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여자, 남자 혼성으로 구기 종목을 하기 어려워진다. 신체 발달이 달라지면서 힘에서 여자아이들이 밀리고 치인다. 더 큰 어려움은 남자아이들은 초등학교 시절 내내 공으로 하는 운동을 접해서 발기술이나 손기술이 발달했는데, 여자아이들은 나이가 들수록 공과 점점 멀어져서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와 비슷한 기능을 가진 채 고학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여학생이 피지컬이나 힘에서 남자아이들과 견주었을 때 밀리지 않는다 해도, 스스로 공 다루는 기술이 부족하다고 느껴서 경기 참여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체육에 자신감이 떨어진 여자아이들이 공으로 하는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게 되고, 교사조차 여학생들이 체육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초중고 여자 체육은 오로지 피구와 발야구에 머무르다 끝나는 상황이..
수원시 권선구 소재 한 어린이집 원아 50명 가운데 14명이 결핵균에 집단 감염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이는 지난달 24일 기준인데 아직 검사가 진행되지 않은 원아들도 있어 추가 감염자가 더 나올 수 있다고 한다.(본보 15일자 1면) 본보 취재에 따르면 이 어린이집 한 보육교사가 결핵에 걸렸고 이로 인해 어린이들까지 감염됐다는 것이다. 이 보육교사는 2월 말 퇴사했는데 지난해 11월부터 의심 증상을 보였고 3월에 결핵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학부모들은 이 보육교사가 기침을 하는 모습을 보고 불안감을 느껴 원장에게 문의했지만 “문제없다”며 방치했다가 퇴사 후 폐렴, 폐결핵에서 양성이 나오자 뒤늦게 결핵 감염 사실을 알렸다며 분노했다. 어린이 집 원장은 “1년에 한 번 진행하는 건강검진과 2월 25일 진행된 CT결과에서 음성 판정이..
1. 2011년 일본 북동해안에서 진도 9.0의 강진이 일어났고, 10m에 달하는 쓰나미가 밀려왔다. 쓰나미는 미야기, 이와테, 후쿠시마현 등을 휩쓸었고, 후쿠시마 원전에서 방사능이 유출됐고, 대략 25,000명 넘는 인원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고베 대지진 이후로 다시 한번 일본을 덮친 끔찍한 재난이었다. 재해 복구 예산이 무려 250조 원이 넘는다는 엄청난 피해 앞에 일본 전역은 깊은 시름과 비통함에 잠겼다. 그런데 쓰나미가 빠져나간 뒤, 리쿠젠타카타 시를 찾은 조사관은 경이로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바닷가에 심어진 7만여 그루 소나무가 모두 끝장난 상황에서 그야말로 낙락장송 한 그루가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높이도 27.5m에 달하며, 수형도 아주 예쁘고 우뚝한 소나무는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일본인들은 그 나무를 기적의 소나무라 부르며, 어떤 재난에도 굴하지 않는 일본의 대화혼을 상징한다고 여겼다. 그런 희망과 상징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희망은 헛된 꿈이었다. 쓰나미로 몰려온 바닷물이 뿌리를 완전히 침식해서, 소나무는 형체만 남아 있을 뿐, 이미 죽은 고사목이란 판정이 나오고 만 것이다. 섬겨야 하는 신(かみ)이 팔백만이나 되는 일본인들은 소나무 한 그루쯤 더 신으로 모신다고 무슨 큰일이랴 싶었나 보다. 이미 죽어버린 소나무 속을 다 파내고 시멘트를 채우고, 방부 처리한 껍질과 줄기 몇 개를 남겨서 거대한 인공 소나무를 만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기적의 소나무란 이름으로 공원을 만들어 탐방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살아남은 듯 보였던 소나무로 위로받고, 희망을 걸어보자는 마음이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그 소나무가 종내 회생할 수 없는 고사목이란 사실이 드러난 뒤에도 15억 원이 넘는 비용을 들여서 좀비 소나무를 만들고, 그 시멘트 덩어리를 기적의 소나무라 불러도 좋은 것일까? 2. 골프란 운동은 그날 굿샷을 몇 번이나 날렸느냐가 아니라, 배드샷을 얼마나 줄였느냐가 스코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앞자리가 6자로 바뀌니 가끔 살아온 나날을 뒤돌아보게 된다. 비교적 큰 풍파 없이 살아왔다 싶기도 하지만, 이런 구비 저런 곡절이 왜 없었겠는가. 바라보면 부럽고 멋져 보이는 친구들은 다들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했고, 사고를 덜 친 친구들이다. 살면서 사고를 안 칠 수는 없다. 문제는 ‘이왕 버린 몸’이란 생각이다. 이왕 버린 몸이니, 운세가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운세가 나쁠 때 틀린 판단을 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선택지를 갖는다. 이왕 버렸으니 폭삭 망해보자는, 실현 가능성이 극히 드문 패에 모두걸기하다 정말 거덜 나는 것. 그리고 불에 다 타버려 폭삭 주저앉은 집구석이지만, 그래도 뭐라도 건져보겠다고 잿더미를 뒤적이는 행보다. 무얼 택할지는 본인이 결정할 일이다. 전두환 노태우만 때려잡으면 민주주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분단 조국은 단박에 통일이 되리란 생각이 얼마나 나이브했던가. 그렇다면 윤석열이 대통령 됐다고 세상 다 망한 것처럼 해야 할 일도 손 놓고 있는, 좋게 말하면 직무유기요, 있는 대로 말하면 시대 앞의 저 죄인들을 어찌할꼬. 민주당 이야기다. 분김에 고향말로 적어본다. 시방 뭣들 하는겨. 이왕 버린 몸이라 이거여?
‘팝콘’과 ‘나폴레옹제과점’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윤석열 팝콘’ 키워드로 포털을 검색해봤다. 250여개 기사가 나왔다. 조선일보(6.12자 인터넷판)는 “윤 부부 주말 영화관 데이트…팝콘 먹으며 ‘브로커’ 봤다”를 기사 제목으로 뽑았다. 중앙일보는 ““윤 부부…“저도 시민이잖아요”” “윤 대통령 부부, 팝콘 먹으며…메가박스서 ‘브로커’ 관람”, 동아일보는 “‘브로커’ 관람…팝콘 나눠 먹기도”였다. 상당수 매체는 일제히 ‘시민과 소통하는 대통령’에 비중을 뒀다. 새 정부 출범에 따른 ‘허니문’ 기간이기 때문일까? 그날, 윤 대통령이 영화를 관람한 당일, 북은 방사포를 발사했다. 언론은 대체로 직접적인 비판을 삼갔다. 몇몇 셀럽과 민주당 국회의원의 SNS 비난 글을 지면에 소개했을 뿐이다. 한편, 윤 대통령 부부의 ‘나폴레옹제과점 주말 쇼핑’에 대해선 보도가 확대되지 않았다. ‘윤석열 나폴레옹제과점’ 키워드 검색 결과, 50여개 기사가 나왔다. ‘영화 관람’ 보도보다 기사량이 훨씬 적었다. 조중동은 아예 기사로 다루지 않았다. 대통령 부부의 ‘사적(私的)’ 행위에 따른 경호 인력의 낭비, 삼선교 인근 시민의 교통 불편 이슈를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속내가 읽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주말 빵집쇼핑은 주말 영화 관람과 더불어 여론의 관심사가 됐다. 대통령 부부의 일거수일투족은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상품 가치’가 크다는 점이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언론이 대통령의 사적 행위에만 포커스를 맞추면, 대통령은 ‘이미지 정치’와 ‘이벤트 정치’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매일같이 벌어지는 ‘사건’과 ‘이벤트’를 정신없이 쫓아다녀야 하는 기자들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우려를 금할 수 없는 지점이다. 윤 대통령의 ‘팝콘 정치’와 ‘빵집 정치’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이면을 생각할 수 있다. 윤 대통령 부부가 언론을 선전도구로 활용하고 있거나, 윤석열 대통령을 만들어 낸 주류 언론이 윤 부부를 그릇된 방향으로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보도를 통해 대통령 부부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분할 수 있도록 경고해야 한다. 정파적이든, 비정파적이든 언론에게는 사회적, 공익적 책무가 요구된다. 대통령이 대통령의 역할에 무지하고, 대통령이 권력을 오·남용한다면 언론은 강력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자유시장 체제에 놓여 있는 ‘기업형 언론’, 혹은 ‘사주(社主) 언론’이 ‘언론의 현실’일지라도 언론은 공공재의 기능을 갖기 때문이다. 어쨌든 윤 대통령의 ‘팝콘정치’ ‘빵집정치’는 말초적이다. 물가상승, 화물연대 총파업, 민생경제 위기 극복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국가 안보를 담보할 수도 없다. 대통령은 대통령답고, 언론은 언론다워야 한다. 공자님은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말씀을 후세에 남겼다. 국민이 바라는 대통령, 국민이 바라는 저널리즘은 ‘팝콘’도 아니고 ‘빵지순례’도 아니다.
손흥민의 아버지다. 1962년생. 예순한 살. 환갑이다.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은퇴할 때까지는 매우 유능한 축구선수였다. 그 아들이 세계 최고의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을 먹었다. 나는 그 아버지가 궁금해졌다. 그의 자서전을 찾았다.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책을 펼쳤다. "나의 축구는 온전히 아버지의 작품이다." 이 문장은 실은 성공한 아들들의 흔한 효도발언을 출판사가 광고카피로 뽑아 쓴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초장부터 손웅정에게 빨려들어가는 것이었다. 자칭 '마발이 3류 축구선수'가 쓴 이 책이 오늘 나처럼 부실한 가장들은 물론 이 해괴망측한 시대를 내리치는 죽비였기 때문이다. 한 마라토너가 2012년 12월, 스페인에서 열린 크로스컨츄리 경기에 출전하여 2위로 달리고 있었다. 선두는 런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로 케냐의 아..
태어난 자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태어나 이름을 부여받고 열심히 살다가 늙어 병들고 죽음을 맞이하는 삶의 과정을 보면, ‘생명체’와 ‘삶’이란 서로 다른 말이 아니라 표현의 차이에 불과하며, 또한 생명체의 삶이란 ‘생로병사’라는 말 안에 모두 담겨있음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죽음이 삶의 일부라는 것은 개체의 소멸이라는 죽음 자체가 생명 현상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개인이 겪는 죽음이 생명 현상의 한 과정에 불과하다면, 유한한 존재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의문은 개인 차원 내지 층위를 달리해 바라볼 필요가 있다. 비록 나라는 개체는 특정일에 태어나 일정 기간 살다가 특정일에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이지만, 나를 있게 한 부모로부터의 생명의 힘이 있었듯이, 내 부모 또한 그 부모에 의해 존재할 수 있었다. 거꾸로 개인의 존재를 유지했던 생명의 힘은 당사자는 죽음으로 소멸되어도 자식을 통해 이어져 간다. 여성과 남성이란 성의 분화 형태는 있을지언정, 생명은 개체의 죽음 넘어 또 다른 탄생으로 끊임없이 지속되어 후손의 형태로 그 숫자를 늘려가며 다양하게 번창하는 모습이 있다. 아름다운 지구 생태계는 그 결과물이다. 이렇게 죽음과 탄생이라는 생명의 역사는 살아 움직이는 우리 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진보 보수라는 양 날개로 끊임없이 서로 얽혀 작동하면서 사회는 점차 바람직하게 나아간다. 생명이 번창하고 다양하게 전개되기 위해서라도 각 개인의 죽음이 필연적이고, 그런 죽음을 통해 더욱더 다양한 생태계가 펼져지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우리가 개인 죽음에 슬퍼하듯이 지지하던 진영의 패배는 실망스럽고 슬픈 일이지만, 이번 대선과 지선 결과가 우리 사회 발전에 더욱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은 이번 대선과 지선 이후의 또 다른 탄생을 만들어 냄으로써 이뤄진다. 이렇게 층위를 달리해 본다면, 일반적으로 느끼는 것과 달리 생명체의 죽음이 매우 필요하고 소중한 과정인 것처럼, 사회 발전에 특정 진영의 정부나 후보자의 승리 내지 패배 역시 그리 실망하거나 환호할 것은 없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는 조금씩 다양해지고 더욱 생명의 힘을 펼쳐간다. 해방 후 외세에 의한 참혹한 전쟁을 겪었고, 이어서 이승만 정권을 민중의 힘으로 쓰러트렸으나 다시 박정희 군사독재가 이어졌다. 이승만 정권의 죽음, 민중 세력의 죽음, 그리고 이어진 군사독재는 청와대 안가의 총성으로 죽음을 맞이하는가 했더니 끈질긴 군사독재의 힘이 광주항쟁마저 죽이며 이어갔다. 하지만 생명의 힘은 결코 그런 죽음으로 사라지지 않고 다시 그 힘을 발휘해 한국 사회를 21세기 선진국이 되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이렇듯 한 진영이나 후보의 승패를 바라보며 너무 슬퍼하거나 실망 내지 분노할 것은 없다. 이번 선거 결과 역시 이미 사회를 움직일 힘이 다한, 민중의 염원을 이뤄낼 힘이 다한 집단이 죽음을 맞이한 셈이다. 이것은 다시 또 다른 탄생을 통해 끊임없이 생명의 힘을 이어가는 과정이다. 한 죽음을 바라보는 마음이 또 다른 탄생의 힘이 될 때 생사를 넘어 진정한 생명의 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이 된다. 일제 시대로부터 이어진 적폐 기득권을 국민 모두에게 돌려줄 생명의 힘을 우리 사회와 국민은 충분히 지니고 있다. 생사를 통해 다양하고 건강한 생태계가 형성되듯이 생명의 사회는 끊임없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요구한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 문제를 필두로 심각한 경제난이 예고된 상황에서 여야 정치권이 ‘민들레’니 ‘수박’이니 하고 한심한 계파 갈등 양상만 노정하고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더욱이 화물연대의 파업이 장기화하면서 민생이 시나브로 골병이 들어가고 있는 판에 여야가 적극적으로 탈출로를 모색하기는커녕 내부권력 다툼에 혈안이 돼 오히려 국민적 걱정거리로 등장하는 형국이다. ‘정치’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를 되새겨 패거리 다툼을 즉각 중단함으로써 날로 높아지는 ‘정치 불신’을 씻어내야 할 시점이다. 국민의힘 내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을 구심으로 자기 세력을 구축하려는 ‘계파 본색’이 드러나고 있다. 최근 윤 대통령 측근이자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일한 장제원·이용호·이철규 의원 등이 주축이 돼 결성하려던 당내 모임 ‘..
영어를 모르면 한국서 어찌 살까? 국제규격에 알맞은 지식수준을 가졌음을 자랑하고 싶어서일까. 영어단어가 거리에서도 춤춘다. 영어를 한글로 쓰기도 하고, 영문자를 그대로 쓰기도 한다. 의미 없는 국적불명 말도 와글거린다. 언어의 속뜻을 공부하는 필자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드물지 않다. 오늘의 주제는 ‘거리의 언어학’이다. 얼치기 영어가 거리를 질주하도록 방치되고 있다. 국어 버리고, ‘영어’를 수학과 함께 ‘필생의 과업’으로 삼는 나라의 영어 실력이 이 정도인가. 자동차 뒷 유리창에 세련된 디자인의 ‘baby in car’(베이비 인 카)라는 커다란 글자 스티커가 붙어있다. 차안에 아기가 있다는 말일까, 뜻만 통하면 된다고? 용(龍)과 드래곤(dragon)을 같은 단어로 아는 사람들의 평면적인 생각이다. 용은 드래곤이 아니다. 한국어로 외국어를 생각한다. 비교언어학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다. 영어의 명사(noun)에 ‘a’ 또는 ‘the’ 같은 부정관사(不定冠詞)나 정관사가 꼭 붙는 것을 모든 학습자는 영어 공부 초기에 꼭 배운다. 잊었을까? 없으면 다른 뜻이 될 수도 있다. ‘baby’in(g) car’(베이빙 카)를 말하는 것이냐고 한 외국인이 농담처럼 묻더라는 얘기 들었다. ‘제멋대로(아기처럼) 운전하는 차라고 떠벌려 (다른 운전자를) 협박하는 것이냐?’라는 말이다. 발음만으로는 그렇게 알기 쉽다. 언어의 여러 얼굴이다. 메이커가 저렇게 만들었으니 그냥 산다고? 늘 봐도 ‘베이비 인 더 카’(baby in the car)는 없다. 사는 사람이 있으니 저 스티커 제품은 유행한다. 실소(失笑) 절로 나온다. 참다 못 했을까, 최근 ‘baby on board’(베이비 온 보드) 스티커가 어쩌다 보이기 시작했다. ‘아기가 타고 있다.’는 정확한(오해 소지 없는) 영어다. ‘온 보드’는 차나 비행기 등 여러 탈것에 공히 쓰이는 말이다. ‘BEST DRIVER’(베스트 드라이버)도 외국인의 의아함을 부르는 얼치기 말이다. 비싼 택시냐, 어떤 인증의 표시냐 묻는 다소간의 오해도 거리 현장에서 생긴다고 한다. 좋은(good)과 더 좋은(better), 그 다음의 가장 좋은(best)의 뜻의 혼동이겠다. 관할 행정관서의 ‘유식함’이 길거리를 무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거의 모든 택시와 운전자의 모자에 ‘가장 좋은 운전자’라는 표지가 붙어있으면, 그 말의 뜻은 이미 죽었다. 베스트 드라이버는 (단어 뜻대로) 1명이어야 한다. 한 달 또는 1년 단위로 새로 뽑을 수도 있겠지만. ‘아기가 타고 있어요’ ‘좋은(착한) 운전자’라고 쓰던지, 꼭 영어로 쓰고 싶다면 외국인도 오해하지 않도록 단어를 선택해야 한다. 왜 스스로 무식의 깃발을 걸까? ‘대충 쓰면 된다.’는 생각, 곤란하다.
‘범죄도시 2’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다. 영화는 엄청나게 재미있다. 그러니 이 영화가 단기간에 천만 관객을 모은 것에 대해서도 하등의 불만이 있을 수 없다. 다만 극중에서 잔혹하게 살해된 아들과 납치된 남편의 여자 역(박지영)에 대해 일체의 말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좀 이상하게 생각한다. 박지영이 참 잘했다.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그런데 포커스는 마동석에게만 맞춰져 있다. 최귀화나 박지환 같은 배우 등등 남자 배우들에게만 맞춰져 있다. 그게 불만이라면 불만이다. 극중 캐릭터나 배우들의 평가에서 불평등한 점이 있다는 얘기이고 다소 쏠림 현상이 보인다는 얘기이다. 뭐 중요한 얘기는 아니다. ‘범죄도시 2’의 매력은 양가적(兩價的), 곧 이중의 가치에서 찾아진다. 우파들은, 다소 폭력적이긴 해도 불의를 보면 참지를 못하는 데다 후배들이나 자기 경찰서 식구들은 무조건 감싸고 보는 마초적이고 가부장적인 모습에 매료될 것이다. 남자라면 역시 저렇게 강력한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며 침을 흘릴 것이다. 극중 주인공 형사 마석도(마동석)는 ‘수사권이 없으니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고 징징대는 베트남 영사관 직원에게 말한다. “아 그러면 우리 국민들은 우리가 보호해야지 누가 합니까?” 그는 자신의 상관이나 후배가 살인자에게 ‘칼침’을 맞자 한 마디로 눈이 돌아 버린다. 그리고 돌진한다. ‘범죄도시 2’에는 확실히 남성성과 맨스 플레인이 과도하게 흐른다. 좌파가 보기에도 이 영화는 정의감이 넘쳐서 좋아할 것이다. 게다가 주인공 마석두는 서장도 아니고 반장도 아니다. 그저 일개 형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불의와 싸운다. 세상이 아무리 엉망이어도 그는 묵묵히 끝까지 정의를 실현시키려 몸을 불사른다. 그 실천력이 대단하다. 그런 점들을 좋아할 것이다. 한마디로 ‘범죄 2’는 좌우를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 좋아할 만한 요소를 두루 갖췄다. 이 영화가 천만을 넘긴 이유는 거기서 찾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천만’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공연한 심통이 아니다. 이 영화의 폭발적인 흥행에는 지난 25일 동안 좌석점유율을 평균 56.7% 이상 독식해 왔다. 물론 좌석판매율(객석 점유 대비 실제 관객 비율)은 27.1%였다. 시장 전체의 관객을 놓고 보는 시장점유율은 67.1%였다. 이 말은 곧, 천만으로 치솟는 정점일 때는 시장점유율이 70%를 훨씬 웃돌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극장 관계자들은 좌판율을 들어 이게 꼭 독과점의 힘을 빌은 흥행은 아니라고 입을 모을 것이다. 일응 일리가 없는 얘기는 아니지만 영화 한 편이 스크린 10개 중에 최대 7개 이상 가져가고 나머지 영화 열몇 편이 스크린 두어 개로 교차상영화되는 상황을 놓고 보면 그 얘기가 꼭 예뻐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회가 공정해야 한다는 말은 다 거짓이다. 그거 다 수사학에 불과하다. 문재인 정부가 실패한 부분이 있다면 이상(理想)을 현실화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 때문이었다. 자본주의에서는 기회 자체가 공정할 수 없다. 그건 사실 모두가 다 아는 얘기다. 다만, 그 기회의 불평등이 과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보수나 진보 모두 자본주의는 건전해야 한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작동해야 한다는 데에는 서로 간 불만이 없다. 근데 그러기 위해서는 성문법(成文法)이 아니라 불문법(不文法)으로라도 일정한 룰이 관통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스크린 독과점 문제는 늘 경계돼야 하는 것이다. 코로나19가 끝나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없다로 논쟁이 많았다. ‘과거처럼’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봤다. 포스트 코로나, 뉴 노멀의 시대가 왔으니 새롭게 준비하라는 말이 즐비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가가 다시 천만의 시대를 회복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도 적지 않았다. 지금 상황을 놓고 보면 그 두 가지 모두 틀린 셈이 됐다. 일단 천만 시대가 보란 듯이 복구됐다. 솔직히 이렇게 빨리 회복될 것이라고 내다본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천만의 시대가 돌아가지 말아야 할 지점으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뉴 노멀, 포스트 코로나의 역설적인 전진성(前進性)을 훼손시켰다. 일부 식자들은 뉴 노멀 시대의 과거의 복원은 어떤 지점으로 돌아가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야지 무조건 ‘라떼에는’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라고 역설해 왔다. 천만 시대의 가치는 독주의 천만보다는 동반의 천만 일 때 더 빛이 나는 법이다. 그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다시 이런 식이라면 독립영화, 예술영화, 작은 영화들은 더욱 더 숨이 막힐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면 그 상처의 골이 깊어지고 결국엔 비상업영화들은 궤멸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다. 어떤 저널에서 이번 ‘범죄도시 2’의 천만 흥행을 두고 ‘보복관람’이라는 표현을 쓴 것에 깜짝 놀랐다. 이번 대선은 증오의 선거, 보복의 가치가 제1의 의미로 떠올랐고 그게 지금 정부의 탄생을 가져오게 하는 요인이었다. 선보다는 악이었다. 그렇다면 ‘범죄 2’의 흥행은 꽤나 시대적, 정치적 코드를 담고 있는 셈이다. 어째 불안 불안하다. 대통령이 빵을 사러 다니며 대대적으로 교통 통제를 한다고 한다. 대통령 부부가 박찬욱 감독을 비롯해 배우 송강호와 박해일, 영화계 원로 김동호 옹(翁), 박기용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등을 용산 청사 잔디밭으로 불러 만찬을 즐겼다고 한다. 송강호와 윤석열 대통령이 악수를 나눌 때 부동자세로 서있는 박해일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어째, 다들, 불안 불안하다.
학교에 떠도는 풍문 중에 ‘신도시 학교는 구도심 학교보다 학교 폭력 위원회가 훨씬 자주 열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유치원 시절부터 한곳에 살아서 학부모들끼리 안면이 있거나 아이들끼리 친분이 있는 경우라면 학교폭력 위원회까지 가지 않고 해결될 사안인데, 신도시에서는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부모도 아이도 낯선 상태라 민감하게 대응하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 신도시 학교와 구도심 학교의 학폭위 개최 건수를 통계로 확인하지 못해서 단순한 풍문인지 사실인지 모르지만, 교사들이 체감하는 횟수는 확실히 신도시 쪽이 많은 듯하다. 교사들이 이용하는 커뮤니티에서 신도시에서 학폭 담당 업무를 몇 년 동안 연달아서 맡으면 과로사한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나오는 걸 보면 그렇다. 새로운 곳에 와서 학생과 학부모들이 낯설고 예민한 게 사실이라면 학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