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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6·25전쟁 영웅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명성황후 시해 후 예안 선성의진을 결성해 을사조약 파기와 을사오적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단식 순국한 이만도(李晩燾·1842.1.28~1910.10.10)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또한 8월의 6·25전쟁영웅으로는 전쟁 초기 포항을 탈환하기 위한 형산강 도하작전에서 수류탄을 품고 강을 건너 적 기관총 진지를 파괴한 후 장렬히 산화한 연제근(延濟根·1930.1.14~1950.9.17) 육군 이등상사를 선정, 발표했다.


이 만 도 (李晩燾·1842.1.28~1910.10.10) 선생

 

 

 

이만도 선생은 퇴계의 11세손으로 경북 봉화군 봉성면에서 태어났으며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1876년 최익현이 개항을 반대하면서 올린 상소를 두둔해 파직 당했다.

선생은 1894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는 일이 벌어진데 이어 9월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왕의 밀령이 전달되자 거병을 준비했지만 소모관 이용호가 일본군에 붙잡히는 바람에 뜻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선생은 가장 앞선 예안통문에 참여, 의병을 일으켜 대장을 맡아 선성의진을 이끌었다.
 

 

 


선생은 대장에서 물러나 의진을 정비하였고 집안 후손인 이중린, 이인화, 이중언 등이 이를 이어 3월 태봉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자 선생은 아들 이중업을 통해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다섯 역적의 목을 베소서’라는 상소를 올리며 을사늑약 파기를 강력히 주장했다.

선생은 1910년 9월17일 단식을 시작했다.

나라를 잃고 군왕이 치욕을 당하게 된 것에 대해 죽음으로 책임을 다하고자 함이었다.

단식 21일째 되던 날 경찰이 와서 강제로 음식을 먹이려 하자 선생은 크게 소리쳐 꾸짖으며 그들을 물리쳤다.

10월10일(음 9.8) 선생은 단식 24일째 되던 날 순국했다.

이만도 선생의 동생 만규는 의병에 참가하고 파리장서에 서명하였으며 아들인 중업은 아버지를 따라 의병에 참가하고, 아버지를 여읜 뒤 1910년대 항일투쟁을 이끌었다.

죽음을 통해 국권피탈의 책임을 다하고자 한 선생의 절의는 민족적 현실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었으며 선생은 쓰러져 가는 조선의 진정한 선비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연 제 근 (延濟根·1930.1.14~1950.9.17) 육군 이등상사

 

 

 

연제근 이등상사는 1948년 1월30일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청주의 제7사단에서 훈련을 받았다.

1949년 육군 3사단 22연대 1대대 1중대 대원으로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참전해 공비 9명을 생포하는 큰 전공을 세운바 있으며 이 공적으로 당시 연제근 분대장은 2계급 특진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3개월도 안돼 낙동강 방어선마저 무너뜨린 뒤 포항 일부와 부산을 두고 국군과 대치했다.

이처럼 전선이 포항 형산강 일대까지 밀리는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을 때 1950년 9월17일 제3사단 22연대 1대대의 분대장이었던 연제근은 12명의 돌격대원을 이끌고 포항을 탈환하기 위한 형산강 도하작전에 참가했다.

이 당시 연제근은 수류탄을 몸에 매달고 수중포복으로 돌진하던 중 적의 기관총 사격으로 어깨가 관통 당하는 중상을 입었으나 끝까지 도하해 3발의 수류탄을 투척하고 적의 기관총 진지를 완전히 파괴시켰다.

이로써 포항탈환의 결정적 공훈을 세웠지만 연제근 분대장을 포함한 9명의 특공대원이 안타깝게도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했다.

이와 같은 연제근 분대장의 전공에 힘입어 22연대는 형산강을 무사히 건너 포항지구를 수복하는데 성공했다.
 

 

 


이 작전은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압록강까지 북진하게 되는 전기가 됐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전공을 기려 2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1950년 12월), 화랑무공훈장(1951년 8월), 무공포장(1956년 10월)을 추서했다.

/자료제공=국가보훈처 수원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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