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귀신을 보거나, 악마와 대화를 나누거나 하는 일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은 방송사가 시청률을 원하는 것이다. 신문사가 더 많은 광고 수익이 들어 오기를 원할 때이며,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만의 관객을 원할 때이다. 곧, 모두들 매명 욕에 사로잡힐 때이다. 유명 인사를 따라다니고, 그의 뒤를 캐고, 가짜 뉴스들을 스스럼없이 만들고, 그래서 자기도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에 시달릴 때이다. 그런 방송, 그런 언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는 사회 그 자체가 악마이다. 영화 ‘악마와의 토크 쇼’가 얘기하려고 하는 건 바로 그것이다. 최근 극장에서 개봉됐지만 ‘범죄도시4’의 기세와 스크린 독점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정말 악마가 뭔 짓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아 어쨌든 사람들의 주목을 크게 끌지는 못한 척한 작품 ‘악마와의 토크 쇼’는(20일 현재 7만 5919명을 기록했다. 놀라운 성적이다.) 매우 흥미로운 소재를 다루고 있는 영화이다. 작은 영화이다. 일종의 독립영화이고 그래서 꽤나 발칙한 느낌을 준다. 재미있다.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한 것(모티프이지 실제 그대로는 아니라는 것)이다. 1977년 한 TV 토크 쇼에서 벌어진 기이한 일, 그보다는 기상천외한 쇼가 만들어 낸 소동을 그렸다. 실제 벌어졌음직한 일, 실제 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사건을 그대로 보여 주는 척, 사실은 메타포(은유와 주제의식)가 가득한 드라마로 만든 것이다. 일종의 다큐드라마일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헷갈리게 된다. 어쩌면 그 혼란과 혼돈이 이 영화의 궁극의 주제일 수 있다. 인기 토크 쇼 진행자 잭 델로이(데이비드 다스트말치안)의 ‘올빼미 쇼’는 1971년에 첫 선을 보인 후 5년 넘게 인기 가도를 달렸지만 그의 아내 매들린(조지나 헤이그)이 폐암으로 사망한 후 잠깐 잠적을 했고 이후 곧 복귀는 했지만 시청률이 예전과 같지 않은 상태다. 당연히 토크 쇼가 방송되는 UBC와 잭 델로이, 이 프로그램의 프로듀서, 심지어 보조 진행자 거스(리스 오테리)까지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다 할 태세이다. 마침 할로윈 데이이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청률 집계 기간이라는 것이다. 방송은 1970년대이든, 온갖 유튜브와 OTT가 난무하는 2024년 현재이든 시청률, 조회수, 좋아요와 구독자 수에 목을 맨다. 1977년 시청률의 위기에 몰린 잭 델로이 쇼(이 쇼는 단 한 번도 NBC의 ‘쟈니 카슨 쇼’를 이겨 본 적이 없다. 만년 2위의 수준이었으며 이런 상황이 이 토크 쇼를 만드는 모든 사람들의 행동 동기를 만들어 냈던 셈이다. 그런데 이 영화 ‘악마와의 토크 쇼’는 호주産이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호주와 미국의 방송 프로그램 산업을 섞어 脫 국적화, 가상화 시켰다.)는 스튜디오에 유령을 불러들이기로 한다. 첫 번째 초대손님은 스스로를 영매라고 부르는 인도계 크리스투(파이살 바지)이고 두 번째는 마술사 카 마이클 헤이그(이안 블리스), 그리고 세 번째는 초심리학자인 준 로스 미첼(로라 고든)이다. 크리스투는 영매를 불러들이려고 시도하다가 스튜디오에 오물을 토하고 실려 나간다. ‘초자연국과수연(초자연현상을 조사하는 국제 과학 수사 연맹)’ 지도자인 마술사 카 마이클 헤이그는 이 모든 것이 잭 델로이의 쇼라고 생각한다. 그는 ‘올빼미 쇼’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상한 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쇼가 진행되는 내내 초자연 현상의 조작설을 증명하려 애쓴다. 그걸 도와주는 사람에겐 50만 달러를 주겠다고 약속까지 한다. 그러니 방청객 여러분들 중 누구라도 휩쓸리지 말고 정신을 차리라고 그는 말한다. 준 로스 미첼 박사는 1974년에 있었던 아브락사스 제일 교회 사건의 피해자 소녀 릴리(잉그리트 토렐리)가 겪는 빙의 현상을 연구한다. 아브락사스의 교주인 샌더 디아보는 납치와 어린 소녀들을 제물로 받친다는 혐의를 받고 FBI의 추적을 받던 중 스스로 교회에 불을 질러 교인 모두를 몰살 시켰다. 릴리는 그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이다. 준 박사와 릴리는 잭 델로이 쇼에 나와 빙의를 통해 유령을 불러들인다. 스튜디오에는 이상 현상이 속출하기 시작한다. 전기장이 일어나고 유리잔이 박살 나는가 하면 릴리가 앉은 의자가 공중으로 부양되기도 한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일일까. 진행자 잭 델로이와 출연자 카 마이클 헤이그는 열띤 논쟁을 벌이고 급기야 좀 전에 나간 방송을 한 프레임 한 프레임 되돌려 가며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조작인지, 환상인지, 집단 최면의 결과인지를 알아 내려 애쓴다. 그리고 곧 믿기지 못할 사건이 터지고 잭 델로이를 둘러싼 비밀이 드러난다. 근데 이것 또한 진짜일까 가짜일까. 영화 ‘악마와의 토크 쇼’는 토크 쇼가 벌어지는 스튜디오 무대와 그 무대 뒤의 풍경을 오가며 지금 여러분이 보는 드라마가 실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영화가 갖는 최대의 장점 중의 하나는 모든 상황과 모든 인물을 그럴듯하게 그려 내는 데 있어 거의 최고급이라는 것이다. 프로듀서들은 저렇게 행동하고 말할 것 같으며, 토크 쇼 기획자들은 저런 생각을 가지고 진행자들을 저렇게 부려 먹을 것 같은 데다, 진행자의 겉과 속, 시청자들에게 보이는 얼굴과 무대 뒤에서 보여 주는 초조함은 완전히 다를 것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공동 감독인 캐머런 케언스, 코린 케언스의 작품 장악력이 뛰어나고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디자인해 냈음을 보여 준다. 연출의 힘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있을 법 하지 않는 상황을 그럴듯하게 연기해 낸, 곧 ‘연기 혼에 빙의된’ 배우들의 연기력도 한몫을 당당하게 해 낸 작품이다. 특히 릴리 역의 잉그리트 토렐리의 빙의 연기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했던 부분이다. ‘악마와의 토크쇼’를 보는 모든 사람들은 이 영화가 허구, 가짜임을 잘 안다. 그러나 소녀가 빙의 되는 모습에서는 살짝 속게 되거나, 더 나아가 정말로 저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자발적 착시’에 빠진다. 관객 역시 스스로의 관객을 원하고 거짓이 진짜이길 원하게 된다. 그걸 원할 때 만들어지는 기이한 최면의 환각 상태를 즐기고 싶어 한다. 아브락사스 교회 사건은 아마도 1993년 미국 텍사스 주 웨이코 시에서 일어난 다윗파의 집단 자살 사건을 가져 온것으로 보인다. 다윗파의 교주 데이비드 코레시는 교인을 살해하고 폭행한 혐의부터 미성년자 강간 및 마약 공급 혐의까지 등등으로 ATF(Bureau of Alcohol, Tobacco, Firearms and Explosives : 주류 담배 화기 및 폭발 물 단속반)의 기습 체포 작전에 놓이자 자신을 따르던 신도들과 저항하다 교회에 불을 질러 집단 자살을 했다. ‘악마와의 토크 쇼’ 자체도 호주의 한 심야 토크쇼에서 벌어졌던 일, 그 소동을 모티프로 한 것이다. 영화 ‘악마와의 토크 쇼’는 시청률이라는 악마, 조회수라는 악마에 사로잡힌 현대 매스미디어의 폐해에 대해 얘기한다. 방송(언론)은 혼돈을 즐긴다. 혼란이 돈을 만들어 준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그 혼돈을 정리하고 진실을 알리려고 노력해 오기도 했지만(베트남전의 진실이나 흑인 인권운동의 의미를 알리려 했던 CBS TV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처럼) 점점 더 정치사회적 아수라장을 조장하는 가학성을 보여 왔다. 영화는, 거짓이 돈이 된다면 가짜 뉴스라도 만들라고 난리를 치는 허위 방송의 시대를 빗댄다. 기가 막힌 것은 1977년 때나 2024년 지금이나 그 난장이 전혀 정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무려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언론은 좋아지기는커녕 점점 악마화 되어 왔다. 세상은 진화하지 않았다. 그게 문제다. 늘 악마와 토크를 즐기려는 세상이 문제다. 악마를 불러들이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다.
예전에 꽤나 잘 나갔거나 잘 만들어졌던 영화를 몇 부작 드라마로 만드는 것이 대세가 된 요즘이다. 거꾸로 옛날 드라마를 영화 한 편으로 만드는 것은 그래서 이색적이다. 최근 개봉된 ‘스턴트 맨’이 그렇다. 리 메이저스(그 유명한 ‘6백만 불의 사나이’의 주연배우)가 주인공 역으로 나온 드라마 ‘더 폴 가이(The Fall Guy)’는 1981년~1986년까지 ABC TV의 인기 드라마였고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TV 시리즈였다. 이 드라마를 영화 한 편으로 리메이크한 작품이 바로 지금의 ‘스턴트 맨’이다. 영화의 원제는 옛 드라마처럼 ‘더 폴 가이’ 그러니까 ‘추락한 남자’지만 개봉 과정에서 제목을 한국 관객들이 알기 쉽게 바꿨다. 눈이 좀 어두운 관객들은 이 영화가 그다지 재미가 없을 것이다. 온통 클리셰(cliché)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그건 순전히 스토리 구성 탓이다. 영화 ‘스턴트 맨’은 당연히 ▲스턴트 장면을 ‘과하게’ ▲액션만을 ‘중점적으로’ ▲스턴트 장면을 기대하고 온 관객만을 철저하게 고려하여, 영화 구성을 짜야 했기 때문에 스토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작품이다. 스토리’따위’에 신경 쓸 틈이 없다. 얘기는 가장 단순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스턴트 액션에 더 신경을 쓰며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감독인 데이비드 리치는, 충분히 짐작했겠지만 실제 스턴트 맨 출신이다. 그는 브래드 피트의 대역 스턴트를 오래 했고 아주 오래전에는 장 클로드 반담의 위험한 역할을 대신했던 그의 얼터 에고였다. 데이비드 리치는 개인 배우의 대역 스턴트를 오래 한 경력을 바탕으로 스턴트 감독 자리를 거쳐 결국 액션 영화감독까지 됐다. ‘존 윅’ 1 편에 감독 자리에는 그의 이름도 올라 있다. 영화 ‘스턴트 맨’의 주인공은 콜트 시버스(라이언 고슬링)이다. 그는 조감독인 조디(에밀리 블런트)와 연인 사이이다. 콜트 시버스는 가장 뛰어난 스턴트 맨이고 현재 할리우드 스타인 톰 라이더(애런 테일런 존슨)의 대역 스턴트를 한다. 콜트는 이번 촬영을 끝내면 조디와 밀월여행을 떠나려 한다. 고층에서 추락하는 장면이다. 이미 촬영이 잘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배우인 톰 라이더와 톱 스타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영화의 제작자 게일(해나 워딩엄)은, 콜트의 얼굴이 슬쩍 나온 것 같다며 미안하지만 다시 한번 찍자고 한다. 갑이 원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 건 스턴트 맨도 마찬가지다. 그는 다시 한번 고층 건물 세트 위에 올라 와이어를 매고 아래로 뛰어내리지만 이번엔 큰 사고로 이어진다. 허리 부상을 크게 입은 콜트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채 1년 8개월을 잠적한다. 그리고 조디의 감독 데뷔작인 ‘메탈 스톰’의 스턴트 연기자로 복귀하지만 모든 것이 다 변해 있는 상태다. 특히 조디와는 이미 서먹해진 관계가 됐다. 프로듀서 게일은 콜트에게 약물 파티 이후 사라진 배우 톰을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사실은 그것 때문에라도 콜트를 불렀다고 말한다. 톰을 찾아 나선 콜트는 그가 주로 난잡한 파티를 벌인 호텔 룸에서 미상의 시체를 발견한다. 이때부터 스턴트 가이 콜트 시버스의 일생일대 소동극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콜트는 ▲사랑하는 여인 조디를 되찾아야 하고, ▲그녀의 감독 데뷔작을 성공적으로 완성시켜 줘야 하며, ▲사라진 톰 라이더를 찾아오고, ▲호텔의 살인범을 추적해야 한다. 이 모든 걸 동시에 다 해 낼 수 있을까. 의외로 모든 건 단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음모극이었음이 드러난다. 써보고 나서 읽어 보면 아주 재미있는 얘기 같지만 이건 할리우드 액션 영화 백 편중 아흔여덟 편 정도라면 갖고 있는 이야기 구조이다. 너무 뻔한 스토리여서 배우들의 연기도 너무 뻔해 보인다. 라이언 고슬링과 에밀리 블런트 같은 고(高) 개런티 배우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둘의 ‘돈 액수’ 때문인지 둘 외에는 이렇다 하게 이름있는 배우를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스턴트 연기자들이 수배, 수십 배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가 여기까지라면 더 이상 쓸 말도 없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 보면 작품 전체가 유명 액션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를 뜯어다가 그걸 스토리로 연결시킨 구조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치 비틀스의 노래 33곡의 제목과 가사를 이어 붙여 영화의 이야기를 꾸민 줄리 테이머 감독의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2008년작, 에반 레이첼 우드, 짐 스터게스 주연. 주인공 이름이 루시와 주드인데 각각 비틀스의 노래 ‘루시 인 더 스카이 위드 다이아몬드’와 ‘헤이 주드’에서 따 온 것이다.)와, 장르는 판이하게 다르지만. 아주 닮아 있는 꼴이다. 이런 류의 영화들은 미술로 얘기하면 일종의 콜라주(collage : 질감이 다른 여러 재질의 소재를 이리저리 합치고 접착해 만든 작품. 피카소 등 입체파 화가들이 주로 썼다.) 기법의 작품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이야기가 천편일률적이고 ‘단순무식’한 것이 이해가 간다. 이 영화는 유명 장면을 이어 붙이는 부분의 이음새 그 링크만을 위해 스토리를 덧붙인 작품이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스토리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액션 영화 패러디 장면과 그다음 장면이 잘 이어지는지 그렇지 않은 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자 이러면 영화를 보게 되는 시점과 시각에 큰 차이가 벌어진다. 예컨대 첫 장면, 콜트가 고층 빌딩에서 추락하는 스턴트 액션 장면은 톰 크루즈 주연의 ‘미션 임파서블 4 : 고스트 프로토콜’에서 이단 헌트가 두바이 빌딩에서 떨어지는 장면과 비슷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나오는 액션 스턴트는 빈 디젤과 드웨이 존슨 주연의 카 레이싱 영화 ‘분노의 질주’에서 가져온 것이다. 차가 전복하는 회전이 8바퀴 반이 나와야 하는데 헬기 카메라까지 총 7대의 이동 카메라가 질주하는 차량을 찍는다. 영화 속 감독인 조디는 스턴트 맨이 콜트인 줄 모르고 디렉팅을 해 댄다. 그녀는 그에게 앞의 차에 달려 있는 카메라에 보다 바짝 다가서라고 말한다. 콜트는 마땅치 않아 하면서도 감독 지시대로 차를 밀어붙였다가 비싼 카메라를 깨 먹는다. 카메라가 깨지면서 화면이 부서지는 장면은 고스란히 영화에 사용된다. 모두 ‘분노의 질주’에 나오는 실제 장면들이다. 특히 차가 8바퀴 반 뒤집히는 장면을 다시 한번 연출해 낸다. 콜트가 톰의 초호화 숙소에 들어갔을 때 그를 공격하는 여자 인기 스타(테레사 팔머)와 싸우는 장면은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 ‘킬 빌’에서 가져온 것이고, 콜트가 건물에서 갱단들을 피해 호텔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기 전의 신은 다니엘 데이루이스의 ‘라스트 모히칸’에서 가져왔다. 콜트가 악당들에게 의자에 묶여 고문당하는 장면과 이어지는 보트 추격전은 ‘007 카지노 로얄’의 것이다. 쓰레기차를 쫓고, 이어서 그 차에 올라타고, 급기야 쓰레기차 안에 싸움을 벌이거나, 차가 뒤집어져 길에 미끄러지면서도 주고받는 격투 신은 딱 ‘제이슨 본’ 시리즈의 장면들이다. 그것마저 지루하다고 느껴지면 그 액션의 장면들마다 마다에 1980년대 록 음악이나 발라드 송을 덧칠했다. 오프닝에 그룹 키스의 ‘I was made for loving you’가 꽝꽝대고 콜트가 문밖에서 악당들과 싸우는 것도 모른 채 그가 자신을 또 떠났다고 생각하며 축 처진 조디가 스태프들과 함께 가라오케에서 부르는 노래는 필 콜린스의 ‘Against all odds’이다. 콜트가 조디의 마음을 잃게 된 것을 슬퍼하며 차 안에서 혼자 듣는 노래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All too well’이다. 이 모든 것이 어떤 관객들에게는 즐거운 백화점식 구성이라며 열광할 만한 일일 것이다. 어떤 관객들에게는 ‘심하게’ 진부한 구성이라 받아들여질 것이다. 아마도 세대에 따라 평가의 차이가 극명한 영화일 수 있겠다. 당신은 지금 무슨 세대인가. 이른바 MZ 세대가 아니면 주의 경보를 내릴 영화이다. ‘스턴트 맨’은 철저하게 MZ 세대를 위한 팝콘 영화다. 젊은 세대들을 위한 쉬운 팝콘 영화 한 편쯤은 있어야 한다. 와이 낫!(Why not?). 그게 뭐 그리 큰 문제인가.
우리에게는 아직 낯선 러시아 영화(이건 순전히 감독 이름과 배우 이름이 입에 쉽게 붙지 않아서인데 예컨대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같은 감독 이름은 도통 외워지지가 않는다. Tchaikovsky도 그렇다. 차이코프스키인가 차이콥스키인가. 이것도 오랜 세월 영어교육 대미 의존도가 강했던 문화 탓이다.)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차이콥스키 얘기이긴 하지만 차이콥스키의 음악, 그러니까 그의 『백조의 호수』나 『비창』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음악회나 연주회, 발레 장면도 이렇다 할 게 나오지 않는다.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완벽하게 그의 아내 얘기이다. 영화는, 차이콥스키의 성적 취향에 따라 철저하게 버림받고 처절하게 유린됐던 아내 니나(안토니나 밀류코바)의 얘기를 담는다. 총 143분 러닝타임 중 절반이 지난 82분쯤 그 이유가 나온다. 차이콥스키(오딘 런드 바이런)의 여동생인 사샤(바르바라 시미코바)는 올케 안토니나 밀류코바(알리오나 미하일로바)에게 자신의 오빠는 ‘부그르’라고 고백한다. 니나는 부그르가 뭐냐고 묻고, 잠시 머뭇거리던 사샤는 이렇게 말한다. “오빠는 여자를 안 좋아해. 평생 여자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 오빠는 남자를 좋아해. 그것도 어린 남자 애를.”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이자 그것도 페도필(소아성애자)이라는 사실을 아내인 니나가 처음 인지하는 순간이다. 그리스 정교의 교리대로 순진하고 순수한 영혼으로 살아왔던 니나는 새로운 성(性)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영화는 이때부터 약 1시간 동안 급전직하의 절벽을 타고 넘기 시작한다. 니나, 곧 안토니나 밀류코바는 이후 원치 않는 남자와 성관계를 맺고 애를 세 번이나 갖는다. 애들은 다 고아원에 보냈으며, 그런 와중에 동시에 여러 명의 남자와도 관계를 맺는 그룹섹스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녀는 차이콥스키에게 복수하기 위해 절대로, 절대로 그와 이혼하지 않는다.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는 차이콥스키와 밀류코바가 처음 만난 1872년과 결혼을 했던 1876년, 그리고 둘이 헤어진 1877년과 그 이후 니나가 파국의 인생을 살았던 1917년까지의 삶을 다룬다. 그 사이인 1893년에는 ‘위대했던’ 음악가 차이콥스키는 콜레라로 세상을 뜬다. 영화의 인트로는 1893년 차이콥스키의 장례식이다. 니나는 그의 영안실에 마치 타인이 가듯이 조화를 들고 가는데 그전에 조화의 문구를 쓰느라 애를 먹는다. ‘가장 위대한’, ‘사랑하는 이에게’ 등의 어휘에서 헤매던 그녀는 이렇게 쓰기로 결정한다. ‘그를 추앙하던 그의 아내로부터’. 영화는 한 위대한 예술가와의 삶이란 것이 사랑인지 추앙인지, 아니면 그 사이에서 변질된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애증의 예술사이자 예술이 가져가야 할 진정한 가치, 사람들이 예술을 추앙하고 사랑하는 진정한 이유와 의미에 대해 묻는다. 어떤 게 진짜 사랑이냐고 묻는다. 그 과정, 2시간이 넘는 영화 시간 동안 사람들은 마치 심신이 짓이겨지는 듯한, 그래서 마치 도살자에게 다져지는 육고기가 되는 느낌을 받는다. 예술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저렇게 모든 것을 내던져야 하는 것인가. 소아성애자였던 차이콥스키가 자신의 성벽(性癖)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한 여인의 일생을 저렇게까지 망가뜨려도 되는 것인가. 안토니나 밀류코바는 결국 차이콥스키에게 철저하게 버림받은 후 창녀(같은 존재)가 됐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니나의 극도의 결벽증 같은 스토킹, 곧 차이콥스키는 절대로 자신을 떠날 수 없다는, 오직 자신만이 그를 사랑해야 한다는 광기 어린 집착이 차이콥스키를 1년도 안 돼 지치게 만든 요소일 수도 있겠다. 니나의 사랑은 미친 것일 수도 있다. 사랑은 늘 광기와 정상 사이를 오가게 마련이다. 이 둘의 사랑은 따라서 둘의 무릎 맞춤의 진술이 필요한 것이며 어느 한쪽의 일방적 주장만으로 쉽게 재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두 사람 모두 비교적 정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며 사랑은 어쩌면 이 같은, 극히 비정상의 일상에서 잠깐 동안 반짝 타오르기 마련인데, 그걸 어떻게 자신들의 삶 속에서 정상적 궤도로 재 진입시켜 평생을 애정의 관계로 유지하고 살아가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예술적 교감이라는 또 하나의 층위가 생기면 얘기는 좀 더 복잡해진다. 예술가들, 특히 음악가들은 종종 자신의 작품을 위해 사랑 따위는 중요하지 않거나, 사랑이 아닌, 보다 변칙의 삶이 필요하다는 이기주의에 휩싸이게 된다. 한 명의 예술가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축적돼야 한다. 그것 참 이상한 법칙이지만 대중들은 종종 예술을 위해 그 기이한 룰을 받아들이곤 한다. 지금도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무덤에 던져 버리는 사람은 없다. 그건 마치 영화계에서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차이나타운’이나 ‘로즈메리 베이비’를 여전히 애호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다. 로만 폴란스키는 아동 성폭행 범죄를 12건이나 저질러 유럽에서 도피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872년~1917년은 러시아가 혁명으로 들끓던 시기이다. 특히 1872년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848년 칼 마르크스와 함께 쓴 '공산당 선언'을 '공산주의 선언'으로 바꿔 출판해 대중적 선동의 기치를 내세운 해였다. 미하일 바쿠닌이 이끄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이 부패한 러시아 귀족사회인 로마노프 왕조를 연일 공격하던 시기였고 피폐한 민중의 삶은 급속도로 추락하던 때였다. 한편에서는 지식인들 그룹인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들이 민중을 의식화시켜 제정 말기를 붕괴시키려 애쓰던 때였다. 차이콥스키는 이런 시기에 음악을 만들었으며 이런 시대에 소아성애에 집착했고 한 여인의 순종적 사랑을 받는 것을 거부했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2시간이 넘는 시간 내내 비교적 차이콥스키의 ‘위대한’ 음악적 업적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시대의 희생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음을, 민중의 삶, 구체적으로는 한 여인의 기구한 삶과는 유리돼 있었음을, 비교적 비판적 시선으로 이어가고 있다. 인물 구도와 비중에 있어 차이콥스키 대 밀류코바를 거의 7대 3비율로 구성한 것,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한 번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 등은 감독의 그런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안토니나 밀류코바의 구애 공세를 보여주는 영화 초반부는 눈물겹다. 여인은 예수에게 자신의 남자를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하고 남자가 자기 것이 되게 해달라고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기도에 기도를 거듭한다. 남자에게 팬 레터를 보내고, 그에게 다가서기 위해 음악원에 들어가고, 결국 남자가 자기 집에 오게 하기 위해 편지에 편지를 쓰기를 반복한다. 남자가 방문하는 날 그녀는 온 집안을 깨끗이 치우고, 가장 순결해 보이는 옷을 입고, 가장 예쁘게 차려입은 채 그와 마주 앉아 이렇게 말한다. “처음 뵈었던 날부터 제가 바랐던 건 한 가지예요. 선생님을 안고 키스하는 거 그리고 평생 함께 하는 거요. 그럴 자격이 없겠지만요. 정신 나간 팬은 아니에요. 이제 어떤 다른 남자에게는 끌리지 않아요.” 이런 고백을 하는 여인을 남자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사랑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 한 가지나 몇 가지 법칙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매우 복잡 미묘한 것이며 늘 추앙과 비난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고 한참이 있으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차이콥스키를 비난하지 않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둘의 만남은 애초부터 잘못됐던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이 안타깝고 불쌍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 사랑은 어렵다. 어려운 사랑 때문에 많은 사람은 참담해진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잔혹한 러브 스토리가 사람들을 성장시킨다.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가 던지는 궁극의 메시지이다.
프랑스 출신의 촬영감독인 브누아 델롬의 첫 장편 연출작 ‘마더스’의 영어 원제는 마더스 인스팅트(Mothers’ Instinct)이다. 어퍼스트로피 s가 앞이 아니라 뒤에 찍혔다. 그러니까 엄마의 본능이 아니라 엄마들의 본능 혹은 엄마들의 직감이라는 뜻이겠다. 극 중 엄마가 복수하는 얘기이고 제목만으로도 두 엄마의 갈등, 음모, 범죄의 느낌이 나되, 그게 다 엄마 곧, 모성애의 발로나 그것이 원인이 된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 영화는 2018년 올리비에 마셰 드파스가 만든 ‘뒤엘(Duelles, 대결)’을 리메이크한 영화이다. ‘마더스’는 제목을 원래대로 했다면 훨씬 더 이해가 빠를 수 있는 작품이다. 데미언-셀린 부부와 사이먼-앨리스 부부는 이웃간이다. 데미언(조쉬 팔스)은 제약회사에 다니고 사이먼(앤더슨 다니엘슨 라이)은 회계사이다. 셀린(앤 헤서웨이)은 예전에 간호사였고 앨리스(제시카 채스테인)는 기자였다. 네 사람 모두 40대 초반들이고(넷은 어느 날 케네디에 대해 얘기하는데 그가 너무 젊다고 데미언이 얘기하자 사이먼의 아내 앨리스는 "케네디는 43, 당신은 42이라며 나이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중산층이며 막 상류층으로 갈 수 있을까 말까, 그 중간쯤 서 있는 화이트칼라 집안들이다. 이런 이웃일수록 당연히 아내끼리 친한 친구가 되는데 셀린과 앨리스는 각각 맥스와 테오, 8살짜리 동갑내기 아들을 키우며 더욱 더 가까워진 관계이다. 둘은 번갈아 가며 아이들이 하교할 때 데리러 갈 정도의 사이이다. 맥스와 테오, 아이 둘도 더없이 막역하게 지낸다. 문제는 사고가 터진다는 것이다. 셀린의 아들 맥스가 어느 날 새집을 나무에 건다며 2층 발코니 난간에 올라 섰다가 추락사한다. 이웃의 앨리스는 아이가 난간에 올라갔던 바로 그 순간을 목격했고 옆집으로 뛰어갔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황이었다. 엄마인 셀린은 아래층에서 전기 청소기로 청소를 하고 있어 소리를 듣지 못했다. 셀린이나 앨리스나 두 사람 모두 이후 슬픔과 죄책감이라는 두 감정 사이의 골짜기에서 기이한 증오와 분노에 시달리게 된다. 셀린과 앨리스는 맥스가 죽은 것이 서로의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또 단순한 사고였을 뿐이라며 이성적인 생각으로 돌아와 서로를 위안하기 일쑤이다. 왔다 갔다의 싸움을 반복하는 사이 두 집안에서는 또 다른 사건이 잇따른다. 앨리스의 시어머니가 정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가 하면 셀린의 남편 데미언은 결국 자살을 한다. 워낙 신경쇠약증이 있었던 앨리스는 이 모든 일이 셀린이 꾸민 일, 자신에게 왠지 아들 맥스의 복수를 하려는 계획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셀린은 셀린대로 앨리스가 점점 더 과대망상증이 심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 여자의 '뒤엘' 곧, 대결이 시작된다. 누구의 짓일까. 앨리스의 정신이상일까. 셀린의 교묘한 범행일까. 원작은 2018년 ‘뒤엘’이라고 했지만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샤론 스톤과 이자벨아자니가 나왔던 1996년작 ‘디아볼릭’과 1974년 존 바담 감독이 만든 ‘애증의 덫’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원조 격인 1955년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디아볼릭’을 닮아 있다. 물론 ‘마더스’는 이들 작품과 이야기와 줄거리가 전혀 다르지만 서스펜스, 곧 그 극적 긴장감의 분위기를 닮으려 했다는 점에서 드라마의 주조(主潮)를 ‘디아볼릭’에서 가져오려 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예컨대 이런 서스펜스의 분위기를 말한다. 앨리스는 셀린이 차를 몰고 외출하는 것을 창 밖으로 지켜보다 그녀 집의 열쇠를 갖고 이웃집으로 몰래 들어 간다. (둘은 집 키를 서로 나눠 가질 만큼 친한 사이였다.) 앨리스는 셀린 집 지하에 가서 약품함을 뒤지려 하지만 잠겨져 있다. 그때 셀린이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지하에 있던 앨리스는 황급히 불을 끄고 계단 밑으로 몸을 숨긴다. 셀린은 지하로 가는 문이 약간 열려 있는 걸 보고 의아해 한다. 셀린은 지하로 내려가지만 몸을 숨긴 앨리스를 보지 못한다. 관객 눈에는 지하 차창으로 들어오는 불빛으로 앨리스의 얼굴 일부가 보이지만 정작 셀린은 알아채지 못한다. 셀린은 다시 1층으로 올라가고 앨리스는 조금 후 안도의 한숨을 쉰 후 올라가지만 막상 1층에서 기다리던 셀린에게 들키고 만다. 둘은 심한 말싸움을 벌인다. 둘의 말싸움은 이후 점점 더 심한 몸싸움으로 이어지게 된다. 둘의 대결은 심해진다. 영화 ‘마더스’는 엄마 둘, 여자 둘의 대결, 그 결투가 점점 더 선을 넘게 되는, 그 점층법의 서사가 잘 짜인 작품이다. 엄마의 본능, 직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엄마는 아이가 아프려고 하면 이미 그 전조를 몸으로 감지한다. 아이들과 정신이 연결돼 있는 엄마들에게 자식의 위기는 곧 자신의 위험과 같다. 아이가 죽으면 엄마는, 엄마라는 존재는, 아이를 대체할 무엇, 대신할 누구를 본능적으로 찾게 된다. 종종 그것은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한다. 모성애는 때론 너무 지나쳐서 인간관계의 모든 것을 파국으로 만들 때가 많다. 영화 ‘마더스’는 바로 그런 얘기를 하는 작품이다. 시대 배경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두고 43살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인 1960년인 것으로 보인다. 케네디는 61년에 대통령이 됐다. 60년 현재는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었으며 공화당 정부가 집권하던 시절이다. 케네디는 ‘뉴 프론티어(새로운 개척 정신)’을 내세우며 대선 캠페인을 성공시켰다. 당시 미국은 2차 대전과 한국 전쟁 등을 딛고 일등 국가로 올라서고 있을 때로 셀린-앨리스 집처럼 신흥 중산층들이 양산되던 때였다. 그러나 곧 케네디의 암살을 전후해 60년대 미국 사회는 극도의 분열과 갈등으로 접어들게 되고 결국 이들 중산층 사회가 몰락하게 되면서 미국은 계급의 양극화가 점점 더 심화된다. 지금 미국의 문제는 바로 이때, 60년대 형성된 진보적 중산층 가정의 붕괴와 분화로부터 시작된 셈이라는 것이다. 모성의 가치가 언제부터 변질됐는가, 언제부터 정신 이상적이 되어 갔는가를 지켜보는 건 다소 아프고 가슴 아픈 일이다. 모성애가 이상성을 지니게 된 이상 가정과 사회는 복원되기가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브누아 델롬 감독이 그런 고차 방정식까지 고려하며 영화를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감독은,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정치사회학을 스스로의 작품에 배태(胚胎) 시키곤 한다. ‘마더스’에는 그런 사회성이 담겨 있다. 제스카 채스테인과 앤 해서웨이의 연기 대결은 거의 불꽃이다. 채스테인은 77년생이고 해서웨이는 82년생이다. 여전히 뛰어난 미모를 유지하면서들, 연기력은 보다 더 고급스러워지고 지적이면서, 매력적이고 육감적이 됐다. 둘 다 연기력 면에서 지금이야말로 전성기임을 보여 준다. 두 여배우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찾아볼 만한 작품이다. 지난 3일 개봉됐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면 60년대 초 미국의 한 가정사를 보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갖는 위기의 정서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불안하고 불길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건 달라지지 않았다. 엄마가 무너지면 가정이 붕괴한다. 모성이 왜곡되면 사회가 망가진다. 그건 언제 어디서나 다른 말로도 적용되고 응용될 수 있는 명제이다.
넷플릭스가 3월 초 공개했던 송중기 주연의 영화 ‘로기완’은 대단히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잘못 만든 작품이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특이한 소재의 영화였고 북한, 탈북, 난민이라는 정치적 개념을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새로웠다. 배우들도 안정적이다. 특히 조연들, 서브 텍스트 인물들이 흔들리는 드라마 전체를 탄탄하게 받쳐 낸다. 로기완 삼촌 역의 서현우와 엄마 역의 김성령은 일단 이 영화의 시작을 좋게 만든다. 연변 여자로 로기완의 고기 공장 선배 격인 선주 역의 이상희는 늘 그렇지만 연기가 최고 급이다. 변호사 역으로 나온 강길우, 여자 주인공 마리의 아버지 역으로 나온 조한철도 영화 전체를 안정적으로 받쳐 준다. 심지어 마리의 죽은 엄마 역의 이일화도 나쁘지 않다. 이 영화는 어쩌면 캐스팅이 살린 작품이다. 여주인공 마리 역을 맡은 최성은은 잘 하지도 못하지도 못했다. 그건 순전히 이 마리라는 캐릭터가, 당초 영화가 추구했던 작품의 방향(그런 게 만약 있었다면)에 비해 지나치게 과장되게 ‘운행됐기’ 때문이다. 그녀는 갱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격 도박판의 선수이다. 마리는 술과 약물, 무엇보다 폭력에 휩싸여 살아가는 위험한 상태의 여자이다. 그럼에도 배역을 맡은 최성은(‘시동’ ‘젠틀맨’)은 최선을 다한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비해 로기완 역의 송중기는 오랜 경력의 배우답게 부드럽고 순조롭게 연기를 이어 간다. 다소 ‘쉽게 간다’는 느낌까지 줄 정도이다. 이 영화의 최대 실수는 결말이다. 감독 김희진의 선택인지, 제작사 용필름의 임승용 프로듀서의 결정인지, 아니면 넷플릭스의 압력이었는지(넷플릭스는 최소한 그런 짓은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모르겠으나 마지막을 꾸려 간 서사의 방식은 전형성의 식상함을 벗어나지 못해 인상을 찌푸리게까지 한다.(풀 샷 화면 양쪽에서 달려오는 두 남녀의 씬이란...70년대 한국 영화 화법이다.) 무엇보다 앞의 서사와 역설적으로 충돌하는 선택이기도 했다. 주인공 로기완은 살아남는 것 외에는 모든 게 사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의 현재적 삶의 조건이 그런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마지막 결말은 그가 그렇게 얘기했던 사치의 극단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많은 관객들, OTT 시청자들이 이 영화의 결말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평자의 입장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이다. 로기완의 남한식 이름은 노기완이겠다. 1990년 12월 1일 생이고 북한 자강도(과거의 평안북도와 함경북도의 일부를 통합한 구역) 우서군 출신이다. 그곳 하상협동농장 관리위원회 제7작업실에서 태어났다. 그는 무슨 일엔가에 연루돼 북한을 탈출했으며 그 과정에서 어머니를 잃었다. 로기완은 탈북자 신분으로 벨기에에 왔지만 도통 정치적 난민의 자격을 얻기가 쉽지 않다.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국가가 지원하는 생활비를 얻을 수 있다. 거주민 자격을 얻으면 취직도 가능하고 여러 합법적인 경제활동이 가능하다. 그래서 모든 정치적 망명자들이 난민 자격을 따내려고 애를 쓴다. 경쟁이 이만저만 치열한 것이 아니다. 그 자격을 얻기까지 많은 난민들은 불법체류의 노동에 시달린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해당 국가 내의 폭력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해당 국가 공권력의 행사 때문에 빚어지는 일일 수도 있지만 가장 심한 것은 자국 노동자들의 차별 때문이다. 자국 노동자들은 난민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늘 그들은 불법 이주자들을 걷어차고 침을 뱉으며 (얼마 되지도 않는) 가진 걸 빼앗아 가려 한다. 그리고 늘 이렇게 얘기한다. “니들 나라로 돌아가!” 난민들이 가는 나라마다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판을 치는 이유이다. 로기완도 이런 폭행을 수없이 겪는다. 영화 ‘로기완’은 유럽의 한 탈북민이 겪는 처참하고 치열한 생존기이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탈북자들에 대한 우리의 감정 역시 꽤나 양가적(兩家的)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탈북자들에 대해 모순과 이중적 감정을 지녀 왔다. 하나는 강고하고 지독한 북한식 사회주의 독재(조선왕조 공산주의)에서 탄압받았던 약자의 인물이라 해서 동정하고 지지하는 반면 또 한편으로는 이들이 남한 내에서 극우적 정치인이나 극보수의 기독교도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편승해 우리 사회 내 사회민주화를 방해하는 기회주의적인 인물들로 치부하곤 한다. 영화 ‘로기완’은 탈북민들에 대한 우리의 위선적이고 중첩된 시각을 비껴가게 한다. 탈북민은 어떤 지옥에서라도 살아남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고 세상은 늘 지옥에서 살아 남는 자들이 지옥을 만든 자들을 이기는 법이다. 로기완의 엄마는 죽어 가는 와중에 너는 죽지 말고 어떻게든 꼭 살아남으라며, 여기 말고 어디 좋은 데로 가서 인간답게 살다 죽으라는 유언을 남긴다. 로기완은 어머니의 시신을 시체 해부용으로 병원에 판 돈으로 지옥의 땅을 벗어 난다. 엄마의 몸뚱이를 판 돈으로 그는 자유를 얻으려 한다. 그러나 그의 속마음은 엄마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그건 로기완의 나중에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깨달은 사실과 맥락이 같은 것이다. 자신과 같은 (정치적 난민은) 벨기에(같은 국가의 땅에서) 살 권리도 없지만 떠날 권리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어머니의 돈으로 자유를 얻으려 하지만 정치적 자유가 곧 정신적 자유까지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그는 오랜 기간, 상처(그의 왼쪽 손목에 나있는 면도날 자국)와 트라우마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 ‘로기완’은 따라서, 그런 처절하면서도 절절한 비극적 정서에 좀 더 몰입되어야 했던 작품이다.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가져가야 했을 주조(主潮)였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제 북한이니, 탈북이니 하는 얘기의 영화는 성공 가능성이 없다. 제작사 용 필름(‘뷰티 인사이드’ ‘독전’ 등)이 걱정했던 것은 바로 그 점이었을 것이다. 원작에는 거의 없는 캐릭터 마리가 과도하게 증폭된 이유이다. 제작자와 감독은 이 영화를 대중적인 분위기로 만들기 위해 ‘로맨스와 액션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당히 넣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너무 나갔다. 둘의 연애가 너무 달콤하고 순진하며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들기도 한다. 심지어 다소 갑작스럽다. 특히 마리가 아버지에게 엄마의 안락사 과정을 추궁하는 장면은 식상함의 극치이기도 하다. 마리는 오랜 투병 생활을 한 엄마의 죽음을 오직 아빠의 책임으로만 묻는다. 그녀는 엄마의 추도 모임에서까지 약에 취해 난동을 피운다. 오히려 현실성이 떨어지는 장면을 더러 넣은 것을 이해하기 힘들다. 편집에서 과감하게 들어냈어야 옳았다. 원작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는 탈북자 로기완을 만나기 위해 벨기에에 온 한 르포라이터 작가인 김 작가가 주인공인 이야기이다. 그녀, 김 작가는 로기완을 만나지는 못하지만(그는 이미 영국으로 떠났다.) 박이라는 사람을 통해 그의 일기장을 전해 받는다. 원작에서 아내가 안락사로 숨을 거두는 사람은 바로 이 박이라는 한인공동체 봉사 요원이다. 김 작가는 한국 출판사에 자신을 연모하는 사람이 있지만 박을 통해 로기완과 교감하기 시작한다. 소설의 주인공 김 작가가 결국 깨닫는 것은 우리 모두가 사실은 ‘난민적’ 존재라는 것이며 난민들이 정착을 원하듯 우리 모두도 (정신적) 정착을 원한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영화 ‘로기완’은 원작의 모든 캐릭터를 병합하거나 분리하고, 전혀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 내면서까지 원작과는 다른 선상에 놓일 만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데 주력한다. 결과는 원작과는 달리 다소 상업적이고 대중적이 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영화 ‘로기완’이 아까운 것은 그 지점에 놓여 있다. 적절한 작품성과 문학성, 적절한 상업성과 대중성을 혼합해 균형을 맞췄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걸 보여 줄 수 있는 게 바로 엔딩 장면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열린 결말로 가야 했을 것이다. 혹여나 마지막 장면(그게 설마 마다가스카르라고 얘기하지는 말지니)이 로기완의 상상이자 판타지였다고 말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제발 그거였으면 좋겠다. 평론가로서 진정으로 바라는 바이다.
영화는 종종 도덕의 수많은 회색 지대를 탐색한다. 그래서 영화는 종종 불편하다. 심지어 불온하기까지 하다. 섹스와 성의 얘기가 정치적 선택의 영역까지 확대되기도 한다. 금기의 선을 넘는 것, 그 금기의 선을 만든 사람과 제도, 시스템에 의문을 표시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제96회 아카데미상 각본상 후보에 올랐고 지난해 5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경쟁작이었던 토드 헤인즈 감독의 ‘메이 디셈버’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을 수 있)는 작품이다. 제목인 메이 디셈버는 ‘메이 디셈버 어페어(May December Affair)’의 준말이다. 원래는 늙은 남자와 어린 여자와의 섹스 스캔들, 일종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식의 로리타 스캔들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영화 ‘메이 디셈버’는 성 관계가 바뀌었다. 나이 든 여자와 어린 소년의 섹스 스캔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레이스(줄이앤 무어)와 조 유(찰스 멜튼) 부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부부다. 아내는 59세이고 남자는 36이다. 24년째 살고 있는 부부이다. 이들은 여자가 36살이고 남자가 중1 때인 13살 때 만났다. 두 사람은 여자가 일하던 펫 숍 창고에서 섹스 행각을 벌이다 발각돼 세간에서 엄청난 비난을 샀다. 그레이스는 투옥됐고 감옥 안에서 남자아이의 아이를 낳았다. 현재는 딸과 쌍둥이 남매 등, 3남매를 키우고 살며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도 아이들이 있다. 현재의 젊은 남편 조 유는 한국계이다.(실제 배우인 찰스 맨튼도 어머니가 한국인인 코리안 아메리칸이다.) 그레이스의 증언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그는 조숙했다고 한다. 그레이스는 진심으로 조 유에게 빠졌다고 주장해 왔다. 둘은 극 중에서 말다툼을 벌이는데 그레이스는 조에게 “그때 (우리의 관계를) 리드했던 게 누구야? 누구였어?”라고 따진다. 조와 그레이스는 안 그런 척, 과거가 누르는 무게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며 살아 간다. 영화 ‘메이 디셈버’가 특이한 것은 이중의 액자 구성처럼 돼있다는 것이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늙은 여자와 젊은 남자의 애정행각을 직접 다루기보다는 그 앞에 캐릭터를 한 명 배치한다. 이 둘을 관찰하는 여배우 엘리자베스(나탈리 포트만)인데 그녀는 얼마 전 둘의 이야기를 다룰 예정인 영화에서 그레이스 역으로 캐스팅됐다. 여배우는 자신의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이 부부의 집을 방문해 그들을 탐색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영화 속 영화를 찍기 위한 한 여배우의 사전 리허설 같은 맥락으로 구성돼 있다. 따라서 영화는 실제 사건을 다루고(메리 케이 레트루노 스캔들이 모티프가 됐다.) 그 과정에서 관객들은 한 번 걸러지는 시선 처리를 경험하는 셈이 된다. 관객들은 영화 속 여배우의 생각으로 둘의 관계를 지켜보게 되는데 그게 결국 자신의 생각과 동일하게 될지는 모를 일이다. 토드 헤인즈는 그 부분에 대해 관객들이 스스로 선택하게 만든다. 이건 과거 그가 만든 ‘캐롤’이라는 레즈비언 영화에서도 썼던 방식이다. 여배우 엘리자베스는 TV 시리즈로 꽤나 유명해진 스타인만큼 그레이스–조 부부의 집인 조지아주 서배너까지 온 김에 부부의 고등학생 딸의 학교에 가서 특강 아닌 특강 초청을 수락하기도 한다. 한 남학생은, 남자 애 답게, 다소 천박한 질문을 던진다. 선생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섹스 연기는 어떤 가요?”라고 묻고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답한다. “오랜 시간 벌거벗고 서로를 비비고 껴안고 있으면 사람들이 지켜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쾌감을 느끼는 척 연기를 하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쾌감을 느끼지 않는 척 연기를 하고 있는지 구별이 안될 때가 많다.” 완벽한 메소드 연기의 본질에 대한 설명이다. 학생들 대부분은 이해를 못 하지만 그레이스의 고등학생 딸은 나중에 엘리자베스가 연기할 자기 엄마의 모습이 어떻게 그려질지 상상하게 되고 불쾌감을 느낀다. 영화가 다루는 세상의 진실은 진실인 척하는 건지, 진실이 아닌 척하는 건지 구분하기 힘들다. 토드 헤인즈 감독과 감독을 대신하는 주연배우 나탈리 포트만은 그레이스란 여자가 도덕적인 척하는 건지, 아니면 도덕적이지 않은 척을 하는 건지, 더 나아가 자신들의 영화가 도덕을 옹호하는 건지 그 같은 도덕의 선을 만든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건지 애매모호할 뿐이다. 그레이스의 고등학생 딸처럼 불쾌하고 기분 나빠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도덕의 무한한 회색 지대’가 주는 철학과 통찰, 삶이 지혜를 구하려 할지는 보는 사람들의 선택의 문제일 수 있다.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보수 성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이 영화의 내용에 대해 질타할 수도 있다. 30대 성인 여자는 10대 초반의 미성년 남자와 성관계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이 거의 전 세계에서 공인하고 있는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고, 시각을 조금 달리하면, 나이 많은 노인 남자가 어리고 젊은, 심지어 소녀를 취하고 유린하는 것에 대해 오랜 역사와 시간 동안 묵과해 왔으며 그걸 범죄로 규정한 것은 현대에 이르러서 였을 뿐이다. 아직도 일부에서는 노인이 젊은 여성을 취하는 것에 대해 ‘회춘’ 운운하며 관행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성년의 여성과 미성년의 남자아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혹독한 징벌을 내리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라고 이 영화는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면에서 영화 ‘메이 디셈버’는 꽤나 여성주의적 시선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이야기의 액자 형 구성답게 영화는 중간중간 카메라 트래킹(카메라가 피사체를 죽 따라가며 찍는 것)으로 관객들을 영화 안으로 이동시킨다. "자 이제부터 당신은 영화 안으로 들어갑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스의 집으로 찾아 들어갈 때 엘리자베스의 시점 샷으로 관객들을 그레이스의 집으로 인도한다. 엘리자베스가 30대의 그레이스와 어린 조가 섹스를 하다 들켰다는 펫 숍의 창고로 들어가는 장면도 같은 방식으로 찍었다. 그레이스는 그 좁은 창고 안으로 들어서면서 그레이스가(로 빙의) 돼 소년을 안는 자신을 느껴 보려 한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관객들에게 엘리자베스의 느낌을, 그때의 그레이스의 느낌을 당신들도 가져 보라고 권한다. 욕정일까, 사랑의 욕망일까. 토드 헤인즈는 극중 인물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전이시키는 데 있어 섬세하면서도 천재적인 연출력을 갖춘 감독이다. 뛰어 나다. 미셸 르그랑과 마르셀로 자르보스가 만들어 낸 음악은 영화가 대사 없이 음악만으로도 내면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매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영화음악 때문에라도 인간의 삶은 매우 복잡한 내면을 지녔음을 느끼게 해 준다. 그건 엘리자베스의 엄마가 대학교수로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대해 가르쳤고 그레이스의 엄마는 블루베리 파이 레시피를 남긴 평범한 여자였지만 엘리자베스와 그레이스는 결국 서로의 안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얘기이다. 인생의 복잡성을 이해하면 상대에 대해 관용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는 이 장면을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두 여자의 투 샷으로 보여준다. 그 처리의 연출 방식이 기가 막히다. 두 여배우의 연기도 기가 막히다. 불꽃이 튀긴다. 이 영화 ‘메이 디셈버’는 따라서 그냥 흘려보낼 그럴 영화가 아니다. 그럼에도 소재 탓인지 한국 극장가는 홍보를 주저하고 있다. 아쉬운 일이다.
세상의 영화가 ‘파묘’와 ‘듄 파트 2’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극장의 한편에서 조용히 상영되고 있는 일본 영화 ‘오키쿠와 세계’란 작품도 있다. 하늘에 구름이 있으면 땅에는 똥이 있는 법이다. 그렇다고 ‘파묘’와 ‘듄 파트 2’가 천상의 영화이고 ‘오키쿠와 세계’가 ‘똥 같은’ 작품, 곧 졸작이라는 얘기 따위는 결코 아니다. 세상의 고귀함과 비천함은 다르지 아니하며 손바닥 안과 손바닥 밖의 차이일 뿐이라는 얘기이다. 영화는 늘, 그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이쪽 저쪽 모두를 찾아봐야 한다. 물론 ‘오키쿠와 세계’는 똥 얘기로 가득 차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 두 명, 야스케(이케마츠 소스케)와 츄지(칸 이치로)의 직업은 ‘똥 장사’이기 때문이다. 두 청년은 에도(도쿄)를 돌며 똥을 사(퍼) 와서는 채소밭 농부에게 거름으로 파는 일을 한다. 1860년대 즈음해서 그 앞뒤로 한참 동안 그런 ‘비천하고 비루한’ 직업이 있었다. 야스케와 츄지는 주로 빈민가 공동주택을 돌며 똥을 푸는데 여기에는 몰락한 사무라이의 딸 오키쿠(쿠로키 하루)가 살고 있다. 이 셋이 처음 만나는 곳도 동네 변소 앞이다. 츄지는 헌종이를 구해 떼다가 파는 일을 하다 비를 피하던 와중에 마침 똥을 푸던 야스케를 만나게 되고 그의 일에 합류하게 된다. 여자 오키쿠는 변이 급해 종종 거리다가 이 둘을 만나게 된다. 셋은 똥으로 엮여 만나게 되고 각자 똥 같은 일, 똥보다 못한 세상살이를 겪지만 점점 더 서로를 위하게 되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오키쿠는 무사들 간의 이상한 싸움에 휘말리는데 순전히 세상 물정 모르는 사무라이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는 칼에 베여 죽임을 당하고 오키쿠 역시 성대가 잘려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똥 푸는 청년 야스케 역시 툭하면 끝물인 사무라이들에게 봉변을 당한다. 사무라이들은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채 집안에서 노름이나 하며 똥만 싸대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똥을 사러 온 야스케에게 돈을 더 내라며 행패를 부리기 일쑤이다. 한편 야스케의 똥을 사는 채소밭 주인은 똥통의 똥이 반밖에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다가 야스케에게 똥통을 들이붓기까지 한다. 졸지에 똥 세례를 받은 야스케는 분노하기보다는 킬킬 거리며 동료이자 동생인 츄지에게 이럴 때는 웃어야 한다고 말한다. 야스케는 소리친다. “이 똥 같은 세상 똥이나 먹으라고 했더니 정작 내가 먹고 있잖아!” 영화 ‘오키쿠와 세계’는 바로 이런 얘기로 돼 있으며 서장과 종장을 제외하고 총 7장으로 구성돼 있다. 영화는 계속해서 똥, 똥, 똥 얘기를 해대고 있고 야스케가 심지어 손으로 막 똥을 퍼 담을 때 약간 구역질이 느껴지기도 하지만(그 구토의 효과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영화를 모두 흑백으로 찍은 것일 테지만) 점점 더 진짜로 비위를 상하게 하는 일은 다른 데 있다는 것을 느끼게 만든다. 똥은 똥이로되 똥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오키쿠와 세계’는 똥을 매개로 한 은유가 가득한 척 사실은 매우 직설적인 작품이다. 세상은 똥 같은 존재라는 강렬한 야유로 가득하다. 에도의 공동주택에 장맛비가 쏟아지고 골목에는 공중변소에서 넘친 똥물로 가득해진다. 한 남자가 미닫이문을 열고 밖을 보며 인상을 잔뜩 구긴 채 말한다. “구린내가 진동하는군. 정말 형편없는 동네야” 에도의 동네 골목길이든 지금의 세상이든, 영화 ‘오키쿠와 세계’는 현재의 일본, 더 나아가 세계 모든 나라가 똥처럼 엉망이 돼 있음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영화는 때로, 아니 종종, 어떤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었고, 그걸 왜 지금 이 시기에 만들었으며, 한편으로는 그것을 어떤 사람, 곧 누가 만들었느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는 일본의 중견 감독 사카모토 준지가 만들었으며 시대 배경은 1858년에서 1860년으로 넘어가는 길목이다. 그렇다면 사카모토 준지는 왜 지금, 하필 이 시기에 ‘오키쿠와 세계’라는 똥 애기 가득한 기이한 서사의 영화를 내놓을 생각을 했을까. 1858년과 1860년은 일본 근대사에 있어 극도의 혼란기이자 전환기였던 때이다. 1853년 일본은 미국 페리 함대에 의해 미일 수호 통상조약이라는 불평등 협약이 맺어지고 강제 개방과 개항이 이루어진다. 그 직후 일본은 600년을 지켜 온 막부 정권이 몰락하고 천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을 모색하는, 메이지 유신이 진행된다. 대정봉황(大政奉還 : 막부를 폐지하고 권력을 천황에게 바친다)을 통해 메이지 유신이 단행된 것은 1868년이다. 영화 ‘오키쿠와 세계’는 그 와중에 벌어지는 소소하면서도, 아주 작은 이야기인 척한다. 서사는 작지만 주제는 크다. 작은 골목길의 똥 얘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메이지 유신기 전체, 더 나아가 현대 일본 사회에까지 다가서려 하는 작품이다. ‘오키쿠와 세계’는 이전의 권력과 새로운 권력이 교체되는 대 혼란기의 와중에도 서민과 빈민, 낮은 계층과 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겪는 삶은 변하는 것이 없으며, 또 없어 왔다는 점을 보여준다. 정치는 1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무용하다. 적어도 감독인 사카모토 준지는 그렇게 꿍얼거리고 있는 셈이다.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말하는 새로운 인물들이라고 해 봤자 사람들의 생활고, 더 나아가 인생고는 좋아지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한다. 특권은 더욱 특권화될 뿐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키쿠와 세계’에 나오는 하층 계급의 세 남녀 주인공은, 자신들의 고단한 삶을 지켜주고 버티게 할 수 있는 힘은 결국 자신들 스스로에게 나온다는 점을 깨닫는다. 그 젊은 연대야말로 이 ‘똥 같은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뀔 수 있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처음에 오키쿠는 사무라이 딸로서의 자존심이 하늘을 찔렀던 여자이다. 변소 앞에서 야스케를 만나서는 (똥 푸는 남자인 주제에)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식으로 대한다. 자신은 아무리 세상이 변해 간다 한들 엄연히 사무라이 집 안의 딸이라는 것이다. 한편 그녀는 헌 종이를 떼다 파는 일을 하던 중인 츄이는 살갑게 대한다. 오키쿠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을 하며 종이는 지식인의 행위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키쿠는 처음에 지식인의 허위의식, 1850년대 당시 상층부에 기생하며 살아가던 사무라이들의 위선을 그대로 보여 준다. 그녀가 야스케에게 친절한 마음을 갖게 된 것, 야스케처럼 결국 똥 장사가 된 츄지를 사랑하게 된 것은, 그녀의 성대가 다른 무사들에 의해 잘리고 난 이후이다. 그녀는 그 일로 언어장애인이 됐는데 그 같은 변화는 그녀로 하여금 사무라이의 딸이라 해 봤자, 곧 당대의 지식인이라고 해 봤자 발언할 수 있는 능력,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면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차이가 없음을 자각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오키쿠는 그런 점에서 감독인 사카모토 준지의 예술관을 투영시키고 있는바, 말하는 자=>글을 읽고 쓰는 자=>지식인=>예술을 할 수 있는 자=>영화를 만드는 자는 끊임없이 낮은 데로 임하는 자세와 태도를 지녀야 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카모토 준지는 일본 영화계에서 일종의 ‘상남자’ 대우를 받는다. 그만큼 그는 선이 굵은 남성성이 강한 영화를 만들어 온 것으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사회성과 정치적 주관이 강한 작품 역시 거리낌 없이 발표해 세간의 주목을 받아 왔으며 논란도 자초했다. 2000년작 ‘얼굴’과 같은 작품은 섬뜩한 살인 미스터리 극으로 사카모토 준지의 연출 예각이 얼마나 날카로웠는지를 보여 준다. 김대중 납치사건을 모티프로 한 ‘케이티(2002)’같은 영화는 그의 정치 감각이 다소 혼란스러움을 드러냈던 작품이었다. 한국의 채민서를 캐스팅하면서까지 ‘큰 영화’로 키우려 했던 2007년작 ‘망국의 이지스함’은 평화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일본 자민당의 정치 성향을 옹호하는 듯해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사카모토 준지가 다시 강렬한 사회파 영화로 돌아온 것은 2010년의 ‘어둠의 아이들’이었고 그 이후 많은 작품을 발표해 왔지만 한국에서는 ‘망국의 이지스함’ 이후 지금까지 명성을 회복하지 못해 왔다. 이번 ‘오키쿠와 세계’는 그의 연출 감각이 녹슬지 않았으며 정치적으로도 자신 특유의 아나키즘을 회복한 것으로 보여 준다. 세상은 똥이다. 똥 같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 똥을 더러워 하거나, 무시하거나, 피하거나, 남에게 던지거나 하면 안 될 일이다. 그 같은 깨달음이 세상을 바꾼다. 변혁은 거기서 시작된다.
2018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일본의 미래사회, 정확하게는 일본의 10년 후에 대해 가한 예측은 많은 부분이 정확하지가 않다. 그는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에 신인 감독 5명을 기용해 ‘10년’이란 제목의 옴니버스 영화를 만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이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로 나뉘게 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전혀 생각지 못했다. 따라서 영화 ‘10년’은 역설적으로 미래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 대한 영화이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우리가 그동안 미래 예측을 하는 데 있어 이른바 돌발 변수들을 얼마나 고려하지 않고 살아왔는가를 보여 준다. 우리 모두 코로나가 과거 흑사병 같은 팬데믹이 될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영화는 인간의 상상을 기초로 하고 그런(상상하지 못했다는) 면에서 영화 역시 뒤처지고 말았다. 영화 ‘10년’은 그런 의미, 우리의 오류와 영화의 오류, 특히 세계적 거장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오류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흥미를 가지고 지켜볼 만한 영상 기록물이다. 무엇보다 10년으로는 세상이 그렇게 바뀌지 않는다. 물론 10년 사이에 별의 별 앱의 개발이 뒤따르고(예를 들어 2018년에서 6년이 지난 2024년에 한국 경기도에서는 ‘똑버스’라는 마을버스 앱까지 개발이 됐다. 마을버스를 콜택시처럼 부를 수 있는 서비스 앱이다.) 디지털 정보시스템이 엄청나게 업그레이드되겠지만 그것들에 사람들이 철저하게 더 종속이 될지 아니면 오히려 반대로 그런 테크놀로지를 거부하며 자연주의로 돌아가 살아갈지는 그 누구도 모를 일이다. 10년을 텀으로 미래 사회의 변화를 예측하는 건 그래서 올바르지 않아 보인다. 그건 10년이란 기간이 턱없이 짧아서가 아니라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작고 디테일한 변화가 뒤따를지를 예상하기란 도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잘한 변화가 많을 것이다. 넷플릭스에 올라 있는 영화 ‘10년’은 모두 다섯 개의 옴니버스 영화로 돼있다. ‘플랜 75’와 ‘청개구리 동맹’ ‘데이터’ ‘그 공기는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등 각각 20분 안쪽의 작품들이다. 영화적으로는 거의 다 뛰어나지 못하다. 습작 수준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정말 신인감독 차원에서 연출을 맡긴 작품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럼에도 각 영화가 갖고 있는 설정과 주제의식만큼은 높이 살 수 있고 일본 사회를 비롯해 지금의 인류가 안고 살아가는 고민의 실체를 공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작품이다. 미래사회를 그리는 모든 영화는 사실 미래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현실의 불안증에 대한 것이다. 이런 류의 영화가 대체로 디스토피아적인 이유이다. 비관의 지성주의가 하늘을 찌를 정도다. 첫 에피소드인 ‘플랜 75’는 안락사 얘기이다. 75세가 되면 사람들은 안락사 신청을 할 수 있게 된 사회를 그린다. 일본 후생노동성 공무원들은 정부의 플랜 75 캠페인을 통해 안락사를 적극 유도하고 있는바 지하철로 가는 쇼핑몰 같은 곳에 무료 상담소를 만들어 홍보를 할 정도이다. 일본 정부가 추진하는 안락사 정책의 이유는 자명하다. 75세 이상의 복지 문제, 그 비용과 예산을 이제 더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일본 사회가 고령화됐으며 그 부담을 젊은 층에게 전가시키지 않기 위해 노인들을 ‘죽이기로’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합법적 자살 방조 정책’의 대상에 전 노인이 모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중산층과 상류층의 노인들은 여기에서 제외된다. 후생성의 간부는 직원 교육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여전히 활발하게 소비를 하는 사람들이다.” 안락사도 계급과 계층에 따라 적용되는 시대와 사회가 됐음을 보여 준다. 단편 ‘플랜 75’는 결국 피치 못할 선택처럼 여겨지는 존엄사의 문제가 언젠가 사회계급적 갈등의 이슈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그 불안증에 대해 얘기하는 내용이다. (존엄사를 소재나 주제로 한 작품들이 모든 대중예술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을 정도로 세계 공통어가 되고 있는 요즘이다. 국내에서는 남유하란 작가가 쓴 근미래 소설 『다이웰 주식회사』가 이 부자연스러운 죽음의 사회학이 지닌 계급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와 묘하게 닮은 점이 있다.) 작품이 갖고 있는 주제의식의 심각성과 드라마틱한 이야기 구조 때문인지 이 ‘플랜 75’는 장편으로 확장됐으며 지난 2월 7일 국내에 개봉됐다. 장편의 이야기는 많이 달라졌다. 안락사=존엄사를 놓고 씨줄날줄로 얽힌 캐릭터가 4명인데 중심인물은 죽음을 선택하려는 78세 노인이다. 여기에 이 노인을 죽음으로 유도하는 시 공무원이 있다. 콜 센터 여성은 노인의 고민을 들어주는 역할이다. 유품 정리사인 필리핀 노동자 여성도 있다. 이들 4명의 일상의 언어는 죽음이다. 편안한 죽음. 웰 다잉. 사람이 아무리 좋은 죽음을 기획한다 해도 죽음은 죽음이다. 죽음이 일상어가 된 사회는 어둡고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플랜 75’의 장단편 영화를 만든 하야카와 치에 같은 일본의 젊은 감독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얼마나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플랜 75’의 결정적인 하자는 고령층이 ‘죽어 줘야 할’ 기준의 나이를 너무 낮게 잡았다는 것이다. 75세라면 너무 젊다. 요즘 세상에서 죽기엔 아직 아까운 나이 소리를 듣는다. 물론 영화의 설정이 물리적 나이의 중요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재정에 피해를 끼치는 노년계층이냐 그렇지 않은 존재이냐에 주어져 있는 것이기는 해도 영화를 보고 있으면 지금과 같은 시대로서는 다소 과장된 설정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나이 대를 훨씬 높이거나 아니면 아예 없애는 식의 설정이 보다 현실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단편 ‘플랜 75’ 외에 영화 ‘10년’의 나머지 4편은 일본 사회의 통제된 교육 시스템의 문제나 후쿠시마 오염 사태 등 환경 이슈, 자위대 해외파병의 논란에 대해 다루는 내용들이다. 이들 단편들을 대체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사고(思考)는 일본의 군국주의로의 회귀를 극도로 우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문제는 과거 자신들이 저질렀던 과오를 오히려 영광의 시절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고 보는 듯하다. 이들 군국주의 향수론자들이 또다시 일본 사회를 훼손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이다. 넷플릭스 옴니버스 영화 ‘10년’은 일본 사회의 현재적 고민이 어떠한 것들이며 또 얼마만큼 깊은 것인가를 보여 준다. 일본의 고민은 우리의 고민일 수 있다. 모든 사회의 극우는 극우끼리 통하고 진보는 진보끼리 통한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영화가 고민하고 두려워하는 미래사회의 모습은 우리가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하는 실체와 별반 차이가 없다. 이 영화 ‘10년’ 그리고 확장 버전 ‘플랜 75’를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장편 ‘플랜 75’의 영화적 완성도는 만만치 않다. 괜히 단편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장편으로 만드는 게 아니다.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영화 ‘덤 머니’는 미안한 얘기지만 흥행이 잘 될 영화는 아니다. 주식 투자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에 도통 집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주식 투자에 능통한 사람들은 이런 영화에, 역시 도통,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영화에 대한 관심 따위, 돈에 대한 것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돈이 많은 자들은 영화를 잘 보지 않는다. 영화는 대체로,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이 즐기는 대중 예술이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주식을 하지 않는다. 아니 주식을 할 돈이 없다. 그러니 주식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니까 결론은 ‘덤 머니’라는 영화는 돈 없는 사람들도 내용을 잘 몰라서 안 보게 되고 영화를 우습게 하는 돈 많은 부자들은 관심이 없어서 안 보게 되는 작품이다. ‘덤 머니’가 미국 영화임에도 극장에 많이 걸려 있지 않은 이유이다. 이 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지 낮은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은 영화 42분쯤에 나오는, 한 경제뉴스 채널의 앵커 멘트를 한 번에 알아듣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달려 있다. 멘트는 다음과 같다. 헤지펀드들이 ‘게임스탑’에 공매도를 시작했는데 공매도는 해당 주식이 떨어져야 돈을 버는 시스템이죠. 그런데 헤지펀드들에겐 안된 이야기지만 개인들이 그 주식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WSB(월스트리트 베츠)라는 유치하고 과격한 커뮤니티가 ‘게임스탑’에 대한 헤지펀드의 공매도가 과한 수준인 것을 알고 월가의 큰 손들을 혼내기 위해 조직적인 구매운동을 시작한 겁니다. 레딧의 혁명가들이 월가의 볼기짝을 때리고 있죠. 적어도 세 가지 곧 헤지펀드와 공매도, 레딧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 레딧은 www.reddit.com으로 미국의 뉴스 SNS이다. ‘덤 머니’가 다루는 핵심적인 내용은 공매도이다. 그러니 공매도를 알아야 한다. 공매도. 한자로 쓰면 空賣渡이다. 영어로 얘기하면 Short selling이다. 역설적이게도 공매도의 개념은 한자로 보면 이해가 간다. 빌 공, 혹은 가짜 공이다. 가짜로 매수매도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것인 바, 지수(수자) 금융자본주의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공중에서 상대의 주식을 빌리고 그것을 액면 가로 시장에 내다 판 후 주식이 떨어지면 다시 사서 빌린 주식을 갚는 것이다. 5천 원짜리 주식 10주를 빌려 5만 원에 팔고 주가가 3천 원으로 떨어지면 10주를 사서 갚는다. 그러면 3만 원이 든다. 내게는 2만 원이 남는다. 한 마디로 공중에서 숫자만 날아다니는 거래이지만 잘만 머리를 쓰면 실물의 돈이 들어올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런 거래가 개인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자본력을 지닌 금융자본가들이 자기끼리 회사나 펀드를 만들어(헤지펀드) 진행한다고 하면 한 마디로 돈 놓고 돈 먹기가 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돈 다발’ 영역에 일반인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갖가지 제어 장치를 해 놓는다. 특정 거래소, 자신들의 웹 사이트, 자기들이 만든 온 라인 계좌만을 이용하게 하는데 운용 규범을 아주 까다롭게 만들거나 그러면서도 사용자들에게 막대한 수수료를 챙겨 먹는다. 증권가 큰 손들은 도랑치고 가재 잡는다. 크레이그 길레스피 감독(‘아이, 토냐’ ‘크루엘라’ 등 다수)이 만든 ‘덤 머니’의 덤 머니는 개인 투자자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개미 투자자들의 돈을 말하는 속어이다. ‘덤 머니’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며 2021년 코로나로 세상이 난리를 겪을 때 벌어진 월스트리트의 일대 사건을 극화한 것이다. 키스 길이라는 무명의 증권 애널리스트(폴 다노)는 어느 날 게임스탑이라는 컴퓨터 디지털 기기 회사의 주식이 지나치게 저평가 돼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유튜브로 유저들에게 게임스탑 주식의 매수를 권유한다. 사건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게임스탑은 공매도 리스트에 올라가 있으며 주식 큰 손들은 이 회사의 주식을 ‘인위적으로’ 계속해서 떨어뜨리는 ‘합법의 작전’ 혹은 ‘제도적으로 허락한 주가 조작 행위’를 진행시킨다. 키스 길의 제안은 개미 투자자들의 관심을 사고 무려 800만 명이 매수를 시작한다. 주가는 20달러에서 350달러까지 치솟고 주가가 오르면, 이를 되사서 갚아야 하는, 그래서 오히려 큰 손해를 보게 되는 헤지펀드들은 막대한 손실액을 방어하기 위해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결국 ‘개미들’의 주식 거래를 갑자기 차단하는지 하는 방식으로 공매도 주가의 조정에 나선다. 그러자 곧 사태는 게임스탑이라는 회사를 가운데 놓고 벌어지는 월가 금융가 Vs 일반 개미들의 싸움으로 확대된다. 개미 투자자들, 일반인들은 게임스탑 사태를 부르주아에 항거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저항, 곧 프랑스 혁명처럼 받아들인다. 2021년 미국 월가의 게임스탑 사태의 과정이다. 크레이그 길레스피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웠던 것이 분명하다. 하나는 공매도를 포함해 지금의 금융 자본주의, 혹은 지수 자본주의의 허점을 분명히 얘기하겠다는 것이고 지금과 같은 체제와 시스템으로는 공정한 거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키스 길이 미 하원 금융조사소위 앞에 나가(코로나 때여서 PC 줌으로) 하는 증언은 이 영화가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그는 조사 위원이, 내부 정보 없이 어떻게 게임스탑 사태를 알 수 있었느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예측한 게 아닙니다. 주식을 면밀하게 추적했습니다. 임계 증권 목록, 주문 흐름, 매수 정지 등의 요인이 해당 주식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가 시장의 내부 작동 원리에 무지한 결과입니다. 터무니없는 공매도 비율과 공매도 세력의 시장 조작과 증권사의 정산 지연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스템이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식 시장의 개념은 공정한 운동장으로 머리와 운이 따른다면 돈을 벌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제 머리와 운도 통하지를 않습니다. 대기업들이 기술과 정보에서 크게 앞서가고 재력으로 밀어붙이니 개인은 희망이 없는 것이죠.” 감독 크리스 길레스피의 작품 기획의 또 다른 전략 하나는 키스 길 같은 특정한 한 사람의 영웅보다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들, 개미 투자자들을 가능하면 많이 보여주자는 것이다. 빚과 아이 이빨 교정을 해줘야 하는 간호사 제니의 사례, 학자금 10만 달러를 갚아야 하는 대학생 하모니와 리리 레즈비언 커플, 미시건 디트로이트의 다 쓰러져 가는 게임스탑 매장에서 풀 타임으로 일하는 중남미 이민자 2세 마르코스 등등의 에피소드가 극 전편을 이어 나간다. 제니는 말한다. “나 같은 사람은 기껏해야 재난 지원금으로 600달러를 받았다. 평생을 뼈빠지게 일했고 지금도 코로나 병동에서 힘들게 일한다. 그런데 어떤 인간들은, 헤지 펀드 회사들을 구하겠다고 돈 가진 자들은 30억 달러를 준다.” 제니나 마르코스, 하모니와 리리 모두 세상이 불공정하다고 느끼고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져가는 지금과 같은 시스템은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 모두 게임스탑 주식을 끝까지 쥐고 장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 적당한 고점에서 팔고 나가도 됐지만 키스 길이 1200달러어치가 된 주식을 팔고 나가지 않는 한 자신들도 버티겠다고 말한다. 자신들 한 명 한 명이 버티면 월 가는 붕괴한다, 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들은 생각한다. 혁명이란, 한 명 한명이 버티는 것이다,라고. 영화 ‘덤 머니’는 어리석(다고 생각되)은 개미 투자자들, 민중들 한 명 한 명의 혁명 투쟁기이다. 모든 혁명은 경제 투쟁에서 시작된다. 영화 ‘덤 머니’는 경제 민중의 승리를 기록하고 있다. 그 점이 후련함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공정과 상식이라는 단어를 새삼 생각하게 만든다. 공정한 주식 거래란 없다. 따라서 공정한 세상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덤 머니’가 영화 너머로 알려주는 진실일 것이다.
최동훈 감독의 비운의 역작 ‘외계+인’ 2부를, 영화는 세 가지 좋은 점을 찾을 수 있으면 '좋은 영화'라는 원칙 아닌 원칙에 입각하여 분석해 본다. ‘외계+인’ 2부에 좋은 점 세 가지는 있는가. 있다면 그건 무엇인가. 일단 이 영화의 복잡한 줄거리부터 대략 파악하고 가는 게 좋다. 그건 결코 스포일러가 아니다. 스토리의 설정 ‘외계+인’ 1,2부는 알려져 있다시피 외계인 설정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외계인들은 인간의 몸속에 자신들의 죄수를 가둬 놓았는데 어느 날 이들 죄수들이 인간의 몸에서 탈출하면서 가공할 사태가 벌어진다. 주인공은 이안(김태리)이고 이안의 아버지(김우빈)가 이들 탈출한 범죄자 외계인들을 추적하는 인물이다. 그의 복제 프로그램이 바로 AI 썬더(김우빈)이다. 썬더는 과거 시대에는 우왕과 좌왕(신정근 이시훈)이라는 이름의 고양이가 돼 이안을 돕는다. 보다 정확하게는 얼치기 도사인 무륵(류준열)의 눈과 발이 되어 이안의 뒤를 쫓는다. 무륵은 어릴 때 위기에 처한 이안의 목숨을 구해주었으며 1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 둘은 서로 좋아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외계인 범죄자 중에 대장은 설계자(소지섭)이다. 그에 준하는 또 다른 빌런은 자장(김의성)이다. 나중에는 행동대장 빌런인 금괴 밀수꾼 윤경호도 나온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과거 시대에는 삼각산의 두 신선 부부 흑설과 청운(염정아 조우진)이 나온다. 둘은 무륵에게 도법을 전수했다. 악당 자장에게서 파문을 당하면서 맹인이 된 검객 능파(진선규)도 있다. 이들 모든 인물들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신검의 행방을 쫓는다. 이 신검은 1부에서는 어린 이안이 다시 현재의 시간으로 돌아 오기 위해 꼭 필요한 영험한 양날 검으로 묘사된다. 신검은 시간의 문을 열 수 있는 일종의 열쇠라는 것이다. 그러나 2부를 들어서면 시간의 문이 비교적 자유자재로 열린다. 에너지가 불안한 곳에서는 그럴 수 있다는 것이 AI 썬더의 설명이다. 신검은 시간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일, 무엇을 위해 꼭 필요한 물건임이 밝혀진다. 이안의 운명은 그걸 수행하는 것으로 돼있다. 영화의 좋은 점 ① “너는 너다!” 개념 어쨌든 영화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몸에는 외계인 악마가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전의 ‘외계+인’ 1부가 2시간 반 가까운 러닝 타임 동안 이야기의 변죽만 울린 채 끝났다며 대중의 호된 ‘질책’을 받은 이유가 바로 ‘인간=외계인’이라는 개념 때문이다. 과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든 2022년 현재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이든 캐릭터들이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이안의 몸에 어떤 외계인이 들어가 있는지, 그게 아빠 같은 외계인이었는지 아니면 알고 보니 진짜 악당이었는지 알 수 없게 처리됐었다. 삼각산 신선 부부에 따르면 제자 무륵의 몸 안에 요괴가 들어 있다고 하는데 그 요괴의 정체 역시 과연 누구인지 정확하지가 않다. 다 큰 이안은 역시 다 큰 무륵을 만나 재회하면서 기뻐서 어쩔 줄 모르지만 무륵은 자기 안에 이상한 무엇이 들어왔다며 이안에게 자신을 믿지 말라고 말한다. 자신을 경계하고 떠나라고 말한다. 그때 이안의 대답은 이것이다. “너는 너야. 네 안에 그 무엇이 들어 있든지 내게 있어 너는 그냥 너야.” 이 대사 한 마디가 ‘외계+인’ 1부에 대한 불만을 일소하게 해 준다. 사실상 1,2부로 나뉘어지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법한 이 영화가 어떤 전개 방향을 가져갈지를 암시해 주고 결정해 준다. 너는 너다. 네가 어떤 존재이든 너는 결국 선한 사람이 될 것이고 내가 그렇게 너를 만들 것이며 그럼으로써 우리는 함께 할 것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영화 ‘외계+인’은 결국 더불어 산다는 것, 자아와 타자가 결합하는 선의의 방식, 더 나아가 내면의 악한 욕망을 외향적인 삶에 있어 어떻게 누르고 절제하며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동양적 선(禪)의 사상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인연은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과거로 어떻게든 이어진다는 윤회의 사상을 지향하고 있다. 이번 2부는 바로 그 점을 집중적으로 확실하게 보여 준다. 그 점이 좋다. 영화의 좋은 점 ② “뜰 앞의 잣나무”를 말하다 별다른 의미가 없는 듯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 말은 2부의 인물 우왕(혹은 좌왕인데 그건 중요하지가 않다. 그 둘은 고양이 몸에 들어간 존재들이다.)의 입에서 나온다. 우왕은 이 얘기를 할 때 시종 킥킥대는 모습이다. 자신이 주인으로 섬기는 청년 도사 무륵이 도통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을 때이거나 혹은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이 고양이 변신인간(신정근)은 어김없이 이 말을 던진다. ‘뜰 앞이 잣 나무지 뜰 앞의 잣나무.” 이 대사는 또 다른 고양이 요괴인 좌왕(이시무)의 존재가 소멸될 때도 쓰인다. ‘뜰 앞의 잣나무’는 불교의 명상에서 쓰이는, 일종의 선시(禪詩)의 일부이다. 한자로는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고 쓴다. 불교의 선 사상은 서구식 이성의 논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냥 모든 개념과 관계를 통틀어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깨달음 같은 것이다. 선승(禪僧, 참선 중인 승려)이 스승에게 묻는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스승은 답한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느라.” 선문답(禪問答)은 해괴망측한 대화법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고고한 진리가 숨어 있다. ‘외계+인’ 1,2부는 사실 이 선문답에 기초한 스토리 라인으로 짜여 있다. 영화는 늘 논리의 구성에 치중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짜고 보여주고 나누는 모든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으며(우주평행이론) 종종 신비스럽게도 그 모든 시간이 뒤틀리는 지점이 있어 이야기도 앞뒤 순서가 맞지 않을 수가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논리정연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무륵이 나중에 무슨 일을 저지르고, 이안의 존재가 왜 뒤바뀌고, 민개인이라는 현대 여성(이하늬)은 왜 맹인 검객 능파의 초상을 벽에 걸고 살아가고 있으며, 그녀가 물려받은 조상의 무기는 과연 무엇인지, 그게 어떻게 과거에서 현재로 왔는지는 달마가 왜 서쪽에서 왔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최동훈이 얘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모두가 다 뜰 앞의 잣나무이거늘. 영화의 좋은 점 ③ 미래는 과거이고 과거는 미래이다 ‘외계+인’ 2부의 화룡점정은 외계인 빌런들(소지섭 김의성 윤경호)과 일대 혈투를 벌이는 무륵과 이안, 흑설과 청운 부부도사, 관세청 조사원 민개인, 그리고 AI 프로그램 썬더가 한 공간에 모인다는 것이다. 이들이 싸움을 벌이는 모습은 모두 다 만화적인 것이어서 보다 보면 지치는 감이 없지 않지만 탈선하는 열차 신 같은 CG는 영화 테크놀로지의 극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시각적 쾌감을 준다. 외계인 악당의 차에 부딪혀 날라가는 교통순경 차량 안이 360도 돌아가는 장면, 그 뒷좌석에서 수갑을 찬 채 몸이 같이 돌아가는 흑설과 청운, 민개인의 모습 같은 것은 촬영의 난이도, 차량 세트 구성 등의 난도가 높은 것이다. 최동훈은 영화 기술이 남다르지만 그걸 가져가려는 상상력이 뛰어난 인물이다. 이번 2편에서도 그 점을 유감없이 보여 준다. 무엇보다 과거 시대의 인물과 미래적 존재인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현재의 한 공간에 모인다는 설정은 감독이 나름 각을 준 장면처럼 느껴진다. 썬더는 과거로 돌아가 현재에서 죽어(소멸해) 가던 이안의 아빠에게 이안이 신검으로 임무를 어떻게 달성해 내는가를 보여 준다. 미래는 과거가 된다. 과거가 미래가 되는 것뿐이 아니다. 미래는 그냥 과거이다. 같은 존재이다. ‘외계+인’ 2부가 보여주는 시간의 철학이다. 그 점이 흥미롭다. 결론적으로 이번 2부는 꽤나 흥미롭다. 애당초 1부 없이 이 2부만으로, 그때그때 플래시 백 기법을 사용해 가며 한 편의 영화로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들 때는 그걸 그 누가 알았겠는가. 모든 것이 다 뜰 앞의 잣나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