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라는 작품이 있다. 와카타케 지사코가 쓴 소설도 있고 오키타 슈이치가 만든 영화도 있다. 75세 노년 여성 모모코가 홀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고독하다. 한편으로는 고독을 즐기는 것도 같지만 속살을 보면 고통의 나날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이 여성은 55세에 남편이 죽자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드디어 혼자가 됐다.’ 그러나 그 이후 대화다운 대화를 하지 못하며 산다. 거의가 다 독백이다. ‘오늘도 세 시간을 기다려 1분 진료를 했다’라든가 아침마다 눈을 뜨면 가상의, 허구의 인물이 늘 머리맡에서 자기에게 말을 건다. ‘그냥 더 누워 있어. 일어나 봐야 별다른 일도 없잖아?’ 하지만 이 ‘노친네’ 모모코는 굳이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세 시간 동안 기다렸다가 눈 깜짝할 사이의 무심하고 무례한 병원 진료를 보는 일과 같은 루틴의 일상을 시작한다. 영화든 소설이든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를 보고 있으면 노년의 삶이 지녀야 할 의지 같은 것이 느껴져 코끝이 찡해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완벽하게 파편화된, 고립된 개인만의 삶으로 치닫고 있는 일본 노년층들, 더 나아가 일본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모골이 송연해진다. 일본사
고만고만하고 비교적 평범한 탈북자의 얘기처럼 느껴지던 다큐멘터리 '그림자꽃'은 러닝타임 38분쯤부터 급물살을 탄다. 이 다큐의 중심인물인 김련희(53)가 한국 주재 베트남 대사관을 ‘치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김련희는 베트남 대사 측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다. 자신을 제발 북한으로 돌려 보내 달라는 것이다. 남한 정부가 자신을 억류하고 잡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자 꽃'은 탈북자 여성의 얘기가 아니다. 평양 시민으로 살아가던 한 여성이 어찌어찌 해서 남한까지 흘러 들어 왔는데 당초에는 순진하게도 다시 북으로 돌아 갈 거라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모든 일의 뒤틀림이 시작됐음을 보여 주는 내용이다. 김련희는 여전히 자신을 탈북자가 아닌 평양시민이라 주장한다. 남한은 그런 그녀를 국가보안법상의 이적 행위자로 간주하고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때리기까지’ 했다. 그녀에게는 보호관찰관이 따라 다니고 일주일에 한번 씩, 혹은 수시로, 그녀가 자신들에게 출두하기를 요구한다. 남한에서 김련희가 살아가는 삶은 한 마디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그녀는 북으로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지만 문재인 정부 하에서조차 출국금지 연장은 계속된다. 통일부 관계자는 ‘이
합의 하에 아내인 니키(세피데 모아피)와 헤어져 살고 있는(그래봤자 길 건너 아버지 집, 몇백 미터 차이에 불과하지만) 데이빗(클레인 크로포드)은 아내에게 섹스 파트너가 생긴 것을 알게 되고 가슴에 불길이 인다. 데릭이라는 남자인데(크리스 코이) 아마도 니키는 자신들의 별거를 좀 더 ‘실천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데이빗은 예전에 자신의 것이었던 침대에 이들이 벌거벗고 잠들어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는 새벽에 과거 자신의 침실로 몰래 기어들어가 여자의 머리에 총을 겨눈다. 데이빗은 결국 니키와 데릭을 죽일 것인가. 그렇다면 이 영화 ‘킬링 오브 투 러버스’는 결국 치정 살인극이라는 얘기일까. 그렇게 단순하고 치졸한 얘기일까. 영화 ‘킬링 오브 투 러버스’를 보고 있으면 세상엔 여전히 젊고 신선한, 새롭고 낯선 영화 작가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늘 새로운 것, 새로운 인간관계,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고 그것들의 총합을 꿈꿔야 한다면 이 영화만 한 것이 없다. 이야기는 예측과 달리 완전히 ‘엉뚱한 산’으로 내달리며 자극적인 장면이나 대사와 같은 양념을 전혀 뿌리지 않는다. 독보적이랄 만큼 특이한 이야기 설정과
이게 나라인가. 나라가 나가가 되려면 나라다운 기본기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 의사가 의사다워야 하며 교수가 교수답고 목사가 목사다워야 한다. 기자가 정론곡필을 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검사나 판사가 깡패나 건달 짓을 하면 안된다. 정치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도 하기 싫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작동되는 것이 없다. 야권의 유력 대선 후보 부인이자 오랜 경력의 신경정신과 의사라는 사람이 자신의 인상비평 하나만 믿고 공개적으로 상대 당 유력 대권 후보를 사이코패스로 진단한다. 그러면서 자기의 실수였다고 얼버무린다. 이건 외과의가 환자의 왼쪽 폐를 적출해야 하는데 오른쪽을 잘라내고 나서는 앗 착각했네 라고 하는 것과 같은 얘기다. 환자가 죽고 나서도 단순 실수였다고 얘기하는 식이다. 이게 의사인가. 저자 거리의 약장수도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TV에서는 의학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1, 2’가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쳐다보지도 않거나 심지어 비난을 하기까지 했다. 도대체 한국사회 어디에 저런 의사가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판타지를 녹이는 TV 드라마라 하더라도 좀 적당히 하라는 것이다.
영화 ‘듄’은 예상하거나 준비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당혹스러운 작품이다. 아라키스/아트레이데스/하코넨/프레멘/스파이스/베네 게시리트 등 생소하고 외우기도 힘든 이름들이 계속되는데다 이야기가 어디서 시작돼 어떻게 연결되는지, 어떤 끝을 향해 달려가는지 러닝 타임 155분이 다 돼 가도록 도저히 짐작하기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프랭크 허버트의 동명 원작소설이 지닌 방대함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인류의 문명은 그것이 문학이 됐든 음악, 미술, 사진 혹은 그 무엇이 됐든 거의 대부분이 1960년대에 이루어지고 완성됐음을 이 소설은 다신 한번 웅변하고 있다. 인간의 지성은 60년대가 최고조였던 듯이 보인다. 이 영화를 따라가기 힘들게 하는 요소 가운데 또 하나는 등장인물, 캐릭터를 맡은 배우들의 면면 때문이기도 하다. 티모시 샬라메와 레베카 퍼거슨을 중심으로 오스카 아이작/조슈 브롤린/제이슨 모모아/스텔란 스카스카드/하비에르 바르뎀/장첸, 심지어 샬롯 램플링까지 배우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어떤 이는 많은 분량에 또 어떤 배우는 작은 역으로 나왔다가 사라진다. 예컨대 프레멘의 지도자 격 인물로 비중은 크지
이번 주 영화로 넷플릭스 드라마 ‘더 체스트넛 맨’을 고른 것은 순전히 부산영화제때문이다. 영화제 일정을 소화하느라 지난 열흘간 신작들을 챙기지 못했다. 그렇다고 당장 개봉하지 않을 영화제 출품작들을 소개해 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궁여지책까지는 아니지만 그래서, 무궁무진한 콘텐츠를 자랑하는 넷플릭스 작품 중 한편을 소개해 드리겠다. 일종의 덴드다. 덴마크 드라마. 이번 것은 6부작이다. 체스트넛은 밤이다. 가을철에 후두둑 떨어지는 밤송이의 그 밤. 왜 제목이 체스트넛 맨일까. 이 영화의 연쇄살인범이 사람들을 죽일 때마다 그 옆에 밤으로 만든 못난이 인형을 표식으로 놓고 가기 때문이다. 이런 비슷한 얘기는 의외로 많다. 미국에는 쿠키를 이용한 진저맨이 유명하다. 아 캔디맨도 있다. 어린 시절 놀던 인형 만들기, 그 인형을 만들면서 불렀던 노래=동요를 살인 모티프로 자꾸 이용하는 이유는 다 그 당시 당했던 정신적, 육체적 트라우마 때문이다. 예컨대 노르웨이 작가 요 뇌스뵈의 인기 소설 ‘스노우 맨’의 연쇄살인범도 폭력적인 유부남과 사귀던 엄마가 어린 시절 자신의 눈앞에서 일부러 얼음 물에 빠져 자살했기 때문이다. 경찰이었던 엄마의 불륜남은 물에 빠져 들어가
자, 007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제임스 본드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이제 너무 늙었고 허점투성이다. 무엇보다 감정적으로 너무 많이 휘둘린다. 영국 첩보조직 MI6로서는, 그 수장 M으로서는, 눈 딱 감고 폐기처분해야 할 요원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모양이 빠지지 않을까. 여기까지는 영화 내적인 문제의식이다. 이 문제는 묘하게도 영화 외적인 것과 연결된다. 영화사 유니버셜은 제임스 본드 역의 다니엘 크레이그와 계약 관계가 끝나 간다. 크레이그는 한국 나이 55세. 007의 액션 연기를 하기에 쉬운 나이가 아니다. 무엇보다 섹시하지가 않다. 007 캐릭터의 주요 항목 중 하나가 섹시함인데, 다니엘 크레이그에게는 더 이상 본드 걸과의 베드신이 별로가 됐다. 역할 교체가 필요한 시기가 왔다. 젊고 야망적인 배우로 바꿔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할 것인가. 다니엘 크레이그를 어떻게 모양 빠지지 않게 내보낼 것인가. 다니엘 크레이그 출연의 마지막 007 영화 ‘노 타임 투 다이’를 두고 젊은 세대들 간에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대체적으로 지루하고(러닝 타임이 무려 2시간 43분이다) 빌런(악당)들의 죽음이 너무 쉽고 간단하게 이뤄지며 액션도 새로울 게 없다는 것이
자신 스스로를 덤애스(dum-ass), 곧 ‘촌뜨기 무지렁이’라 부르는 빌(맷 데이먼)은 새로 만난, 그리고 가까스로 가까워지게 된 버지니(카밀 코탄)와 함께 하는 시간이 더없이 행복하다. 그는 이국땅 낯선 곳,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노동 일을 하며 살아간다. 막노동판이다. 평생 그가 해왔던 일이다. 조금 더 나은 일이었다는 것이 석유 채굴 노동 정도였다.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했던 일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스틸워터라는 고장. 영화 ‘스틸워터’는 오클라호마 스틸워터 출신 노동자 빌이 프랑스에서 살인용의자로 투옥돼 살아가는 딸 아이를 구해내는 이야기이다…라기 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고 심오하며 그래서 (모두의 인생처럼) 지루한 이야기다. ‘스틸워터’는 파격적인 충격의 드라마가 아니다. 조용한 울림과 여운이 오래가는 작품이다. 극장 문을 나설 때 주인공 빌의 마지막 대사가 자꾸 생각이 난다. 그렇지. 그렇게 되겠지라고 속으로 되뇌이게 만든다. 빌은 버지니가 홀로 키우는 딸 아이가 숙제를 하지 않자 자신도 어릴 때 공부하면 질색을 했다며 그래서 결국 땅 파는 일을 하게 됐다고 한다. 이러다 너도 나처럼 땅이나 파먹고 살게 될 거라고, 그는 어린아이에겐 어울리지 않는 얘
모든 이야기는 ‘그놈의’ 기차 때문에 시작된다. 모든 게 기차와 기차역 때문이다. 경상북도 최북단, 강원도 접경 지역인 봉화군의 한 작은 마을, 전곡리 원곡 마을에는 기차가 서지 않는다. 변변한 대중교통 수단이 없다. 사람들이 마을=세상 밖으로 나가려면 옆 마을인 분천리까지 걸어서 가야 한다. 그런데 그러려면 터널 속 외길의 기차 철로를 통과해야 한다. 터널을 걸어갈 때 기차가 오면 모두 다 죽은 목숨이 된다. 그래서 아이는 어릴 때부터 대통령에게 편지를 쓴다. 마을에 기차역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당연히 청와대는 역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대신, 편지를 쓰던 아이 준경(박정민)이 커간다. 고등학생이 된 준경은 마을 어른들과 함께 간이역을 세운다. 양원역이란 이름도 짓는다. 그러나 양원역은 결국 기차가 서지 않는 역이 되고 만다. 준경의 엄마는 준경을 낳다가 죽었다. 엄마 대신 누나 보경(이수경)이 그를 키웠다.(고 그 자신은 생각한다.) 성격이 까칠한 아버지(이성민)는 기관사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무심하다. 마을에 기차역이 없다는 사실에도 무감하다. 오로지 시간을 엄수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기차를 운행하는 일뿐이다. ‘우리 같은 사람은 그냥 시키는 대
할리우드 제임스 완 감독의 공포 영화들은 의외로 재미가 있다. 여기서 ‘의외’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영화에는 늘 의외성이 크다는 것, 상상하지 않았던 사건과 반전이 벌어진다는 뜻이다. 제임스 완은 말레이시아 출신이다. 그는 요즘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나가는 감독이다. 이번 영화 ‘말리그넌트’는 그의 그런 의외성이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다. 공포 영화가 도무지 어디로 튈지 짐작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공포가 아니라 롤러코스터를 탄, 판타지 액션을 보는 느낌을 준다. 제임스 완의 이번 ‘말리그넌트’는 여러 할리우드 고전 영화의 레퍼런스를 구사하고 있다(고전영화의 일부 장면을 그대로 차용하거나 인용해서 참조하는 것)는 점에서도 흥미롭고 놀랍다. 첫 장면과 영화 중간중간 계속해서 나오는 주인공 매디슨(애나벨 월리스)의 집 전경은 알프레드 히치콕이 만든 전설의 영화 ‘싸이코’의 베이츠 모텔을 그대로 닮았다. 딱 봐도 음습하고 살인이 일어날 것 같다. 그 집 안의 공간 구조는 셜리 잭슨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그 유명하고도 유명한 작품 ‘힐 하우스의 유령’을 닮았다. 2층 회랑의 복도에서 유령의 검은 그림자가 밤사이에 늘 휙휙 지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