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교사 : 오랜만이에요. 어떻게 지냈어요? 최 교사 : 엄청 어려웠어요. 처음엔 이럴 수도 있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일주일이 가고 또 일주일이 가고, 그러면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불안하고 초조하고, 교실을 들여다보면 걱정만 쌓이고 아이들이 재잘거리던 시간들이 그리워지고… 나는 교사가 맞구나 싶어 눈물겨웠어요. 박 교사 : 방안을 찾자고 채근하는 교장의 입장에도 동정이 가더라고요. 리더는 저렇구나.… 최 교사 : 캐나다 로키산맥 기슭의 어느 마을에서 근린공원 임시 갤러리를 마련했는데 거기에 한 초등학생이 써 붙인 ‘칩거 중에 내가 할 일’ 목록을 어느 블로그에서 봤어요. 할머니께 전화하기, 친구들과 그룹 채팅하기, 쿠키 굽기, 쿠키 먹기, 숙제하기, 그림그리기, 리스트 작성하기, 갤러리에 내 그림 걸기…. 아이의 생활과 생각이 오롯이 드러난 그 작은 페이퍼를 보고 다짐한 게 있어요. 내가 아이들에게 일일이 안내하고 설명하고 지시·통제하고 점검·확인하고… 단편적·단기적·일시적으로 그렇게 종용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고
제주에 유채꽃이 피고 있다. 노오란 유채꽃의 물결. 바다의 색깔과 대비를 이루면서 환상의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이 눈부신 4월의 초입에 제주는 도저히 씻어낼 수 없는 아픔의 흔적이 있다. 바로 1948년(무자년) 4월 3일의 기억이다. 그 중에도 4월의 유채밭과 관련된 일은 다랑쉬동굴이다. 다랑쉬동굴은 다랑쉬오름 자락 밑 밭 두둑 사이에 있는 동굴이라고 볼 수 없는 평지의 돌밭에 난 굴이다. 1948년, 이 마을 부녀자와 아이들 11명이 이 동굴에 숨어들었다가 진압군이 피운 맞불 연기에 질식해 모두 죽은 참화의 현장이다. 이 현장은 아이러니하게도 1992년 4월 유채꽃이 피는 봄날 발굴되어 당시의 처절했던 비극을 일깨우며 보는 이의 가슴을 무너져 내리게 했다. 제주 4 3을 외부에 알리고 끊임없이 증언해온 제주 토박이 오승철 시인은 이 현장을 <다랑쉬오름> 작품을 통해 “무자년 솥과 사발, 녹 먹은 탄피 몇 개/ 한 마을 이장해가듯, 고총같은 동굴이여.”라며 정직한 어조로 밝힌다. <바람 난장> 행사에 초청 받았다가 알게된 “무등이 왓”마을도 이로 인한 비극의 현장이었다. 제주의 <바람 난장>은/시와 그림과 음악과 춤이 어우러
n번 방에서 자행된 폭력이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뜨려버린 요즘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익명이 보장된 공간 안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혹하게 돌변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그러한 잔혹한 행위가 돈으로 거래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온라인상에서 자행되는 폭력은 우리 사회의 오랜 논란거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이와 같은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수많은 현대 예술가들은 인간이 지닌 폭력성을 지속적으로 고발해 왔다. 클래스 올덴버그는 청계천에 설치된 높은 소라껍데기 형상의 조형물의 작가로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만, 작업 초기에는 평범한 일상에 만연한 폭력성을 고발하는 작업을 했었다. 스웨덴인이었던 그는 1960년에 미국의 그리니치 빌리지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건달들, 주정꾼들, 매춘부들, 권총 든 사람들이 넘쳐나는 거리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극도로 자본화된 사회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이처럼 잔혹한 거리로 내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거리에 뒹굴고 있는 쓰레기들과 파편들을 주워왔고, 그것에 석고와 물감을 덧발라 권총 모양을 만들었다. <레이건 스펙스 Ray Gun Spex>(1
불규칙 활용 /권혁재 자음 ㄱ으로 미수를 건너온 서천댁 삼열씨 ㄱ의 순리와 말씀으로 불규칙을 새겨들은 서삼열 권사 어쩌다 다른 자음으로 활용하고 싶어도 골화된 요추받침을 지팡이 삼아 ㄱ으로만 걸은 삼열씨 죽음에 들어서야 모음 ㅣ로 반듯하게 편다 자음 ㄱ에서 모음 ㅣ를 최후 자세로 활용한 서삼열씨 ㄱ의 불규칙을 버리고 ㅣ의 규칙으로 관에 누운 서삼열 어머니 굽은 ㄱ이 ㅣ의 어미 활용을 한다. ■ 권혁재 1965년 경기도 평택 출생. 200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해 단국대학교대학원 문예창작학 박사 졸업했다. 시집으로는 『투명인간』 『안경을 흘리다』 외 다수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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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입국자의 ‘코로나19’ 감염사례가 늘고 있어 방역당국이 긴장하고 있다. 이에 정부는 지역사회 감염을 막기 위해 해외 입국자들에게 자가용을 이용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되면 다수의 타인과 접촉이 불가피하고 이는 확산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자가용을 운행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에 경기도가 지난 달 28일부터 미국·유럽발 무증상 입국자들을 대상으로 공항버스를 지원해왔는데 1일부터는 전체 해외 입국 무증상 도민들까지 이용대상을 확대했다. 그런데 경기도 보다 수원시가 이 서비스를 먼저 시행했다. 수원시는 지난 달 26일부터 ‘안심 귀가’라는 서비스를 실시, 해외 입국자들을 개별 수송했다. 수원시민이 사전 신청하면 공항에서 임시생활시설까지 단독 수송해주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시민과의 접촉을 막기 위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연수원 생활동을 무증상 해외 입국자의 임시생활시설로 지정, 진단 검사를 진행하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1~2일간 대기시키고 있다. 이는 공항검역소에서 무증상으로 판단해 입국장을 통과 귀가했지만 나중에 확진 판정을 받는 입국자들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거연수원에서의 진단 결과 여
카프카의 변신처럼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존재하는 바이러스와 싸워야 하고 그 공포와 닥쳐올 위험에 대한 대비로 바쁘다. 처참하고 우울한 변신이다. 코로나19사태가 진정이 되어도 경제활동, 라이프스타일, 인간관계, 사회망 모두 커다란 패러다임의 전환을 맞이할 것이다. 즉 코로나19 전과 후는 우리 삶의 대 변혁을 예고한다. 이른바 ‘언택트(untact)문화’는 빠르게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온라인에 익숙하지 않았던 기성세대도 코로나19 사태 이후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디지털 환경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어졌다. 대학도 어김없이 변화해야 했다. 문 닫힌 각 대학들은 의도치 않게 사이버대학으로 변신을 했다. 한 번도 시도 해보지 않았던 낯선 온라인 강의를 준비하느라 교수들은 진땀을 흘리고 강의부실을 호소하는 학생도 학교도 적응하는 과정에 모두 혼란스럽다. 필자는 사이버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사이버대학은 코로나19에 영향을 받지 않고 학사일정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오히려 코로나19로 인해 학생들의 만족도가 높아지고 등록률도 높아졌다. 지금 여러 대학에서 터져 나오는 학생들의 수업 질에 대한 볼멘소리는
1893년 봄, 충청도 보은군 장안골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장안골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아이들이 “서울 장안이 장안인가 보은 장안이 장안이지”라는 노래를 불렀다. 보은 장안골 곳곳에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새긴 깃발이 휘날렸다. 집회를 소집한 해월 최시형(1827~1898)은 도인들에게 공중위생을 지키고, 음식을 조심하고, 청소를 철저히 할 것 같은 기본 수칙을 알려주고 잘 지키도록 했다. 수만 명이 모였으나 장안골에는 대소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땅을 파고 일을 본 뒤에 깨끗이 파묻었기 때문이다. 떡장수와 엿장수도 몰려들었다. 점심때가 되면 순식간에 광주리와 엿판이 비워졌다. 놀랍게도 광주리와 엿판에 놓고 간 돈을 계산하면 한 푼도 틀리지 않았다. 장사꾼들은 이후부터 떡 광주리와 엿판을 내려놓고 광주리가 비기를 기다리다가 돈만 거두어 갔다. 보은에 수만의 동학도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고종(1852~1919)은 호조판서 어윤중(1848~1896)을 양호선무사로 임명했다.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보은에서 성장한 어윤중은 보은 일대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에 한번쯤 빠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세계 공통이다. 그래서 미국의 컬럼니스트 짐 피빅은 만인에게 사랑받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이렇게 표현 했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아이스크림이 콘에서 떨어질 때의 실망감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이런 아이스크림의 원조(元祖)를 자처하는 나라는 여럿 있다. 이탈리아도 그 중 하나다. “로마시대 네로 황제가 시칠리아섬 에트나산 정상에서 가져온 만년설에 과일 등을 섞어 먹은 것이 최초의 아이스크림 기원”이라 주장하고 있어서다. 그리스 사람들은 기원전 5세기에 눈가루에 꿀을 섞어서 먹었다며 원조를 자처하고 있다. 중국은 이들 나라의 아이스크림은 ‘셔벗’의 원조에 가깝다며 2세기경 우유와 쌀을 얼려서 혼합해 만든 아이스크림을 먹은 자신들이 원조라 주장한다. 아이스크림을 얼음이라는 의미의 ‘글라세’라고 부르는 프랑스도 원조를 자처하는 나라다. 아이스크림이 대중화 된 것은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만국박람회에서다. 우연히 와플 장수와 아이스크림 장수가 공동으로 와풀에 아이스크림을 담은 콘을 선보였고 곧바로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시원 달콤함’의 대명사가 됐다. 우리나라엔 좀 늦게 상륙했다.…
겨울 문턱은 삭막하다. 겨울엔 모든 것들이 동면에 들어간다. 나무는 가지를 벗고 맨몸으로 칼바람을 맞이할 태세를 갖춘다. 어찌 나무뿐이랴. 어린 시절 가난한 내 이웃들도 겨울 문턱엔 저마다 허둥거렸다. 겨울은 두려웠고 겨울은 사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행여 먹을거리가 모자라지 많을까. 행여 추위에 떨 내 새끼들에게 무엇을 입힐까? 사람들은 허름한 장롱문을 열고 겨울 준비를 서둘렀다. 이미 바람결이 선뜻해진 겨울 문턱에서 너나없이 들판에 나서 한 톨이라도 더 거두기 위해 가을 추수에 땀 흘렸다. 어린 나는 그런 겨울을 기다렸다. 겨울에는 눈이 오기 때문이다. 얼음 위에서 뒹굴고 놀기 좋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내 첫눈이 오기를 기다렸다. 삭막한 겨울 아침 집 뒤란의 대숲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와 참새 소리도 기다려졌다. 그러나 나에게 겨울은 춥고 배고팠다. 그런데도 나의 겨울은 이상하게 설렘을 안겨주었다. 나에게 겨울은 기다림의 계절이었다. 추위 속에서도 얼음이 풀리고 봄이 온다는 희망의 계절이었다. 겨울이 있기에 봄이 오기 마련이니까…. 우리의 생인들 무엇이 다를까? 나의 어린 시절은 차가운 빙점이었다. 춘궁기가 있던 내가 자란 합천 골짝은 겨울이 너무나 가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