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눌타리 꽃 그 최초의 바다 /류기봉 오늘을 분질러 버렸다 미안하다 기약은 못하지만 영농일지는 이것으로 끝 하눌타리 꽃 그 최초의 바다 ■ 류기봉 1965년 경기도 가평 출생. 199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해 시집 『장현리 포도밭』, 『자주 내리는 비는 소녀이빨처럼 희다』, 『포도 눈물』, 산문집 『포도밭 편지』가 있다. 2006년 흙살리기 참여연대에서 수여하는 흙사랑 생명사랑상을 수상했으며 1998년부터 2016년까지 ‘포도밭 예술제’를 개최했다.
구두가 붉다 /김광순 발아래 부려놓고 반응달 빗금치어 저 많은 문서 사이로 못 박힌 나를 뽑아 손수건 꽃잎 하나가 업무일지 덮었네 구석진 책상 위에 말 없는 작은 명패 이십오 년 종종걸음 뉘엿이 산등 타고 근로자 헤진 구두가 오솔길을 내려와 채마전 떠날까봐, 의자는 삐걱대고 구두끈 삭았어도 마음 먼저 잇닿아 다수의 젖은 눈에서 백량금이 붉더라. ■ 김광순 1960년 충남 논산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해1988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당선 및 『시조문학』에 추천됐다. 시집『물총새의 달』, 『새는 마흔쯤에 자유롭다』, 『고래가 사는 우체통』, 『달빛 마디를 풀다』가 있으며 한국문화예술진흥기금을 수혜, 대전문학관 기획전시「중견작가전」에 선정됐다. 한국시조작품상, 대전문학상, 한밭시조문학상, 한남문인대상.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이자 대전시조시인협회 회장 엮임, 한국시조시인협회 대전지부장, 오늘의시조시인회의 부의장으로 있다.
나의 시작 /박병두 나의 무덤엔 새벽마다 안개가 덮이곤 하였다 뒤늦게 선택한 무덤 한두 개쯤은 별을 갖고도 싶었지만 무덤을 비추던 내가 별이라고 여겼던 것들은 금세 스러져 버리곤 했다 햇빛이 안개를 말릴 때까지 나는 곧잘 안개 속에 서 있곤 하였다 무덤 밖 어둠을 둥둥 떠 다니던 불빛이 신문배달원의 오토바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가슴엔 무엇이 떠 다니는지 주목했지만 그것들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이내 속살을 숨기곤 했다 안개에 숨어 슬그머니 지나가버린 계절들과 미성숙 몇 개를 여기에 내려놓고 나는 이제, 무덤을 열고 출발하려 한다 무덤 밖은 더욱 뿌연 안개로 덮인 더 큰 무덤일 뿐이라고 던져진 조간에는 씌어 있지만 내 속에 무엇이 떠 다니는지 내내 알아내기 어렵겠지만 잘 있거라 내려놓은 것들이여 어느 길에서 해후하게 되더라도 악수하지 않을 예정이니 묵묵히 지나가주기 바란다. ■ 박병두 1964년 전남 해남 출생. 한신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해 1985년 ‘T.V문학관’ 대본을 쓰면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월간문학』, 『수필문학』, 『현대시학』, 『열린시학』을 통해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해남 가는 길』 외 3권, 수필집 『흔들려도, 당신은 꽃』 외 3권
낮달 /안준하 당신이기에 시리도록 사랑하고 가슴 아파했다 하얗게 살아 동심원처럼 퍼져 가는 인연 질기고도 길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빛바랜 낮달 참 곱기도 하다 ■ 안준하 1966년 강원도 평창 출생. 전 강원관광대학교 겸임교수, 현 세경대, 문경대 겸임교수로 있다. 1996년 월간 『한국시』로 등단해 한국문인협회 충주지부, 한국자유시인 협회, 한국시인협회 회원으로 있다.
사계리 /고주희 우리였던 일들이 이곳에 있다 내가 허리 숙여 조개껍질을 줍듯 언젠가 당신은 아픈 한 계절을 수습하러 조용히 다녀갈지도 모르는 일 당신, 아직 거기인가요? 무대조명처럼 일제히 불 켜진 한치 배들 사이로 눈부시게 출렁이던 바다 수평선을 향해 달려가던 맨발과 가슴 속 가장 먼 별을 당겨 솨 솨 파도 소리를 내던 두 사람의 눈빛 섬이라는 징후는 한쪽이 먼저 출발하고 남은 한쪽은 막 정박한 배의 운명으로 기울어지는 것 잠이 빠져나간 자리에 선명한 물이 들기 전까지만 유효하고 안전한 발자국들 사계의 여름쯤에서 마음을 돌린 일이 색색의 질문으로 쌓여가는 지층일 때 대답인 줄도 모르고 잠겨가던 밤의 노래들 파도 없이도 젖은 열 개의 발가락으로 당신은 정박지가 된다 모르는 섬이 매일 밤 다녀간다 ■ 고주희 1976년 제주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해 2015년 《시와 표현》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우리가 견딘 모든 것들이 사랑이라면』 등이 있다.
놀이터에 모인 아이들 - 파티 플레이 혈맹원 모집 /김승일 나는 폭력에 질질 끌려가지 않을 거야 나는 소소한 희망과 사랑을 지루해하지 않을 거야 나는 친구를 버리지 않을 거야 나는 끝까지 나를 던질 거야 나는 끝까지 너를 지킬 거야 내가 가진 것들을 기꺼이 포기할 거야 작은 반지를 빼서 해변에 놓을 거야 어른스러워질 거야 시소를 타고 그네를 타듯이 네가 웃을 때까지 네가 다시 안전한 마을로 되돌아갈 때까지 쓰러진 자리에서 촛농 같은 희망을 떨어뜨리지 않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 지도 위에 저장해놓을게 네가 잃어버린 것들을 줍줍줍, 주우며 뒤따라갈게 언젠가는 네가 나를 부활시켜줄 때가 올 거야 내가 크리 맞을 때 내가 죽어가고 있을 때 네가 나를 맨 처음 발견해줄 친구였으면 ■ 김승일 1981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 석사수료. 2007년 『서정시학』 신인상 시부문으로 등단해 시집 『프로메테우스』, 낭송시집 『어른들은 좋은 말만 하는 선한 악마예요』 등이 있다. 스포큰워드 소셜 클럽 <말하는 오후> 운영진으로 활동 중이며 <광흥창 시학교> 시창작 강사로, 용인시 용신중학교 운영위원회 지역위원과 학교폭력근절운동가로 활동 중이다
수리산 변산바람꽃을 아시나요 요한이에게 /김주혜 찬바람이 불어야 피는 꽃을 아시나요? 수리산 계곡에 눈꽃이 사라지고 겨우내 감싸주던 바위가 눈물을 흘리면 땅에 코를 박고 봐야만 하는 애처로운 꽃. 행여 남의 눈에 띌까 바람 따라 날아와 하늘색 술을 단 상여처럼 하얀 꽃 눈짓 한 번에도 숨통이 끊어지는 가녀린 꽃. 온몸이 마비 된 채 태어나 아홉 살에 “엄 마” 하고 입을 떼고, 다음 날 “아 퍼” 하고 기쁨 주더니 그 다음 날 “엄 마, 아 퍼” 하며 하늘꽃이 된 요한이. 새파랗게 기다리다 단명하는 수리산 변산바람꽃을 굳이 보시려면 발밑을 조심하세요. ■ 김주혜 서울 출생. 세종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해 1990년 [민족과 문학] 시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시집 『때때로 산이 되어』, 『아버지별』, 『연꽃마을 별똥별』을 수상했다. 한국시인협회, 가톨릭문인회 회원이며 ‘시인들이 뽑은 시인상’을 수상했다.
깎아지른 비탈에 서 있는 저 손을 잡아 평지로 끌어 올려주고 싶다 통증으로 무뎌진 가지마다 햇빛이 찌르르 잠든 사이 전생이 터널처럼 지나가버리고 세상에 없는 사람을 지나칠 때면 흙의 표정을 읽게 된다 소멸하지 않는 찌르르처럼 어디쯤엔가 뻗은 발등을 밟는 것 같아서 때죽나무오색딱따구리새끼노루귀복수초비자나무산담굼부리돌탑졸참나무참나무죽은비둘기옆마른덤불은 죽음까지 친절한 찌르르찌르르 소리 없는 죽음은 바닥보다 깊고 단단해서 수직 동굴에 돌멩이를 던지자 무심했던 사람에게서 욕설이 튀어 나온다 기어이 절망을 돌아보게 만든 금기의 찌르르라고 가장 힘든 순간 무너지지 않으려고 숨을 참는 돌탑처럼 찌르르 찌르르 종일 말뚝에 매어 있는 왕이메오름이 오름에서 달아나려 애쓴다 ■ 김효선 : 1972년 제주도 서귀포시 출생. 2004년 계간 『리토피아』로 등단해 시집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2018년 아르코 창작기금 수혜, 『시와 경계』 문학상과 『서귀포문학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봄놀이 /양선희 그 사람이 왔다 화분을 안고 화분과 화분에서 핀 꽃 방금 온 바람결 그 사람이 화분을 내려놓은 곳 속속 꽃 돋아난다 꽃이 빛을 끌어당긴다 죽은 색도 살린다 꽃의 생기로 그 사람과 나 찰랑댄다 내 몸 꽃 천지 ■ 양선희 1960년 경남 함양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해 1987년 계간 『문학과 비평』에 시로 등단,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서 당선됐다. 시집 『일기를 구기다』, 『인연에 울다』를 펴냈으며 에세이집 『엄마냄새』, 『힐링커피』, 『커피비경』이 있다.
괄호의 거처 /허은희 가방이 반만 열린 지점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그녀는 당신의 애무가 논리적이라고 했다. 기승전결이 완벽한 그림이라고 했다. 체위를 바꿀 때마다 책장 넘기는 소리. 물을 삼키는 목젖에서 유향 냄새. 당신의 방에 저물지 않는 계단이 있다고 했다. 지퍼의 요철이 한쪽으로 비틀려 있다는 걸 눈치 챈 건 오래전이다. 이젠 가방에 손을 넣을 수가 없다. 절반의 체온이 따로따로 미끄러진다. 두 발을 꺼내야하는데. 그녀가 물었다. 키스 할 때 당신의 혀는 어디에 있나요 ■ 허은희 1966년 인천 출생. 2003년 『시사사』로 등단해 시집 『열한 번째 밤』이 있다. 제28회 인천문학상과 제3회 사사사작품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