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사태에 대한 무기력한 대응으로 한계를 드러내었던 아세안이 최근 아세안 플러스 3 및 동아시아 정상회의(캄보디아 프놈펜), G20(인도네시아 발리), APEC(태국 방콕) 등 열흘 동안에 걸친 연속 국제회의의 개최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본 회의보다는 그 전후에 벌어지는 각국 정상들의 개별 회담에 시선이 더 집중되었고, 미중 정상회담은 그 중 백미를 장식하였다. 미중 양국은 그간의 팽팽하였던 대립과 갈등을 지양하고 경쟁(또는 협력) 관계로 나아갈 것임을 표명하였다. 또 3년 만에 한중 정상회담도 개최되었다. 미중 양국 사이에서 외교적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우리에겐 단비와 같은 소식이다. 또한 바이든 대통령은 회담 후 "중국과의 신냉전은 필요하지 않다."라고 확언함으로써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후 짙어지던 신냉전에 대한 우려..
코로나 19 백신 접종이 시작된 후 1년 반 가량이 지났다. 3차백신접종 그리고 오미크론 대유행 후부터 지금까지 한의원에서 만나는 분들의 패턴이 흥미롭다. 대부분 “백신 다 맞았는데 코로나 19도 걸려 고생했어요.”라고 말한다. 나의 대답이 이어진다. “감염되지요. 코로나 19는 RNA바이러스죠. 특징이 변이가 계속 일어나요. 변한다는 겁니다. 백신은 변이 된 후에 만드니 백신을 만드는 속도는 바이러스가 변이 하는 걸 뒤따라 갈 수밖에요. 그래서 백신접종이 감염을 예방할 수 없지요. 그러면 ”저는 모르죠. 전문가가 아니니 어찌 알겠습니까.”라는 대답부터 “어떡해요. 직장에서 안 맞으면 안 된다고 했거든요.”라는 체념조나 혹은 “국가의 감염병에 대한 관리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요?” 등 다양한 대답이 따라온다. 신기한 게 그다음은 거의 비슷하다. “그래도 안 맞았으면 더 심하게 앓았을까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안 맞으려고요.” 이런 풍경 속 최근에 어찌어찌 소개로 한약치료를 받아야겠다고 내원한 한 86세 할머님은 작년 2차백신 접종 후부터 크게 앓고는 입맛을 잃고 전신이 저리고 안 아픈 데가 없다는 표현이다. “앓기 전에는 정말 스무 살은 젊어 보인다고 했는데 완전 폭삭 삭아 버렸어요. 자식들이 내가 잘못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하신다. 할머님에게 “백신은 보약이 아니에요. 쉽게 말하자면 약하게 코로나19에 걸리게 하는 거예요. 부작용도 있고요. ” 하니 “몰랐지요. 나 코로나도 걸렸잖아요. 이렇게 앓을 줄 알았으면 안 맞았지요. 그래도 죽은 사람도 있는데 다행인 건지” 백신은 보약이 아니라는 말은 그것이 맞은 사람의 활력을 더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비유적으로 보약이라고 할 때는 에너지를 더해줘서 우리 몸에 원래 있는 면역을 포함한 몸이 전체적으로 잘 기능하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뜻이다. 백신은 그렇지 않다. 다만 특정 병원체의 항체 생성을 돕는다. 오히려 중증을 예방하고자 맞은 백신에 해당하는 바이러스가 변이 되면 인체는 그것에 감염될 때 면역의 방어기전이 더 취약해질 수 있는 최초항원원죄(original antigenic sin) 개념이 있다. 책 『호메시스』에서 저자인 이덕희 교수는 잔류성 유기오염물질(Persistent Organic Pllutants;POPs) 이 혈중 GGT를 증가시켜 당뇨병이나 각종 만성질환의 시초가 된다는 대규모 연구결과를 말한다. POPs는 적은 농도에서도 인체의 에너지 생성 공장인 미토콘드리아에 독성을 나타내는 기전으로 작용한다. 장기간 마스크 착용도 POPs로 작용할 수 있다. 유래 없이 인류에게 접종된 mRNA백신은 어떨까? 장기간, 또, 반복되면 어떤 영향을 미칠까. 아직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질병청의 통계는 코로나 19 백신으로 인한 중대한 이상 사례는 19319 건, 그중 사망자는 1903명이다. 여전히 진행형이다.
본보 25일자(1면, 7면)에는 악질적인 연쇄 성폭행범 박병화와 아동 성범죄자 조두순 관련 기사가 실렸다. 화성시가 최근 봉담 원룸에 입주한 박병화가 신청한 생계지원을 유보하기로 했다는 소식과, 조두순이 안산 와동의 집에서 선부동으로 이사할 계획을 철회했다는 내용이다. 박병화는 여성 10명을 연쇄 성폭행, 15년 옥살이를 마치고 지난달 31일 만기 출소해 화성시 봉담읍의 한 원룸에 입주했다. 이에 화성시와 주민들의 거센 퇴거요구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화성시는 즉각 “박병화 가족이 임대차 계약 과정에 위임장을 제출하지 않는 등 절차상 하자가 발견됐다”면서 계약을 무효로 하는 절차를 진행 중이며 건물주도 당사자에게 퇴거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출소 직후 봉담읍 초등학생 학부모 50여 명과 정명근 화성시장은 박병화가 입주한 원룸 앞에서 기..
안 그런 것 같지만 축구 영화는 사실, 그리 많지가 않다. 야구나 풋볼, 특히 복싱을 다룬 영화들은 많아도 축구는 그렇지가 않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얘기이고 아주 인상적인 작품이 그리 많지 않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예컨대 야구 같은 경우는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을 맡았던 1984년 영화 ‘내추럴’ 같은 것이 있고 케빈 코스트너의 1999년 영화 ‘사랑을 위하여’ 같은 작품은 잊을 수 없는 야구영화…라기보다는 러브 스토리로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다. 배리 래빈슨이나 샘 레이미 등등 명장 감독들이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물론 ‘사랑을 위하여’ 같은 경우도 케빈 코스트너의 앞 머리가 아직 남아 있을 때이고(웃자고 하는 소리이며 대머리 남성 분들 기죽지 마시라. 끝까지 사랑하고 연애하며 사실 수 있다.) 켈리 프레스턴이 유방암으로 죽기 훨씬 전의 일이다. 스포츠 영화는 스포츠가 앞으로 너무 나오면 안된다. 그러려면 그냥 TV 중계가 낫다. ‘내추럴’이든 ‘사랑을 위하여’ 든 영화 속에 음모와 범죄가 나오기도 하고 팜므파탈(요부)이 등장하기도 한다. 풋볼 영화인 올리버 스톤 감독의 ‘애니 기븐 선데이’ 같은 풋볼 영화는 광활한 경기장을 하나의 국가 영토처럼 놓고 점령을 위해 일보 전진 이보 후퇴를 거듭하는, 정치 드라마이자 인생 드라마로 엮어 낸 역작이었다. 이에 비해 정통 유럽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는 비교적 손에 꼽을 정도이다. 할리우드의 거장 감독인 존 휴스톤이 1982년에 만들었던 ‘승리의 탈출’이 기억나는 정도이다. 연합군 포로들이 수용소의 독일군과 축구 시합을 벌이는 이야기이고 양 팀 선수가, 양측 군인이 두 나라 간에 전쟁을 벌이 듯 목숨을 걸고 경기를 펼치게 된다는 내용인 바, 연합군 포로들은 이 과정에서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는 전쟁 드라마이다. 제목이 왜 승리의 탈출인 지를 암시하는 대목이다. 축구가 영화로 잘 안만들어지는 이유는 과정이 비교적 우직하고 정직하며 결과가 뻔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싸우는 선수들, 정직하게 훈련했던 사람들, 남의 뒷 머리를 치는 지략보다는 몸과 몸이 부딪히는, 그 ‘육질의 정확도’가 승부를 가로지르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별로 음모나 뒷거래가 없다. 한마디로 영화가 가져다 쓸 드라마적 요소가 야구나 풋볼에 비해 그리 많지 않거나 축구 경기의 흥분감만큼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 수 있는 축구 영화를 만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세상이 온통 축구 얘기, 월드컵 얘기다. 요즘 축구는 예전과 달라진 것이 많은데 확실히 한국 팀이 매우 잘한다는 것이고 사람들의 관심이 비단 한국 팀의 우승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시합에서 만끽할 수 있는 화끈한 재미, 그럼으로써 일상의 지루함과 비루함에서 탈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한국 팀의 기량이 높아진 것은 다른 모든 이유에 앞서서 선수들 개개인의 체력이 매우 높아진 것 때문일 것이다. 전후반 90분 동안 선수들은 지치지 않고 구장을 종횡무진 누비고 뛰어다닌다. 전반에 반짝했다가 후반이면 공격과, 특히 수비에서 현격하게 밀리는 상황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선수들 모두 잘 먹고 잘 크고 잘 단련된 덕이다. 개인과 국가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기량과 국력, 국격이 동시에 올라갔기 때문이다. 축구 팬들은 비록 한국이 16강에서 떨어진다 해도 중계 시청을 중단하지 않는다. 누가 이겨도 또 누가 져도 축구는 축구이고 그 열렬한 분위기는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전에 한국 팀이 탈락하면 중계방송조차 중도에 중단될 만큼 한국 우선의 경기가 아니라는 것이고, 바로 그게 월드컵 정신이며, 팬들의 태도가 이제 경기는 경기 자체로 즐기겠다는 것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글로벌 화 됐다는 얘기이다. 축구가 국수주의나 지나친 민족주의 감정에 휩싸이거나 그렇게 이용되던 시대는 지나도 한참을 지난 것이다. 우리도 과거엔 그럴 때가 있었다. 전두환 시대 때가 그랬다. 선수와 축구 팬들은 이제 선진화될 만큼 선진화돼있는 상황이다. 감독이나 축구 운영위원회가 이상한 짓, 못된 짓을 하면 당장 쫓겨나거나 해체될 것이다. 자기 마음에 드는 선수를 기량과 상관없이 주요 포지션에 배치하거나 이유 없이 특정 선수를 내치거나 하면 안 될 것이다. 축구 역시 승리를 향해 가는 여러 매뉴얼이 있을 것인 바, 사리에 어긋나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훈련방식으로 선수들을 압박하고, 그런 것 등등에 대해 개선을 요구하는 축구위원회나 팬들의 목소리를 무시하면서 독선적으로 팀을 운영하는 감독이라면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축구에서 바라는 것은 정직하게 노력하는 경기이며 그래서 얻게 되는 그 대가이다. 그건 승리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한국에서는 어쩌면 곧 축구 영화가 한편 만들어질 것이다. 지금의 정치 상황과 연계해서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되는 얘기로 만들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주성치 주연의 ‘소림축구’에서 웃음과 코미디를 싹 걷어 낸 분위기 같은 것. 약한 자들, 선한 자들이 승리하는 이야기 같은 것이 만들어질 것이다. 나라가 축구보다 못한 세상이 됐다. 사람들이 축구를 보면서 한편으로 마음이 찝찝한 것은 이겨도 이긴 것 같지 않은 느낌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여론조사업체 모닝 컨설트의 조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세계 지도자 22명 가운데 꼴찌인 22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축구는 좀 지더라도 재미와 감동을 주면 된다. 지도자의 국격과 품격은 그럴 수가 없다. 되돌리기가 매우 힘든 일이다. 이럴진대, 실로 닥치고 축구나 볼 일이다. 근데 과연 그럴 일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탈리아 칸초네 3곡을 꼽으라면 산타 루치아, 돌아오라 소렌토로, 오 솔레미오가 아닐까 싶다. 가사를 몰라도 격정과 애수 가득한 멜로디가 심장으로 직진한다. '노래'라는 뜻의 칸초네는 이탈리아의 민요, 대중가요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세상의 모든 가요가 그렇듯이 사랑과 이별, 우정,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소재로 하고 있어 가사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번역해 가사를 들려주면 멜로디처럼 이국적이고 시적인 노랫말을 기대했던 이들은 살짝 실망한다. 그런 이들에게 이 노래들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산타 루치아의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처럼 흥미진진하다. 4세기 초, 로마제국 시절, 시칠리아에 살던 처녀 루치아는 출혈이 멈추지 않아 죽어가던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성녀 아가다의 무덤을 찾아가 눈물로 기도한다. 기적적으로 어머니가 살아나자 루치아는 남은 삶을 예수님께 바치기로 하고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준다. 문제는 루치아에게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었다는 것. 약혼자는 파혼보다 곧 제 손에 들어올 것으로 생각한 루치아의 재산이 날아가는 것에 분개한다. 그래서 집정관에게 그녀가 기독교도(당시 불법이었던)라는 것을 고발한다. 로마 법정은 루치아의 눈을 뽑고 매음굴로 보내라 명한다. 그런데 기이하게 루치아의 몸은 여러 장정들이 달려들어도 꿈쩍 하지 않았고 화형을 시키려 해도 불붙지 않아 결국 칼로 최후를 맞는다. 그 후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한 뒤, 루치아는 성녀로 지정된다. 루치아의 시신을 거둔 곳은 베네치아. 산타 루치아 성당과 역의 유래다. 루치아가 당한, 눈 뽑힌 고문에서 기인했는지, 빛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루체( Luce)와 이름이 비슷해서인지, 성녀 루치아는 이탈리아에서 시력 보호의 성인으로 숭앙받아왔다. 12월 13일이 루치아 성녀의 축일인데,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날, 눈알 모양의 빵을 먹으며 눈병 없기를 기원한다나. 루치아 수녀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여러 화가들의 그림 중, 스페인 화가 주르비란의 그림을 보라. 붉은 조끼를 입은 루치아가 오른쪽 손에 접시를 들고 있다. 그런데 접시 속에 담긴 것은 놀랍게도 눈알 두 개다. 섬뜩하다. '돌아오라 소렌토로' 이야기도 재미있다. 1902년, 호텔 경영자이기도 한 소렌토 시장 트라몬타노는 마을 주민들의 꿈인 '우체국 건립'에 고심하고 있었다. 그즈음, 수상이 재해 현장 방문을 위해 소렌토를 찾았다가 트라몬타노의 호텔에 묵게 된다. 트라몬타노는 기회를 놓칠세라 수상에게 우체국 건립을 부탁한다. 수상은 긍정적인 답변을 준다. 수상의 마음이 변하거나 잊어버릴까 전정긍긍한 트라몬타노는 급히 작사, 작곡자를 섭외해 노래 한 곡을 만들게 한다. 그리고 수상이 호텔을 떠나는 날, 미리 불러온 가수에게 노래를 부르게 한다. 이 노래가 바로 '돌아오라 소렌토로'다. 번안 가사로 귀에 익은 산타 루치아는 인생 찬가인데 알고 보니 종교 박해로 비참하게 죽은 처녀 루치아의 비극적인 삶을 품은 노래라는 것, 그리고 제목과 분위기 때문에 '당연히' 사랑 혹은 이별 노래로 알았던 '돌아오라 소렌토로'가 우체국 청원가였다는 것, 이 사실을 알고 노래를 듣게 되면 명곡의 환상이 깨지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65세 이상이 되는 사람을 노인이라 한다. ’노인복지법‘에 따르면 장기요양급여를 받을 수 있는 노인은 노인성 질병, 고령 등의 사유로 독립적인 일상생활이 어려운 사람이며, 65세 이상의 노인 또는 65세 미만의 사람으로서 뇌질환·치매 등 노인성 질병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다. 노인은 후손의 양육과 국가·사회의 발전에 기여해온 분들로서 존경과 더불어 생활의 안정과 그분들의 능력에 맞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받고 원하는 만큼 사회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보장해 주도록 법에 명시되어 있다. 보건복지부 장관과 자치단체장들은 노인복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상담·지도, 노인(의료)복지시설 입소 위탁 등의 조치를 해야 하며, 생활이 어려운 노인들은 매월 일정액의 연금이나 장기요양급여 등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지난주 대통령실 앞에서 벌어진 mbc 기자와 윤석열 대통령 사이의 논쟁은 언론에 대한 이 정권의 낮은 인식을 드러내 큰 문제점을 남겼다. 윤 대통령은 외국 정상과의 만남 직후 자신이 뱉은 비속어를 보도한 언론 가운데 유독 mbc를 향해 “국가안보의 핵심축인 동맹관계를 사실과 다른 가짜뉴스로 이간질하려고 아주 악의적인 행태를 보였다”면서 극단적인 비난과 언론 혐오증을 보여줬다. 이에 해당 기자가 “(mbc가) 뭘 (그리) 악의적으로 (보도)했다는 거냐?”고 물었지만 그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대통령실은 더 나아가 기자의 질문이 ‘난동에 가까운 행위’라고 규정하고 출입 정지 등 징계를 추진하겠다고 한다. 대통령과 대통령실의 대응은 남 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흉하다. 국민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내용에 대한 질의를 무시하는 대통령이나, 대답하기 다소 껄끄러운 내용에 대해 질문을 했다는 이유로 기자의 질문 행위를 ‘난동’으로 규정한 대통령실을 보면서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느낌이 든다. 대통령은 취임 직후 이른바 도어스텝핑 방식의 소통을 강조하면서 “정부 정책에 대해 언론을 통해 민의를 들을 수 있으니 얼마든지 비판할 것은 비판하라”고 당부하기까지 했던, 불과 몇 달 전 약속을 스스로 뒤집겠다는 것인가? 대통령은 취임할 때 ‘헌법을 지키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헌법이 가장 소중하게 담고 있는 언론 자유를 제한하겠다는 것인가? 듣기 싫은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 대통령 전용기 동승 배제와 출입정지 등의 치졸한 방식으로 언론을 억압해서야 되겠는가?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행태는 명백한 헌정질서 문란 행위임을 명심해야 한다. 언론 자유는 민주주의의 척도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민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자유를 자유롭게 하는 자유라는 점에서 ‘기본권적 기본권’이라고도 불린다. 그 기본권이 대통령의 억지스런 말 한마디에 부정당하는 현실을 보는 것은 안타깝다. 언어심리학자 에드워드 사피어는 ‘말은 思考의 거울’이라고 말했다. 내뱉은 말이 사람의 인품과 인문학적 소양의 수준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대통령의 입이 너무 거칠고 저급하다. 또 사실이 아닌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자주 어지럽힌다. 거짓말과 거친 대응은 권력에 대한 감시라는 언론 본연의 비판적 기능에 대한 몰이해를 반영한다. 대통령 비속어 발언 보도가 대통령의 말글살이 수준과 판단 능력의 문제점을 온 천하에 드러낸 것은 차라리 다행스런 일이다. 실수를 사과하기는커녕 이를 보도한 언론을 향해 공격하는 대통령의 비뚤어진 성품을 국민들이 알아채게 되었기 때문이다. 헌법주의자임을 자처하고 자유와 상식을 내세우려면 헌법에 담긴 민주주의 정신을 제대로 새겨야 한다. ‘말 따로 행동 따로’인 사람의 말은 늘 공허하다.
제헌의회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국부로 추앙받았다. 봉건시대 왕 같은 대통령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왕조가 해체됐지만 근대화 이행이 더디어 봉건가치가 사회 면면에 남아있었기에 국민이 대통령을 인식하는 시각은 숭상이었다. 5.16을 통해 집권한 박정희도 비슷했다. 모내기하고 논두렁에서 막걸리 같이 마시는 사진 한 장에 국민들이 칭송했다. 박정희는 시대정신을 잘 읽었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는 캐치프레이즈에 농축되어 있듯이 그시대 국민이 바란 방향을 잘 포착하여 경제개발5개년계획 등으로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경제발전은 큰 치적이다. 권력욕으로 72년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헌법을 발표하며 정치가 사라졌다. 해방 이후 79년까지는 정치보다 통치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 대권을 노릴 수 없는 이시절 국회의원..
보름남짓 남은 정기국회가 격량속에 휩싸여 있다. ‘이재명 사법 리스크’를 둘러싼 여야대치가 가팔라지고 있다. 경제활성화 법안을 비롯해 윤석열 정부가 제출한 77개 법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게 현주소다. 그나마 여야가 ‘이태원참사 국정조사’에 전격 합의한 것은 다행이다. 그럼에도 대장동 의혹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조사 필요성을 언급하는 등 연일 압박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어 향후 정국은 예측불허다. 그렇지 않아도 민생고에 신음하는 국민 입장에서는 착잡하다. 김용 민주연구원 부원장에 이어 정진상 당대표 정무조정실장까지 이 대표 최측근 인사들의 구속영장이 잇따라 발부됐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검찰이 이르면 정기국회 회기중이나 올해안에 이 대표를 소환조사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그럴경..
정치·사회적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서로 다른 의견이 첨예하게 맞서 사회 분열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최근 이태원 참사로 희생된 고인들의 이름을 모 인터넷 매체가 공개했는데 이를 두고도 극한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쪽에서는 공개를, 다른 한쪽에서는 비공개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의 말을 경청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는 상대에게 논점하고는 아무런 상관없는 말을 함으로써 토론 자체를 무력화 시킨다. A가 논점인데 B라는 논점으로 이동하면 토론은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 토론이 가능하려면 A 범주 안에 있어야만 한다. A1, A2, A3 등 중학교 수학시간에 배우는 인수분해 동류항 A를 벗어나면 식이 성립되지 않거나 다른 차원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는 토론뿐만 아니라 짧은 글이든, 시든, 소설이든 동류항 묶기에서 벗어나면 실패작으로 본다. 논점이 일관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글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토론이나 글쓰기는 영화 ‘주유소 습격 사건’의 명대사인 "한 놈만 패라"가 철저하게 지켜져야만 하는 것이다. 논점이탈은 십중팔구 상대를 비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풍경은 우리가 주변에서 숱하게 보아온 게 아닌가? A와 B가 길거리에서 자동차 접촉사고로 말다툼을 한다. 시시비비를 가리다가 A가 B에게 다짜고짜 "너, 몇 살 먹었어?"하고 나이를 들이댄다. 그것으로 토론은 끝이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를 오히려 조장한다. '메시지에 자신 없으면 메신저를 공격하라'는 말이 하나의 철칙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상대를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정치는 고도의 토론행위임을 부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과정을 통해 논점 A는 휘발되고 만다. 정치 프레임이 자연스레 들어선다. 이태원 참사 고인들의 이름 공개 여부에 대한 논점이 '사고를 은폐하려는 정권의 음모'와 '야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막으려는 시도' 등 프레임으로 이동했음을 우리는 지켜보았다. 여당과 야당의 프레임 전쟁이 되고 만 것이다. 명단 공개 여부 논쟁은 우리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스 비극인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가 문제 제기한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현재적 시점에서 새롭게 고찰할 수 있는 등 실로 많은 것을 숙의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하지만 토론 문화의 부재와 정치 프레임화해서 이득을 보려는 정치 세력들 때문에 사장된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쯤이면 우리 사회의 분열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우리 사회에 갈등을 관리하는 토론 문화가 빈곤해서 빚어지고 있다는 게 입증되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라면 당연히 갈등이 존재한다. 갈등은 변수가 아닌 상수인 셈이다. 이제부터라도 논점 A만 말하는 것을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