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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대홍수 이전에 북한산성 내 최대 500여 가구 거주

세계문화유산으로 가는 북한산성 재조명
<5> 북한산성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132년 백제 개로왕 때 사람 살았다는 기록 있지만 확인 안돼
북한산성 안에서 사람 죽으면 시구문 통해 밖으로 나와 매장
8·10월 초하루에 소를 잡아 제사… 일제강점기 때도 이어져

대부분 억새를 사용한 초가집에 돌로 담이나 벽을 구성
땔감·수확물 등 내다 팔며 부족하지 않은 생활 유지
4차례 홍수로 큰 피해… 한국전쟁 때 피난가지 않기도


◇북한산성 안 사람들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132년 백제 개로왕 때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북한산성에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북한산성에서의 ‘사람 발자취’는 132년 백제의 개로왕 때부터 기록상 언급돼 있으나, 당시의 북한산에 쌓았다는 성곽이 현재의 ‘북한산성’과 어떤 관계인지 아직까지는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다. 현재까지 북한산성에서 조선시대 이전의 유물이나 유구가 확인된 사례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증언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의 북한산성 안에는 상당량의 답(밭)과 유실수, 숯으로 제작이 가능한 참나무 등 생업활동이 가능한 여건이 갖춰져 있었다.

기록이 부족해 가구 수를 파악하기는 어려울 듯하나, 몇몇 사람들이 거주해왔던 것으로 보이며 사찰이나 굿터와 같은 종교시설은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관리하고 있는 북한산성 내 지역은 일반인(일부 종교인 제외)들의 거주 및 경제활동을 제한하고 있다. 등산객이 늘어나면서 무허가 상업시설도 함께 늘어나 국립공원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2010년, 북한산성 내에 살던 사람들은 이주됐다. 떠날 사람들은 떠나고, 남을 사람들은 북한산성 입구 앞의 상가에 자리를 잡게 됐다.



◇북한산성 안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 때는 약 500세대 2천명 상주

북한산성에는 1925년 을축년대홍수 이전 500여 세대가 거주했던 것으로 증언됐다. 지금의 수문 부근부터 태고사 아래까지 많은 이들이 거주했다고 한다.

을축년대홍수는 1925년 을축년에 한국에서 일어난 4차례의 큰 홍수를 말한다. 7월부터 9월 초에 걸친 호우피해로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해당하는 1억300만원의 피해액을 냈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을축년대홍수가 북한산성에 미쳤던 영향력은 현재의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강력했다. 북한산성 내에 남아 있던 행궁과 같은 주요 건조물들이 일시에 파괴됐다고 전한다.

북한산성 토박이인 이모 씨는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북한산성 내의 수로가 다 바뀌었으며, 그로 인해 지금 물에 잠긴 지역이 개인소유로 돼 있는 지역이 많다”고 했다.

북한산성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중성문 옆의 시구문과 원효봉 북문 아래의 시구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서 매장했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는 아랫마을인 지축에서 상여를 빌려와서 대서문을 통해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북한산성 사람들이 사용했던 ‘상여’인데, 2009년 필자가 고양시청에 근무하면서 지축동 사람들에게 기증받은 2기의 상여가 바로 그 ‘상여’인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이 상여는 현재 고양시청의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그들은 원래 북한산성행궁지에서 제사를 지냈으나, 한국전쟁 때 그곳에서 많은 군인들이 사망해 부정탄다는 이유로 중창으로 옮겨서 10월 초하루에 제사를 지내고, 부황사에서 8월 초하루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사를 지낼 때는 소를 잡았는데, 일제강점기 때에는 소를 잡는 것을 금지하는데도 북한산성 사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야간에 개울에서 소를 잡았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북한산성을 관리하면서 일제강점기 때에도 이어진 이 제사는 맥이 끊기게 되는데, 공단 측에서 ‘화재의 위험성’ 등을 이유로 제사를 못 지내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7, 8년을 지내지 않다가 2012년에 몇몇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제사를 재개했다고 한다. 2012년 제사는 대서문 앞에서 지냈으며, 예전보다 참여하는 인력이 적어서 소규모로 치렀다.
 

 

 


◇북한산성 사람들, 초가집에 돌담을 쌓고 땔감장수가 많아

북한산성 내 민가들은 거의 대부분 초가집 형태인데, 볏짚을 구하기가 어려운 지역이기 때문에 억새를 지붕재료로 많이 사용했었다고 한다. 또 대부분 돌로 담이나 벽을 구성했다고 전하는데, 이는 북한산의 옛 사진들과 일치하는 증언이다.

북한산성 사람들은 죽은 나무, 썩은 나무, 낙엽 등을 땔감으로 팔거나 숯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농사도 조금 지었지만, 수확량이 많지는 않았던 것으로 전하며 주로 고구마, 감자, 조, 팥 등을 재배했다.

땔감과 수확물은 종종 영천(현재의 영천시장, 서대문 밖)에 가서 팔았는데, 장시가 주로 새벽에 서다보니 밤 12시에 북한산에서 출발해 밤을 꼬박 새워 걸으며 영천에 도달해 물건을 팔았다고 전한다.

또 한국전쟁 후에는 남자들이 영천으로 가는 길에 자주 징발되는 상황이어서 주로 여자들이 물건을 팔러 나갔다.

해방 이후에는 북한산에서 많이 나는 살구와 감 등을 팔았는데, 서울사람들한테 인기가 좋았다고 전한다.

또 산에서 도룡뇽 알같은 약재를 거둬 팔기도 해 부수입을 올렸다는 증언도 있다. 이에 북한산성에 살던 사람들은 산성 밖의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유지했다고 한다.



◇현대사의 아픔, 북한산성 사람들 기억 속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굉장히 무서웠던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독립운동뿐 아니라 조금만 잘못해도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이 많았다고 전한다. 놋그릇 등을 뺏어가는 일화 등을 들어보면 당시의 정황을 알 수 있다.

또 최모 씨라는 인물은 제2차 세계대전 시, 흥국사 앞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대동아전쟁을 이기게 해달라’고 함께 빌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북한산성 안에 살던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참석하지 않으면 바로 보고했고, 보고된 자는 일제에 끌려갔다고 전한다. 3년 동안 흥국사 앞에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전쟁의 승리를 기원했다고 하는데, 8·15 해방 직후 행방불명됐다고 한다.

북한산성 사람들은 한국전쟁 때에는 피난가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군들이 산으로 들어오기는 했지만, 사람들을 죽이거나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큰 반감은 없었다고 한다. 다만 주변에서 공산당에 가입한 사람들이 북한산에 올라와서 사람들을 죽이고는 했다고 증언됐다.

원래 한국전쟁으로 인한 북한산성의 피해는 전쟁 전반기에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후반기에 훈련과 공습으로 많은 시설이 파괴된 것으로 전한다.

북한군들이 북한산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수한 연합군이 북한산에 유류드럼통을 뿌리고 기관총을 난사해 불을 냈다고 하며, 원효암의 경우에는 탱크로 공격했다고도 한다. 그래서 북한산성 내의 대부분의 집들이 소실됐다고 한다.

이후 1·4후퇴 때에는 북한군 1개 연대가 마을로 들어와서 서대문 방위선에서 대치중이었던 한국군과 싸우다가 전멸했다고 전해진다.

/심준용 A&A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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