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취재 때문에 나태주 시인을 만났는데 ‘어떤 존재가 시인이 되는가. 시 없이 무탈하게 사는 삶, 지옥을 살더라도 시 쓰는 삶 중 택하라면 기꺼이 후 선택을 하는 자’라는 말을 들었다. ‘좋은 시를 쓰려면 지옥을 살아봐야 한다’는 말로도 들렸다. 실제 문인, 예술가 중 오체투지하듯 산 이들 가운데 ‘문학과 예술의 소재, 성찰이 삶의 지옥에서 빚진 게 많아 통과의례라 생각한다’ 라거나 ‘다시 태어나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같은 길을 가겠다’고 말하는 예술가를 많이 만났다. 그들처럼 예술의 피와 끼가 없는 나는 ‘도대체 예술이 무엇이기에 지옥마저 껴안는가’라는 의문을 더하곤 했다. 스탄 게츠(Stan Gets 1927-1991)를 소개하려고 꺼낸 이야기다. 브라질 보사노바 음악을 이야기할 때 작곡자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tonio Carlos Jo..
8·15 광복 76돌이 지났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에 따르면 한국이 1990년 이후 30년 사이에 주요 경제 지표에서 일본을 넘어섰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국가경쟁력에서 한국과 일본은 1995년 각각 26위와 4위였는데 지난해는 23위, 34위로 한국이 역전했다. S&P 등 3대 국제신용평가기관의 신용등급도 일본보다 높다. 또 유엔산업개발기구(UNIDO)의 제조업 경쟁력 지수(CIP)에서 1990년 한국과 일본이 각각 17위, 2위였는데 2018년엔 한국이 3위, 일본은 5위가 됐다. 한국과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1990년 각각 17위, 2위에서 2020년엔 10위와 3위로 격차가 좁혀졌다. 반면에 기초과학·원천기술 분야에서는 여전히 거리가 있다. 2020년 글로벌 연구개발(R&D) 1000대 투자기업 수에서 일본은 한국보다 5배 이상 더 많다. 소..
지난 11일 저녁 여권 대선경선후보 6인이 3차 TV토론을 벌였다. 이재명 후보가 지난 8월 8일 여권 후보자간의 네거티브를 중단하고 캠프간의 소통채널을 마련하자고 제안한 후 진행된 첫 토론회였다. 백제논란에서 인성시비, 경기도 지사직 유지문제, 탄핵찬성, 조국사태 방조, 삼부토건 비리 연루설 등으로 이어진 이낙연 캠프와 이재명 진영의 날 선 공방은 ‘명락대전’이라 부를 정도로 과열된 면이 있다. 주류언론은 양 캠프의 갈등을 부추겨 ‘명락공멸’ 분위기 조성에 적극 나서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는 ‘배설물 같은 말’을 인용해 기사를 쓰는 언론사들을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3차 TV토론회에서 경선후보들은 상대적으로 뭔가를 ‘자제’하며 후보자의 과거 발언과 기본정책에 대한 공방에 치중하는 모습이었다. 인신공격과 같은 네거티브..
국민의힘 대선 경선이 오는 30일 후보 등록과 함께 본격 개막된다. 하지만 시작전부터 당내 파열음이 도를 넘고 있다. 무엇보다 이준석 대표와 윤석열 전 검찰총장 사이의 갈등이 점입가경으로 치달으며 벌써부터 대선 가도에 빨간불이 켜진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이 대표 부재중 윤 전 총장의 전격 입당과 이후 당 공식 행사 불참 등이 ‘대표 패싱’ 논란으로 이어진 두 사람의 관계가 이번에는 경선준비위가 제시한 후보자간 정책토론회를 둘러싸고 충돌했다. 윤석열 캠프 종합상황실의 신지호 총괄부실장이 11일 한 방송에 나와 “당 대표의 결정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헌법과 법률에 근거하지 않은 것은 탄핵도 되고 그런 거 아닌가”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자 이 대표는 “탄핵 얘기까지 꺼내는 것을 보니 계속된 보이콧..
코로나 때문에 1년 반 동안 거의 운동장을 사용하지 못하면서 운동장 곳곳에 초록색 풀이 무성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남자아이 하나가 창밖으로 운동장을 바라보다가 풀을 조금만 더 자라게 두면 천연 잔디구장이 될 거 같다고 좋아했다. 교장 선생님께서 수풀처럼 변해가는 운동장을 보다 못해 가끔 직접 잡초 제거를 하셨지만 사람이 사용하지 않는 공간에서 승자는 이름 모를 잡초였다. 풀들은 여름 햇볕을 받고 더 맹렬하게 자라고 있다. 운동장을 떠올리면 초등학교 때 남자아이들과 축구를 하며 뛰어다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새로 지은 건물에 구색 맞추기 식으로 작게 운동장이 있었는데 그나마 1년 뒤에 별관이 신설되면서 운동장 크기가 더 줄어들었다. 그곳에서 점심시간과 방과 후에 공을 차며 놀았다. 물론 그렇게 놀았던 여학생은 나뿐이었다. 내가 유년 시절 내내 살던 아파트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나와서 성별에 상관없이 어울려 놀았다. 나는 언제나 놀이터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아이들과 놀 때도 있었지만 남자아이들이 하는 축구와 야구 같은 운동을 자연스럽게 함께 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한 여자 친구들이 내 주변에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점심시간에 남자아이들이 운동장 한가운데서 축구를 하는 동안 여자 아이들은 운동장 한쪽의 놀이터에서 술래잡기하거나 그네를 탔다. 체육시간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체육수업이 끝나고 자투리 시간이 남으면 남자아이들은 축구공을 받아서 운동장을 누볐는데 여자아이들은 배구공을 받아 운동장 구석진 곳에 라인을 그려 놓고 피구를 했다. 피구는 공에 맞으면 탈락하는 게임이라 피하려고 애쓰다가 공에 맞으면 아프고 분했던 기억이 있다. 피구 할 때 공에 맞은 기억 안 좋게 남아서 공으로 하는 운동을 싫어하게 된 친구도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초등학교 때가 아니면 격렬한 운동을 경험해볼 기회가 거의 없다. 운동을 좋아했던 나조차도 여자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공을 직접 만질 기회가 거의 사라졌다. 여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중 여고의 점심시간 운동장은 황량한 벌판 그 자체였다. 체육수업이 있었지만 힘도 맥아리도 없이 병든 닭처럼 앉아있는 우리를 보며 체육 선생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했다. 그나마 CA활동으로 배드민턴부에 가입해서 3년 동안 열심히 배드민턴을 친 거로 운동의 구색을 갖췄다. 그마저도 안 했으면 땀 흘릴 일이 전혀 없었을 거다. 어릴 때 운동을 경험해봐야 어른이 되어서도 운동하는 생활체육인의 삶을 살 수 있다. 어린 시절 사교육으로라도 태권도를 오래 배운 사람과 살면서 운동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커서 스포츠를 대하는 태도에 차이가 생긴다. 남자들이 나이 들어서 자연스럽게 조기축구회나 야구단, 농구 같은 스포츠 팀 스포츠를 즐기는 반면에 팀 스포츠를 즐기는 여자 어른은 찾아보기 어렵다. 어릴 때 다양한 종목을 적어도 몇 년 동안은 꾸준히 접해봤어야 그 종목에 재미를 느끼고 어른이 되어서 다시 찾지 않을까. 지금처럼 학교 운동장 양 사이드에 한 쌍의 축구 골대가 세워져 있고 그 옆에 농구 골대가 있거나 없는 모습이라면 여자아이들은 앞으로도 스포츠를 접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 쌍의 축구 골대를 차지하기 위해 남자아이들 사이에도 점심시간에 종종 다툼이 일어나는 판에 여자아이들이 낄 자리는 없다. 운동장 전체를 가로지르는 축구 골대 대신에 우리 학교처럼 운동장이 매우 넓다면 풋살장 규격으로 골포스트를 두 쌍 만들어서 남자, 여자가 따로 이용할 수 있게 지도하거나, 다양한 종목의 코트가 들어서면 아이들 전체가 사용하는 모두의 운동장이 될 수 있을 거다. 지금은 반쪽짜리 운동장이다.
언젠가 친척 어르신 한분이 전화로 건강상담을 하셨다. 증상인 즉. 목이 뻐근하게 아프고 한쪽 팔이 저리고 당기는 것이었다. 체크해봐야 할 검사와 일상에서의 자세와 운동 등 변화가 필요한 것들을 설명드리며 이어진 나의 대답은 내원 치료가 필요한데 먼 거리를 고려하여 근처 한의원에서의 침치료를 권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목이 아프고 팔이 저리는 등의 증상이 침으로 치료가 되냐고 반문하셨다. 약침 등 다양한 침에 대한 안내와 함께 치료효과를 설명하자. 놀라워하시며 지금 이렇게 설명을 들어서 이제야 알게 되었지 정말 지금까지는 몰랐다고 반색을 하셨다. 반면에 몸의 상태가 그렇지 않은데 침만으로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 최근 무릎의 통증으로 내원한 환자의 경우가 있었다. 걷기가 힘든 지경이 되었는데 정형외과의 치료로 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20 도쿄 올림픽이 폐막했다. 코로나 상황과 더불어 어수선한 여론 속에 무관중으로 열린 터라, 이전의 올림픽에 비해 임팩트는 덜하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선수들의 투혼을 보고 있노라면, 올림픽이 가진 상징성과 치열함은 여전하다고 느껴졌다. 세계 각국의 수많은 선수가 다양한 종목에서 경쟁이라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내는 기록과 승패의 이야기는 언제나 가슴 벅차다. 개인적으로 개인전보다는 단체전 및 단체 종목을 더욱 유심히 지켜보는데, 이는 그간 ‘팀(team)’이라는 형태로 그들이 보냈던 시간이 주는 감동이 더욱더 무게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아마 내가 느끼는 매력은 같이 한다는 것의 가치인 듯하다. 10년 전 'Top 밴드'라는 이름의 밴드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KBS 2 TV에서 제작 방송됐다. 당시 각 방송사는..
독일에 귄터 발라프(G.Wallraff)라는 저명한 탐사전문기자가 있다. 1980년대 중반 그는 통상적 취재보도의 한계를 느끼고 본격 탐사취재에 나선다.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 시장의 패권을 틀어쥐기 시작하던 그 시절, 인간은 존중받지 못한 채 이윤과 효율의 극대화 논리에 뒷전으로 밀려난다. 독일은 ‘라인 강의 기적’이라는 놀라운 경제 성장으로 전 세계에 명성을 떨쳤지만 그가 주목한 것은 그 그늘 아래서 신음하는 이주 노동자들이 겪는 극심한 고통이었다. 이들에 대한 인종 차별과 착취가 만연한 것이 그로 하여금 탐사보도 전문기자의 외길을 걷게 한 셈이다. 당시 독일은 이른바 ‘3D 업종’에 종사할 자국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였다. 3D 현장은 터키와 그리스 등 빈국 출신 불법 입국자들의 몫이 되었다. 산업 폐기물과 방사능 물질 등 독일인이 기피..
제1금융을 이용할 수 없는 형편에 처한 ‘금융 약자’ 3610명에게 돈을 빌려주고 법정이자 24%를 초과한 이자를 받아 온 불법 대부업 조직이 적발됐다. 한 제보자의 신고에 의해서다. 이 제보자는 ‘경기도 공익제보 핫라인’에 서민 대상으로 고금리 이자를 받고 불법 채권 추심을 일삼는 불법 대부업 조직이 있음을 알렸다. 이를 토대로 경기도 공정특별사법경찰단이 수사를 진행했는데 연 최고 3만 1000%의 고금리 불법 대부행위를 일삼았음이 드러났다. 도 특사경은 이들을 검찰에 송치했고 조직원 7명은 징역 4월~징역 1년 6월형을 받았다. 경기도는 2019년부터 공익·부패신고 전담 창구인 ‘경기도 공익제보 핫라인’을 설치·운영하고 있다. 불법 사금융 조직을 제보한 공익제보자에게는 신고 포상금이 지급되는데, 이번 신고자에게는 3090만 원이 지급된..
도쿄올림픽에서 우리 국민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선수는 단연 김연경이었다. 비록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여자배구 주장으로 경기를 이끈 ‘식빵 언니’ 김연경의 리더십은 우리에게 금메달로도 대체할 수 없는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아무도 그녀의 ‘식빵’을 나무라지 않았다. 2016년 리우세계 대회 한-일전 경기 때 공격에 실패한 그녀가 돌아서며 내뱉은 ‘식빵’에는 자탄과 함께 다시 실패하지 않겠다는 간절한 다짐이 담겼고, 그 상황과 그녀의 심경에 우리가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언어는 상황과 분리되지 않는다. 인간의 말과 글은 내용과 함께 감정을 전달하며, 그 내용과 감정은 언제나 상황에 결부되어 있다. 한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려면 그 언어가 발화한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반드시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거전이 달아오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