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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룡문] 의병군가

이창식 주필

‘내집 없어 서러워라/나라 없어 서러워라./임금 섬겨 나라 찼고/왜놈 잡아 임금 앞에 꿇어 앉혀/우리 임금 분을 풀어주세.’ 1896년 4월 7일자 ‘독립신문’에 실린 ‘의병군가’다. 독립신문은 갑신정변 때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갑오개혁 때 귀국한 서재필이 정부 지원을 받아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이었다. 그런데 그 신문 창간호에 ‘의병군가’가 소개된 것이다.

 

이는 독립신문이 지향하는 논조와 사시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다. 1896년은 한말 의병이 붕기한 해이기도 하다. 한말 의병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눈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촉발된 을미의병(전기·1896~7), 을사늑약으로 일어난 을사의병(중기·1905~6), 조선군대 해산에 반대하는 정미의병(후기·1907~11)이다. 의병 궐기를 선도한 것은 유인석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격문(檄文)을 포고했다. ‘마침내 갑오년 6월 20일 밤에 이르러 우리 조선 삼천리 강토가 없어진 셈이다. 옛날 고구려가 하구려(下句麗)로 된 것도 수치라 이르는데 하물며 소일본(小日本)이 된다면 얼마나 서러운 일이겠는가. 오랭캐로 변한 몸이 어떻게 세상에 나설 수 있으리오. 공(公)으로 보나 사(私)로 보나 살아갈 가망이 전무하니 화가 되건 복이 되건 죽을 사(死)자 하나로 지표를 삼을 따름이다.’ 전후 15년에 걸친 의병 활동은 일제의 제압을 이겨내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지만 전국 각지에서 펼친 의병 봉기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한말 의병을 당시 신문들은 비도, 화적, 적경, 활빈당, 비류, 적도, 적당, 작한, 의병이라 불렀다.

 

의병만 빼고는 모두 천하의 몹쓸 집단으로 폄하했다. 신출귀몰하는 의병 때문에 불안에 떨수밖에 없었던 일제로서는 그것도 양반 대접이라고 했을지 모르지만 우리로서는 어디까지나 ‘의병’이었다. 다음은 독립신문 학부주사 이필균이 지은 애국가다. ‘아세아의 대조선이/자주 독립 분명하다. 애야애야 애국하세/나라 위해 죽어보세./합심하고 일심되어/서세동점(西世東漸), 막아보세./남녀없이 입학하여/세계 학식 배워보세./교육해야 개화되고/개화해야 사람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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