는 랑젤뤼스(L'Angélus), 즉 ‘삼종기도’다.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그는 농촌의 전원풍경을 그린 화가이기에 앞서 인간공학의 수호성인이었다. ‘건초 묶는 사람들’, ‘양털 깎기’, ‘양치는 소녀’를 그려 국제적 아이콘이 됐다. 그로 인해 농촌화가의 대명사가 됐지만 그의 진가는 이보다 더 거창하다.

 

 

1847년 프랑스는 불황이 덮쳐 집 없는 농부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이 모습을 밀레는 ‘폭풍우의 피난처’에 담아냈다. 그 후 1년 뒤 파리 살롱전에 ‘키질하는 농부’를 출품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하는 농부를 그림에 등장시킨 건 밀레가 처음이었다. 비평가들은 밀레의 정치적 관점과 농부들을 향한 연민을 감지했다. 밀레는 농민에 대한 그림을 더욱 발전시켰고 자신의 고향을 닮은 바르비종(Barbizon)에서 ‘파종’, ‘만종’, ‘이삭 줍는 사람들’ 등 대작을 계속해서 그렸다. 그는 농부들을 미학적으로 예찬한 최초의 화가였다.

 

사실 밀레 자신도 농부였다.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 망슈 주 그레빌 아그에서 태어난 그. 형제 많은 집안의 장남이었다. 양을 치고 쟁기로 밭을 갈면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사제인 삼촌의 영향을 받아 성경과 몽테뉴, 라 퐁텐, 호메로스, 셰익스피어, 밀턴, 샤토브리앙, 빅토르 위고를 읽으며 지적으로 성장했다.

 

스무 살이 되면서 데생에 큰 재능을 보이자 밀레의 아버지는 아들을 쉘부르(Cherbourg)로 보내 유명한 초상화가 폴 뒤무셀(Paul Dumouchel)의 지도를 받게 했다. 스물세 살 때 미술전에서 입상함으로써 쉘부르 시의 장학금을 받고 파리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밀레는 학교 대신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작품들을 복사해 혼자 공부하는 것을 즐겼다. 그 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다시 파리로 돌아와 바르비종에 정착했다.

 

 

밀레가 말년을 살다간 바르비종. 이곳은 퐁텐블뢰숲 자락의 보금자리다. 경치가 아름다워 밀레, 테오도르 루소, 장바티스트 코로, 샤를르 프랑수아 도비니 등 많은 화가들이 드나들었다. 특히 밀레는 이곳에 인상파화가의 선구자가 된 바르비종 학파를 열었다. 이 마을의 평화롭고 고요한 숲과 평원, 그리고 자연에 반한 밀레. 이곳의 상징적인 경관은 화가들이 쉬어간 간(Ganne) 여관이었다. 지금은 19세기 예술가들의 작품과 삶을 엿볼 수 있는 박물관이 됐다. 또한 밀레의 추억들이 살아 숨 쉬는 밀레박물관도 빼어나다. 바르비종은 ‘초록의 수도’로 원시적 매력을 여전히 내뿜는다.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돌집들과 장미로 뒤덮인 정원들, 긴 산책로에는 아름다운 고택과 상점, 갤러리들이 즐비하다. 만종을 울려 퍼지게 했던 생폴드 샤리앙비에르 성당도 고색창연하다. 옛것이 그리운 시절, 바르비종으로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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