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천수가 팬티를 어떻게 끌어 내렸니?” 죽고 싶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리는 일 자체가 고역인데, 형사는 서류파일을 들고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한 시간째 꼬치꼬치 이상한 것까지 거듭 캐물었다. 윤희는 지옥만큼이나 고약한 면접시험장에 앉은 것 같은 기분으로 형사를 마주하고 있었다. 박태호의 집으로 찾아가서 한바탕 난리를 치고 유리창 몇 개를 더 때려 부순 아버지는 이번에는 경찰서를 찾아가 왜 박천수를 잡아 처넣지 않느냐고 고래고래 호통을 쳤다. 그래서였는지 다음 날 오전에 동천경찰서 조사과 최 형사라는 사람이 서류파일을 들고 병실로 찾아와 피해자 신문이라는 걸 시작했다. 중년의 형사는 질문 자체를 조금 미안해는 것 같기는 했다. 그러면서도 윤희에게 아주 구체적인 답변을 들으려고 했다. 조사는 한 가지를 물어서 답변을 들으면 곧바로 받아적고, 다시 묻고 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윤희가 답변을 머뭇거리자 형사는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채근했다. “어쩔 수 없어. 이게 우리가 하는 조사 절차야. 현장 상황을 세세하게 정리해야 하니까 이렇게 물을 수밖에. …그래, 박천수가 팬티를 어떻게 끌어 내렸냐?” “그냥… 팬티 끈을 움켜쥐고 아래로 확……
지지대를 떼어내며 /장병천 마침내 그대는 길을 건너고 나는 지상을 떠멘다 그대가 내려놓는 세상은 가볍기만 해서 바람 없이도 수만 번도 날 수 있을 테고 너끈히 부러진 날개를 고쳐 메고 다시 가장 높은 하늘 한 바퀴쯤 넉넉히 돌 것이다 바라만 보던 중턱쯤에 키를 맞출 것이다 영영 결별을 선언할 것이리라 너를 묶었던 내 마음도 떨어져 나갈 것이리라 묶인 자리 패인 상처들도 제 자리를 잡아가는데 나는 도무지 아침이 멀기만 하다 그대의 품에서 청의가 빛날 때 낮은 곳에서 부르는 내 노래는 싱그럽다 하나 둘 넘어졌던 걸음들이 일어설 때 나는 자리를 비켜줘야 할 것이리라 주섬주섬 앉은 자리를 치워줘야 할 것이다 함께 휘거나 꺾이거나 넘어졌던 마음들도 ■ 장병천 1959년 충북 괴산출생, ‘창조문학’, ‘동양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옴. 한국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 ‘비존재’ 동인, 충남문학상, 창조문학상 수상, 시집 ‘한번은 나부끼는 바람이고 싶다’ 외 5권, 충남 아산 설화고등학교 교사.
화분 연대기 /안명옥 화분 하나 오래 놓였던 자리 자국이 남아 있다 새 화분을 들이고 한 구석으로 밀려났던 화분 내버려둔 시간 동안 저 홀로 견디며 큰 잎사귀에 가려져 그늘을 품고 산 화분 이제 때가 된 거야 음악처럼 중얼거리며 들어보니 화분이 가벼워졌다 힘들던 시간 네가 없었더라면 집은 사막과 같았을 거야 누군가를 기다리던 뒷모습을 닮은 한 존재가 그렇게 떠나갔다 꽃 피우던 시절을 기억하는 한 우린 늙지 않는 것 자꾸 베란다가 허전해 서성거린다 지는 잎들이 바닥에 흥건하다 ■ 안명옥 1964년 화성 출생.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졸업. ‘시와시학’ 제1회 전국 신춘문예, 시집으로 ‘칼’과 ‘뜨거운 자작나무숲’ ‘콤한 호흡’ 출간. 서사시집 ‘소서노召西奴’, 장편 서사시집 ‘나, 진성은 신라의 왕이다’, 창작동화 ‘강감찬과 납작코 오빛나’, 동화 ‘금방울전’, ‘파한집과 보한집’, 역사동화 ‘고려사’ 등이 있고 성균문학상, 바움문학상, 만해시인상, 김구용문학상 등 수상.
복습(復習) /이복현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파랗다. 마음껏 낙서를 하고 싶은 하늘 노인학교 다니시는 어머니가 마당에 나와 서서 손가락 끝으로 빈 하늘에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다. 어머니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하늘에 상상의 구름글자 한 자씩 생겨난다. 가갸 거 겨 고 교 구 규 … 줄도 열도 안 맞게 삐뚤빼뚤 빈 하늘을 채우는 꿈의 글자들 “어머니, 지금 뭐 하세요?” “으응, 어제 배운 글자를 복습하는 겨, 안 까먹으려고 하늘에다 자꾸만 써보는 것이지” “봐라, 하늘이 저렇게 파란 칠판 같잖여?” ■ 이복현 1953년 전남 순천 생, 동국대행정대학원(석사) 및 서울대법학연구소 수료.1994년 중앙일보, 1995년 시조시학을 통해 데뷔, 1999년 대산창작기금(시 부문)을 받고, 첫 시집 ‘따뜻한 사랑 한 그릇’ 외 1권의 작품집을 냄. 등단 후 중앙일보, 문학과의식, 문학사상, 현대시, 시평, 유심, 시와경계, 작가마루 등 약 30여 일간지 및 문예지에 시와 시조를 꾸준히 발표하고 있음. 현재 법무사로 일하며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 이사로 활동, 한국시인협회(상임위원), 한국작가회의 회원.
미황사, 달마고도 /김정조 달마가 바위에 앉아 햇볕 쪼였을 달마고도를 따라 걷습니다 오래전 제 몸을 이탈한 마음 하나 미황사, 바위 능선에 머물고 있어 잘 있는지, 만나러 왔습니다 달마산에 올라, 바다를 보며 아픈 무기력에 누워봅니다 길 잃은 아이처럼 헤매기도 합니다 땅끝 마을까지 와서 최선을 다하며 살았냐고 제 자신에게 물어 봅니다 ■ 김정조 1954년 대전출생, 2005 경기문학 신인상, 2011 문학나무 신인상, 2017 한국미소문학대상, 2018 문학나무숲 시인상 수상. 한국시인협회·한국문인협회 회원, 시집 ‘따스한 혹한’
너 /이노나 바람이 몹시 불었다 나뭇가지가 휘청였다 햇살이 따라 흔들렸다 깃발은 위로 펄럭였다 구름이 빠르게 흩어졌다 어떤 것도 머무르지 않았다 어렵게 태어난 꽃송이가 아뜩히 날리고 있었다 그 위로 바람이 다시 불었다 그리고 끈질기게 꿈틀대는 숨을 보았다 바로, 여기 봄 깊은 뿌리로 돋는 네가 있었다 ■ 이노나 1969년 경남 마산 출생. 경북대학교 사법학과·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문창과 졸업. ‘연인’에 시 부문 등단(2012), ‘K-스토리’ 소설 부문 등단(2017). 시집 ‘마법 가게’.
“아악! 왜 이래요, 사장님! 아악! …사람 살려!” 마지막으로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가운을 막 교복으로 갈아입고 난 뒤였다. 탈의실로 쓰고 있는 주방 옆 작은 창고에서 나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잠시 황홀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 무렵, 카페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누군가 뛰어들어와 윤희에게 달려들었다. 굵은 뿔테 안경을 쓴 남자…박천수. 작은 도시 동천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시내 한복판 번화가에서 가장 큰 건물인 이 그랜드 빌딩 건물주의 아들이자 윤희가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2층 카페 아프리카의 대표이기도 했다. 박 사장은 일이 있다면서 초저녁에 일찍 카페를 나갔었다. 문을 닫으려는 가게에 다시 들어서는 박천수를 보자 윤희는 ‘뭐 잊어버리고 간 것 있으세요, 사장님?’하고 물어보려고 입을 막 열려는 참이었는데, 다짜고짜 와락 끌어안고 홀 바닥에 구른 것이다. 있는 힘을 다해 박 사장을 떠밀면서 윤희는 다시 한번 외쳤다. “사장님! 아니, 아저씨! 이러지 마세요! 대체 왜 이래요?” 그러자 박천수가 윤희의 교복 상의를 거칠게 벗겨 내렸다. 투두둑 하고 단추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박천수가 덜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윤희야, 제발 좀 가만히…
먼 곳 /박재화 낙타는 왜 석양으로 나아가는가 뒷걸음질 없이 고개를 추켜들고 눈 먼 세상 한복판을 묵묵히 가는가 무한 절대의 안팎을 품은 낙타의 등에 가만히 깃드는 달빛 서늘한 시간을 반추하며 나아가는 모래의 오롯한 혹 적막이 알을 품는다 낙타는 왜 다시 석양 속으로 들어가는가 하염없이 가뭇없이 ■ 박재화 1951년 충북에서 출생. 대전고, 성균관대·성균관대학원 졸업. ‘현대문학’ 2회 추천 완료로 등단. 시집 ‘도시(都市)의 말’, ‘우리 깊은 세상’, ‘전갈의 노래’, ‘먼지가 아름답다’ 등이 있음. 기독교문학상, 성균문학상, 다산금융상(茶山金融人賞) 등 수상.
아침 기다림 /김종섭 겨울 맷새가 눈 속에 부리를 문지르고 빈 하늘이 사람을 기다리는 아침은 신선하다 빈 하늘을 받드는 맨살의 나무들이 한데 어울려 기다리는 시간은 매운 겨울바람처럼 맑고 신선하다. 기억처럼 피어오르는 다향과 함께 음악을 듣는다 목관의 선율을 따라 아침 햇살로 다가오는 그대 겨울 손님은 눈부시다 이윽고 안부를 나누고 일어설 우리의 시간은 또 노을처럼 소리없이 떠나갈 것이지만 지금 이 순간의 창밖은 아름답다 저 잔설에 떨어지는 아침 햇살 어쩌면 그대 아롱진 눈망울인양 반짝이고 겨울 맷새가 눈 속에 부리를 문지르고 있음으로 하루 기다림의 시간은 언제나 따뜻하다. ■ 김종섭 1946년 경북 포항 출생, 중앙대 및 영남대대학원 졸업. ‘월간문학’ 시 당선으로 등단. 시집 ‘환상조’등 12권, 칼럼집 ‘동백과 산수유 사이’, 시감상집 ‘시의 오솔길을 따라’, 평론집 ‘서정의 미학’등. 윤동주문학상, 조연현문학상, 경상북도문화상, 여산문학상 등 수상. 한국문협 부이사장, 경북문협 및 경주문협 회장 역임.
밤 하늘에는 별강이 흐르고 /김유제 날마다 별밤은 달빛을 안고 까치집 개울가에서 그네를 탄다 앞산 숲은 반딧불 축제 물고기 잡이 쪽대를 털면 별들이 한바탕 춤을 추었고 전설품은 바위 이야기 천길바위, 부엉새바위, 천장바위, 용바위가 비를 부르면 동네마다 풍년이 온다 산신령 무대의 메아리 산은 보물산이라 청석광의 화석을 찾고 폐광 탐방길을 더듬다가 돌담 숯가마 터에서는 가난을 구워냈고 고려청자 요지 계곡이 쉼을 부른다 미산 막걸리 몇사발 마시고 자랑 폭탄을 터트렸다 파편은 새숲으로 튀었고 새떼들이 일어나 확성기로 조잘대며 아침을 끓이기 시작했다. ■ 김유제 1961년 보령 미산출생, 문예사조를 통해 문단에 나옴. 시집 ‘서울역의 봄’, ‘아침을 여는 여자’ 마을공동체시집 ‘봉성리 사람들’. 현재 한국문협 보령지부회장, 문학기념물조성위원장, 국제PEN한국본부이사, 한국문협 충남지회이사, 충남시인협회이사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