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문 앞에서 /유 하 이제 어디를 가나 아리바바의 참깨 주문 없이도 저절로 열리는 자동문 세상이다. 언제나 문 앞에 서기만 하면 어디선가 전자 감응 장치의 음흉한 혀끝이 날름날름 우리의 몸을 핥는다 순간 스르르 문이 열리고 스르르 우리들은 들어간다. 스르르 열리고 스르르 들어가고 스르르 열리고 스르르 나오고 그때마다 우리의 손은 조금씩 퇴화하여 간다. 하늘을 멀뚱멀뚱 쳐다만 봐야 하는 날개 없는 키위새 머지않아 우리들은 두 손을 잃고 말 것이다. 정작, 두 손으로 힘겹게 열어야 하는 그, 어떤, 문 앞에서는 키위키위 울고만 있을 것이다. 몸이건 사물이건 쓰지 않으면 낡고 퇴화된다. 무용지물이다. 손과 발이 없는 뱀처럼 스르르 기어다녀야 할 판이다. 편하고 쉬운 것만 찾다보니 언젠가는 몸통만 굴러다니지 않을까 우려된다. 부르는 것도 귀찮아 버튼이 있다. 누워서 떨어지는 감을 기다리지 않아도 스르르 진수만찬이 들어오는 목구멍들도 마찬가지다. 갑질인 부모 밑에서 성장한 갑질들의 진상이 자주 보이고 있다. 그들은 그 부모의 힘과 돈이 없으면 문 앞에서 키위키위 우는 날개 없는 키위새일 뿐이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처음부터, 두 손으로 힘겹게 열어야만 열리는 그…
훈제된 저녁을 위해 /윤형돈 내가 잘 때 그들은 깨어있고 우리가 누울 때 그는 달린다. 사건 현장에서 맞는 새벽엔 여명의 눈동자가 없다 하찮은 횡포와 사소한 무례가 거리에 난무할 때 경종 울리고 찰진 뭐 그런 마음의 파출소 하나쯤 누구나 지니고 살면 좋겠다. 방자한 자신을 타이르듯 통한의 수업은 모두 끝났다 궁노루 뛰놀게 하고 훈제된 저녁을 위해 졸업이다. 공부하는 내일은 졸업이 아니다. 오늘은 무엇에 대해 쓸까. 망설이고 있었던 터에 윤 시인의 시 한편이 날아왔다. 특수한 직업을 갖는 가까운 지인이 방통대 졸업을 했나보다. 인고의 시간을 타고 달려온 그에게도 아픔이 있겠지만 곧잘 안개 속에 서 있던 속살을 숨기듯 시나브로 지나가버린 계절의 일들과 성숙하지 못한 일들을 숨겨놓고 뿌연 안개로 덮인 새벽을 알리는 조간에 기억을 일어나게 할지라도 다시 해후하게 되더라도 몇 장의 슬픔을 잊고 뚜벅뚜벅 길을 열어가길 바란다. /박병두 시인·문학평론가
버리긴 아깝고 /박 철 일면식이 없는 한 유명 평론가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서명을 한 뒤 잠시 바라보다 이렇게까지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싶어 면지를 북 찢어낸 시집 가끔 들르는 식당 여주인에게 여차여차하여 버리긴 아깝고 해서 주는 책이니 읽어나 보라고 며칠 뒤 비 오는 날 전화가 왔다 아귀찜을 했는데 양이 많아 버리긴 아깝고 둘은 이상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뭔가 서로 맛있는 것을 품에 안은 그런 눈빛을 주고받으며 - 박철시집 〈작은 산/실천문학 2013〉 이 나라 시인의 꼬리꼬리한 냄새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시다. 자존심과 긍지까지도 함께 보여주는 시다. 전업시인이 거의 없다시피 한 시단에 등록된 시인이 이만 여 명이라 한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 시인들은 꾸역꾸역 새로 나타난다. 시인이 많다는 건 여러 가지 문제를 낳기도 하지만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이 시에는 있다. 시인도 식당 여주인도 나도 너도 우리 모두를 이상한 눈빛으로 이끄는 맛깔스러운 레시피가 있다. /조길성 시인
질그릇 /톈허 농부는 밥이 수북이 담긴 질그릇을 양손에 받쳐 들고 있다 생명은 한 그릇의 쌀밥과 함께 이어져 왔다 질그릇에 쌀밥이 담기지 않으면 밥을 먹는 사람은 이제 영원히 밥을 먹지 못한다 질그릇이 엎어지면 그것은 농부의 무덤으로 변해 버린다 - 톈허 시집 『바람이 불었다』, 한국문연 밥과 노동의 관계란 생명체의 거부할 수 없는 화두이다. 노동은 힘들고 밥은 맛있다. 노동은 피하고 싶고 밥은 먹고 싶다. 이것은 딜레마다. 우리는 매순간 머리를 굴린다. 조금 덜 노동하고 조금 더 맛있는 밥을 얻기 위해 골몰한다. 하고 싶은 일보다 밥그릇이 큰 곳을 기웃거린다. 밥그릇은 의외로 단순하다. 밥그릇은 엎는 순간 자신의 무덤이 된다. 이 사실은 무섭고 두렵다. 농부가 양손에 받쳐 들고 있는 질그릇은 윤기 없이 소박하다. 한 끼의 밥이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이미산 시인
군만두―일인분 /김향미 여기―지금―내가 있음이―내 뜻과 무관하다면 너―올드보이여 나의 가장 큰 敵이여 그리하여, 그러므로, 그러나, 그러하니, 그렇다면―누구냐 넌? 처음 만나는 양 해맑은 얼굴로 속이 비칠 듯 말 듯 하늘거리는 눈웃음으로 내게 눈짓하는 오늘이 악동의 표정이다 소가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이름을 버리고 그릇의 크기를 잊고 날마다 새로운 이름을 지어줄 테니 다른 꽃으로 오렴 낡고 무거운 네 허기를 벗어버리고 부디 만개를 겪어보지 못한 여린 꽃으로 약수 흐르는 우물의 표정으로 -〈유심〉 2014년 12월 내 삶에 갑자기 뛰어든. 넌 누구인가, 혹시 망치를 숨기고 있다가 갑자기 뒤통수를 칠 적이 아닌가, 혹시 군만두 일인분에 지나지 않을 사소한 존재가 아닌가, 장난기 가득한 아이처럼, 하늘거리는 눈웃음으로 다가오는 인연이 내 뜻과 무관하다면, 굳어진 군만두의 자세를 벗고, 군만두가 담긴 좁은 틀을 깨고, 날마다 밝고 피어나는 꽃처럼, 끝없이 솟아나는 맑은 물처럼, 새롭게 태어난 자의 모습으로 오렴. /신명옥 시인
꽃의 門 /김다희 밑씨가 은밀한 비밀의 문을 여는 시간 어둠을 하늘로 밀어올리는 꽃대 고독한 것은 스스로 빛나는 문장이다 도르르 말린 꽃잎 속에 詩자 한 자 새겨서 하늘이 잠시 잠깐 잠드는 사이 하얀 접시꽃 한 송이 제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김다희 시집 〈봄의 시퀀스〉에서 싹이 돋아 제 몸을 한껏 키운 꽃은 마침내 꽃봉오리를 만들어낸다. 그 꽃봉오리 활짝 열어 꽃을 토해내는 것을 지켜보면 가히 신비경이다. 거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향기는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생명과 우주의 불가사의한 조화이다. 詩가 과연 그 세계와 어울릴까 싶기도 하지만, 고독한 싸움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열어가는 점에 있어서는 비슷한 부분이 있을 성도 싶다. 모든 생명들이 자신을 비밀스러운 문을 한껏 열어 당당하게 세상으로 나오는 계절이 왔다. /장종권 시인
꿈꾸는 선묘 /박태일 선묘 앉은 귀밑볼 아침이슬 반짝입니다 선묘 앉은 돌부리 패랭이꽃 절로 핍니다 선묘 마음 속 간날 한 그리움 섰다 무너지면 선묘 저는 부석 물가 으뜸 빛좋은 곱돌입니다 손을 주셔요 산허리 빗발 들고 젊어 헤픈 님 사랑 무에 쓰나요 손을 주셔요 멈칫멈칫 님 떠나고 고개 돌려 님 떠나고 가릴 수 없는 그 한 자리 그리움 풍기 순흥 흔한 삼밭 삼꽃처럼 붉게 젖을 때 선묘 이제 발바닥으로 님 사랑 느끼며 선묘 이제 목젖으로 님 사랑 참으며 선묘 흘러 남도 바다에 서겠습니다 님 마을 언저리 배고픈 풀꾹새 되어 풀꾹풀꾹 한낮 온 밤에 저 그리움 남겨두고 가다가다 밤바다 첫물길을 놓치겠습니다. 신라에서 공부하러 건너온 젊은 의상스님을 연모해, 어머니 나라를 버리고 멀리 신라 땅까지 의상을 따라 건너왔다던, 당나라 처녀 선묘 옛이야기를 시로 풀어낸 듯 하다. 경북 북쪽 영주 부석사다. 가슴시린 일은 사랑하는 님 흔한 기억 속에서도 깃들지 못한 채 질경이 꽃처럼 철따라 피었다 지고 있을 이 땅 한 많은 여자들 속 앓는 사랑놀이다. 사랑은 사람이 이루는 일이나 사람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일 가운데 가장 큰 일이기도 하니 그럴 듯한 꿈꾸는 선묘의 자태가…
이탈한 자가 문득 /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시집 〈황금빛 모서리〉1993 생각이 똑같은 궤도를 돌고 있다. 이 진부한 궤도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몸부림 칠수록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안 되는구나, 별 수 없구나, 절망이 나를 짓눌렀다. 그래도 나는 놓지 못했다. 이 궤도가 나를 보호하고 지탱해주는 힘이라 여겼으므로, 떨어지면 끝날 것 같았으므로. 두려움과 공포,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이제 놓기로 한다. 익숙해지면 만들어지는 궤도라는 습성. 내 정신을 가두는 틀에서 저 낯선 곳으로. 나를 투하한다./신명옥 시인
빨간 민들레 /고정국 민들레야 섬에 피지 마라 민들레야 섬에 피지 마라 입양 절차도 없이 혈육 한 점 날려보낸 미혼모 홰를 켠 눈빛이 하얀 밤을 설친다. 폭풍에, 풍문에 떠돌다 어둠 속에 뿌리를 내려 밤이면 백만 송이 피워 밝힌 민들레 바다 빨갛게 아빠도 모르는 염색머리 소녀가 웃네. - 「빨간 민들레」 부분, 고정국 시집 『서울은 가짜다』 (2003년, 리토피아) 시조라고 하면 고즈넉함, 예스러움, 서정성 등을 아직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시조에 대한 고정관념을 단번에 깰 수 있을 만큼 고정국의 시는 현실에 밀착해 있고 힘이 있다. 섬의 민들레가 육지의 민들레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 시조를 읽으면서 처음으로 생각했다. 민들레는 포자로 번식하는 식물이다. 포자들이 바람에 실려 가다가 땅에 내려앉지 못하고 바다로 떠밀려 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다행히 땅에 내려앉은 포자는 뿌리를 내리겠지만 바다에 내려앉은 포자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어디로 실려 가는 걸까./박설희 시인
어머니가 가볍다 /이승하 아이고ㅡ 어머니는 이 한마디를 하고 내 등에 업히셨다 경의선도 복구공사가 한창인데 성당 가는 길에 넘어져 허리를 다치신 어머니 받내는 동안 이렇게 작아진 어머니의 몸 업고 보니 가볍다 뜻밖에도 딱딱하다 이제 보니 승하가 장골이네 내 아픈 나를 업고 그때…… 어무이, 그 얘기 좀 고만 하소 똥오줌 누고 싶을 때 못 눠 물기 기름기 다 빠진 70년 세월 업으니 내 등이 금방 따뜻해진다 -시집 『뼈아픈 별을 찾아서』 나는 작년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없으니 작년부터 천애고아다. 세상 비좁게 사는 나를 위해 어머니는 세상 모서리를 내게 내준다고 세상을 등졌다. 대신 어머니에게 내가 내준 자리는 경주 법화세계라는 추모관의 작은 수족관 같은 공간이다. 어머니가 가벼워지는 것도 부모라는 짐의 무게를 들어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안다. 끝끝내 자식 수발만 드는 어머니의 사랑이 절절이 끓는 시다. 이승하 시인이 내게 귀엣말을 해 온 적이 있다. 동병상련이라는 공감을 할 수 있었다. 산다는 것이 설탕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삶의 질곡에서 건져 올린 좋은 시를 보여주는 시인이 내내 존경스럽고 고맙다. /김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