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공공기관에 대한 대대적인 혁신을 예고하고 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공공기관 파티는 끝났다”고 밝힌 바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영업이익으로 대출 이자를 갚지 못하는 한계공기업들이 지난해 거액의 ‘성과급 잔치’를 벌였다. 한국전력공사와 한국철도공사 등 공기업 18곳이 영업이익으로 대출 이자도 갚지 못하는 상황에서 약 4000억원에 달하는 성과급을 지급했다. 한국전력은 지난해 5조8601억원의 영업적자인데도 임직원들에게 총 1586억원의 성과급을 줬다. 부채비율이 200%를 넘는 한국철도공사와 한국지역난방공사도 각각 772억원, 110억원의 성과급을 나눠가졌다. 사기업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한계공기업의 ‘성과급 잔치’가 가능한 이면에는 문재인 정부가 평가지표에서 ‘경영실적’ 점수 비중은 낮추고 ‘사회적 가치 구현’ 비중을 높인 것이 영향을 미쳤다. 특히 350개 공공기관의 정규직 수는 문재인 정부 출범 전인 2016년 30만 7690명에서 지난해 41만 6191명으로 10만 8501명(35.3%)이나 늘었다. 공기업에 대한 전면적인 구조개혁이 시급하다. 먼저 경영평가시스템을 개편하고 재무구조 개선에 적극 나서야 한다. 경영 평가 항목 중 전 정부가 대폭 높인 사회적 가치는 배점을 낮추고 경영 성과 배점을 다시 높여야 한다. 이와관련해 경영평가시스템의 지속성이 중요하다. 그동안 공기업의 부실 또는 방만한 경영이 이뤄지게 된 동기를 보면 새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정권코드’에 맞는 평가항목이 새롭게 들어가고 또 평가 비중에도 변동성이 확대된 탓이 크다. 정권이 바뀌어 눈높이가 크게 달라지면 경영 안정과 추진력을 확보할 수 없다. 윤 정부는 전 정부가 과도하게 비중을 낮춘 재무 부문을 조정하되, 5년후 다른 정권이 들어서도 이번에 달라질 경영평가시스템이 계속 유지되도록 공익적 가치와 재무상태의 균형점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기관장에 대한 철저한 실적평가가 요구된다. 공기업 기관장은 일반 행정부와는 다르게 정권의 전리품처럼 전문성이 결여되거나 무시된 낙하산 인사가 비일비재했다. 정권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일정 수준의 정무적 인사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인선 과정에서 전문성을 최대한 살리고, 임명된 이후 CEO평가를 보다 치열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나마 윤 대통령이 특히 정치인 출신들의 기관장 인선에서 예전보다 훨씬 높은 잣대로 전문성을 보고 있다는 소식이어서 다행스럽다. 셋째 책임과 함께 공기업의 자율성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공기업의 부실한 경영 내용을 보면 자원외교, 탈원전,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과임원 인사 등 역대 정권(청와대)이나 해당부처에 과도하게 예속된 경우가 많았다. 또 기관장과 손발을 맞춰야 할 일반 상임이사 인선 등에서도 외부 입김이 강해 인사가 왜곡되거나 늦어지는 파행 사례가 많았다. 큰 방향에서 정부와 호흡을 맞춰야 하지만 공기업과 기관장의 재량권이 대폭 개선돼야 한다. 그래야 책임도 물을 수 있다. 끝으로 공공기관 개혁은 정부, 정치권 등 다른 부문의 혁신이 동반돼야 저항을 줄이고 추진 동력을 배가시킬 수 있음을 명심하자.
개봉과 동시에 엄청 화제를 모을 것이 확실히 되어 보이는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에는 인상적인 대사가 나온다. 주인공 형사는 자꾸 자신 앞에 용의자가 돼 나타나는 여자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이 대사는 이제 여기저기서 패러디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여자의 대답은 이거였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남자 형사의 저 대사를 지자체장들에게 해주고 싶다. 지방자치단체장이 되면, 특히 새로 되고 나면, 늘 만만한 게 영화제인 모양이다. 이런저런 영화제를 만들겠다, 혹은 만들어 달라 등등 이쪽 전문가들에게 요구와 부탁을 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영화제 하면 그저 극장에 영화를 ‘갖다 붙이는 행위’ 정도로만 생각하는 듯 보인다. 무엇보다 거, 돈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오? 얼마면 된다는 거요, 식이다. 문제는 영화제가 그렇게 만만한 퍼포먼스가 아니라는 점이다. 극장에 영화를 갖다 붙이는 것만으로는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가당치 않은 일이다. 영화제를 돈만 가지고 할 생각이라면 절대 하면 안 되는 일이다. 수없이 영화제를 해 온 사람으로서 그럴 때마다 지자체장 당사자에게 거나 관련 공무원에게 분명히 경고성 얘기를 건넨다. 영화제는 한번 시작하면 ‘빽도’가 불가능하다, 한번 멈추거나 연기하는 순간 중단되는 것이다, 대중들에게 영화제란 존재를 알리기까지 최소한 3년의 시간이 걸린다, 길게는 5년까지 걸린다, 그걸 감당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단체장의 임기는 4년이다. 혹시 선거에서 지고 단체장이 교체된다 하더라도 지속 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등등이다. 대체로 초기에는 모든 걸 호언장담한다. 그리고 많게는 수십 억, 아무리 적어도 10억 내외를 투여해 첫 해 영화제를 시작한다. 그리고 대체로 3년이 못 가서, 혹은 그 언저리에 사단이 난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현재 강릉국제영화제다. 이 영화제에 대해서는 신임 시장이 선거 운동 당시부터 아예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매년 10월 말 혹은 11월 초에 열리는 이 영화제는 지난해까지 3회를 했으며 예산은 매년 30여 억원 가까이 투입돼 왔다. 지금 폐지한다면 백억 원 가까이를 허공에 날리는 셈이다. 영화제를 단체장의 취향에 따라, 정치적 의도에 따라 만들었다 없앴다 하는 식으로 하려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영화제 자체를 우습게 안 결과라느니(영화제를 하려면 수십, 수백 편의 영화를 사전에 검토하고 일일이 저작권 이슈를 해소하고, 돈을 들여 수급을 해서는, 한 편 한 편 번역과 자막 작업을 해야 한다. 그걸 번인으로 할 때가 있고 슈팅 기법으로 자막을 할 때가 있다. 그런 것도 결정해야 한다. 번인은 스크린 안에 자막을 심는 기술이다.) 영화인들에 대한 모욕적인 행태라느니(한번 씹고 버리는 껌처럼 자신의 정치적 홍보에만 활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얘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기에도 지쳤다. 그냥 막대한 예산 낭비를 지역민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의 얘기만 하고 싶다. 다 지역민들이 세금으로 낸 것, 국민이 세금으로 낸 것으로 예산을 충당했고 그 돈이 헛되이 쓰인 결과가 됐다면 결국 국민과 지역민들만 희생이 된 꼴이기 때문이다. 영화제를 열어서 외부인사들, 배우들, 연예인들을 초청하려면 숙박과 교통이라는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역으로 얘기하면 영화제를 하면 지역의 숙박시설, 교통 인프라가 확충되고 발달할 수 있는 계기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쪽이 먼저 돼야 한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한쪽이 한쪽을 자극시키고 결과적으로 산업이 확장되는 형태로 나아가면 된다. 그런데 이런 부분에 대한 전략적 검토 없이 마구잡이로 일단 영화제를 유치하겠다고 나서는 경우가 많다. 그와 동시에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전문가의 얘기를 귀담아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전문가에게 일을 맡기지 않으려고 한다. 앞에서는 네네 하면서도 뒤에서는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된다는 소리를 반복한다. 그렇게 충돌과 갈등을 반복하고 있는 영화제가 현재 전국적으로 270개가 넘는다. 발상의 전환, 의식의 전환을 할 때가 됐다는 얘기다. 한국에 영화제가 많은 이유는 극장 환경 때문이다. 국내 극장에서는 오로지, 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 상업영화밖에 볼 수가 없다. 예술영화, 비상업영화, 독립영화는 오로지 영화제에서 밖에 볼 수가 없다. 영화제가 많아진 원초적인 이유는 극장 문화의 균형이 무너져 있기 때문이다. 이걸 수정하고 복원하면 영화제의 수도 자연스럽게 정상을 되찾을 수 있게 된다. 영화제가 복무해야 할 것은 두 가지 방향이다. 하나는 중국의 시장 의존도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시장을 개발해야 하는데 6억 5000만 명에 이르는 아세안(ASEAN) 10개국 만한 곳이 없다. 전 정부의 新남방정책은 윤석열 정부 들어 가차 없이 폐기됐다. 영화계 입장에서 보면, 실로 한심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복무해야 할 두 번째 방향은 철저하게 지역화하고 소규모화 하라는 것이다. 전국 단위의 영화제는 부산과 전주, 부천 정도로 됐다. 다른 영화제들은 공연히 ‘국제’ 소리 붙이며 몸집만 키울 필요가 없다. 과도한 욕망이다. 지역에 맞는 콘셉트로 지역 축제로 만들어 내되 콘셉트도 특색 있게 좁힐 필요가 있다. 날자도 줄이고 편수도 줄여서 예산 역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맞다. 수십 억을 들인다 한들 스태프들 월급은 거의 최저 수준을 밑돌 때가 많다. 그건 실로 괴이한 일이다. 하여 영화제를 만들겠다고 하는 단체장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 정말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한편으로는 현재 영화제를 없애겠다고 발 벗고 나서 있는 시장이나 군수, 혹은 시의회 의원들에게 묻고 싶다. 우리가 그렇게 만만하다고 생각하는가? 하기사 대통령이 EU가 아니라 NATO에 가서 경제실리외교를 하고 돌아오겠다고 하는 현실이니. 실로 자괴스러운 나날이다. 할 말이 없다.
공기업 6월은 인사철이다. 상반기 퇴직일정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느라 각종 모임마다 작별인사가 이어가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몇 년간은 베이비부머들이 대거 빠져나가느라 떠들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올해 퇴직인사 자리는 분위기가 조금 독특하다. 아무도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없다. 떠나는 사람이야 아쉬움에 그렇다 치더라도 분위기메이커가 되어야 할 후배들마저 자뭇 심각하다. 정권이 바뀌면서 철도공사는 정부 지분매각이라는 이름으로 민영화망령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정권발 노동시간을 92시간으로 연장하느니 마느니하는 소리도 들린다. 이러니 후배들은 “또 얼마를 싸워야 할지..”라며 떠나는 선배들을 외려 부러워하기도 하는데.. 일전에도 적은 바 있지만 철도기관사 입장에서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폭주기관차”라는 말이다. 거대한 중량과 힘을 가진 기관차가 폭주한다면 어떤 참사가 벌어질지 잘 아는 입장에서 꿈에라도 떠올리기 싫은 말이다. 그런데 두 달된 윤석열 정권을 보노라면 이 끔찍한 단어가 떠오른다. 인플레와 불경기로 허리가 휘는 국민들은 뒷전이고 요직이란 요직은 죄다 검사출신 측근으로 채우며 세간을 경악케 했다. 이 정도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국방부청사와 공관을 빼앗곤 4성장군 7명을 임기와 상관없이 한꺼번에 옷을 벗겼다. 국정원 1급 27명을 전원 대기발령시키고, 경찰고위직 인사를 화투패 뒤집듯 뒤집어놓곤 되려 ‘국기문란’이라 거품을 물었다. 거기다 부동산이건 세금이건 죄다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만 매일 땡윤뉴스로 흘러나오니 국민들은 폭주기관차를 마주하는 심정이 아닐 수 없다. 작금의 폭주기관차 같은 윤석열 정권이 더욱 무서운 것은 공동체의 제어장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현실 때문이다. 권력의 폭주를 제어하는 장치는 언론과 야당이다. 돌아보라. 지금 대한민국에 참언론이 있는가? 제대로 된 야당이 존재하는가? 눈이 먼 탓인지 나는 찾아볼 수 없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권이 인사후보자만 내놓으면 코드인사니 보은인사니 하면서 씹어대던 언론들은 역대급 참사에 가까운 현 정권의 인사에 대해선 꿀먹은 벙어리다. 속칭 김학의동영상을 보고도 김학의를 몰라보고 선배를 선배라 부르지 못하던 홍길동 검사들의 안구질환이 언론에 집단으로 전염된 듯하다. 대한민국3대천재 중 하나로 놀림받는 한동훈 장관의 딸과 나경원의 아들이 모두 무혐의를 받아도 어느 언론도 조국 전 장관의 딸과 비교해 문제를 제기하진 않는다. 야당은 또 어떤가? 당권이란 잿밥에만 눈이 멀어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 누구는 당대표에 나오지마라며 떼거지로 아우성이니 살다살다 출사표는 들어봤어도 ‘출사저지표’는 또 처음이다. 당선가능성 1도 없는 사람이 이재명이 당대표가 되면 당이 깨질 것이라며 내가 안나갈테니 너도 나오지 말란다. 팬도 없는 정치인이 자기 당 팬덤을 능멸한다. 부끄러움이 없다. 이러니 코미디프로가 폐지되고도 남는다. 대한민국에 예고된 위기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철도에는 폭주기관차를 막기위한 방편으로 탈선전철기라는 장치가 있다. 통제 없이는 절대 진입하지 말아야 할 구간에 실수로라도 진입할 경우 무조건 탈선하는 방향으로 진로를 잡아놓은 선로전환기를 말한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서는 안 될 길로 밀고 들어가는 폭주정권에게 탈선전철기 역할을 해온 것은 시민사회였다. 제어장치가 마비된 위기의 대한민국에 시민사회가 최후의 보루로 또다시 탈선전철기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기를 바란다. 지금이라도 언론과 민주당만 정신차리면 된다.
시절 참 수상하다. 국내외 험한 정세는 끝내 죄없는 민초들을 희생시키고 미봉될 것이다. 나는 지금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이 나라와 함께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저 악몽이었으면 좋겠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이를 어째야 하나. 이렇게 걱정이 태산일 때, 나는 종종 안전하고 편안한 은신처를 찾아 찐하게 의존한다. 오늘은 그곳에 관한 이야기다. 거기서 벗들과 측은지심으로 동병상련한다. 한 친구가 불안한 미래를 높은 통찰력으로 예언하면 착하게 받아들인다. 이 진지한 실용주의의 시간은 한 사내가 두부김치에 막걸리 서너 병을 시키면서 이내 막을 내린다. 침울의 그늘이 사라지고 순식간에 활기를 띤다. 술은 다정하고 똑똑한 친구들 보다 늘 곱절로 유력하고 우호적인 물질인 것이다. 오죽하면 서양의 멋쟁이들이 술을 '스피릿'이라 했겠는가. 번역하면 '술은 올바른 정신(spirit)을 일깨워주는 실로 큰 친구, 대붕(大朋)'쯤일 거다. 실은, 이 정도는 세상의 모든 술집에서 가능한 체험이다. 인사동 주점에서 그 기본 미덕에 더하여 매번 특별한 감동과 기쁨을 주는 까페가 하나 있다. 후배들이 '서정춘이라는 시인'이라는 시집을 헌정한 그 시인이 홍보부장이다. 문화공간 '시/가/연(詩歌演)'. 거기에는 항상 시와 노래, 공연이 있다. 우정과 환대가 있다. 시인 김영희와 건축가로 소리시인(시낭송가) 이춘우는 짝꿍이다. 이 집 주인이다. 40명쯤 앉을 수 있는 공간에 무대와 피아노까지 다 갖춰 놓았다. 손님 중 누구든 나머지를 관객으로 하여 시낭송, 연주, 노래를 할 수 있다. 나도 취하여 이 무대에 올라 이백의 '장진주'(將進酒)를 암송하고 '남도의 비'를 불렀다. 소설 '옥봉'의 저자인 장정희 선생과 함께 한 곳도 여기였다. 우리말 지킴이 故 외솔 최현배 선생의 장남은 최영해 정음사 대표고 그 아들이 최동식 고려대 화공과 교수다. 시/가/연은 최영해/최동식 부자의 제사를 모셔 왔다. 정음사는 윤동주 시집 초판본을 낸 출판사로 유명하다. 故 이창년 시인의 제사도 지낸다. 각박한 인생살이의 어느 지점에서 만난 타인들에게 이렇게 뭉클하게 예를 다하는 건 이 부부의 품격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이생진, 임보 등 걸출한 시인들과 박찬일, 서봉석 시인 등이 시가연에서 시창작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각각 운영한다. 또 우리가곡 부르기는 손종렬 단장, 영화모임은 최명우 교수, 판소리 모임은 이규호 교수가 이끌고 있다. 임진택, 김명곤 등도 이 무대에 섰다. 지난 주 안주인의 초대를 받고 갔다. 국내 현역 최고령(97세) 성악가 테너 홍운표 선생과 17세 바리톤 박원일군의 80년 세월을 무색하게 만든 공연이었다. 놀라웠다. 바리톤 원영재(80세), 바리톤 양태갑 선생과 이경혜 교수(75세) 등이 함께 하여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팬데믹으로 억눌렸던 문화감성이 폭죽이 된 거였다. 그 무렵 또 다른 날, 동국대 불교학과 박경준 교수, 울산대 건축과 김선범 교수, 관동대 환경학과 김영덕 교수와 함께 했다. 모두 70대 초반의 명예교수들인데 50대 청춘의 안색에 연주와 노래는 프로에 가까웠다. 한참 아래인 나는 그 틈에 끼어 모처럼 유쾌했다. 전공도 다른 그들은 시가연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다 한다. 전설의 운동가요 '직녀에게'는 박교수의 동생 박문옥이 작곡한 걸 그날 알았다. 이별이 너무 길다. 그래서 슬픔도 너무 길다. 그래서 우리는 만나야 한다. 시가연은 이처럼 날짜와 요일을 달리하여 열 개의 학교로 가동된다. 손님은 자동으로 관객이 되고 수줍음만 떨쳐내면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주객 구분 없이 함께 즐긴다. 이곳 벽면에는 수천 권의 시집이 꽂혀 있다. 이들의 가슴은 따숩고 넓다. 머리는 옳다. 이 멋으로 코로나도 이겼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이생진 시인(94세)은 '섬의 시인'답게 특구 인사동을 '인사島'로 개칭한다. 대한민국을 서울로 줄이면 인사동은 제주도격이라는 것. 시가연은 '인사도'의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가/연! 실로 희귀하고 소중한 문화예술공간이다.
김동연 경기도지사 당선인이 도지사 비서실장을 도청 내부 공모를 통해 선발하겠다고 밝혀 눈길을 끈다. 민선 경기도정 사상 처음으로 보이는 행보에 도민들의 관심이 쓸리고 있다. 김 당선인은 최근 자신의 SNS를 통해 “경기도청 공직자들을 깊이 신뢰하고 있다. 선거캠프에서 함께했던 분이 아니라 도에서 근무하는 일반직 공무원 중에서 공모를 통해 비서실장을 선발하겠다”고 밝혔다. 김 당선인은 “경기도지사 비서실장은 중요한 자리다.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도 캠프 비서실장들은 후보의 대리인 역할을 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면서 “이제 도정을 맡게 되면서 도지사 비서실장에 맞는 역량, 도정에 대한 이해, 저와 함께 도민을 위해 헌신할 자세를 갖춘 비서실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당선인은 앞으로도 도정과 도의 인사에서도 ‘유쾌한 반..
너무도 감미롭고 포근한 클래식 음악. 단연 타이스(Thaïs)의 명상곡이다. 멜로디를 들으면 천상의 세계, 평온의 세계에서 스르르 잠들 것만 같다. 이 곡은 쥘 마스네(Jules Massenet)의 걸작이다. 19세기말 프랑스 오페라계를 풍미한 마스네. 그는 이 곡 외에 마농, 베르테르 같은 굵직한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우리에게 낯익은 곡은 타이스 2막의 ‘명상곡’이다. 각종 광고와 김연아 선수의 갈라쇼를 환상적으로 수놓은 배경음악, 그게 바로 이 곡이다. 타이스. 이집트의 창녀다. 아나톨 프랑스가 쓴 소설을 루이 갈레가 각색했고 마스네가 오페라로 만들었다. “수도사 아타나엘은 유명한 창녀 타이스를 개종시키려 갖은 노력을 다한다. 타이스는 마침내 크리스천이 되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 칩거한다. 그러나 아타나엘은 자신이 집착해 왔던 건 관능미 넘치는 타이스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하지만 타이스는 속죄의 기쁨 속에서 죽음을 맞고 아타나엘은 신심을 잃은 채 절망한다.” 인간의 위험하고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다. 인간본능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19세기 대중은 이를 무척 불편해 했다. 타이스가 첨에 흥행에 실패한 이유다. 시대의 선봉장 마스네. 그는 분명 천부적 재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의 성공비결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는 어김없이 아침 5시에 일어나 정오까지 골방에 틀어박혀 작업을 했다. 그 덕에 프랑스 무대를 일찍이 독점했다. 서른한 살에 ‘대고모(Grand-tante)’로 명성을 얻었고, 서른여섯 살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서른일곱 살에는 파리 음악원 교수가 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의 끝없는 여행도 성공비결 이었다. 1842년 프랑스 남부 생테티엔에서 태어난 그. 여섯 살에 파리로 이사했지만 10대부터 작곡지를 옮겨 다녔다. 보르도를 여행하며 타이스를 작곡했고, 아봉(Avon)에 머물며 주옥같은 페드로 서곡과 라호르왕, 그리고 알자스 희곡을 작곡했다. 마스네는 스물네 살 때 루이즈와 아봉의 생 피에르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거리 64번지에 있는 장모님 댁에 머물렀다. 그 후 이곳에 자주 들렀고 중년이 되면서는 아예 집을 한 채 사 11년간 머물렀다. 아봉은 마스네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파리에서 60킬로 떨어진 센 강 좌안에 위치한 이 마을은 원래 원예밭으로 꽉 차 있었다. 남서쪽 3.5킬로 지점에는 루이 14세가 만든 환상의 퐁텐블뢰(Fontainebleau) 성이 있다. 르네상스 양식의 이 성은 초록의 녹지인 숲으로 둘러싸여 고요하기 그지없고 새소리만 들린다. 경치가 빼어나 모네, 르누아르, 시슬레, 삼총사가 자주 이곳에 들러 그림을 그렸다. 이런 분위기는 아직도 남아 있다. 파리에 출장이나 여행을 간다면 이곳을 찾아가 봐라. 파리 리옹역에서 열차로 18분이면 족하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세계의 수도 파리 곁에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김동연 경기도지사 당선인이 발달장애인과 가족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15일 수원역 지하 1층에 마련된 발달·중증장애인 참사 경기도 분향소에서 발달장애인 가족들과 만난 자리에서다. “혼자가 아니고 경기도에서부터 같이 한다는 것을 꼭 보여드릴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꼼꼼하게 발달장애인 대책을 챙기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말 기준 우리나라 전체 발달장애인은 25만5207명으로 전체 등록 장애인의 9.6%였다. 그 가운데 경기도 내 발달장애인 수는 우리나라 발달장애인의 21.9%에 달했다. 가족 중에 발달장애인이 있으면 그들의 삶은 무너진다. 우리나라 발달장애인 가족들은 한계에 처해 있지만 제도 밖의 문제여서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절망을 견디다 못해 급기야는 소중한 목숨까..
1959년 시카고대학의 찰스 라이트 밀즈(C. W. Mills. 1916∼1962)가 쓴 『파워엘리트(Power Elite)』는 출간과 동시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관료집단과 군수업자 그리고 군부 등 세 집단이 삼위일체가 되어 미국의 주요한 정책결정을 내리니 이들을 ‘파워엘리트’라고 하였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세 집단은 이해관계를 같이하며 공동목적을 향해 공동전선을 형성하고 나머지 미국인들을 이에 추종케 한다고 주장했다. 밀즈는 이같은 미국 사회는 결코 다양한 여러 집단 간의 유화(宥和)가 이루어지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맹비난을 하였다. 밀즈에 의하면 미국 사회는 결코 기회의 나라도 아니고, 다양성의 나라도 아닌 것이다. 권력은 항상 그들 파워엘리트들에 주어져 있고 그들은 전가의 보도처럼 그것을 행사해 미국을 점차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 국가로 만들고 있다고 외쳤다. 사람들은 그를 분노의 사회학자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이런 별명을 얻기에는 파워엘리트의 전횡만을 고발해서가 아니었다. 어쩌면 밀즈를 가장 분노케 한 것은 권력이 대물림되고 있는 미국 사회였을 것이다. 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파워엘리트의 권력과 부 그리고 지위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식들에게로 승계되는 비율이 증가해 1950년의 파워엘리트의 자리는 이미 68%가 이전 세대의 파워엘리트의 자녀들에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 21세기의 미국 사회는 어떨까? 이미 권력과 부의 대물림은 확고부동한 사실이 되었고 이제는 2대가 아니라 몇 대를 이어서 쓰고도 남을 만큼의 힘이 계승되고 있지 않을까. 밀즈의 분석을 우리 사회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 전통적으로 문벌과 학벌을 따지는 우리는 미국보다 몇 배는 더 심할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이제 먼 옛날의 이야기다. 커다란 변동 없는 재벌 그룹과 2세 정치인들의 등장 그리고 전문직 영역에서의 대물림 등등 그 증거는 차고도 넘친다. 특히 패자부활전이 없는 우리 사회는 학벌이 평생을 보장하는 구조이다 보니 부모는 자녀들의 대학입학에 목숨(?)을 건다. 최근에는 글로벌 엘리트를 지향한다. 한때 자녀에게 탄생 선물로 미국 국적을 주기 위한 원정 출산이 유행이더니 이제는 까다로워진 규제를 피해 미국의 주요 대학의 입학으로 목표를 바꾼 듯하다. 어차피 미국 국적이든 미국 학위든 다 국내용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달리 평소 생활에서의 스펙을 중요하게 여기는 미국 대학입학을 위해 중고등학교부터 스펙 조작에 몰두한다. 논문표절은 기본이고 대필작가의 등장에 대리 앱 제작, 미리 확정해 놓은 봉사활동까지 수법도 다양하다. 이미 30대 대기업의 사내이사 38%가 외국대 출신이고 윤석열 정부의 장관 59%도 국외 석박사 출신이다. 그들만의 스카이캐슬은 오래된 이야기였는데 멍청한 나만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알았더라도 해줄 능력 없는 부모이니 자식들에게 면이 안 서게 되었다. 참, 넘겨줄 권력이나 부도 없으면서 괜한 걱정인가.
며칠 전 얼굴에 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는데 어떤 환자가 큰 소리로 의사를 타박하고 있었다.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었으나 치료결과에 대해 따지는 게 분명했다. 의사는 난감해하며 무언가 설명하려고 했고, 환자는 말을 자르며 책임을 추궁했다. 의사의 명령에 환자가 순한 양이 되어 복종하는 일반적인 풍경과는 정반대여서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지내는 의사들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설명하면서 특수한 사례인지 물어보았다.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일반적인 일이라고 대답을 했다. 의사가 갑이었던 시절은 끝났고, 갑을관계가 바뀌고 있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 현상이 빚어졌는지 묻지 않았다. 변화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의사와 환자의 뒤바뀐 관계는 분당 글쓰기 교실에서 강의했을 때 있었던 일을 떠오르게 한다. 대령 출신의 중년 남성이 수강을 했는데 그는 병사들에 대해서 전혀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이즈음 병사들은 지휘관들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단다. 그러나 지휘관들이 모범을 보이거나 합리적으로 설명을 하면 병사들이 예전 못지않게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병사들을 나약하다고 본 우리들의 편견을 깨기에 충분한 증언일 것이다. 학교에서 교사들의 명령을 무조건적으로 받들어야만 했고, 어길 경우 심한 체벌을 받았던 시절에는 입대해서도 닮은꼴인 군대에 대해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어디 그 뿐인가? 교도소는 물론이고 병원과 관공서 등 숱한 곳에서 개인은 억압의 피동체일 뿐이었다. 철저하게 길들여져 닫힌 사회에 걸맞는 핏기 없는 사람으로 전락해갔던 것이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교도소 등 공적 기관이 인간을 어떻게 체제내적 인간으로 훈육하는지 역사적 사례를 통해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이 보고를 통해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모습을 유추해 보아도 손색이 없다. 그만큼 한국 사회는 전근대와 근대, 현대가 뒤죽박죽 뒤섞여 있는 것이다. 집권당인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 대표가 최근에 군인들의 군 기강이 빠져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도 권 대표의 말에 동의할지 모른다. 현대 사회에 맞는 군대에 대한 고민이 없는 이 생각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현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아픈 반증일 것이다. 1912년에 발표된 토마스만의 중편소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은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 배경인 자유로운 시민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물론 그 사회는 자본주의가 독점 단계로 이행해 인간 소외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렇다 해도 현대라는 관점에서 보면 1백 년 전인 그 사회가 지금 우리 사회보다 뒤떨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가운데 위에서 예로 든 것처럼 전근대와 근대적 풍경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변화의 주인공들은 그 누구도 아닌 피동체였던 개인들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역사적 진전이 관념이 아니라면 이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언론에 대한 시민의 신뢰가 바닥 수준이라는 한탄은 새롭지 않게 들린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영국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매년 발행하는 ‘디지털 뉴스리포트’ 뉴스 신뢰도 평가에서 최하위 혹은 꼴찌 수준이라는 평가를 종종 듣기 때문이다. 한국은 46개 국가 중에 2021년 38위, 2022년 올해는 40위라는 결과를 받았다. 뉴스 전반에 대한 신뢰 하락은 전 세계적인 경향이다. 2021년 평균 44%였던 신뢰도 수준은 일 년 사이 42%로 낮아졌다. 뉴스리포트는 코로나 영향을 지목했다. 다른 정보원에 비해 공신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언론사 뉴스에 대한 신뢰가 상승했었다가, 코로나 상황이 안정되니까 팬데믹 이전으로 회귀하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진단했다. 한국은 뉴스 전반에 대한 신뢰가 30%로, 글로벌 평균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렇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