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기획시리즈'검색결과
상세검색“독립선언서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하노라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조선총독부에 독립선언식 거행을 통고하고, 독립선언서 낭독 후 체포를 당한다. 그리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학생과 시민들,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로 나가 독립 만세를 부르짖으며 태극기를 펄럭였다. 일제 탄압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는 그렇게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국민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 3·1운동, 이는 임시정부 수립으로 연결됐다. 1919년 4월 10일 중국 상하이, 임시의정원 초대 의원 29명은 조국의 광복을 바라며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했고 다음 날인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헌장 등을 의결 및 선포하며 항일 투쟁의 산실인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의 역사가 시작됐다.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임명, 국무원 비서장에 조소앙,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재무총장에 최재형, 군무총장에 이동휘, 법무총장에 이시영, 그리고 문창범에게 교통총장을 맡겼다. 그해 9월 연해주를 중심으로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정부 형태로 개편한 대한국민의회 등을 흡수하고 서울에서 13도 대표들이 국민대회를 열어 정부를 수립한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통합과정을 거쳐 진정한 정부로 거듭났다. 초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내무총장 안창호의 주도로 연통제와 교통국을 조직했으며 독립신문을 발행, 각종 외교 선전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애국공채 발행 및 국민의연금을 통해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했다. 또한 임시정부는 ‘한일관계사료집’을 편찬해 국제사회에 한반도의 상황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베르사유 강화체제에 의한 국제적 안정 기조를 고집하던 열강들의 냉대와 일제의 추격에 의해 국내 조직이 파괴, 해외 각처에 산재한 동포사회의 교통·통신의 장벽 등으로 애초 계획했던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운영 기술이 미숙해 국민적 지지기반의 붕괴를 겪은 임시정부는 이러한 어려움을 타파하고자 1923년 국민대표회의를 수집했고 두 차례 헌법개정을 단행하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국민적 기반을 확보하지 못하며 수난을 겪었다. 이에 김구는 1931년 보다 직접적인 항일투쟁을 추진하기 위해 특무 조직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이듬해인 1932년 1월부터 한인애국단의 단원들은 직접적인 항일 투쟁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1932년 1월 8일 히로히토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을 시작으로 그해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의 의거까지 이어지며 국민적 지지를 받음과 동시에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됐다. 특히 윤봉길의 의거의 경우 국제적으로 한인의 반일투쟁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역할뿐만 아니라 상하이 사변 등으로 피해를 입은 중국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용사가 능히 하였으니 장하도다”라 말하며 윤봉길을 칭송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임시정부는 일제의 탄압으로 상하이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이어 1937년 일어난 중일전쟁의 영향으로 중국 전역을 옮겨 다녀야 했다. 1932년 5월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항저우를 비롯해 전장, 난징, 자싱,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을 거쳐 1940년 9월 충칭에 정착했다. 1940년 9월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 태평양전쟁 발발에 맞춰 대일선전포고를 하며 연합군과 함께 참전했다. 또 중국정부를 통해 국제외교를 강화해 카이로선언 이후 대한민국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약속도 받는 등 성과를 거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그토록 바라던 광복이 찾아오기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과 자유를 위해 27년간 외교활동을 비롯한 의열투쟁, 군사 활동 및 교육·문화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1945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내외 동포에게 고(告) 함’이란 성명서를 통해 “우리가 처한 현 단계는 건국강령에 명시한 바와 같이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려 하는 과도적 단계이다”며 “본 임시정부는 최속 기간 내에 곧 입국할 것, 전국적 보선에 의한 정식 정권이 수립되기까지의 국내 과도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저명한 각 민주 영수회의를 소집하도록 적극 노력할 것이다”고 정권 수립의 계획을 밝혔다. 하지만 돌아온 대한민국의 상황은 그들이 바라고 희망을 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한반도 38도선 이남에서 군정을 펼치던 미국은 임시정부를 인정할 수 없단 입장을 고수했고, 이로 인해 요원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대한민국의 땅을 밟은 임시정부의 요원들은 서대문 근처 경교장에 자리를 잡고 과도정권 수립에 들어갔다. 김구가 국내 정치지도자를 만나는 한편, 내무부장 신익희는 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위원회를 운영했다. 1946년 2월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비상국민회의가 발족됐으나, 이 조직이 미군정 자문기관 민주의원으로 변질되면서 과도정권 수립이 좌절됐다. 또한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과 영국, 소련의 외상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가 결정되며 건국이 어려워지자 임시정부는 ‘4국 원수(元首)에게 보내는 결의문’을 채택, 즉시 독립을 주장하며 반탁 운동을 실시했다. 하지만 미군정의 ‘방해와 남한만의 정부를 우선 수립하자’라고 주장하는 이승만과 그를 지지하는 한국민족대표자회의 결성 등으로 결국 남북한 단일 정부 수립을 바라던 임시정부의 꿈은 무너졌다. 이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임시정부는 해산됐고, 그 법통은 대한민국 정부가 계승해나갔다. 비록 그들이 구상한 남북한 단일정부 수립은 이루지 못했을지라도 수십 년간 나라 잃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조국 독립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그들이 있어 현재 우리가,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다. 그들의 희생과 노력을 특별한 날만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도 되새겨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 경기신문 = 김도균 기자 ]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 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대.” 1995년 아버지 김용환이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는 날, 딸 김후웅은 이같은 내용의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글을 남겼다. 김용환은 집안 말아먹을 난봉꾼이라는 뜻의 파락호(破落戶)를 수식어로 하는 안동의 실존 인물. 노름과 난봉질로 세간의 온갖 비난을 받았음에도 해방 후 독립운동이 인정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됐다. ‘신행 때 농 사오라 시가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서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가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뒤늦게 사실을 알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담아 쓴 딸의 편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를 제목으로 한 연극이 오는 12월 14~15일 이틀간 반월아트홀 소극장에서 시민들과 만난다. 경기문화재단 ‘2021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추진 민간공모 지원사업’에 선정,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공연을 앞둔 극단 맑은물은 2004년 6월 창단 이후 흥미진진한 독립운동가의 일대기를 무대화해 경기북부 시민들에게 감동과 교훈, 재미를 선사하려 한다. 이번 연극은 서로군정서의 판독이었던 석주 이상룡 선생의 지시로 상해임시정부 설립을 위해 현재의 화폐가치로 300억 원에 해당되는 거금을 미련 없이 내놓았던 독립운동가 김용환 선생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린다. 김용환은 술과 노름으로 자신을 위장해 일경의 눈을 피하고, 밤새 노름판에서 돈을 잃어준 뒤 마지막 큰 판에서 돈이 쌓이면 “새벽 몽둥이야”를 외쳤다. 고함과 함께 몽둥이를 든 장정들이 등장해 돈을 쓸어가는데 이들은 김용환의 지시를 따르는 청년들로 챙긴 돈은 상해로 보내졌다.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는 기지와 계략으로 독립운동사의 획을 그은 김용환의 일대기를 빠른 템포의 장면전환과 양식화된 표현 방식, 마치 추리물을 같은 긴장감으로 무대를 꾸민다. 딸 후웅 역의 배우 김용선을 비롯해 김용환 역 현승철, 종길 역 손성호, 아들 역 황무영, 며느리역 오보혜, 하시모토 역 전상진, 노석출 역 김장동, 부인 역 최소영 등이 무대에서 호흡을 맞춘다. 연극은 팔순의 치매노인 후웅이 정부로부터 자신의 아버지 김용환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를 의심하면서 시작된다. 혼인을 앞둔 후웅에게 아버지는 신행 때 혼수로 장롱 사갈 돈마저 노름으로 날려 가슴을 숯검댕이로 만들었던,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한평생 가슴앓이를 하고 살아온 후웅이 과거로의 여행을 통해 아버지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지난날의 한과 상처를 치유하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이우천 대표는 작품에 대해 “흔히 독립운동사 또는 독립운동가에 대한 극은 대게 무겁고 진지하거나 어두운 결말을 통한 비극적 접근으로 가슴 한편이 암울해진다. 독립운동사라는 것이 대게는 약자의 저항이기에 당연할 것”이라고 운을 뗐다. 이어 “천편일률적인 독립운동사를 벗어나, 재미와 위트가 철철 넘치는 일제강점기 역사극을 무대에 그림으로써 관객에게 새로운 독립운동사를 제공하고자 한다. 선연들이 가지고 있던 기지와 위트를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보여주겠다”고 설명했다. 끝으로 “포천시 소극장 문화를 정착시키고 시민들에게 자연스럽게 문화향유의 수단으로 다가가고자 한다”면서 “오랜 시간 연극과 공연문화에 지조와 열정을 쏟아온 실력 있는 제작진, 배우들과 시민들에게 눈물과 웃음을 선사하고자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 파락호였으나 독립운동가였던 김용환은 누구인가 앞서 말했듯 파락호는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말하는데 과연 독립운동가의 모습과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싶다. 김용환은 퇴계 이황의 제자이자 그의 학맥을 잇는 중책을 맡은 학봉 김성일의 13대 종손이다. 또 애민 애국의 정신으로 존경을 받던 서산 김홍락의 손자로 향산 이만도의 손녀 이호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학봉가의 종손으로 집안을 지키며, 할아버지의 공을 인정받아 참봉이라는 종9품 벼슬을 얻은 김용환은 난봉꾼 행색일 때도 김참봉으로 불렸다.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계기는 1896년 의병활동을 하던 김회락이 학봉 종택에 은신해 있다 잡힌 일에서부터다. 이때 일본군은 김회락을 잡기 위해 학봉 종가를 찾아 그의 사촌인 김흥락을 포박하고 치욕을 보인 뒤 집안을 약탈했다. 당시 그 모습을 지켜보며 훗날을 도모한 김용환은 이후 20세기 초 조선에 위기가 찾아오자 비밀리에 독립운동에 몸담았다.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되자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퍼져나갔고, 김용환은 의병활동을 창의했던 할아버지 김흥락의 손자답게 1908년 의병장 이강년 의진에 참가했다. 1911년에는 김상태 의병 부대에 참가하는 등 다양한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했다. 석주 이상룡은 1911년 안동을 떠나 만주로 향하면서 학교를 후원하고, 의병을 지원하는 일과 착취당하는 백성을 지키는 것을 김용환에게 당부했다. 1919년 3월 여러 이들의 뜻이 모여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것이다. 이처럼 독립군기지 개척을 위해 독립운동자들과 연결돼 거액의 자금을 제공했던 김용환은 일경에 세 번이나 붙잡혀 고초를 치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고, 독립운동 조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일제 감시가 삼엄했던 당시, 일경의 눈을 피하려고 술과 노름에 빠져 한량 행세를 하며 살았던 김용환.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집안 말아먹을 한량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가면서도 끝내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재산을 상해로 보냈던 유명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초저녁부터 노름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큰 판돈을 걸고 베팅하는 특기가 있었다고 한다. 노름판에서 돈을 잃으면 ‘새벽 몽둥이’라고 외쳐 건달들을 불러서 돈을 가지고 갔다고 하는데 사실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하는 것처럼 위장해 독립운동 자금을 만들었던 것이다. 김용환은 도박으로 전 재산을 잃고 외동딸의 결혼자금도 줄 수 없었던 상황에서 딸 후웅이 시댁에서 지원받은 혼수비마저 노름으로 썼다고 알려졌다. 외동딸에게마저 원망과 미움을 받으면서도, 생을 마감할 때까지 비밀리에 부친 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기억된다. 1945년 광복 다음 해 여름, 김용환은 59세 나이에 병세가 깊어 위중한 상태에 놓였다. 독립투사 측근인 하중환이 문병을 와 “병이 이렇게 깊은데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 감으실 건가?”라고 하자 김용환은 “선비의 후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자 자신이 좋아서 한 일”이라며 끝까지 함구했다. 그의 헌신은 3년상이 끝나는 1948년, 하중환의 제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김용환은 1995년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는다. 그의 딸 김후웅은 그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라는 글로 발표했다.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김용환을 기억하며 국가보훈처의 공훈전자사료관에서 찾아본 결과, 김용환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911년김상태 의진에서 활동한 이래 만주에 거액의 군자금을 제공했다 하며 활동 내용은 미상이나 3번 피체(남에게 붙잡힘)된 사실이 있고, 1922년 10월경에는 의용단에 입단하여 경북 서기로 임명된 후 경상도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과 동지 포섭 등의 활동을 계속하다가 체포된 사실이 확인됨’이라고 쓰여있다. 성남시와 성남문화재단이 추진한 ‘독립운동가 100인 웹툰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김용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국내 대표만화가들이 독립과 평화를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을 웹툰으로 재조명하는 프로젝트는 역사를 널리 알리고 국민들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는 평을 받는다. 이 프로젝트로 ‘파락호 김용환’이 탄생했다. 이정현 작가는 “가장 많은 것을 가진 이가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삶을 살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단어가 이렇게 어울리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싶다”고 말했다. 이 작가는 종가의 종손으로 가문을 이끄는 삶과 나라 잃은 백성으로 독립을 위해 애쓰는 삶을 살아간, 파락호가 아닌 독립운동가 김용환을 알아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독립투사들의 업적과 의의를 기리는 일은 후손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이자 의무이다. 몰래 독립운동을 하면서 끝까지 밖으로 드러내지 못했던 독립운동가 김용환을 잊지 않고 기억하길 바란다. [ 경기신문 = 신연경 기자 ]
합방의 비운을 맞은 순간이나 일제강점기 전시기를 통해 사람들은 종교에서 위안을 삼았고, 또 결속함으로써 사회 결사의 조직적인 힘을 조성했다. 특히 한민족의 종교적 지형은 지배 종교가 없는 시대였다. 여러 갈래의 종교가 신종교적 성격을 띠었는데, 민중들의 호응이 가장 컸던 종교는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였다. 일제의 식민통치 심장부를 둘러싸고 있던 경기도 역시 다양한 종교들이 민족문화운동 창출에 매진했다. 경기도는 다른 지역과 뚜렷한 차이를 나타내는 종교적 민족문화를 지닌 것으로 풀이된다. 초기 의병운동이 진압되면서 일제강점 초기 경기도 일대에서는 종교를 통한 교육구국운동, 사회결사운동 등이 중심을 이뤘다. 도시, 농촌 모든 곳에서 일어났고, 깊숙한 산야는 피난처가 되기도 하고 신흥종교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경기도 지역의 종교운동은 사회적 기능상 진보적이어야 했고, 실리적이며 실천적이어야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종교들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조선총독부라는 물리적 힘을 행사하는 식민통치의 정치세력이 등장했다. 이러한 억압적 통치구조에 맞서 민중결사를 유도해낸 신종교는 천도교와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구세군 등의 개신교였으며, 천도교와 여러 종파의 개신교는 일제와 싸우면서 민족진영의 정신세계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이렇듯 경기도 일대의 종교운동은 일제강점기 전 기간 동안 조직적인 교단운동과 사회개혁적인 신앙운동으로 꾸준히 지속됐다. 다만, 제도화된 교단종교운동으로는 발전하지 못했는데, 이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회유 때문이었다. 한강변에 위치한 양평은 조선시대 천주교 신앙이 싹튼 곳으로, 그 주변의 남양주와 광주 남한산성 천진암 등은 서울에서 정치권력에 실각한 양반들이 모여들어 새로운 가치체계 운동으로 서학과 천주교운동을 일으켰다. 동학이 창도 당시 기층 농민을 대상으로 종교운동을 전개했다면, 천도교는 농촌지역의 농민과 함께 도시의 중소상인, 학생, 개화지식인을 대상으로 했다. 따라서 갑진개혁 이후 천도교의 중심부는 경성이 됐다. 또한 천도교 운동은 점진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 조선총독부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도교는 북한산 밑 수유리에 봉황각과 강학당을 건축하고 팔도의 인재들을 모아 민족운동 세력으로 양성했다. 이에 일제의 회유와 탄압이 계속됐지만 이들은 굴복하지 않았고, 경성과 경기도 주변에서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던 종교세력이 됐다. 일제강점기 동안 경성과 경기도 일대에 조직적인 선교를 담당한 세력은 개신교 중 감리교였으며, 이들은 복음선교보다 병원과 학교, 출판사를 세우는 문화선교를 우선으로 했다. 물론 기독교에 대해서도 일제는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통감부는 1908년 사립학교령과 1915년의 개정 사립학교령을 발표, 기독교 학교의 교육활동을 위축시켰다. 소위 황국신민교육을 장악하는데 방해가 된 것이 미션교육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경기도 지역의 종교세력이 적극적인 저항 형태를 집단적으로 표출한 사례는 소수다. 그 중에서도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가평 적목리에서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식민통치에 직접적인 반대를 표명한 안식교의 적목리 공동체 신앙운동은 무저항 불복종 민족운동으로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가평 적목리 신앙공동체 태평양전쟁의 패색이 짙어가던 일정 말 신사참배가 강요되고, 대한의 젊은이들은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꽃다운 처녀들은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가던 시기, 일제의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강제징용과 징병 그리고 교회 명령을 목숨을 걸고 거부한 7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가평군 적목리 신앙공동체이다. 이들은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인적이 드문 심산계곡 통나무집에서 풀뿌리와 나무껍질 등으로 허기를 채우면서 일제의 살인마적 폭력 앞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도하고 애국정신을 지켰다. 지도자들은 전국 여러 곳을 다니며 백성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 적목리 신앙공동체 형성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전운이 짙어짐에 따른 선교사들의 철수와 한국인 지도자들의 검거 및 순교, 그리고 교회해산 등이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적목리는 가평역에서 서북쪽으로 100리 길, 들어가는데만 하루가 걸리는 만첩산중이었고, 일단 들어오면 하룻밤을 묵어 가야할 정도로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이 곳으로 모이게 된 연유는 이미 18년 동안 목상으로 산판 경험이 많은 신태식 목사가 당시 가평의 경춘철도 임업주식회사 출장소 소속이어서 산중에서 철도 침목(枕木)을 깎는 일을 할 수 있었다. 당시의 화급한 일화를 신 목사의 아들인 신우균 목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이름난 애국지사는 아니었으나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연구한 나머지 일본은 곧 망하고 미국이 이길 것이며 그때에는 신앙의 자유가 올 것이란 신념이 있던 분이시다. (중략) 그러던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일본 순사 두 명과 한인 순사 한 명이 우리 외딴 집으로 연락도 받기 전에 갑자기 들이닥쳤다.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조사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중략) 일본 순사들이 칠판에 한글이 적혀 있는 것(성경 절들)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중략) 준비가 끝나자 아침 일찍 조용히 집을 버리고 떠난 것이다. (중략) 며칠을 걸었는지 모른다. 발이 부르트고 터져서 쓰리고, 그래도 걸어야 했다. 이렇게 하여 도착한 곳이 적목리였다.” 적목리 신앙공동체의 주요 목적은 신앙 양심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제가 곧 패망할 것이라는 확신으로 민족정신을 지켰다. 이들은 무모한 일제 침략전쟁을 반대하고, 강제징집을 거부했는가 하면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신사참배 강요에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하지만 70여 명이 집단생활을 하다 보니 식량이 큰 문제였다. 더구나 겨울에는 음식을 구할 수 없는 형편으로, 나물과 풀, 나무껍질 등을 벗겨 먹거나 나물을 쌀이나 옥수수 등으로 끓인 죽을 먹곤 했다. 가족들 중 일부가 산판에서 일하고 배급받은 소량의 식량으로는 모든 식구들이 먹기에 언제나 부족했다. “평강에서 얻은 아들 상순이가 난 지 1년도 못되어 올라온 터라, 아내는 산후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더욱이 끼니조차 잇지 못하는 형편에서 젖이 나올 리 없었다. 산에 들어갈 때 가지고 온 약간의 쌀로 밥을 지어 산모와 갓난아이에게 먹이노라면 다섯 살 짜리 효순이가 콩깻묵을 씹다가 숟가락을 놓으면서 ‘다 큰 아이는 밥 먹는 거 아니지?’ 하며 눈물을 글썽거리며 돌아서는 것을 볼 때 내 마음은 메어지는 듯했다.” 신태식 목사와 함께 공동체의 지도자로 활동했던 반내현 목사가 남긴 기록이다. 반 목사는 가족들을 공동체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주로 일경을 피해 여러 곳을 다니면서 백성들을 계몽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극도의 곤궁한 생활에서도 머지 않아 해방될 조국의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반내현을 위시한 지도자들은 사선을 넘나드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전국을 순회, 신앙정신을 교육하고 계몽운동을 펼친 것이다. 특히 일본식 교육을 거부하고 자녀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가르쳤다. 그렇게 이들은 1943년 9월 해방이 될 때까지 2년 간 적목리라는 심산유곡에서 일경을 피해 겨우 연명하며 신앙의 자유와 민족혼을 지키는 삶을 살았다. 이종근 삼육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는 “이 공동체는 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오늘날 우리들에게 인간존재의 한계상황에서도 개인들이 믿음으로 뜻을 모으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귀감이 된다”며, “암울했던 시대, 신앙양심에 입각해 민족정기를 지킨 항일 민족정신의 훈련장으로서 교육적 의미가 크다”고 평했다. * 자료 및 사진 출처=일제하 경기도 지역 종교계의 민족문화운동 [ 경기신문 = 신연경 기자 ]
3·1독립만세운동 때는 전국 어느 지역보다 치열한 만세 시위가 이어졌고, 이후 일제가 문화통치로 노선을 바꿨을 땐 애국 계몽운동의 중심지가 됐던 경기도. 따라서 경기도 출신의 항일 독립운동가는 구한말 항일의병에서부터 3·1운동의 주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 다른 나라에서 해방을 맞아야 했던 이들까지 다양했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돌을 던진 안양의 원태우 지사 이토 대사는 22일 하야시 공사 등과 더불어 수원부에 사냥을 나아갔다. 돌아오는 길에 경부철도의 열차를 타고 오후 6시 안양정거장을 발차하자마자 이내 기차를 향해 돌을 던진 자가 있어, 돌이 유리창을 깨고 후작(侯爵, 이토)의 얼굴을 덮쳤으나 부상은 입지 않았다고 전한다. 협약(協約, 을사늑약)에 불평하는 폭한(暴漢)의 소행일 거라는 말이 있으나 아직 분명하지는 않다. 일본 박문사가 발행한 ‘일로전쟁 사진화보’ 제39권(1905년 12월 8일 발행)에 적힌 내용으로, 을사늑약 닷새 후인 1905년 11월 22일 특파대사로 서울에 머물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함께 수원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올 때의 일을 보도한 것이다. 당시 이들은 오전 9시 남대문역(서울역)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수원에 온 뒤 팔달산을 유람하고 사냥을 한 후 귀경길에 올랐다고 한다. 그렇게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안양역을 지나 서리재 고개를 느릿느릿 넘고 있을 때 누군가 돌을 던졌다. 이 돌멩이에 열차의 유리창이 깨졌고, 그 파편에 이토 히로부미는 얼굴에 상처를 입는 봉변을 당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일로전쟁 사진화보’는 ‘민소(憫笑, 가볍게 웃음)할 조선인의 폭행’이라는 제목의 삽화와 함께 “폭한(暴漢)을 잡고 보니 우매한 농민으로, 대사가 탄 기차라는 것도 모르고 술에 취하여 무의미하게 돌을 던진 것”이라는 설명을 붙였다. 또 대한매일신보는 ‘어디서 돌멩이가 날아 왔냐면’이라는 제목의 기사(1905년 11월 24일자)를 통해 “안양역 근처에 잠시 정차하였더니 돌연 돌멩이가 들어와 차창은 파손되고 이토의 몸과 얼굴을 스치고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날 오후 7시에 서울로 돌아왔다”고 전했다. ‘을사늑약’으로 비통했던 국민들의 심정을 대변해 이토 히로부미에게 돌을 던진 사람은 바로 원태우 지사였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안양역을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친한 동료들과 함께 철로에 돌을 쌓아 열차의 탈선을 유도, 전복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거사 직전 결과가 두려운 동료 한 명이 돌을 치웠고, 원태우 지사가 근처에 있던 주먹만 한 돌멩이를 이토에게 던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체포됐다. 이 사건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 권24 ‘이토대사 탑승 열차 위해범 원태근 조치 건’이라는 문서(이 선고서에서는 원태우 지사를 원태근으로 잘못 기재하고 있다)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2개월의 형을 살고 태형 100대를 맞았다. 또한 이때의 혹독한 고문으로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았으며, 후사도 얻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 일제는 원 지사의 의거를 축소하고 ‘취한의 악희’로 폄훼했다. 반면 이토 히로부미는 원 지사를 가벼운 죄로 처리할 것을 지시해 세간의 관심을 이끌었다. 이에 대해 중추원 의장을 지낸 김윤식은 ‘속음청사(續陰晴史)’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한민족을 능멸하고 겉으로는 국민을 보호한다 하면서 하등으로 보아 종이나 짐승 취급을 하였으며 스스로 자초한 화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이등박문이 자기 나라로 귀국할 때 일본인은 한인을 학대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겉으로는 체면치레고 말 같지 않은 소리라. 통분하고 울분을 금치 못한다. 송상도의 기려수필은 원태우 지사의 의거와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비교하면서 “안중근은 이토를 죽이고, 태근(원태우)은 이토를 죽이지 못했다. 이토가 중근의 탄환에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 꼬투리는 태근의 돌멩이에 있었다”고 평가했다. ▲파주 공릉장 시위를 이끌고 임정에 투신한 심상각 1919년 3월 28일, 파주 조리읍 봉일천리 공릉장에 30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 가운데 2000여 명은 발랑리 광탄면 사무소에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하고 공릉장까지 행진한 주민들이고, 나머지는 이 과정에서 합류한 인근 주민들이었다. 이날 공릉장 시위를 주도한 인물은 심상각이었다. 이들은 봉일천에 있던 헌병 주재소를 습격하기 시작했고, 위기감이 높아진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10명이 죽고 70여 명이 다쳤다. 역사는 이날 공릉장 시위를 경기 북부에서 가장 치열했던 독립만세운동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후 심상각은 중국 상해로 망명길에 올라 임시정부에 참여하며 요원으로 활동한다. 또 ‘동제사’에 가입해 활동하기도 했는데, ‘동제사’는 상해와 남경 지역을 기반으로 한 항일 독립운동단체였다. 10년 만에 귀국한 그는 신간회에 가입하기도 했지만, 곧 고향인 파주로 돌아와 광탄보통학교를 세우고 직접 교장으로 취임, 교육 사업에 전념하게 된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를 표방,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해 창립한 민족운동단체이다. 안재홍·이상재·백관수·신채호·신석우·유억겸·권동진 등 34명이 발기했다. 한편, 심상각과 함께 공릉장 시위를 계획했던 이들의 면면도 다양하다. 서울 경성대동법률학교를 나온 류영은 졸업 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일하다 일제의 침략정책을 감지하고 곧 사직했으며, 3·1만세운동이 발발하자 고향으로 와 시위를 계획했다. 또한 이로 인해 징역 1년형을 받았다. 김웅권의 경우 공릉장 시위 이후 중국 상해로 망명길에 올랐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연통제 조사원을 지냈다. 상해에서 후장대학을 졸업했고, 광복 후에는 이범석을 단장으로 하는 조선민족청년단 발족(1946년)에 참여해 총무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한백봉, 광주 분당장 3·1운동을 기획하다 광주군 돌마면에서도 3·1독립만세운동이 치열하게 벌어졌는데, 이 운동을 이끈 주역이 한백봉이다. 그는 일가친천과 지역 유지들을 규합해 만세운동을 준비하는 한편 인근 낙생면장인 남태희에게도 만세운동 참여를 제안했다. 옛 광주시 낙생면은 지금의 판교 지역에 해당한다. 이들이 정한 거사일은 분당장날인 27일. 거사를 하루 앞둔 26일 밤, 그는 돌마면 율리 주민 50여 명과 함께 뒷산에 올랐고, 새벽까지 봉화를 밝히며 횃불을 들고 다음날 있을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을 예고했다. 이날 시위를 보고한 ‘일본외무성 육해군문서’에 따르면 당시 분당리 장날 모인 주민들은 3000여 명에 달했다. 또한 책 ‘3·1운동 비사’에는 이 시위의 규모와 양상에 대해 ‘만세 시위를 마치고 돌아올 때 일본인 헌병도 함께 만세를 부를 정도로 격렬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로 인해 한백봉은 연행돼 4일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고, 1년의 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된다. 재판 과정에서 “나의 행위는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와 인도(人道)에 근거해 의사 발동한 것으로 범죄가 아니다”라고 항변했지만 일본인 판사는 이를 일축했다. 분당리 장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게 실형을 받은 그는 일본 경찰에 붙잡힌 순간에도 태극기를 품에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옥고를 치르고도 독립운동에 대한 열의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한백봉은 농민운동과 문맹퇴치운동 등을 이어가다 1927년 분당리 장날 만세 시위를 함께 이끌었던 한순회와 힘을 모아 신간회 광주지회를 구성했고, 간사를 맡게 됐다. 그는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산될 때까지 임원으로 활동하며 지역 사회의 물산장려운동, 문맹퇴치운동, 농민운동에 앞장섰다. 신간회가 해체된 이후에도 광주 지역 유림을 이끌면서, 충렬서원과 광주 향교를 중심으로 유림들의 항일 독립정신을 일깨우는데 앞장섰다. 우리 정부는 1990년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또 지난 2007년 성남문화원과 성남 3·1운동기념사업회는 ‘송헌 한백봉 선생 묘비 제막식’을 열기도 했다.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 ]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박물관이 10월 한 달간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청산을 위한 독립운동 유물기증 캠페인’을 진행한 가운데, 도민들의 관심이 이어졌다. 이번 캠페인은 지역의 독립운동 역사를 보존·계승하고 도민들의 유물기증 참여 활성화를 위해 열렸다. 이 밖에도 경기도박물관은 도내 역사, 문화와 관련된 유물이나 자료를 기증받고 있다. 기증 의사가 있는 경우 전화 또는 이메일, 박물관에 직접 방문해 기증에 대한 안내를 받으면 된다. 이후 기증유물 심의를 위해 유물기증심의위원회가 개최되며, 심의 결과에 따라 수증 여부를 결정하고 통보한다. 이 절차를 마치면 기증신청서를 작성하고 접수한 뒤 경기도박물관은 유물을 인수한다. 기증처리는 기증증서를 발급하고, 기증유물은 박물관 소장품으로 등록해 영구 보존한다. 보존처리가 시급한 문화재는 복원 수리하고, 중요 자료의 경우 국가 및 도 문화재로 지정 신청을 하기도 한다. 기증자에게는 기증증서, 감사패를 증정하고, 박물관 전시실 내에 기증자 성명을 영구 게시한다. 박물관 홈페이지에도 기증자 및 기증유물을 공개하며, 특별전시 개막식 등 주요행사에 초청한다. 경기도박물관은 지난 8월 ‘2021년도 경기도박물관 유물 구입’ 공고를 냈다. 박물관 소장자료 관리지침 제2장 4조·5조에 의거한 올해 구입대상 유물은 ▲대한제국기 관련 자료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자료 ▲경기도 독립운동 관련 자료(독립운동가 친필자료, 일기, 사진 등) ▲일제강점기 전적 자료(잡지 초간본, 일기 등) ▲근대 회화, 복식(장신구 포함), 목가구(대한제국~일제강점기) 등이다. 접수기간은 8월 17일부터 8월 20일까지였으며, 655건(1697점)이 접수됐다. 경기도박물관에서 소장품 관리를 맡고 있는 박본수 책임학예사는 “예산을 들여서 지난 8월에 유물구입 공고를 냈고 9월부터 실물접수를 통해 꽤 많은 유물이 모였다. 내부, 외부평가를 거쳐서 구입대상으로 어느 정도 물망에 오른 것들이 최종 확정을 앞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류접수 된 유물 중 실제 실물접수는 115건(277점)이었으며, 1차 내부 위원평가와 2차 외부 위원평가를 거쳐 56건(156점)이 구입 대상으로 결정됐다. 이에 박물관 측은 지난 26일 구입 예정 유물 화상자료를 공개하며 “도난 혹은 분실 등 불법적으로 유통되는 문화재로 의심되는 유물이 있거나 의견이 있으신 경우 연락처로 알려주시기 바란다”고 안내했다. 구입예정 유물 화상자료는 143점에 달하는 51건이다. 구입예정인 유물들이 보관된 경기도박물관에서 박본수 책임학예사를 만나 유물들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오얏꽃 문양 새겨진 김병엽 호위대장의 의복 먼저,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청산을 위한 독립운동 유물기증 캠페인’을 통해 박물관에 기증된 1건의 유물 및 유품이 있다. 바로 1907년 순종의 호위대장이었던 김병엽 대장의 예복과 대한국 기념장 증서 등이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쎄, 이웃들에게 장군이라 불린 그는 1900년 무관학교를 졸업했으며, 1905년 시위보병 제1연대 제2대대 중대장을 맡았다. 이 유물·유품은 안동 김씨 김병엽 선생 가족에 의해 경기도박물관에 기증된 것이다. 예복을 보면 소매 끝이 붉고 계급을 알려주는 금줄이 있으며, 팔꿈치 부분에는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이 수놓여 있다. 예복의 단추에도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박본수 책임학예사는 “기념장 증서와 관련된 유물인 것이다. 집안에서 간직하다가 박물관에 위탁하고, 이번 기회로 기증받게 됐다”며 “아쉽게도 하의는 남아있지 않지만 역사적 가치가 높은 만큼 새로 만들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당 김은호와 위창 오세창의 합작 ‘서화대련’ 근대기 화가 이당 김은호와 위창 오세창이 비단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합작한 ‘서화대련’은 ‘시원하고 깨끗한 가슴은 물거울처럼 맑고, 온화한 기상은 피어오르는 봄바람 마냥 따스하구나’란 의미가 담겨 있다. 김은호는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와 있으며, 오세창은 민족 33인 중 한 명이다.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그 당시 산물이란 평이다. ◆심전 안중식의 ‘취태백도’ “무신년 가을에 취해서 그리다. 술에 취한 이태백 그림을 춘파 대인에게 드리다.” 박본수 책임학예사는 이 그림을 가리키며 “이 그림을 그린 심전 안중식이란 분은 조선 말기의 화가 오원 장승업의 제자”라고 소개했다. 덧붙여 “당시 우국지사들이 나라를 잃고 절명한 분들도 있고 그 슬픔을 술로 달랬다고 한다. 술에 취한 이태백을 통해 자신들의 모습과 생각을 투영한 작품이라 볼 수 있다”고 했다. ◆뿌리가 드러난 난 ‘노근란도’ 또 하나의 작품은 심전 안중식이 그린 노근란도(露根蘭圖)로, 뿌리가 훤히 드러난 난의 모습에 눈길이 간다. 안중식이 정소남의 작품을 본 뜬 것인데, 중국 송말원초 때 화가 정소남은 망국에 대한 변함없는 충절의 상징을 담아 묵난화법을 창시했다고 알려져 있다. 안중식 역시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잃고 뿌리 잃은 백성들이란 의미를 담아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닐까 싶다. ◆자수 태극기와 수원 옛모습 담긴 엽서 대한제국 시대의 자수 태극기는 희귀한 자료이며, 1930년대 수원의 전경을 담은 엽서 30여 점도 있다. 박본수 책임학예사는 “자수 태극기를 보면 액자 뒤는 완전 삭아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고 말했고, “화령전, 수원역, 방화수류정 등 옛 모습이 담긴 엽서만 모으셨다고 한다. 수원의 옛 모습이기에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세계교통전도와 우리나라 소식이 실린 해외 신문들 특히 구입유물 중에서 각종 지도와 해외 신문 역시 눈여겨 볼 만했다. 세계교통전도는 한일합병 직전 1909년 대한제국에서 발행한 것으로, 바다해상에는 항로와 항해가 도식돼 있고 지도 상단, 하단을 보면 세계 국기들과 함께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서울에서 일본군이 고종 퇴위 반대시위를 진압하는 모습이 담긴 1907년 8월 4일 발행된 신문. ‘한국의 고난’이란 제목으로 고종황제의 헤이그 밀사 사건 후 고종의 퇴위를 반대하는 시위와 시위대를 진압하는 일본군의 삽화가 담겨 있다. 또 1900년 12월 16일 발행된 신문은 프랑스에서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한국관의 모습을 그렸다. 경복궁 근정전을 재현한 전시장을 배경으로 한국의 다양한 의상과 공예품, 태극기를 볼 수 있다. [ 경기신문 = 신연경 기자 ]
3·1운동 102주년과 광복 76주년을 맞이한 2021년, 경기도에서는 일제잔재 청산을 위한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대표이사 강헌)이 시행하고 있는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추진 민간공모 지원사업’은 2019년부터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과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사업의 지속사업으로 운영 중이다. 해당 공모는 ▲예술창작(연극, 무용, 음악, 인형극) ▲콘텐츠 개발(체험, 교육, 캠페인) ▲학술연구(가치공유 학술대회, 공청회 등) 분야를 지원하며, 대한민국의 뿌리를 이루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정신을 계승·발전시키는 것뿐 아니라 문화예술 분야의 일제잔재 청산과 관련된 문화 예술 콘텐츠를 경기도민에게 제공하기 위한 목적이다. 경기도의회 역시 지난 2019년 11월 5일, 도내에 남아있는 친일잔재 청산의 방향과 범위를 설정하고 원활한 청산 작업을 지원하고자 ‘친일잔재청산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우리의 잘못된 과거를 성찰해 공정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우리 민족의 과제”라며 도내에 잔존하고 있는 일제잔재를 성공적으로 청산하도록 열심히 활동하겠다는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한 차례 활동 기간을 연장해 올해 5월 4일 활동을 종료했으며, 주요 활동은 생활 속 뿌리내리고 있는 일본식 용어, 지명, 문화, 친일파의 예술품 등 친일잔재를 청산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당시 김경호 친일잔재청산 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의회 차원에서도 경기도민과의 공감대 형성을 통해 일제잔재가 청산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고, 활동을 마치면서는 “도민과 함께하는 실천 운동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앞으로도 역사 정의를 실천하는 다양한 활동이 추진되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또 채신덕 부위원장이 대표 발의한 ‘경기도 일제잔재 청산에 관한 조례’가 4월 29일 열린 제351회 임시회 제4차 본회의에서 원안가결로 통과되면서 일제잔재 청산 사업 추진을 위한 기반을 조성했다. 경기도의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공동 발의한 조례안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시행과 다양한 활동에도 일제잔재가 청산되지 않고 있음을 꼬집으며, 경기도에 남아있는 일제잔재를 청산함으로써 역사의 진실과 민족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도민에게 자주독립과 애국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제정됐다. 이 조례는 일본제국주의가 국권을 침탈한 후 경기도에 남아 있는 일제잔재를 조사해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청산함으로써 사회정의 구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정의하는 ‘일제잔재’는 일본제국주의 및 친일반민족행위자에 의해 경기도에 남아있는 일본제국주의의 모든 흔적을 말한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제4조 일제잔재 청산을 추진하기 위해 추진계획에 포함되어야 할 사항, 제5조 경기도지사가 추진할 수 있는 사업과 예산의 지원, 추진 부서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채신덕 의원은 “일제잔재 청산은 일회성에 그칠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넓은 범위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경기도 일제잔재 청산에 관한 조례’를 바탕으로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박물관은 지역의 독립운동 역사를 보존·계승하고 도민들의 유물기증 참여 활성화를 위한 캠페인을 진행했다. 경기도박물관은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및 독립운동 관련 유물의 구입과 기증을 통해 도내 근대역사문화 정체성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를 확보할 계획이다. 더 나아가 향후 기증 유물 중심의 특별전과 학술행사를 개최하고, 도민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한 홍보 활동을 적극적으로 이어갈 예정이다. 경기도박물관 박본수 책임학예사는 “경기도의회에서 2~3년 전부터 일제잔제 청산, 국외문화재 환수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올해 관련 조례가 제정됐고, 경기도에서는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박물관에서는 관련 유물 수집과 기증, 두 가지 방향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고, 향후 전시까지 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다”면서 “31개 시·군에 포스터와 리플렛을 보내 도민들이 캠페인에 관심을 갖고 유물을 기증할 수 있도록 알리고 있다”고 했다. 박본수 책임학예사는 경기도박물관에서 구입·기증·위탁 및 기증자 네트워크 관리, 기증유물 조사연구 및 해제집 발간, 국외반출문화재 유물 구입 및 기증 등 소장품 수집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경기도박물관은 1996년 개관 이래 도내 역사, 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유물을 수집·보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기증된 유물은 과학적 보존처리를 거쳐 안전한 수장시설에서 보관되며, 전시와 연구를 통해 도민뿐 아니라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과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박물관에 따르면 현재 소장품의 약 50%에 달하는 기증유물은 박물관 설립의 모태가 됐다고 볼 수 있다. 경기도박물관 측은 “앞으로도 우리 도와 관련한 유물을 확보하고 보존과 전승을 위해 노력해 경기도 대표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한다”며 관심과 참여를 당부했다. [ 경기신문 = 신연경 기자 ]
경기(京畿)는 사전적인 의미로는 원래 ‘경’은 ‘천자(天子)가 도읍한 경사(京師)’를 뜻하고, ‘기’는 ‘천자의 거주지인 왕성(王城)을 중심으로 사방 500리 이내의 땅’을 의미했으나 점차 ‘왕도의 외곽지역’이라는 일반적 개념으로 사용됐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조선 시대 왕도와 왕실을 보위하기 위해 설치된 왕도의 외곽지역을 말한다. 또 행정상의 경기도는 서울과 인천을 제외한 서울 근방의 지역이었다. 경기도의 인문지리적 조건은 항일운동사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의병운동은 경기도가 중심이 되어 서울로 향했고, 독립운동의 경우 서울에 소재한 일제 조선총독부가 독립군의 궁극적인 공격 대상이 됐다. 특히 경기도의 항일운동은 일제의 통감부나 조선총독부 공략의 역할을 담당한 경우가 많았다. 경기도의 항일투쟁이야말로 한국 근대사 항일투쟁에서 중요하면서도 핵심적인 활동을 담고 있다. 3·1운동의 분수령이 된 ‘2·8독립선언’ 일제는 1910년 조선을 병합하면서 강압적인 무단통치와 토지조사사업 등을 통해 국민들의 생존까지 위협했다. 이에 일제에 대한 분노와 저항은 전 민족적인 항일운동으로 일원화될 수 있는 정치·사회적 기반 조성으로 이어졌다. 1918년 말부터 국내에서는 이미 학생·종교단체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독립운동이 계획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일본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소식이 전해졌다. 도쿄 조선청년독립단이 주동한 ‘2·8독립선언’은 일본에 유학 중이던 한국인 남녀 학생들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한 사건이다. 대표는 최팔용·윤창석·김도연·이종근·이광수·송계백·김철수·최근우·백관수·김상덕·서춘 등이다. 이들은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자극받아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한국유학생 대회를 열고, 60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최팔용이 대표로 나가 이광수가 작성한 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 만장일치로 가결해 일본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려다가 일본경찰의 제지로 실패했다. 4개항으로 구성된 결의문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한일합병은 우리 민족의 자유의사에서 나오지 않았고, 우리 민족의 생존발전을 위협하는 등 독립 주장 ▲둘째, 일본의회 및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 대회 결의로 우리 민족의 운명을 판결할 기회 요구 ▲만국회의 민족자결주의(민족들은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내용)를 우리 민족에게 적용, 일본 주재 각국 대·공사가 이 같은 내용을 각 그 정부에 전달할 것 ▲넷째, 모든 항목의 요구가 실패할 경우 일본에 대해 영원히 혈전을 선언함 등이다. 이 사건으로 주동자 60여 명이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됐고, 그 중 9명은 일체의 방청이 금지된 채 열린 재판에서 출판법 위반으로 2명은 1년, 나머지는 9개월에서 3개월까지 금고에 처해졌다. 그러한 2·8독립선언은 곧장 국내 민족지도자 및 학생들에게 알려져 3·1운동을 일으키는 한 계기가 됐다. 2월 28일 밤까지 민족대표 33인이 선정됐고, 3월 1일 아침 각 집 앞에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이 뿌려진데 이어 오후 2시 정각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던 태화관(泰和館)이라는 요릿집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기에 이른다. 당초에는 탑골공원에서 발표 예정이었으나, 유혈사태가 일어날 것을 우려해 장소를 변경, 조용히 선언식을 진행했다. 선언문을 낭독한 민족대표 33인은 즉시 일본경찰에 자수하고 순순히 연행됐으며,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머뭇거리다가 대표들과는 별도로 선언식을 진행하고 만세운동을 개시하게 된다. 이때 33인은 옥고를 치렀으며,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도 있고, 이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사한 사람도 많았다. 치열했던 경기도의 3·1운동 및 다양한 항일운동 경기도 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치열하게 만세시위가 벌어진 지역이다. 1919년 3월부터 3개월간 추이를 보면 경기도와 경성부의 합계 횟수가 415회이고, 이 가운데 경성부의 31회를 제외하면 경기도에서 벌어진 것이 384회나 됐다. 그러니 처벌자의 숫자에서도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전국의 지역별 탄압 수치에 관한 연구 자료에 따르면 총 776건 중 경기도가 256건으로 전체 32%로 나타났다. 특히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교회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은 경기도 3·1운동의 치열함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모두 28명이 무참히 살해 되고 민가 30여 채가 불에 탔다. 3·1운동 이후 항일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독립운동의 이념과 노선도 다양하게 분화됐다. 한편에선 실력양성운동과 자치운동 같은 타협적인 노선이, 다른 한편으로는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좌우 합작해 신간회를 결성하게 되는데, 1927년 2월의 일이다. 이들은 ▲정치· 경제적 각성을 촉구함 ▲단결을 공고히 함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등을 행동 강령으로 내세웠고, 연말까지 전국에 100여 개 지회를 설립하며 조직을 갖췄다. 경기도 지역에는 1927년 6월 경성을 시작으로 8월 성남과 광주, 10월 수원, 11월 안성, 12월 인천, 1928년 3월과 6월 각각 고양 서부지역과 강화가, 1929년 8월 장호원, 1931년 1월 광흥지회 등이 설립됐다. 신간회는 지회를 중심으로 각 지역 특성에 맞게 회관 건립, 이재민 구제 등 사회구제 활동과 함께 언론, 집회, 결사, 출판 등의 자유 쟁취와 청소년·부인 형평 운동을 지원하는 사업을 펼쳤다. 여성단체 근우회 역시 이 시기 좌우 합작으로 생겨난 전국적인 여성조직으로, 1927년 5월 구성된 후 1929년까지 국내에 57개, 해외에 2개 지회가 만들어졌다. 경기도에는 개성, 인천 등지에 형성돼 남녀평등, 부녀노동자의 보호, 생활개선 등에 앞장섰다. 그런가 하면 노동계의 조직화와 노동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도 했다. 1920년 4월 최초의 대중적 노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지부가 인천과 강화, 개성에서 조직됐고, 1922년에는 인천노동연맹이 노동조합 성격으로 결성됐다. 1920년대 말에는 파업의 참여 범위가 확대, 광산노동자와 토목노동자의 파업이 증가하는 모습도 보였다. 1930년대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의 민족적, 계급적 각성이 높아졌다는 특징이 있는데, 일제의 타도와 민족의 독립을 이루지 않고서는 이러한 상황이 개선될 수 없었기 때문에 민족독립운동의 성격을 띠게 됐다. 경기도 각 지역에서는 소작인들이 단결해 동양척식주식회사나 지주의 수탈과 횡포에 대항해 소작쟁의를 벌였다. 1930년 3월 수원과 진위(현 평택) 지역에서 수진농민조합이 창립된 것과 같이 혁명적인 농민운동 단체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함께 경기지역에선 각 영역에 걸쳐 여러 가지 항일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정치적으론 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이, 사회경제적으로는 농민운동에서부터 노동·여성·학생·소년·물산장려운동, 협동조합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개됐다. 수원·인천·개성을 중심으로 민립학교들의 민족교육을 비롯한 문화운동 등 모든 영역에서 독립운동이 전개된 곳도 경기도였다. 우선, 1919년 5월 결성된 대한독립애국단의 후신으로, 11월 결성된 혈복단의 수원지부인 ‘수원 혈복단’이 있었다. 수원에서 서울로 통학하던 학생들이 주축으로 움직였으며, 구국민단으로 이름을 바꾼 후에는 상해 임시정부와 관계를 맺고 독립신문의 배포를 담당했다. 또 수원고등농립학교 학생들은 농촌계몽운동, 천도교 조선농민사 수원지부 설치, 야학운동 등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학생운동은 1927년 6월 건아단, 1928년 7월 조선개척사 등으로 이어졌다. 이밖에 경기지역 학생 비밀결사운동으로는 조선학생동지회의 제2의 3·1운동 계획, 신공공립보통학교 졸업생이 중심이 된 조선예술호연구 구락부의 무장항쟁계획, 강제징병을 피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포천 보덕사 조선민족협동단 무장투쟁 기도 등을 꼽을 수 있다. 1920년대 학생운동은 학교 내부의 문제인 동시에 일제에 대한 반일문제로 출발, 일본인 교장과 교사 배척 등의 이슈로 동맹휴학을 단행하거나 학생비밀결사 활동을 벌이는 등으로 전개됐다. 1930년대 학생운동의 중요한 부분은 농촌계몽운동으로, 일제의 우민화 교육정책에 반대해 문맹 퇴치와 농민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전국에서 펼쳐졌다. 개성 송도고보, 미리흠여학교, 호수돈여고보 등의 학교가 문자보급운동에 적극적이었고, 브나로드 운동 참여는 경기도가 가장 많았다. 이와 같은 학생들의 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곳으로 수원, 안성, 양주, 포천, 고양, 시흥, 광주, 강화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대표적인 것이 화성군 샘골마을과 주변 지역에서 벌인 최용신의 농촌계몽 운동이다. 3·1운동 후에는 특히 도시와 농촌에서 여성 교육을 위한 강습회나 토론회 등이 활발하게 진행됐는데, 경기도 내에 부녀들을 위한 야학이 40여 개소가 운영됐다. 여성은 다음 세대 어머니로서, 여성 교육은 미래 세대와 민족의 미래를 밝히는 민족운동의 일환이었다.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 ]
“터졌구나 터졌구나 조선 독립성, 십년을 참고 참아 이제 터졌구나. 삼천리금수강산 이천만 민족, 살았구나 살았구나 이 한 소리에 만세 만세 독립 만만세.” 독립을 향한 열망과 독립운동에 대한 반가움이 담긴 이 노래는 1919년 3·1 운동 당시 ‘대한 독립만세’ 함성과 함께 곳곳에서 부르던 ‘독립가’의 가사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노래지만 현실에서는 이를 아는 이는 드물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지배에 맞선 투쟁의 음악인 항일음악, 해방 쟁취와 자주독립을 이루고 민족국가 수립을 목표로 불렸던 이 노래들은 자주독립을 한 현재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런 점에서 지난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출간해 전파에 나섰다. 그로부터 4년여가 지난 지금, 민족문제연구소는 국민들이 항일음악을 쉽게 듣고 부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방학진 민족연구소 기획실장은 “우리나라 항일독립운동 노래의 특징은 서정적인, 고향을 그리는 부분이 많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향을 떠나 망명을 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기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러한 항일노래를 학교의 종소리, 대중교통 속 음악 등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국민들이 독립운동 노래를 듣고 흥얼거리는 것이 목표”라고 전했다. 한일 과거사 청산에 앞장서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 그들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여전히 남아있는 일제잔재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힘쓰고 있기도 하다. 방학진 실장은 “과거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에 친일음악가들이 만든 곡들이 많았다. 현재는 대부분의 곡이 빠졌지만 아쉬운 점은 독립군가를 제외하면 그 자리에 항일독립운동의 노래가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헌법에 명시하고 있음에도 독립운동가들이 실제 부르고 들었던 항일 노래를 학교 현장에서 교육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독립운동의 정신에 대해 반기하는 것”이라 덧붙였다. 그와 연구소는 교과서 내 독립운동 노래 수록과 군대에서도 항일군가를 배우고 부르는 것을 목표로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음악이라는 것은 생활 속에서 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최소 하루에 10회 이상 듣는 종소리에 항일음악을 담아 매일매일 들려준다면 독립운동의 생활화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 대학생 시절부터 항일 및 일제잔재 청산을 위해 자원봉사를 하는 등 관심이 많았다는 방학진 기획실장은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이유는 없다”며 “친일문제가 오랫동안 꺼내서는 안 될 금기 영역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이 민주화가 되면서 말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용기 있게 말하는 단체와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고 이야기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학생들이 독립운동 역사를 재미있게 배울 수 있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한 방 기획실장. 그는 “독립운동 교육이라는 것이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지 못하고, 암기과목이란 생각만 들게 한다는 점이 안타깝다. 오감을 통한 교육으로 조금 더 현실적이고 생동감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사상과 생각이 담긴 음악을 통해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느낄 수 있을 것”이라며 “영정 속 노년의 모습으로만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노래 등을 통해 재미를 갖도록 해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사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 현재에도 20~30년 전 교육방식으로 독립운동사를 배우고 있다는 점이 또한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 중 열네 분이 살아 계시다. 만약 광복 80주년을 맞이하는 2025년 이분들이 돌아가신다면, 우리는 앞으로 독립운동가가 없는 시대를 살아야 한다”며 “독립운동가 부재의 시대에 우리 사회가 어떻게 교육을 시킬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기”라 답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런 문제에 대해 생활 속에서 쉽게 독립운동가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방 기획실장은 “지역 화폐 온누리 상품권과 같은 지역 화폐를 거의 대부분 지자체가 다 발행하고 있는데 그 디자인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을 이용하고 있다. 경기도 구리시나 경상남도 창원시의 경우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을 화폐에 넣어 발행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런 식으로 생각만 바꾼다면 비용을 적게 들이고도 독립운동에 대해 알릴 수 있다. 매일 쓰는 지역화폐 더 나아가 지폐에도 독립운동가의 디자인을 넣는다면 쉽게 접할 수 있다”면서 “독립운동을 통해 해방을 이룬 나라 중 독립운동가가 지폐에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독립운동이 중요하다고 강조는 하지만 현실적인 실천이 부족하지 않나 싶다”고 부연했다. 끝으로 그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의 제국주의와 싸웠다는 것이지 일본, 일본인들에 맞섰다는 점이 아니란 것이다. 또한 그런 제국주의, 파시즘이 어떠한 형태로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일제가 조선인들을 폄하하는 모습이 현재 우리가 동남아 지역 사람들이나 난민들을 무시하는 모습, 학벌과 지역으로 차별을 두는 모습과 유사하다”며 “일제잔재 청산이라는 것이 그들이 남겨놓은 유무형의 제도와 정신 등을 바꾸는 것이다. 역사를 진정으로 공부한다는 것은 지금 시대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투영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의 말처럼 우리 모두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에 분노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희생에 감사한 마음은 갖고 있지만, 일상에서 그러한 마음을 행동으로 보이고 있는지는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난 1991년 반민특위의 정신과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故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받아 설립돼 한국 근현대사의 쟁점 및 과제 연구와 한일 과거사 청산에 힘써온 민족연문제연구소의 노력에도 여전히 곳곳엔 그 잔재들이 남아있는 실정이다. 이제는 특정한 단체나 사람들에게 잔재청산의 과업을 맡겨둘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이러한 활동에 관심을 갖고 힘을 보태야 할 때이다. [ 경기신문 = 김도균 기자 ]
1911년 6월 10일 만주 서간도 지역에서 신흥강습소로 출발해 일제 탄압으로 1920년 폐교되기까지 독립군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가 올해로 설립 110주년을 맞이한 가운데 역사적 의미가 다시금 조명되고 있다. 항일무장투쟁의 산실 신흥무관학교는 항일독립운동 기지의 건설을 위해 이회영과 이시영, 이동녕, 이상룡 등이 중국 지린성 류허현 삼원포에 설립한 신흥강습소가 그 시작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1907년 결성된 항일비밀조직 신민회가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공식노선으로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의했다. 같은해 12월 이회영과 이시영 등 6형제를 시작으로 이듬해 2월 이상룡과 김동삼 등이 서간도로 이주한 뒤 5월에 자치기관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신흥(新興)이라는 뜻은 신민회의 ‘신(新)’과 구국투쟁이 왕성하게 일어난다는 의미인 ‘흥(興)’을 합친 것으로, 이 학교가 신민회의 조직적 결의에서 비롯돼 독립운동을 목표로 설립됐음을 알 수 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신흥학교에 참여하기 위해 찾아오는 청년들이 늘어나면서 기존의 시설만으로 수용할 수 없게 됐고, 그해 5월 류허현 고산자로 본부를 옮기며 명칭을 신흥무관학교로 변경했다. 그러나 1920년 5월부터 일제가 서간도 일대 독립운동 세력에 대해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해 학교는 정상적인 운영이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3·1운동 이후 두만강과 압록강 접경지대에서 독립군이 활발히 활동했으나 일본군의 강요로 중국 관헌들 또한 근거지 이동을 요구하며 사실상 독립군을 탄압했다. 한 달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의 군대가 봉오동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일본군의 보복을 피해 학교로 몸을 숨겼지만, 결국 그해 7월 학교는 폐교됐다. 이 무렵 300여 명의 신흥무관학교 졸업생과 생도들이 교성대를 구성해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에 참여, 10월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110주년, 독립군 뜻 기리는 행사 열려 오늘날 우리에게는 뮤지컬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좀 더 친숙하게 느껴진다. 지난 2019년 육군은 항일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신흥무관학교를 배경으로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치열한 삶을 담은 창작 뮤지컬을 제작해 선보였다. 항일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신흥무관학교가 군대의 뿌리라는 인식에서 시작, 1907년부터 1920년까지 경술국치 전후 역사적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내용으로 잘 알려진 역사적 사건보다 혼란과 격변의 시대 한복판에 서 있었던 인물을 조명했다.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해 무관학교를 설립한 선각자들부터 조선, 일본, 만주 등 각지에서 찾아온 무관들, 무관학교가 배출한 수많은 투사 등 그들이 이끌어간 항일무장투쟁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그렸다. 국군의 뿌리를 다루는 뮤지컬이었던 만큼 당시 군 복무중이던 지창욱, 강하늘, 성규 등 배우들이 작품에 출연했다. 올해는 설립 110주년인 신흥무관학교의 잊혀진 숨은 주역들을 기리고자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전국 곳곳에서 열린다. 독립기념관은 앞서 6월 무명의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한 웹툰 ‘신흥무관학교 새벽의 노래’를 제작했다. 전 연령이 광복을 이루기 위해 치열했던 독립운동 과정을 쉽게 되새길 수 있도록 기획한 웹툰을 공식 홈페이지에 8회 연재했다. 남양주시는 6월 10일부터 12일까지 ‘신흥무관학교의 뿌리, 남양주!’를 주제로 사진전과 인문학 콘서트 등을 개최했다. 남양주는 평탄한 관직생활을 그만두고 자신의 안위를 뒤로한 채 모든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창설에 쓴 민족독립운동을 주동한 이석영 선생의 고향이다. 당시 이석영광장에서 열린 공연 중 관람객 모두가 한마음으로 ‘신흥무관학교 교가’를 부르며, 신흥무관학교의 뿌리가 남양주임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용인출신 독립운동가 예우해야 한다는 책임 느껴” “신흥무관학교 110주년을 맞아 그동안 공적이 과소평가되거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용인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재평가해서 제대로 예우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큽니다.” 신흥무관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있어 용인 지역 사람들의 활약을 밝힌 용인문화원과 용인학연구소는 이같이 밝혔다. 용인문화원은 경기문화재단 ‘2021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추진 민간공모 지원사업’에 선정돼 오는 11월 9일 부설 기관인 용인학연구소와 신흥무관학교 11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학술대회 ‘신흥무관학교와 용인사람들’은 신흥무관학교에서 활동한 용인독립운동가 여준, 김공집, 오광선, 이영선을 조명한다. 학술대회는 ▲1주제, 여준의 신흥무관학교 활동과 독립운동 ▲2주제, 김공집의 신흥무관학교 활동과 독립운동 ▲3주제, 오광선의 신흥무관학교 활동과 독립군 활동 ▲4주제, 이영선의 독립운동과 해방후 신흥학우단 활동을 다루며, 각각 박성순 단국대 교수와 박환 수원대 교수, 김명섭 단국대 연구교수, 조길생·김태근 용인학연구소장 등이 발표한다. 여준은 서전서숙과 오산학교에서 구국 교육운동에 전념하다가 국권피탈 후 서간도로 망명, 합니하의 신흥학교에 합류해 1913년부터 이 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해 기틀을 확립하고 독립군을 길러냈다. 그는 간도참변으로 폐교된 신흥무관학교를 부활시킨 검성학교를 세워 독립군 양성을 이어갔다. 김공집은 오산학교 출신으로 여준이 고향인 용인 죽릉리에 세운 삼악학교의 교사로 있다가 서간도로 망명, 스승과 함께 신흥학교에서도 활동했다. 죽릉리 삼악학교 출신인 오광선은 국권피탈 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이 학교 교관을 지냈다. 서로군정서 중대장으로도 활약했으며, 여준이 교장으로 있는 검성학교에서 군사 교관으로 있기도 했다. 이영선은 만주로 망명해 독립군으로 무장 투쟁을 전개하다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후 임시정부에서 국내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파견돼 피체됐으며 석방 후 남자현 여사 의거에 가담했다. 해방 후 귀국한 그는 귀환 동포 생계지원 활동을 하다가 재만주 신흥학우단이 결성되자 단장으로 활약하며 이시영과 함께 신흥학교의 부활을 위해 노력했다. 용인문화원과 용인학연구소는 공적이 과소 평가된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이 신흥무관학교에서 활약이 지대했다는 것을 밝혀 경기도민의 자긍심을 함양할 수 있는 역사콘텐츠를 제작, 그들의 업적을 알리는데 적극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한편, 이번 학술대회 내용은 발표와 토론을 통해 추후 ‘신흥무관학교와 용인사람들’ 책자로 발간될 예정이다. [ 경기신문 = 신연경 기자 ]
“그들의 생활은 명랑함과 심각함이 기묘하게 혼합됐다.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생명이 지속되는 한 마음껏 생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기막히게 멋진 친구들이었다.” 미국의 작가 님 웨일스는 자신의 저서 ‘아리랑’에서 무장독립운동을 펼치던 의열단에 대해 이같이 묘사했다. 1919년 만들어진 의열단은 1929년 해체될 때까지 무력투쟁을 통한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워왔다. 머나먼 이국 땅 상해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겠다는 그들의 숭고한 정신은 책, 영화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후대인 우리들에게 전해진다. 경기문화재단의 ‘2021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추진 민간공모 지원사업’에 선정돼 무대를 올린 ‘서울발레시어터’의 무용 ‘화양연화’는 일제강점기 민족의 한과 죽음을 각오한 채 독립에 대한 열망을 누구보다 뜨겁게 태운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최진수 예술감독이 이러한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에는 운명적인 우연이 있었다. 그는 “예전에 중국 상하이에 잠시 간 적이 있다. 그때 길을 걷다가 우연찮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발견했다. 그날의 경험이 영감이 돼 이번 작품을 기획했다”며 “공연을 준비하며 독립운동가 한 명 한 명을 찾아 조사를 했었다. 사실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에 맞춰 4월 29일 공연을 선보이고 싶었는데 여러 문제로 하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가상의 인물 강준의 삶을 통해 독립을 향한 헌신과 눈물, 당시를 살아가던 젊은이들의 열정을 담고자 했다는 최 감독. 이런 작품을 만든 그였지만 과거에는 ‘항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한다. 최 예술감독은 “나도 어렸을 때는 역사적인 부분에 대해 관심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매체를 통해 한국사를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 주는 강의나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당시 ‘중년의 무용가가 뭘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던 시기였는데 그런 강의를 듣다 보니 관심이 생기게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단체의 전대 선생님이나 예술감독님들께 항상 ‘발레단이라는 것은 항상 사회에 공헌을 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렇기 때문에 관심이 가던 역사를 화려한 춤으로 만들어 관객들에게 선사하면 그 안에 담긴 역사적 의식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덧붙였다.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음악과 소품, 의상 등 작은 것까지 그의 손이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최 감독 역시 작품 제작에 있어 빠져들었다고 했다. 작품 ‘화양연화’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식을 전하고 싶다는 최진수 예술감독. 그는 “요즘 세대들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의식이 우리 때보다 적은 것 같다. ‘욱일승천기’ 등 일제강점기를 그려낸 디자인이나 제품을 소비하는 모습을 보면 역사의식에 대해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또한 최 감독은 “그렇다고 반감을 갖자는 것은 아니다. 글로벌한 시대다 보니 일본의 제품을 사용할 수는 있으나 이러한 의식을 갖자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작품을 조금 더 다듬고 발전시켜 관객들에게 재미를 선사하는 한편, 이같은 정신을 전달하고 싶다는 그는 공연의 마지막 부분인 ‘아리랑’을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 꼽았다. 그는 “공연 마지막 장면이 아리랑이다. 관객들의 입장에선 뜬금없다고 느낄 수 있지만, 앞서 화려한 장면들이 끝나고 난 뒤 한국인들의 ‘한’을 표현한 부분이다”라며 “사람이 죽은 후 공간, 사람이 태어나기 전 공간, 아무것도 아닌 그런 공간을 통해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정서를 아리랑과 함께 녹여냈다”고 이야기했다. 그 역시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을 보일 정도였다고 했다. 이런 최 감독의 마음을 아는 듯 관객들의 반응이 가장 뜨거운 장면도 아리랑이 울려 퍼지는 엔딩 장면이다. 최진수 감독은 “마지막 장면이 호불호가 많이 갈렸던 것 같다. 클럽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 가장 좋았다는 관객들도 있었지만, 아리랑이 가장 좋았다는 관객들이 많았다. 나와 같이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서양의 대표적인 무용인 ‘발레’와 한국의 아픈 과거를 합치는 과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응당 해야 할 길이란 생각으로 묵묵히 걸었다고 했다. 그는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점이 한국에서 태어나,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해야 될 일인 것 같다”면서 “서양의 것을 받아들여 쫓아가는 것도 좋지만, 한국적인 것과 그런 색채를 입힌 예술은 대한민국 예술가들이 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재즈, 스윙 음악에 맞춰 펼쳐지는 발레는 관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한편, 그 이면에 담겨있는 의열단의 항일정신을 자연스레 스며들게 했다. 최 감독은 “기회가 된다면 작품을 더 업그레이드해 내년에 공연을 올리고 싶다. 가능하다면 많은 관객들이 찾아올 수 있는 곳에서 선보이고 싶다. 순수예술을 하고 있다 보니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다”면서 “이번 작품에서는 소품 등에서 아쉽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예산적인 측면이 괜찮다면 조금 더 자연스럽고 좋은 공연을 선사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최진수 예술감독은 항일에 대해 “작품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소속돼 있는 일본인 무용수들에게 일제강점기에 대한 콘텐츠를 보여줬다. 역사 속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고, 이를 왜곡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도 전하고 싶었다”며 “한국인, 일본인 구분 없이 사실에 대해 알아야 하고 그것에 대해 의식을 가지는 것이 지금의 ‘항일’이지 않을까 한다”고 대답했다. 2021년으로 26년째를 맞은 서울발레시어터는 한국이 발레 불모지 시절부터 창작 발레를 선보이며 국내 발레 전파에 힘쓰고 있다. 지난 2018년 단장을 맡아 그는 항일에 대한 창작 발레를 구상하고, 준비해 우리들에게 선보였다. 짧은 10년의 역사를 가진 의열단, 그들의 독립에 대한 의식과 항일에 대한 열망이 무용가들의 몸짓을 통해 여전히 살아있는 듯하다. 최진수 감독의 바람처럼 조금 더 발전한 작품을 통해 불꽃같았던 10년이 잊혀지지 않게, 조금 더 오랫동안 유지되길 바란다. [ 경기신문 = 김도균 기자 ]
“항일음악을 소재로 한 다양한 문화 콘텐츠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관심의 씨앗이 되길 소망합니다. 관심들이 모여 커질수록 진실된 역사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되며 우리의 정체성을 바로 알게 될 것입니다.” 항일음악은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반대한 투쟁 음악으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해방을 쟁취함으로써 자주독립을 이루고 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애국계몽운동을 비롯해 독립운동, 해방운동, 변혁운동 등을 아우르는 혁명음악으로, 그 중심에는 애국가, 독립가, 혁명가, 항일가요, 반일가요, 항일가곡 등 항일노래가 있다. 경기문화재단 ‘2021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추진 민간공모 지원사업’에 선정, ‘청년1919-2021’ 공연을 앞둔 예술단체 우주는 음악예술 분야의 일제잔재 청산과 항일음악을 대중들에게 소개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우주는 전통예술을 기반으로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대중들의 문화적 성향을 파악하고, 소통을 중요하게 고려하는 작품으로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관련 전문가들이 모여 10년 이상 호흡을 맞추고 있는 공연단체로 지난 2017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항일음악 330곡집’ 집필 참여를 계기로 ‘항일음악회’, ‘항일음악 토크콘서트’ 등 전국적인 규모의 행사를 통해 일제잔재 청산과 항일음악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한다. 이번 공연 ‘청년 1919-2021’은 김현희 예술감독과 김애자 연출, 문현정 조연출, 노관우 음악감독 등이 호흡을 맞춘다. 특히 우주의 노관우 음악감독은 항일음악 330곡집을 집필했던 고(故) 노동은 선생의 아들로 부친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항일음악창작극 탄생 배경은 항일 음악안에 녹아 있는 당시 독립운동의 정신을 대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2017년부터 공연을 기획한 우주는 항일음악을 현시대 사람들이 이질감 없이 들을 수 있도록 재편곡의 작업을 거쳐, 실제로 관객들이 당시의 독립운동 상황에 몰입해 항일음악을 기억할 수 있는 작품을 완성했다.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순간만큼은 하나 된 청년들 ‘청년1919-2021’은 수원 기생 김향화, 화성 제암리사건,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인 농촌계몽운동의 최용신 등 경기지역을 배경으로 한 독립운동가와 사건을 주제로 한다. 더불어 안창호 등이 작사해 널리 불리던 ‘격검가’, ‘그리운 강남’과 같이 당시의 항일음악들이 어우러진 공연이다. 이번 무대에는 그동안 공연을 진행하면서 ‘100여 년 전에 있었던 항일운동과 항일음악, 항일노래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과 어떤 연관이 있고,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생각해온 우주의 고민이 담겨있다. 단체의 감독, 연출 등이 머리를 맞대고, 1919년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청년과 2021년 현대를 치열하게 살고 있는 청년들이 이 땅에서 피, 땀 흘리며 열정을 다하는 같은 청년임에 틀림없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 결과가 바로 100년 전 항일운동을 하던 수많은 청년들을 공감하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준비한 이번 공연이다. 작품 속 대학 신입생이 된 물리학과 청년은 처음으로 듣는 대학교양 수업 ‘창의적 사고와 역사 읽기’에서 역사의 시간 흐름을 블랙홀 이론으로 설명한다. 모든 걸 삼키는 블랙홀에는 3·1운동, 제암리 사건, 해방, 6·25 전쟁 등 수많은 역사적 사건이 마구 빨려 들어가 있다. 블랙홀 속 3·1운동의 현장에서는 2021년 오늘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 청년 세 명이 식민지 역사의 현장에서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청년들과 만나게 된다. 만세 운동을 준비하며 모인 청년들의 뜨거운 토론 현장, 그곳에는 일본 경찰 앞에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청년, 제암리 사건의 부당함을 목격하며 치를 떠는 청년, 농촌 계몽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청년, 항일 노래를 부르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열정으로 이겨내는 청년들이 있다. 하지만 모두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순간 1919년의 청년과 2021년의 청년은 하나가 된다. ◇“고민과 노력들이 항일음악 관심의 씨앗 되길” 이번 공연은 당초 9월 25일 관객들과 만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한 차례 연기돼 오는 11월 15일 안산 상록구 보노마루소극장에서 열릴 예정이다. 공연에 앞서 김주경 우주 대표와 인터뷰를 통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는 “독립운동가나 사건들, 항일음악을 소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항일운동이 공연을 보는 관객 한 명 한 명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100년 전 항일운동이 과거가 아닌 현재가 되는 경험을 하게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작품 속 항일노래를 부르며 죽음의 두려움을 삶의 열정으로 이기는 청년들이 지금의 대한민국 청년들과 청년의 때를 보낸 어른들, 보내게 될 아이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예정된 공연이 미뤄졌지만 더욱 완성도 높은 무대로 관객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김 대표. 그는 “코로나로 공연이 미뤄진 것은 아쉽지만 공연 전까지 만전을 기하겠다”면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항일 음악에 대해 소개할 수 있어 영광스러웠다. 이번 공연이 가장 보람 있는 순간으로 남을 것 같다”고 부연했다. 단순히 음악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음악과 극이 어우러지고 확장된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 감격스럽다는 김 대표에게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는 공연 이후에 관객들을 더 많이 만나기 위해, 각급 학교에 찾아가는 공연을 할 수 있을지 추진해보겠다는 목표도 밝혔다. 뿐만 아니라 항일음악책 출판, 콘서트, 음악극 등 자신들의 노력이 앞으로 항일음악을 소재로 한 문화 콘텐츠들이 더욱 다양하게 제작될 수 있는 관심의 씨앗이 되길 바란다는 꿈도 이야기했다. 끝으로 김주경 대표는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로 끊임없이 항일음악을 소개해드리도록 열심히 고민하겠다”고 인사했다. [ 경기신문 = 신연경 기자 ]
불이 꺼진 공연장, 이육사 시인의 ‘광야’가 울려 퍼진다. 뒤이어 핀란드 민족주의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Jean Sibelius)의 ‘핀란디아’가 연주된다. 대한독립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안겨준 이육사의 시는 핀란드인들에게 같은 마음을 안겨준 시벨리우스의 곡과 만나 살아있는 역사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경기문화재단의 ‘2021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추진 민간공모 지원사업’에 선정, 공연을 펼친 광주시민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민족시인 이육사가 부른 항일노래’는 이육사의 시와 오케스트라의 연주 등이 어우러진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공연이다. 살아생전 31편의 시를 남기고 떠난 이육사, 그의 작품으로 공연을 만들어낸 김기원 지휘자는 “윤동주 시인은 정적인 느낌인 반면 이육사의 경우 행동적인 시인이라 생각했다. 이육사의 시를 주제로 잡은 만큼 시 낭송 부분은 꼭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 ‘광야’ 등 5편을 선정했다”고 말했다. 이어 “선정된 시에 맞게 새롭게 작곡하거나 편곡을 거쳤다. 또한 오케스트라가 서양의 곡이다 보니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곡은 없었다. 그래서 곡의 이미지나 태생에 초점을 맞춰 곡을 골랐다”고 덧붙였다. 그는 ‘대한혼가’, ‘새야새야 파랑새야’, ‘거국행’ 등을 편곡하는 한편, 시벨리우스와 스메타나 등 해외 민족주의 작곡가들의 곡을 이용해 이육사의 시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시구절의 운율에 맞춰 편곡한 곡을 배경으로 무용가가 펼치는 한국무용과 이육사 시인의 시는 귀와 눈, 피부를 통해 보는 이들에게 전달된다. 이 가운데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중 ‘몰다우’는 오스트리아의 통치하에서 일어난 체코의 문예부흥운동을 대표하는 곡이다. 마치 일제에 억압을 받았던 대한민국의 상황과 닮아있어 더욱 가슴을 적시는 대목이다. 김 지휘자는 “이전에는 항일음악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경기문화재단의 공모를 통해 관심이 생겼고 자료 등을 찾아보며 흥미를 갖게 됐다. 이육사 생가가 있는 안동을 방문하고 많은 서적을 찾아보며 공연 구성이 이뤄졌다”며 “재단의 프로젝트가 계속된다면 다른 방법으로 공연을 진행해 보고 싶다. 이미 그에 대한 아이디어는 구상해뒀다”고 귀뜸했다. 6개월여 준비 기간을 거치며 시인 이육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는 그는 “이육사라는 사람에 대해 공부를 하면 할 수록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혼자 관련된 자료를 보며 눈물을 훔친 적도 있다”면서 “민족을 위해 큰일을 한 우리 선조라는 것을 느꼈고, 의식도 많이 깬 기회인 것 같다. 독립운동가로서, 시인으로서 이육사를 알게 된 시간”이라 평했다. 펜으로 독립운동을 한 시인, 이육사. 김기원 지휘자는 이번 공연을 통해 그 혼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좌석 간 자리 띄우기를 시행하게 돼 많은 관람객을 유치하지 못해 아쉽다는 그의 말과는 달리 공연을 본 시민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특히 독립군가에 뒤이어 연주된 차이콥스키의 ‘1812’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그는 “이번 공연을 통해 시인의 삶과 총이 아닌 펜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그의 얼을 다시 재조명하고 그 의미를 돌아볼 수 있었으면 한다. 또한 대한의 독립을 바라는 이육사의 시에 해외 민족주의적 곡을 더해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다”면서 “러시아가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격파한 것을 묘사한 차이콥스키 ‘1812’란 곡에 대한 반응이 가장 좋았다”고 회상했다. 이어 “풍부하게 음악을 선사하기 위해 75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참가했다. 많은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좋은 반응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공연에 대한 긍정적인 연락도 받았다”고 부연했다. 광주시민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지난 2019년 창단된, 광주시를 대표하는 전문예술 공연 단체로, 광주시 문화예술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또한 지역 내 부족한 클래식 공연 및 문화향유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의 욕망이 대한민국을 집어삼켰던 시절, 총과 칼 대신 펜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이육사. 그의 소망과 바람, 혼과 열정은 여전히 시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민족시인 이육사가 부르는 항일노래’ 공연은 그 얼을 다시 한번 느끼고 되뇔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시간이었다. [ 경기신문 = 김도균 기자 ]
2021년 경기문화재단 지원 공모사업인 일제잔재청산 및 항일에 관한 사업의 일환으로 지난달 13일 ‘민족시인 이육사가 부르는 항일노래’가 관객들과 만남을 가졌다. 40년의 인생 동안 17번의 투옥에도 불구하고 항일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이자 그 정신을 31편의 시로 남긴 시인 이육사. 작품 초기에는 그 색이 옅었다고 하지만 그는 분명 펜을 들고 독립운동을 한 시인이다. 그의 작품 중 ‘광야’, ‘꽃’, ‘청포도’ 등 옥석을 골라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 보르딘의 ‘폴로비치안 댄스’,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중 ‘몰다우’, 차이콥스키의 ‘1812’ 등 곡과 합쳐 선사했다. 또한 테너, 무용, 연극배우 등이 출연해 공연을 풍성하게 만들면서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의 저항의식과 민족의식을 더욱 부각시켰다. 무대의 포문을 연 ‘광야’는 1845년 12월 17일 동생 이원조에 의해 발표된 것으로, 일제하의 절망적 현실 및 고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광명의 세계를 염원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시를 통해 저항의 씨앗을 뿌리며 광복을 기다린 이육사의 정신은 시로써 우리들에게 이어져오고 있다. 독립을 바라는 마음을 담은 시와 함께 연주되는 음악 역시 독립에 대한 의식을 고취시킨다. 가장 먼저 연주된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는 핀란드의 암울한 시기를 담고 있다. 니콜라이 2세가 다스리는 러시아에 의해 억압을 받은 조국 핀란드의 자치권과 언어 자유를 갈망하며 핀란드 민중들의 애국심 고취를 위해 작곡된 곡으로, 일제에 억압을 받던 우리 민족의 그것과 비슷하다. 이외에도 공연에서 연주된 모든 곡들이 모두 독립에 대한 국민들의 염원을 그린 것이다. 체코 프라하를 관통하는 젖줄인 몰다우강을 주제로 만들어진 ‘몰다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 하에 있었던 체코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그린 곡이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야욕으로 수많은 나라가 어려움에 빠졌던 시기 그들은 음악으로, 시로 독립에 대한 희망을 그렸다. 이육사가 그러했듯 시벨리우스도, 스메타나도 그랬다. 2021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 독립의 기쁨을 느끼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누리던 국가, 조국의 품속에서 그 소중함은 당연하고 사소한 것이 됐다. 하지만, 이러한 당연한 것들은 누군가의 희생과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나라 대한민국 그 네 글자에 담긴 선조들의 정신과 소중함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문화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주는 수단이자 계속해서 소통을 할 수 있는 창구다. 이육사의 시와 국내외 독립에 대한 희망을 담은 노래를 그린 이 공연은 우리가 잊고 살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 경기신문 = 김도균 기자 ]
“내가 선택한 길은 이거야.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조국 해방을 앞당길 수 있는 방법이야. 걱정마, 나 안 죽어. 살아서 조국 해방 꼭 두 눈으로 볼 거야.” 1926년 6월, 조선식산은행 폭탄미수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이 차례로 붙잡혀 감옥으로 들어왔다. 목숨을 내걸고 거사에 나섰지만, 실패하고 난 후였다. 도대체 왜 성공하지 못했을까? 어디서,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걸까? 기억과 상황을 더듬어 간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들은 거센 심리적 갈등에 몸부림치게 된다. 바로 ‘너희의 배후를 한 명이라도 적으면 살려 주겠다’는 종이 쪽지 한 장씩을 받게 됐기 때문이다. 살기 위한 갈등인 것이다. 경기문화재단의 ‘2021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추진 민간공모 지원사업’에 선정, 무대에 오른 ‘프로젝트 엘’의 연극 ‘그날 밤’은 이렇듯 추리와 심리, 서로 의심하는 와중에 극이 진행된다. 나라를 위해 죽겠다는 이도 있고, 또 간절히 살고 싶다는 인물의 이야기도 그려진다. 박제영 연출은 “그 당시 실제로 폭탄을 던진 다음 불발이 생각보다 많았다. 나석주 열사도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으나 터지지 않았고, 다른 건물로 넘어가 던졌는데도 불구하고 불발이 됐었다”면서, “그 자리에서 자결하려 했지만 그 마저도 일본군에게 제지를 당해 실패하고 감옥에서 순국하신 사건을 모티프로 잡았다”고 말했다. 나석주 열사의 이야기를 주제로 잡은 이유에 대해 민병훈 작가는 “일제 강점기 때 독립군들이 폭탄을 많이 이용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폭탄테러는 정말 목숨을 버릴 것을 각오하고 한 행위가 아니겠느냐”면서 이분들의 숭고한 죽음을 복원하는 의미로 접근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제 강점기에 관련된 일들을 일상생활에서 잊고 사는데, 이를 지속적으로 상기하는 게 중요하고 알아야 될 부분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유명진 대표는 “이 작품을 하면서 굉장히 놀란 부분도 있고, 근현대사에 대해 많이 배우고 탄탄해진 느낌”이라며 “근데 지금 젊은 친구들, 저희 크루 중에 갓 20살이 된 친구도 있고 어린 친구들도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모른다. 그런 부분에서 ‘문화가 더 쉽게 풀어준다면’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소개했다. 얼마 전 공연을 보러왔던 어린 관객들이 일제강점기에 대한 관심이 생겨 책도 구매하고 인터넷으로 찾아보기까지 했다는 얘길 들었다면서 좋아하는 유 대표의 얼굴에선 뿌듯함이 묻어났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젊은 사람들이 귀감이 돼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그래서 작품 마지막에 ‘아무리 개개인이 아무렇지 않아 보일지언정 개개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란 대사가 있다”고 부연했다. 또한 젊은 사람들이 소리를 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녀다. 역사도 그 중 한 부분이고, 계속해서 사회문제에 대한 화두를 던지겠다는 심산이다. “젊은 사람들이 이 시대에 어떤 고민을 하고 있고, 앞으로 나가기 위해선 어떤 행동들이 필요할까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꼭 역사물이 아니더라도 그 시대에 필요한 소리가 있다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프로젝트 ‘엘’은 2020년 만들어진 신생극단으로, 엘이란 단어는 불어로 날개라는 뜻이다. 이는 극단을 거쳐 간 사람들이 날개를 달고, 또 공연을 본 관객들 역시 훨훨 날아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 움직임 연극을 지향하고 있는데, 한국사람들에겐 다소 어색할 수 있는 움직임으로 서사를 풀어내는 극단인 것이다. 다만, 이번 작품 ‘그날 밤’은 정극에 가까운 스타일로 제작하기 위해 공을 많이 들였다. 유 대표는 “사실 이 작품은 7년 전 서울예술대학교에서 학사 학위 공연으로 한 번 올린 적이 있다. 그때 이 작품이 관객들에게 힘이 있고 이 시대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무언가로 다가와 언젠가 꼭 다시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에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고 말했다. 박 연출은 “과거 작품과 가장 달라졌다고 할 수 있는 포인트는 심리전이 더 강해졌다는 부분과 친일파라는 캐릭터가 생긴 것”이라며, “예전에는 단순히 일본에 지배당하고 있는 조선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고 풀이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그 안에서 변절하는 배신자가 나타나고,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들이 어떻게 심리적으로 압박하고 회유시키려고 하는지에 대한 장면이 많이 추가됐다. 또 그 안에서 흔들리는 인간적인 모습을 담아내고자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무대 위에는 거대한 문이 자리하고 있는데, 일제강점기 일본처럼 압도적인 모습을 담았다고 이은석 무대감독은 설명했다.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문 너머의 모습은 절대 볼 수도, 갈 수도 없을 것 같은. 이 문은 절망적이고 막막했던 일제강점기(현재)를 상징한다. 그리고 또 다른 문은 독립(미래)을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조명디자인은 특히나 돋보였다. 이차훈 조명감독은 “감옥이라는 공간이 갖고 있는 사실적인 빛의 바탕을 의도함과 동시에, 공간간의 대비와 인물의 일상이 잘 보일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고 했다. 또한 독립운동가들의 정의로운 희생이 보일 수 있도록 빛에도 메시지를 담았다고. 그날 밤이 느껴지는 음악도 작품에서 한 몫 한다. 피아노와 저음의 현악기 울림을 바탕으로 표현된 감정선이 아름답고도 슬프다. 김요찬 음향 감독에 따르면 시대적으로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관객에게는 클래식으로 익숙했던 소리들을 응용해 무거움과 묵직함으로 베이스를 설정하고, 이것과 조화롭게 에너지를 발산하는 멜로디를 만들어 넣었기 때문이다. 요즘 프로젝트 엘 안에서는 ‘마더블루’라고 해서 임신에 대한 얘기가 화제가 되고 있다. 크게 3가지 카테고리가 있는데, 그것은 청년에 대한 이야기, 환경에 대한 이야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문제거리 등이다. 또한 ‘마더블루’란 작품 이외에도 환경과 인권에 대한 부분을 담고 싶어 ‘신인류’란 작품도 계획 중에 있다는 게 유 대표의 말이다. 민병훈 작가는 “초고를 쓰고 첫 공연을 한 지 7년이 지났다. 무수한 말과 의미 사이에서 다시 극을 고치고 또 고쳤다. 시간이 쌓여 말이 되는 것, 그것은 역사뿐”이라며 “우리는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말들을 길러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이 여기 도착했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끊임없이 나라의 미래를 고민하며, 투쟁하고 죽음을 불사하는 그들의 정신은 과연 지금 세대에게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연극 ‘그날 밤’은 역사와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 ]
해방 76년째인 지금도 ‘친일 청산과 일제잔재 극복’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우리 모두가 동참해 찾아내고 뿌리 뽑아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갈 길이 멀다고 해 가지 않으면, 목적지는 그만큼 요원해질 뿐이다. 그런 점에서 경기도의 행보는 가히 주목할 만하다. 3·1운동 100주년이던 2019년부터 도내 친일잔재 조사를 시작으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아울러 ‘항일운동’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각종 사업들까지 활발히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화독립’을 완성하는 날까지,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나아가자는 의미를 담아 준비한 기획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진정한 ‘문화독립’ 완성하는 날까지 ② 일제잔재 청산, 지속적 실천운동 돼야 ③ 일제가 두려워 한, 민속신앙과 전통 ④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는 왜 사라졌나 ⑤ 숨겨진 의미 알면 쓰지 못할 일제잔재어 ⑥ 삼베 수의·유족 완장 장례문화, 전통 아니었다? ⑦ 항일 독립운동 정신, 문화예술 콘텐츠로 만나다 계속 3·1운동과 임시정부의 항일정신을 계승하고 일제잔재 청산을 위한 경기문화재단의 ‘2021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추진 민간공모 지원사업’, 그 활동에 동참한 뜻 깊은 행사들의 소개를 이어가고자 한다. 경기문화재단 민간공모 지원사업 ① 동상에 생명을 불어넣다. ‘소녀상은 살아있다’ 지난 2011년 12월 14일 서울 종로구 일본 대사관 앞,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기 수요시위 1000회를 기념해 최초로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청동조각상은 1920~1940년대 조선 소녀들의 일반적 외모를 가진 단발머리 모습으로 의자 위에 손을 꼭 쥔 채 맨발로 앉아있다. 소녀상의 단발머리는 부모와 고향으로부터의 단절을, 발꿈치가 들린 맨발은 전쟁 후에도 정착하지 못한 피해자들의 방황을 상징한다. 왼쪽 어깨 위 새는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과 현실을 이어주는 매개체를 뜻하며, 소녀상 옆에 놓인 빈 의자는 세상을 떠났거나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모든 피해자를 위한 자리이다. ‘소녀상은 살아있다’ 사진전을 기획한 ‘행복한 찍새’의 최성환 작가는 이 빈자리에 주목했다. 그는 “소녀상은 동상이지만 그 옆에 살아 숨 쉬는 사람을 앉혀 살아있는 우리가 소녀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시작하게 됐다”며 “사람들은 동상의 숫자를 늘려가며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한다. 작업의 한 부분이라 볼 수 있지만, 나 역시 현재를 살아가는 시민 중 한 사람이고 내가 처한 역사의 한 부분을 작업에 녹여 메시지를 공유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최 작가는 지난 6월 26일 김포한강중앙공원 평화의 소녀상을 시작으로, 양평물맑은시장, 일산문화공원, 동탄센트럴파크, 수원올림픽중앙공원 등 경기도 관내 5곳에서 시민들과 함께 전시를 준비했다. 최성환 작가는 “이전에 진행하던 인터뷰 사진 프로젝트 중 ‘소녀상은 살아있다’의 원류가 되는 기획의 첫 모델을 만나게 돼 본격적으로 기획을 하게 됐다”며 “2014년도 당시 혼자서 프로젝트를 이끌어 가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공공장소에서 촬영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절차 등이 복잡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어려움 속 그는 경기문화재단의 ‘2021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추진 민간공모 지원사업’에 대해 알게 됐고, 이를 통해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는 “소녀상이란 주제 자체가 일제 강점기가 남긴 하나의 잔재라 생각한다. 이런 것이 현재까지 영향을 주고 있고, 그런 파장이 국내외에서 길게 이어지고 있는 대상이자 메시지라 생각했다”며 “이런 점에서 소녀상을 선택한 건 당연한 일”이라고 답했다. 이어 “국민들의 모금과 관심으로 만들어진 전국 150여 개 소녀상이 세워진 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어 촬영을 통해 소녀상을 가까운 이웃이라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7년간 프로젝트의 첫 장을 마친 현재, 최 작가는 ‘더 열심히 그리고 더 조심스럽게 해야겠다’는 소회를 밝혔다. 그는 “현재 없는 분들에 대한 이야기이자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의 연결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보니 조심스럽다. 더 신중하게 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사람이란 소재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를 끝까지 오래 이어가고 싶다”며 각오를 다졌다. 또한 “이번 사진전을 통해 과거에 대한 정확한 메시지를 공유 및 전승하는데 목적이 있다. 기회가 된다면 해외에 있는 소녀상을 대상으로도 진행하고 싶다”며 “소녀상을 세우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사진을 찍는 것은 시간 소요가 적다. 그런 사진 한 장이 전 세계 소녀상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알리고 퍼트린다면 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라 전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항일이라는 단어는 우리나라가 해방이 됐음에도 아직도 제자리걸음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항일이란 단어보다는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중요하다”면서 “아직까지 위안부 사건과 친일파에 대한 미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과 같이 잘못 이해되고, 정의되는 것을 바로잡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목소리 높였다. 소녀상 하나를 세우는 것조차 일본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 속, 살아있는 소녀상이 담긴 사진 한 장이 일본정부에게 다시 한번 진실과 정의의 준엄함을 보여주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기대 역시 그의 희망 중 하나다. 경기문화재단 민간공모 지원사업 ② 소시민의 영웅담, ‘다이어리. 0328. 봄’ 1919년 3·1일 전국에 퍼진 독립을 향한 뜨거운 함성. 27일 후 경기도 광명시에도 그 뜨거운 열기가 이어졌다. 광복이란 희망을 이룬지 76년이 됐지만, 여전히 우리가 모르는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은 많다. 1919년 3월 28일 경기도 시흥(현 광명시 소하동)에서 일어난 대규모 만세운동, 우리의 글인 한글과 대한의 정신을 지키고자 했던 소시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채 사용하고 있는 일제잔재를 자연스럽게 돌아볼 수 있다. ‘다이어리. 0328. 봄’을 기획한 창작의숲 최지영 대표는 “경기도 광명시를 주활동 지역으로 하는 창작의숲은 예비 사회적 기업이기 때문에 지역콘텐츠 개발과 지역 문화소외계층을 대상으로 문화향유 및 공유, 창작활동을 통해 지역주민들에게 공연을 제공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지난해 ‘광명의 그날’이란 작품을 통해 광명의 3월 만세운동에 대해 그린 후 올해에는 같은 주제로 ‘다이어리. 0328. 봄’으로 항일 역사를 알렸다. 1919년 3·1운동의 결과 조선총독부는 휴교령을 통해 학생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서울 배재고등학교를 다니던 최호천, 윤의병 역시 고향인 광명시 소하리로 돌아오게 되며 위대한 만세운동의 첫걸음을 뗐다. 3월 27일 오후 6시 30분 설월리에는 만세 소리가 울려퍼졌다. 스물한 살 청년 이정석은 혼자 만세운동을 하며 온 동네를 누볐고, 다음날 일본순사에 체포됐다. 이후 28일 이정석의 친구 최호천과 윤의병을 필두로 주민 200여 명은 이정석의 구출과 만세운동을 펼쳤고, 하루 뒤 주동자 7명은 체포돼 재판을 받는다. 이날 재판을 받은 7명 중 최호천과 윤의병을 제외한 5인은 농민으로 당시의 소시민들이었다. 뮤지컬에서 눈에 띄는 점은 일본군이나 경찰, 일본인이 나오지 않고 독립의 희망과 한글을 지키기 위한 노력, 두려움 사이 청춘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는 부분이다. 최 대표는 “이번 작품에선 한글 사용에 조금 더 중심을 두려고 했다. 요즘 사람들이 은어나 외래어 사용빈도가 높다. 이런 부분이 안타까웠다”면서 “뮤지컬의 소재가 된 인물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한글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는데, 우리는 편하다는 이유로 이런 소중함을 덜 생각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또한 “젊은 친구들에게 강압적으로 바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한글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고, 생각의 전환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최지영 대표는 이번 공연을 통해 소시민들의 영웅담을 담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 뮤지컬은 영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일반사람들, 즉 소시민들의 이야기다. 그런 사람들이 영웅은 아니지만 그분들이 선택한 삶은 영웅스러운 것”이라며 “만세운동과 한글을 지키기 위한 선조들의 애국, 애민정신을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어 “많은 사람들이 항일 독립운동과 관련된 콘텐츠는 무겁다라고 생각하는데, 사람냄새가 나는 작품이자 편하게 와서 보고 집으로 돌아가 한글에 대한 소중함을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는 공연이 되고 싶다”고 소망을 전했다. 공연을 기획하기 전 ‘항일’에 대해 어렴풋한 느낌만 있었다는 최 대표는 작품을 준비하고 마무리한 시점에서 자신 역시 그 소중함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다고 한다. 최지영 대표는 “공연 전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아, 그랬구나’라는 생각이었다면, 지금은 감사함과 민족에 대한 자긍심도 갖게 됐다”며 “공연업계에서도 일제잔재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제부터라도 최대한 사용하지 않는데 배우들과 동참하기로 했다. 작은 부분부터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작은 행동이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라 강조했다. ‘다이어리. 0328. 봄’은 1919년 찬란한 만세운동 뒤편에 숨겨진 청년들의 희망과 두려움, 그것을 이겨내고 나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고, 가장 아래에서부터 시작된 혁명을 그렸다. 관심이 없다면 알지 못할 독립운동가의 인간적 삶에 집중해 당시 청년들의 삶 속 아픔과 그런 아픔조차 아름다웠음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문화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매개체다. 그들의 희생으로 지킨 대한의 정신과 문화를 이제 우리가 지키는 것, 그것이 2021년 현 시대 항일의 자세일 것이다. [ 경기신문 = 김도균 기자 ]
해방 76년째인 지금도 ‘친일 청산과 일제잔재 극복’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우리 모두가 동참해 찾아내고 뿌리 뽑아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갈 길이 멀다고 해 가지 않으면, 목적지는 그만큼 요원해질 뿐이다. 그런 점에서 경기도의 행보는 가히 주목할 만하다. 3·1운동 100주년이던 2019년부터 도내 친일잔재 조사를 시작으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아울러 ‘항일운동’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각종 사업들까지 활발히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화독립’을 완성하는 날까지,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나아가자는 의미를 담아 준비한 기획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진정한 ‘문화독립’ 완성하는 날까지 ② 일제잔재 청산, 지속적 실천운동 돼야 ③ 일제가 두려워 한, 민속신앙과 전통 ④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는 왜 사라졌나 ⑤ 숨겨진 의미 알면 쓰지 못할 일제잔재어 ⑥ 삼베 수의·유족 완장 장례문화, 전통 아니었다? 계속 “이제껏 전통이려니 생각하고 따랐던 삼베 수의와 유족이 차는 완장 등 장례문화가 일제잔재라니 참 애석하네요. 이제라도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삼베로 수의를 만들어 고인에게 입히는 풍습이 사실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됐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몇 년 전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다는 경기도민 A 씨는 전통 장례문화인줄 알았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유교 전통 사상의 영향으로 효를 중시해왔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겨 함부로 손상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뜻의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옛말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머리카락조차 함부로 다루지 않았던 우리 선조들은 조상을 극진히 섬겼다. 2002년 경기도박물관이 발간한 ‘경기민속지 5권’을 살펴보면 선조들은 태어나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한 생애에서 중요한 시기에 행하는 일생의례를 지냈다. 인생의 고비는 출생과 성년, 혼인, 사망과 같은 신체적 성장과 쇠망에 따라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 믿었으며, 출생의례를 중시한 서양과 달리 사후의례의 하나인 제례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중에서도 사람이 태어나 살다가 마지막으로 통과하는 관문인 죽음을 다루는 의례가 상례(喪禮), 그 일부분으로 장사를 치른다고 해 매장·화장 등으로 시신을 다뤄 처리하는 의례가 장례(葬禮)이다. 현재 우리가 말하는 수의(壽衣)는 장례 과정 중 시신을 목욕시킨 후 평상시처럼 팔다리를 끼워서 옷을 입히는 의식에서 쓰는 옷으로 습의에 해당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가 의례준칙을 통해 임의로 뜯어고친 예법을 우리 민족에게 강요하는 과정에서 수의가 변질됐다는 전문가들의 설명이 수년 전부터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전통 수의는 평상시 입던 가장 좋은 옷으로 최연우 단국대학교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교수는 2017년 ‘현행 삼베수의의 등장 배경 및 확산과정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삼베 수의의 등장과 정착 배경에는 일제강점기에 행해진 일제의 식민주의 정책이 있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한국에서 삼베 수의가 우리의 본래 전통이라는 명분 하에 상례문화로 자리 잡았고, ‘바람직한 전통’이라는 미명 아래 정착·확산시키기 위해 등장한 유언비어에 가까운 속설이 믿음이 돼 정작 우리 전통이었던 다른 소재의 수의가 점점 설 곳을 잃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꼬집었다. 문헌과 출토된 유물을 통해 조선시대의 수의 소재를 알 수 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유학자들이 가례주석서를 편찬하는데 대표적으로 이재(李縡)가 쓴 ‘사례편람’을 보면 수의 소재로 주, 견, 백, 금, 무명이 제시된다. 베는 남자용 홑바지에 쓰였고, ‘주나 무명, 베로 한다’는 기록이 있다. 왕실의 수의 소재는 조선시대 오례의 예법과 절차를 기록한 ‘국조오례의’, ‘국조상례보편’, ‘조선왕조실록’과 여러 왕과 왕비, 왕세자와 왕세자빈 등의 국장을 기록한 의궤 등에서 확인된다. 왕의 장례에는 광직, 모단, 모시 등을 썼고 왕비의 장례에는 금선, 필단, 모단, 모시 등을 썼다고 한다. 어디에도 삼베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조선시대 수의에 삼베가 전혀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최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조선시대 100여기의 분묘에서 발굴된 수천 점의 옷에서 염습의 구분 없이 모든 출토복식을 대상으로 했을 때 극소수에 해당하는 몇 점의 삼베옷이 나왔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일반적으로 평상시 입던 복식 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수의로 지어 입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평소에 옷감으로 사용되지 않는 삼베를 수의로 입는다는 것은 잘못 전해지고 있는 전통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제정 ‘의례준칙’, 유족 완장·국화 등 한국전통에 변화 광복 76주년을 맞이했으나 오늘날 국내 장례문화는 아직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 많다. 삼베로 만든 수의와 유족 완장과 리본, 영좌의 꽃장식 등 장례 모습은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의례준칙’에서 비롯됐다. 조선총독부는 1934년 11월 10일 전통적인 사례에 근거를 둔 간략화 된 ‘의례준칙’을 제정·공포하며, 조선시대 상장례 규범서의 하나인 ‘사례편람’의 상례절차와 내용을 대폭 축소·간소화했다. 조선의 관혼상제례를 인위적으로 바꾸고자 한 조선총독부는 전통적인 장례 절차를 무시하고 상주와 상복, 습렴 등에 대해 새로운 절차를 제시했다. 이때 값비싼 비단, 명주 사용을 금지하고 삼베와 무명을 수의로 만들 것을 강제했다. 상례의 제한 내용은 성복의 절차를 생략하고, 염습이 끝나면 바로 상복을 입도록 했다. 상복에는 상장을 달도록 제한하고, 양복을 입을 경우에는 완장을 차도록 했다. 또 유족이 한복 등 전통복장을 입었을 때 왼쪽 가슴에 나비 모양의 검은 리본을 달게 했다. 고인의 영혼을 모시는 영좌 주변을 국화로 장식하는 것도 일제의 영향이다. 한국은 사람의 시신을 실어서 묘지까지 나르는 상여를 장식하는 종이꽃 수파련 말고는 생화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었다. ◆“오죽했으면 삼베 수의랴” 그렇다면 전통 장례문화에서 삼베옷은 누가 입었을까? “나는 군부(임금)에게 죄를 얻었으니 황공한 마음으로 죽는다. 너희들은 옷은 삼베옷으로 하고 염은 삼베 이불로 하며, 띠풀로 관을 덮고 달구지로 실어다 장사하여 대략 흙으로만 덮도록 하라. 나의 뜻을 어김이 없도록 하라.” 1608년 광해군 즉위년에 교리 최기남이 성혼의 원통함을 풀어줄 것을 청하는 상소문에 이와 같이 성혼의 유서가 인용됐다. 성혼은 임진왜란 시 선조가 피난 중 자신의 집 근처를 지났음에도 달려와 문안하지 않았다고 해 죄를 입었고 위 내용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이를 보면 조선시대에 삼베옷은 ‘죄인이 입는 옷’이라는 관념이 형성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부모를 여읜 자식이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기는 뜻에서 삼베 상복을 입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밖에 현대 민속에서 삼베 수의를 가난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마련하는 수의로 인지해 “오죽했으면 삼베 수의랴”라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전통 수의 복원→일제잔재 청산 위한 움직임 ‘활발’ 전통 출토복식을 국내 최대 규모로 소장하고 있는 단국대학교는 2016년 신형 전통수의를 개발했다. 전통수의의 발전적 계승과 장례문화 복원에 나선 단국대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최연우 교수를 비롯해 전통의상학과와 전통복식연구소에 소속된 연구진 15명이 삼베 수의가 일제잔재라는 점에서 조선시대 출토복식을 고증해 1년여 끝에 신형 전통수의를 개발한 것이다. 당시 최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삼베 수의가 등장하면서 오늘날 사람들이 전통수의로 알게 됐고, 그러다 보니 중국산까지 비싸게 유통되고 있어 안타까운 생각에 철저한 고증을 통해 전통수의의 발전적 계승에 착수했다”고 전했다. 특히 그는 “바쁜 현대인들이 전통 예법대로 모두 장례를 치를 수는 없지만, 최소한 수의는 전통을 현대적으로 복원하고,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국화꽃 장식이나 조화도 없애고 전통대로 병풍을 세우는 방식으로 개혁하는 게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2019년에는 한국장례협회와 당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간사를 맡았던 김명연 국회의원이 장례문화의 일제잔재 청산을 위해 ‘우리시대 장례문화를 진단하다’를 주제로 토론회를 공동주최했다. 박일도 한국장례협회장은 “일제강점기 하에 유입된 왜곡된 장례문화를 확인하고 바른 문화를 만들기 위한 시발점이 됐다”면서 “앞으로 일제잔재를 확인하고 전통을 발굴, 계승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김명연 의원 역시 “일제에 의해 왜곡된 장례 의식과 풍습을 청산하는 것이 자주독립의 정신을 완성하는 일”이라고 목소리 높였다. [ 경기신문 = 신연경 기자 ]
해방 76년째인 지금도 ‘친일 청산과 일제잔재 극복’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우리 모두가 동참해 찾아내고 뿌리 뽑아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갈 길이 멀다고 해 가지 않으면, 목적지는 그만큼 요원해질 뿐이다. 그런 점에서 경기도의 행보는 가히 주목할 만하다. 3·1운동 100주년이던 2019년부터 도내 친일잔재 조사를 시작으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아울러 ‘항일운동’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각종 사업들까지 활발히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화독립’을 완성하는 날까지,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나아가자는 의미를 담아 준비한 기획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진정한 ‘문화독립’ 완성하는 날까지 ② 일제잔재 청산, 지속적 실천운동 돼야 ③ 일제가 두려워 한, 민속신앙과 전통 ④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는 왜 사라졌나 ⑤ 숨겨진 의미 알면 쓰지 못할 일제잔재어 계속 “나는 아직까지도 우리말을 쓰다가 담임 선생님에게 따귀를 맞는 꿈을 꾼다네.” 일제 말 국민(초등)학교를 다닌 한 어르신의 말이다. 일제의 강압적 교육의 폐해는 이렇듯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뼛속 깊이 박혀 상처로 남아 있다. 일제가 그토록 갖은 수단과 방법을 써가며 말살하고자 했던 ‘한글’은 지금 어떤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우수한 언어로 평가돼 있고, 새로운 한류 문화의 중심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결국, 그것이 줄임말이나 신조어라 할지라도, 우리말 한글을 쓰는 방식에서 비롯됐다면 그 역시 미래세대의 희망이 될 수 있다. 다만, 세대 간 소통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면, 이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받아들이고 어떤 방식으로든 하루 빨리 해소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소위 ‘젊은 사람들의 것’으로 치부하고 방치하고 있다가는, 언젠가 같은 우리말을 쓰는데도 불구하고 의사소통이 안 되는 불상사가 없으리란 보장도 없지 않을까 싶다. 이미 늦은 시작이다. 최대한 빠른 시간에 공유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어떤 방식으로든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분명 우리말로 얘기하는데 서로가 서로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일제시대 교육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요즘 세대들 간에 통용되는, 게다가 의미도 모르는 채 사용하고 있는 일본어 문제도 각별한 관심이 필요한 부분이다. 적어도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 알게 된다면 쓰지 않을 단어들은 최대한 많이 알려주고 깨우쳐 주는 것이 국가나 지자체 차원에서 나서야 할 마땅한 사업이 아닐까 한다. 최근 경기문화재단 후원으로 열린 ‘2021 문화독립 만세운동’ 프로젝트에 참여한, 비보이이자 여행 인플루언서인 브루스리 씨는 “나 역시 무심코 쓰던 상당수 단어들이 일본어 잔재였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무엇보다 그 속에 담긴 진짜 의미가 충격적이었다”면서, “대한민국 사람들이 본인들을 하대하고 모욕하는 단어들을 일상에 사용할 만큼 바보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금지와 변화라는 말을 앞세운 캠페인보다는, 우리가 모르고 있던 잔재 단어들의 의미를 정확히 알게 해주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상의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 간질병 환자라고 부를까? 세상에 어떤 친구가 친구에게 지뢰를 밟아 다리가 없어질 놈이라고 하겠나? 바로 ‘땡강 부리지마’와 ‘찐따’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이다. ‘땡깡 부리지마’는 일본식 한자 ‘텡캉’으로 간질병 환자, 간질병의 의미로 일본에 복종하지 않는 조선인들을 비아냥댔던 단어였다. 또 일본어 ‘진빠’에서 유래된 말, ‘찐따’는 6·25전쟁 당시 우리 군인들에게 “너는 지뢰 밟을 놈이야!”라며 무시와 모욕의 표현으로 썼던 말이다. ‘묵찌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묵’은 러시아의 군함, ‘찌’는 침몰, ‘파’는 파열의 뜻을 담아, 러·일 전쟁 후 일본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게임이라고. 우리말로는 ‘가위, 바위, 보’다. 브루스리 씨는 “나라면 숨겨진 의미에 관한 설명을 듣는 순간부터 우리말을 사용할 것 같다”면서, “현대는 15초짜리 콘텐츠를 즐기는 시대다. 최대한 짧은 시간에 그들이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일본어 잔재 청산은 기본적으로 선행돼야 할 문제이자 과제다. 특히나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의 정신이자 정서를 해하기 위해 철두철미하게 작업하고 심어놓은 것들, 우리가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들은 결단코 찾아내 없애야 한다. 방송인 출신 역사학자인 정재환 박사는 저서 ‘나라말이 사라진 날’을 통해 영화 ‘말모이’에 눈길을 끄는 장면이 나온다며 소개한다. 바로 판수의 중학생 아들 덕진이 월사금을 내지 못해 일본인 선생에게 ‘빠따’를 맞는 부분이다. 이때 덕진이 자신도 모르게 ‘엄마야’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데, 그 순간 선생은 ‘학교에서 조선어가 금지된 게 언제 적 일인지 모르냐?’며 덕진을 일으켜 세운 뒤 사정없이 따귀를 올려붙인다. 정 박사는 “영화는 상상력으로 만드는 것이어서 사실과 다른 내용이 첨가되기도 하고 과장되거나 부풀려지기도 하지만, 당시 학생들이 처한 현실은 영화 이상이었다”며 “어느 학교에나 교실 벽에 ‘국어상용’이라 적힌 표어가 붙어 있었고, 벌금통을 만들어 조선어를 쓸 때마다 1전씩 넣도록 한 학교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어 사용 학생에 대한 감시와 처벌은 일상적이었다”고 지적했다. 일제는 조선 땅을 정치·경제적으로 지배했을 뿐 아니라 강력한 동화정책을 시행, 조선인으로 하여금 일본어로 말하게 하고, 일본 정신을 갖게 하려고 했다. 그래야 천황을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황국신민을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특히 전시 체제에 돌입한 일제는 조선어 말살을 통해 완벽한 동화를 실현하고자 했다. 결국 천황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천황의 신민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의 정체성은 소멸돼야 할 대상이었고, 조선어와 조선 글자는 반드시 사라져야 할 조선 역사와 문화의 정수였다. 1911년 9월 22일 조선총독부는 조선 지배의 방향을 담은 조선교육령을 발표한다. 교육의 목표는 역시나 ‘충량한 국민을 양성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국어, 즉 일본어를 보급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11월 1일부터 보통학교를 비롯한 조선 학교에서 일본어 교육이 시작됐다. 보통학교 교육과정에선 일본어의 비중이 가장 높았고, 조선어는 소홀이 취급됐으며, 조선 역사는 사라져갔다. “우리말은 다시 살았다. 우리의 글자로 다시 살았다. 다시는 말하는 벙어리 노릇이나 눈 뜬 소경 노릇을 할 필요가 없는 때가 오고야 말았다.” - 정태진, ‘재건도상의 우리 국어’ 中 일본어는 일제의 패망과 함께 운명을 다했고, 우리말과 한글은 독립했다. 말 그대로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우리말과 글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일제가 35년 동안이나 주입한 일본어는 일상을 잠식하고 있었고, 해방이 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그와 같은 현실에 직면해 있다. 성주현 1923 제노사이드연구소 부소장은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무엇보다 일제 시기 왜곡된 우리의 역사와 문화, 즉 민족정기를 올바르게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언어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생각과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한국인으로서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과연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일인가. 우리말 사랑은 일제 잔재어뿐 아니라 영어 등 외래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아무리 좋은 외국어라도 우리말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우선시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 ]
해방 76년째인 지금도 ‘친일 청산과 일제잔재 극복’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우리 모두가 동참해 찾아내고 뿌리 뽑아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갈 길이 멀다고 해 가지 않으면, 목적지는 그만큼 요원해질 뿐이다. 그런 점에서 경기도의 행보는 가히 주목할 만하다. 3·1운동 100주년이던 2019년부터 도내 친일잔재 조사를 시작으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아울러 ‘항일운동’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각종 사업들까지 활발히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화독립’을 완성하는 날까지,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나아가자는 의미를 담아 준비한 기획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진정한 ‘문화독립’ 완성하는 날까지 ② 일제잔재 청산, 지속적 실천운동 돼야 ③ 일제가 두려워 한, 민속신앙과 전통 ④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는 왜 사라졌나 계속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출판된 책들의 제목을 보면 그 의도가 다분히 엿보인다. ‘조선의 풍수’, ‘조선의 귀신’, ‘조선의 향토신사’, ‘조선의 미신과 속전’ 등등. 한국이 전근대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결국, ‘일본은 문명, 조선은 미개’라는 프레임을 짜 한국인 스스로 믿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아울러 일제는 공동체 놀이에 대한 통제와 탄압으로 대동놀이 성격의 민속놀이는 철저히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론 전통 민속놀이를 장려한다는 ‘향토 오락 진흥정책’을 추진했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인을 전쟁에 내보내기 위한 꼼수가 숨어 있었다. 한국 전통사회에선 집단놀이가 많이 행해졌는데, 이러한 우리의 민속놀이도 전근대적 유산으로 낙인찍히며 점점 쇠퇴해갔다. 소위 문화정책의 시기였다는 1920년대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3·1만세운동 이후 일제는 군중들이 모이는 집회를 철저히 경계했고, 대동놀이 성격의 민속놀이는 요주의 대상으로 삼았다. 지금의 우리들에겐 아마도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것들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열광하며 참여했던 대표적인 놀이로 ‘돌팔매싸움(石戰)’, ‘횃불싸움’, ‘줄다리기’ 등을 꼽을 수 있다.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석전(石戰)’은 ‘수서’ 동이전 고구려조에서 찾을 수 있을 만큼 유서가 깊으며, 일반적으로 마을이나 지역 단위로 남자들이 편을 갈라 돌을 던지며 모의 전투를 벌이는 상무적인 놀이였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정월 보름날이 되면 한양의 애오개 사람과 동서남의 3대문 밖 사람들이 만리현(萬里峴)에서 맞서는데, 두 패가 되어 몽둥이나 돌을 들고 싸움을 벌인다고 기록돼 있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때 3문밖 편이 이기면 경기도 지방에 풍년이 오고, 애오개 편이 이기면 그 밖의 지방에 풍년이 든다고 했다는 부분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이렇게 갈고 닦은 실력이 전쟁에서 빛을 발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의 행주대첩은 그 대표적인 예로 평가되고 있다. 김준기 경희대 민속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은 “행주치마가 여인들이 돌을 나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은 믿을 수 없다 해도 석전이 전투에 활용된 것만은 분명하다”면서, “일본은 조선군의 돌팔매 실력에 한 번 혼쭐이 난 경험이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일제는 석전이 실전을 방불케 해 사상자가 속출하기도 하는 등 위험성이 동반되기 때문에 금지해야 한다고 근거를 댔다”며 “하지만 위험성과 상관없는, 조선인의 단합과 용맹성을 기르는 다른 민속 현상도 탄압의 대상으로 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무엇을 우려했는지 짐작케 한다”고 부연했다. 이같은 현상은 ‘두레’에 관한 주의사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 두레는 마을마다 50~60명 정도가 보편적이었고, 군대처럼 강력한 규율을 갖고 있었다. 서열이 확실하지 않을 경우 ‘농기뺏기’라는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기도 했을 정도란다. 이에 일제는 비용과 충돌의 위험성을 제기하며 품앗이로의 전환을 유도한다. 품앗이는 고작 3~5명 정도가 일손을 공유하는 만큼 집단 행동의 돌발성을 피할 수 있다고 여긴 까닭이다. 일제가 군중집회와 같은 대동놀이를 경계했다는 증거는 줄다리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1930년 2월 11일자 A 신문에 실린 다음의 내용을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부산) 동래에서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에 한 번씩 개최되는 줄다리기 대회는 유일무이한 대중적 운동으로서 일반 대중은 삭전의 승부를 보지 못하면 명절을 쉬지 못한 감각조차 들 만큼 갈망과 기대가 큰 대회인데, 지난 8일 하오 3시에 이르러 당국은 돌연 상부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금지하여 원성이 자자하였다. 경기도 또한 논농사가 이뤄지는 평야 지대에서 행해지던 대규모 줄다리기 행사가 일제의 탄압에 의해 중단됐다. 어르신들의 제보에 따르면 줄다리기를 하려고 줄을 꼬는 족족 어느 틈엔가 일경이 나타나 칼로 자르고 가곤 했다는 게 김 연구원의 전언이다. 그랬던 일제가 왜, 1930년대 들어와 ‘향토 오락 진흥정책’을 추진하며 우리의 민속놀이에 관심을 갖게 됐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만주사변 이후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 전쟁 병기로 쓸 조선인의 체력을 향상시키려는 목적이 다분했다. 그 시범 지역으로 선정된 곳이 경기도였다. 경기도 지방과가 1933년부터 다음 해까지 조사·정리한 자료집 ‘농촌오락행사간(農村娛樂行事栞)’의 서문에는 “조선 재래의 농촌 오락은… 여러 폐해가 있는바 개선의 여지가 적지 않다. 따라서 이를 그대로 계승하거나 답습할 것이 아니라 그 공과를 가려 나쁜 점을 개선하고 좋은 점을 장려해야 한다”라고 적혀 있다. 이 자료집에는 당시 경기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민속놀이의 거행 시기, 내용, 특징들과 함께 개선점, 시행상의 주의사항 등이 들어있는데, 이는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를 폄하하고 일제의 의도에 맞게 조작하겠다는 시도에 다름 아니었다. 예컨대, 널뛰기의 경우 ▲침목은 나무를 이용하지 말고 볏단 또는 가마니를 이용한다 ▲판은 길이 7척, 폭 1척 8촌 정도, 두께는 1촌 이상으로 한다 ▲윗부분에 새끼줄을 달아 이 새끼줄을 잡고 넘어지지 않게 한다 등의 주의가 필요하다고 명시돼 있다. 일제는 우리의 전통 민속 중에서 어떤 건 비합리적이라는 이유로, 어떤 것은 낭비적이거나 위협적이라며, 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는 등의 명분을 내세워 통제를 가했다. 그렇게 우리의 것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왜곡되는 수모를 겪은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전통을 바로 세우고 문화를 제대로 복원하는 일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그 무엇이 아니라, 혹은 재밌는 놀이로서의 접근이 아니라, 적어도 대한민국 국민, 경기도민의 ‘정신적 뿌리’를 찾는 일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게다가 지금 우리가 열광하는 거의 모든 문화예술 역시 자랑스런 우리네 선조들의 전통에서 비롯됐으니 당연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다행히 경기도를 이끌고 있는 이재명 지사는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에 대한 의지가 높고, 실천력도 매우 돋보이는 편이다. 그래서 더욱 중요한 건 선택과 집중의 문제라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다. 단순히 국가나 지방의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재현하는데 만족해서는 안 될 일이다. 무엇보다 핵심은 ‘원형을 얼마나 제대로 복원해 냈는가’의 여부가 될 것이다. 전통 민속에 관한 학문적 연구가 일제강점기 들어서부터 시작됐다는 점은 특히나 주의해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어디까지나 식민지 정책을 위한 사정 자료로, 일제의 입맛대로 선별되고 왜곡된 정보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잘못을 저지르는 일은 절대 없어야겠다.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 ]
해방 76년째인 지금도 ‘친일 청산과 일제잔재 극복’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우리 모두가 동참해 찾아내고 뿌리 뽑아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갈 길이 멀다고 해 가지 않으면, 목적지는 그만큼 요원해질 뿐이다. 그런 점에서 경기도의 행보는 가히 주목할 만하다. 3·1운동 100주년이던 2019년부터 도내 친일잔재 조사를 시작으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아울러 ‘항일운동’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각종 사업들까지 활발히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화독립’을 완성하는 날까지,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나아가자는 의미를 담아 준비한 기획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진정한 ‘문화독립’ 완성하는 날까지 ② 일제잔재 청산, 지속적 실천운동 돼야 ③ 일제가 두려워 한, 민속신앙과 전통 계속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일제가 내건 미끼 중 하나는 조선을 근대적인 사회로 발전시켜주겠다는 사탕발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극복해야 할 문화로 매도하고, 민속 신앙을 미신으로 규정해 타파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돼버렸다. 일제강점기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왜곡은 현재까지도 온전히 바로잡히지 않았고, 잔재 또한 깨끗이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특히, 이러한 ‘무형의 유산’은 개인의 가치관이나 일상, 나아가 사회 전체의 의식세계와도 깊게 관계되어지는 만큼 그 중요성이 더해진다. 강제로 빼앗긴 문화원형을 복원하고, 되찾는 일이야말로 일제잔재 청산의 시급한 과제라 하겠다. ◆일제강점기 국가 제사의 축소와 변질 ‘순종황제실록’에 따르면 1908년 7월 23일 국가 제례는 ▲제실(帝室)과 관련이 있어야 하며 ▲시의(時宜)에 맞지 않는 제사는 영원히 폐지하고 ▲합사하는 것이 옳은 묘사전궁(廟社殿宮)은 옮길 장소를 찾아 봉안토록 하고 ▲대제(大祭), 별제(別祭), 속제(俗祭), 삭망제(朔望祭) 가운데 중요하지 않은 것은 생략하고 ▲신당(神堂), 아일(衙日), 고사(告祀)와 같은 것은 폐지한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각종 제사의 규모와 횟수는 축소되고, 상당수의 제사는 폐지됐다. 조선의 왕족들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왕실 봉작제에 편입시켜 종묘제례는 이어졌지만, 형식적인 의례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1926년 순종이 승하, 1928년 종묘에 부묘된 이래 종묘는 조선왕조의 상징성을 상실한 채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다. 대한제국의 국가 제례 공간은 자연스레 의례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됐고, 일본 천황을 제신(祭神)으로 하는 조선 신궁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일제는 1898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주둔했던 왜성대(倭城臺)에 대신궁(大神宮)을 세웠으며, 1908년 남산에 한양공원을 조성하고, 1912년 조선신사를 세우기 위한 준비를 거쳐 1920년 5월 기공식, 1925년 10월 준공식을 치렀다. 이때 남산 중턱에 있던 국사당은 인왕산으로 옮겨졌고, 남산은 일본의 국조대신(國祖大神)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을 위한 제례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전통 유교 교육의 본산인 성균관의 경우 1911년 6월 15일 조선총독부가 경학원으로 개칭하면서 교육 기능을 없애고 문묘 석전 의례만을 유지시켰다. 그러니 일제강점기 성균관과 향교는 교육기관의 역할은 사라지고 제사 기능만 남겨진 상태였고, 교육 기능이 없는 제사 기능은 후손이 끊긴 제사나 다름 없었다. 결국 문묘 대성전은 일제가 전국 향교를 통제하고 간섭하는 공식 통로가 됐으며, 조선인들에 대한 황국식민화 교육정책의 일환으로 이용됐다. 그런가 하면, 관왕묘와 성황제 등 국가 차원의 공적 국행의례를 민간 지역의례로 바꿔 마을 제사로 전락시켰다. 마을굿의 형태로 진행되던 민간의 동제도 규제하면서 간단한 고사나 치성으로만 할 수 있게 했고, 도당굿은 도당제로 변했다. 1934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3·1운동 이후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인문 교화 방면의 민풍 혁신’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관혼상제의 일생의례를 대폭 축소하는 ‘의례준칙’을 반포, 의례의 간소화가 경제적 부담을 덜어준다는 측면을 내세웠다. 하지만, 이것은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위한 필요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채미하 한국교통대학교 초빙교수는 “일제강점기의 제사는 대체로 조선 후기에 일반화된 제사의 절차대로 지냈고, 제사의 종류도 기일과 명절에 지내는 제사로 나뉘어져 있었다”면서, “의례준칙은 제례의 범위를 기제사와 묘제로 축소했고, 대상은 4대 봉사에서 2대로 한정했다. 제전(祭奠)의 공물(供物)도 간략하게 정비했고, 신주 대신 지방 또는 사진을 사용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일제의 전통문화 왜곡... 마을신앙 탄압, 신토(神道) 강요 조선의 전근대적 사고를 강조하기 위해 가장 손쉽게 이용할 수 있었던 민속 현상은 무속과 민간신앙이었다. 일제는 1912년 3월 25일 ‘경찰범처벌규칙’을 정해 무속 행위를 범법으로 규정, 강력한 단속을 통해 마을굿과 개인굿을 금지시켰다. 이는 무속의 사회적 기능, 예를 들어 민중의 오락을 대표하고 정신을 치유하는 등의 기능을 인지한 데 따른 것이다. 그런데 ‘경찰범처벌규칙’은 1907년에 발포된 일본의 ‘경찰청처벌령’을 모방한 것으로,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국교(國敎)의 상징인 천황제의 토대를 공고히 하려는 데 있었다. 게다가 일본에도 무속과 일맥상통하는 ‘신토’란 전통 종교현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속에 미신이라는 굴레를 씌어 집중 탄압했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행동에 다름 아니었다. 김준기 경희대 민속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은 “일제는 문화정치기에 기존의 탄압 일변도 정책을 선회해 숭신인조합 등 무속인 조합을 묵인하는 대신 일본의 주신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를 봉숭하도록 했다”며 “무속을 이용해 이와 유사한 신토를 국교로 삼으려는 야욕을 가동시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무속을 정화한다는 명목 아래 무당에게 신사신앙을 교육시키고, 이를 중심으로 무속을 동화시키기 위한 숭신단체가 경성·경기 지역에 창설되기도 했다. 한국인의 신앙적, 종교적 토대가 민속 신앙적이라는 점이 조사에 의해 밝혀지면서 정신적인 지배를 목적으로 일본 신도 속으로의 편입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일제가 그토록 경계하고 끊어버리기 위해 애쓴, 우리 민족의 애향심과 대동단결의 힘은 강했다. 결국 일제가 패망하며 이러한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민중예술의 쇠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예컨대, 세습무 집안이 주축이 돼 만든 지역별 자치 조직으로, 수많은 재인(才人)과 광대(廣大)들이 활동했던 재인청이 1920년대에 이르러 하나 둘씩 해체되며 사라졌다. 전통 연희의 일부는 전승이 단절되기도 했다. 1784년부터 나름대로 엄격한 조직체계를 갖추고 130여 년간 그 명맥을 이어온 경기도 재인청(현 오산시 부산동)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역시나 ‘경찰범처벌규칙’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각종 문화예술의 원형, ‘경기도 도당굿’... 뿌리 찾고 원형 복원해야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적이고 일방적인 동화 정책에서 벗어나 식민지의 문화, 역사, 제도를 인정한 후 지배국인 자신들의 여러 제도를 식민지에 맞춘다는, 이화(異化) 정책으로의 전환을 꾀하게 된다. 특히 1930년대 들어 마을의 복합적인 공동체 의례인 ‘동제(洞祭)’를 ‘부락제(部落祭)’라 칭하며 적극적인 조사에 나서는데, 그 이면을 살펴보면 불순한 의도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30년대 초반 조선총독부가 입안한 정신 계몽운동, ‘심전개발(心田開發)’운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마음을 잘 다스리면 경제적, 사상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선전하며 독려했지만, 실상은 사상을 통제해 식민지배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고, 천황에게 순종하는 황국신민을 만들기 위한 의도가 짙게 깔려있었다. 즉, 신을 공경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마음을 이용해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국민으로 개조하는데 ‘동제’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를 모색했다는 것이다. 김준기 전임연구원은 “경기도 도당굿 같이 무굿과 풍물을 동반한 동제를 억제하고, 신토와 유사한 절차를 지닌 유교식 동제로 획일화를 시도했다. 다음 수순은 당연히 마을의 전통 신당을 신사(神社)로 교체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것이었다”며 “일제의 패망으로 신토를 한국의 국교로 삼으려는 그들의 술책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지적했다. 한반도에 마을굿 대신 일본의 국체관념인 신사신앙을 이식하려는 정책이 본격화된 것은 1936년 이후의 일이다. 일제는 ‘일읍면 일신사’를 설치해 조선인의 신사참배를 강제하고 국민의례화까지 했다. 그러나 한국 고유 동제의 특성을 과소평가하고 얕잡아 본 그들에겐 정책 실패만이 남았을 뿐이다. 이는 마을굿이 혈연 간의 파벌이나 반상간의 계층 의식을 약화시킬 정도로,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적 유대감과 일체감을 엮어내는 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간과한 결과였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의 마을굿은 우리 민족 전통의 수호였고, 자주적인 민족수호운동이었다고 평가된다. 다만, 신토와 유사한 절차로 획일화를 강요한 탓에, 지역별 특수성이 희석되는 피해를 입게 된 것은 너무나 아쉬운 대목이다. 경기도 각 마을에 전승되던 도당굿이 나름의 마을 역사를 반영,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루라도 빨리 뿌리를 찾고 원형 복원에 나서야 할,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재인청도 도당굿에서 그 원류가 확인되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일제의 민속신앙에 대한 인식이나 정책은 우리 민족 전통의 근원적인 모습을 없애고 자주의식을 분열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계기로 온 국민이 정신적으로 똘똘 뭉치는 기회가 만들어진다면 그보다 의미 있는 일도 없지 않을까 싶다.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 ]
해방 76년째인 지금도 ‘친일 청산과 일제잔재 극복’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우리 모두가 동참해 찾아내고 뿌리 뽑아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갈 길이 멀다고 해 가지 않으면, 목적지는 그만큼 요원해질 뿐이다. 그런 점에서 경기도의 행보는 가히 주목할 만하다. 3·1운동 100주년이던 2019년부터 도내 친일잔재 조사를 시작으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아울러 ‘항일운동’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각종 사업들까지 활발히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화독립’을 완성하는 날까지,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나아가자는 의미를 담아 준비한 기획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진정한 ‘문화독립’ 완성하는 날까지 ② 일제잔재 청산, 지속적 실천운동 돼야 계속 우리가 일제잔재를 청산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고유문화가 불순한 의도에 의해 훼손되거나 왜곡, 심지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상적으로 받아들인 문화가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화를 위한 민족문화말살 정책에 따라 강압적으로 주도면밀하게 주입한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오죽하면 한국인이 ‘싸움이나 잠꼬대까지 일본어로 하는 상태’를 만들어내고자 했다는 말이 있을까. 일제잔재 청산의 문제는 이제 ‘지속적인 실천운동’으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더 이상 간헐적인 지적과 막연한 구호에 그쳐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 점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정리해 나갈 것인가 하는 방향성과 대상의 채택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경기도에서 일제에 의해 훼손된 문화 복원 및 지원에 관한 조례안이 발의된 것은 지난 2019년 9월 18일이다. 이 조례는 일제에 의해 도에서 사라진 우리 고유의 문화를 복원하고 지원하는데 필요한 사항 규정을 목적으로 한다고 제1조를 통해 명시했다. 또한, 4조에는 도지사가 실태조사를 할 수 있고, 전문성과 인력을 갖춘 연구기관이나 법인 또는 단체에 이를 의뢰해 실시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놓았다. 사업의 경우 일제에 의해 훼손된 문화 연구, 문화 복원 및 청산, 문화에 관한 출판물 발간 및 데이터베이스 구축·관리와 교육·홍보, 전문 인력 육성 등을 가능하도록 했다. 경기도는 곧바로 친일 목적으로 제작된 도내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대상으로 한 잔재 조사연구 용역에 돌입, 2020년 4월 완료했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문화·예술 분야 일제잔재 청산 공모 사업, 친일문화잔재 기록보관소 구축 및 활용 사업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당시 용역에서는 일제강점기(1905년~1945년 8월)에 형성된 생활문화 속 친일잔재에 대해 시공간적 범위와 용어 및 개념 정의, 이에 따른 자료 수집과 조사 연구를 통해 친일 인물 257명, 친일 기념물 및 송덕비 161개, 친일 인물이 만든 교가 89개, 일제를 상징하는 모양의 교표 12개 등 일제잔재를 밝혔다. 이 가운데 대표적 친일잔재로 경기도가(京畿道歌)와 춘원 이광수의 기념비가 꼽혔다. 수십년 동안 불려진 경기도가가 친일파 이흥렬이 작곡한 것으로 드러나자 도는 발빠르게 공모를 진행, 도민들의 참여 속에 ‘경기도에서 쉬어요’라는 새로운 경기도 대표 노래를 탄생시켰다. 이 노래는 매일 아침 경기도청 청사에 울려퍼지고 있다는데, 마치 우리에게 하루 한 번씩 ‘친일잔재, 일제잔재는 꼭 청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특히 지난해 12월 31일 송년 제야행사에서 처음으로 공개, 올해 시무식 행사를 통해 공식적으로 선보였다는 점도 그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지난 3·1절 기념식에서 ‘2021년을 경기도 친일청산의 원년으로 삼겠다’고 한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하나하나 철저하게 조사하고 착실하게 준비한 뒤 가열차게 추진해 나가고 있음을 증명해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듯 경기도는 우리 생활 속에 깊이 박힌 친일문화 잔재 청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이다. 일제잔재의 유형은 크게 인적·물적 잔재, 유형·무형의 잔재, 친일 잔재, 민족말살정책의 산물 등으로 구분할 수 있고, 이들 중 어느 것 하나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중요한 문제들임에 틀림없다. 인적·물적 잔재는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통치에 부역한 친일반민족행위자를 포함해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맺어져 이해관계를 같이하고 기득권을 유지한 ‘친일파’, 그리고 그들이 형성한 친일재산을 말한다. 또 일제가 침략전쟁과 식민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조성한 시설물과 선전 조형물 등 유형의 잔재와 장기간 식민지배 하에서 오염된 정신문화와 훼손된 전통문화 등을 일컫는 무형의 잔재가 있다. 이와는 별개로 그들의 행위와 주장을 미화·옹호하는 논리와 기념사업 등 친일잔재,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파괴 멸실된 문화와 원형이 손상된 건축 문화유산 등 민족말살정책의 결과물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가운데 우선적으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무형의 잔재’로, 그 중에서도 제대로 알지 못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거나 왜곡돼 전해지고 있는 것들을 대상으로 삼아 소개하려 한다. 특히 생활문화 속 잔재들의 구체적 사례를 들어 조목조목 짚어보고, 실질적인 실천운동으로까지 확대시킬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출 예정이다. 예컨대, 일제식 생활잔재로 분류되는 ‘삼베 수의’의 경우 언제부터 쓰였는지, 그 배경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등을 전문가들과 함께 자세히 알아보고, 과연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는 방식이다. 한반도에 마을굿 대신 일본의 국체관념인 신사신앙을 이식하기 위한 정책이 본격화된, 1936년 이후에 대해서도 살펴보게 될 것이다. 물론 보존이냐 철거냐를 놓고 논란이 많은 건축물이나 기념비 등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고민하고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경기문화재단(대표이사 강헌)이 심혈을 기울여 진행 중인 ‘2021 문화예술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추진 민간공모 지원’ 1차 사업으로 선정된 단체들 가운데 프로그램을 선별, 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 속에서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도 갖게 될 것이다. 말그대로 부지불식간에,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일제잔재는 무엇인지, 이번 기회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명확히 알고 없애기 위한 노력들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 고유문화의 정통성을 찾고, 그 위상을 올바로 정립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도 없고, 미뤄서는 안 되는 일임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길 또한 기대해본다.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