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수'검색결과
상세검색이맘때면 중국 서북쪽 사막에서 재미난 경기가 벌어진다. 12팀의 말 탄 남자들이 사막의 하얀 모래먼지를 뒤집어쓰고 무언가를 빼앗기 위해 격렬히 싸운다. 마지막 승리의 손이 쟁취한 것을 농구골대처럼 생긴 골망에 던지면 경기 끝. 쟁취물의 정체를 알게 되면 웃음이 슬몃 올라온다. 양가죽 한 장. 위구르족이 사막에서 늑대 쫓던 일에서 만들어진 경기란다. AI가 인간을 대체하느니, 하는 금속성 뉴스가 천지인 요즘, 멀지 않은 곳에 ‘사막에서 말 달리며 양가죽 뺏기 경기’를 하는 땅이 아직 남아있다니, 거짓말 같다. 위구르족만의 전래 음악 ‘무카무’도 사막 냄새, 사람 냄새 가득하다. 이 땅이 중국이 아니었던, 먼 옛날 16세기 초, 야르칸트 왕국의 왕 ‘압둘 루시타’는 백성들의 삶을 알아보기 위해 잠행에 나섰다가, 거리에서 아름다운 소녀 아마니사한을 보고 한 눈에 반한다. 왕궁에 데려와 왕비를 삼고,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게 해준다. 음악을 좋아했던 아마니사한은 거리를 떠돌던 서민들의 노래와 춤, ‘무카무’를 왕궁에 들여 ‘12 무카무’로 집대성한다. (세종대왕이 종묘제례악을 정비한 것을 떠올리면 되겠다) 고되고 외로운 사막살이의 한이 절절이 밴 목소리와 ‘그래도 살아 보겠다’는 의지로, 세상의 모든 꽃이 한꺼번에 핀 것 같이 화려한 춤으로 장식한 무대의 무카무. 내게 위구르족은 무카무다. 댜오양과 무카무의 땅은 현재 중국에 속해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되었다. ‘민족과 언어, 종교와 문화가 다른 우리를 독립시켜 달라!’며 약 200년간 투쟁해온 위구르족은 중국 입장에서는 티베트보다 더 골치 아픈 족속이다. 비폭력 독립운동을 해온 티벳과 달리 위구르족과의 분쟁은 피비린내 가득했다. 이 불행한 동거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일까. 기원전부터 유목민들이 살았던 이 땅을, 6세기 중엽엔 동돌궐이, (8세기 중엽 위구르 제국이 잠깐 세워지긴 했으나) 9세기 중엽에는 키르키족이, 10세기 이후는 몽골족이, 17세기 이후에 준가르 칸국이 차례로 점령한다. (중국) 청나라가 쳐들어온 때는 1755년. 청나라는 이 점령지를 새로운 영토라는 뜻으로 ‘신장’이라 명한다. ‘신장 위구르’라는 이름은 그렇게 생겨났다. 위구르족은 독립투쟁을 꾸준히 시도해왔다. 청나라 멸망 후인 1911년, 소련의 지원을 받아 공산국가인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을 세우기도 했으나, 2차 대전 후 다시 중국의 손아귀로 넘어간다. 이들의 독립투쟁을 거세하기 위해 중국은, 위구르족 대다수인 이슬람교도를 박해하고 그들의 전통,문화를 말살해왔다 위구르족의 독립투쟁을 테러로 규정해 수만 명을 학살하고 100만 명을 구금하는 등, 21세기, 대명천지에 있을 수 없는 민족말살책을 저질러왔다. 최근 외신은, 중국이 핵 확장 실험을 시도한다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신장 위구르 자치구. 60년 전인 1964년, 이곳에서 핵실험을 강행해 위구르족의 심장을 폭파시킨 바 있었다. 유목민의 전설과 신비를 담아 내려온 댜오양과 무카무. 이 불모의 땅에서 숨 쉬며 명맥을 이을 수 있을 것인가. 어느 글에선가, 애달픈 가락과 현란한 춤이 어우러진 무카무의 무대를 보고 ‘화려한 슬픔’이라했던 것이 갑자기 사무친다.
스무 해도 넘은 일이다. 한 달 넘게 인도를 배낭여행하며 경전처럼 지녔던 책이 있었다. 강석경의 인도기행. 소설가 강석경이 4개월간 인도 전국을 탐험한 내밀한 기록이었다. 책은 여행 내내 가이드가 되어주었다. 스리나가르를 간 것도 책 속, 한 구절 때문이었다. ‘ 인도에서 사랑하고 싶은 곳은 많았으나, 살고 싶은 곳은 단 한 곳, 스리나가르였다’ 그런데, 어쩔까. 인도 최북단, 스리나가르는 분쟁지역, 여행위험지역이었다. 영국 여성여행자가 군인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데, 작가도 갔다 오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살고 싶은 곳은 스리나가르 뿐’이라는 구절은 사선도 넘고 싶게 만드는 주술이었다. 설렘, 공포가 뒤섞인 감정으로 도착했다. 아아! 작가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피르판잘 설산을 병풍처럼 두른 거대한 달 호수(Dal Lake)! 그 위에 줄지어 떠있던 형형색색의 기이한, 하우스 보트들! 윤슬처럼 번지던 무슬림의 저녁 아잔 소리! 그 사이를 소금쟁이처럼 지나던 시카라 배의 상인들! 왜 무굴제국 황제들과 영국 고관대작들의 휴양지였는지 알겠다. 참말, 이 세상 같지 않은 정경이었다. 그 그림 같은 풍경을, 잘못된 붓질처럼 망쳐놓은 존재들이 있었으니 사방 어딜 가도 줄지어 선 군인들이었다. 8시 통금을 지키지 않으면 총 쏴 죽일 수도 있다던가. 이 환장하게 아름다운 땅에 누가, 왜 총 든 저들을 세운 것일까. 스리나가르가 속한 카슈미르(Kashmir) 지역은 한반도와 비슷한, 약 22만제곱킬로미터 크기의 인도, 파키스탄의 경계지역이다. 이 땅은 삼분 되어 인도, 파키스탄, 중국이 나눠가졌다.(인도령 잠무 카슈미르, 파키스탄령 아자드 카슈미르, 그리고 중국령 카슈미르) 카슈미르는 왜 분단됐는가? 인도와 파키스탄은 왜 싸우는가? 인도 파키스탄(그리고 인도 동쪽의 방글라데시까지)은 과거, 한 나라였다. 영국 식민지로 있다 1946년 독립하면서 힌두교를 믿는 인도와 이슬람을 믿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로 삼분된다. 문제는 인도가 거머쥔 잠무 카슈미르의 주민 대다수가 이슬람교도라는 것. 그들은 파키스탄에 속하기 원하지만 인도가 순순히 내줄리 없다. 그게 분쟁의 이유다. 독립 이후 세 차례나 전쟁을 치뤘지만 지금까지 해결난망으로 으르렁대고 있다. 인도- 파키스탄 분쟁이 두 나라만의 문제가 아닌 게, 둘 다 핵보유국이라는 것이다.(인도는 1974년, 파키스탄은 1998년) 서남아시아의 화약고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인도 영화 중 ‘카슈미르의 소녀’라는 것이 있다. 인도인 주인공 남자가 엄마 잃은 다섯 살, 파키스탄 소녀를 고향에 보내주는 과정을 그렸다. 남자가 소녀를 업고 가는 장면에서 이슬람 전통 노래, ‘카왈리(Qawwali)’가 나온다. ‘사랑기’라는 현악기, ‘하모니움’이라는 건반악기, ‘돌락’이라는 타악기를 든 연주자들이 가수와 함께 노래도 한다. 그 악기소리와 목소리에서 인더스 문명의 기름진 땅을 탐낸 숱한 제국의 침입에 피 흘렸던 민초들의 한과 히말라야와 사막, 바다를 품은 거대륙의 하모니가 느껴왔다. ‘카왈리’는 이슬람 신비주의 분파인 수피즘의 노래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북인도 힌두스타니 전통도 섞여있다. 노랫말도 파키스탄의 펀자브어와 인두의 힌디어, 페르시아어 등을 가리지 않고 썼다. 카왈리뿐인가. 1946년 이전, 두 나라는 문화,예술,관습...모든 것을 함께 하던 한민족이었다. 종교의 차이가 적국을 만들었다. 하긴, 남 얘기할 것 없다. 우리는 더하다. 이념이 차이로 금 긋고 못 만난 세월이 70년이니.
“드론은 안돼요. 중국 때문에” “아니, 인도 땅 위에 드론을 띄우겠다는데 왜 중국 눈치를 봐야 됩니까?” “우리가 눈치 보는 게 아니라 인도가 눈치 보고 있어서요” 무슨 이야기인가. 내년 여름, 히말라야 사막 퍼포먼스를 앞두고 예술가와 여행사 대표가 주고받은 이야기다. 동양화가, 대북주자, 현대무용가, 피아니스트 등 열 명 가까운 예술가들이 히말라야 여행을 가기로 했다. 2주간의 여행경로 중, 히말라야가 품은 사막이 포함된 것을 알고 예술가들은 흥분했다. 사막을 주제로 즉석 작품을 펼쳐보겠다는 것이다. 동양화가가 대북연주에 맞춰 먹 드로잉 쇼를 펼치면 현대무용가가 이를 춤으로 표현한다는 식. 상상만으로 흥이 넘친 대북주자가 공연 장면을 드론으로 촬영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붕 떴던 분위기가 동력 잃은 드론처럼 내려 앉은 것은 그 지점이다. 여행사 대표가 일언지하에 불가능하다고 한 것이다. 중국과 인도의 60년 분쟁사를 모르면 이해 못할 상황이었다. 중국과 인도의 싸움은 국경선 때문이다. 국경문제가 왜 생겼는가. 맥마흔 라인 때문이다. 맥마흔이 뭔가? 영국의 외교관 이름이다. 1914년, (인도를 식민지로 갖고 있던)영국과 (중화민국에서 독립상태이던)티베트, 중화민국등 삼자가 모여 맥마흔 라인을 정했다. 영국 외교관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이 국경선이 영국 주도로 그어졌고, 영국 식민지 인도에 유리하게 그어졌을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중국이 순순히 받아들였을 리 없다. ‘중국 땅 되기 전의 티벳하고 정한 국경선을 인정할 수 없다’며 분쟁지역인 동부의 아루나찰프라데시주와 북부의 악사이친 고원을 중국 영역으로 못박았다. 결국 1962년, 전쟁을 일으켜 국경분쟁을 더 키웠다. 핵 가진 두 대국의 싸움은 3차 대전의 우려를 낳기도 했다. 이 전쟁 후에도 크고 작은 분쟁은 계속 되었다. 2020년, 라다크에서 일어난 난투극으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 소모전을 해결하기 위해 양국은 지금까지 20차례 가까운 양국회담을 열었다. 그러나 합의점을 못 찾은 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 얼후와 인도 시타르의 협주를 볼 수 없는 것인가. 답도 끝도 안 보이는 양국의 국경분쟁을 지켜보며 ‘월드뮤직 전문가’로서 해온 생각이다. 나는 얼후 연주를 좋아한다. 중국 문화를 대표하는 ‘얼후’는 해금처럼 두개의 현에 활을 걸어 연주하나 굵고 거친 느낌의 해금과 달리 가늘고 맑은 소리를 낸다. 그 명징한 소리는 독주보다 협주 때 더 빛난다. 협주 악기 중에서도 동류인 현악기와 함께 할 때 더 멋들어진다. 그래서인지 유튜브의 얼후 협주는 대부분 현악기다.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동서양의 모든 현악기와의 협주를 감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인도를 대표하는 ‘시타르’ 와의 협주는 찾을 수가 없다. 시타르는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 라디오 헤드 등의 유명 그룹이 즐겨 연주해 세상 널리 알려졌고, 라비 상카라는 불후의 연주자 덕에 세계인이 사랑하는 악기가 되었다. 신비하고 몽환적인 시타르와 맑고 투명한 얼후의 하모니를 갈망해온 사람이 나뿐이었겠는가. 혹시 중국과 인도의 오랜 분쟁이 예술 문화에마저 국경선을 그어버린 것인가.
쿠르드족은 뉴스 속의 나라였다. ‘어린 소년들의 늙은 노래’를 듣기 전까지. 그 노래는, 개봉한지 10여년 지나 보게 된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2004년 개봉/바흐만 고바디감독)’이라는 영화에 나온다. 언론 속에서 접한 쿠르드족의 이미지는 어떠했던가. 메마른 산악지역의 전사, 독립을 위해 늘 분쟁 속에 사는 투사… 그런 모습들이었다. 그 이미지 속에 아이들은 없었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고아가 된 다섯 남매의 이야기다. 가난만 남은 집안에서 가장이 된 열두 살 맏이 아윱에게 학교는 사치고, 설상가상 죽을 병 걸린 동생을 위한 수술비 마련이 발등의 불이다. 어린 누나가 수술비를 보태려고 이라크 노인에게 신부로 팔려갔지만 돈을 받지 못한다. 아윱은 유일한 재산인 노새를 팔기 위해 밀수꾼들과 함께 이라크 국경을 넘는다. 제목의 ‘취한 말’을 은유로 생각했는데, ‘험산 넘는 노새가 한파에 쓰러질까봐 미리 술을 먹여 추위를 못 느끼게 하는 행위’에서 나온 말이었다. 삶이 곧 전쟁인 이 다섯 남매 입에서 나오는 노래가 고울 리 있겠는가? 그래도 그렇지. 트럭 뒤에 탄 아이들이 무심결에 부르는 민요 가사는 섬뜩했다. ‘인생이라는 놈은 나를 산과 계곡으로 떠돌게 하고 나이 들게 하면서 저승으로 이끄네’ 영화 속 삶, 노래 속 비탄은 쿠르드족의 현재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옥이다. 기원전 9세기, 말 다루는 신공으로 기세를 떨쳤던 서아시아의 강대국 메디아 왕국(현재의 이란 북서부 지역)의 후손이며 12세기 십자군 전쟁에서 영국 리처드 1세의 군대를 격퇴한 영웅 살라딘의 후예가 어쩌다 이렇게 나라 잃은 떠돌이들이 됐을까. 국가는 세우지 못했으나 중동의 요지, (지금의) 터키, 시리아, 이라크, 이란 접경의 산악지대에서 단일 언어, 단일 문화의 자부심을 갖고 살던 3000만 명 넘는 쿠르드족. 그들도 1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을 꿈꾸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지금의 터키)에 속했던 쿠르드족은 ‘독립국가를 만들어주겠다’는 영국 등 연합국의 꼬임에 넘어가 연합국의 적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싸운다. 그러나 약속한 땅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면서, 영국은 얼굴을 바꾸고 심지어 영국령 이라크로 만들어버린다.(이때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가 ‘아라비아의 로렌스’다) 2차 대전 이후에는 소련과 미국이 배턴을 넘겨받는다. 소련은 쿠르드족이 이란 북부에 ‘쿠르드 공화국’을 세우도록 돕더니, 막상 이란이 반격하자 모른 체 한다. 피바람만 불고 독립은 무산된다. 미국의 배신은 대하 드라마급이다. 1972년, 이란, 이라크 분쟁 때, 19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때, 2014년,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 때, 2019년, 시리아 내전 때, 독립의 약속을 믿고, 미국을 위해 전쟁 총알받이가 되어 싸운 쿠르드족에게 돌아온 것은 미국의 배신과 독립의 물거품이었다. 쿠르드족 오래된 속담, ‘산만 있고 친구는 없다’는 말이 역사의 예언처럼 들린다. 월드뮤직을 강의하면서 늘 안타깝게 느낀 것은 세계인들이 공감하고 좋아할 쿠르드족의 음악을 찾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음악을 통해 그들의 참상을 알리고 우리가 함께 할 길을 모색하고 싶은데 말이다.
음악이 없는 나라가 있을까. 노래 불렀다고, 악기를 연주했다고 죽임을 당하는 나라가 있을까. 21세기, 대명천지에 그런 나라가 존재한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통치 하에서 문인들은 책을 벽장 깊이 숨기고 화가들은 그림을 땅에 묻는다. 예술 학교는 폐쇄되고 음악인들은 고국을 탈출한다. 평생 노예인 이보다 불행한 이는 ‘자유의 맛을 본’ 노예라던가. 이슬람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에 한 때, 공산정권이 들어섰었고, 미군이 주도했다. 그때,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을 눌러, 국민들은 뜻밖의 자유를 구가했다. 그 경험이 지금의 고통을 더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탈레반은 누구인가. 중앙 아시아에 위치한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는 실크로드 역사와 맞물리며 전개되었다. 동서양 요충지라 숱한 강대국의 말발굽 아래 시달려야 했다. 아프가니스탄이 국가 모양새를 갖추고 역사에 등장한 것은 18세기 중반, ‘두라니 제국’이다. 제국은 100년도 안돼 망하고 이어 바라크자이족이 정권 잡은 ‘아프가니스탄 왕국’이 오늘날의 국경선을 만들었다. 제국주의 시대인 19세기와 20세기 초, 영국과 세 차례에 걸친 80년간의 전쟁으로 쇠락해가던 아프가니스탄은 70년대 이르러 소련의 영향으로 공산국가가 된다. 탈레반은 국민 대다수가 이슬람 교도인 나라에 공산주의를 강제 이식하는 과정에서 뿌려진 씨앗이다.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남녀차별 없는 공산이념과 사유재산을 인정하고(부자가 빈자에게 재산을 베푸는 선행을 장려한다) 여성보호란 명목으로 자유를 제한하는 이슬람 교리는 정면충돌한다. 1979년,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반정부주의자 소탕을 명목으로 침공한다. 미국이 이를 두고만 볼 리 없다. 당시는 서슬 퍼런 냉전시대. 미국은 소련과 싸우는 이슬람 세력에 무기 제공 등 경제 원조를 한다. 이슬람 세력의 끈질긴 저항과 미국의 원조로 소련은열세에 몰려, 침공 10년만인 1989년, 백기를 든다. 소련이 물러가고 미국이 손 놓아 혼란에 빠진 아프가니스탄에 구원자로 등장한 존재가 바로 탈레반. ‘탈레반’은 ‘학생’이란 뜻인데, 아프가니스탄 지방에서 이슬람 원리주의 공부하면서 성장한 학생들이 뭉쳐 만든 집단이었다. 탈레반은 1996년, 부패 정권을 뒤엎고 집권에 성공한다. 나 몰라라 하던 미국의 재등장은 2001년 발생한 9.11테러 사건 때문이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쳐들어가 숨은 테러 주동자, 알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라덴을 잡아내 사살한다. 분이 덜 풀린 미국은 테러 근절을 내세워 아프가니스탄에 눌러앉는다. 20년 가까이 주둔하던 미군은 ‘얻는 것 없이 돈이 너무 들어가잖아!’라는 트럼프의 한마디에 철수계획이 세워졌고 바이든 정부에 의해 2021년, 실행된다. 미군에 의존하던 무기력한 정권은 바로 탈레반에게 백기를 들고 정권을 넘긴다. 다시 탈레반 세상이 된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민속 악기 중, 깃작(ghichak)라는 현악기가 있다. 해금처럼 세워놓고 앉아서 켜는 악기인데 투박한 모양새, 애달픈 소리가 민초들의 것임을 느끼게 한다. 주술처럼, 아프가니스탄의 그 낯선 땅 한가운데로 훌쩍 데려가는 그 신묘한 소리가 사라져버리면 어쩌나. 2011년, 탈레반이 파괴해 사라진 바미안(Bamiyaan)석불처럼 말이다. 지난 여름, 탈레반이 ‘파와드 안다라비’라는 민요가수를, 깃작 연주를 계속한다는 이유로 살해했다는, 기막힌 뉴스를 접하고, 말 그대로 만감이 교차한다.
눈 먼 자만이 될 수 있었다. 현악기를 들고 마을을 돌며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다. 서사시를 읊고 옛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대부분 문맹이었고 통신수단이 없었던 옛날, 사람들은 이들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전쟁이 났다더라. 왕이 바뀌었다더라. 역병이 돈다더라...... 집시들의 삶만큼 원시적이고 낯설고 매혹적인 사람들. 그들끼리만 비밀리에 주고받던 언어가 있어 신비를 더하는 존재들. 이들은 우크라이나의 맹인 유랑 예술가로, ‘콥자’라 불렸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세월의 격변 속에서도 콥자를 예우하고 사랑했다. 글 배운 이들이 늘고 통신수단이 생기고 놀거리, 볼거리 넘치는 세상이 되어도 콥자를 기다렸다. ‘오직 사람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가 있기에. 그렇게 수 천 년 역사와 함께 해온 콥자들이 20세기를 만나면서 씨가 마르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기원 전후, 이란 계통의 스키타이인과 로마제국을 뒤흔든 고트족, 훈족이 잠시 살았던 이 땅에 뿌리내린 이들은 서기 6세기경에 나타난 슬라브인들이었다. 이들은 (오늘날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이우’라는 도시를 세워 우크라이나 역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13세기 침입한 몽골의 2세기에 걸친 지배 후, 14세기에는 리투아니아, 폴란드, 터키, 몰도바의 땅 따먹기 전쟁터가 되었고 16세기,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식민지가, 18세기 말에는 러시아 속국이 된다. 1927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우크라이나 역사상 최악의 시기를 겪게 된다. 스탈린의 공업화 정책은 유럽의 곡창지대라 불렸던 농업국 우크라이나를 엉망으로 만든다. 농민 대거도시이주, 곡물 강탈 등의 폭압정책으로 3백만 이상의 아사자를 냈다. 또 민족말상정책으로 글과 말을 빼앗고, 민족문화를 거세했다. 망나니 칼춤같은 정책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부류가 콥자들이었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이야기와 노래 등 전통을 전수하며 민족감정을 되살린다’는 이유로 무조건 잡아가 즉결처형시켰다. 안 그래도 현대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있던 콥자들의 씨가 말라갔다. 콥자가 부활한 것은 1990년 12월, 소련 해체로 우크라이나가 독립되면서다. 대학생들이 주축이 돼 ‘콥자’를 찾아 나섰다. 타국으로 도망갔거나 시골마을에 숨어 살거나 걸인이 된 콥자들을 한 명, 한 명 어렵게 찾아냈다. 콥자는 다시, 우크라이나의 상징과 정신으로 부활했다. 예술대학들은 콥자의 반두라를 가르치는 전공을 만들었고 콥자들의 연주는 거리뿐 아니라, 현대식 무대에서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유튜브에서도 반두라를 감상할 수 있는 시대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만이 비밀스레 주고받았던 언어, ‘레비카’가 비극적 역사의 격랑 속에 떠내려가버린 것. 소실된 것이다. 지금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서도 사랑을 하고 결혼식을 올리고 아이가 태어난다. 결혼식 중에 (콥자들만 연주하던)반두라 공연도 보인다. 우크라이나의 서러운 역사, 콥자들의 수난과 함께 현재 전쟁의 참상이 더해져 안 그래도 슬픈 반두라 소리가 사무치게 느껴진다.
‘코소보는 세르비아의 심장! 폭력을 멈춰주세요’ 테니스 세계 랭킹 2위의 수퍼스타, 노박 조코비치의 지난 5월의 발언에 발칸반도가 들썩였다. 코소보는 즉각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조코비치의 징계를 요구했다. 여기서 드는 의문, 조코비치의 고향은 코소보다. 그런데 왜 코소보의 적국(?), 세르비아 편을 든 걸까? 이 의문은 코소보 문제의 핵심을 품고 있다. 코소보 분쟁의 해결이 난망한 이유는 세르비아와 코소보, 양국의 입장과 주장이 좀처럼 만나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나라의 속내를 가상 토크로 꾸며보았다. 코소보 : 한 마디로 우리 코소보의 주장은 ‘우리를 독립국으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오!1980년 대 말, 발칸반도를 장악하던 유고슬라비아에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몬테네그로,마 케도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이 모두 독립했는데 왜 우리만 독립국으로 인정 하지 않는 거요? 세르비아 – 코소보 땅은 우리 세르비아인들에게 유대인의 예루살렘같은 곳이요. 우린 6세기부터 이 땅에 세르비아 왕국을 건설했고 중세 세르비아 정교회의 첫 번째 교구도 이곳 에 만들었소. 그뿐 아니지. 오스만 터키와 싸울 때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역사의 현장도 이곳이오. 한마디로 우리 세르비아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품은 땅이오. 조코비치 선수가 코소보를 “세르비아의 심장”이라고 말한 이유일거요. 코소보 – 배신자 조코비치! 아버지가 코소보인인데 자식놈이 세르비아를 편들고 있으니! 세르비아 – 정확히 말하면 코소보에 살던 세르비아인이었소. 코소보는 세르비아 땅인데 알바니아 놈들이 숫적으로 우세하다고 몇 안되는 세르비아인을 못살게 굴어왔잖소! 코소보 – 그러니까 독립하겠다는 거요!. 우리 코소보에 세르비아인은 고작 2%밖에 안되오.. 알바니아인이 94%고 종교도 이슬람이 95%요. 세르비아인들이 믿는 정교회 신자는 3.5%요. 민족과 종교가 세르비아와 너무 다르다는 말이요. 그래서 세계 모든 나라가 코소보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있잖소. 세르비아 – 그 입 다물라. 그리스, 슬로바키아, 스페인, 불가리아, 루마니아, 키프로스는 우리 편일걸? 러시아와 중국은 확실히 우리 편이지. 코소보 – 우리를 우크라이나 꼴로 만들고 싶소? 러시아가 지금 하고 있는 짓처럼? 25년 전, 소위 ‘코소보 전쟁’이라고, 당신네 세르비아와 싸워 민간인 1만 3000명이 죽고 3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한 비극을 되풀이해야겠소? 세르비아 – 독립하겠다고 나서지 않으면 전쟁은 없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코소보는 우리 세르비아의 자치주’요! 코소보 –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코소보 전쟁 중의 소수민족 박해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가장 피해가 컸던 이들은 집시였다. 600만명 추산되는 집시의 반이 발칸반도에 살고 있는데, 코소보 땅의 집시들은 전쟁 중에는 세르비아에 이용 당하고 전쟁 후에는 코소보 안, 알바니아인들의 보복대상이 돼 살해, 폭행 등 만행을 당했다. 지금 코소보 땅에서는 집시들의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피묻은 1500개 소뼈 더미 위에 흰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앉아있다. 소뼈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닦고 있는 그녀의 입에서 끊임없이 유고슬라비아의 민요가 흘러나온다. 흰 드레스의 여인은 세르비아의 행위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이고 이 작품은 1997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장을 거머쥔, ‘발칸 바로크(Balkan Baroque)’. 4일간 이뤄진 이 퍼포먼스는 90년대 발칸반도의 보스니아 내전 학살을 고발하는 행위였다. 그 충격적 퍼포먼스와 함께 기억에 남은 그녀의 인터뷰. “내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을 때 ‘세르비아인’이라고 말하지 않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세르비아인이면서 세르비아인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단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나라는 어디일까. 소뼈를 닦으며 부른 노래를 주목한다. 유고슬라비아 민요. 지구상에서 사라진 나라 유고슬라비아. 백년도 못 채우고 사라진 유고슬라비아의 흥망사는 발칸반도 비극의 상징이다. 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신생국가들이 생겨난다. 발칸반도에서는 세르비아가 주도권을 잡아 이웃나라들을 흡수, 연합국을 세우는데 그 이름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이었다. 이 신생 왕국은 독일 나치가 일으킨 2차 대전으로 공중분해된다. 당연지사,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백성들은 나라를 되찾겠다고 파르티잔이 되어 맹렬히 싸우는데, 대표적인 수장은 세르비아 출신의 ‘요시모토 티토’였다. 결국 소련의 도움을 받아 나치를 몰아낸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인민 연방 공화국’의 대통령이 된다. 티토는 공산주의자였지만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기를 거부하고 서방과 외교 길을 트는 등 중립노선을 견지, 유고슬라비아를 동유럽의 강국으로 만든다. 문제는 1980년 티토의 사후에 벌어진다. 1984년, 대통령이 된 슬로보단 밀로세비치는 공화국들의 독립 움직임을 무력으로 진압하며 내전의 불씨를 만든다. 1989년, 동유럽의 공산정권의 붕괴는 불에 기름 부은 격이 되었다. 1990년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등의 줄이은 연방 탈퇴와 독립 선언, 이를 막으려는 (세르비아가 주도한)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군대 투입으로 인한 내전으로 발칸반도는 살육의 땅이 된다. 슬로베니아 내전, 크로아티아 내전, 보스니아 내전(3년 8개월에 걸친 내전으로 30만 명이 학살되고 220만 명의 난민이 발생), 코소보 자치주 내전(8600명 사망, 100만 명의 난민 발생)등. ‘발칸의 화약고’라는 말이 나온 것이 이해된다. 결국 내전 끝에 공화국들은 줄줄이 독립해 나가고 세르비아는 하나 남은 몬테네그로와 신유고연방을 만들지만 2006년, 몬테네그로마저 독립해버린다.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 거대한 나라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현대 발칸반도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알바니아, 그리스등 9개 국가를 품고 있다, 라고 끝내는 순간, 예상되는 질문이 있다. “코소보 공화국은 왜 빠진 거요?” 코소보 문제는 현재 발칸을 화약고로 만드는 가장 큰 불씨다. 코소보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발칸의 미래를 말할 수 없다. (3부에서 계속)
2년 전쯤 들은 아름다운 이야기. 무대는 세르비아의 군용 무기 고물상이다. ‘니콜라 막수라’라는 한 예술가가, 매주 이곳을 방문해 예술 재료를 찾는다. 고물 무기더미에서 예술재료? 그것도, 가급적 전쟁의 최일선에 섰던 무기들, 또 가급적 전장의 핏자국이 얼룩진(물론 은유다. 살상무기를 선호한다는 뜻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무기들을 고른다. 그 섬뜩한 살인무기들은 이 예술가의 손을 통해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로 탈바꿈한다. 이를테면 M70소총과 군용 헬멧으로 만든 기타, 바주카포와 군용 가스통으로 만든 첼로, 탱크로 만든 타악기.......등이다. 막수라의 꿈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참전용사들로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연주하고 싶습니다.” ‘처치 못해 쌓여있는 무기 고물더미’는 세르비아의 상흔을 말해준다. 그 ‘상흔’이란 유고슬라비아 분열 과정에서 발생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상처일 것이다. 세르비아 얘기 나오다 갑자기 왜 유고슬라비아? 라고 묻는 이들도 있을 듯 하다. MZ세대 중에는, 지구상에서 사라진 유고슬라비아란 국명이 금시초문인 이들도 있을 듯 하고. 요즘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음울한 지구촌에 세르비아-코스보 사이의 전운이 연일 토픽이던데, 이를 보고 ‘그런데, 둘이 왜 싸워?’하는 이들도 있지 않을까. 이해한다. 이들 나라이름이 속한 발칸반도의 역사는 머리 아프다. 산악지대 많아 복잡한 지형처럼 민족도, 종교도, 이해관계도 보통 복잡한 게 아니다. 제대로 설명하려면, 위에 언급한 나라 말고도 (사라진)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속했던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북마케도니아 등의 이름도 끌어내야 한다. 들여다볼수록 (풀고 풀다 확 가위로 끊고 싶은) 엉킨 실타래 같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월드뮤직을 소개하려면, 집시의 영혼을 품은 땅 발칸반도를 지나칠 수는 없으니. 한 번에 못 끝내고 2회에 나눠 소개하는 이유다. 발칸 반도는 기원전 일리안족이 살고 있던 땅으로, 5세기 이후, 훈족의 서방 침략을 피해 남하한 슬라브인들이 대거 내려와 살게 된다. 이 땅을 여러 강국의 혓바닥이 끊임없이 핥고 지나간다. 3세기의 로마, 5세기-9세기의 아시아계 유목민 아바르족, 13세기의 몽골 타타르족......그리고 16세기의 오스만 튀르크는 무려 400년간 이 땅을 지배한다. (‘발칸’은 ‘산’이라는 뜻의 오스만 튀르크어로,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에 걸쳐있는 발칸 산맥 이남 지역을 이르는 지명이었다. 19세기 이후에 반도 전체를 부르게 된다) 그러다 20세기 초,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에 맞선 발칸 전쟁으로 승기를 잡는다. 그리고 슬라브 민족을 통합하겠다는 야욕을 품는데 이는 발칸반도 안의 소국들을 범슬라브 주의로 묶어 통치하겠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강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발칸반도 안의 보스니아를 점령해버린다.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암살한 사건 배경이다. 이 사건이 세계 1차 대전을 촉발시켰다. 이후 발칸반도의 100년 역사는 롤러코스터를 탄다. (2부에 계속)
세계에는 재미난 대회들이 많다. 핀란드의 ‘아내 업고 달리기 대회’, 호주의 ‘참치 멀리 던지기 대회’ , 독일의 ‘오피스 체어 레이스(사무실 바퀴의자 달리기 대회)와 익스트림 다림질 대회(수중 다림질, 절벽 다림질, 번지점프 다림질 등), 뉴질랜드의 ’어린이 대상, 길고양이 사냥대회‘ 등이 그 예다. 우리나라 ’멍 때리기 대회‘도 집어넣을 수 있을 듯 하고. 별나기로 최고인 듯싶은 대회는 슬로바키아의 ‘무덤 파기 대회’다. 지난 2016년, 장례 산업 발전을 위해 장례업체 직원을 대상으로 시작됐다. 대회 규칙을 보면, 2인 1조를 이룰 것, 오직 삽과 곡괭이만 사용할 것, 무덤은 길이 200cm, 깊이 150cm, 폭 90cm의 규격을 맞출 것 등. 심사는 정확도, 스피드, 그리고 아름다움으로 평가하는데, ‘아름다움’은 ‘얼마나 예쁘게 팠는가’를 본다고 한다. 이 이색행사 이야기를 듣다보면, 죽음이 멀고 두렵게 느껴지지만은 않다. 슬로바키아 여행하면 공동묘지가 마을에 속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풍경이 이 대회와 겹쳐 떠오른다. 죽음을 삶 가까이에 둔 슬로바키아 문화는 주변 강대국의 끊임없는 침탈로 피얼룩진 과거사와 유관할 듯싶다. 그 오욕의 역사 속, 국명은 슬로바키아가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였다. 1993년, 무혈혁명인 벨벳혁명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뉘기까지 한 몸이었다는 이야기다. 체코슬로바키아는 AD 10세기 이래, 헝가리 마자르족의 지배, 세계 1차 대전 후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2차 대전 중 독일 나치의 지배, 종전 후, 소련의 지배로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는 등, 지난한 식민의 역사를 견디어야 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소련 위성국가 국민들이 자유를 부르짖을 때,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 역시 수도 프라하의 바츨라프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인다. 결국 약 40년, 군림한 공산정권을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지게 한 벨벳혁명을 이룬다. 우리나라의 광화문 촛불시위처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벨벳처럼 부드럽게, 평화적으로 성공시켰다고 그렇게 부른다. 이 민주화 격량기에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각각 독립하게 되는데 이 역시 평화로웠다고 ‘벨벳이혼’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와는 벨벳이혼이 성사된 1993년, 외교관계가 수립된다. 국가간 경제교류도 활발해 현재 삼성, 기아자동차, 현대 모비스등 90개 국내 업체들이 투자하고 있다. 월드뮤직 강사로서 슬로바키아에 관심 갖게 된 계기는 처음 보는 독특한 악기 때문이었다. 산악국가인 슬로바키아 양치기들이 나무를 깎아 만들어 불었던 푸야라(Pujara)라는 관악기다. 연주를 접하면 세 번 놀란다. 보통 사람 키 넘는 160cm-200cm의 특대형 길이에 놀라고 그 장대 같은 악기를 몸에 딱 붙이고 연주 하는 특이한 모습에 놀라고 또, 마치 저승에서 혼을 부르는 듯한 저음의 신비한 소리에 놀란다. 톤 홀(손가락 구멍) 3개와 본관에 붙은 50-80cm의 짧은 관에 입술을 대고 불러내는 소리다. 이 이색적인 푸야라 연주를 우리나라에서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지난해 11월, 제주도에서 열린 ‘국제 관악제’로, 프로그램의 하나인 ‘세계토속관악공연’ 무대에서 스위스 알프혼(Alphorn), 중국의 셩(Sheng), 남미의 팬프루트(Panflute)와 함께 슬로바키아의 푸야라가 연주되었다. 푸야라의 내력을 아는 내게는 아쉬운 무대였다. 실내 공연장에서 원피스 입은 연주자가 마이크 앞에서 하는 공연하는 모습은 전통악기의 매력을 떨어뜨린다. 유튜브에 슬로바키아 시골의 전통 의상 입은 노인들의 연주들이 있는데, 푸야라의 신비를 느끼려면 (영상이긴 하지만) 처음은 그렇게 접하는 게 낫지 않을까싶다.
그림을 보며 음악을 떠올릴 때가 있다. 미치도록 좋아하는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1882-1967)의 그림을 보면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Gymnopedies)가 흐른다.(느껴진다) 옛 그리스어로 ‘벌거벗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인 짐노페디는 슬픈가락이나 어둡지 않고 단음 선율인데 불협화음이 느껴진다. ‘고독’만으로 말해질 수 없는 호퍼의 그림을 부연해준다. 그런데 그의 그림에서 ‘브람스 4개의 소품 op.119 중 1번 인터메조 b단조’를 듣는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브람스와 호퍼의 저주받은 사랑. 스승의 아내를 평생 짝사랑한 브람스의 사랑 이야기는 모르는 이가 드물지만, 호퍼의 사랑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살았을 때도 슬펐던 사랑이 후세에 더 슬프다. 호퍼가 살던 시대의 미국은 어떤 곳이었나. 19세기 후반의 미국은 거대한 땅덩이, 천혜의 넘쳐나는 자원, 그리고 프론티어 정신으로 거세게 용틀임했다. 유럽이 20세기 들어서면서 세계 1,2차 대전으로 망가지고 있을 때 대서양 건너편에 있던 미국은 공업국, 산업국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호퍼는 1920년대의 대공황 혼란기에서 급속도로 발전한 미국, 그것도 미국의 심장부 뉴욕에 살며 도시화 과정의 편린을 화폭에 담았다. 그의 가슴을 친 것은 도시의 발전상이 아니라 그림자들이었다. 그의 그림을 나타내는 단어, 고독, 상실, 소외등은 그가 죽을 때까지 그림의 상징으로 따라다녔다. 그의 그림은 ‘도시와 고독’ 두 단어로 설명된다. 지난 주, 뉴욕 휘트니 미술관과 공동 기획으로 전시 중인 서울 시립 미술관의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를 관람했다. 관람객들의 실망의 소리를 미리 듣고 왔다. 호퍼의 대표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1942년작/Nighthawks)’이 빠졌다느니, 호퍼 자신이 흑역사라고 한, 호구지책으로 그렸던 삽화 전시가 다수라느니, 하는 투덜거림이었다. 그러나 나는 호퍼의 1914년작, ‘푸른 저녁(Soir Blue)’을 본 것만으로 배가 불렀다. 어둠이 내리는 파리 카페의 한 쪽 귀퉁이 풍경을 그린 것으로 손님 등 7명의 사람이 나오는데 가운데 앉아있는 흰 옷의 피에로가 눈에 확 들어온다. 호퍼, 자신을 그린 것이다. 압권이다. 화장은 이목구비와 표정을 지운 게 아니라 슬픔을 덮었다. 그래서 더 슬프다. 호퍼는 청춘시절, 파리에서 만난 한 여인을 10년 넘게 짝사랑했으나 버림 받았다. 그 후 그려진 그림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고 보는 걸까. 중국영화 ‘패왕별희’에서 평생 시투를 사모했던 두지(장국영분)가 시투의 결혼 후 버림받고 지은 표정이 겹쳐지자 100년 전 그의 감정이 전이돼 심장을 누른다. 브람스는 (앞에 언급한) 음악을 1893년, 클라라 슈만에게 선물하며(그것도 자신의 생일에) 이렇게 말했다던가. ‘각 음표와 각 마디는 마치 리타르단도처럼, 각 음표에서 고독감을 이끌어내는 것처럼 가슴에 와 닿아야 합니다’ 브람스의 사랑을 모르면 '고독'이란 단어는 오독된다. 호퍼 그림을 장악하고 있는 '도시와 고독'도 마찬가지. '푸른 저녁'의 도시와 고독은 호퍼의 사랑을 알아야 읽을 수 있다.
‘달나라에 갈 수 없다면!’ 북유럽의 외딴 섬나라 아이슬란드의 관광 홍보 문구다. 아이슬란드는 거리만큼이나 상식에서 먼 일이 일어나는 나라다. 귀신 이야기부터. 아이슬란드에 건물을 세우거나 도로를 놓으려면, 예정 부지에 ‘정령이 살고 있지 않다는 증명’을 해야 한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경치 좋은 곳에 ‘땅의 신이나 땅 사람, 혹은 숨어있는 사람’이라 부르는 정령이 산다고 믿는다. (우리 식으로 바꾸면 도깨비, 터줏대감 정도가 될 듯) 2013년, 도로를 내려던 시공업체와 정령이 깃든 바위 훼손을 막는 주민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 법정까지 간 일이 있는데, 판사는 주민 편을 들어 ‘바위를 파손하지 말고 이전’하도록 했다나. 다음 이야기도 귀신 이야기급이다. 맥도널드 햄버거가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일이 있었다. 15년 전, 금융위기로 아이슬란드가 부도 위기에 처하자 맥도널드가 발 빠르게 철수했다. 폐업 하루 전, 조르투르 스마라슨이라는 남자가 햄버거 세트를 구입한다. 그는 먹다 남은 것을 집에 둔 뒤, 3년 정도 지나 발견했는데 놀랍게도 조금도 썩지 않은 상태였다. 이 신기한 버거세트는 국립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가 1년 뒤인가, ‘버스 호스텔 레이캬비스’에 옮겨졌고 지금도 계속 전시 중이란다. (방부제 논란이 일자 맥도날도 본사는 ‘습기 없는 날씨라 부패하지 않은 것’이라 해명했다나?) 아이슬란드에서만 만들어 판다는 ‘고래 맥주’도 이색적이다. 한 주류 업체가 고래잡이 전문회사와 함께 긴수염 고래고기로 만든 알코올도수 5.2% 맥주를 시판했다. 기본적으로 ‘과학적 탐구 목적’외의 포경이 금지돼 있는 나라에서 어떻게 허가 받았는지 궁금하다. 음악계에서도 아이슬란드만의 별난 이야기가 있다. 자국어가 있는데 굳이 세상에 없는 언어를 만들어 음악을 하는 록밴드가 있다. 시규어 로스(Sigur Ros). 1994년에 결성돼 30년 가까이 활동해온 유명 밴드로 우리나라 월드뮤직 애호가들에게는 꽤 알려져있다. 2013년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내한 공연을 했다. 일반인들에게 낯선 ‘시규어 로스’가 알려진 것은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 JTBC ‘캠핑클럽’등에서 이들의 히트곡 ‘호피폴라(Hoppipolla)’가 인기를 얻으면서다. 혹성같이 광활하고 이색적인 아이슬란드 자연의 바람, 자연의 소리를 듣는 것 같다. 시규어 로스만의 음악어는 ‘희망어(Vonlenska)’로 불린다. 재즈 음악의 스캣처럼 이해할 수 없는 언어에 아이슬란드어를 살짝 곁들어 섞었다. 이 언어로 노래 제목을 만들고 노랫말을 만든다. 아이슬란드인들도 못 알아들으니 그저 마음으로 듣고 느끼는 수밖에 없다. 시규어 로스의 곡 중, 내가 자주 들었던 곡은 ‘Olsen Olsen’이다. 역시 제목의 뜻이 없고 가사도 해석되지 않는다. 뜻 모를 말은 음악처럼 들리고 반복해 들으면 명상 음악 같기도 하다. 삶을 지치게 하는 것 가운데 넘쳐나는 말들도 있다. 겉치레 말, 영혼 없는 말들...... 시규어 로스의 희망어가 그걸 일깨운다.
그림 하나가 하루를 점령한다. 일본 세키네 쇼지의 ‘죽음을 생각한 날’. 일본 배낭여행 중인 아들에게 남편이 SNS 가족방을 통해 보낸 글 중에 있었다. 학교를 자퇴한 열일곱 살 아들은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유럽에 이어 일본을 떠돌고 있다. 아들이 나라 밖 문화, 예술을 많이 접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남편은 거의 매일 ‘일본 예술 정보’를 보낸다. 세키네 쇼지의 그림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어두운 하늘 아래, 어두운 나무들 속,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한 사내가 고개 떨구고 걸어간다. 그 배경 모두, 남자의 등을 누르는 십자가로 보인다. 또 다른 그림, ‘신앙의 슬픔’은 어떤가. 어두운 들판을 걷는 다섯 여인, 죄지어 끌려가는 듯도 하고 순교의 길인 듯도 하다. 손에 든 꽃은 사약처럼 느껴진다. 흰옷의 여인들 사이에서 혼자 붉은 옷을 입은 여자. 고개를 유달리 모로 꺾은 그 여인에게 시선이 오래 간다. 아, 그 여인의 배경 또한 십자가로 보인다. 사내와 붉은 옷 여인의 사연이 궁금하다. 미치도록. 화가에 대해 찾아본다. 19세기 말에 태어나 스무 해를 살고 폐병으로 죽었단다. ‘죽음을 생각한 날’을 열여섯 나이에 그렸다는 것을 알고 충격받았다. 당장 그의 화집을 구입 하려 했는데, (예상대로) 화집은커녕, 책도 전무하다. 비단 세키네 쇼지 화집뿐일까. 대형서점에서도 일본 화가들의 화집을 본 기억이 없다. 아들에게 세키네 쇼지의 화집을 구해달라고 부탁해야겠다. 보름 전 일본 여행을 시작한 아들은 떠나기 전, 일본 역사책을 여러 권 읽었다. 학교 졸업한 지 까마득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는 내게 일본 전사(全史)를 5분 안에 정리해주었다. 조몬인, 야요이족이 살았던 고대에 이어 ‘일본’이라는 국호를 처음 썼던 나라 시대, 사무라이 계급이 탄생한 헤이안 시대, 군사정권 시대를 연 12세기의 가라쿠라,무로마치 막무시대, 그리고 우리나라 조선 중흥기(태종, 세종, 세조, 성종)와 맞물린,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을 이룬 전국시대, 비교적 평화기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시대. 메이지 유신(1868년)으로 근대화에 뛰어든 후, 아시아 패권을 잡기 위해 청일전쟁(1894), 러일전쟁(1904),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 전쟁(1941) 등을 차례로 일으키며 전쟁광이었던 제국주의 시기. (우리를 괴롭혔던 임진왜란과 일제 식민지 시절도 상기하자) 그 벌을 받아 2차 세계대전 패전국이 돼 쑥대밭이 되었는데, 한국전쟁특수를 누리면서 다시 일어난 뒤, 서방과의 자유무역 교류를 하며 수출, 기술혁신 집중으로 고도성장, 오늘날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아들에게 일제 강점기는 조선 시대 임진왜란처럼 호랑이 담배 먹던 때 이야기일 것이다. 식민지 시절의 고역과 복수심에 ‘쪽발이 *들’이라며 분개하던 어른들을 보며 성장한 내게 일본 예술품들은 지금도 ‘위안부, 독도 문제’의 색안경을 통과해야만 들어온다. 작품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다. 자유롭게 문화, 예술을 만나는 아들을 부러워해야 하나. 아들이 돌아오면 격세지감의 다리를 잇기 위해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을 들어야겠다. 지난 3월 타계한 사카모토는 아시아인 최초로 아카데미 작곡상(영화 마지막 황제 OST)을 받았던 세계적인 작곡가, 피아니스트면서, 탈원전 및 반핵운동, 2015년 아베 정부의 ‘안보법안’반대, 한국 위안부에 대한 사과 등을 주장하며 평생 양식 있는 세계시민으로 살았다. 그의 음악이 역사 없이 들리는 이유다. 일단 마지막 황제 OST 중 ‘Rain’을 들어보시길.
나 나탈리야 파우스토바의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애잔하고 신비로운 음률 때문일까. 러시아의 오래된 자장가 한 곡에 매혹되었는데, 해석된 가사를 보고 흠칫 놀랐다. 1절은 세계의 모든 자장가처럼 ‘자장 자장, 잘자라 아가야’ 분위기인데 2절로 가면서 확 바뀐다. (2절) 테레크강은 바위 따라 콸콸 흐르며/ 탁한 파도가 철석 거리네/ 나쁜 체첸족이 강변을 따라 기어오며/ 칼날을 가는구나/그러나 네 아빠는 노련한 전사/전장을 누빈 불굴의 전사(후략) (3절) 너도 알겠니 그 때가 올 거야/ 싸움의 날이 찾아올 거야/용감하게 말 등자에 발을 걸고/손에 총을 쥐거라/내가 전투용 안정에/비단으로 수를 놓아주마(후략) 인생이 고해라도 자장가만은 평화로워야하지 않나. ‘ 아가, 나쁜 놈 잡기 위해 칼날을 갈자, 싸움의 날이 오면 총을 쥐거라’ 라니. 돋보기를 대보자. 노랫말 속의 카자크(Cossacks/ 혹은 코사크)는 전쟁으로 바람 잘 날 없었던 러시아를 수호해온 군대 이름이다. 아이가 성장해 카자크가 돼 달려가 싸울 전쟁 적수는 러시아 남쪽의 체첸 공화국. 러시아와 체첸은 왜 싸우는가. 러시아의 역사와 함께 짚어보자. 기원 후 880년대, 유목민들이 산발적으로 살던 땅에 북유럽의 바이킹족이 남하, (현재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를 점령해 ‘키예프 루스’를 세운다. 998년, 키예프 루스는 몽골 침략으로 멸망하고 북쪽의 모스크바 대공국이 성장, 1721년, 러시아 제국이 된다. 20세기 넘어오면서 러시아는 혼란의 도가니가 된다. 1904년의 러일 전쟁, 1905년,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부른 참사인 피의 일요일, 1917년 2월 혁명, 1918년,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간의 러시아 내전 등...... 러시아에 불어닥친 혁명 바람은 1917년, 레닌이 이끈 사회주의 국가, 소련을 탄생시킨다. 유럽 동구권 등 주변 국가도 소련의 위세에 끌려 공산화된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대적한 냉전시대에 소련 경제는 갈수록 추락했다. 1982년, 당권을 잡은 고르바초프가 경제 살리겠다고 시작한 개혁, 개방의 불꽃은 주변 위성국으로 튄다. 그들의 민주화, 독립요구에 불을 붙인 것이다. 결국 1991년, 15개 위성국이 차례로 독립에 성공했는데, 체첸 공화국은 예외였다. 체첸이 가진 6천만 톤 규모의 석유, 카스피해와 흑해의 연결지점이라는 지정학적 이익, 독립시 주변국에게 미칠 파장 등을 셈한 러시아가 ‘체첸만은 절대, 절대 독립 불가!’를 고수한 것. 18세기부터 러시아의 침략으로 만신창이 되어온 체첸인의 복수심과 독립의지도 만만치 않았다. 둘은 1990년대에 두 차례에 걸친 전쟁, 끔찍한 테러와 인질극 ,그에 대한 단죄 등, 피가 피를 부르는 보복전을 계속해왔다. 소강된 것은 푸틴이 대통령이 되면서 강행한 체첸 초토화 작전 때문이었다. 체첸의 독립을 이끌던 지도자 대부분이 죽거나 감옥에 갇혔다. 그렇다고 체첸인 모두의 독립의지까지 말살할 수는 없었을텐데, 지난 2월, 체첸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위해 국가 근위대를 파견해주었다. 체첸의 수장 ‘람잔 카디로프’가 친러시아쪽이며 푸틴의 최측근인 까닭이다. 우크라이나와 동병상련일 체첸의 급변신이 기막히다. 제국주의의 탐심, 전쟁의 그림자가 오랫동안 세상 모르는 러시아 아기들의 요람에 드리웠던 것도 기막히고.
오장육부 중, 유일하게 문학적인 것, 시 속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심장이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쇼팽 연주를 듣다가 든 생각이다. 마흔도 못 채우고 떠난 생애 내내, 고국 폴란드의 혁명 실패로 타국에서 떠돌다 절명한 쇼팽. 그의 유언은 심장을 고국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바램대로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됐다.) 쇼팽과 같은 떠돌이 삶들의 유언은 대개 ‘내 뼛가루를 고국(고향)에 묻어다오’ 정도지, 심장을 떼내 묻으라는 경우는 드물다. 심장은 마음, 영적인 것의 상징이니, 평생 피아노와 살았던 쇼팽에게 심장은 자신의 예술혼을 담은 장기였을 것이다. 내게 폴란드는 쇼팽이고 쇼팽의 음악은 심장이다. 그리고, 폴란드를 각인시키는 또 하나의 심장이 있으니, 폴란드 민요 Dwa Serduszka(Two Hearts; 두 개의 심장)이다. 폴란드 민요하면 ‘산새들이 노래한다. 수풀 속에서, 아가씨들아, 숲으로 가자......’로 시작하는 동요 ‘아가씨들아(Szta dzieweczka)’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폴란드 영화 ‘콜드 워(2019개봉/ 파벨 포리코브스키 감독) ’속 주제가 Dwa Serduszka를 듣고 감동 끝에 심장이 ‘총 맞은 것처럼’ 되었다. 줄거리를 한 줄로 말하자면, ‘심장 가는대로 사랑하고 예술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시대, 음악인 남녀의 사랑 이야기’정도가 되겠는데, ‘불가능한 시대’라 함은 세계 2차 대전 후 나치의 마수에서 벗어난 폴란드가 공산위성국가로 살던 1950년대 이후의 냉전 시대다. 그 빙하의 온도를 알지 못하면 죽음을 불사한 20년간의 사랑도, 반복돼 나오는 Dwa Serduszka 선율의 격정도 이해할 수 없다. 폴란드는 (그 나라말로 폴스카로 부르는데) 서슬라브족에 속하는 폴라녜 부족이 세운 ‘폴란드인의 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여러 부족이 살던 이 땅은 966년, 미에슈코 1세 공작이 통합했고 이후 1025년, 폴란드 왕국이 세워져 역사에 등장한다. 1569년,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이 결성돼 17세기까지 유럽의 강대국으로 군림했으나 1795년, 나폴레옹 전쟁 속에서 제정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분할 지배를 123년간이나 받는 처지로 전락한다. 1918년,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잠시 평화시국을 맞았으나 1939년 9월, 독일의 침공으로 세계 2차 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전쟁 중, 또 독일과 소련에 의해 양분되고 유대인 300만 명을 포함, 600만 명의 국민이 사망하는, 2차 대전 최대 피해국이 된다. 전쟁 후인 1952년, 소련의 전체주의 손아귀에 잡혀 살아야 하는 위성국가가 된다. 1980년, 전기 기술자였던 레흐 바웬사의 연대자유노조 결성 등으로 대표되는 반정부 운동은 1989년, 연대자유노조의 국회 진출, 의회선거 압승, 1990년, 바웬사 대통령 당선으로 대전기를 맞는다. 나아가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완전한 독립국가로 선다. 이후 시장경제로 전환한 폴란드는 민주주의 시스템을 정착시켜나가면서 공산진영이 아닌 자유진영의 최전방 국가로 자리매김한다. 전쟁의 참화, 식민의 설움, 그로 인한 이웃나라 러시아와의 적대시......우리의 어두운 역사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영화 ‘콜드 워’의 배경은 1949년에서 1964년까지, 공산주의 체제 하, 사상검증을 받으며 살아가던 냉전 시대다. 음악은 정치적 도구로만 용인 되었다. 국경을 오가며 더 뜨거워지는 20년간의 사랑, 불륜,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마지막...... 폴란드의 시대 배경을 모르고 보면 ‘이해와 용인이 쉽지 않은 사랑 놀음’이고 주제가 ‘Dwa Serduszka’속 반복되는 심장의 은유도 사랑노래의 통속적 표현으로 들리지 않겠는가.
세계인의 귀신(?), 드라큘라의 나라, 루마니아에 ’마녀‘라는 직업이 있는 것을 아시는지. 우리나라의 역술인처럼 ’주술, 점술을 하는 존재‘ 정도로 여긴다지만, 루마니아의 미신숭배는 유난하다. 국가적으로 대통령 주재하에 ’악령 쫓는 행위‘를 벌인 적도 있다. 독재자 니콜라 차우셰스쿠(1989년 민중혁명으로 처형) 부부가 개인 마녀를 두고 미래를 점치곤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루마니아의 직업 ’마녀‘가 별난 것은 ’마녀‘에 대한 선입견 때문일 것이다. 중세기 기독교 박해 당시 수많은 여성이 억울하게 마녀 재판대에 올려져 끔찍한 고문 후 화형 당했다. 1563년 제정, 173년간 시행된 ’마녀법‘으로 6만~10만명 가까운 여성들이 처형되었다. 마녀로 몰린 여성들은, 실상, 고아로 컸거나 장애가 있는 등, 주변의 보호와 변호를 받지 못한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지배층은 마녀사냥을 종교전쟁과 페스트 등의 전염병 창궐, 기근 등으로 인해 분개한 민중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정치쇼로도 썼다. 이 인권지옥의 역사가 ’마녀‘란 단어를 오염시켰는데, 실상 마녀의 영어단어 ’Witch’는 기독교가 퍼지기 전에는 나쁘게만 쓰이지 않았다. 고대부터 존재한 마녀는, 남녀 성별 없이 요술을 부리는 이들을 넓게 지칭한 단어였다. 마녀들 중에는 오늘날의 상담사처럼 마음의 치유자도 많았다. 오늘날 루마니아의 직업, ‘마녀’는 국민들에게 중세 이전처럼 처우받고 있을 것이다. 그런 마녀들이, 10여년 전, 분기탱천해 다뉴브 강가에 피켓을 들고 모여들었다. 루마니아 정부가 그들에게도 세금을 걷겠다고 공포한 다음이다. 미신행위 직종은 노동자 등록이 되어있지 않아 과세 대상에서 제외했었는데, 재정난 극복을 위해 소득세 부과를 결정한 것이다. 다뉴브 강가에서 마녀들은 소리 높여 ‘정부에 집단저주를 내리겠다’고 경고하고 저주의 구체적 내용도 밝혔다. 다뉴브 강에 고양이 똥과 죽은 개, 독초 등을 풀어 정부 관리들에게 사악한 기운이 내리는 마법을 걸겠다는 것이다. 그 기사를 보고 ‘나의 다뉴브 강’ 이 역류했다. ‘나의 다뉴브 강’은 어떤 곳이었던가. 청춘의 절정기이던 20대, 노래방 애창곡 중 하나가 ‘사의 찬미‘였다. 사랑도 일도, 되는 일 하나 없어 술로 자해하던 한 때, 그 노래가 지혈을 해주었다. ’사의 찬미‘ 는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성악가였던 윤심덕(1897-1926)이 노랫말을 짓고(확실하지 않은 설이다) 불러 대히트를 친 곡이다. 인기의 배경에는 윤심덕이 유부남이었던 극작가 김우진과의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절망, 현해탄에 동반 투신한 사건이 있었다. 그 노래가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월드뮤직에 빠지면서 원곡이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Iosif Ivanovici,1845-1902)의 ’다뉴브강의 잔물결(Waves of The Danube Waltz)‘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보지 않았던 다뉴브강에 대한 동경이 생겼음은 물론이다. 마녀가 루마니아에서 과세 대상인, 어엿한 노동자라지만, ’마녀들의 다뉴브 강가 집단저주 해프닝‘은 청춘의 추억, 선망 일렁이는 ’나의 다뉴브 강‘의 순결한 환상에 금을 내었다. 재미는 있었지만.
헝가리의 별난 도서관 이야기를 들었다. 책이 아니라 사람을 대출해 주는 도서관이라는데 이름하여 ’살아 있는 도서관(Living Library). 도서관을 찾은 사람들은 ‘만남을 원하는 이’를 전용 카드로 신청한다. 대개 직업과 성향등을 기록한다. 사서는 고객이 원하는 이를 백방으로 찾아내 도서관에 오게 한다. 대면 시간은 딱 한 시간. 일반 도서관의 ‘기한 내 책 반납’과 같은 규정이 있는데 ‘만난 사람과 싸워서는 안 되며 한쪽이 대화를 원치 않을 시 바로 중단해야 한다’는 것. 최다 대출 희망 대상자는 ‘은행강도’였다. 당연지사, 대출을 원하는 이는 일반인이 평소 만나기 힘든 존재들이었다. 레즈비언, 랍비, 유럽연합관리 등이 눈에 띈다. ‘집시’를 만나기 원하는 ‘네오 나치주의자’도 이색적이다. 헝가리에서 집시는 보기 드문 존재가 아닌데? 그가 집시를 만나고 남긴 기록이 마음에 남는다. ‘과거 세상의 모든 집시를 증오했는데 도서관에서 만나 대화해 보고 달라졌다. 지금도 도둑질하는 놈들은 싫지만!’ 헝가리 하면 제일 먼저 집시가 떠오른다. 야생의 냄새가 맡아지는, 인간의 바닥 정서가 밴, 심장을 저미는 애조가 끓는 집시 음악을 미치도록 좋아한다. 헝가리를 집시의 고향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은데 오랜 세월 학자들의 연구로 그들의 출발은 인도 북부 지방이라는 것, 수천 년 동안 천천히 서쪽으로 이동해 지중해 남단으로, 이베리아 반도로, 러시아 쪽으로 흘러갔다. ‘집시’라는 단어는 생김새만으로 ‘이집트인’이라고 속단한 영국인들이 줄이고 변경해 부른 것이 펴져 오늘에 이르렀다. 집시문화와 먼 우리는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에 나오는 ‘카르멘’, ‘노트르담 파리’에 나오는 에스메랄다 등을 통해 이국의 매혹적인 존재를 떠올리지만 집시가 살고 있는 유럽 등지에서는 전혀 아니다. 15세기 작품,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에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라서 집시 얼굴도 헬렌처럼 아름답게 여긴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처럼 그들은 가난하고 저급한 부류로 대해졌다. 천년 떠돌이 삶의 곤궁은 오늘도 마찬가지여서 거리에서 춤, 노래, 마술 등의 재주로 생계를 잇는 이들이 많다.(버스킹 공연도 집시 문화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집시와 음악, 두 단어가 붙어 다니는 이유다. 그들이 즐기는 악기 중 바이올린이 대표적인 것은 떠돌이 삶을 용이하게 하는 작고 단순한 구조 때문이다. 헝가리에 내가 좋아하는 집시 바이올리니스트가 많다. 요제프 렌드바이(Jozsef Lendvay), 안탈 잘라이(Antal Salai), 로비 라카토시(Roby Lakatos) emd...... 그들의 음악은 비 내리는 이 음울한 겨울에 잘 어울린다. 안개까지 자욱한 오늘, 집시 소울에 클래식, 재즈가 섞여있는 로비 라카토시의 ‘Spring of dream’을 소개하고 싶다. 불편한 질문 하나. 집시들이 천 년 동안 떠돌이의 삶을 살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첨단, 모던의 사각지대에서 거칠게 살고 있지 않다면 그 소울(soul)이 유지되었을 것인가.
20대 초반 나이의 후배와 마포에 있는 경의선 숲길을 걸었다. 루프탑 카페가 보여 들어갔는데 이름이 ‘헤이, 쥬드’다. 주인에게 ‘헤이, 쥬드’ 노래를 청해 흐르게 하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나에게 헤이, 쥬드는 프라하의 봄이야’ MZ세대인 후배, 못 알아 듣는다. 꼰대 소리 듣지 않을 선까지 내 암호같은 말을 해명한다. 영화 ‘프라하의 봄(1989 개봉작)’에 비틀즈의 노래 ‘헤이 쥬드(Hey Jude)’가 나온다. 비틀즈의 목소리가 아닌, 체코 가수 마르타 쿠비쇼바(Marta Kubisova/1942년생)가 자국어로 바꿔 불렀다. 비틀즈가 불렀을 때는 우울한 한 아이를 위한 ‘응원가’였는데 마르타 쿠비쇼바는 국민개혁가요로 바꿔 불렀다. 존 레논의 5세 장남 줄리안 레논이 자주 벌어진 부모의 싸움 때문에 어두워진 것을 본 폴 매카트니가 삼촌 마음으로 노래를 만들었다. (줄리안의 애칭이 주드) 1968년, 발표되어 ‘예스터데이’와 함께 비틀즈 최고 명곡이 된 이 노래는 그해 체코 ‘프라하의 봄’ 속에서는 민중 개혁가로 퍼진다. ‘프라하의 봄’은 체코 국민들의 민주화 운동이었다. 나치 독일 점령 하의 체코슬로바키아에게 구원이 되어준 소련은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 지배자로 둔갑한다. 1948년, 공산당이 전권을 장악하면서 일당독재 전체주의 사회로 나아갔고 1960년, 사회주의 헌법 채택,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국명 변경하며 국민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겨울을 살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68년 1월 출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민주 자유화 노선을 채택한 알렉산더 두브체크의 개혁은 민주 시민들의 환호를 불렀다. 그러나 동토를 녹일 것으로 기대했던 프라하의 봄은, 민주화 물결이 이웃 동구권으로 확산될 것을 두려워한 소련의 군홧발 아래 짓이겨진다. 68년 8월, 바츨라프 광장의 시민 평화 시위는 소련군이 밀고 들어온 탱크와 총성에 의해 피로 물들며 좌초된다. 체코 국민 작가 밀란 쿤데라의 명작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좌절된 체코 민주화 운동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한 체코 젊은이들의 사랑이야기다. 미국 감독 필립 카우프먼은 이 소설을 ‘프라하의 봄’이라는 영화로 만들었다. 국민 가수 마르타 쿠비쇼바는 68년, 프라하의 봄에 이어 89년, 벨벳 혁명 때도 헤이, 쥬드를 민주주의를 꿈꾸는 개혁의 노래로 불렀다. 쿠비쇼바의 목소리, 체코어로 불린 ‘헤이, 쥬드’는 영화 ‘프라하의 봄’에도 나와 영화의 세계적 히트와 함께 체코인의 민주화 염원을 세상에 알렸다. ‘삶은 내게 너무 무거운데 당신에게는 너무 가볍군요’라는 영화 주인공 테레사의 명대사를 떠올리며 노래를 듣는다. 헤이, 쥬드는 겨울을 사는 지금의 우리에게 옛날 노래만은 아니다.
크로아티아를 가면 시내 곳곳 붉은 글씨로 ‘KRAVATA’라고 쓰인 간판을 만날 수 있다. 크로아티아의 수제 넥타이 판매점이다. 프랑스에서는 이 단어를 넥타이로 쓴다. 기원을 알면 재미있다. 17세기, 기독교 신·구교간 ‘30년 전쟁’(1618-1648)은 프랑스, 스페인, 덴마크, 스웨덴 등 대부분 유럽 국가가 참여한 국제전이었다. 프랑스 우방이었던 크로아티아는 파리로 파병을 한다. 파리 시민들은 크로아티아 병사들의 목에 맨 붉은 스카프를 보게 된다. 국왕 루이 14세도 스카프에 관심을 갖고 한 병사에게 정체를 물었다. 국왕의 질문을 제대로 못 알아들은 병사는 얼결에 ‘크라바트’라고 답한다. 크라바트는 ‘크로아티아의 군인’이라는 말이다. 병사는 답을 이렇게 했어야 했다. ‘우리 크로아티아에서는 남편과 아들이 전쟁에 나갈 때 목에 붉은 스카프를 매어주는 전통이 있습니다. 마귀를 쫓는다고 생각해 부적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무사귀환을 바라는 염원을 담은 것입니다.’ 루이 14세의 눈에 그 붉은 스카프가 멋있게 보인 듯하다. 루이 14세는 ‘크라바트’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후 파리에서 유행하게 되는데 모두 이를 ‘크라바트’라 불렀다. 크라바트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패션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이 패션 소재로 쓰면서 크게 유행하게 됐는데 프랑스 혁명과 함께 수그러든다. 그러다 19세기 초, 영국 패션 디자이너 ‘보우 브러멜’의 ‘보우 타이(bow–tie)’ 일명, 나비넥타이가 인기를 끌면서 ‘넥타이’라는 이름으로 전 유럽에 퍼지게 된다. (이야기 나온 김에) 크라바트의 변주로 나온 오늘날의 길게 매는 넥타이를 ‘포 인 핸드(four-in-hand)로 부르는 설도 재미있다. 포 인 핸드는 ’네 마리 말이 마차 한 대를 끈다‘는 의미에서 나왔는데, 목에 Y자로 맨 넥타이가 ’마부가 말을 몰 때 쓴 Y자형 고삐와 닮은 데서 나왔다는 이야기다. 크로아티아의 넥타이 상점 ‘KRAVATA’의 간판 앞에서 재미난 역사를 떠올리면서 동시에 발칸반도 스타 ‘고란 브레고비치’를 떠올린 기억이 난다. 그레고비치를 알게 된 것은 그가 영화 음악을 담당한 고전 명작, ‘집시의 시간’(1989)을 보면서였다. 발칸반도를 무대로 한 집시들의 삶을 그린 영화로 1989년, 제42회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이 영화 속에 나온 ‘Ederlezi’를 얼마나 반복해 들었던지! 집시의 광기와 한이 내 몸에 불을 붙였다. 브레고비치는 보스니아 출생인데, 아버지는 크로아티아인, 어머니는 세르비아인이다.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는 브레고비치. 그런데 궁금증이 인다. 왜 브레고비치는 아버지의 나라, 크로아티아의 상징인 넥타이를 절대 매지 않는 것일까? 공연에서도 수많은 홍보사진에서도 넥타이 맨 브레고비치를 본 적이 없다. 넥타이 매지 않는 그의 패션에서 혹, 발칸의 피 묻은 역사를 읽어낼 수 있을까.
세계사의 3대 거짓말을 꼽으라면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그래도 지구는 돈다’, 마리 앙트와네트의 ‘빵 없으면 케이크 먹으면 되죠!’, ‘노예해방을 위해 시작한 미국 남북전쟁’이라는 말을 들고 싶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18세기 이탈리아 작가 주세페 바레티의 창작물에 나온 부분이지 갈릴레이가 실제 한 말이 아니며, ‘빵 없으면 케이크를.....’도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에 나온 글로 앙트와네트의 무개념을 드러내기 위해 누군가 지어 퍼뜨린 말이다. 미 남북전쟁은 미 연방을 탈퇴한 남부에 대한 응징에서 시작된, ‘미연방수호’가 목적이었던 전쟁이었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은 남부를 이기기 위해,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노예제도를 뒤흔들기 위한 것이었다. 링컨이 노예해방론자이긴 했지만 그것이 그의 전 생애의 주제는 아니었다. ‘노예 해방’을 위해 생을 던진 이는 따로 있다. 미 육군 대령이었던 존 브라운( John Brown 1800-1859)이 대표적이다. 1856년, 브라운은 캔자스 동부의 포타와타미에의 고립된 오두막에서 다섯 명의 노예제도 찬성론자를 살해해 지명수배자가 된다. 불가피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브라운은 공공연히 ‘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남부인들과의 평화적 협상은 불가능하다. 노예제도를 끝장내기 위해서는 폭력혁명밖에 없다.’라고 주장했다. 노예해방론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투신하게 된 브라운은 자식들도 투사로 만들었다. 두 번 결혼해 스무 명의 자식들을 두었는데(첫 번째 부인으로부터 7명, 둘째 부인으로부터 13명) 아들들 대부분이 아버지를 따랐다. 포타와타미에 오두막 살인사건으로 지명 수배를 받던 브라운은 본격적인 노예해방 운동을 결심한다. 노예 등 지지자, 약 5000명을 무장투쟁전사로 만들기로 결심, 이에 필요한 무기를 연방정부의 하퍼스 페이 무기고에서 탈취하려한다. 그러나 1859년 10월 결행된 그의 거사는 곧바로 달려온 지역 농장주들과 민병대, 연방군에 의해 좌초된다. 그 자리에서 생포된 브라운은 버지니아 주정부에서 반역죄, 포타와타미 오두막에서의 살인죄, 노예반란 선동죄 등으로 재판받은 끝에 교수형으로 처형된다. 미국인들은 존 브라운의 노예해방운동과 처형이, 1861년에 일어나 노예를 해방시킨 미국 남북전쟁의 단초였다고 생각한다. 남북 전쟁 중 북군의 진군가로 불리웠던 노래가 있다. 제목하여 ‘ 존 브라운의 시체(John Brown’s body)’ 존 브라운의 몸은 무덤에 누워 썩어가지만/ 그의 영은 진군하고 있다네/ 하늘의 별들은 따뜻하게 죽어간 존 브라운의 무덤을 비추고 있네/ 영광 영광 헬레루야.....후략...... 들어보면, 아, 이 노래! 하며 단박에 알 것이다. 학교 교가로, 찬송가로 익히 귀에 익은 리듬이다. 이 진군가는 전쟁 후, 가사가 바뀌어 미국 개신교의 찬성가로 불렸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이 그들이 세운 학교의 교가로 쓰면서 퍼져나갔다. 대의와 타인의 존엄을 위해 생을 바친 존 브라운의 삶을 떠올리면서, 존 바에즈와 휘트니 휴스턴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들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