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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6·25전쟁 영웅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3·1운동 당시 범어사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비밀결사 만당 일본지부를 조직하는 한편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법린(金法麟·1899.8.23~1964.3.14) 선생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또한 6월의 6·25전쟁영웅으로는 전쟁 발발 당시 일반 야포로 적의 전차를 격파한 김풍익(金豊益·1921.8.6~1950.6.26) 육군 중령을 선정, 발표했다.

김법린 (金法麟·1899.8.23~1964.3.14) 선생

불교계 항일운동 선봉에 서다


 

김법린 선생은 1899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1913년 영천 은해사로 출가해 이듬해 범어사로 승적을 옮겨 신식학교인 명정학교 보습과 및 구학교육인 강원과정을 배웠다.

이 때 스승인 국어학자 권덕규와 독립투사 서상일과의 만남이 후일 조선어학회 활동과 3·1운동에 참여한 동기가 된 것이다.

1917년 선생은 범어사의 인재양성 책에 힘입어 휘문의숙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불교중앙학림으로 편입했다.

이 시기 한용운 선생이 유심회를 조직하고, 불교잡지 ‘유심’지를 발간하자 선생은 철아(鐵啞)라는 필명으로 기고했으며 한용운으로부터 독립 완성에 매진하라는 당부를 받고 동료들과 함께 범어사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신상완, 백성욱, 김대용과 같이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특파원 자격으로 국내에 파견되는 등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만주 안동현으로 건너가 국내 독립운동과의 연결을 위한 활동을 하면서 항일비밀결사 한국민단본부의 기관지인 ‘혁신공보’를 발행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밀령에 따라 한국독립을 위한 사료의 집성과 전달을 주도하고, 승려들과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의용승군을 조직, 기밀부를 설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일제의 검거망이 좁혀져오자 선생은 1923년 11월넓은 안목에서 조국 독립을 모색하고자 유학을 결심하고 1923년 11월, 프랑스 파리대학교(소르본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이후 1927년 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해 ‘한국에서 일본제국주의 정책 보고’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같은해 12월 반제국주의연맹 총회에서 한국의 실정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1928년 초 불교계의 요청으로 귀국한 선생은 강연 및 기고 활동은 물론 조선불교청년회 재건과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 개최를 주도해 일제 사찰령을 부정하는 등 불교계의 자주화를 위해 힘썼다.

또한 학문의 정진을 위해 일본 유학을 단행, 같은 시기에 불교청년 항일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이 결성되자 만당 일본지부를 결성하고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동경 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김풍익 (金豊益·1921.8.6~1950.6.26) 육군 중령

개전초기 적 전차진격 저지한 영웅

 

1948년 10월 육사 특별 7기로 육군 소위에 임관된 김풍익은 6·25전쟁 발발당시에는 육군포병학교 제2교도 대대장으로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남침을 개시한 북한군은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워 38도선을 돌파하고 포천을 점령한 후 계속 남하하면서 서울의 교두보라 할 수 있는 의정부를 위협하고 있었다.

육군본부는 의정부 북방의 축석령과 금오리 중간에 위치한 155고지와 202고지에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는 한편 이 선에서 적을 섬멸하고 반격을 개시하기 위해 후방지역의 예비사단을 전선에 투입했다.

육군포병과 제2교도대대도 제2사단을 직접 지원하라는 명령에 따라 6월26일 새벽, 금오리 방어선에 포진했다.

이미 포천을 점령한 적은 이 무렵엔 선두 전차가 자일리 방면까지 진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대장 김풍익 소령은 금오리에 제2포대를 포진시키고 자일리 부근의 적진을 향해 집중포격을 가했으나 105㎜ M3 구형 야포의 화력으로는 T-34 전차의 전진을 막을 수 없어 결국 축석령의 방어진지가 돌파되기에 이르렀다.

김풍익 소령은 대전차무기가 없는 상황에서 적의 전차를 격파하는 길은 오로지 야포의 직접 조준사격뿐이라 판단하고 제2포대의 6번포를 서남쪽 1㎞지점의 교량 부근까지 전진시켜 43번 도로변에 배치했다.

6월26일 오전 9시40분쯤 적의 선두 전차가 길모퉁이를 돌아 50M 전방까지 접근하자 그는 제2포대장 장세풍 대위를 비롯한 6번포 반원과 함께 직접 조준사격으로 제1탄을 발사해 적의 전차를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제2탄을 장전하는 순간 후속하던 적 전차가 발사한 직격탄이 6번포에 작렬, 김풍익 소령을 포함한 전원이 현장에서 산화했다.

김풍익 중령은 이러한 공로로 1950년 10월30일 충무무공훈장과 1950년 12월30일 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고 중령으로 추서됐다.

 

 

 


/자료제공=국가보훈처 수원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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