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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룡문] 군민복

이창식 주필

우리나라에 서양 양복이 도입된 것은 1883년 인천항 개항 전후였다. 서양인들이 양복을 입고 나라 안에 들어왔을 때 백의(흰옷)만을 입던 우리 선조들은 퍽이나 당황했을 것이다. 특히 서양 여인들이 입은 양장은 우리 여인들 눈에는 낯설다 못해 괴이하게 보였을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유교의 영향을 받은 우리 민족은 백의를 지선극미(至善極美)의 전통문화로 여긴데다 유교에서는 검은색을 음사(淫邪)한 색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검은 계통의 옷을 금기시 하였다. 그런데 1884년 (고종21) 6월 의복제도를 바꾸는 ‘사복변제절목(私服變制節目)’이라 일컬으는 변복령을 발표했으니 나라 안이 조용할리 없었다. 변복령은 일반 민간들에게 반령착수(盤領窄袖·둥근 깃에 좁은 소매)를 강요했다.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지만 10년 뒤인 1894년 9월 갑오개혁 때 의복제도가 다시 제기되고 같은해 12월 대례복을 흑단령(黑團領)으로, 통상 예복을 흑색주의(黑色周衣)로 바꾸었다가 이듬해 3월 관민 모두가 검은색 주의(周衣)를 입도록 하였다. 이를 을미변복령이라 한다. 백의 민족의 자존심은 이 시점에서 접어야만 했다. 반면 1930년대에 일본 유학이 잦아지면서 양복과 양장이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되고 학생, 회사원, 관리, 교사들이 양복을 입기 시작하면서 서울 장안에만 양복점이 4백개나 됐다.

 

1936년 미나미지로(南次郞) 총독이 부임하면서 이 땅의 복식제도는 또 한 번 바뀐다. 미나미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보는 소위 국방색의 국민복을 입고 모든 관리들에게 국민복 착용을 강요했다. 국민복은 유사시에 군복으로 사용이 가능한 것으로 스탠드 칼라에 5~6개의 단추를 달아 운동성과 실용성이 매우 높았다. 1941년 미국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때는 내선일체(內鮮一體), 황국신민(皇國臣民)을 내세워 남성은 국민복, 여성은 ‘몸빼’를 입게하였다. 전쟁과 함께 양복지 배급제가 시작되고, 양복점은 하루 아침에 문을 닫거나 옷수선가게로 전락하고 말았다. 광복과 더불어 우리는 일제의 복제 억압에서 벗어났지만 역경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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