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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찰’ 여주 신륵사를 거닐다

남한강변 숨은절경·숲 길 펼쳐진 그 곳…신라 원효대사가 창건
다층석탑·다층전탑 등 국가지정 보물 7점 보유 ‘문화 보물창고’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들면 풍경소리 벗 삼아 가을 속으로…


오대산 줄기가 공작산, 우두산, 고달산을 내달아 남한강에서 꼬리를 적시듯 봉황의 형세로 내려앉은 봉미산(鳳尾山)의 아담한 산세를 벗 삼아 자리한 전통사찰 신륵사(神勒寺).

강원도, 충청도의 물길이 서로 잇닿아 스미고, 섞이고, 휘돌아치는 남한강변에 위치한 신륵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전설(傳說)이 내려오고 있으며, 고려 우왕 2년(1376년)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해졌다.

조선 예종 원년에 세종대왕릉이 여주로 천장(遷葬)되면서 세종대왕의 극락왕생을 비는 원찰로서 보은사란 사액을 받기도 한 신륵사에는 조사당과 다층석탑, 다층전탑 등 국가 지정 보물 7점을 보유한 한국의 보물창고이자 문화 유적지다.
<편집자 주>

신륵사 극락보전(神勒寺極樂寶殿)

극락보전은 고려말 1379년(우왕 5) 나옹(懶翁) 선사 입적 후 중창되었고, 1440년(세종22)에 중수되었다가 1473년(성종4)에 대대적인 중수 내지 신축이 이루어졌다.

현재의 극락보전 건물은 1797년(정조21)에 시작하여 3년만인 1800년에 완공됐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을 주불전으로 하는 절에 비해서 극락전을 주불전으로 하는 절이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웅전 다음으로 많은 법당이며 극락정토왕생의 신앙이 강했음을 읽을 수 있다.

극락보전 정문 바로 안쪽 상부에는 기이한 현판이 있다. 글씨는 ‘천추만세’(千秋萬歲)라 되어 있으며 나옹화상의 글씨라고 구전되고 있다. 이 현판은 이상하게도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을 나타내 흥미롭다.

신륵사 조사당(神勒寺祖師堂)

조사당은 신륵사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고려말 3화상(和尙)이라 불리는 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無學)의 덕을 기리고 또 그들의 법력을 숭모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중앙에 목조(木造)의 나옹화상 독존(獨尊)을, 좌우에 지공과 무학선사의 영정을 봉안했다.

지공은 인도승으로 나옹의 중국 유학시절 스승이며, 나옹은 원나라 황제의 명에 의해 연경의 광제선사 주지로 부임했다가 후에 공민왕의 왕사가 되기도 했다. 무학은 나옹의 법통을 이어 받은 후법제자이며 조선 태조의 왕사이기도 했다.

신륵사 다층석탑神勒寺多層石塔)

다층석탑은 극락보전 바로 앞에 아담하게 서 있는 대리석 석탑으로 매우 아름다운 용과 구름 문양, 연꽃 문양을 남기고 있다.

현재 탑의 위치는 사찰의 구조로 볼 때 처음에 만들어졌던 원래 위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형태를 살펴보면 탑과 지면을 잇는 지대석 네면에 모두 연화문을 조각하였으며, 이 지대석과 본탑의 몸체를 구분하는 갑석에도 역시 연화문을 새겨 넣었다.

탑의 아랫부분 몸체에 섬세한 필치로 조각된 비룡문과 구름무늬는 그 기법이 매우 능숙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신륵사 다층전탑(神勒寺多層塼塔)

사찰 경내 동남쪽 강가의 넓은 바위 위에 웅장한 다층전탑 1기가 있다. 벽돌을 쌓아서 만든 탑이므로 예부터 신륵사를 가리켜 ‘벽절’이라고 한 기록들이 있다.

형태적 측면으로 볼 때 중국탑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당나라 시기에 세워진 장안 흥교사의 원측탑, 규기탑, 현장탑과 같은 형태인 것으로 보아 나옹 화상이 중국을 여행하며 보고 온 그대로를 이곳에 재현해 내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부도(神勒寺普濟尊者石鐘浮屠)

인도의 불탑이 넓은 기단을 이용해 그 위에 복발형의 부도를 안치하는 것에 비해 이 부도는 복발형보다는 돌종(石鐘)을 기단 위에 놓은 형태다.

신라시대 유행하던 팔각원당형 부도 형식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다소 새로운 양식을 가미하면서 매우 장식적이고 화려하게 조성돼 왔다.

지상에 넓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부도를 안치했다. 묘역 전면에 얇은 돌을 깔고 낮은 네모 모양의 기단 위에 2단의 받침대를 깔았다. 기단의 정면과 좌우면에는 2단의 계단이 있고 기단의 끝에는 조각이 있다.

석종 뒤쪽에 있는 석종비에 의하면 나옹의 입적 3년 후인 우왕 5년(1379)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神勒寺普濟尊者石鐘碑)

보제존자의 석종 바로 뒤쪽에는 보제존자 나옹의 묘비가 있다. 보제존자는 경상도 밀양(密陽) 형원사(瑩源寺)로 가는 도중 이곳에서 입적하여 그 묘역을 마련하고 또 묘비를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앞뒷면 가득 새겨져 있는데 앞면에는 ‘여흥군신륵사 보제사리석종기’(驪興郡神勒寺普濟舍利石鐘記)라 하여 나옹을 추모하는 내용과 부도를 조성하게 된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뒷면에는 보제존자진당시병서(普濟尊者眞堂詩幷序) 및 부도조성 불사에 동참했던 사대부중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여기에 새겨진 인물들은 환암, 고암, 무학 등 당대 고승들을 망라하였고 재가신도로는 염제신, 이인임, 최영, 이득분 등 당대 권신들이 모두 동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려 후반기의 전형적인 비석의 형태를 보여주는 이 비는 높이 212cm로서 비신(碑身)은 121cm에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비신의 폭은 61cm이며 기단과 비받침대 및 지붕돌은 모두 화강석이다.

비문의 자경(字徑)은 약 2.2cm, 해서(楷書)로 기록되었으며, 당대를 대표하는 문필가 이색과 명필 한수가 각각 짓고 썼는데 단정한 필치가 돋보이는 명품이다.

신륵사 대장각기비(神勒寺大藏閣記碑)

대장각기비는 높이 133cm, 폭은 88cm로서 비신 둘레에는 이를 보호하기 위해 돌기둥을 세워놓고 있다.

현재 이 비는 신륵사의 동쪽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는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선사의 제자들과 함께 발원하여 대장경을 인쇄하고 이를 보관하기 위한 2층의 대장각을 지었다.

비신은 좌단이 깨어져 몹시 손상되어 글자를 알 수 없고 따라서 이 비를 세운 연대를 밝힌 부분에도 손상이 있어 이를 알 수 없으나 대체로 우왕 9년(1383)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문은 자경 2cm의 해서(楷書)로 예문관제학 이숭인(李崇仁)이 짓고 진현관제학 권주(權鑄)가 썼다.

뒷면에는 대장경 인쇄와 대장각 건립에 참여한 승려와 신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神勒寺普濟尊者石鐘 앞 石燈)

보제존자 나옹의 석종 바로 앞에 그 형태가 매우 아름다운 석등이 있다. 석종부도를 장엄하기 위한 공양구(供養具)로서 바로 묘탑 앞에 건립된 형태가 매우 특이하다.

석등의 재료는 화강석을 사용하고 있으나 유독 화사석은 납석을 사용했다. 또 이곳에 비천(飛天) 또는 용을 새겨 매우 화려함을 나타내고 있다.

석종의 형태가 매우 묵직하고 또 세부의 섬세한 조각을 피한 남성적 작품이라면 이 석등은 매우 섬세하고 또 전면에 걸쳐 아름다운 조각을 나타내고 있는 여성적 작품이라 할 것이다.

이 석등의 구조는 8각의 기본형을 취하고 있다. 8각의 기단 위에 8각의 화사석과 옥개석, 그리고 그 정상에 보주를 놓은 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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