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권익위원회의 지방의회 종합청렴도 평가 결과 광역·기초의회의 청렴도가 형편없이 낮은 것으로 나타나 놀랍다. 그중에도 경기도의회가 종합청렴도 평가에서 최하 등급을 받았다는 소식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청렴도를 의심받는 지방의회가 할 수 있는 감동적인 정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교육을 대폭 강화하는 한편, 부패·갑질에 대한 ‘일벌백계’가 엄격하게 작동하는 자정(自淨) 장치를 완비해야 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 국민권익위원회가 발표한 92개 지방의회(광역의회 17개, 기초시의회 75개)의 종합청렴도 평가에 따르면, 2023년도 광역·기초시의회의 종합청렴도는 100점 만점에 68.5점이었다. 지난달 28일 국민권익위가 발표한 행정기관·공직유관단체의 종합청렴도 80.5점과 비교해도 훨씬 낮은 수준이다. 놀라운 평가 결과는 경기도의회가 종..
비장애인들은 별 불편 없이 이용할 수 있는 공공편의시설들이지만 장애인들에게는 높고 험한 산, 급류가 흐르는 강이다. 장애인들은 분명 우리사회의 구성원인데도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없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공시설도 접근이 어렵다. 사소한 부분까지 보다 더 각별한 보살핌이 필요하지만 이 사회는 아직도 장애인들에게 친절하지 않다. 차별은 지금 이 시간 우리나라 곳곳에 존재한다. 장애인에게만 국한된 불편이 아니다. 어린이·노인·임산부 등 ‘일시적 장애인’들은 시설물 이용, 이동 등에 불편을 느끼고 있다. 이들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BF-Barrial Free)을 만드는 것은 우리 사회의 과제다. 그래서 제도화한 것이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 인증제’다. 이 제도는 2015년 법제화, 공공건축물..
경기도와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이 중소·벤처기업 투자 육성을 위해 추진하는 ‘경기도 G-펀드’의 2023년 신규 조성액이 3178억 원을 돌파해 단년도 최대 규모를 달성하는 등 기대 이상으로 순항 중이다. 편드 조성이 빠르다는 것은 높은 신뢰와 기대치를 정확하게 반영한다. 창업이나 기업 운영에서 자금은 인체의 혈액에 비유된다. ‘경기도 G-펀드’가 효율적 투자에 허점이 없도록 충실하게 운용돼 지역 경제 도약의 소중한 마중물 사명을 다해주길 기대한다. 2026년까지 1조 원을 조성할 계획으로 지난해 2월 23일 비전 선포 및 협약식을 열고 출발한 ‘경기도 G-펀드’는 도내 중소·벤처기업의 투자 기회를 넓히는 투자 마중물 용도로 조성하는 펀드(투자조합)다. 경기도는 지난해 스타트업, 스케일업, 경기북부 균형발전, 미래성장 분야로 나눠 펀드를 조성..
구리시의회가 방정환문학상 시상식 예산 2800만 원을 전액 삭감했다고 한다. 최근 경기신문 보도(‘구리시·문화재단, 백경현 공약 발목 잡기에 발끈’)에 따르면 시의회는 지난 해 제331회 제2회 정례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2024년 구리시에서 개최될 제34회 방정환문학상 시상식 예산을 모두 삭감, 행사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방정환문학상 시상식에 대한 담당 공무원의 충분한 설명이 부족했다’는 것이 삭감이유였단다. 구리시와 구리시문화재단에서는 ‘백경현 시장 공약사업에 대한 발목 잡기’ ‘시장의 공적이나 업적을 깎아내리려는 정치적 의도’라고 판단한다. 방정환문학상 시상식 예산은 2800만 원이다. 상금이 2500만 원이고 나머지 300만 원은 운영비로 사용된다. 지역이나 대학축제에 초청하는 유명가수 한명의 출연료에도..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정치테러가 발생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부산 가덕도 방문 중에 지지자를 자처한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흉기피습을 당해 중상을 입었다. 사라졌던 정치테러가 재발했다는 사실에 온 국민이 충격에 빠졌다. 이런 후진국형 정치테러는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 범행의 배경을 낱낱이 밝혀내는 것은 물론 총선 국면에서 재발할 여지를 강력히 차단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작금의 극단적인 ‘정쟁’ 풍토에 대한 정치권의 치열한 반성과 혁신이 절실하다. 사건은 이 대표가 부산 가덕도 신공항 부지를 둘러본 후 기자들과 문답을 진행하던 중 범인이 순식간에 달려들면서 발생했다. 머리에 파란 종이 왕관형 모자를 쓴 한 남성이 접근한 뒤 취재진을 뚫고 이 대표에게 접근해 갑자기 목을 향해 흉기를 찌르는 모습이 촬영됐다. 목격..
대한민국의 미래가 사라지고 있다. 소리 없이 광속으로 진행되는 인구 기반 붕괴는 ‘국가소멸’을 염려해야 할 정도로 화급한 화두가 됐다.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0’순위는 북한의 핵무기가 아니라 최근의 인구 통계들이 보여주는 인구재앙이라는 진단까지 나온다. 1천360여만 명으로 전국 광역자치단체 중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한 경기도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언 발에 오줌 누기’식 대응으로는 어림도 없다. 이젠 특단의 조치를 결심해야 한다. 통계청은 우리나라 작년 3분기 합계출산율은 0.7명으로 1년 전보다 0.1명 줄었다고 발표했다. 한국에 이어 OECD 역순 2위인 이탈리아의 합계출산율은 그래도 1.23명 수준이다. 통계청 인구추계를 보면 6년 후인 2030년까지 생산연령 인구가 257만 명이 감소하고, 고령인구는 400만 명이 증가한다. 이후엔 이런..
김한민의 역작 ‘노량 : 죽음의 바다’는 서사(敍事)의 협공과 그 전략이 뛰어난 작품이다. 흔히들 이 영화는 해상 전투 신의 압도적인 비주얼이 최대 장점이자 볼거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총 152분의 러닝 타임 동안 이렇다 할 전투 장면은 70분이 지나가도록 나오지 않는다. 그 비교적 긴 시간을 김한민은 임진왜란 7년의 전쟁이 갖는 의미, 그것이 어떻게 노량의 전투로 이어지는가를 보여 주려 애쓴다. 그건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읽혀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과 생각이 굉장히 중요한데 김한민은 그 ‘논리와 사고’를 위해 얼마나 자신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는가를 촘촘히 보여 주려 애쓴다. 핵심적인 화두는 이순신 역의 김윤석이 해내는 대사이다. 이순신은 조명(朝明) 연합 수군의 명나라 측 총 도독인 진린(정재영)이 이제 그만 적당히 저들, 왜군에게 퇴로를 열어 주자는 제안에 대해 끊임없이 같은 말을 반복한다. “이번에야말로 저들을 완전히 섬멸시켜야 합니다.” 그는 부하들에게도 같은 말을 똑같이 한다. 부하들 중 충성스러운 장수인 송희립(최덕문)마저도 이제 이미 이긴 전쟁이니 더 이상의 희생은 그만했으면 한다. 그런 그에게 이순신은 말한다. “아직도 내 뜻을 모르겠느냐. 이번에 완전히 끝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는 것이느니라.” 관객들 상당수가 놓치고 있지만 엔딩 타이틀이 다 올라간 후에 나오는 일명 쿠키 영상에서는 광해군(이제훈)이 나온다. 노량 앞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권율(남경읍)이 찾아와 “세자 저하. 이제 왜란이 끝났습니다.’라고 말하자 광해는 매우 의미심장한 답변을 한다. “모르겠소? 이건 왜란이 아니외다. 전쟁이었소.” 이 부분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상념에 젖게 한다. 김한민 감독이, 임진년에 일어난 조선과 일본 간의 전쟁을 왜란(倭亂)이라고 하는 건 일종의 비하(卑下)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부분이다. 이때의 전쟁을 ‘왜란이 아니라 전쟁으로’ 잘 이해해야 이후 일본 제국주의와 그 실체인 정한론(征韓論)의 배경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임진년의 전쟁을 국제 정세의 큰 틀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 이번 영화 ‘노량 : 죽음의 바다’의 진짜 내용이고 감독이 짜놓은 서사와 전쟁 신이라는 협공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하려는 메시지의 실체이다. 영화의 오프닝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인 이유가 그 때문이다. 히데요시의 죽음은 일본 내부에 필연적인 권력 다툼을 예고하는 것이고 그 중심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있을 것이다. 히데요시의 세력은 나중에 서군으로(그들의 본거지는 원래 오사카였고 히데요시는 거대한 오사카 성을 축조해 그 안에서 살았다.) 이에야스 파는 동군으로(나중에 에도, 곧 도쿄에 막부를 연다.) 무장하고 세키가하라에서 대 혈투를 벌인다. 지금의 기후 현(県) 일대이다. 기후 현에는 나고야 시가 있다. 이게 1600년이고 노량 해전이 벌어진 때는 1598년이다. 조선 남부에 진을 치고 있던 일본의 두 수장, 소서행장들은 고니시 유키나가(이무생)와 시마즈 요시히로(백윤식)이다. 당연히 둘 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수하들이며 反 도쿠가와 이에야스 파 들이다. 이들 중 세키가하라에서 살아남은 시마즈 요시히로는 나중에 사쓰만의 자기 번에서 세력을 키운 후 그 위의 조슈 번과 동맹을 맺고 이에야스 막부에 맞선다. 이들의 ‘삿초 동맹’은 천황 중심의 실질적 중앙집권 체제의 구축을 계획하는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다. 천황 중심의 친위 쿠데타이다. 이 세력 한가운데의 인물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이다. 임진왜란이 아니라 임진년의 조일 전쟁의 내면에 일본 제국주의의 흐름이 어떻게 조성되고 있었는 가를 아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김한민은 이순신의 대사에 “이번 전쟁은 여기서 반드시 끝을 내야 한다”는 말을 넣은 것이며 이순신뿐만 아니라 총명했던 광해의 입을 통해서도 “아직도 (그 의미를) 모르겠소”라며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행상 전투 신의 극한 체험은 수많은 배가 학익진을 펼치거나, 이순신의 전투 선박들이 일본이 짜놓은 대열의 허리를 끊고 들어가는 장면이거나, 후미를 공격하는 모습이거나 하는 등등이 아니다. 결코 흔히들 생각할 수 있는 CG의 극대화를 통해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김한민이 창조해 낸 해상 전투 신의 진정한 쾌감은 거의 후반 마무리 즈음에 나온다. 조선과 일본 수군은 양측 모두 정면 공격을 감행하고 접선(接船)으로 충돌을 일으킨 다음 양측 병사 모두가 엉켜 어느 쪽이라고 할 것도 없이 양쪽 배 위 모두에서 백병전을 벌이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김한민과 촬영감독 김태성은 ‘원 씬 원 컷 롱 테이크’로 찍어 냈다. 카메라를 한 번도 끊지 않고 하나의 컷으로 이어 가면서도 이를 핸드 헬드(들고 찍기)로 촬영한 것이다. 어마어마한 고난도의 촬영이며 이런 그림을 만들려면 감독의 완벽한 디자인이 사전에 머릿속에서 이미 짜여야 한다. 배우 모두와의 합이 절대적인 건 기본이다. 한 번의 NG는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장면이 좋은 진짜 의미는 ‘무명의’ 병사들이 벌이는 생존의 살륙전을 보여줌으로써 임진 전쟁이 얼마나 잔혹하고 비극적이었는가, 그걸 넘어 전쟁 자체가 갖는 희생이 얼마나 큰 것인 가를 육체의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원 테이크 신’을 보여 준 후 김한민은 그 지옥의 싸움을 내려다보는 이순신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커트한다. 그리고 다시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병사들을 바라보는 이순신의 시점을 쇼트로 커트한다. 김한민은 이순신의 얼굴에 살육의 비극을 바라보는 복잡한 심정의 표정을 담아낸다. 근데 그 표정과 이순신의 반복되는 대사 ‘이번에 이 전쟁을 반드시 끝내야 한다’는 것은 오히려 상충되는 듯 보인다. 살육을 통해 살육을 끝내겠다는 그 이율배반의 철학이야 말로 이순신이 지닌 궁극의 전쟁 철학이었음을 영화는 밝혀 내고 있다. 이순신 노량 해전의 의미는 거기서 나온다. 전쟁으로 전쟁을 끝낸다! 그리하여 전쟁을 할 때는 때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 중도에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곧 전쟁을 끝내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조선 내의 주전론과 화친론 사이의 전쟁 철학의 차이를 그려 내고 있다. 얼마나 윤색이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순신이 전투를 독려하며 치는 북소리는 영화 후반부의 극장 안을 휘어 감는다. 일본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 북소리 때문에 미쳐 간다. 그는 귀를 틀어막으며 ‘누가 저 북소리 좀 멈추게 하라’며 구토를 한다. 이순신의 북소리는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이다. 관객들 역시 영화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귓가를 울리는 그 북소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자신들을 발견한다. 상업영화가 가져가야 할 여운의 극대화를 이만큼 살려 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고 김한민의 노련한 연출은 그 점을 충분히 염두에 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의 흥행이 또다시 성공의 수치로 육박해 갈 수 있다면 그건 순전히 영화 속 이 이순신의 북소리 때문이다. 셋째 아들 이면(여진구)의 죽음과 그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순신의 내면을 담아내는 방식도 특이하다. 이순신은 자주 아들에 대한 꿈을 꾼다. 방 씨 부인(문정희)은 그런 그를 두고 방을 나서면서 말한다. “아들은 죽어서도 아비 곁으로 오는군요. 다음에 또 만나면 이제는 어미한테도 좀 오라고 얘기해 주시구려.” 임진년의 전쟁이 모성과 여성성에 얼마나 큰 상처를 냈는가를 보여 준다. 이번 영화에는 문정희처럼 그렇게 한 신만 나오는 배우들이 적지 않은데 아들 이면 역의 여진구가 나중에 이순신의 환상 속에 나와 ‘아버님 너무 힘들어 하지말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울컥하는 심정이 된다. 이순신 한 명에게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정재영이 맡은 진린의 캐릭터라든가, 항왜 준사 역의 김성규, 송희립 역의 최덕문, 심지어 일본 장수 시마즈 역의 백윤식까지 캐릭터들을 매우 입체적으로 다뤄 냈다는 점은, 이 영화가 균등의 미학에 얼마나 치중했는가를 보여준다. 그 점이 좋다. 김한민의 이순신 3부작 중 이번 노량은 단연 최고의 작품이다. 감독은 영화를 만들면서 자신의 영화를 통해 진화하고 진보한다는 진리를, 김한민은 이번에 톡톡히 보여 준 셈이다. 그의 ‘임진 전쟁’에 대한 행보, 새로운 해석이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해진다. 그것도 매우.
육상효 감독의 신작 ‘3일의 휴가’는 장르상 판타지로 분류돼 있지만 그 내면을 조심스럽게 따라가다 보면 사실은 공포영화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05분의 러닝 타임 내내 극장 안에는 거의 통곡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이 영화를 보면서 울지 않는다면 세상 최고로 무감각한 냉혈한 소리를 듣거나 적어도 자신의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인간이란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심지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인간 소리를 듣게 될 수도 있다. 당신의 돌아가신 엄마가 결국 당신을 버릴 수도 있다. 그건 ‘13일의 금요일’의 아이스하키 복면을 쓴 연쇄살인마에게 쫓기는 꿈만큼 무서운 일이다. 아무리 무심한 인간인들 엄마 얘기에 등을 돌려서는 안된다고, 죽은 엄마에게조차 버림받을 정도로 눈물 한 방울 없는 인간이 돼선 안된다고 우리는 유치원 때부터 들어오며 자랐기 때문이다. 영화 ‘3일의 휴가’는 엄마 얘기이다. 그것도 죽은 엄마다. 자신이 임종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 엄마가, 뒤늦은 죄책감에 빠져 사는 딸아이를 위해 하늘나라에서 3일간 휴가를 받아 자식 곁으로 잠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딸은 엄마를 보지 못한다. 엄마는 살아 있는 딸의 일에 개입하면 안된다. 아이를 만져서도 안 된다. 살아생전 딸은 내내 못되고 모질게 굴었지만 엄마는 죽어서도 그런 딸을 보듬고 싶어 한다. 그런데도 이런 모습을 보면서 당신이 안 울 수 있다고?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차라리 공포이다. 모두들 자신의 엄마에 대한 죄책감, 죄의식을 어두운 극장 안에서 새삼 꺼내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육상효는 2010년 ‘방가? 방가!’와 2012년의 ‘강철대오 : 구국의 철가방’을 만들며 주류 영화계에 안착했다. 그는 그 이전부터 가장 잘 쓰는 시나리오 작가 소리를 들었으며 스스로 개발한 시나리오 작법의 매뉴얼(그는 최근 저서 『이야기 수업』을 냈다)로 영화과 교수 생활을 할 정도였다. 육상효는 어떻게 보면 한국의 로버트 맥키 같은 인물이다. 맥키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훌륭한 시나리오 작가…라기 보다는 가장 훌륭한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을 가르치며 좋은 시나리오와 그렇지 않은 작품을 구별해 주는 인물이다. 육상효는 자신이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 전 임권택 감독의 작품으로 유명해졌다. 임권택의 1996년 영화 ‘축제’가 그가 쓴 각본이었다. 김홍준 감독의 걸작 ‘장미빛 인생(1994)’의 각본 작업에도 참여했으며 김유진 감독의 1995년 영화 ‘금홍아 금홍아’도 그의 시나리오 작품이다. 훗날 2015년에는 임권택 감독의 마지막 영화 ‘화장’을 각색할 만큼 오랜 기간 영화계의 ‘그림자’로 뛰어난 역할을 많이 했던 인물이 바로 육상효이다. 그가 만든 이번의 ‘3일의 휴가’는 놀랍게도 직접 쓴 시나리오가 아니다. 유영아가 쓴 것을 일부 각색과 연출만 맡은 것이다. 유영아는 ‘국가대표 2’와 ‘82년생 김지영’ 등 현재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는 영화 및 드라마 작가로 유명하다. 아마도 짐작컨대 ‘3일의 휴가’가 모녀의 얘기이며 딸의 시선과 정서가 강하게 투영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여성성’의 골간을 꾸린다는 건 장년의 남자 감독으로서는 다소 부담이었을 것이다. 유영아가 쓴 섬세한 글의 맛을 육상효는 능숙하고 능란하게 영상으로, 배우들의 연기로 빚어냈다. 환상의 조합이 이루어진 셈이다. ‘3일의 휴가’는 하늘에서 내려온 엄마(김해숙)가 여전히 딸 때문에 마음고생을 이어 가는 설정으로 돼 있다. 배경은 경북 김천 시이며 여기서도 조금 더 시골 안쪽으로 들어간 허름한 공간이다. 딸(신민아)은 엄마가 그렇게 생고생을 하면서 키워 냈고 그래서 미국 유학까지 보내 박사가 되게 만들었지만 정작 지금은 엄마의 시골집으로 들어앉아 촌부(村婦)로 살아가겠다는 양 속 터진 일상을 이어 가는 중이다. 이 신식의 촌 아낙네는 어깨너머로 기억하는 엄마의 온갖 가정식 음식을 만들어 스스로 해 먹는다. 가뭄에 콩 나듯 찾아 드는 손님들에게 밥도 팔고 동네의 노인들, 과거 엄마의 이웃들과 같이 나눠 먹기도 한다. 죽은 엄마 유령은 딸의 행태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건 동네 이웃 노인들도 마찬가지 심정이다. 그들은 딸에게 어여 너의 길을 가라고, 그게 네 엄마가 원하는 것이라며, 아예 마을을 떠나 다시는 돌아 오지 말라고 윽박지른다. ‘3일의 휴가’는 언뜻 설정을 듣거나 외간을 살짝 엿보기만 해도 도무지 2시간 가까운 시간의 에피소드를 이어 가기가 쉽지 않게 느껴진다. 그렇게 이야깃거리가 많을까. 그런데 육상효는 그걸 해낸다. 현실의 에피소드가 떨어질 만하면 딸의 기억을 통해 어머니의 과거가 펼쳐지며 거기에서 또다시 눈물 한 바가지를 쏟게 만든다. 엄마는 딸을 자신의 동생 집에 맡기고 재가 아닌 재가를 했는데 그건 새로운 남자의 두 아이를 키우는 조건으로 자신의 딸이 다녀야 할 학교 교육비를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가정부 유모 같은 일을 하기 위해 여자는 자신의 딸을 자기에게서 떼어 놓은 셈이다. 엄마는 그게 딸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딸은 끝내 엄마의 선택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3일의 휴가’의 진짜 설정은 여기서 나온다. 영화는, 죽은 엄마가 살아 있는 딸을 멀리서나마 재회하는, 그런 단순하고 진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엄마가 살아 있을 때 딸은 늘 못되고 모질기 그지없으며 엄마는 늘 그런 딸에게 이상하리만큼 쩔쩔매게 된다는 그 고유의 관계 자체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근데 그건 기이한 보편성을 지닌다. 현실에서도, 아니 현실에서는 더욱더 잘 해 주려는 엄마에게 딸은 늘 짜증을 낸다. 그리고 돌아서서는 후회를 하는데 그렇게 후회하는 자신 때문에 더 짜증을 낸다. 그래서 또 엄마를 만나서는 또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부리고 소리를 친다. 그러지 않는 딸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딸이 비로소 짜증 증후군에서 벗어날 때는 엄마가 이미 죽은 후이다. 신의 이상한 장난 같은, 인생의 그런 악습의 굴레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자식, 딸은 한 명도 없다. 영화는 전 극장 안에 그런 후회의 탄식을 쏟아 내게 만든다. 어떤 관객들은 부끄럼 없이 소리 내어 울기도 한다. 육상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치의 용서도 없이 극한의 신파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 한순간도 쉬지를 않는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자 그러니 다들 울면서 속죄하라고 몰아친다. 그건 하늘의 명을 받고 매몰차게 밀어붙이는 저승사자 같은 느낌을 준다. 그 지속적인 톤 앤 매너를 지켜 간다는 점에서 육상효가 얼마나 구전의 기술력이 뛰어난 감독인 가를 보여 준다. 실컷 울고 나오게 한다는 점에서 ‘3일의 휴가’는 극단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사람들은 이 영화가, 모질고 척박한 세상에서, 모두들 (엄마가 가르쳐 준) 삶의 가치보다 사회가 만들어 낸 성공과 성취의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진정한 자아의 성숙이 어디서부터 시작돼야 하는가를 깨닫게 한다. 그건 일종의 도덕적 깨달음이다. 세상이 구원받는 것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이다. 세상은 모성의 본질을 아는 자들만이 구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3일의 휴가’가 만들어 내는 놀라우면서도 새로운 사회 이데올로기이다. ‘3일의 휴가’는 놀랍도록 극단적인 신파의 영화이다. 그런데 바로 그 극한의 경험이 이 영화에 대한 호평을 이루어 낸다. 육상효는 여전히 이야기꾼으로서의 구력과 기력이 대단한 인물임을 입증해 냈다. 관객은 수백만까지는 들지 못했다. 이 영화는 관객 수가 중요하지가 않다. 사람들은 진심으로 입소문을 만들어 내고 있다. 흥행이 대박은 아니더라도 육상효라는 감독의 존재가 새삼 증명됐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유의미한 작품이다. 그거면 됐다.
넷플릭스 영화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는 명령어이다. ‘세상을 등지고 떠나라’란 의미다. 그래서 영화 속 주인공 가족 클레이와 어맨다 부부, 그리고 이들의 자녀 아치와 로즈 남매는 어느 날 충동적으로 집인 브루클린을 떠나 동부 포인트 컴포트라는 해변 마을로 여행을 온다. 어맨다(줄리아 로버츠)는 비수기를 이용해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에어 B&B를 빌렸는데 집이 꽤나 호화로워서 마음에 들어 한다. 그런데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거대한 유조선이 해변 백사장으로 돌진하는데 항법 장치의 오류 때문이다. 집 앞에는 자꾸 사슴이 나타난다. 처음엔 한 마리, 그리고 점점 더 많이, 나중에는 떼 거지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밤중에 원래 이 빌라의 주인공이라고 주장하는 흑인 남자 G.H.스콧(마허샬라 알리)과 그의 딸이 방문을 하고 시내 곳곳이 정전이어서 하룻밤 ‘자기 집’에 머물고 가겠다고 요청한다. 하기야 모든 인터넷이 끊기고 와이파이는 전혀 작동하지 않으며 당연히 내비게이션의 GPS 등도 다 먹통이 된 상태이다. 와이파이가 전혀 터지지 않고 모바일 폰이 구실을 완전히 못하게 되면 현대인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어맨다의 남편 클레이(에단 호크)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시티 칼리지에서 영어와 미디어를 가르치지만 인터넷이 없으면 당연히 길도 못 찾고, 정보나 뉴스를 볼 수 없으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도 못할뿐더러, 이런 일에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던 사람인지라 온통 혼돈과 혼란 속에서 헤맨다. 그는 사전에 주어졌던 시그널을 전혀 알아 채지 못했던, 그저 모바일 의존증이 절대적이었던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건 어느 정도 어맨다도 마찬가지이다. 16살인 아들 아치(찰리 에반스)는 오직 여자들 몸매에만 관심이 있어 비키니 입은 G.H.의 딸 루스(마이할라 헤럴드)를 몰카로 찍기에만 집중한다. 그나마 핸드폰의 사진 촬영 기능은 인터넷과는 상관이 없는 거라 가능한 얘기이다. 동생인 로즈(파라 맥켄지) 역시 오로지 태블릿PC로 시트콤 드라마 ‘프렌즈’의 마지막 회를 볼 생각밖에 없다. 그런데 인터넷이 안되는 상황이다. 로즈도 ‘멘붕’이 오기 시작한다. 주변은 점점 아수라장으로 변해 간다. 비행기가 떨어지고(당연히 비행 항법 장치가 뒤엉켜 있을 테니) 자율주행차들은 제멋대로 고속도로를 달려가 사고를 낸 후 길을 완전히 막히게 한다. 동물들이 뛰어다니고, 이상한 굉음(혹은 극초단파라 불리는 방사능 소음) 때문에 모두들 귀청이 떨어질 뻔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치는 멀쩡했던 이빨이 다 빠져 버리는데 그게 다 이 이상한 소음 때문이다. 그건 실제로 쿠바 미국 대사관에서 벌어진 일이긴 했다. 아직 그 실체와 배후를 못 밝힌 사건인데 대사관 직원들 상당수가 갑자기 눈이 멀거나 쓰러져 사망했고 그것은 알아챌 수 없었던 극초단파 소음 때문이었음으로 잠정 결론이 내려진 상태다. 미국은 이를 러시아의 공작이었다고 생각했다. 버락 오바마 정부 때의 일이었다. 이때 미국은 60년 만에 쿠바에 대한 경재 봉쇄를 풀고 미-쿠바 간 수교를 맺었다. 1962년 미-쿠바 미사일 사태 이후 처음 있었던 실로 역사적인 일이었지만 극초단파 의심 사건 이후 쿠바 내 미국 대사관은 잠정 폐쇄됐고 트럼프 정부에 의해 수교는 다시 단절됐다. 이번 영화에서 이 얘기가 나오지만 사람들은 잘 알아 채지 못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나마 14살짜리 로즈가 어쩌면 가장 똑똑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아이는 엄마에게 침대에 누워 자기가 본 미드 ‘웨스트 윙’에서의 일화를 소개한다. 엄마가 너 ‘웨스트 윙’도 봐?, 라고 묻자 아이는 아론 소킨이 쓴 회 차만 본다고 대답할 정도로 영리하다. 로즈가 말하기를 한 남자가 있고 그는 기도를 열심히 하며 살아가는데 어느 날 홍수가 터졌지만 하나님이 구해주실 거라고 믿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남자가 배를 타고 와서 구해 주려 했지만 내게는 하나님이 있다며 거부했고 나중에는 헬리콥터가 와서 그를 구하려 했지만 역시 하나님 핑계로 피난을 가지 않았다. 그는 결국 물에 빠져 죽었는데 하나님 앞에 간 그는 왜 자신을 구해 주지 않았느냐고 거칠게 항의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 가라사대, 나는 너에게 배도 보냈고 헬리콥터도 보냈느니라. 로즈는 이 얘기를 엄마에게 자분자분 하면서 “나는 더 이상 앉아서 기다리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 실제 강철 룸으로 돼 있는 패닉룸, 곧 방공호를 발견하는 것은 로즈이다.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영어로 얘기하면 ‘디스거스팅’하다. 욕지기가 날 만큼 자기모멸적이다. 국가 시스템이 붕괴하고 세상이 무너져 내릴 때 사람들, 특히 지식인이라고 떠들며 살았던 사람들, 중산층, 상류 지배층의 사람들은 무능한 것이 아니라 그저 무기력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첨단 기기가 아무것도 제공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는 모든 것이 속수무책일 뿐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들 우리 자신의 여러 측면을 한 가지씩 반영하고 있다. 어맨다는 필요 이상으로 신경질적이고 계산적이며 G.H.의 딸 루스는 그야말로 ‘싸가지가 바가지’여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화가 나게 만든다. 어맨다는 상황이 자기 주도권에서 벗어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루스는 어맨다의 태도를 다소 무조건적으로 (인종) 차별적이라고 받아들인다. 예컨대 이런 대사이다. 풀을 가리키며 “당신은 수영 안 해?”라고 루스가 묻자 어맨다는 너나 하라는 식으로 대답하더니 루스마저 안 하겠다고 하자 이렇게 말한다. “왜? 머리 때문에?” 흑인들의 머리는 물에 젖으면 더 곱슬거리게 되기 때문이다. 투자 분석가이자 미래산업 분석가인 G.H.는 클로이에게 국가 붕괴 3단계를 말한다. 자신의 클라이언트 중에 방산업체 큰 손이 있고 그가 어느 날 가장 가성비가 좋은 프로젝트라며 설명해 준 게 있다는 것이다. 첫째 모든 방송 통신을 해킹으로 끊고 타깃 국가를 고립시킨다. 둘째 국가의 모든 시스템을 하나하나 제거한다. 셋째 자연발생적으로 군사 쿠데타를 유도한다. 영화는 실로 그 과정을 차례차례 보여 준다. 영화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에서 가장 무서운 말은 ‘누군가 국가를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통제할 수 있는 그 누군 가가 존재하지 않을 때가 더 문제’라는 것이다. 최고의 혼돈과 혼란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온갖 가짜 뉴스와 편견이 판을 치게 만든다. G.H의 이웃이었던 대니라는 남자(케빈 베이컨)는 엽총을 들고나와 G.H.와 클로이를 위협하면서 이 모든 것은 한국이 저지른 짓이라고 말한다. 아니면 중국이거나. 영화에서는 그냥 한국이라고 말한다. 북한이나 남한을 구별하지 않는다. 어쩌면 트럼프 류의 극보수 미국인들은 군사와 테러로 위협하는 북한이나 경제와 문화로 우위에 서려 하는 남한이 다 똑같은 존재일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들은 다 어떻게 됐을까. 생존해 낼 수 있었을까. 생존의 가치는 무엇인가. G.H.가 현명한 척 어맨다에게 얘기하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일 것이다. 그는 자신들이, 결국 ‘살아남더라도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맞는 얘기이다. 지금이라도 하루 두 시간 정도는 모바일 폰을 들여다보지 말 것이며 아는 길은 굳이 내비게이션을 보지 말고 이정표와 거리 감각으로 찾아가 보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영화가 주는 아주 간단한 충고이기도 하다.
2007년에 나온 ‘록키 발보아’란 제목의 영화는 다소 말이 안 되는 설정이어서 당시의 평단에서는 애초부터 관심을 못 끌었던 작품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다 늙은’ 실베스터 스탤론이 ‘다 늙은’ 록키 역으로 나와 젊고 탄탄한 몸매의 선수를 상대로 다시 한번 링 위에 올라간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록키 발보아’는 1990년에 나온 ‘록키5’ 이후 17년 만의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 늙은 영화’인 ‘록키 발보아’는, 물론 흥행은 그다지 잘 안됐지만, 그래도 꽤나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단순한 권투 영화라기 보다는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건 상실에 대한 것이었으며 상실감 자체를 극복해 내는 것보다 그걸 어떻게 치유해 내고 무엇보다 그럴 수 있는 사람들과 같이 하느냐에 대한 얘기였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1977년에 나온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 ‘록키1’이 사실은 권투 영화가 아니라 러브 스토리였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록키’ 시리즈는 싸구려인 척 알고 보면 그 내면에 상처와 상실, 사랑, 가족의 연대 같은 주제를 담고 있는 휴먼 드라마였다. ‘록키 시리즈’는 할리우드 프랜차이즈 영화의 시초 격 작품이었으며 실베스터 스탤론은 이것 말고도 ‘람보 시리즈’와 최근의 ‘익스펜더블 시리즈’까지 할리우드의 트렌드를 이어 나가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스탤론의 일대기 아닌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슬라이’에 담겨 있다. 슬라이는 실베스터 스탤론의 닉 네임이다. 일대기 아닌 일대기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생애가 다소 그의 ‘입맛’에 맞춰져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고 늘 그렇듯이 작품의 제작 과정에서 상당 부분 그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 다큐는 그가 어떻게 ‘록키’란 영화로 성공하게 됐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이한 것은 단순한 성공담을 넘어 그의 입지전적인 특성을 제대로 보여 주려 애쓰고 있는데 그건 그가 일종의 싱어 송 라이터로서 각본, 연출, 제작, 주연을 모두 맡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록키 시리즈는 순전히 그가 1인 다역을 맡아 만들어 낸 작품이다. 사람들은 그를 근육질의 액션 스타로만 생각하고, 따라서 거의 대사는 하지 않는, 다시 말해서 머리가 별로 똑똑하지 않은 연기자 아닌(연기파가 아닌) 연기자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다큐 ‘슬라이’를 보고 있으면 오히혀 그가 매우 똑똑한 인물인데다 현명하기까지 하다는 점, 삶의 체험에서 녹여 온 인생철학이 꽤나 두터운 부피감을 지니고 있는 배우임을 알게 한다. 그는 영화 속 캐릭터를 대체로 자신이 겪었던 일에서 가져왔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록키1’에서 복싱 코치가 그의 집으로 찾아와 자신과 함께 훈련을 하자며, 자신이 그를 키워 주겠다고 하지만 록키가 매몰차게 거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코치는 이전에 그를 체육관에서 쫓아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슬라이’에서 스탤론은 그 장면을 회상하면서, 그 씬을 찍을 때 어릴 적 자신을 두드려 패고 못되게 굴었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리허설을 찍었는데 너무 리얼하게 대사와 액션이 나왔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스탤론의 연기가 그야말로 경험과 삶에서 툭툭 튀어나온 것임을 보여 준다. 록키 시리즈의 마지막인 ‘록키 발보아’에서도 아들과 말싸움을 하면서 하는 대사 “이 세상에서 가장 센 건 인생이라는 주먹이야.”도 비교적 애드립처럼 튀어나온 것이다. 실베스타 스탤론이 걸어온 배우 인생, 영화 인생이 꽤나 흥미로운 에피소드들로 가득 차 있음을 나타내는 장면들이다. ‘슬라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46년생인 실베스터 스탤론의 배우 인생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며 그가 아직도 상업적 가치가 높은, 수익성이 있는 스타급 배우임을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그는 2023년 최근까지도 액션 영화 ‘익스펜더블4’를 찍었으며 제작과 주연을 맡았다. ‘익스펜더블’ 시리즈는 그가 60대에 들어서면서 창조해 낸 새로운 시리즈로 나이 든 액션 스타들이 총출연하는 작품이다. 이제 브루스 윌리스는 치매에 걸려 나오지 못하고 있지만 아놀드 슈왈츠네거, 제이슨 스태이덤, 돌프 룬드그렌, 심지어 태국의 ‘옹박’인 토니 쟈까지도 소환시키고 있다. 실로 대단한 섭외력인 바, 그건 어디까지나 스탤론의 아이디어가 좋아서였고 그래서 난다 긴다 하는 액션 스타들이 다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스탤론은 어느 날 한물 간 록밴드 콘서트에 갔다가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한다. 이 지면을 통해서도 소개된 바 있지만 국내 OTT 티빙(TVING)에 탑재돼 있는 ‘파라마운트+’의 시즌 드라마 ‘털사 킹’도 실베스터 스탤론의 최신작이다. 77살인 그의 현재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으로 늙고 처졌지만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모든 영화나 드라마는 자신의 삶의 체험과 느낌에 기반하게 한다는 원칙을 강조하듯 이 드라마도 다 늙은 마피아가 새롭게 자신만의 조직을 미국 오클라호마 털사에서 재건시킨다는 줄거리이다. 이 ‘다 늙은’ 마피아는 과도한 폭력을 쓰기보다는 지략으로, 때론 말의 재간으로 상대를 쓰러뜨리고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다. 잃었던 딸과의 관계도 되찾고 가끔 애인과 시간도 보내며 새롭게 만난 젊은이들과 진한 우정도 쌓는다. 그건 마치 실베스터 스탤론 자신이 현재 할리우드에서 다 늙었다고 내쫓겨진 판국이지만 새로운 스태프와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만의 영화를 다시 찍을 수 있다며 속으로 소리치고 있는 얘기처럼 들린다. 스탤론의 영화는 스탤론 자신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의 속마음이 다 들여다 보인다. 다큐멘터리 ‘슬라이’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과연 한 인간을 움직이는 동력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꽤나 성찰적인 작품이다. 스탤론은 무명이었고, 우둔하고 바보 같은 말투에, 포르노 배우를 연상케 하는 새하얀 근육질 몸매를 지닌, 절대 성공할 수 없어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을 캐스팅하지 않는 영화계 시스템에 대항해 자기 스스로 각본을 쓰고 자기 스스로를 주연으로 뽑았다. 일부 제작자들이 시나리오의 값을 높이 쳐주는 대신 감독과 주연은 바꾸고 싶어 했지만 끝까지 거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생이 가장 센 주먹이고 거기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은 한 방 맞을 때마다 견디고, 버텨내고, 받아치고 하는 거야,라는 ‘록키 발보아’ 때의 대사처럼 세파를 견디고, 견디고, 견디어 낸 한 사람의 성공담은 꽤나 인상적일 수밖에 없다. 스탤론은 성공하기 위해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성공한 것이다. 인생은 어쩌면 늘 그 반대편에서 동력이 찾아지며 스탤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엉뚱하게도 끝없는 결핍에서 온 셈이다.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의 원천적인 결핍, 곧 부성의 결핍, 모성의 부재 등등 스탤론의 인생에는 죄 모자란 것 투성이었다. 그렇다면 스타가 된 지금은 넘쳐나고 있는가. 이제는 스러져 가고 있음에 대한 결핍=상실이 그를 움직이게 하고 있다. 다큐 ‘슬라이’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비버리힐즈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그가 이사를 나오는 장면이다. 그는 ‘아들과 딸을 위해 마련한 이 큰 집에 이제 모두가 떠나고 혼자 남았다’며 이제는 잃어버린, 헐벚었던 예술가 의식을 되찾기 위해서 동부로 이사를 간다고 말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슬라이’는 우리가 몰랐던 실베스터 스탤론의 진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할리우드에서 스타가 된다는 것, 현대사회에서 성공한 삶을 산다는 것, 진짜 성공이라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 무엇보다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를 반추하고, 사유하며, 성찰하게 한다. 물론 ‘록키’와 ‘람보’ 시리즈의 성공은 레이건 정부가 만들어 낸 우파 보수 주의 시대의 특성과 맞물려 있기는 하다. 이번 다큐에서는 그런 사회정치학은 빠져 있다. 그것까지 기대하면서 볼 다큐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