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대통령 선거가 민주진영의 패배로 끝났다. 근소한 차이로 졌다고 하지만 그 영향이 너무도 엄청난 것이기에 패배 원인이라도 제대로 살펴봐야 한다. 필자는 그 원인을 민주정부의 치밀하지 못했던 국정 운영과 민생 정책의 총체적 실패에서 찾고자 한다. 우선 국정의 이니시어티브를 잡지 못한 탓이 크다. 해방 후 한반도는 애초 미국의 냉전 전략에 따라 민주주의와 평화를 실현하기 어렵도록 설계돼 있었다. 미국이 주도한 냉전 속에서 일본과 한반도에는 소련의 남진을 막을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이 주어졌다. 민족의 이익이나 민주주의에 앞선 이 핵심적 국익 때문에 미국은 줄곧 독재세력의 집권을 도와왔다. 친일 부패 엘리트들이 지배 세력으로 재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그러나 승리를 쟁취한 민중을 대신해 집권한 민주 정부들은 하나같이 빈약한 정치적 비전으로 국정 난맥상을 보이다가 자멸하고 말았다. 4월 혁명 이후 민주당 정부의 좌절, 1980년대 서울의 봄과 6월항쟁의 상황에서조차 독재를 끝장내지 못한 것 등은 그 생생한 사례이다. 민주 정당들의 분열과 일부 지도자들의 과욕이 빚은 결과였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 역시 거악 세력들의 발목잡기로 휘청거리다가 정권을 내주고
부산대와 고려대가 조국 전 장관의 딸에 대해 의학전문대학원과 학부 입학을 전격 취소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들 대학은 의전원 전 과정을 마치고 졸업과 함께 의사자격시험에도 합격한 제자에 대해 입학 취소라는 초유의 퇴출 조처를 잇따라 감행한 것이다. 부산대와 고려대는 과거 “표창장이 입학 요건에 필수적인 문건은 아니었다”고 밝힌 바 있어 상충되는 이번 결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우선 학교가 나름의 삶을 가꿔온 제자의 인생 설계를 이토록 망가뜨려도 되는지를 묻고 싶다. 최대 12년 세월이 흐른 지금 와서 해당 대학들의 이런 태도를 이해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애초 입학이 안 되었더라면 선택했을 제2의 길조차 소급해서 가로막음으로써 끼친 손실도 작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엄혹한 유신독재이었던 때 은사이셨던 학장의 일화가 기억에 새롭다. 그는 시위 때마다 현장에 나타나 시위를 말리고 심지어 주동자에게 따귀를 올려붙였던 완고한 분이었다. 정권 말기 증상이 점차 심해지자 학생들은 대규모 유신반대 시위를 준비 중이었는데, 실행도 하기 전에 적발됐다. 박정희 정권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학생들이 마치 공산 국가 건설을 모의 실행하려 했던 것처럼 시위 모의 사건을 ‘용공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집무실의 국방부 청사 이전을 밀어붙이는 자세를 둘러싸고 비판이 거세다. 대통령의 광화문 시대를 열겠다는 공약을 내세우고 당선 직후 느닷없이 용산으로의 이전을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후보 시절 이전부터 일방적으로 그를 띄웠던 극우언론마저 ‘소통을 위한 이전’이 아니라 ‘이전을 위한 소통’부터 하라며 싫은 소리를 쏟아 붓는다. 집무실 이전에 대한 반대 여론이 58% 이상 나온다니 앞으로 그가 펼칠 국정운영이 더 걱정이다. 도대체 누구 말을 듣고 이처럼 서두르는가? 울진 삼척 일대 큰 불로 삶의 터전이 잿더미로 변해버린 이재민들, 코로나 환국으로 장사가 안되어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소상공인들에게는 이런 그의 모습이 과연 어떻게 비춰질까?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는 중국 역사에서 춘추시대(기원전 770년)의 개막 시점에 西周 몰락의 주인공으로 한 여성을 지목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절세 미인인 포사(褒姒)가 장본인인데, 서주 유왕 때 포로로 잡힌 사람들을 송환받기 위해 포 나라가 바친 여성이었다. 이 여인은 왕의 총애를 받았지만 도통 웃지를 않았다고 한다. 어쩌다 한번 웃음이라도 지을 때면 왕은 넋이 나갈 만큼 기뻐했다고 한다. 갖은 방
20대 대통령 선거는 결과가 비록 실망스럽지만 촛불혁명 과정에서 몇 가지 의미있는 역사적 성과를 남겼다. 촛불혁명 연장선에서 대선을 만났던 필자는 개표 결과를 통해 두 가지의 소중한 의미를 도출해낼 수 있었다. 첫째는 역사는 결코 직진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이다. 우회하다가 역류하고 정체하기도 하지만 마침내 강을 이루어 바다에 이르는 물과 같은 것이다. 민주개혁세력이 아직은 주류인 구(舊)체제를 뒤엎을 만한 압도적 파워를 갖추진 못했지만, 이번 개표 결과를 보면 앞으로는 역사의 물줄기를 얼마든지 우리 혼자 힘만으로 바꿀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겨났다. 강고한 주류에 박빙의 차로 패배했지만 비주류 이재명이 이룩해낸 성과는 실로 놀라운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 정부의 몇가지 치명적 실정에 불리한 선거구도, 언론의 편파보도 총공세, 편향된 검찰 수사 등 겹겹의 벽을 뚫고 대등한 지지표를 얻어낸 것은 값진 성과이다. 더욱 주목할 것은 김대중-노무현 때와 달리 보수와의 연합을 통한 세 불리기도 전혀 하지 않고 독자 후보로 나서 이런 희망적 결과를 일궈냈다는 사실이다. 이는 민주진영의 5년 후 재집권 전망을 분명 밝게 해준다. 둘째, 원래 평화와 민주주의는 그 자
‘어질면서(仁) 무(武)하지 않으면 어짊을 이룰 수 없다.’('춘추좌전' 선공편). 무가 어짊 실현의 필요조건임을 말한다. 무는 戈(과: 창으로 무력을 뜻함)와 止(지: 전쟁을 막아 평화를 지키는 힘)로 이뤄진 합성한자이다. 권력은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용기 있는 자에 주어져야 한다는 경구이다. 루쉰은 물에 빠진 개를 보면서 일갈한다. “물에 빠진 것은 사람이 아니라 미친 개다.” 사람들을 물어뜯다가 참다못한 사람들의 몽둥이에 쫓겨 물에 빠진 개를 구해선 안된다. 측은지심으로 차마 내치지 못한다면 미친 개는 다시 사람들을 물어뜯게 될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세력은 단호히 때려잡아야 함을 비유한 것이다. 루쉰은 “페어플레이 좋다, 그러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도 지켜야 하는 절대선이란 없다”고 단언한다. 시민의 용기는 로마를 악에서 구했다. 쿠데타로 원로원 공화파를 속여 황제에 즉위하려는 카이사르는 브루투스에 의해 살해된다. 브루투스는 그를 죽인 뒤 “폭군은 죽었다”고 시민들에게 외쳤다. 브루투스는 사실 카이사르 정부(情婦)의 아들로 카이사르의 최측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억압받을 때 국가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4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대통령 중심제에서 대선은 향후 펼쳐질 국정의 주요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총선 이상으로 가장 중요한 정치행사이다. 우리 민족은 해방 이후 모두 3차례나 민주정부를 출범시킨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다. 민족 분단의 열악한 정치지형, 반공 극우언론이 압도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친일 반민주 무리들을 물리치고 대한민국을 민주주의의 세계적 모범 국가로 만들었다. 지난 2017년 박근혜 탄핵으로 권력과 부의 양지에서 밀려난 특권 반칙세력들은 외세와 재벌에 빌붙어 누려온 권세와 부를 잃고 한동안 지리멸렬했다가 지금은 전열을 가다듬고 권토중래를 노린다. 마치 이번 대선이 정권을 탈환하기 위한 마지막 기회라도 되는 양 총궐기하는 기새이다. 이들은 사회의 투명성을 높이려는 정부의 개혁조처도 자신들이 장악한 검찰과 재벌, 편파적 제도언론을 총동원해 사사건건 흠집을 내 좌초시키려 애를 쓴다. ‘민주개혁이 우리만의 기득권을 줄이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마음깊이 똬리를 틀고 있는 듯하다. 개혁을 노골적으로 반대할 때 나타날 국민적 역풍을 우려해 ‘정권교체 플래카드’로 검은 속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시절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미국으로부터 되가져오는 것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취임 이후 몇 차례 협의 끝에 지난해 다시 작전통제권 반환을 몇 년 뒤로 미루는 결정을 하고 말았다. 작전통제권 반환이 현재로선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그 부속문서인 SOFA(주한미군지위협정·Status Of Forces Agreements)이다. 방위조약은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미국에 모든 군사주권을 통째로 넘긴, 지상에서 가장 해괴하고 굴욕적인 주권포기행위였다. 자기 군대를 스스로 지휘 통제하지 못하는 국가, 이게 과연 나라인가? 군사주권을 잃어 청일, 노일 전쟁이 이 땅에서 벌어지는 바람에 우리 민족이 최악의 참화를 당해야 했던 구한말 상황은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조약 4조는 “...미합중국의 육, 해, 공군을 대한민국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수락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한마디로 우리 정부의 동의 없이 미국이 자신의 군사력을 한반도와 그 주변에 배치할 ‘무한 권리’를 명문화하고 있다. 더 극악한 독소조항은 SOFA로 더 심각한 불평등
우리 선조들은 해방이 되던 날 과연 감격에 겨워 마음 놓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기가 내려지고 태극기가 내걸려야 할 곳에 대신 새로운 점령국 미국의 성조기가 오른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직감하고 불길한 생각을 하게 됐을 것 같다. 이 땅에서 일본인들이 물러간다는 것이 한반도 상황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됐을 터이다. 이후 이 땅의 현실은 민족의 소망과는 점차 멀어져 갔다. 아직 광복은 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전범국 일본이 패전을 했을 뿐 조선은 미, 소에 의해 분할되어 자주독립국가로의 길도 더 험난해졌다. 조국은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되돌아오지 못할 단절과 분열의 길로 들어섰고 급기야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조국은 해방된 지 불과 몇 년도 못돼 허리가 잘리고 재분단되는 비극적 운명에 빠져든 것이다. 반면 친일 반민족 세력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잠시 독립운동가 출신들이 미군정 눈에 나 정치적 위기에 몰린 순간 이들은 환호했다. 일제 조선인 고등계 순사들은 이제는 미군정의 당당한 후원을 받아 이 땅을 영원한 반공 분단국가로 만드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군 수뇌부도 독립군 출신은 한직으로 밀려난 반면
우리 현대사는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주주의자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오히려 반역자들로부터 갖은 고문과 심지어 암살까지 당했던 뒤틀린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민주주의는 분단이라는 냉혹한 현실과 불가분의 관련성을 지닌다. 76년 동안 민족국가 건설(nation-state building)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민주주의는 분단체제의 제한을 받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민주주의를 탄압한 자들이 다름 아닌, 분단에 기생해 민족의 화해와 협력을 가로막는 자들인 상황에서 더 무슨 말을 하랴! 여기서 우리는 민주화 운동과 민중 생존권 투쟁을,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큰 틀의 독립운동에 포함시키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 등 강대국에 의한 한반도의 강제 분할이 만든 현실에서 민주화 운동은 앞으로 여전히 독립운동의 연장선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분단은 민족을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몰아넣었고 민주주의를 압살했으며, 민족융성의 순간순간마다 우리의 창조적 에너지를 소진시켰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분단체제가 철폐되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을 웅변하는 것이다. 허리가 잘린 긴 수난의 세월이 사회 곳곳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는 완전
“단순히 말하고 쓴다고 모두 언론이라고 할 수 없다. 진실을 공정하고 이성에 맞게 정확하게 (전하고), 강자와 지배자의 구미에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민과 공공의 현명한 판단 자료가 되는 양질의 정보를 책임감 있고 불편부당한 자세로 제공해야 비로소 (언론이라 할 수 있다.)... 언론은 수없이 숭고한 생명과 정신이 피 흘려 싸운 결과로 얻어진 고귀한 이름이다.” (리영희 선집 ‘생각하고 저항하는 이를 위하여’ 2020, 452~453쪽, 괄호 안은 필자가 넣음) 요즘 언론인들은 공공연히 ‘기레기’로 불린다. 이는 시민들이, 품격마저 잃고 불평등 구조의 개혁과 사회적 진보에 맞서는 기득권 세력과 한 패가 된 언론 현실을 풍자하며 붙여준 명예롭지 못한 별명이다. 필자 또한 언론인으로서 가없이 부끄럽다. 언론행태에 대한 비판은 검찰개혁 이슈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 부패와 독선으로 점철된 검찰 비리에 대한 개혁 목소리에도 언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사실상 ‘살아 있는 권력’으로 꼽히는 검찰, 극우 정치세력과 손을 맞잡고 시민들의 정당한 개혁 요구를 왜곡보도로 맞받아쳤다. 조중동의 보도에서는 이제 민주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되찾아 오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