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적 생활을 보내는 사람에게 육체적 욕망의 만족이 행복인 것처럼, 자신의 영성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기부정은 바로 행복이다. 남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은 선인이다. 만약 그가 선을 행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다면 그는 더욱더 선인이다. 나아가서 그가 선을 행한 상대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면 그는 최고의 선에 도달한 것이며, 그 선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가 그것을 계속함으로써 받는 고뇌의 증대뿐이다. 또 만약 그가 그것 때문에 죽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최고의 완성에 도달한 것이 된다. (라 브뤼에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예수) 아집은 영혼의 감옥이다. 감옥이 우리의 육체의 자유를 빼앗는 것처럼 아집은 반드시 우리의 행복을 빼앗는다. (류시 말로리) 남을 위해 사는 것이 비로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얼핏 이상하게 들릴지
시장과 시의원 선거에 입후보한 예비 후보들의 문자가 넘쳐나고 있지만 시민들에게 외면받기 일쑤다. 국회의원·대통령 선거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번 지방 선거도 이전처럼 주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치러질 것이다. 기초자치단체장이나 기초의원들의 막강한 힘을 감안하면 열기 없는 선거가 낯설 뿐 아니라 시민들이 무책임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기초자치단체는 시민들의 일상생활 그 자체를 관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통과 환경, 복지, 문화, 건축 등 눈 뜨면 마주치는 모든 것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기초자치단체장의 권한은 상상을 초월한다. 특히 건축 등 각종 인허가권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 권한이다. 지난 2011년 녹지 변경 권한 등을 기초정부로 이전한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지자체의 힘은 더욱 막강해졌다. 그런데 이 권한은 두 얼굴의 야누스다. 중앙의 권한을 지역으로 분산했다는 점에서는 민주주의의 진전임에 틀림없다. 구소련의 멸망 원인 중 하나로 중앙과 지역의 권한 분담이 이뤄지지 않은 점 등 비민주주의를 들곤 하는데 이런 점에서 지방자치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권한이 기초자치단체장의…
올해 4월 20일은 정부에서 제정한 제42회 장애인의 날이다. 하지만 장애인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활동하는 활동가들에게는 제 20회 장애 차별 철폐의 날이다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의 날 행사에 와서 "장애인의 날을 축하드립니다"라고 말한다 무엇을 축하한다는 말인지. 장애를 축하한다는 것인지, 장애인의 날을 축하한다는 것인지, 도통 애매모호하다. '장애인의 날'하면 장애인들을 모아 놓고 행사하고 선물주고 음식대접하는 날인줄 아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이제 장애인의 날도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이전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먹기 살기 힘들고 다들어렵다는 핑계로 장애를 돌봄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그리고 장애인은 도와 주고 긍휼히 여겨야 하는 존재들로 인식했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고 21세기 대한민국 은 선진 7개국에 이름을 올릴만큼 발전하고 성장했다. 그러면 장애를 대하는 장애·비장애인들의 의식도 그만큼 성장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현실은 결단코 아니다 다들 많이 좋아졌다고는 말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단적인 예로 대한민국을 움직인다는 거대야당의 당대표가 장애인을 바라보는 모습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천부 인권을 지니고 있
2년 1개월 동안 이어졌던 사회적 거리두기가 전면 해제되면서 대한민국의 ‘시민정신’ 역량이 오롯이 시험대에 올랐다. 이미 서구 몇몇 나라의 실패 사례에서 보듯이 무절제한 행동은 금물이다. 통제된 삶에서 비로소 온전히 해방된 희열을 자칫 방종으로 어그러지게 해서는 안 된다. 과도한 일탈과 방심은 감당 못 할 고통을 되불러올 수도 있음을 절대로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높은 ‘국민 의식’ 수준만이 팬데믹 재연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예방할 수 있다. 정부는 사적 모임 인원과 다중이용시설 영업시간 제한 등을 모두 해제해 오랜 기간 국민의 일상을 옥죄던 족쇄를 풀었다. 299명까지 허용하던 행사와 집회, 70%까지 가능하던 종교시설 인원 제한도 해제했다. 25일부터는 4주 이행 기간을 거쳐 코로나19를 1급 감염병에서 독감처럼 2급 감염병으로 하향 조절할 예정이다. 마스크 착용 의무는 그 실효성을 포기할 수 없어서 당분간 실내외를 막론하고 유지하기로 했다. 온 국민이 겪어온 불편과 상공인들의 막심한 피해를 생각하면 이번 거리두기 해제는 큰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최근 일주일간 일 평균 확진자가 16만 명으로 줄었고 감염 재생산율도 1.29에서 0.82로 낮아졌다. 거리두
봄은 꽃의 축제이다. 약속하듯 일시에 피었다가 밤새 우수수 지고, 나뭇가지에는 파릇하게 새싹이 돋아난다. 죽고 사는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계절, 4월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달이기도 하다. 교회에서는 이날에 감사예배를 드리고 계란이나 떡을 나눈다. 고향 북쪽은 어떠한가. 남쪽의 봄과는 의미가 다르다. 꽃의 축제가 아니라 수령의 탄생을 기념하는 4월의 봄 축제가 열린다. 모든 행사를 김일성의 생일인 4월 15일에 맞추어 진행한다. 국외 예술단을 초청해 예술축전 행사도 아주 크게 한다. 부모님 생신은 잊고 있어도 절대 잊어서는 아니되는 수령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평양은 분주하게 움직인다. 생필품이 부족한 시기 이날에 맞추어 교복이나 당과류를 공급받으면 수령의 은덕이라고 칭송했다. 지방도 이날에는 거리를 청결하게하고 울긋불긋 꽃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다. 국가는 곧 수령이며 수령이 태어난 날을 ‘태양절’이라 한다. 그러니 4월은 곧 수령의 봄이며 죽은 자를 기억하고 부활하고자하는 봄이다. 전문가들은 이날에 맞추어 북쪽에서 미사일을 쏠 것이라 예측한다. 요즘은 참으로 걱정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민간인이 희생되고 수많은 피난민 행렬을 볼 때면 고향을
고뇌의 고귀함을 모르는 사람은 아직 이성적 생활, 즉 참된 인생을 시작하지 않은 사람이다. 밤의 어둠 속에 별이 보이듯, 고뇌 속에서만 인생의 의미가 보이는 법이다. (소로) 질병 수족을 잃는 것, 끔찍한 환멸, 재산의 상실, 사랑하는 이와 이별이니 하는 이 모든 것은 처음에는 돌이킬 수 없는 불행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그러한 상실 속에 숨어 있는 강인한 치유력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에머슨) 운명이라는 것 자체가 실제로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보다도, 인간이 그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훔볼트) 작은 고통은 우리를 화나게 하지만, 커다란 고통은 우리를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게 한다. 금이 간 종은 탁한 소리를 내지만, 그것을 아예 두 동강 내버리면 다시 맑은 소리를 낸다. (리히테르) 혁명(革命)의 명은 곧 하늘의 말씀이다. 하늘 말씀이 곧 숨·목숨·생명이다. 말씀을 새롭게 한다 함은 숨을 고쳐 쉼, 새로 마심이다. 혁명이라면 사람 죽이고 불 놓고 정권을 빼앗아 쥐는 것으로만 알지만, 그것은 아주 껍데기 끄트머리만 보는 소리고, 즉 참뜻을 말하면 혁명이란 숨을 새로 쉬는 일, 즉 종교적 체험을 다시 하는 일이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는 옛말이 있지요. ‘입은 비뚤어져도 주라(朱螺)는 바로 불어라’도 같은 뜻이지요. 사람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워낙 이치에 닿지 않는 고약한 말들을 많이 지어내니 이를 경계하자고 내놓은 교훈일 거예요. 비뚤어진 입으로도 바른말을 하고 나발도 바로 부는데, 어찌 멀쩡한 입으로 곡변(曲辯)을 늘어놓는 사람이 이리 많으냐는 탄식의 의미도 보이는군요. 요즘은 뉴스마다 시사평론가들이 따라붙네요. 개 중에는 언론계에 오래 활약하여 전문성을 갖춘 이들도 있지만, 소위 기계적인 균형을 맞추려고 등장시킨 정당 소속 ‘말꾼’들도 수두룩하지요. 그런데 어떤 경우든, 지식인이랍시고 방송 프로그램에 나온 멀쩡한 양반들이 하나같이 현란한 말재주로 ‘저질 청백전’을 벌이는 모습이라니 거저 혀를 내두르게 되는군요. 신기한 것은 그 어떤 주제를 놓고 토론을 해도 자기 편 주장에 꿰맞추어 편견투성이 궤변을 지어내는 솜씨들이 하나같이 기가 막히는 수준이라는 사실이에요. 어느 쪽이라고 할 것도 없이 별별 논리들을 다 동원하여 읊어대는 변명과 반박이 멀쩡한 사람 홀리기에 딱 좋은 논법들이네요. 조금만 맑은 귀로 들어보면 영락없이 교묘한 ‘궤변’이거나 불
요사이 청와대 청원 게시판의 존속 여부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청원 게시판도 사라질 것이다, 아니다 청원 게시판의 효용성은 있으니 게시판을 없앴다가는 불통의 이미지만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등등의 주장들이 그것이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의 모델은 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만든 “We the People”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해당 사이트는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폐쇄됐다. 이런 미국의 사례를 통해 보건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청원 게시판이 사라질 가능성은 있다. 그런데 무조건 폐지하기보다는 해당 게시판의 장단점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그 장점을 보자면 이렇다. 우리가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을 경우가 있게 마련이다. 이런 경우가 발생했을 때, 하소연을 하거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대상이 마땅치 않으면 마음속의 상처는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소연할 대상, 억울함을 호소할 대상이 있다면, 문제 해결 가능성과는 별개로 상당 부분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다. 자신의 억울함 해소를 위해 뭔가를 했다는 심적 위안을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누군가에게 자신의 처지를 말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