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 같은 할머니다. 꼬부라진 허리가 호미를 닮았다. 호미를 닮아서, 반듯하게 서도 얼굴은 땅으로 쏟아진다. 할머니는 종일 땅만 보고 산다. 이불을 개고, 밥을 하고, 마당을 쓸고, 풀을 뽑고, 밭고랑을 맨다. 할머니는, 고개 들어 하늘을 보는 것보다 물웅덩이에 비친 하늘을 내려다보는 게 편하다. 내려다보는 것에 익숙한 할머니가 집 앞 자갈밭에 물을 준다. 한 마지기 자갈밭은 할머니의 전부다. 호미로 긁어 판 한평생이 고스란히 자갈밭에 묻혀있다. 아들 하나에 딸 하나, 고구마 같이 튼실한 자식들도 밭일을 하다 낳았다. 호미 같은 할머니가 자갈밭에 물을 준다. 마당에 있는 수도꼭지에 호스를 꽂아 물을 뿌린다. 호스는 마당과 텃밭을 이어주는 탯줄 같다. 가느다란 호스를 타고 밀려온 수돗물이 마른 자갈밭에 찔끔 떨어진다. 전립선(前立腺) 걸린 늙은 사내의 오줌발도 저러할까. 할머니의 한숨이 물을 따라 자갈밭으로 추락한다. 딸을 건져 올릴 때도 저렇게 물이 떨어졌었다. 사십년 세월이라고 지울 수 있겠는가. 그날, 저수지로 물놀이 간 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밭일을 하던 할머니는 맨발로 저수지로 달려갔다. 건져낸 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호미 같은 할
얼굴은 ‘얼의 꼴’이다. 법정 스님이 한 말이다. 얼은 넋이고 꼴은 겉모양이니, 얼굴은 넋의 겉모습인 셈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정신의 줏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이 보인다고들 한다. 법정 스님의 말대로라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넋에 따라 삶의 궤적이 그려지기는 하지만 현재의 삶이 곧바로 얼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얼굴에는 삶은 없고 정신의 줏대만 있다. 졸업논문과 연봉계약서와 등기부등본은 없고 뼈와 살과 주름만 있다. 뼈와 살과 주름을 따라서, 부딪고 보듬고 벼르는 생각의 흔적만 있다. 얼굴에는 거짓이 없다. 화장이나 성형으로도 감춰지지 않는다. 뼈를 깎고 주름을 덮어도 정신의 줏대는 바뀌지 않는다. 얼굴은 저마다 지닌 정신세계의 조감도(鳥瞰圖) 같아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눈빛에서 묻어난다. 인물 사진을 즐겨 보는 까닭도 그래서다. 그렇다고 내게 작품을 보는 안목이 있다는 건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앎이 얕아서 깊게 보지 못하는 나의 눈은 작가의 의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대신 내 눈이 쫓는 건 사진에 담긴 얼굴의 흔적이다. 눈빛과 표정과 주름에 드리워진 생각의 발자취이다. 얼굴에는
알 길이 없다. 거기가 흡연이 가능한 곳인지 아닌지. 소사역 1번 출구를 나와 왼쪽으로 틀면 곧장 파출소다. 파출소 앞에는 6차선 도로를 가로지르는 횡단보도가 있다. 그녀의 위치는 횡단보도와 파출소를 y축 밑변으로 하는 직삼각형의 x축 높이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그리도 오묘한 꼭짓점 좌표에서 담배를 물어서일까. 야트막한 화단 담벼락에 엉덩이를 붙이고 이등변삼각형처럼 한쪽 다리를 꼰 체 담배를 피우는 그녀가 문득 궁금하다. 화단은 구청 직원들이 심어놓은 봄꽃으로 요란하지만, 내 눈에 클로즈업 되는 건 그녀 하나뿐이다. - 아시죠. 술 보다 담배가 더 해로운 거. 임플란트 시술을 마친 의사는 금연을 요구했다. 치과 의사의 명령이 없었다면 나 또한 그녀와 한편이 되어서 담배를 태워 물었을까. 저기, 죄송한데요. 뒤통수 긁적이며 다가가 그녀에게 담배 한 개비 적선할 수 있었을까. 주신 김에 라이터도 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궁둥이를 쑥 빼고, 담배 문 입술만 그녀의 라이터를 향해 전진시킬 수 있었을까. 착각은 자유지만 그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상황이 일어나기에는 그녀가 물고 있는, 아니 그녀에게 물림을 당하고 있는, 담배의 물림 형태와 구조가 너무 도드라졌
엄마, 당신이 낳은 딸을 보세요. 낳고 기른 딸이, 이제는 또 다른 딸의 엄마가 되어서 걸어가요. 낮게 걸린 비구름 사이로, 건듯 내딛는 걸음걸이가 바람 같아요. 바람은 멈추지 않아요. 멈춤과 바람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라서, 끝끝내 멈춤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요. 엄마, 당신이 낳은 딸이 그래요. 이제는 또 다른 딸의 엄마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당신의 딸이기를 포기한 적은 없어요. 의사의 입에서 사망선고가 떨어지던 그 날도 그랬어요. 모두가 절망으로 머리를 조아릴 때, 당신이 낳은 딸은 바람처럼 나부끼며 온몸을 펄럭거렸어요. - 울 엄마 아직 안 죽었어요. 엄마, 당신이 기른 딸을 보세요. 낳고 길러 공부시킨 딸이, 이제는 또 다른 딸의 엄마가 되어서 새벽을 열어요. 새벽이면 어둠은 썰물처럼 무너져요. 무너지는 어둠을 딛고 현관문을 나서는 뒷모습이 밀물 같아요. 밀물은 바다를 품었어요. 바다를 품은 밀물이 첫차를 타고 돈 벌러 가요. 엄마, 당신이 기른 딸이 그래요. 가족을 먹이는 일이라면 포기하지 않아요. 포기를 모르는 모습이 엄마를 닮았어요. 뒷모습조차 당신이랑 똑같아요. 금방이라도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고 서방” 하고 부를 것 같아요. 불러 세우
그런 날이 있습니다. 무얼 해야 할지, 왜 해야 할지, 텅 비어버린 날 말입니다. 껍데기만 살아 펄럭거리는 하루는 시간을 삼키는 종이인형 같습니다. 인형이 삼켜버리는 시간 때문일까요. 봄이 찾아왔지만, 사람들은 봄을 맞을 겨를도 없이 겨울을 삽니다. 세상은 ‘확진’과 ‘격리’의 틈에서 몸살을 앓습니다. 약기운인지, 봄기운인지. 거리에는, 계절을 따라 걷지 못하고 주저앉은 그림자로 가득합니다. 애써 길을 걸어도 보이는 건 겨울뿐입니다.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아무리 찾아도, 왔다는 봄은 아득하기만 합니다. 다시 봄입니다. 움트고 싹트는 것들로 세상은 천지가 젖몸살입니다. 몸살꽃 이파리는 저물고 뜨는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돋아납니다. 저무는 것과 뜨는 것들이 경계의 이쪽과 저쪽에서 요란합니다. 삼월의 낮과 밤이 덩달아 흔들립니다. 흔들리는 하늘과 땅에서 잠들었던 봄이 실눈을 뜹니다. 저무는 것들이 흘린 눈물에서 뜨는 것들의 생명이 잉태합니다. 씨에서 싹이 트고 알에서 새끼가 깨어납니다. 흙에서 눈을 뜬 것들은 하늘로 줄기를 뻗고, 물에서 숨을 튼 것들은 바다를 향해 꼬리를 흔듭니다. 새는 날개를 펴고, 꼬리를 접은 올챙이는 네 발로 걷습니다. 다시 봄입니다. 울어
노래하는 것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강을 노래하는 물결이 그렇고, 숲을 노래하는 그늘이 그렇고, 봄을 노래하는 햇살이 그렇다. 사람에게는 있는 저마다의 이름이 강과 숲과 봄을 노래하는 것들에게는 없다. 밀고 밀리는 물결들마다, 덮고 덮이는 그늘들마다, 비추고 부서지는 햇살들마다, 붙여져야 마땅할 저마다의 이름이 없다. 사람 사는 세상도 그와 같아서, 노래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글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무엇이든, 틈을 열고 틈 너머를 노래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무명(無名)이라 부른다. 문학이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연극이든 상관없다. 사람을 노래하든 세상을 노래하든 달라지지 않는다. 노래하는 것이 전부인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호봉도 직급도 계급도 없다. 월급도 휴가도 보험도 정년도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일까. ‘싱어게인, 무명가수전’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시청자들의 눈길이 쏠렸다. 오디션에 참가한 무명가수들은 이름표 대신 번호표를 달고 심사위원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부르는 노래의 깊이와 색깔과 맛깔스러움에 따라 심사위원들의 선택이 갈렸다. 갈리는 승패에 따라 시청자들의 탄식과 환호 또한 서로 갈렸다. 탈락한 무명가
아내에게서 회식이 있다는 문자가 왔습니다. 딸은 야간근무를 하는 날입니다. 냉장고를 뒤적이다 장을 보러 나섰습니다. 무얼 살까, 한 끼니를 해결하는 데도 선택이 필요합니다. 재래시장 반찬가게에서 고사리와 도라지와 숙주나물을 샀습니다. 까만 비닐봉지에 세 가지 나물을 담고 9000원을 계산하는 순간에도 저녁메뉴를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고추장이 떨어졌다는 아내의 말이 생각나서 마트에 들렀습니다. 태양초 고추장(1.8kg)과 다담 된장찌개양념(530g), 마파두부 양념소스(130g)와 꽁치통조림을 계산대에 올리고 2만 6660원을 지불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다 학교 앞 사거리에서 신호등에 막혔습니다. 빨갛고 파란 신호등 색깔에 따라 차와 사람이 사거리를 가로지릅니다. 내가 선 횡단보도 신호등 색깔은 멈춤입니다. 맞은편 신호등에 걸린 대선 후보들의 현수막이 바람에 나부낍니다. 나부낄 때마다 얼굴 앞에 새겨진 숫자가 비상등처럼 가쁘게 펄럭입니다. 신호등이 바뀌고 보행자 신호등 밑에 숫자가 깜빡거립니다. 한 번 깜빡거릴 때마다 숫자가 하나씩 줄어듭니다. 대선 후보들의 현수막 때문일까요. 줄어드는 숫자가 마치 다가오는 대통령선거의 카운트다운 같습니다. D-15, D-14
동영상이 ‘카톡’에 올라왔다. 딸이 촬영한 동영상이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웃음소리부터 쏟아진다. 아내와 딸의 웃음소리다. 웃음은 고양이 목에 달린 방울처럼 요란하다. 흔들리는 웃음을 따라 화면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화면 저 편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김진호의 ‘가족사진’이라는 노래다. 흔들리는 화면 한가운데서 노래를 부르는 중년 사내가 비틀거린다. 술에 취한 사내의 비틀거림은 흔들리는 화면과 무관하다. 취한 사내의 입에서 박자를 놓친 노랫말이 흩어진다. 방바닥에 나뒹구는 노랫말을 아내와 딸의 웃음소리가 주워 담는다. “아빠, 춤도 춰야지.” 딸의 주문에 중년의 사내가 두 팔을 치켜들고 비틀어댄다. 흐느적거리는 꼴이 행사장 입구에서 손님을 불러대는 바람풍선 같다. 바람풍선의 두 팔이 허우적거릴 때마다 아내와 딸의 웃음소리가 방안을 가른다. 고양이 목에 달린 방울소리 같아서일까. 아내와 딸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입 꼬리가 먼저 올라간다. 아무리 필름을 되감아도 그날 밤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끊어진 필름 대신 남은 건 술에 취한 중년 사내의 동영상뿐이다. 몇 번을 다시 보았지만, 동영상 속의 중년사내가 나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쓸 때는 ‘국민’이지만 읽을 때는 ‘궁민’입니다. 어쩌면 그래서였는지 모릅니다. 국민(國民)을 가르치는 학교에 궁민(窮民)들만 가득했습니다. 학생들은 궁민인데 학교는 국민이어서, 우리가 다니던 ‘국민학교’에서는 국민과 궁민을 따로 분류하였습니다. ‘가정환경조사’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조사를 맡은 담임선생이 질문을 하면 해당하는 아이들은 손을 들어야 했습니다. 담임선생의 질문은 늘 “고아원에 사는 사람 손들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첫 질문에 손을 들던 몇몇 아이들의 하얀 눈동자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가정환경조사 항목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최종학력도 들어있었습니다. 담임선생이 대졸부터 국졸까지 차례로 읊으면, 해당하는 아이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나는 고졸과 중졸에서 한 번씩 손을 들어야 했는데 이유 없이 주눅이 들었습니다. 한 번 들기 시작한 주눅은 질문이 거듭될수록 깊어졌습니다. 담임선생은, 부모의 직업과 사는 동네와 집의 소유와 방의 개수와 승용차와 전화와 TV와 냉장고와 세탁기의 유무에 대해 차례로 물었습니다. 나는, 회사원과 두 칸짜리 셋방살이 말고는 손을 들 기회가 없었습니다. 라디오는 있었지만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쓸 때는 ‘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어요. 교통법규를 제멋대로 무시할 때 말이지요. 그렇다고 멱살다툼을 할 순 없잖아요. 무시하는 그도, 지켜보는 우리도, ‘어른’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으니까요. 화가 나서 경적을 울려대는 사람도 있긴 했어요. 바쁜 일이 있거나 성마른 성격 탓이었겠지요.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했어요. 다른 차로와는 달리 오른쪽 바깥 차로만 꽉 막혀 있었으니까요. 사고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앞서가던 차들이 차로를 변경하며 추월하기 시작했어요. 급할 것이 없는 우리는 차로를 고수했지요. 장례식장으로 조문을 가는 중이었거든요. 대여섯 대의 앞차가 추월해서 나간 뒤에야 문제의 트럭이 꽁무니를 드러냈어요. 짐칸에 채소를 가득 실은 1톤 트럭이었어요. 사고가 있었거나 고장이 난 것 같진 않았어요. 비상등을 깜빡이며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문제는 느려도 너무 느리다는데 있었어요. 걸어가도 그것보다 느릴 순 없었으니까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싶을 즈음 이유를 알게 되었어요. 비상등을 켜고 기어가는 트럭 앞에는 허리 꾸부러진 할머니가 있었어요. 손수레를 밀고 가는 할머니였어요. 할머니의 손수레에는 차곡차곡 쌓은 빈 박스가 한 짐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