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의 수도 리마에는 ‘수치의 장벽’이 있다. 장벽의 길이가 10㎞가 넘는데 3m가 넘는 담 위에는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어 양쪽은 서로 오갈 수 없는 다른 나라처럼 여겨진다. 같은 도시 안에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한쪽은 판자촌이고 다른 한 쪽은 아주 고급 부촌이다. 한쪽은 몇 십억 넘는 넓은 수영장이 딸린 고급 주택들이 즐비하고 한쪽은 금방 쓰러질 듯한 남루한 판자촌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빈민가 사람들에 의해 오염되거나 절도와 약탈 등을 걱정하여 벽을 세운 것일 것이다. 이 경제적인 차이의 편가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며 오늘날에도 되풀이 되고 있는 패악(悖惡) 중의 하나 일 것이다. 오노레 도미에의 ‘삼등열차’와 ‘일등열차’를 보면 이점은 더 확실해진다. ‘삼등열차’는 철저하게 소외된 군상들로 침울하고 의욕을 상실한 침울함만이 지배하고 있음에 반해 ‘일등열차’ 우아함과 여유가 넘쳐흐른다. 경제적인 편가름에 비해 사상에 의한 편가름은 훨씬 무섭고 강렬하게 나타난다. 십자군 전쟁도 대표적이지만 전쟁을 비롯 학살, 감금 등이 난무한다. 좌우의 대립은 한국 사회를 가로지른 가장 끔찍한 형태로 제주 4·3, 한국전쟁, 광주민주항쟁을 거치며 현재까
10여 년 전 러시아 체홉 페스티벌 극장에서 제작한 셰익스피어의 <십이야>가 LG아트홀에서 상연된 적이 있었다. 작품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상연되는 동안 몇 번이나 폭소를 터뜨렸던 기억이 난다. 작품을 보고 난 이후 종종 이 작품을 되새기곤 했는데, 그건 이 작품이 선사했던 후련한 느낌 때문이었다. 몇 쌍의 커플들이 엇갈림을 반복하다 이내 제 짝을 찾아가는 과정이 전형적인 해피엔딩의 스토리이다. 그런데 러시아 체홉 페스티벌이 제작한 <십이야>에서는 러브 스토리에 필수적인 여배우가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출연한 모든 배우가 남성 배우들이었다. 일부 배우들이 여성 분장을 한 후 여성의 역할을 소화했던 것이었다. 동성 간에 이루어지는 사랑 연기가 그 자체로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여성으로 분장한 남자 배우들이 사랑에 빠진 각양각색의 여성들을 얼마나 그럴싸하게 표현했는지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도 동성 배우들끼리의 사랑 연기에는 긴장감이 없어서 바라보기가 편안했다. 그때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켜면 등장하는 허다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에 필자가 피로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셰익스피어의 작
숨어들다 /이위발 전등이 밤을 몰아낸 줄 알았더니 밤은 사람의 가슴으로 숨어들어가 지우기 어려운 어둠이 되었다는 생각 세상의 어둠은 빛 앞에서 소멸이 아니라 보다 은밀한 곳으로 숨어든다는 생각 한 권의 책으로 내 옆에 누워있는 그림자 - 이위발 시집 ‘바람이 머물지 않는 집’ / 천년의시작·2016 밤이면 도시는 어둠을 물리치듯 휘황찬란하다. 그러나 아무도 그 네온의 불빛이 어둠을 몰아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밤이 되면 사람들은 제 가슴속으로 숨어들어 빠져 나오지 않는 홀로 숨 쉬는 어둠이 된다. 사람들의 밤은, 아니 사람들의 어둠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은밀히 살아내는 것이라는 시인의 상상! 완전한 밝음은 오히려 존재를 사라지게 할 지 모른다는 두렵고도 당연한 발견은 결국 어둠은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처럼 옆에 두고 난감한 시간에 자신을 들여다보듯 보게 되는 내게 숨어든 한 권의 책이 아닌가. 오늘도 내 어둠의 책을 펼치고 부끄러운 밝음을 씻어내야겠구나. /김윤환 시인…
지난 16일 경기도의회 로비에서는 작지만 뜻 깊은 행사가 열렸다. 경기도의회 평화경제특별위원회(위원장 장현국)와 개성공단·금강산 재개 범국민운동 경기도본부, 경기개성공단사업협동조합이 마련한 개성공단 입주기업 물품 전시·판매, 사진전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이 생산한 속옷세트, 남·여 신발, 생활용품 세트, 양말세트, 미세먼지 마스크, 참기름 선물세트 등 다양한 제품이 판매 됐다.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제품들은 품질이 우수한데 다가 이날 가격도 저렴해 의원들과 도청 직원, 도청 방문객들은 앞 다투어 제품을 구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개성공단 폐쇄조치로 피해를 본 국내 125개 기업 중 경기도 소재 기업은 41개사다. 서울 다음으로 많다. 영업부문과 협력업체까지 포함하면 도내 수백 개의 기업이 개성공단 폐쇄조치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봐도 된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도의회 장현국 평화경제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개성공단 기업인들에게 힘이 되고, 개성공단이 가지는 의미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행사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특히 서로의 문화차이를 극복하면서 남과 북의 ‘작은 통일’을 이루었던 개성공단의 의미를 널리 알리고
몰라도 해야 하고 알아도 해야 한다. 내년 4월 치러질 제21대 국회의원선거(총선) 예비후보 등록 이야기다. 첫날인 17일까지 선거구 획정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등록을 해야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국회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에 올라있는 공직선거법 개정이 난항에 빠져서다. 더 큰 변수는 지난 4월 선거법과 공수처법 등을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국회 내 폭력사태에 대한 수사 진행이다. ‘스스로 만든 국회선진화법을 스스로가 위반한’ 오만함을 보인 그 사태를 복기(復棋)하면 이렇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바른미래당 채이배 의원 감금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팩스를 통해 접수된 법안 서류 찢기 ▲국회의원끼리 폭력과 충돌 등이 주 내용이다. 이 사태로 자유한국당 의원 60명 등 국회의원 110명이 고소·고발 당했다. 지난 10월 1일 황교안 대표가 피고발인 신분으로 검찰에 기습 출석했다. 이날 그는 모든 책임이 당 대표인 자신에게 있다며 한국당 의원들은 검찰 소환에 응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검찰이 수사진행을 늦추고 있어 해당 의원들은 아직 ‘직’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국회내에서 벌어진 일로 사진과
모든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지엽이 있고 일에는 또한 시작과 끝이 있다. 먼저 할 일과 뒤에 할 바를 알면 그것이 바로 도(道)에 가까운 것이라 하여 학문에 임하는 자세와 인간 만사의 일대규범을 명쾌하게 밝혀준 대학의 한 구절이다. 인간이 영위하는 온갖 일 즉 학문, 정치, 행정, 사업 등 어떠한 일에 종사하든 유익한 일을 하고자 할 때에는 우선 그 근본을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예컨대 인간사회의 윤리에는 효와 충이 근본이 되어야 할 것이고 입신출세를 위해서는 몸을 닦고 덕을 기리는데 소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공직자라면 국민 위주의 행정을 펴야하고, 토목공사를 한다면 그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이 근본이다. 국가 발전을 도모함에는 민과 관의 화합이 근본이고 대중을 거느리는 데도 그들의 마음을 촉탁하는 것이 긴요함과 마찬가지로 모든 살아가는 삶의 이치 가운데 나의 이익이나 의견 못지않게 남의 그것도 존중하는 생활 윤리의 정착을 위해 대화와 타협 그리고 자제와 수용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최근 모 언론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 국민 중 ‘전반적으로 행복’하며 스스로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60%가 넘…
한 장 남은 달력에 국회의사당을 배경으로 가오리연이 하늘거린다. 대립과 싸움으로 얼룩진 역사를 떨쳐내고자 하는 열망인지 꼬리를 흔들어댄다. 되새기고 싶지 않은 한 해로 그 중심에 국회가 있다. 국회의원은 선거를 통해 선출되어 국민의 의견을 대표하기에 책임과 사명감을 가지고 헌법과 법률을 개정하고, 의결과 관련된 일을 하며, 정부 예산안을 심의 확정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이나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고 비준에 대한 동의권을 행사한다. 정부의 예산안에 대한 심의와 수정을 통해 예산안을 확정하며, 국가의 수입과 지출에 대한 결산을 심사한다. 또한 국정감사와 조사를 통해 국정이 법에 따라 잘 운영되고 있는지를 감시하고 잘못된 부분을 적발하여 시정하도록 한다. 이 처럼 임무가 막중함에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상대편을 비방하고 공격하며 싸우느라 국회를 도외시하고 국민을 외면하며 한 해를 보냈다. 민생을 위한 절박한 법안조차 자기들이 원하는 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 끼워 넣고 협상하는 그 행위는 차마 못 볼 일이다. 오죽하면 국회 무용론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그들은 상류층으로 고등교육을 받았기에 예의와 교양을 겸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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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의료를 받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임종사실이 알려지면서 ‘존엄사’에 대한 세인의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더불어 현재 제한적으로 허용되고 있는 ‘안락사’의 범위도 확대해야 한다는 여론도 일고 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와 가치를 지키면서 생을 마감하도록 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회생 가능성이 전혀 없는 임종 과정의 환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환자와 가족 모두 고통도 뒤 따른다. 무의미한 생명 연장을 위해 경제적 지출도 과다하다. 특히 ‘생명존중’이 우선시 되는 바람에 환자의 자기 결정권과 고통에서 벗어날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2018년 지난해 2월 ‘존엄사법’이라 불리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돼 일부 환자들이 가족과 따뜻한 작별을 나누며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을 수 있게 되기는 했다. 법의 주요 골자가 나을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 죽음의 과정을 연장하는 불필요한 행위를 하지 말자는 것 이어서다.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자 올 초 연명의료에 속하는 의학적 시술의 종류를 늘리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연명의료결정법 시행령 일부 개정령안도 마련돼 시행중이다. 이전까지 연명의료에 속하는 시술은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잔디광장 /조은길 잡초 뽑는 여자들이 납작 엎드려 훑고 지나간 시청 앞 잔디광장은 초록 콜타르로 미장을 하 듯 초록으로 만장일치다 만장일치로 주저앉아 있다 날 선 구둣발이 머리통을 마구 짓밟아도 구린 엉덩이로 숨통을 틀어막아도 만장일치로 침묵하고 민장일치로 인내하는 저 무지막지한 평화주의자들 가까이 가서 보니 아무도 들고 일어나지 못하게 서로의 오금을 껴당기고 있다 핏줄이 시퍼렇게 뒤엉켜 안간힘을 쓰고 있다 초록에는 제 살을 꼬집으며 참는 긴긴 설움의 가족사가 있다 - 시집 ‘입으로 쓴 서정시’ / 천년의 시작·2019 햇볕을 가릴 수 있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일렬로 나란히 앉아 잔디에 섞여 있는 풀을 뽑아나가는 여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펼쳐진다. 그들이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면서 풀에 가려져 있던 잔디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때로는 뿌리가 뽑힐 때도 있지만 그 뿌리는 얽히고설켜서 한 몸처럼 되어 있다. 시인은 ‘만장일치로 침묵하고 만장일치로 인내하는 무지막지한 평화주의자들’이라고 말한다. 그 평화가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가는 ‘서로의 오금을 껴당기면서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