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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룡문] 군사도시 수원

이창식 주필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일신협약 체결,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맞서 1907년 8월 일어난 항일 의병 봉기가 정미의병(丁未義兵)이다. 서울에서 군대가 봉기하자 원주 진위대, 여주?강화 분견대 등이 민간인과 함께 봉기한데 이어 함경도의 홍범도 부대와 경상도의 신돌석 부대를 필두로 각지에서 의병 세력이 확충돼 1908년에는 의병장이 241명, 의병수가 3만 1245명에 이르렀다.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으로 일컬어지는 한일신협약은 군대 해산, 사법권과 경찰권의 위임 등이 포함된 내정 간섭 조약이었다. 국가에는 국가를 수호하는 군대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일제는 항일 운동을 탄압할 목적으로 집회.결사를 제한하고 무기 휴대를 금지하는 보안법 제정과 함께 군대 해산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우리 군대가 이에 항거하며 봉기한 것은 너무 당연했다. 당시의 군사 조직은 중앙에 친위대, 시위대, 호위대가 있고 지방에는 지방대와 진위대(鎭衛隊)가 있었다.

 

지방대는 1897년 6월 지방대 설치령(착령 제22호)에 따라 설치되고, 진위대는 이보다 앞서 1895년 9월 지방 질서 유지와 변경의 수비를 위해 설치됐다. 1900년 7월 원수부 명령으로 진위대와 지방대를 통합해 전국의 진위대를 6개 연대로 재편하는데 제1연대 본부는 강화, 제2연대는 수원, 제3연대는 대구, 제4연대는 평양, 제5연대는 북청, 제6연대는 의주에 본부를 두었다. 진위대 1개 대대의 병력은 대대장 이하 장교 및 하사관 108명, 병졸 900명이었다.

 

1개 연대는 1~3대대로 편제되었기 때문에 병력은 3000여 명, 전체 지방군은 2만 명 정도였다. 1905년 4월 18개이던 대대를 수원, 청주, 대구, 광주, 원주, 황주, 평양, 북청 등 8개 대대로 감축하였다. 일제는 1907년 8월 중앙의 시위대를 해산하고 8월 3일부터 9월 3일까지 순차적으로 진위대도 해산시킬 계획이었는데 8월 1일 의병 봉기로 이어진 것이다. 8월 5일 원주진위대, 8월 9일 수원진위대 강화분견소가 봉기해 일본군과 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패망 때까지만 해도 수원은 군사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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