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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男색 조선에 돌을 던진 나 선각자 나혜석이다”

최초 여류 서양화가 이자 비범한 문인
1974년 일대기 생애말년 복원 재출간

나혜석 이구열 글 서해문집|528쪽|1만9천500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한국 근대사에 가장 특출했던 여성 선각자의 한 사람인 나혜석 일대기. 나혜석을 소문 속의 흘러간 여인상에서 끄집어내 최초로 역사적 평가를 시도한 1974년의 ‘나혜석 일대기-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를 다시 출간했다.

근대 초기의 화가로서 여권론자로서 선구적 면모를 주목하고 신문 잡지들 속에 묻혀 있던 나혜석의 생생한 목소리들을 찾아낸다.

나혜석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을 때에 그들을 찾아 말년의 나혜석을 복원하는 데도 힘썼다.

그 이후 모든 나혜석 연구의 출발점이 된 중요한 책으로 남았다.

나혜석은 근대 한국 여성사에서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비범한 문인이었다. 그뿐 아니라 시대적 여권 주창의 선도자였고, 분명한 민족의식을 가진 이였다. 일본의 여자미술학교에 유학할 때부터 그녀는 남다른 문필 재능을 나타냈고, 조선의 여권 현실을 대담하게 거론하며 그 개선의 필요를 역설하기 시작했다.

나혜석은 전공인 유화 작품 활동으로도 최대의 찬사와 주목을 받았다.

1921년 경성일보 내청각 전시장에서첫 유화 개인전을 열었다. 한국인 화가로는 최초의 개인전인, 한국 근대미술사에 하나의 이정표와 같은 사건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조선미술 전람회에 연속 입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나혜석의 예술가적 낭만과 자만은 유럽 여행지에서 뜻밖에 만난 최린(당시 천도교 지도자)과 부도덕한 순간의 악연으로 참담한 파멸을 자초했고, 끝내는 비극적 종말을 맞는다.

1934년 월간 ‘삼천리’에 나혜석의 공개서한 ‘이혼고백장’이 실린다. 연애, 결혼, 이혼 과정을 솔직하게 토로하는 형식의 ‘이혼고백서’에 이어 최린 상대로 거액의 위자료 청구 소송, 이 전대미문의 엄청난 자기 폭로와 남성 사회 고발은 예상했던 대로 일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나혜석은 중도에 너무나 비참하게 파멸했다. 그것은 그녀만의 과오 탓이거나 책임이 아니었다. 그녀는 남편 곁에 맡긴 어린 아들, 딸에게 지상(誌上)을 통해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

“사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 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죄인은 곧 1930년대의 한국 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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