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여성 참전권운동을 체계화,논리화한 것은 1792년 발표한 메리 울스턴 그레프트의 논문 ‘여성 권리의 옹호’였다. 메리는 이 논문에서 여성에게도 교육을 받게 하고 전문직에 취업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남성이 주는 ‘쓴 빵에 의존하는 시대’는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회를 구성하는 집단들 사이에 진정한 평등이 존재할 때 만이 사회는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이 메리의 결론이었다. 이 같은 견해는 “결혼으로 아내의 ‘법적 존재’는 정지된다.”고 한 1756년에 출판된 법률학자 월리엄 불랙스턴경의 논문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메리 올스턴 그레프트는 이에 대해서도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지위로 격상되어 남성의 정부(情婦)가 아닌 동반자가 되려는 태세가 갖추어질 때 만이 비로서 결혼이 신성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남존여비를 당연시하던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대남(對男) 도발이었다. 메리 울스턴 그레프트는 출산 후유증으로 1797년 38세 나이로 타계했지만 그가 남긴 논문은 훗날 일부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고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사해(死骸)와 같고, 평화가 없는 자는 최고통의 자라, 압박을 피하는 자의 주위의 공기는 분묘(墳墓)로 화하고, 쟁탈을 사하는 자의 경애(境涯)는 지옥이 되나니 우주의 이상적 최행복의 실재는 자유와 평화라. 고로 자유를 얻기 위하여는 생명을 홍모시(鴻毛視)하고 평화를 보전하기 위하여는 희생을 감이상(甘飴嘗) 하나니 차는 인생 권리인 동시에 또한 의무일지로다.”(후략) 이 글은 기미년 독립선언서 발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한용운이 남긴 논문의 서두다. 이 논문은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가진 민족 대표 33인의 독립선언식 때 개회를 선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한 한용운이 옥중에서 쓴 것으로 왜경에 의해 외부에 유출돼 세상에 알려졌다. 한용운은 논문에서 조선독립선언의 이유로 민족자존성, 조국사상, 자유주의, 대(對)세계 의무 등 4가지를 들고 있다. 독립선언과 독립만세를 외친 기미년 독립운동이 90돌을 맞았다. 죽엄을 각오하고 결행했던 민족대표의 독립선언과 일제에 맞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던 민중 봉기는 지독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일신협약 체결,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맞서 1907년 8월 일어난 항일 의병 봉기가 정미의병(丁未義兵)이다. 서울에서 군대가 봉기하자 원주 진위대, 여주?강화 분견대 등이 민간인과 함께 봉기한데 이어 함경도의 홍범도 부대와 경상도의 신돌석 부대를 필두로 각지에서 의병 세력이 확충돼 1908년에는 의병장이 241명, 의병수가 3만 1245명에 이르렀다.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으로 일컬어지는 한일신협약은 군대 해산, 사법권과 경찰권의 위임 등이 포함된 내정 간섭 조약이었다. 국가에는 국가를 수호하는 군대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일제는 항일 운동을 탄압할 목적으로 집회.결사를 제한하고 무기 휴대를 금지하는 보안법 제정과 함께 군대 해산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우리 군대가 이에 항거하며 봉기한 것은 너무 당연했다. 당시의 군사 조직은 중앙에 친위대, 시위대, 호위대가 있고 지방에는 지방대와 진위대(鎭衛隊)가 있었다. 지방대는 1897년 6월 지방대 설치령(착령 제22호)에 따라 설치되고, 진위대는 이보다 앞서 1895년 9월 지방 질서 유지와 변경의 수비를 위해 설치됐다. 1900년 7월 원수부 명령으로 진위대와 지방대
유엔 대표와 북한 대표가 군사회담 또는 상호 연락을 위해 만나는 곳이 판문점이다. 유엔총회를 빼면 유엔과 북한 당국자가 평화적으로 접촉하는 공간으로서는 판문점이 세계 유일의 장소라 할 수 있다. 예전에는 회담이 자주 열려 뉴스 초점이 되었으나 2000년 6월 29일 남북정상회담 이후 10년 동안 남북 화해 무드가 지속된 데다 금강산 바닷길 관광에 이어 개성 육로 관광까지 시작되면서 판문점은 관심권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판문점의 본디 이름은 ‘널문리’ 였다. 옛날 어느 임금이 이곳의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다리가 없어 건널 수가 없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주민들이 집의 대문과 울타리 등을 뜯어내 임시로 다리를 놓아 임금이 무사히 건너게 하였다. 그래서 ‘널문리’라는 지명이 생겼다. 행정구역상으로는 파주군 진서면 어룡리에 속한다. 6.25한국전쟁을 끝내기 위한 1차 회담은 개성에서 이뤄지고 2차부터 널문리에서 회담이 계속되었는데 이곳에는 주막을 겸한 ‘널문리가게’가 있었다. 그런데 휴전협정에 함여했던 중공군이 널문리 가게를 한자로 ‘판문점(板門店)’이라고 직역하는 바람에 오늘날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교외에 있는 킬링필드 희생자 해골탑은 ‘노동자들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명분 아래 자행된 양민 학살이 얼마나 처참한 것이었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남녀가 뒤섞인 해골은 모두 보는 이쪽으로 진열되어 있어서 심약한 사람은 오래 보기 어렵고 온몸이 오싹해지는 전율에 스스로 놀라게 된다. 악명 높았던 투올슬렝 감옥 안에는 수감자를 고문하던 형구(刑具)와 처형자의 인물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또한 광기로 충만한 포악자의 얼굴이 떠올라 자세히 보기 어렵다. 좌파 무장단체 크메르루주가 친미 론놀 정권을 몰아 내고 프놈펜을 장악한 것은 1975년 4월이었다. 그로부터 3년 8개월 동안 강압 통치를 하면서 당시 캄보디아 인구의 2할에 해당하는 200만명을 ‘묻지마’ 학살을 했는데 숙청 대상자는 외국어 해독자, 손이 부드러운 자, 안경 쓴 자, 비농민 등 교육을 받은 소위 부르주아들이었다. 희생자 가운데는 철모르는 어린 아이와 부녀자들도 포함되었다. 지난 17일 킬링필드 대학살 주범 가운데 한 명인 카잉 구엑 에아브(일명·더치·66) 전 교도소장에 대한 재판이 프놈펜의 국제전범재판소
“밥 먹었느냐”, “진지 드셨습니까”라는 인사말은 지금도 쓰이고 있다. 이 인사말은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가난했기 때문에 생겼다는 설이 있으나, 실제로는 의·식·주 가운데 食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생겼다는 설에 무게가 실려 있다. 옛날 한·중·일 3국 가운데 중국은 의(衣), 일본은 주(住)를 중시한데 반해 우리는 음식에 대한 경건한 관념이 강했던 탓에 식사 중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몇몇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쌀을 주식으로 했고, 한끼에 먹는 쌀은 장정인 경우 7홉(현재의 2.1홉), 밥으로는 세 공기를 먹었으나 평균으로 치면 5홉(현재 1.5홉), 두 공기 정도를 먹었다. 이는 2홉을 먹는 일본인에 비하면 배 이상 많은 대식가였다. 대신 보통 하루 두끼만 먹었는데 우리는 아침과 저녁, 서양과 중국인은 점심과 저녁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점심은 말 그대로 뱃속에 점을 찍는 정도로 간단한 식사로 대신 했는데 이덕무의 ‘청장관전서’는 “점심은 낮밥으로 소식(小食)을 의미하며 국왕의 ‘낮것&rsquo
수효를 세거나 주고받을 액수를 서로 따지어 밝히는 것을 셈이라고 한다. 셈은 순수 우리말이다. 옛날 양반들은 한자를 즐겨썼다. 유식을 뽐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자 쓰기는 우리말을 오염시켰다. 지금도 우리가 쓰고 있는 말의 3분의 2는 한자를 직역한 것이고 순수 우리말은 3분의 1이 채못된다. ‘목민심서’ 라는 책을 통해 백성을 깨우치기에 힘썼던 다산 정약용(1762-1836) 조차도 우리말 속담을 한자로 뜯어 고친 ‘이담속찬(耳談續纂)’을 쓰면서 우리말을 훼손하는 실수를 범하였다. 이담속찬은 명나라 왕동궤가 지은 ‘이담(耳談)’에 우리 이언(俚諺.속담) 120조를 여덟자로된 한자로 고쳐 증보한 것이다. 그런데 다산은 “하릅(한살)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를 “하룻강아지(一日之狗) 범 무서운 줄 모른다.”로 잘못 고쳤다. 우리 조상들은 사람 나이는 한 살, 두 살, 세 살로 부른 반면 동물 나이는 다른 말로 구분해서 썼다. 예컨대 한 살은 ‘하릅’, 두 살 ‘이듭’, 세 살 ‘사듭&rsquo
시문(詩文)을 지울 때 자구(字句)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치는 일을 퇴고라고 한다. 시문이 아니더라도 글을 쓰는 사람이면 고치고, 더하기를 하게 되는데 이 때의 퇴고야말로 글 쓰는 이로서는 가장 긴장되는 순간일 것이다. 퇴고란 말이 생긴 데는 일화가 있다. 나귀 등에 앉은 사나이가 무언가를 혼자 중얼거리며 묘한 손짓까지 하며 길을 간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데도 사나이는 정신없이 나귀가 가는 데로 가고 있었다. 이 사나이 이름은 가도(價島)였다. 그는 나귀를 타고 가면서 시 한수를 생각해 내었던 것이다. 시는 이응의 ‘유거(幽居)에 제함’이었다. “한가한 집이라 이웃이 드물고/ 풀섶길은 동산으로 드네./ 새는 연못 가 나무에 잠들었는데...” 여기까지는 술술 읊었는데 뒤에 이어지는 “중은 달 아래서 문을” ‘두들기네(敲)’로 할까 아니면 ‘미네(推)’로 할까 망설이게 되었다. 두들기느냐, 미느냐를 결정하지 못한 가도는 두 글자를 입으로 외어도 보고, 실제로 두들기는 시늉과 미는 시늉을 해보기도 하였다. 가도로서는 무아지경에 가까운
봄과 함께 나물철이 시작된다. 나물은 먹을 수 있는 풀이나 나뭇잎, 뿌리 등의 들나물을 비롯해 산채, 채소를 생으로 무쳐 먹거나 삶거나 데친 다음 양념으로 무친 반찬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전자를 생채(生菜)과 라고 후자를 숙채(熟菜)라고 부른다. 나물과 달리 약으로 쓰이는 것이 약초(藥草)다. 약초는 산과 들에서 생산되는 풀이나 잎, 줄기, 뿌리 등을 건조시키거나 삶거나 찌거나 하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것을 말하지만 건조된 약초를 비롯하여 약의 재료로 쓰이는 식물, 동물, 광물질 모두를 약재(藥材)라고 일컫는다. 나물과 약초는 식재료와 질병 치료의 재료로서 옛날부터 중요한 생활자원의 하나로 쓰여져 왔다. 즉 나물은 식(食), 약초는 약(藥)의 원료로 쓰였기 때문에 식약은 같은 뿌리라 해서 ‘식약동원(食藥同源)’ 이란 말이 생겼다. 나물은 우리 몸에 부족한 영양을 공급해준데 그치지 않고 먹을 것이 없었던 시절 구황식물로 허기진 배를 채워 주었다. 뿐만 아니라 야산에 널려 있는 나물은 빈한한 가정의 생계를 유지시키는 생활수단이기도 했다. 약초 역시 질병치료와 함께 약초꾼의 생계를 돕는 귀중한 경제자원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자연산보다는 대체작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초청음악회가 수원에서 열린 것은 1962년 4월 14일이었다. 당시만해도 수원은 인구 11만명이 조금 넘는 소도시 인데다 문화 불모지여서 음악 자체를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였다. 더구나 세계적 음악가로 성가를 올리고 있는 안익태를 초청해서 음악회를 개최한다는 것은 발상 자체가 엉뚱하다는 소리를 들을만 했고, 일부에서는 당치 않다는 냉소도 없지 않았다. 이 음악회를 갖기까지에는 밖에 알려지지 않은 일화가 있다. 안익태 초청 음악회를 기획한 사람은 당시 수원문화원장이던 김승제였다. 그는 1962년 2월 13일 수원문화원 제4대 원장으로 취임한 것을 기념이라도 하려했는지 1961년 귀국해 서울에 머물고 있었던 안익태를 찾아가 수원에서 음악회를 가져 주기를 간청했다. 안익태는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대음악가답게 김승제의 간청을 흔괘히 받아들였다. 장소는 서울농대 강당으로 정해졌으나 피아노가 문제였다. 김승제는 수원시내 학교를 찾아다니며 피아노를 빌리려 했지만 피아노를 가진 학교가 없었다. 겨우 어느 여학교에서 고물 피아노를 빌렸으나 건반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고 조율은 아예 되어 있지 않았다. 김승제는 이런 사실을 안익태에게 고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