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은 선은 아니지만 선한 생활의 필수 조건이다. 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밖에 없다. 노동과 걸식과 도둑질이다. 만약 노동자의 몫이 적다면 그것은 거지와 도둑의 몫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헨리 조지) 놀고먹는 사람이 한 사람 있으면 다른 한 사람은 가혹한 노동을 하고 있다. 배불리 먹는 사람이 한 사람 있으면 다른 한 사람은 굶주리고 있다. 게으른 자들이 일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줄여주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노동을 덧붙이는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치스러운 놀이는 모두 그런 것이다. 처음에 노예는 자신의 군주가 권력을 누린다는 사실에 불평하지 않고, 다만 군주의 폭정에 불평할 뿐이다.” (존 스튜어트 밀) 인간을 물질화하는 시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人間像)을 증오한다. (전태일)/ 주요 출처: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지난 17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김포 장릉 인근에 문화재청 허가 없이 올라간 아파트의 철거를 촉구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이 글은 곧바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22일 오후 10만 명이 동의했다. 29일 오전 10시 현재 동의한 사람은 14만 명애 가깝다. 김포 장릉은 조선 선조의 5번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과 부인 인헌왕후가 영면에 들어 있는 능이다. 사적 202호로써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그런데 이 앞에 문화재청 허가 없이 건축되고 있는 아파트가 경관을 해치므로 철거돼야 한다는 것이다. “김포 장릉은 파주 장릉과 계양산으로 이어지는 조경이 특징인데, 이 아파트는 김포 장릉과 계양산 가운데 위치해 조경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 청원인의 주장이다. “김포 장릉의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훼손하는 데다 심의 없이 위법하게 지어졌으니 철거돼야 하는 게 맞다. 이를 그대로 놔두고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나쁜 선례로 남아 위와 같은 일이 계속 발생할 것”이라는 청원인의 글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본보(26일 자 8면)에 따르면 장릉을 찾은 관람객들 역시 “우리가 지켜야 할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장릉이 신축 아파트에
지난 27일 인천 송도의 한 아파트에서 외벽을 청소하던 29세의 일용직 노동자가 추락했다. 49층 꼭대기에서 내려가며 청소를 시작해 15층 높이에서 줄이 끊어졌다고 한다. 그에게 외벽청소는 그날이 첫 출근일이었다. 처음 외벽을 타는 노동자가 외줄에 의지한 채 49층 꼭대기에서 허공으로 몸을 밀어낼 때 어떤 마음일까?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그를 지배했을 것이다. 두려움을 밀쳐내고 첫발을 내딛기까지 그의 어깨 위에는 여러 이유가 켜켜이 쌓여져 있었을 것이다. 매달리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삶의 절박한 요구들이.. 신산한 일용직노동자의 삶에 선택지는 그다지 많지 않다. 보통사람은 내려다보기조차 살 떨리는 높이에서 그는 그렇게 매달렸고 짧았던 젊음을 마감했다. 우리는 한해 산재로 882명이 죽는 나라, 그중에 37%인 332명이 이처럼 작업 중 떨어져 세상을 떠나는 나라다(2020년 기준). 비슷한 또래의 90년생 청년 한 사람도 산재(?)를 당했다고 한다. 업무상 과부하로 어지럼증을 앓았다는데 회사는 6년 근무한 그에게 퇴직금(위로금?)으로 50억을 지불했다. 모두가 다 아는 곽상도 의원의 아들 곽병채 씨의 이야기다. 그는 열심히 일했고, 그 대가를 받았을…
‘몸 상해 일한 대가, 50억!’. 국민의힘 곽상도 의원 아들의 이 발언은 조롱과 비아냥의 대상이 되어버렸지만 한편으로는 기가 막힌 일이기도 하다. 어떻게 일해야 퇴직금을 50억이나 받을 수 있는지, 몸이 얼마나 상해야 50억이라는 위로금을 받는지, 우리는 매우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곽 의원은 문준용 씨에 대해 사사건건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근거로 대통령에 대해 저격을 일삼았다. 이제 와서 보면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다. 결국에 문준용 씨에 대한 문제 제기는 아무런 귀책사유가 없음이 밝혀졌지만 검사출신 국회의원으로서의 경험과 지위를 이용한 곽 의원의 행동은 다른 곳에서도 거침이 없었다. 알려지지 않은 일이지만 필자가 몸담고 있는 직장에서도 곽 의원에게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다. 곽 의원이 국회의원으로서 요구하는 무지막지한 자료 요청에 직원들은 퇴근을 하지 못했고 이어지는 고소로 인해 업무 담당자는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업무담당자는 생전 처음 받아보는 경찰 조사로 인해 두려움을 호소하였고 심한 두통과 두근거리는 심장 등 심신 이상도 발병하였다. 당연히 경찰 조사 결과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무혐의가 결정되었지만 곽 의원의 집요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북한의 대남 정책을 총괄하는 것으로 알려진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이틀 연속 담화에서 정상회담 재개까지 거론해 주목된다. 김 부부장은 지난 24일에 이어 25일 종전선언과 남북정상회담 재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재설치 가능성을 언급한 심야 담화를 냈다. 김성 유엔주재 북한 대사도 27일(현지시간) 제76차 유엔총회 일반토의 연설에서 “미국이나 남조선 등 주변 국가의 안전을 절대 침해하거나 위태롭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연설에서 ‘종전선언’을 제안한 이래 나타난 북한의 이 같은 변화는 일단 의미 있는 변화로 읽힌다. 개인 의견이란 전제를 달긴 했으나 김여정 부부장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교감이 없이 할 수는 있는 발언이 아니라는 점에서 북한의 경색국면 전환 의지는 분명해 보인다. 꽉 막혀있는 남북관계에서 새로운 모멘텀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환의 계기를 만들기에 낙관적인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북한의 변화를 무작정 긍정적으로만 해석하기에는 우선 그간 저들이 취해온 비상식적 처사들이 너무나 많다. 국제적인 여론뿐만 아니라 국내 여론도 호의적인 상황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로서야 뭔가 극적인 반전을 만들어내고 싶은…
1960년대 말 나의 고등학교 시절, 지금은 100세가 넘으셨음에도 우리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계신 김형석 교수님께서 10권으로 된 전집을 내셨다. 가난했던 시절, 아들이 그 전집을 사 달라는 간청을 거절할 수 없어 큰 결단을 내리시던 내 아버님의 눈빛이 지금도 생생하다. 잠을 잊은 채 밑줄을 그어가며 연거푸 두 번을 읽었던 기억. 아마도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은 김 교수님이라고 나는 지금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근래 그분의 현 정부에 대해 비판 기고문, 인터뷰 내용이 세간의 화제가 되면서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도 같은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다는 주위의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아는 김 교수님은 그런 생각을 하실 분이 아닌데 혹시나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심이 사실이라면, 그분의 우리 사회에의 영향력을 생각할 때 그냥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남북문제, 나아가 민족의 통일문제는 이념의 잣대를 버리고 희망적 사고가 아닌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여,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바른 길이 보인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김 교수님께서 현 대북정책에 비판적이라는 전제하에 그분의 의식세계를 합리적으로 한번 추론해 보자. 수구초심(首丘初心
불교 경전인 ‘열반경’에 나오는 맹인모상(盲人摸象)이란 우화가 있어요. 바로 ‘장님(시각장애자) 코끼리 만지기’ 이야기죠. 옛날 인도의 어떤 왕이 장님들을 불러서 손으로 코끼리를 만져 보고 어떤지 말하라고 시켰답니다. 그러자 코끼리의 상아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가 “무같이 생겼다”고 말하고, 귀를 만진 이는 “곡식을 까불 때 쓰는 키같이 생겼다”고 했어요. 다리를 만진 사람이 나서서 “다 틀렸다. 코끼리는 커다란 절굿공이같이 생겼다”고 우겼고, 꼬리를 만진 사람은 “굵은 밧줄처럼 생겼다”고 주장했죠. 정치권이 내년 3월로 예정된 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끈 달아오르고 있네요. 주기적으로 인물을 놓고 견줘볼 수도 있고, 정책을 두고 따따부따도 할 수 있다는 건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 국민의 특권이죠. 선거철만 되면 이런저런 부정적인 평가나 불만이 쏟아지고, 지역과 혈연, 지연을 중심으로 갈등도 심화하므로 부아가 치밀 때도 없진 않아요. 그러나 어쨌든 권력을 잡겠다는 사람들을 무대에 올려놓고 생각과 말과 살아온 날들을 뜯어보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그런데 여야의 당내 경선이 치열한 작금의 정치권을 바라보노라면 저절로 짜증이 납니다. 후보들은 자기의 면모를 정직
어린이놀이터 옆 정자나무 쉼터에 걸터앉아 어린이들 노는 모습을 본다. 손자 또래 아이들 대여섯 명이 콘크리트 의자에 가방을 얹어놓고 신나게 놀고 있다. 무슨 놀이인지 한 아이는 호루라기를 불고 다른 아이들은 도망을 치고 뒤를 쫓아가기도 한다. 검은색 반바지에 흰색 셔츠를 입었는데 한 사람 같이 토실토실 건강해 보인다. 사랑스러운 생명의 풋기운이 느껴졌다. 그런데 조금 놀다 어디에서 다시 모이자고 했는지 썰물같이 사라져 갔다. 다른 어린이가 아빠 손을 잡고 등장한다. 아이는 그네를 타고 싶은데 잘 나가지 않는다. 앞으로 걸어갔다 뒤로 밀려오는 반동을 이용해 재밌게 타고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아빠가 다가간다. 아들을 그네에 앉히고 그넷줄을 꽉 잡게 하고서 밀어 높이 띄워준다. 아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좋아한다. 아빠는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사진을 아들에게 보여주며 함께 웃는다. 아빠의 환한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한동안 신나게 놀다가 아이는 아빠의 손을 잡고 돌아갔다. 얼마 후 동생인 듯싶은 서현이가 엄마와 함께 나타났다. 엄마는 딸 서현이가 어린지라 눈 안에서 놀도록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넷줄을 손으로 잡는 법도 알려주고 서현이를 발판에 잘 앉히고 조
진정한 행복은 결코 단번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 얻을 수 있다. 진정한 행복은 나날이 새롭게 완성으로 가는 길을 걷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글을 배우면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벗에게 편지를 써야 하는지 쓰지 말아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음악은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켜는 것을 가르쳐주지만, 언제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켜야 하는지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오직 이성만이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르쳐줄 수 있다. 우리에게 이성을 부여함으로써 신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우리 스스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준 것이다. 지금과 같은 나를 창조한 신은 어쩌면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을지도 모른다. “에픽테토스야! 나는 네 보잘것 없는 육체와 초라한 운명에 훨씬 더 많은 것을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해서 나를 원망하지는 마라. 나는 너에게 네가 하고 싶은 일은 뭐든지 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주는 대신, 네 속에 나 자신의 신성의 일부분을 불어넣었다. 나는 너에게 선을 향해 나아가고 악을 피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나는 네 속에 자유로운 이성을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