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수원 市 승격60주년 수원시는 2009년 8월 15일을 기해 시(市) 승격 60돌을 맞았다. 인간으로 치면 환갑이다. 환갑은 회갑(回甲), 화갑(華甲), 화갑(花甲), 주갑(周甲)이라고도 한다. 수원시와 수원시민으로서는 자축할만한 날이다.수원은 경기도의 수부(首府)이고 도내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도시다. 그래서 시의 건치연혁(建治沿革)에 곁들여 조선 시대 이후 오늘날까지의 역대 목민관(牧民官·오늘날의 시장 또는 시의회 의장)의 거취와 발자취를 간추려 보았다. 수원은 원래 고구려 매홀군(買忽郡)이었는데 고려 때 수주(水州)가 되고, 조선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가 되었으나, 수원이 근대 도시로 거듭나게 된 것은 1794년(정조 18) 화산에 있던 읍치(邑治)를 팔달산 기슭으로 옮기고 나서부터였다. 1895년(고종 32) 인천 관할의 수원군이 되고, 일제하의 1931년 제령 제12호로 ‘수원면’이 ‘수원읍’으로 승격된 상태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1949년 8월 14일 수원읍을 왜정 때 행정구역명인 ‘수원부(水原府)’로
진달래꽃 철이 됐다. 진달래의 고어는 ‘ 욋꽃’이다. 고려 가요 ‘동동(動動)’에 나온다. 진달래를 참꽃이라 하고, 철쭉을 개꽃이라 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진달래를 참꽃이라 하고 철쭉을 진달래라고 하는 곳도 있다. 철쭉은 꽃냄새가 좋지 않은데다 독성이 있어서 먹을 수 없지만 진달래는 먹을 수 있는 꽃이다. 진달래는 ‘두견화’ 또는 ‘산척촉’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촉나라 임금 두우(杜宇)가 억울하게 죽어, 그 넋이 두견이가 되었고, 두견이가 울면서 토한 피가 두견화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진달래꽃은 우리나라 야산에 불붙듯이 피는 꽃이므로 우리와 가장 친숙한 꽃이다. 혹독한 겨울을 이기고 살아남은 거듭살이의 힘은 박해에 굴하지 않는 불멸의 힘을 상징한다. 일제하에서는 항일, 민주화운동 때는 젊은 피의 상징이 된 이유다. 고려의 개국 공신 복지겸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충남 당진에서 요양하였다. 17세 된 그의 딸이 꿈을 꾸고 꿈 속의 신선이 가르쳐 준 대로 진달래 꽃잎을 섞어 술을 빚었다. 이 술을 먹고 복지겸이 나았다고 한다. 이 술을 ‘두견주’ 또는 &l
예언은 신의 의지를 인간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한다. 과학적으로는 초감각적 감지라고 하지만 그 정체에 관해서는 확인된 바가 없다. 노스트라담스(1503~1566)는 역사상 회고의 예언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프랑스 태생의 의사로 유럽을 여행하던 중 페스트로 아내와 자식들을 잃고 방랑길에 오르는데 이때 예언의 능력을 얻었다고 한다. 당시 왕이던 앙리2세에게 “왕이 10년 안에 죽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왕은 이말을 듣고 늘 조심했는데 10년을 일주일 앞두고 친위대장과 무술시합을 하다 눈을 찔려 10년째 되는 날 죽었다. 진 딕슨 부인과 함께 20세기 최고 예언가로 알려진 에드가 게이시(1877~1945)는 잠을 하면서 예언을 하는 초능력자로 유명했다. 그는 주로 현대 의학으로 치료하지 못하는 치료방법을 1만432건이나 예언했는데 적중률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특히 그는 “남극과 북극은 기온이 상승하고 육지가 나타나며 화산이 폭발한다.”고 예언했는데 지금 지구에는 온난화 현상이 일어나 춘하추동, 3한4온의 질서가 무너지고 빙하가 소멸되어 가고 있다. 그의 예언은 적중한 셈이다. 딕슨 부인은 194
당나라 태종(이세민)은 중국 역사상 드문 영명한 군주였다. 태종은 어느날 군신들을 모아놓고 물었다. “창업과 수성(守城) 어느족이 어렵다고 생각하오.” 재상인 방현령이 “천하가 혼란하여 서로 패자(覇者)가 되려고 다투는 시대에 수많은 영웅을 쳐부수고 그들을 굴복시켜 천하를 통일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창업이 수성보다 어렵습니다.” 이에 간의대부인 위징이 이의를 제기했다. “대란을 평정하고 천하를 편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천하를 손아귀에 넣으면 과거 고생했던 것을 잊고 방심한 나머지 자신을 멸망시킨 예가 많습니다. 따라서 수성이 창업보다 더 어렵습니다.” 태종은 “재상 방현령은 짐과 함께 창업했으니 창업이 어렵다 할만하고, 건의대부 위징은 짐을 보좌하여 천하의 통치에 힘을 기울였으니 수성이 창업보다 어렵다고 할만하오.” 태종은 두 사람의 의견이 모두 옳다고 여겼다. 태종이 이와 비슷한 얘기를 위징에게 한 것이 ‘정관정요(貞觀政要)’에 기록되어 있다. “국가를 발전 유지시켜 나가기가 어려운 일이겠오, 쉬운 일이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시인 노작(露雀) 홍사용(洪思容) 문학관이 화성시에 의해 세워진다. 홍사용은 1900년 옛 수원군 동탄면 석우리(돌모루)에서 대한제국 통정대부(通政大夫) 육군 헌병부위 홍철유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여덟살되던 해 백부 승유의 양자로 입적됐다. 1912년 두 살 연상의 원효순과 결혼하고 1919년 장남 규선을 낳았으나 그는 이미 문학에 입문해 박종화,정백 등과 더불어 등사판으로 만든 ‘피는 꽃’을 발간하면서 3·1운동에 담하고 있었다. 1920년 ‘문우’와 1922년 문예지 ‘백조’를 창간했고, 1923년 ‘백조’에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발표했다. 1927년에는 박진과 함께 극단 ‘산유화’를 창단하면서 문학과 연극에 몰입하게 되는데 출판비와 극단 운영비는 홍사용 몫이었다. 1944년 강경·전주 등지에서 교편생활을 하며 희곡 ‘김옥균전’을 썼지만 총독부 검열에 걸려 요주의 인물로 주거제한 명령을 받았다. 그의 문예 열정과 애국 의지는 이 시점
우리나라에 서양 양복이 도입된 것은 1883년 인천항 개항 전후였다. 서양인들이 양복을 입고 나라 안에 들어왔을 때 백의(흰옷)만을 입던 우리 선조들은 퍽이나 당황했을 것이다. 특히 서양 여인들이 입은 양장은 우리 여인들 눈에는 낯설다 못해 괴이하게 보였을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유교의 영향을 받은 우리 민족은 백의를 지선극미(至善極美)의 전통문화로 여긴데다 유교에서는 검은색을 음사(淫邪)한 색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검은 계통의 옷을 금기시 하였다. 그런데 1884년 (고종21) 6월 의복제도를 바꾸는 ‘사복변제절목(私服變制節目)’이라 일컬으는 변복령을 발표했으니 나라 안이 조용할리 없었다. 변복령은 일반 민간들에게 반령착수(盤領窄袖·둥근 깃에 좁은 소매)를 강요했다.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지만 10년 뒤인 1894년 9월 갑오개혁 때 의복제도가 다시 제기되고 같은해 12월 대례복을 흑단령(黑團領)으로, 통상 예복을 흑색주의(黑色周衣)로 바꾸었다가 이듬해 3월 관민 모두가 검은색 주의(周衣)를 입도록 하였다. 이를 을미변복령이라 한다. 백의 민족의 자존심은 이 시점에서 접어야만 했다. 반면 1930년대에 일본 유학이 잦아지
‘내집 없어 서러워라/나라 없어 서러워라./임금 섬겨 나라 찼고/왜놈 잡아 임금 앞에 꿇어 앉혀/우리 임금 분을 풀어주세.’ 1896년 4월 7일자 ‘독립신문’에 실린 ‘의병군가’다. 독립신문은 갑신정변 때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갑오개혁 때 귀국한 서재필이 정부 지원을 받아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이었다. 그런데 그 신문 창간호에 ‘의병군가’가 소개된 것이다. 이는 독립신문이 지향하는 논조와 사시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다. 1896년은 한말 의병이 붕기한 해이기도 하다. 한말 의병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눈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촉발된 을미의병(전기·1896~7), 을사늑약으로 일어난 을사의병(중기·1905~6), 조선군대 해산에 반대하는 정미의병(후기·1907~11)이다. 의병 궐기를 선도한 것은 유인석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격문(檄文)을 포고했다. ‘마침내 갑오년 6월 20일 밤에 이르러 우리 조선 삼천리 강토가 없어진 셈이다. 옛날 고구려가 하구려(下句麗)로 된 것도 수치라 이르는데 하물며
정조가 그의 18년(1794)에 착공한 수원 화성을 1년 반만에 축성을 끝냈을 때 수원 천도설이 나돌았다. 정조 사후 천도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정조의 특별한 수원 애착 등을 감안하면 있을 법한 일이었다는 것이 역사 학자들의 사견이다. 그런데 이보다 184년 전인 광해군 4년(1612)에는 교하(경기도 파주 금천역 부근)로 도읍을 옮기려는 천도 구상이 있었다. 광해군은 그의 5년(1613) 1월 3일 “예로부터 왕들은 성읍을 따로 건설해 예기치 않은 일을 대비했으니, 도읍을 옮기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하는 강화를 마주하고 있고 형세가 아주 기이하다. 독성 산성(화성시 소재)의 예에 따라 성을 쌓고 궁을 짓고는 때때로 순행하고 싶다. 대신과 해조 당상은 헌관.언관.지관과 함께 날을 택해 가서 살피고 형세를 그려오라.”고 비변사에게 명령했다. 때마침 임진왜란(1592· 선조 25)으로 불에 탄 창덕궁이 재건돼 거처를 옮겨야 했는 데도 광해군은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광해군은 교하는 임진강과 너른 평야가 있어 물과 식량 조달이 쉬우며 서울보다 외침에 대비하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환율이 급등하고 증시가 널뛰기를 하면서 금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세계적인 경제 불황 탓이라고는 하지만 세상이 불안해지면 금값이 올랐던 과거 예로 보면 작금의 세상 분위기가 딱히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이 살포시 깔려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엄포, 서해의 긴장 조성, 민항기의 영공 통과 위협에 이어 한·미 합동군사훈련인 ‘키 리졸브’를 트집 삼은 군 통신선 차단 등 한마디로 뒤숭숭하다. 쇠에는 백금, 청금, 적금, 흑금, 황금의 다섯 가지가 있으나 그 가운데서 황색쇠가 으뜸이기 때문에 ‘金’ 자만으로도 ‘황금’을 대표하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금은 고대 신화에서 귀하고 완전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예를 들면 김알지의 탄생 신화에서 그가 있던 곳이 황금궤이며, 가야의 김수로왕 역시 이와 비슷한 형태로 탄생하였다. 수로왕을 비롯한 6가야의 시조는 홍색의 보자기에 싸인 금합 속에 든 황금알의 형태로 자색의 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금은 태양과 함께 신화소(神話素)가 되고 왕권의 신성성과 절대성의 상징이었다. 사주팔자나 관상
조선 시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은 거의 전무에 가까웠다. 음식을 만들거나 바느질하는 일, 또는 술자리 시중을 드는 일말고는 애낳고 기르는 것이 전부였다. 한마디로 직업을 가진 ‘전문직 여성’은 없었다. 예외적으로 여자의 질병을 돌보는 여자의녀와 범죄 사건을 수사하는 여자형사가 일부 있었을 뿐이었다. 조선 시대에 여자 의사는 의녀라 불렀고, 여자 형사는 다모라 불렀다. 의녀 제도가 도입된 것은 조선 초기부터였다. 남녀가 유별하던 유교 사회에서 여인의 병을 남자 의사가 진찰하고 치료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태종 18년(1418)에 궁궐 안에 7명의 의녀를 두었다. 그 뒤 여의사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어린 여자아이를 뽑아 재생원에서 의술을 익히게 했는데 의녀의 신성한 역할을 망가트린 것은 연산군이었다. 그는 그 10년(1504) 6월 “잔치 때 의녀 80명을 가려 뽑아 예의를 가르치고 재주 있는 기생은 옷을 깨끗이 입혀 섬돌 위에 앉혀라.”라고 분부했다.의녀는 기생 역할만 하지 않았다. 궁중에 도난, 전도, 부정 사건 등이 발생하면 규방을 수색하거나 염탐하는 형사 역할까지 시켰다. 의녀의 1인 3역의 모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