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길로이, 아론 소킨, 폴 해기스 등과 함께 현존하는 할리우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 소리를 듣는 크리스토퍼 맥쿼리의 ‘미션 임파서블 7 : 데드 레코닝’은 결국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번 ‘미션’ 시리즈에서 맥쿼리는 자신이 갖고 있던 평생의 숙제 같은 얘기를 몽땅 욱여넣고 집대성한다. 일단 이야기 설정 자체가 그렇다. 뭐랄까. 상대를 너무 크게 잡았다. 인류의 미래를 바로 지금이라도 절대적으로 위협하는 존재가 주인공 에단 헌트(톰 크루즈)의 상대이다. 그 존재는 사실 사람이 아니다. 스스로 진화하는, 일종의 AI 기술이다. ‘엔티티’로 불린다. 겉으로 보기에 에단의 상대는, 그 기술을 차지해 세계 권력을 쥐려는 악당 가브리엘(에사이 모레일스) 같지만 그것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도 어쩌면 그냥 ‘가브리엘’ 곧, ‘4명의 천사장 중 한 명일 뿐이다’. 에단의 적은 가브리엘 같기도 하고 CIA 산하의 비밀 조직이자 자신이 소속돼 있는 IMF(Impossible Mission Force)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 수장인 키트리지 국장(헨리 체르니)이 적으로 배신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 에단의 적은 그냥 절대자로 치환된다. 그냥 의인화된 디지털 존재 그 자체가 된다. ‘엔티티(entity)’, 곧 ‘본질’이란 뜻 그 자체가 된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절대 악인가 아니면 절대 선인가. 그것이야말로 ‘미션 임파서블 7’의 장대한 서사에서 첫 번째로 맞닥뜨리게 되는 딜레마이다. 이런 것이다. 인류의 생존 자체를 말살하게 하는 기술인 만큼 즉각 없애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 통제권을 쥐면 세상의 권력을 얻는다. 전 세계 정보 조직이 딜레마에 휩싸이는 이유이다. 악당의 손에 들어가면 절대적으로 위험한 만큼 이단 헌트 같은 비밀 요원을 이용해 없애야 하는가, 아니면 그걸 통제할 수 있으면 오히려 세상을 지킬 수 있으니 그걸 없애기보다는 가져야 하는가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렇다면 그건 과연 누가 결정하는가’라는 것이다. 조직이든 사람이든 이제 그 실존적 선택을 해야 한다. 영화는 키트리지 국장의 입을 통해 그런 선택의 딜레마를 초반부터 깔아 놓는다. “우리의 삶은 모두 선택의 결과이고 그래서 우린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지. 이단 넌 이번 임무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고통스럽게.” 이번 7편은 ‘에피소드 1’ 곧 전편만을 공개했지만 분위기의 흐름상 누군가의 희생이 없으면 엔티티를 제거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건 곧 에단 헌트의 죽음일 것이다. ‘미션 임파서블 7 : 데드 레코닝’은 영화를 보면서 그렇게 두 번째지만 가장 큰 딜레마를 관객들에게 안긴다. 에단 헌트를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미션 시리즈를 끝낼 것인가 이어갈 것인가. 불현듯 에단 헌트 역의 톰 크루즈가 환갑을 넘긴 나이라는 점이 떠오른다. 007 제임스 본드도 죽었다. 심지어 존 윅도 죽었다. 할리우드가 다른 세대로 넘어가고 있는 시기이긴 하다. 할리우드의 딜레마이다. 영화는 딜레마의 철학을 곳곳에 심어 놓는데 서구인들이 갖는 가장 근본적인 가치, 곧 종교적 의미에서도 그 점을 드러낸다. 에단 헌트를 비롯해 모든 첩보원들이 기를 쓰고 추적하는 엔티티 구동의 열쇠는 십자가이다. 두 개의 십자가가 겹쳐져서 입체형 십자가로 돼야 작동이 된다. 근데 그 십자가 형 키를 처음에 손에 넣는 사람은 그레이스, 곧 은총이란 이름의 여자이다. 신의 은총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법이다. 그레이스(헤일리 앳웰)는 뛰어난 기술을 지닌 소매치기이다. 첩보전에서는 ‘듣보잡’이자 ‘갑둑튀’의 여자이다. 인물들의 이름이 지닌 종교성은 이 영화가 지닌 최대의 딜레마일 수 있다. 지나치게 전형적이지만 한편으로는 피날레로서 그지 없이 좋은 선택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누군가의 대속(代贖)의 행위를 전개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는 예수처럼. 아마도 크리스토퍼 맥쿼리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서구 합리주의 근대 철학)의 결합과 그 갈등의 축을 영화 전체에 풀어 넣으려고 애쓴 것처럼 보인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야말로 이번 영화의 키워드인데다 주인공 에단 헌트를 통해 니체의 초인(超人) 사상을 실현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에단 헌트는 엔티티를 뛰어넘어 인류의 미래를 구원할 수 있는 완벽한 자아이다. 그러나 그가 초인으로서 세상의 또 다른 절대적 권력이 될지(그게 과연 옳은지) 예수처럼 대속의 행위를 이어 갈지(그게 과연 현실적일지)는 현재까지의 이야기 전개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이러자니 논리가 안 맞고(니체의 얘기대로 괴물을 없애려고 스스로 괴물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저러자니(일종의 히어로물이 되니까) 너무 진부해진다. 한 마디로 딜레마이다. 영화 속 캐릭터들은 쉴 새 없이 고민에 빠진다. 전 세계 정보조직의 거간꾼이자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조건 뛰어드는, 일명 화이트 위도우(바네사 커비)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엔티티의 키를 두 쪽 다 가지려 하고 그렇게 될 경우 그것을 어느 쪽에 넘길 것인 가를 놓고 고심한다. 한쪽(예컨대 CIA)은 그걸 가질만한 힘이 있지만 그 작동 방법을 모른다. 또 한쪽(예컨대 가브리엘이나 에단 헌트)은 엔티티의 구동 원리를 이미 알고 있거나 알게 되겠지만 믿을 수가 없다. CIA에 키를 넘기면 전 세계 다른 정보 조직에 쫓기게 된다. 가브리엘 등에게 넘기면 영원히 그의 하수인이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 가를 두고 영화는 등장인물들을 베니스의 한 호텔에 몰아넣는다. 그 장면은 이번 영화의 주제를 극대화하는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심지어 에단 헌트는 여기서 자신의 현재 애인인 일사 파우스트(레베카 퍼거슨)와 새로운 여인 그레이스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파우스트(고민을 하는 인간)냐 그레이스(신이 내린 존재)냐, 인 셈이다. 하지만 에단의 오랜 동지이자 둘도 없는 친구인 루터(빙 레임스)는 그에게 이런 식의 충고를 한다. ‘가브리엘을 죽여선 안돼. 그를 살려서도 안돼. 그냥 키만 갖고 도망쳐야 해. 해답은 거기에 있어.’ 에단 헌트도 위기의 순간 일사 파우스트에게 소리친다. 최대한 멀리 도망쳐! 일사를 보낸 후(버린 후) 그는 그레이스를 구하려 한다. 그러나 정작 그레이스는 자꾸 그런 그에게서 벗어나려 애쓴다. 신의 뜻은 다른 것인가. 그 모든 복잡한 수사학에도 불구하고 딜레마의 주제의식을 액션 한방으로 보여준 씬이 바로 열차 폭파 신이다. 에단과 그레이스가 탄 열차는 노르웨이 어딘 가 절벽에서 철로가 가브리엘의 폭탄 테러로 끊기게 되고 차량 한 칸 한 칸 밑으로 수직 낙하한다. 두 남녀는 칸마다 뒤로 가야 살 수가 있다. 절벽에 세로로 차례차례 대롱거리게 되는 기차 차량 안에서 뒤로 간다는 것은 위로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존을 위해 전진하는 것의 방향성이 뒤틀려지게 된다는 것인 바 이건 마치 대형 크루즈였던 포세이돈호가 태풍으로 전복된 후 사람들이 살기 위해 오히려 뱃속, 배 밑바닥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야 하는 딜레마를 벤치 마킹 한 아이디어이자 설정이다. 이번 영화의 가장 짜릿한 액션 신이자 세트와 특수 촬영, 스턴트와 CG의 절묘하면서도 극상의 결합을 보여준다. 현대 할리우드 테크놀로지를 테크놀로지의 느낌이 아니라 인간 육질의 느낌으로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톰 크루즈의 장인 정신이 배어 있는 부분이다. 그가 독보적인 배우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이다. ‘데드 레코닝2’는 1편에 이어 과연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에단 헌트는 목숨을 잃을 것인가. IMF는 영구 폐쇄되는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될 것인가. 벌써부터 호사가들의 예측이 난무하고 있다. 딜레마이다. 이러자니 너무 아깝고 저러자니 여기까지 온 얘기를 더 이상 정리할 수가 없다. 우리의 삶은 모두 선택의 결과이다. 정말 그렇다.
모든 것은 다 ‘그놈의’ 토드 때문이다. 토드는 강아지다. 유기견이다. 이런 강아지가 흔히 그렇듯 분리불안증이 심하다. 그래서 자주 짖는다. 동네 주민들이 난리다. 집 주인도 결국 방을 빼라고 한다. 견주인 존 체스터와 아내 몰리는 이사를 갈 바에야 아주 색다른 인생의 전환점을 찾으려 한다. 바로 토드가 뛰어놀 수 있고 마음껏 짖을 수 있는, 그리고 온갖 동물과 식물,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다 함께 할 수 있는 농장을 만든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작은 농장’은 이처럼 존&몰리 부부의 불가능하고 무모한 농장 운영 도전기를 그린 내용의 작품이다. 존 체스터는 다큐멘터리 촬영감독이다. 주로 동물 다큐를 찍어 왔다. 몰리 체스터는 건강식 요리 전문가이다. 이 모든 일은 강아지 토드에게서 비롯됐지만 아내 몰리의 입버릇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건강한 요리를 위해서는 채소는 직접 재배한 것을 써야 한다고 말해 왔고 그래서 그녀는 늘 방울토마토부터 바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재배할 꿈에 대해 얘기해 왔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 다큐의 제목은 몇 가지 점에서 의도적인 거짓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일단 ‘작은’ 농장이 아니다. 존&몰리 부부가 사들인 땅은 8만 헥타르, 곧 24만 평이다. 어마어마한 규모다. 영화는 제목만으로는, 그리고 내용의 아우트라인만으로는, 유쾌하고 귀여운 성공담을 담고 있을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처음엔 즐겁게 시작하지만 중간에 매우 심각해지며 나중엔 진지한 성찰로 이끈다. 이건 성공기라기보다는 고난기에 가깝다. 가장 인상적인 존 체스터의 대사는 ‘타협 없는 이상주의의 실현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들 부부는 순진한 이상주의자였다. 아파트 베란다 화단 정도나 키우던 젊은 부부였다. 그런데 황무지를 농장으로 바꿔낸다고? 그것은 결코 이상만으로 되는 일이 아님을 곧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나무가 많아지면 새가 몰려들고 새는 과일을 죄 쪼아 먹어 대서 모두 못쓰게 만든다. 오리 수백 마리는 건기의 호수를 배설물로 채우게 해서 저수지의 물고기를 죽게 만든다. 숲이 우거지면 나무에 진드기와 달팽이가 들끓는다. 동물들이 많아지니 당연히 코요테의 습격이 잦아져 닭들이 거의 죽어 나갈 지경이 된다. 코요테는 존&몰리 부부의 캘리포니아 농장 ‘애프리콧 레인’의 유일한 생산품이자 자본의 동력이 되는 싱싱한 계란 매출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게 된다. 존 체스터는 결국 엽총을 든다. 타협 없는 이상주의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그가 코요테를 사살한 직후 그 사체를 내려다보며 하는 말이다. 다큐 ‘위대한 작은 농장’은 어쩌면 1960~70년대 미국에 풍미했던 히피즘의 부활을 은밀하게 얘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기존 히피 운동에 환경과 동물보호, 생태계 복원을 덧붙인 일종이 뉴히피즘적 색채가 강하다. 기존 히피는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며 물질주의를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정신적 가치에 무게를 둔 운동이었다. 종교적이면서도 정신적 해방과 이념적 자유, 문화적 생활을 꿈꾸던 일군의 젊은이들은 집단생활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히피들은 결국 과도한 약물 남용과 그룹 섹스 등 루저들의 문란한 집단생활로 변질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존&몰리 부부의 농장이 시도될 수 있었던 데는 이들이 주장하는 생태환경론에 동의한 사람들, 곧 에인절 투자자들이 모였기 때문인데다 실질적인 농장 운영도 앨런이라는 이름의 생태 이론가가 멘토로 참여하고 다수의 젊은이들이 자발적인 노동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다큐에는 잘 안 나타나지만 이들은 농장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간다. 존과 몰리의 농장은 결국 새로운 사회, 새로운 시스템을 꿈꾸고 있는 셈이다. 다큐의 제작 방식과 제작 주체, 내러티브 구성과 서사가 돋보인다. 이건 다큐지만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마냥 탄탄한 스토리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8년간 틈틈이 찍어 내 한편의 영화로 만들어 냈다는 것이 놀랍다. 존 체스터는 동물다큐 촬영감독 출신답게 몰리가 땅을 사자고 할 때부터, 그리고 그들이 강아지 토드를 입양한 순간부터 애프리콧 레인 농장이 7년 만에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결국 이 모든 것이 궁극의 엄청난 ‘기록’이 될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한 컷 한 컷 장면을 찍어 놓았다. 그것도 그 무수하고 험난한 농장 일을 병행하면서. 엔드 크레디트를 보면 이를 위해 4명의 보조 촬영감독이 동원됐음을 알 수가 있다. 존 체스터에겐 한 마디로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제작의 단계와 과정도 매우 계획적이었는 바, 장편을 한꺼번에 편집하는 것보다 단편 하나하나, 곧 부분 부분을 완성해서 나중에 이를 모두 합쳐 장편으로 재 편집하는 방식을 택했다. ‘위대한 작은 농장’을 내놓기 전 ‘엠마 구하기’ 등의 단편을 발표하는 방식이다. 결국 하나하나, 차곡차곡 만들어 낸 다큐인 셈이다. 엠마는 존 부부가 처음으로 키운 암퇘지 이름이다. 엠마는 계속 새끼를 낳았는데 한 번에 17마리씩 낳았고 너무 번식력이 강해 그것이 어느 순간엔 존의 최대 고민 중 하나이기도 했다. ‘위대한 작은 농장’은 결국 공존에 대한 얘기이다. 그런데 이 공존은 꼭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다. 공존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적대 관계도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공존은 평화와 전쟁이라는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의 기묘한 합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자연 생태계에서라면 그것은 늘 합리적이며 충분히 수용 가능한 것이다. 존 체스터가 결국 코요테를 죽일 수밖에 없는 것, 모든 작물을 파먹는 포식자 쥐들을 위해 올빼미를 풀어 놓게 된다든지 하는 것, 모든 피복작물에 기생하며 생태계를 파괴시키는 달팽이들을 오리가 잡아먹게 한다든지 하는 것 등등이다. 올빼미 87마리가 두더지 1만 5천 마리를 없앤다. 오리는 거의 모든 달팽이의 포식자이다. 분명한 목적이 있는 유기체는 죽음을 생명으로 재탄생시킨다. 자연과 동물은 수억 년 동안 그렇게 생태계를 유지시켜 왔다. 인간만이 그러지 못하며 산다. ‘위대한 작은 농장’은 동물을 사랑하고 그들을 살리려는 한 부부의 애처로운 노력을 그리는 것을 넘어 인간 사회에 대한 더 큰 메시지, 더 깊은 정치사회적 의미를 던지고 있다. 인간은 지금 당장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받아들이며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얘기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환경영화가 아니다. 매우 정치적 순도가 강한 작품이다. 서사의 구조도 매우 발칙하다. 영화는 남 캘리포니아 지역에 거대한 산불이 난 것으로 시작한다. 존이 몰리를 향해 워키토키로 외친다. 빨리 피해야 해! 다 버리고 집에서 빨리 나와! 그 직후 영화는 이들의 LA 도시 생활로 플래시 백한다. 토드를 입양하는 과정과 거대한 규모의 황무지를 매입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그리고 농장을 운영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아뿔싸, 아까 첫 장면이 대형 산불 모습이었으니 이 모든 게 다 물거품이 된다는 얘기일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렇다면 이 다큐는 결국 언해피 엔딩이라는 얘기일까라는 생각도 갖게 한다. 그 미스터리를 앞단에 슬쩍 덫처럼 던져 놓은 이야기 솜씨가 돋보인다. 재미있게 그러나 진지하게. 자연은 늘 활력이 넘치지만 늘 겸손하고 성찰이 있는 노동을 요구한다. 바로 그 양가(兩價)의 의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얻는 것이 많다. 적어도 타협 없는 이상주의는 없다는 말 하나 정도는 남는다. 이상과 현실이 늘 부딪히는 것은 그 같은 깨달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회정치적 이슈의 해법은 놀랍게도 자연의 순환 법칙에서 찾아질 수 있다. 이 다큐가 전 세계에서 삽시간에 주목을 받았던 이유이다. 그런데 강아지 토드는 어떻게 됐을까. 눈물 없이는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미국 뉴욕 출신의 감독 아리 에스터의 영화들(‘유전’, ‘미드 소마’ 등)은 난독증의 필사본이다. 그의 최신작으로 국내에서 막 개봉될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절대 해독 불가 아리 에스터 월드’의 최고봉이다. 이런 영화를 만드는 아리 에스터도 놀랍지만 이런 영화에 돈을 대고 문을 열어 주는 투자자와 극장들도 놀랍다. 이건 돈을 벌 수 있느냐 없느냐, 들인 돈만큼을 수익으로 환원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이해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관객들을 영화 인식의 인내로 내몬다. 미지(未知)와 불가지(不可知)가 마구 뒤섞여 있는 영화. 노력하면 결국은 알 수 있는, 아직 모르고 있을 뿐(未知)이지만 동시에 그래도 결국엔 알 수 없는(不可知) 얘기가 혼재돼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주인공인 보(호아퀸 피닉스)가 어렸을 때부터 싱글 맘인 모나(패티 루폰)로부터 정서적 학대에 시달려 왔고 그것이야말로 성인이 돼서도 그의 편집증의 궁극적 원인이 됐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끊임없이 살모(殺母)라는 존속 살해의 강박증을 가지고 있음은 느낄 수 있지만 그것 역시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것, 정신병리학적인 것이라는 점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보가 한 번도 섹스를 해 보지 않은, 에이섹슈얼(asexual : 무성애자. 무성생식)인데 나중에 보니 아들이 셋이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보통의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에 맞지 않는다. 알 수가 없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1975년생인 보란 인물, 현재 48세인 남자가 겪고 있는 신경증적 질환에 대한 이야기이(일 수 있)다. 다분히 신경정신학이나 정신질환 연구, 심리학자들일수록 이해도가 빠른 영화일 수 있겠다. 무려 179분이나 되는 이 영화는 총 4개의 장(章)으로 구성돼 있는데 뉴욕 빈민가에서 살아가는 보의 일상이 1부이고 거리에서 칼에 찔린 후 어떤 중년 부부의 집에서 치료를 받는 상황이 2부이고 그 집안의 괴물(또 다른 환자로 이라크 파병 이후 PTSD를 앓고 있는 전직 군인의 공격으)로부터 탈출해 숲속에서 히피로 지내는 이야기가 3부이며 4부는 괴물로 변한 전직 군인에게 쫓기다 엄마의 장례식에 오게 된 후 어릴 적 여자 친구인 일레인(파커 포시)과 기습적으로 섹스를 하게 되는데 그가 평생을 걱정해 왔던 것과는 달리 남자인 자신이 복상사(腹上死)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인 일레인이 성관계 중 돌연사를 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서 자신이 부계가 모두 복상사를 했다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터이다. 자신이 태어나게 된 것도 그렇게, 단 한 번의 사정(射精)으로 엄마를 임신시킨 후 사망한 아버지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엔 주인공 보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를 죽이고 세상에 나온 것이다. 프로이트 심리학의 핵심 키워드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살부(殺父) 개념을 형상화한 셈이다. 남자는 어릴 때 처음 만난 이성이 어머니임으로 아버지에게 경쟁심을 느끼게 되고 그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 반대가 엘렉트라 콤플렉스(딸이 엄마에게 경쟁심을 느끼게 되고 죽이고 싶어 하는 심리.)인데 가부장의 시스템이 무너지고 부권의 권위가 사라진 현대에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아버지, 어머니 모두에게 해당하거나 교차하는 특성을 지닌다. 주인공 보가 엄마인 모나에게서 느끼는 것은 오이디푸스도 엘렉트라도 아닌, 아니면 두 개가 동시인 심리이다. 영화의 1장에 해당하는 첫 번 째 에피소드가 가장 현실에 근접해 있는 내용이다. 뒤의 세 장은 모두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이다. 그건 실재라기보다는 감독인 아리 에스터가 반항하고 저항하려는 가부장 혹은 모계사회의 불필요한 권위의식, 종교의 외피를 쓴 가식적인 윤리 의식, 자본주의(특히 중산층)가 만들어 내는 끝없는 허위의식에 대한 관념적 비판과 비난의 서술이다. 머릿속에서 하는 얘기이기 때문에 두서가 없을 뿐이다. 핵심은 자기 식의 비판이다. 첫 에피소드에서 보는 자신의 정신과 의사(스티븐 헨더슨)와 상담하는 것을 오프닝 시퀀스로 보여 준다. 의사는 아버지의 기일에 맞춰 엄마 집을 방문하게 돼서 좋으냐고 질문한다. 보는 의사에게 ‘꼭 갈 필요가 없고 자신이 가도 되는지도 잘 모르겠다’고 얘기한다. 의사는 자신의 노트에 ‘죄의식(GUILT)’이라 메모한다. 의사는 그에게 신약을 주면서 꼭 물과 함께 먹으라고 한다. ‘꼭’이라고 몇 번을 강조한다. 집에 돌아온 보는 일찍 잠자리에 들지만 옆집에서 두 시간에 한 번씩 보내는 항의 쪽지에 시달린다. 음악 소리를 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보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복도 바깥에서는 헤비메탈의 강렬한 폭발음이 터지는 중이다. 보의 환청은 무음인가, 아니면 음악 소리가 환청인가. 항의 쪽지 때문에 잠을 설친 보는 엄마 집으로 가기 위해 슈트 케이스를 싸고 방 키를 들고 나서지만 그 찰나 방에 놓고 온 무엇 때문에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같은 복도에 사는 아파트의 누군 가가 트렁크와 열쇠를 가져가 버린다. 황당해 하고 있는 그에게 아파트 청소원이 지나가면서 ‘너는 이제 X됐어.’라고 말한다. 엄마에게 전화를 해 비행기 티켓까지 끊어 놨는데 가방과 열쇠를 잃어버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엄마는 넌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고 쏘아붙이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린다. 극심한 불안과 혼란한 정신 때문에 의사가 준 신약을 먹으려고 하자 이번엔 생수가 바닥이 나고 수도가 고장이 났는지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약을 그냥 삼킨 후 용법을 살펴 본 보는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는데 물 없이 이 약을 먹으면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돼있었기 때문이다. 물을 먹기 위해 집 건너편 편의점을 가려다가 보는 이런저런 걸인들과 부딪혀 도망 다니느라 헐덕댄다. 급기야 그는 목욕 중에 있는 자신을 욕탕 천정에 매달려 있다가 그를 덮친 청소부와 몸싸움을 벌이게 되고(이 장면은 명백히 엄마 배 안 물속에 있는 태아를 누군가 공격한다는 것으로 인간은 출생 전부터 심각한 위협에 시달린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남자를 피해 벌거벗을 채로 길가에 나온 보에게 역시 나체로 거리를 활보하며 사람들을 이미 넷이나 찔러 죽인 거지가 휘두른 칼을 맞고 정신을 잃는다. 이런 등등의 서사들은 알프레드 히치콕이 1945년에 만든 영화 ‘스펠바운드’ 속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풍 환상 장면(주인공 존 발렌타인 박사, 곧 그레고리 펙은 같은 내용의 꿈을 반복적으로 꾸는데 얼굴 없는 남자가 녹아내린 시계를 벼랑 아래로 떨어뜨리는 장면이다. 동료 박사인 콘스탄스, 곧 잉드리드 버그먼은 존이 하얀 식탁보에 난 포크의 삼지창 자국을 없애려고 애쓰는 모습에서 그가 극심한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음을 간파한다.)을 연상케 한다. 아리 에스터 식 ‘환상특급’이자 ‘기묘한 이야기’의 결정판이 이번 ‘보 이즈 어프레이드’인 셈이다. 영화는, 인간이 지닌 정신병적 증후군이라는 것이 사실은 그 카테고리나 심도에 비해 수사학적으로 지나치게 과장 왜곡돼 있거나 말이 말을 낳은 경우라는 점, 정신병이 사실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사회와 시스템이 인공적으로 만들고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죄의식이란 무엇인가. 오이디푸스든 마더 콤플렉스든 그 모든 것이 지적 허영의 관념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얘기가 바로 이 영화의 키포인트로 보여진다. 관념을 관념의 끝으로 밀어붙여 그 추상의 실체를 더듬게 만드는 기이한 방식의 영화이다. 옳고 그르거나 맞고 틀린 식으로 재단할 영화가 아니다. 자기에게 대입해 보면서 느끼고 직관하는 영화이다. 영화는 때론 그렇게 정신적일 때가 있다. 이게 다 죄의식 탓이다. 자 근데 그게 과연 무슨 말인가.
지난 2월 국내 극장 개봉 당시 41만 명이라는 비교적 괜찮은 흥행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세간의 화제를 얻는 데는 실패했던 작품 ‘서치 2’는 영화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가 있다. ‘서치 2’는 매우 영리하고 똑똑한 영화이다. 어느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전작 ‘서치 1’처럼 ‘서치 2’도 누군 가를 찾는 얘기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만 연작의 특징을 가질 뿐 두 영화는 연관성이 없다. 1편의 원제는 그대로 Searching(수색)이고 2편은 Missing(실종)이다. 이건 내용 면에서 큰 변별력을 보이는 대목이다. 서사의 구성 면에서 2가 1보다 진화했다. 영화가 훨씬 풍부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두고 사람들이 별다르게 뜨거운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1편과 달리)은 영화를 따라가는 ‘정서’가(‘기술’이 아니라) 점점 더 MZ 세대 중심이기 때문이다. 영화 ‘서치 2’는 디지털 세계의 기술적 다양함을 넘어선, 믿을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한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동시에 구사할 줄도 모르는 올드 세대 관객들에겐 그 서사(敍事), 곧 줄거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작품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영화가 중간중간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서치 2’는 애초부터 올드 세대 관객들을 껴안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아예 배제하고 간 셈이다. 기획부터 영화의 큰 성공을 기대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영화는 비교적 단란한 가족을 보여 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곧이어 전개되는 아빠의 죽음, 부성의 부재 속에서 자란 18세 된 딸과 43세 엄마의 일상에 대한 얘기이다. 배경은 LA이다. 엄마 그레이스 엘렌(니아 롱)은 남편에 대한 상처를 잊고 열심히 살아가려 노력하는 싱글 맘이다. 그녀는 최근 케빈이라는 동양계 남자(켄 렁)와 연애 중이며 그와 함께 콜럼비아 여행을 떠날 참이다. 그래서 참 신경 쓰이는 사람이 청소년 딸 준(스톰 리드)이다. 그레이스는 딸을 준버그(우리 식으로 라면 똥강아지 준)라고 부르며 당연히 딸 준은 모든 청소년들이 그렇듯이 엄마가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것에 짜증을 낸다. 엄마 그레이스는 남친과 여행을 가기 전 자신의 친구이자 가정문제 전문 변호사인 헤더(에이미 랜테커)에게 딸을 좀 들여다봐 달라고 부탁한다. 당연히 이 문제도 딸 준은 엄마에게 부글부글 성질을 부린다. 자신의 나이엔 더 이상 보모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구구절절, 영화 초반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소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런 스릴러 영화일 수록 모든 인물에 복선이 깔려 있다. 영화 속 사건을 풀어 가는 해결의 실마리, 그 답은 인물과 인물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엄마 그레이스는 딸 준에게 자신이 LA로 돌아오는 날 공항에 픽 업을 나와 달라고 한다. 며칠 신나게 파티를 즐겼던 준은 엄청난 숙취 때문에 가까스로 일어나 구글에서 서비스 업체를 찾아 내 난장판이 된 집의 청소를 맡기고 공항으로 엄마를 마중 나간다. 이 모든 것은 실시간으로 그녀의 모바일 폰에 셀카 녹화 형식으로 담겨진다. 하지만 엄마는 공항에 나타나지 않는다. 엄마는 실종된다. 남자 친구도 없어진다. FBI 수사관인 일라이저 박(다니엘 헤니)이 개입한다. 콜럼비아 현지에서는 일종의 흥신소 역할을 하는 서비스 프리랜서 자비(조아큄 알메이다)가 준의 의뢰로 현지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구글 맵이 동원되고 준은 두 사람의 셀 폰 내 위치 추적기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준의 개인 서칭은 디지털 기기의 모든 기능을 총망라시킨다. 심지어 엄마와 엄마 애인이 다녔던 콜럼비아 내 유명 관광지의 CCTV까지 원격 조종으로 열어 볼 정도다. 그녀의 기술, 요즘 아이들이 디지털 기능을 이용하는 수준은 실로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영화는 수사관 일라이저 박, 곧 다니엘 헤니가 전화 목소리 만에서 비로서 얼굴을 드러내는 중반쯤부터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한다. 엄마의 애인 케빈이 사실 사기 전과가 있는 남자라는 것이 알려지고 이 모든 것이 그가 엄마의 돈을 노리고 일으킨 사건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사게 된다. 이윽고 콜럼비아의 CCTV나, 케빈의 모든 SNS에 실린 여행에서의 사진 속 여자가 알고 보니 엄마가 아니라 엄마를 닮은 대역이라는 엄청난 사실이 드러난다. 엄마 그레이스는 콜럼비아로 가기 전, LA 공항으로 가는 우버 택시 안에서 이미 납치돼 실종된 것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더욱더 수상한 것은 지금까지 준이 알고 있었던 엄마의 이름 그레이스도 12년 전 한번 바뀐 적이 있다는 것이며 이전에 다른 정체가 있었음이 알려지게 된다. 이쯤 되면 엄마는 납치, 실종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취를 감추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점입가경이다. 엄마는 실종됐을까. 딸을 버리고 사라졌을까. 아니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살해됐을까. 영화 ‘서치 2’는 화려한 미스터리 스릴러의 이야기 구조이지만 두 가지 다른 측면에서 주목할 거리가 준다. 디지털이 전하는 수많은, 정말 수도 없이 많은 그 난장판의 이야기도 사실은 진실의 조각에 불과할 수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모든 것이 조작될 수 있고 그 조작 여부도 사용자의 취사선택에 따라 선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준도 그렇고, 그레이스도 그렇고, 케빈도 그렇고, 언제든지 모두들 위치 추적기를 끌 수 있으며 구글이든 페이스북이든 기분과 특정 목적에 따라 계정을 폭파시킬 수 있으며 아니면 가상의 계정을 만들어 다른 사람인 양 정체를 숨길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상당수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영화는 그 ‘리얼’을 보여 줌과 동시에 디지털 세상이 지닌 허구, 곧 디지털은 사실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척, 그 안에 담겨 있는 팩트들이 상당 부분 ‘해석이 필요한 진실’임을 나타내고 있다. 디지털 세상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며, 진짜가 아니라 진짜라고 믿고 싶어 하는, 현대인들의 사이비 욕망이 만들어 내는 가상의 세계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가 믿고 있는 가정의 가치가 실제로는 많은 허점과 구멍을 지니고있다는 점이다. 진짜 가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모성도 마찬가지이고 부성도 마찬가지이다. 그건 훈련되고 쟁취되는 것이지 자연스럽게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다들 무슨 말인가 할 것이다. 영화를 보면 알 수 있게 된다. 맞다 꼬시는 것이다. 영화를 보시라는 것이다. 결론을 밝힐 수는 없다. 다만 얘기할 수 있는 것은 해피 엔딩이어서 다행이라는 점 정도이다. 그러나 모르겠다. 실제 삶은 꼭 해피 엔딩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서치 2’는 할리우드 영화이다. 할리우드는 해피 엔딩을 좋아한다. 감안해서 봐야 할 영화라는 얘기이다.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주의 감독인 스웨덴의 루벤 외스틀룬드가 칸에서 두번째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 ‘슬픔의 삼각형’은 제목이 주는 느낌처럼 슬프거나 혹은 그 반대로 재미있거나 유쾌한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매우 찝찝하고 불쾌하며 심지어 反 희망적이고(비관주의나 염세주의란 말은 너무 약하다.) 우울해지는 작품이다. 물론 너무나 신랄하고 조소가 가득해서 반어적 의미에서 재미와 흥미가 가득 찬 작품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왜 지난해 칸 영화제가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 대신(감독상) 이 작품을 선택했는 가를 일응 수긍할 수 있게 한다. 칸은 두 가지 갈래에서 감독의 손을 들어 주곤 하는데 ‘매우 사회정치적인 작품이거나 아니면 매우 예술적인 작품이거나’이다. 외스틀룬드의 영화는 매우 사회적 리얼리티가 강한 작품이다. 이 세상을 묘사해 낸 내용들이 너무 적확해서 거꾸로 내용 하나하나를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칸 심사위원들은 지금 세상에 이런 영화가 필요하다고 봤을 것이다. ‘슬픔의 삼각형’은 자본주의 세상에 대한 뛰어난 분석서이며 일종의 新 자본론이다. 아마도 마르크스가 봤다면 박장대소하고 웃으면서도 동시에 세상이 자신의 말이나 예언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는 내용이어서(자본주의는 망하지 않으니까) 소리 내어 울지도 모를 영화이다.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마지막 장면을 소개하기 어렵지만 세상은 도돌이표처럼 처음으로 돌아간다. 뒤집어진 계급관계는 또다시 뒤집어질 것임을, 원래대로의 계급사회, 그것도 더욱 양극화된 사회로 돌아갈 것임을 보여 준다. 우리는 쳇바퀴 안의 다람쥐이다. 돌아갈 수 없다. 잠시 그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럴 수 없다. 그러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정상이 아니다. 2억 5000만 달러짜리 초호화 크루즈에서 화장실 매니저였던 에비게일(돌리 드 레온)은 표류한 섬에서는 자신의 모시던 손님과 상사를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정상처럼 보이지 않는다. 왠지 캄보디아의 학살자 폴 포트를 연상케 한다. 그녀는 자신만이 고기를 잡을 수 있고 불을 피울 수 있다는 이유로, 또 폭파된 요트에서 가져 온 프리첼 과자를 다량으로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구명정을 차지하고 사람들을 부리기 시작한다. 지식인과 부자를 무조건 때려 잡으며 원시 공산제를 추구했던 폴 포트 정권의 미친 짓, 크메르 루즈의 광기를 서서히 내비치기 시작한다. 그녀는 심지어 과자를 미끼로 모델 남자 칼(해리스 디킨스)의 몸을 탐하기 시작한다. 칼은 같은 모델로 (계약의 관계처럼 보이는) 애인인 아야(찰비 딘)의 분노와 묵인 하에 새로운 지배자 에비게일의 늙은 몸에 봉사를 하며 섬 생활을 이어 나간다. 같이 표류한 사람들은 칼의 매춘 행위를 지켜보며 조롱은 해도 비난하지 않는다. 도덕과 윤리는 생존보다 뒤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외스틀룬드의 이 영특한 자본주의 분석서는 모두 세 개의 장(章)으로 구성돼 있다. ‘칼&아야’가 1부, ‘요트’가 2부, 3부는 ‘섬’이다. 영화 ‘슬픔의 삼각형’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나온 작품 가운데 가장 발칙한 오프닝을 보여주고 있는데 칼을 포함한 패션모델 남자들의 오디션장에서 웃통을 다 벗고 모여서 테스트에 앞서 선배 급으로 보이는 게이 방송 진행자와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다. 이 진행자는 예비 모델들을 모아 놓고 상반된 표정과 몸짓을 보여 줄 것을 요구하는데 이런 식이다. “자, 당신은 발렌시아가 모델이에요. 도도한 표정을 지어 주세요. 자 그러면 이번엔 H&M 모델이에요. 그냥 착하고 평범한, 왠지 해피해 보이는 표정을 지어 봐요. 자 모두 발렌시아가! 다시 H&M! 다시 발렌시아가! H&M!“ 남자 모델 모두들 그가 시키는 대로 표정을 바꿔 가며 연기를 한다. 인간은 돈과 명성 앞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을, 시키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징그럽고’ ‘귀엽게’ 묘사해 낸다. 영화의 핵심 키워드는 모두 2부인 ‘요트’에 몰려 있다. 여기서 선장 토마스(우디 헤럴슨)와 러시아 부자 디미트리(즐라트코 버릭)는 뜬금없는 사상 논쟁을 벌인다. 토마스는 디미트리를 가리켜 러시아의 돼지 자본가라 부르고 디미트리는 토마스에게 미국 공산주의자라 하지만 선장은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라 하는데 디미트리는 마스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썼기 때문에 그게 그거 아니냐고 되받아친다. ‘선장 토마스의 세상 현실 인식=감독 루벤 외스틀룬드의 세계관’은 토마스가 디미트리와 같이 떠들어 대는 술주정 대사 하나하나에 다 담겨 있다. 그는 자신의 노트를 뒤적이며 이렇게 말한다. 디미트리는 그런 그에게 선내 마이크를 대 준다. 배 안의 사람들은 모두 선장의 얘기를, 좋거나 싫거나, 귀 기울여 듣게 된다. 디미트리는 그런 그를 보며 ‘공산주의 나라에서는 항상 듣기만 해야 한다’고 비아냥 대지만 선장 토마스의 비판을 부인하지는 않는 표정이다. “마틴 루터 킹, 로버트 케네디, 말콤 엑스, 존 F. 케네디 모두 미국정부가 죽였다. 미국은 민주적이고 정직하며 선한 타국의 지도자들을 죽였다. 칠레 베네주엘라 아르헨티나 페루 엘살바도로 니카라과 파나마 등등. 미국은 영국과 손을 잡고 중동을 망가뜨린 후 마음대로 국경을 그어 놓고 독재자를 앉혔다. 미국의 가장 돈 되는 사업은 바로 전쟁이다. 1918년 유진 뎁스의 말대로 전쟁은 정복과 약탈의 수단으로 사용돼 왔다. 지배계급이 전쟁을 선포하면 피지배계급은 나가서 싸운다. 지배층은 당신이 전쟁에 나가서 도살되는 게 애국이라 주입해 왔다.” 요트 밖 바다는 엄청난 풍랑이 이는 중이다. 요트 안은 한마디로 뒤집어진 상태다. 사람들, 곧 온갖 명품과 보석으로 치장한 최고의 부르주아들은 모두들 뱃멀미로 토하고 난리가 아니다. 선장이 마련한 파티에서 최고급 음식을 먹는 과정도 흥미롭다. 사람들은 초면에 인사를 나누는데 어느 점잖은 척하는 노부부는 자신들이 민주주의 사회를 위한 사업으로 돈을 벌었다고 한다. 알고 보니 수류탄 장사꾼이다. 디미트리는 자신을 똥팔이라고 부른다. 돼지 똥을 팔기 시작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비료 장사로 일확천금을 벌었기 때문이다. 디미트리는 이 선상 파티에 아내와 젊고 풍만한 정부(情婦)를 함께 데려왔지만 정작 두 여자는 서로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돈이 있으니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디미트리의 늙은 아내(선니이 머레스)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이 오물을 토하는데 남편이 선장과 술을 마시며 정치적 논쟁을 벌이느라 노닥거리는 상황에서 혼자 거의 벌거벗은 채 객실의 화장실을 뒹굴며 구토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녀의 변기는 결국 똥물로 넘치기 시작하며 비싼 카펫이 깔려 있는 선내 파티 룸에 똥물이 흘러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들이 마시던 고급 샴페인 모엣 샹동이 똥물 사이로 떠다닌다. 자본가는 디미트리 마냥 똥팔이이며 자본주의는 현재 똥물로 넘쳐나고 있음을 풍자한다. 미국의 공산주의자, 아니 마르크스주의자인 선장 토마스도 자신을 가리켜 ‘개똥 같은 사회주의자’라고 비아냥댄다. 왜냐하면 그저 자신이 하는 일이라곤 개똥철학만 나불대기 때문이다. 이른바 좌파 지식인들이 늘 하는 일이 그것인 것처럼. 3부인 ‘섬’ 부분은 조금 줄였으면 좋았을 법 하다. 명백히 1974년, 리나 베르트뮬러가 만든 ‘귀부인과 승무원(한국 비디오 제목 ‘무인도의 열정’)’과 그 리메이크작인 가이 리치 감독, 마돈나 주연의 2002년작 ‘스웹트 어웨이’를 벤치마킹한 내용 이자 확장판이기 때문이다. 3부를 조금 줄였으면 오히려 간결미가 돋보였을 것이다. 감독이 워낙 할 말이 많았던 듯이 보인다. 그 많은 수다 중에 감독이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는 여기에 담겨져 있다. 다시 선장 토마스를 통해서다. “당신이 다른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면서 풍요 속에서 헤엄칠 때 세계는 빈곤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어. 너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냐?” 맞다 그러는 거 아니다. 착잡한지고. 아주아주 착잡한 일이로소이다.
안타깝게도 국내외 모두에서 흥행에 실패한 실사영화 ‘인어공주’는 몇 가지 지점에서 다른 면을 지니고 있다. 그것도 두드러질 만큼 아주 다른데 짐작하는 것과는 달리 인어공주가 흑인이라는 점이 제1의 요소는 아니다. ‘공주=흑인’은 차이라기 보다 비교적 단순한 특징, 캐릭터의 외모 설정에 불과하다. 인어공주가 흑인이기 때문에 내용이 달라지거나 극 전체의 톤 앤 매너가 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냥 피부가 까매서 처음엔 다소 ‘신기하게’ 느껴지다가도 이내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 걸 알게 된다. 이번 ‘인어공주’가 안데르센의 원작이나 1989년에 나온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와는 궁극의 지점에서 각각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1) 원작과는 결말을 완전히 다르게 갔다는 것이고 2) 1989년 애니메이션과는 왕자의 캐릭터가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이번 실사영화에서 왕자는 ‘백마를 탄’ 이미지가 아니다. 그는 다른 선원들과 함께 갑판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백성처럼, 일반 국민처럼 살아가려는, 그래서 ‘보통 사람의 정치학’을 깨달아 가려는 꽤 괜찮은 덕목의 지도자 청년으로 나온다. 심지어 왕자는 그리 잘생기지도 않았다. 외모상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의도적으로 평범한 인물로 그리려 애쓴다. 덴마크 작가 안데르센의 원작은 비극이었다. 이번 실사 영화는 해피 엔딩이다. 인어공주는 원작처럼 물거품이 돼 사라지지 않는다. 원작에서 왕자는 다른 여자(우아한 옆 나라 공주)를 선택해서 인어를 배신하지만 이번 실사에서는 다시 인어공주인 에리엘(할리 베일리)에게 돌아간다. 왜냐하면 다른 여자가 곧 흉측한 문어 마녀 울슐라(멜리사 매카시)인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이건 꽤나 진부한 선택인데다 안데르센이 지닌 잔혹하고 우울한 취향을 ‘배반한’ 것이어서 작품을 완전히 다른 지점에 갖다 놓은 최고의 동력이 된다. 감독 롭 마샬(뮤지컬 전문 감독으로 ‘시카고’와 ‘나인’, ‘메리 포핀스 리턴즈’를 만들어 성공했다. 최고의 작품은 ‘숲속으로’이다. 극영화로는 ‘게이샤의 추억’이 성공했다.)이, 안데르센은 안데르센이고 자신은 자신으로서 자신만의 인어공주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다면 원작과 다른 결말이야말로 그걸 성공하게 한 요인이 된다. 하지만 이런 결말은 이미 1989년의 애니메이션에서 일정 부분 차용해 온 것이어서 그다지 신선한 것은 아니다. 디즈니는 세계 청소년 관객들을 위해 잔혹한 비극의 결말을 ‘결단코’ 피해 가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 점에서 이번 실사 판 ‘인어공주’는 디즈니의 제작 철학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실사영화에서 롭 마샬이 강조점을 두려 했던 것은 인종 문제, 미국 내 인종차별의식에 대한 비판의식을 고양시키려 하는 것 ‘따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흑인 인어공주’는 디즈니의 얄팍한 상술이자 세계 시장을 겨냥한, 일종의 맥거핀(진짜 이야기의 실체를 드러내는 데 있어 그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앞서 전개시키는 가짜 이야기. 트릭.)이다. 디즈니는 의도적으로 논란을 만들어 냄으로써 최대치의 마케팅 효과를 노린 셈이다. 할리우드는 청년 세대들을 겨냥해 혁명마저 상품으로 내다 파는 진짜 장사꾼들이다. 2011년 뉴욕 증권가 월스트리트에서 벌어진 청년들의 격렬했던 시위 ‘오큐파이 월스트리트(Occupy Wall Street)를 점령하라’ 이후에 나온 영화가 제니퍼 로렌스 주연의 ‘헝거 게임’시리즈였다. 할리우드는 좌파나 우파나 가리지 않는다. 돈만 벌 수 있다면 스스로 게릴라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흑인 인어공주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이번 실사판 ‘인어공주’의 주제는 왕자의 대사에서 나온다. 왕자 에릭(조너 하우어 킹)은 뱃머리에서 저 멀리를 바라보며 신하 그림스비 경(아트 말릭)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저 외부로 나아가야 합니다. 외부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 (섬) 왕국이 살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에릭의 왕국은 여왕(노마 두메즈웨니)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데 여왕은 현재 바다의 신 트리톤(하비에르 바르뎀)과 대립해 싸우고 있다. 트리톤은 여왕의 나라에 의해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를 잃었다. 그는 현재 7대양의 바다에 인어공주 딸 7명을 키우고 있으며 그중 막내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인어공주’의 원제는 the little mermaid, 곧 ‘막내 인어’이다.) 영화 ‘인어공주’의 설정, 곧 섬 왕국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미중 G2의 갈등을 의미하며 에릭은 (트럼프처럼) 장벽을 쌓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일국 자본주의나 자국 우선주의에서 벗어나 공생과 연대의 세계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개방만이, 오픈 마인드만이 살 길이라고 그는 확신한다. 그런 에릭에게 적국의 막내 공주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매우 정치적인 승부수에 해당하는 일이다. 영화는 결국 둘이 결실을 맺게 한다. 그건 세계 평화를 이루어 내거나 이루어 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자는 얘기와 동음이의어이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아들이 러시아 푸틴의 딸을 사랑한다면 두 나라는 전쟁을 멈출 수도 있겠다. 실로 동화 같은 상상이지만 그럼에도 흐뭇해지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어공주’의 진짜 주인공은 인어가 아니라 왕자이며 적어도 각각이 아니라 이 남녀 커플 두 명 모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탈(脫) 인종주의가 아니라 탈 패권주의에 의한 세계 평화와 공존이라는 것이 ‘인어공주’의 핵심 메시지이다. 롭 마샬은 뮤지컬의 대가이고 노래와 춤의 연출에 있어서 전문가 중 최상위 급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당연히 ‘인어공주’의 백미는 주인공 에리얼의 노래이다. 할리 베일리의 노래는 이 영화를 두고 벌어진 이런저런 논란과 논쟁을 잠재울 만큼 최고 수준이다. 영화는 별로지만 베일리 노래 하나는 끝내줘, 라는 식이다. 또는 영화도 괜찮은데 정말 노래가 대단해, 라는 평가도 이어진다. 그만큼 할리 베일리의 음성과 노래 실력은 신의 영역이다. 베일리가 워낙 압도적이라 다른 배우들의 안무와 노래는 빛이 나지 않는다. 그럴 바에야 아예 비중을 줄이는 것이 낫다고 롭 마샬은 판단했고 그 대신 만화 캐릭터인 갈매기 스커틀(아콰피나)과 게 세바스찬(데이비드 디그스), 물고기 플라운더(제이콥 트렘블레이)가 바다속 생물들과 합창을 하는 노래 ‘언더 더 씨’에 각을 줬다. 이 영화의 하일라이트에 해당한다. 굉장히 행복하고 유쾌해 보이는 척, 노래 가사는 참혹한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언더 더 씨’는 영화 ‘인어공주’의 모든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에리얼 내 말 좀 들어 봐 / 인간 세상은 엉망이야. / 바다 밑의 삶이 그 어떤 것보다 낫다구.. /.. 너는 육지로 올라가는 걸 꿈꾸지만 그건 큰 실수야…/…. 저 바다 밑 저 바다 밑…/…저 물가에서는 하루 종일 일하지 / 태양 아래의 노예처럼….』
캄보디아계 프랑스 감독 데이비 추가 만든 ‘리턴 투 서울’은 의도한 건지 오해한 건지, 서울과 한국이라는 공간 그리고 거기에 얽힌 시간을 굴절시킨다. 마치 깨진 거울로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보는 느낌을 준다. 데이비 추는 코끼리 엉덩이를 만지듯 한국의 일상을 담아낸다. 시작부터 김추자의 ‘꽃잎’ 같은 노래를 흘린다. 영화 내내 김추자나 신중현 같은 한국의 올드 팝이 사용된다. 영화 전체적으로는 다소 뜬금없거나 지나치게 감독 개인 취향으로 보인다. 데이비 추는 자신 스스로가 인상 깊었던, 자신이 알고 있는 내에서만 한국의 공간을 그려내는데, 그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보다 정확하게는 맞지 않지만 맞지 않지만은 않다. 아마 사람들 눈에 비친 이방인의 삶은 일정 부분 그렇게 왜곡될 것이다. 이국적이고 이색적일 수 있다. 칸 영화제가 이 작품..
올해 실제 나이 77세(1946년생)인 실베스터 스탤론이 극 중 75세 마피아 역을 맡은 국내 OTT 채널 TVING의 파라마운트 시즌 드라마 9부작 ‘털사 킹’은 미국 털사(Tulsa)를 배경으로 한다. 털사는 미국 중남부 오클라호마주의 두 번째 도시로 인구는 40만이 좀 넘는, 인구밀도가 낮은, 미국 기준으로 보면 이른바 ‘깡촌’ 개념의 지역이다. 인디언 크리크족이 카지노를 운영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며, 이 인디언 후예들도 신종 마피아로 불린다. 털사가 있는 오클라호마주는 위로는 캔사스가 있고 아래로는 텍사스가 있는 지역이다. 소위 바이블 벨트에 속한 지역 중 하나인 곳이다. 바이블 벨트는 미국 중남부에서 동남부에 걸친 기독교 지역으로 대체로 보수적이고(공화당, 심지어 트럼프를 찍고) 동성애에 대한 반대론이 강한 지역이다. 미국 최대 도시인 동부 뉴욕이나 서부 LA 등지에 있다가 이곳 털사로 온다는 것은 한 마디로 좌천이나 유배를 뜻한다. 주인공 드와이트 데이빗 맨프레드(실베스터 스탤론)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뉴욕 마피아 보스 피트 인버니치(A.C.피터슨)의 아들 치키(도미닉 롬바르도치)가 1997년에 저지른 살인사건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25년을 복역한 후 만기 출소한다. 조직 보스 피트와 드와이트는 두목-부하관계라기보다 절친 사이다. 드와이트는 굳게 입을 다문 채 25년을 버틴다. 조직의 비밀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함구한다. 그러나 인비니치 패밀리는 감방에서 돌아온 그를 애물단지로 여긴다. 그냥 두자니 이제 실질적인 보스가 된 치키에게 걸리적거릴 것이고, 버리거나 처치하자니 조직의 룰이나 의리상 그럴 수가 없다. 새 보스 치키는 그에게 털사로 가라고 명한다. 거기서 새롭게 조직을 일구고, 개척하며 살라는 것이다. 이제 드와이트는 인비니치 패밀리의 털사 지부장이 된다. 드와이트는 거칠고 폭력적이지만 나름 지혜롭고 현명한, 게다가 25년의 복역 기간 중 책을 엄청나게 읽어서 꽤 유식하고 지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샐러리맨의 죽음’을 쓰고 마릴린 몬로와 살았던 미국 최고의 희곡작가 아서 밀러를 설명하면서 헨리 밀러와는 다르다는 점을 이야기하는데(헨리 밀러가 쓴 건 ‘북회귀선’이야 라고 말하면서), 털사에서 조직하게 되는 신종 단원 중 그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의 운전기사가 된 25세 흑인 청년 타이슨(제이 윌)은 물론 대마초 판매상 보디(마틴 스타)조차 우드스탁이란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세상은 무식해졌다기보다 바뀌었다. 25년이라는 큰 강이 생긴 것이다. 마피아 깡패 드와이트가 겪는 털사의 삶, 신천지의 인생이 격랑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드와이트는 옛날 방식으로, 25년 전에 맺었던 인간관계의 방식으로(그는 주로 현금을 쓴다) 자기만의 마피아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털사 킹’은 9부 에피소드 내내 다양한 사건과 상황들을 전개시키며 보는 사람들을 TV 앞에 바짝 붙여 앉힌다. 로맨스도 비교적 상당한 분량으로 나오는데, 이 늙은 마피아는 스테이시라는 미모의 중년 여성(안드레아 새비지)을 사귀지만 끝은 그렇게 좋지가 못하다. 그녀는 에피소드 내내 드와이트 옆에서 묘한 관계를 맺는다. 연방 기관 AFT(Bureau of Alcohol, Tobacco, Firearms and Explosives :미국 주류 담배 화기 단속국) 요원인 여자가 남자에게 끌리는 이유는 그가 자신과 같은 처지이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잘 나가던 요원이었던 여자는 9·11의 트라우마를 겪었고 이른바 설리 사건(미국에서 항공기가 허드슨강에 불시착한 사건) 때 큰 실수를 해 털사로 밀려온 인물이다. 스테이시는 드와이트와 동침한 다음 날 그에게 나이를 묻는다. 드와이트는 그녀에게 그렇게 직접적으로 묻지 말고 JFK가 암살됐을 때 몇 살이었냐는 식으로 물어보라고 한다. 그때 몇 살이었냐고 여자는 다시 묻고, 남자가 고등학생이었다고 하자 여자는 혼비백산 바로 옷을 챙겨 입고 호텔 방을 나선다. 나가면서 여자는 이렇게 소리친다. “난 당신이 꽉 찬 쉰다섯인 줄 알았다고!” 드와이트가 정작 마음을 기울이게 되는 여성은 스테이시보다는 나이가 좀 더 든 마가렛 드베로(다나 델라니)라는 인물이다. 목장의 여주인이고 아마도 이번 시즌1보다는 시즌2에서 드와이트를 위해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목장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드라마 내내 늙은 백마 한 마리가 나온다. 파일럿이란 이름의 이 말은 종종 목장에서 탈출해 말발굽 소리를 또각거리며 시내 곳곳을 다닌다. 파일럿은 늙어서 소용없는 말이지만 여전히 품위 있는 자태를 지녔다. 새벽, 차가 비어 있는 거리에서 말갈기를 휘날리며 걸어가는 파일럿의 모습은 주인공 드와이트의 모습과 대구(對句)된다. 드와이트 역시 파일럿처럼 늘 말갈기를 다듬으며(정장으로 빼입으며) 다닌다. 그 역시 외롭고 늙은데다 쓸모가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마피아 패밀리 중간보스로서)품위가 있고 매력적이다. 여자들이 드와이트에게 빠지는 이유이다. ‘털사 킹’은 그래서, 마피아 이야기인 척 마피아 이야기가 아닌 드라마이다. 드와이트는 털사의 터줏대감인 조직 폭력배로 바이크 갱단 카올란왈트립 일당(리치 코스터)과 일전을 벌여야 한다. 그 와중에 AFI와 FBI 양쪽의 추적을 받는다. 왈트립의 수하로 들어간 지역 경찰까지 그를 귀찮게 한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 드와이트가 회복하거나 되찾는 것은 이들을 물리치고 새롭게 건설하는 조직 패밀리 ‘따위’가 아니다. 그가 털사에서 새롭게 얻는 것은 가족관계 같은 파트너들, 젊은이들이다. 드와이트는 실제로 자신의 딸을 되찾기도 한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딸 티나는 오랫동안 범죄자인 그를 증오해 왔지만 결국 아빠 곁인 털사로 오게 된다(이 부분이 다소 억지스럽다). ‘털사 킹’은 갱스터 드라마가 아니다. ‘털사 킹’은 갱스터 드라마인 척, 갱스터 드라마를 변주한 가족 드라마이다. 9개의 에피소드를 흥미 깊게 혹은 주의 깊게 지켜보게 되는 이유이다. ‘털사 킹’은 고령화 사회를 우회적이면서 긍정적인 시선으로 그린 작품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에는 많은 사회적 정치적 메타포가 담겨져 있는데, 드와이트와 운전기사 타이슨의 관계를 통해 신구세대 갈등과 흑백 갈등 문제를 이야기하곤 한다. 세상의 어느 사회처럼 기이하게 부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미국사회에 대해 한 늙은 현자의 안타깝지만 따뜻한 시선을 담아 내고 있다. 드와이트는 자신이 머무는 호텔에서 어두워지는 창밖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린다. “피투성이가 됐지만 패배하진 않았어. 다운이 됐어도 여전히 난 링 위에 서있어.” 미국이 갖고 있는, 올드하지만 여전히 의미있는 자본주의적 가치, 인간이 지니고 있어야 할 존엄성과 품격을 말한다. ‘털사 킹’의 매력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대본, 시나리오가 돋보인다. 현재 미국 할리우드의 가장 잘나가는 시나리오 작가 테일러 쉐리던(‘시카리오’, ‘로스트 인 더스트’, ‘윈드 리버’)이 전편을 썼다. 텍사스 출신인 그는 털사가 고향인 것처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려 낸다. 사실 이 ‘털사 킹’의 제목은 아벨 페라라 감독이 1990년에 만든 ‘킹 뉴욕’에서 가져 온 것이다. ‘킹 뉴욕’은 잔혹했다. ‘털사 킹’은 인간적이다. 세월이 바뀐 만큼 마피아 두목도 폭력배로서만으로는 살아가기 힘든 법이다. 그건 자본주의가 점점 인간적인 얼굴이 돼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마피아적 삶과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것에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전설의 영화 ‘대부1·2·3’ 시리즈가 오랜 시간 늘 해왔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넷플릭스 신작으로 제니퍼 로페즈 주연의 영화 ‘내 이름은 마더’에 대해 쓰는 이유는 100퍼센트 순전히, ‘영화는 이렇게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 반면교사의 지점을 공유하기 위해서이다. OTT 넷플릭스에 탑재된 수백 수천 편의 영화 가운데 얼마나 ‘사소한’ 작품들이 많은지(영화는 좋은 영화인지 혹은 나쁜 영화인지로 구분되지 않는다. 다만 사소한 영화인지 아닌지로 나뉠 뿐이다)를 유감없이 선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온통 클리셰(clich) 덩어리이다. 설정 자체가 말이 안 되거나 무리한 것이다. 그리고 앞뒤가 안 맞는다. 액션은 이런저런 영화에서 온통 다 끌어다 쓴 것이거나 익숙한 장면들을 이어 붙인 것들이다. 가장 최악인 것은 정치적 올바름과 젠더 이슈에 대한 강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럴 경우 자..
극장에선 조기에 종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영화 ‘무명’이 알 만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모았던 이유는 1930·40년대의 이야기를 다뤘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때가 지금보다 훨씬 멋있었다. 시대도 그랬고, 예술도 그랬다. 패션은 더더욱. 무엇보다 사람들이 멋있었다. 저항할 줄 알았고, 그 와중에 즐길 줄 알았으며, 반드시 사랑들을 했다. 그것도 모두 치열하게. 지금 시대에는 사라진 단어, ‘혁명’과 ‘사랑’이 이 시대에는 존재했다. 영화 ‘무명’이 다루는 이야기는 바로 거기에 있다. ‘무명’은 1941년 상하이에서 암약한 제5열(상대 진영 내부나 후방에서 암약하는 스파이 조직)에 대한 이야기이다. 복잡한 것은 제5열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나 셋이라는 것이며 혹은 제5열 안에 또 다른 제5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중간첩 혹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