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재보선 이후 정치권이 내년 대통령 선거를 향한 반응을 시작했다. 출발점은 민심의 무게추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불변의 법칙이어야 한다. 여당에게는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회초리였고 야당에게는 변화가 없다면 다음에 똑같은 채찍을 예고한 것이다. 그런데 선거 후 모습들은 여야가 별로 달라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다. 먼저 여당을 보자. 선거 패배에 책임지고 물러난 지도부에는 소위 친문 인사들이 다시 자리를 메웠다. 당내 50여명의 초선 의원들이 ‘반성문’을 내고, 앞으로 선출할 당 지도부에 친문 진영의 2선 후퇴를 촉구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당 대표 후보군에 거론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그 범주에 해당한다. 변화의 시작은 인적 쇄신이다. 새 지도부는 내년 3월 대선에 내세울 후보 경선을 관리하는 막중한 책임을 맡는다. 특정 색깔을 가진 지도부가 들어서 자칫 경선 중립 논란을 불러온다면 본선에서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여당이 재보선 참패의 수모를 딛고 대선에서 제대로 싸우고 싶다면 당내 역량을 총집결할 수 있는 최고의 경쟁력 있는 후보를 만들어 내고, 그 후보의 정책과 신념을 중심으로 심판을 받는 게 최선이다. 과거 여당 아래서 선출된 김영삼(1992
4,7 보궐선거가 끝났다. 무능한 정권보다는 부패한 정권이 낫다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언론들은 그 결과를 두고 문 정권의 실정 특히 부동산정책의 실패를 원인으로 꼽고 있다. 기울어진 언론지형을 탓하더라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것은 청년층의 이탈이다. 아직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출구조사에서 18~20대 남성 청년층은 야당후보를 70% 이상 지지했다고 한다. 촛불정권을 만든 청년들이 이제 촛불정권을 버린 것이라며 청년층이 보수화되고 있다고 한다. 혹자는 이를 두고 4, 50대와 달리 그들은 민주화운동과 감정적으로 연결되지 않았기에 권위주의 정권의 폐를 이해하는 역사의식이 부족하고, 찰나적인 욕망에 부응하는 MZ(밀레니엄 세대)세대들의 특성이라고 말한다. 과연 청년층이 보수화된 것일까? 정치의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아프고 상처난 곳을 어루만져주고 사회 전체의 힘으로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강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는 끊임없이 약자의 입장에 서야 한다. 코로나 정국에서 전 국민이 힘들고 지쳐가고 있었다. 자영업자, 직장인, 공무원, 의료진, 알바생까지 모든 국민이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고 외
언론이 객관적일 수 있을까? 사실상 불가능하다. 공정성과 균형성도 마찬가지다. 관점에 따라 다 다르다. 북한산을 동서남북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것처럼. 불가능한 언론의 객관성을 마치 가능한 것처럼 포장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특정 이념을 지향(주관적)하면서도 객관을 빙자해 때로는 심판처럼 행세하려 든다. 언론이 활용하는 객관용 포장재는 ‘취재원’이다. 기자의 이념성향에 맞는 취재원의 말만을 인용해 그 사안을 일반화하려 든다. 기자는 여러 방식으로 다양한 취재원을 만난다. 사건 현장이 가장 바람직 하지만 모든 사건 현장에 다 있을 수는 없다. 각종 통신수단을 활용해 취재원의 목소리를 듣는다. 코로나가 창궐한 후로는 비대면 취재가 더 느는 추세다. 어떤 방식으로 취재를 했던 문제는 기사 방향을 미리 설정하고 거기에 맞는 취재원만을 인용해 객관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한 예로 KBS시청료 인상 문제는 찬반의 대립이 있다. 이런 사안을 보도하면서 특정 입장을 대변하는 전문가 의견만을 인용한다. 그 전문가의 이념 성향을 알 수 없는 독자들에게 방송계 전체 의견인 것처럼 포장한다. 취재원의 다양성과 관점의 다양성은 언론의 공정성을 담보하는 전제다.…
똑순이었다. 그녀가 갑자기 나타나서 뭐라고 몇 마디 하더니 검정 비닐봉지 하나를 내 손에 건네주고 총총히 사라졌다. 이름은 나도 모른다. 나이는 나보다 한두 살 어린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똑순이 반장이라고 불렀다. 똑순이는 중학교 졸업하고 바로 공장에 들어왔다고 했다. 150이 될까 말까 한 작은 키였다. 하지만 얼마나 야무지고 똘똘했는지 10년 만에 상동공장 반장이 되었다. 억세다는 아줌마들도 똑순이에게는 꼼짝하지 못했다. 남자들도 힘들어하는 석고 틀을 번쩍번쩍 들어 날랐다. 노조 대의원이었다. 그러나 데모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석현공장에서부터 임금인상과 노조민주화 투쟁이 시작됐지만, 똑순이는 나서지도 않았고 다른 남자 대의원들처럼 아줌마들이 데모에 참가하는 것을 막지도 않았다. 모두 본사까지 가두 시위에 나설 때도 똑순이는 묵묵히 자기 일만 했다. 상동공장 경비실 옥상에 올라가 데모를 할 때도 공장 창문으로 쳐다만 보던 똑순이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나는 데모를 주동하다 해고되었고 복직 투쟁 30일째였다. 저녁 퇴근 시간에 상동공장 앞에 와서 피켓시위를 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검정 비닐봉지를 열어보았다. 하얀 우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면, 우리는 거기서 초인간적인 무언가를 의식하게 된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이상 신도 역시 존재한다. 그것을 신이라 부르건 뭐라 부르건, 어쨌든 우리 안에 우리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 생명의 원천을 신이라 부르건 뭐라 부르건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마치니) 숲을 거닐면서 내 눈을 피해 전나무의 뽀족한 잎 속에 몸을 숨기려고 다급하게 움직이는 딱정벌레를 바라보면서 스스로 묻는다. 어째서 이 딱정벌레는 이렇게도 겁을 먹고 나에게서 숨으려고 하는 것일까? 어쩌면 내가 그 녀석의 은인이 되어 그들의 무리에게 무척 기쁜 소식을 전해줄지도 모르는데. 그럴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위에, 즉 이 딱정벌레나 다름없는 인간 위에 서 있는 위대한 은인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소로) 신은 마치 그물과 물의 관계와 같다. 뜨고 있는 동안 물은 그물 속에 있지만, 떠냈을 때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색과 행위를 통해 신을 찾고 있는 동안에만 신은 우리 안에 있다. (표도르 스트라호프) 이 세계와 우리의 삶 뒤에 왜 이 세계가 존재하며, 그 속에서 우리가 왜 부
지난 8일 경기조달지원센터가 수원시 영통구에 문을 열고 업무에 들어갔다. 이로써 조달업체 업무처리를 위해 인천지방조달청과 서울지방조달청까지 가야 했던 경기남부지역 중소기업들은 가까운 수원에서 일을 처리하게 됐다. 도내에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기업(총 78만개)이 있다. 조달사업실적 역시 전국에서 가장 많은 6조5천억 여원이다. 그런데도 이런 대접을 받아 온 것이다. 수원에 경기조달지원센터가 신설되면서 도내 기업들의 애로사항 일부는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조달청 독점체제다. 경기도는 공공 조달시장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합리적이고 공정한 조달 시스템이 도입돼야 한다며 도 자체 공정조달시스템 구축을 추진 중이다. 지난해 7월 경기도청에서 열린 ‘국가조달시스템(나라장터)의 지방조달 독점 개선을 위한 공정조달시스템 자체 개발·운영 전문가 간담회’에서는 현재 조달청 독점 체제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조달청이 정부·지자체·공공기관 등 공공 조달시장을 독점함으로써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간담회 참석자들의 발언은 타당성이 있다. 특히 “공정한 경쟁을 하고 합리적인 가격에 구매를 하려면 저희 같은 일반기업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야 할
왜 그럴듯한 남성조차 여성존중에 실패하는가? 정의당의 장혜영 의원은 당대표가 자신을 성추행한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며 국민들에게 발표한 글에서 위와 같이 물었다. 사실 나도 계속 그것이 오래동안 궁금했다. 왜 그럴듯한 그들이 여성을 존중함에 실패하는가? 선한 가치의 추구, 인간 진보에 대한 희망과 그것에 대한 실천을 표방하는 이들이 왜 바로 옆의 여성을 존중하는데 성공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궁금한 그것을 물을수도 없었고 행여 아주 조심스럽게 용기를 내어 물어도 대답은 석연치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하라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니가 너무 예민하다는 말을 많도 많이 들었다. 그러던차에 나의 오랜 내적물음을 표면화시킨 장의원의 글들은 나만 아팠던 것이 아니구나 나만 궁금했던 것이 아니구나 위로가 되었다. 문제제기를 하는 국회의원이 대한민국 국회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희망을 보았다. 급진적 여성주의를 표명하던 한 여성의원은 한 한의사모임에 참여해서 그 모임에서 유일한 여성이었던 나에게 건배를 청하며 자신이 여성주의를 내세우며 핍박을 받은 역사를 알려 주었다.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과거에 어떤 시선을 받았는지 알기에 그녀의 용기에 지지를 보내었다. 그 말들 이
우리의 삶이 정신적일수록 우리는 더욱 더 불멸을 믿게 된다. 우리의 본성이 동물과 같은 성질에서 멀어짐에 따라 불멸에 대한 의심은 점점 사라져간다. (마르티노) 내세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내세를 믿는 근거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신의 존재와 나의 불멸이 의심할 나위 없는 진실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다만 나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과 내가 불멸한다는 것을 도덕적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것은 곧 신과 내세에 대한 믿음이 나에게서 결코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내 본성과 굳게 맺어져 있음을 뜻한다. (칸트)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 알고 있는 것의 전부는, 내가 아직 본 일이 없는 것, 모르는 것을 믿으라고 나에게 가르친다. (에머슨)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입장은, 학자가 자신의 학문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방에 들어간 어린아이와 같다. 어린아이는 그 얘기의 시작을 듣지 못했고 또 얘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하고 나간다. 그는 무엇인가 듣기는 듣지만 들은 것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신에 관련한 말은 우리가 공부를 시작한 것보다 몇십 세기 전에 시작이 되
“광산의 조건이 지금보다 더 나빴던 것은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젊은 시절 깊은 지하 갱도에서 말 등에나 씌우는 마구(馬具)를 둘러메고 팔 다리로 기어서 탄차를 질질 끄는 그 지독한 노동에 시달렸던 노부인들이 아직도 몇 사람 살아 있다.” 조지 오웰이 1937년 출간한 《위건 부두로 가는 길 (The Road To Wigan Pier)》의 한 대목이다. 이 작품은 영국 북부 탄광지역 위건의 빈민노동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조사한 르포 문학이다. 다음 문장을 보자. “그녀들은 임신 중일 때도 이 일을 계속하곤 했다. 요즈음에도 만약 임신한 여성들이 탄차를 끌어야만 석탄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석탄 없이 지내기보다 차라리 임신부들이 탄차를 끌게 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 그럴까? “우리 모두가 비교적 고상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정말이지 목구멍에는 석탄 먼지가 가득하고 눈까지 시커멓게 된 채 강철같은 팔과 배의 근육으로 삽질을 해대면서 지하에서 악착스럽게 일하는 이 가련한 사람들 덕택이다.” 그러면 그 ‘가련한 사람들’은 왜 이리 일해야 하는가? 그 까매진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어찌 하랴. 조지 오웰은 수입이 끊기는 공포를 이렇게 단적으로 짚는다. “가장 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