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에 있을 국민의힘 전당대회 룰이 결정됐다. 지금까지의 국민의힘 당헌 당규는, 당원 투표 70%와 일반 국민 여론조사 30%로 당 대표를 선출하도록 규정돼 있었다. 그런데 이번 전당대회 룰 변경으로, 100% 당원 투표로만 당 대표를 선출하게 됐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당원 투표 90%에 여론조사 10%의 비율로 바꾸자고 했다가, 결국 당원 투표만으로 당 대표를 선출하게 된 것이다. 당원 투표로만 당 대표를 선출하자고 주장한 측의 논리는 이렇다. 첫째, 당원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당원의 목소리를 최대한 반영해야 한다, 둘째, 현재 당원 수가 80만 명까지 늘었기 때문에, 과거 20만 당원 시대보다는 당원 투표만 반영하더라도 훨씬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수 있다, 셋째, 여론조사의 비율을 늘릴수록 역선택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등이 당원 투표만으로 대표를 선출해야 한다는 논리적 근거다. 당원도 4배 가까이 증가했고, 당내 민주주의를 활성화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논리도 설득력은 있다. 그런데 역선택 가능성 때문에 당원 투표만으로 당 대표를 선출하자는 논리에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여론조사에 역선택이 혼재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부인하기 힘들다.…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 10‧29 이태원 참사 49일 시민추모제가 지난 16일 이태원역 거리에서 열렸다. 무대 위 대형 스크린에는 희생자들의 생전 사진과 유족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스쳤다. 진행자는 희생자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리고 이름 하나마다 “기억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추모는 대상이 되는 사건이나 사람에 대해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일이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과거의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이면서 슬픔을 넘어 현재를 살아갈 힘을 찾아내게 한다. 애도의 한 방법이기도 한 추모는 희생자를 잃은 상실과 슬픔, 그리고 아픔을 유가족과 지인들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표현하게 한다. 이런 시간의 누적이 서로를 지지하는 힘을 이룬다. 희생자에 대한 개인의 기억이 미디어를 통하면 사회적 기록이 된다. 이렇게 모인 추모 기록은 사회적 기억을 구성한다. 희생자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기억이 되고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겠다는 이유가 될 것이다. ‘미안해, 기억할게’라는 제목으로 한겨레가 연재하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 이야기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야기하고 있다. 엄마 아빠에게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것
모든 것에 저항할 수 있지만 선량함에 대해서는 저항할 수 없다. (루소) 선행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선이 아니다. 대가를 예상하고 이루어진 경우에도 역시 선이 아니다. 선은 인과율을 초월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횃불과 불꽃이 아무리 강력해도 태양 앞에서는 빛을 잃어버리듯이, 우리의 지능도(설사 천재라 하더라도) 또 아름다움도, 마음으로부터의 선량함 앞에서는 빛을 잃어버린다. (쇼펜하우어) 한없는 부드러움은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들의 천성이자 재산이다 (존 러스킨) 연약한 식물이 단단한 흙을 뚫고 바위가 갈라진 틈을 지나 자생한다. 선량함도 그와 같다 어떠한 쐐기도, 어떠한 망치도, 어떠한 무기도 선량하고 성실한 사람은 이기지 못한다. (소로) 인간이 있는 곳에는 그에게 선을 행할 기회도 있다. (세네카) 우리가 어떤 사람을, 우리의 마음에 든다거나 우리에게 선을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속에서 모든 사람들 속에 깃들어 있는 신의 영혼을 보기 때문에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신의 사랑, 진정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원수 사랑이 가능해지는 이유이다. 위대가 무엇이 위대겠습니까? 강대국의 뒤를 따라가며 그 후진을 무릅쓰는 이른바 후진국의식을…
행정 부재 상황에서 세월호 참사와 유사한 형태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160명 가까운 희생의 사회 참사는 유족은 물론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특히 참사를 흔적 없이 지워버리려는 정부의 의도적 참사 대처 방식은 사람들의 분노를 더욱 유발했다. 그런 방침은 참사 이튿날인 10월30일 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결정이었다. 희생자들에 대한 49재 시민 추모제가 지난 주 이태원역 앞에서 있었다. 정부의 방해 공작과 무책임한 변명 속에 분노한 국민 모두, 유족의 슬픔과 함께 하며 참사 희생자를 기리고, 다시는 이와 같은 참사가 없기를 바라는 행사였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굳이 그날 살던 아파트 주민들에게 감사 떡을 돌리고, 특정 행사에 참석해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환히 웃는 모습을 연출했다. 세상을 향해 눈물 흘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올린 로마 권력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직 ‘법대로’만이 진리로 보인다. 이처럼 우리사회는 정치 검찰에 의한 검찰독재국이 되어, 이제 ‘민주’가 아닌 ‘법주공화국’이 되었다. 사람을 노예로 생각하며 법을 주인으로 모시는 나라다. 법주공화국에선 정치 검찰에 의한 정치 폭력이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은 2017년 6월 2일 선을 보인 후 2018년 12월 14일 막을 내린 시즌 3까지 6% 안팎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알쓸신잡은 지난 12월 2일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인간 잡학사전(알쓸인잡)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돌아왔다. 알아두어서 쓸데없는 앎은 없다. 속임수나 가짜뉴스도 평소에 넓게 지식을 축적해두면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사실 공부는 꼭 쓸 데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내가 좋아서, 나의 만족, 자아의 발전을 위해 습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적 욕구를 채우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게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원시인류가 말을 하게 되고, 따라서 뇌가 발달하면서 조리 있게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전달하는 능력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해온 원동력이었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다. 이때 흔히 안다고 하는 것(knowledge)은 라틴어로 스키엔티아(sciéntĭa), 즉 지식이었다. 내가 아는 것은 참인가? 단순히 안다는 것과 지식은 다르다. 경험적 실증적으로 검증된 지식이었다. 그래서 브로노프스키는
이천이십이 년, 한 해의 시간이 노루꼬리만큼 남았다. 누가 세월의 백지에 365개의 선을 그어 하루, 한 주, 한 달, 한 해의 캘린더를 만들어 365일 읽어가며 살도록 하였는가. 어느 의사가 사람의 열을 재면서 36.5 ℃의 체온을 유지해야 정상이라고 하였는가, 따라서 365와 36.5라는 숫자의 의미에는 어떤 깊은 뜻이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 밤은 너무 밝다>>의 저자인 아테네 ‘크롭베네슈’는 무수한 인공조명 때문에 식물도, 그 식물의 수분을 도와주는 곤충도, 밤에 이동하는 철새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혼란에 빠져 본래의 생체리듬을 잃어버린다고 했다. 대한민국은 빛 공해 노출 면적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다고 한다. 늦게 잠자고 깊이 잠들지 못하는 현상에 빛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일은 각박한 상황 속에서 희망을 찾는 일처럼 생각해 왔다. 먼 조상 때부터 밤을 낮 삼아 일한 덕분에 밥 먹고 살게 되었고, 밤잠 안 자고 공부하는 학생이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밤은 밤다워야 하고 낮은 낮다워야 함을 생각 못하고 살았다. 한 해가 저물고 있다. 금년이라는 세월이 어두워지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만이 이 세상에 정의를 이룰 수 있다. 자연의 모든 힘도 우리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만약 의식적 존재의 집합체인 인류가 이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할 자가 없다. (히지츠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들은 생존경쟁을 위해 온 힘을 다 쏟고 있어서 생각할 시간도 없이 단순히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회개혁자의 과제가 매우 어렵고 그 진로가 험난한 것도 그 때문이다. 위대한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 맨 처음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상류계층의 조소와 일반 서민의 저주를 받는 것도 그 때문이며, 사람들에게 박해받고 고통받으며, 수난의 옷을 입고 가시관을 써야 하는 것 또한 그 때문이다. (헨리 조지) 자신은 남으로부터 분리된 존재이며, 남도 역시 각각 서로에게서 분리된 존재라는 의식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생활조건에서 나온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서로의 거리가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우리는 살아 있는 모든 것과의 합일을 느낄 수 있고, 우리의 삶은 더욱 즐겁고 기쁜 것이 된다. 이 세상의 삶을 전반적으로 개선하는 사업에 대한 우리의 참여가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꼭 필요한 것
1.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이기적 유전자’를 빌리자면, 성(性)에 대한 관심은 우월적 종족 보존을 위한 DNA의 절대 명령입니다. 거부할 수도 뿌리칠 수도 없는 유혹이지요. 사랑과 섹스 이야기가 세계 각국의 신화와 전설에서 빠지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다. 폼페이(Pompeii)는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근처에서 융성했던 환락도시였습니다. 그런데 A.D. 79년 8월 24일 비극이 닥칩니다. 근처의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한 거지요. 거대한 용암과 유독 가스가 도시를 덮칩니다. 수만의 생명이 불길과 화산재 아래 묻혀버렸습니다. 이 도시는 그렇게 흔적 없이 사라졌다가, 1592년 밭을 갈던 한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됩니다. 본격적 유적 발굴은 1748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로마 전성기의 문화와 생활풍속이 기적처럼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내게 되지요. 2018년 폼페이의 레지오 브이(Regio V) 유적지구에서 새로운 프레스코 벽화 하나가 발굴됩니다. 세계적 화제를 불러일으킨 발견이었지요. 그리스 신화를 다룬 내용이었습니다. 천하의 난봉꾼 제우스가 백조로 변신하여 스파르타의 여왕 레다를 유혹하는 이야기. 이때 레다가 임신을 해서 알을
크로아티아를 가면 시내 곳곳 붉은 글씨로 ‘KRAVATA’라고 쓰인 간판을 만날 수 있다. 크로아티아의 수제 넥타이 판매점이다. 프랑스에서는 이 단어를 넥타이로 쓴다. 기원을 알면 재미있다. 17세기, 기독교 신·구교간 ‘30년 전쟁’(1618-1648)은 프랑스, 스페인, 덴마크, 스웨덴 등 대부분 유럽 국가가 참여한 국제전이었다. 프랑스 우방이었던 크로아티아는 파리로 파병을 한다. 파리 시민들은 크로아티아 병사들의 목에 맨 붉은 스카프를 보게 된다. 국왕 루이 14세도 스카프에 관심을 갖고 한 병사에게 정체를 물었다. 국왕의 질문을 제대로 못 알아들은 병사는 얼결에 ‘크라바트’라고 답한다. 크라바트는 ‘크로아티아의 군인’이라는 말이다. 병사는 답을 이렇게 했어야 했다. ‘우리 크로아티아에서는 남편과 아들이 전쟁에 나갈 때 목에 붉은 스카프를 매어주는 전통이 있습니다. 마귀를 쫓는다고 생각해 부적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무사귀환을 바라는 염원을 담은 것입니다.’ 루이 14세의 눈에 그 붉은 스카프가 멋있게 보인 듯하다. 루이 14세는 ‘크라바트’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후 파리에서 유행하게 되는데 모두 이를 ‘크라바트’라 불렀다. 크라바트는 프랑스를 대표
사랑은 때때로 위험한 말이다. 가족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사악한 행위가 저질러지고, 조국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사악한 행위가 자행되며, 인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큰 사악한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 사랑이 인간 생활에 의의를 주고 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지만, 도대체 그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문제는 지금까지 끊임없이 동서고금의 현자들에 의해 해답이 제시되어왔지만, 그것은 언제나 부정적인 답이었다. 즉, 흔히 사랑이라 불리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통하고 있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가 마치 서로 이방인이나 원수처럼 살고 있는 이 피폐하고 낡은 세상에 새로운 희망을 준다. 사랑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여, 그들은 당장 정치가들의 외교활동과 거대한 군대, 수많은 요새가 아주 쉽게 사라지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조상은 어떻게 저런 불필요하고 사악한 것을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고생을 해왔을까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에머슨) 중국의 현자 가운데 맹자와 비교되는 묵자(墨子)가 있다. 그는 권력자들에게 힘과 부와 권력과 위세에 대한 존경심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존경심을 사람들에게 고취하라고 충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