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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전략적 거점으로 북한산성 축성… 수도 방위체제 완성

 

세계문화유산으로 가는 북한산성 재조명

<2> 도성 방위를 위한 전략적 방어진지, 북한산성의 축성
 

 

임진왜란 이후 보장처 강화 대두
종묘와 사직 보전 최소한의 대책

 

17세기 후반 인구 증가 등 변화
숙종 “백성과 함께 끝까지 지킨다”
여민공수론 전환… 도성 수비 강화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 중심
삼군문 도성수비체제 성립
강화도·남한산성 등과 함께

 

도성 방위 전략적 거점 구축

 

 

 


◇불가피한 선택, 보장처 강화론의 대두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수도 방위를 위한 목적으로 강화도에 진보(鎭堡)를 설치하며 방비를 강화하고, 남한산성을 새롭게 축성하는 등 관방 시설을 강화했다.

이는 보장처(堡障處)를 강화한다는 차원으로, 보장처란 위급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나 외적에 대처하기 위한 전략적 거점 지역을 의미한다. 보장처 강화론은 임진왜란을 경험한 조선 사회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도판 1>

조선은 건국 이후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에 입각한 안보 전략을 구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위체제(五衛體制)를 마련했다. 오위를 중심으로 중앙을 수비하는 동시에 오위가 전국의 진관(鎭管)을 아우르는 체제였다.

이같은 안보 전략는 조선왕조가 추구하는 중앙집권체계에 대응하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오위체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됐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오위체제의 전제가 되는 국민개병제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양인 신분 이상을 군역(軍役)에 편성하고 이를 통해 군사 자원을 확보하려고 한 것이었으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피역자(避役者)가 등장하거나 포를 납부하고 군역을 면제받는 관행이 광범위하게 통용되면서 군사의 징발이 여의치 않았다. 임진왜란 초기 군사 동원이 어려웠던 것은 그 결과라 하겠다.

이에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선에는 보장처를 강화하자는 안보 전략이 대두했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국에 병력을 고루 배치해 국방 태세를 갖춰야 하지만, 이를 위한 재정이나 군사적인 차원에서 여력이 없자 차선책으로 종사(宗社)만이라도 보전하기 위한 최소한의 대책이 강구된 것이다.

종사라 함은 종묘와 사직의 줄임말로, 종묘는 선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이요, 사직은 토지와 곡식의 신을 모시는 단으로 농경 국가의 상징이다. 종묘와 사직은 그 자체가 조선 왕실과 국가를 상징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따라서 종사를 보전하는 것은 국가와 왕실을 보전하는 것으로, 유사시 보장처로 들어가 종사만이라도 보전할 수 있다면 국가가 유지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그리고 병자호란 때 강화도와 남한산성으로 왕실과 일부 관료들만이 피난을 갔던 것은 이런 전략에 의거한 것이다.

 



◇백성과 함께 최후까지 도성을 지킨다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보장처 강화론에서 탈피, 백성들과 함께 도성을 끝까지 지키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여민공수론(與民共守論)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앞 시기 도성 수비가 어렵다고 하면서 보장처 정비를 통해서 유사시 피난가는 것을 생각했던 논리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숙종이 “도성민은 바로 나의 적자(赤子, 갓난아이라는 뜻으로 백성을 지칭함)인데 어떻게 난리에 임해 보전할 도리를 생각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백성과 더불어 최후까지 도성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은 그 하나의 예라 하겠다.

이렇게 인식이 변화한데는 여러 가지 요인을 찾을 수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서울의 변화이다. 17세기 후반 조선 사회는 사회·경제적으로 많은 변화를 경험했는데, 그 중 서울의 변화는 주목된다.

일단 인구가 종전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하면서 도시 공간 역시 확대됐다. 또 도시 수공업이 발달했고, 한강을 중심으로 물류 교역이 확대되는 등 종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화했다. 다만 이런 가운데 서울 도시민들의 삶을 위협하는 일이 일어났다. 도성 내에서 불만 세력에 의한 괘서 사건이 발생하고 백성들이 궁궐문을 막고 살 길을 강구해 줄 것을 요구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사회 불안 요인이 급증하자 당시 도성민들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외적의 침략이나 내부 반란에 대비해 도성 수비 강화를 간절하게 요구했다. 북한산성을 축성할 때 무신들이 이례적으로 상소를 올리려고 한 일이나, 도성 수축에 대해 서리(書吏)나 하인들이 모두 좋다고 한 점, 도성에 상주하는 군인들이 함께 거주하는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도성 방위의 강화를 촉구한 점 등은 당시 도성민들의 강렬한 자위(自衛) 의식을 보여준다.

조정에서는 이같은 도성민들의 욕구를 수용해 새로운 방위체제의 정비를 모색했다. 여기에 왕권 행사를 위한 숙종의 군사력 확보를 위한 정치적 의도, 군영 정비의 필요성 등이 개입하기도 했다. 그 결과 훈련도감과 어영청, 금위영을 중심으로 한 삼군문 도성수비체제가 성립됐으며, 전략적 거점으로 북한산성이 축성됐다.<도판 2>



◇도성 지척의 금성탕지(金城湯池), 북한산성의 축성

북한산 일대에 성을 축성하자는 주장은 임진왜란의 와중인 1596년(선조 29) 다시 있을지도 모를 일본군의 서울 침략에 대비한 논의에서 시작됐다.

우리에게 한음(漢陰)으로 잘 알려진 이덕형은 북한산 일대를 답사한 뒤에 다소 과장된 표현이지만 “10여명의 군사가 수 만 명의 적을 상대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해 전략적 우수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현실적인 재정 문제로 축성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효종에 다시 한 번 축성 논의가 제기되기도 했으나 그 본격적인 논의는 숙종 중반 이후였다. 1702년(숙종 28) 우의정 신완(申琓)은 북한산성을 축성해 도성과 표리(表裏, 겉과 속)로 삼아 도성을 지킨다면 만전의 계책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를 계기로 군사들을 중심으로 한때 축성을 위한 공사가 추진되기도 했으나 민생 안정이 시급하다는 명분론에 밀려 축성이 중지되고 도성 수축으로 선회됐다.

도성 수축이 일단락된 뒤인 1709년 다시 축성 논의가 제기돼 논란이 있었다. 논란의 와중에서 청나라 예부에서 해적들의 일부가 조선으로 도주해 약탈할 경우에 대비하라는 자문(咨文)이 전해졌다. 숙종은 이를 축성을 위한 주요한 명분으로 삼았다. 숙종의 경우 평소 관방 강화에 관심을 가졌으나 번번이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의 약조, 즉 성곽을 개축하거나 신축하지 못한다는 조항에 걸려 주춤했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온 자문을 근거로 조정에 축성을 위한 본격적인 논의를 지시했다. 결국 1711년(숙종 37) 2월 축성이 결정됐고, 같은 해 4월 3일 삼군문에서 분담해 공사에 착수, 10월에 최종 완성이 됐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도판 3>

북한산성의 축성으로 강화도, 남한산성 등과 함께 도성 수비를 위한 새로운 전략적 거점이 구축됐다.

 



서문 초입에서 한 번 머리 둘러보니

기개가 장건하고 마음이 웅대해져 내 근심 풀리네.

나라 도성 지척에 금성탕지의 견고한 성 있는데,

어찌 우리 백성 수호하는 서울을 버리랴.<도판 4>



위 시는 숙종이 북한산성 축성 후인 1712년(숙종 38) 4월 이곳에 들러 감회를 적은 시 6수 중 일부이다. 숙종은 북한산성을 방비에 빈틈이 없다는 뜻의 금성탕지(金城湯池)라 표현하며 전략적 우수함을 강조했다.

/이근호 명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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