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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4월의인물] 지복영 김만술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한국광복군에 입대해 제3지대 초모위원 겸 비서로 활동한 지복영(池復榮·1920.4.11~2007.4.18)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또한 5월의 6·25전쟁영웅으로는 베티고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김만술(金萬述·1929.10.28~1991.5.28) 육군대위를 선정, 발표했다.

 

광복군에서 맹활약 ‘한국의 잔다르크’
베티고지전투 기적적인 승리이끈 주역

지복영 선생은 1920년 4월 11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지복영 선생은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이었던 지청천(池靑天·1888.1.25~1957.1.15) 장군과 윤용자 여사 사이에서 태어나 1924년 어머니를 따라 중국으로 이주했다.

아버지 지청천 장군은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서로군정서 및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사령관을 지내며 항일투쟁에 앞장선 분이었다.

이에 따라 지복영 선생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통해 민족의 독립을 위한 희생정신을 몸으로 익혔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중국의 상황이 위태롭게 진행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진강과 남경 장사, 광주, 유주, 기강을 거쳐 중경에 정착하기까지 먼 길을 이동해야했다.

남경의 중국학교에서 공부하던 지복영 선생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가족들과 함께 한 피난길 중에도 피난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하는 등 교육에도 큰 열정을 보였다.

1938년 11월 광서성 유주에 도착했을때 지복영 선생은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를 조직했다.

청년공작대원은 34명이었으며 이중 여성대원은 지복영 선생을 포함해 총 11명이었다.

지복영 선생이 조직한 청년공작대는 주로 한국과 중국인들의 항일의식 고양을 위한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지복영 선생은 1940년 9월17일 중경 가릉빈관에서 거행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에서 오광심, 김정숙 등과 함께 여성광복군으로 참여해 총사령부의 사무 및 선전사업을 담당했다.

광복군 총사령부가 전방인 섬서성 서안으로 이동하게 되자 선생도 서안에서 오광심 선생 등과 함께 1년 반 동안 기관지 ‘광복’ 간행에 전념했다.

이후 모병 업무 강화를 위해 광복군 서안 제3지대가 편성되자 선생은 서안보다 더 전선에 가까운 안휘성 부양에서 광복군 초모 활동을 전개하는 등 대일항전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무리한 활동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중경으로 돌아온 선생은 건강을 회복한 후 1943년부터 임시정부 외무부로 차출돼 중국방송을 이용, 한국인 학병들의 탈출을 권유하는 등 모병활동을 전개했다.

지복영 선생은 1945년 광복군 총사령부 편대 재편성 당시 소령으로 재임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지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중공군 2개대대 공격 소대병력으로 격퇴시켜
미국 십자훈장·금성태극무공훈장 수여받아

김만술 육군 대위는 1947년 6월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부산에 주둔하던 제5연대에 배속됐으며 1948년 ‘여순 10·19사건’ 진압작전과 태백산맥 등지에서 준동하던 공비토벌작전에 기관총 사수로 참여했었다.

6·25전쟁이 발발한 후 평양 탈환작전을 비롯한 주요 전투에 참전해 탁월한 지휘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953년 7월 15일 특무상사에서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돼 제1사단 제11연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2소대를 지휘하게된 김만술 소대장은 부임 당일 소대원 35명과 함께 베티고지를 지키고 있던 중 야음을 이용해 인해전술로 공격해오던 중공군 제1군 예하 제1사단의 2개 대대 규모의 적을 맞아 5차례의 공방전을 벌였다.

김만술 소대장이 이끄는 2소대는 13시간 동안 치열한 혈전을 전개한 끝에 적 314명을 사살하고 450명을 부상시키는 전공을 거뒀다.

김 소대장은 이 공훈으로 미국 십자훈장(1954)에 이어 국군 최고의 영예인 금성태극무공훈장(1954)을 수여받았다.

제1사단 제11연대가 지키고 있던 베티고지는 임진강 지류가 남북으로 흐르는 가운데 표고 120~150m의 봉우리 3개로 형성된 전초진지였다.

김만술 소대장이 이끄는 2소대가 인수하기 전 베티고지의 방어를 담당하던 제7중대 1소대는 3일 동안 이어진 적의 공격으로 전력이 절반 이하로 감소돼 더이상 버틸 능력이 없었다.

이러한 악조건 하에서 베티고지를 인계받아 수차례 적의 공격을 막아낸 김만술 소대장의 2소대는 이미 서봉을 장악한 적과 교전하며 진지를 보수하고 경계를 강화하던 중 야간에 대대규모의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수류탄을 투척하며 적을 저지하던 김만술 소대장은 중과부적으로 전세가 불리함을 판단하고 소대원을 유개호 속으로 피신시킨 후 진내 포격을 요청해 적을 격퇴했다.

이어 퇴각했던 적이 짙은 안개를 이용해 다시 공격을 가해오자 수류탄전과 백병전을 통해 이를 격퇴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거뒀다.

김만술 소대장이 지켜낸 베티고지 전투는 전쟁기간의 전투 중 연천군 지역의 대표적인 전투 사례이며 야전사에서 거둔 높은 전공(戰功)으로도 유명하다.

연천군 왕징면 고장리(古莊里) 베티고지에는 김만술 대위의 전적지가 만들어져 있다.

/제공=국가보훈처 수원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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