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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룡문] 여성 참정권운동

이창식 주필

영국의 여성 참전권운동을 체계화,논리화한 것은 1792년 발표한 메리 울스턴 그레프트의 논문 ‘여성 권리의 옹호’였다. 메리는 이 논문에서 여성에게도 교육을 받게 하고 전문직에 취업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남성이 주는 ‘쓴 빵에 의존하는 시대’는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회를 구성하는 집단들 사이에 진정한 평등이 존재할 때 만이 사회는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이 메리의 결론이었다.

 

이 같은 견해는 “결혼으로 아내의 ‘법적 존재’는 정지된다.”고 한 1756년에 출판된 법률학자 월리엄 불랙스턴경의 논문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메리 올스턴 그레프트는 이에 대해서도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지위로 격상되어 남성의 정부(情婦)가 아닌 동반자가 되려는 태세가 갖추어질 때 만이 비로서 결혼이 신성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남존여비를 당연시하던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대남(對男) 도발이었다. 메리 울스턴 그레프트는 출산 후유증으로 1797년 38세 나이로 타계했지만 그가 남긴 논문은 훗날 일부 남성들이 여성의 권리증진을 위한 투쟁에 동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여성참정권 운동이 완성되기까지에는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자적 지위에 있던 여성들의 눈물겨운 항쟁이 있었다. 1913년 6월 4일 영국의 한 경마장에서 와일딩 데이비슨이라는 젊은 여인이 트랙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 질주하는 국왕 소유의 말을 가로 막다가 밟혀 죽는 사건이 있었다.

 

그녀는 경마를 가로 막는 것으로 여성의 권리 쟁취를 호소하려 했던 것이다. 사건 이후 여성 운동가들은 밤중에 문패에 페인트 칠을 하고 우체통에 잼을 부어넣었으며 꽃밭의 꽃을 뽑아버렸다. 또 전선을 절단하고 허위 화재경보를 울리는가 하면 심지어 교회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반사회적인 행동이었지만 그들은 평범한 영국 국민의 아내, 누이동생, 어머니, 딸로서 투표권을 얻기를 바랬을 뿐이었다. 영국의 여성운동은 산고에 비할만한 형극의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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