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묘하게도 두 가지 영화를 뒤섞은 듯한 느낌을 준다. 하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이고 또 하나는 마이클 J 폭스 주연의 ‘백 투 더 퓨처’이다. 우주 평행이론과 가족사가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 마히토(산토키 소마)는 현실 경계를 넘어 이(異) 세계를 오간다. ‘인터스텔라’의 매튜 매커너헤이가 우주 공간을 떠돌듯. 마히토는 또 다른 세계에서 어린 시절의 친 엄마를 만난다. 그건 J 폭스가 ‘백 투 더 퓨쳐’에서 그러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마히토의 엄마는 현실 세계에서 이미 죽은 몸이다. 이 영화를 두고 일부 저널들은 (익명의) 대중들로부터 혹평이 잇따르는 양 다소 과장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그 (저널)들은 영화가 불편했다고 덧붙인다. 그런데 그런 비평이 오히려 불편하고 지나쳐 보인다. 이들이 영화가 불편하다고 하는 이유는 영화의 서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지 않아서일 것이다. 물론 이 영화를 두고 재미있다 혹은 재미없다는 식의 취향이 갈리는 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렇다고 대중의 이름을 빌어 영화를 매도하는 것은 다소 지나쳐 보인다. 무엇보다 그 혹평의 근거가 1)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했고 2) 아버지가 처제와 결혼했으며 3) 영화가 친절하지 않다는 등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일부 저널들은 무엇에 기반해서 이 영화가 일본 제국주의를 두둔했다고 판단하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무작정의 비판은 편견이자 왜곡이다. 아마도 그건 주인공 마히토의 아버지가 군수업체 사장이라는 설정 때문일 것이다. 시대는 1942년, 2차 대전이 한창인 때이다. 일본 군부가 미국 태평양 함대가 있는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적으로 공격한 직후이다. 마히토의 아버지 마키(기무라 다쿠야)가 운영하는 공장은 비행기 조종석 덮개를 만들며 호황을 누리는 중이다. 마키는 시골 저택 건너에서 어디론가를 향해 가고 있는 수많은 ‘죽음’을 가리키면서 ‘덕분에 자신은 잘 살게 되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마히토는 그런 아버지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마히토는 아버지가 보란 듯이 자신을 승용차로 데려다 준 학교에서 등교 첫날부터 아이들의 ‘이지메’에 시달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돌멩이로 자신의 머리를 짓이긴다. 아버지는 학교에 돈을 뿌려 가면서까지 범인을 색출하겠다고 부산을 떨지만 마히토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집 뒤, 거대한 탑이 있는 성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영화는 마히토의 눈을 통해 아버지(세대)의 극악했던 무지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을지언정 그들의 세계관을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태도를 보인다. 다만 그 '톤 앤 매너'가 적극적이고 전투적이지 않을 뿐이다. 영화는 전쟁이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얘기가 중심 테마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얘기인즉슨, 일본 군국주의 시대에 편승한 아버지라 할지라도 아이의 눈에는 ‘아버지는 아버지’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특히 자신의 어린 시절이 그랬다는 것이다. 시각이 입체적이지 않다고 해서 거기에 이념의 외투를 씌워 비난할 일은 아니다. 아버지가 엄마의 동생, 곧 처제와 재혼을 한 것을 두고 마치 불륜 관계를 연상하듯, 이 영화의 불편한 점의 하나로 꼽는 것도 올바르지 못한 처사다. 처제와의 관계는 상처(喪妻)를 한 이상 불륜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전에 아버지와 이모의 관계가 묘했다는 얘기일까. 영화에서는 그 전사(前史)를 언급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건 근친 관계도 아니다. 당시와 같은 전쟁의 시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죽고 가족관계가 파괴되는 바람에 그 굴곡의 삶 과정에서 근친이라 할 수는 없지만 가까운 사람끼리의 결합이 많이 이루어지던 시대이긴 했다. 프랑스의 앙드레 말로는 자신의 죽은 형을 대신해 형수와 동거 후 결혼했다. 그렇다면 앙드레 말로도 불편한가. 시대에 대한 내재적 이해, 공감각의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저널이 이런 식의 얘기를 남발해서는 안 된다. 이야기 구조가 난삽하고 캐릭터가 너무 많이 나온다는 등 내용에 대한 불만이 이어지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완전히 이해가 불가능한 지경은 아니다. 1942년이라면 미국이 참전하고 본토와 도쿄에 대한 공습이 줄기차게 이루어진 때이다. 이른바 도쿄 대공습의 전초전이다. 이때 미군은 이후 베트남전에서도 사용해 비난을 샀던 네이팜탄까지 퍼부어 민간인 피해가 극심했지만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는 독일과 일본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치솟았을 때였다. 일본 군국주의자들, 독일의 파시스트들의 만행을 생각하면 그건 일단 당연한 반응들이었다. 마히토의 생모는 이때의 공습으로 죽었다. 마히토는 엄마를 그리워하는데 그의 환영 속의 엄마는 매번 불길에 휩싸여서 애타게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마히토는 불타 죽은 엄마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모이자 새엄마인 나츠코(기무라 요시노)는 엄마와 똑 닮았다는 얘기를 듣지만 마히토는 그런 그녀가 오히려 낯설고 정이 가지 않는다. 마히토는 처음에 나츠코를 딱딱하게 대한다. 나츠코는 마히토를 만나자마자 아이의 손을 자신의 배에 갖다 대며 여기에 새 생명이 있고 너의 동생이 있다며 가까워지려고 애쓰지만 정작 마히토가 그녀를 ‘이모 엄마’라고 부르는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이모 엄마 나츠코는 임신으로 인해 병이 생기고 아픈 몸으로 누어 머리에 큰 상처가 난 아이를 어루만지며 죽은 언니를 무슨 낯으로 보겠냐며 눈물을 흘린다. 둘 사이는 서먹서먹하다. 시간이 한참을 지나서야, 이(異) 세계 속에서 만난 ‘어린 엄마’ 히미(아이묭)로부터 둘의 관계를 ‘허락하는 듯’한 느낌을 받고 나서야 新 모자 관계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궁극으로는 한 소년이 겪는 마더 콤플렉스와 이에 따른 성장기이다. 시대가 불온하고 불안했을 뿐 그건 어느 시대 어느 누구나 겪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의 보편성, 일반성은 여기에 있다. 그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후죽순의 수많은 캐릭터와 그 곁가지를 잘 처리하고 정리해 낼 수 있다. 마히토를 탑의 성, 그 깊은 심연으로 인도하는 것은 왜가리이다. 이 왜가리는 자신 몸속에 있는 못생기고 못된, 또 다른 자기의 왜가리를 부리 밖으로 꺼낸 후 아이를 요리조리 데리고 다니며 교활한 행동을 한다. 왜가리는 마히토의 또 다른 자아(얼터 에고 alter-ego)이다. 마히토의 내면은 충돌하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이모라지만 아빠가 엄마를 잊고 다른 여자한테 가는 게 싫다. 자신의 머리에 돌을 찧지만 그건 아빠에게 하고 싶은 행동이기도 했다. 이모는 엄마를 너무 닮아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다. 자신도 완전히 엄마라는 존재를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히토가 좀처럼 새엄마에게 곁을 주지 않는 이유이다. 그래서 마히토는 자신의 세계에서 가능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의 안으로 더 들어가려 한다. 아이가 기를 쓰고 높은 탑을 지닌 비밀의 성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이유이다. 왜가리는 끊임없이 마히토에게 속삭인다. "엄마는 아직 죽지 않았어" "엄마가 살아서 너를 기다리고 있어" 왜가리에 이끌려 다가 간 성 앞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써 있다. “나를 배우는 자는 죽는다.” 마히토는 성 안에서 일본 군인들을 연상시키는 펠리컨과 잉꼬들의 공격에 시달리지만 결국 어린 엄마 히미의 도움을 받아 ‘(어린) 자신을 죽이고’ ‘(성장한) 자신을 되살리는 데’ 성공한다. 잉태의 방에 유폐돼 있는 이모 엄마도 구출해 낸다. 마히토는 어린 엄마와 각기 다른 문, 현실의 문과 죽음의 문을 각자 열고 가까스로 행복하게 헤어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요시노 겐자부로의 아동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이지만 여기에 하야오 자신의 일대기를 죄다 비벼 넣은 느낌을 준다. 전범국 군수공장 사장 아들이라는 점, 비교적 대저택의 시골에 살았다는 점 등이 그렇다고 전해진다. 전쟁 때문에 빚어지는 비극과 불안이 최고조인 시대였고 어쩌면 그것이 계속 반복되는 지금의 현실에서 하야오는 여전히 삶의 의미와 그 답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야오는, 그리고 그건 결국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 스스로만이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성 안에서 만난 할아버지의 아버지, 태초의 선조 같은 남자는 마히토의 선택을 되묻는다. “혼돈과 혼란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겠느냐?” 미야자키 하야오는 욕된 세상이나마 견뎌내고 지켜내며 늘 새로운 사람과, 그게 바로 이모 엄마 같은 사람이라도, 꼭 나의 친모가 아니더라도, 아버지처럼 시대감각이 둔한, 대책 없는 사람이라도, 다시 사랑하며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노 감독이 은근히 권하는 삶의 방식을 담고 있는 내용의 애니메이션이다. "그대들도 이렇게 살지 않겠는가?"이다. 그 질문을 각자 생각해 볼 일이다.
아마도,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봉준호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이 영화 ‘노란문 :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이하 노란문)’을 만든 감독 이혁래는 이런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봉준호가 옛날에 영화 서클을 했어. 그 이름이 노란문 영화연구소야 등등. 그리고 이런 얘기를 한 사람은 이 다큐멘터리 제작사인 브로콜리 픽쳐스의 대표 김형옥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노란문의 회원이었으며 이번 다큐의 주요 인터뷰어로 나온다. 그래서 처음엔 봉준호를 중심에 놨을 것이다. 봉준호니까! 봉준호의 초창기 시절, 아니 그보다 훨씬을 더 거슬러 올라가 영화적으로 노바디이고 낫씽이었던 그의 시절을 추적하는 얘기가 중심이었을 것이다. 맞다. 봉준호니까! 그러나 영리하게도 이 영화의 제작자와 감독은 어느 순간 스스로 궤도를 이탈했으며 그것이 오히려 지구로 귀환하는(더 좋은 작품이 되는) 항로가 됐을 것이다. ‘노란문’에서 봉준호는 작은 강이다. 더 큰 강은 봉준호를 넘어 노란문 회원 전체이고 그보다 더 넓은 바다는 시네필의 세상에 대한 것이며 그보다 더욱더 깊은 심연은 한국 영화계 그 자체의 역사이자 지금의 모습이다. 그건 마치 이 세상의 역사를 움직이는 동인이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민중들이며 개별이 아니라 전체이고 개인이나 아니라 사회 그 자체라는 얘기와 같다. 이 다큐는 그런 면에서 진보적이다. 그런 세계관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다큐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려고 하는 질문과 답은 다음과 같은 점에 모아져 있다. 노란문 영화연구소와 장산곶매, 청년, 영화공간 1895 등 당시 영화 게릴라(소모임)들이 암약(?)하던 ‘그 위대한 시대’의 한국 영화(인)들, 한국 영화계는 과연 지금 어디로 갔는가. 한국 영화는 1990년대 시네필 시대와 비교할 때 진정으로 진화했는가, 아니면 오히려 퇴보했는가, 그렇다면 그 각각의 이유는 무엇인가 등등이다. 다큐 전체의 톤 앤 매너는 시종일관 유쾌하게 향수에 젖게 하지만(옛날의 동창들이 모이는 것이니까) 그 내면은 다소 아쉽고 씁쓸하며, (모두들 장년과 초로의 나이가 됐으니 너무나 당연하지만) 인생의 뒤안길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만약 이들처럼, 1980,90년대의 시네필 시절을 동시대로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는 다소 슬프게 다가설 것이다. 반면 그 이후의 세대에게는 낯설고 신기하며 역설적으로 매우 이국적인 느낌이 들 것이다. 그 감정의 층위야말로 이 영화가 파고 들어가려 했던 부분으로 보인다. 그 정서의 간극 한가운데에서 영화는 마치 지금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했던 질문 같은 것을 던지고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다큐 ‘노란문’은 생각 이상으로, 그리고 예상 밖으로 매우 세련된 공정 과정을 선보인다. ‘동창회 다큐’치고는 제작비도 많이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바, 예컨대 봉준호의 당시 습작인 ‘룩킹 포 파라다이스’, 일명 ‘고릴라 1, 2’ 얘기와 그에 대한 증언을 전개하면서 그가 히다치 캠코더로 작품을 찍은 공간을 보여 줄 때이다. ‘고릴라’의 로케이션은 당시 봉준호가 살았던 서울 시내 어딘 가의 대림아파트 지하 보일러실이었는데 영화 속의 누군가 얘기하듯이 이 영화에는 봉준호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것을 영상으로 증언해 낸다. ‘고릴라 2’의 지하공간은 이후 김뢰하 주연의 1984년 단편 ‘지리멸렬’의 그것으로 변한다. 그리고 다시 2000년작 ‘플란다스의 개’에서 아파트 경비들의 공간으로 바뀌고, 그리고 또 2003년 영화 ‘살인의 추억’에 나왔던 지하 취조실 공간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2019년의 ‘기생충’에서 반지하의 공간으로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보여 준다. 그 모든 공간을 미니어처로 제작해 병렬로 배치한 후 그걸 레일을 깔고 카메라를 수평으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보여 준다. 그 발상과 시각적 디자인이 발칙하다. 감독 이혁래가 시각효과에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모든 것은 다큐 ‘노란문’이 세공력이 뛰어난 작품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시네필들이 추억담답게 영화 속에는 당연히 주옥같은 영화들의 향연이 중첩돼 있다. 봉준호가 그 어린 시절,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공포의 보수(1953)’를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세미나를 하자고 하니까 누구는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1996)’을 보자고 했고 자신은 ‘공포의 보수’를 가져갔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회원들은 이들 영화를 모두 몇 번이나 재 복사를 한 해적판 비디오로 봤고,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는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 대해 더 집착하고 열광할 수 있었음을 고백한다. 봉준호가 회원들과 공유했던 코폴라 감독의 ‘대부’ 얘기를 주요 장면으로 얘기하는 대목에서 이혁재의 다큐는 쇼트 바이 쇼트(shot by shot)로 분할해서 하나하나 설명하듯이 (마치 봉준호가 영화 강의 하듯이) 보여준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분노의 주먹’도 장면을 잘라 가며 분석해 주는데 바로 그런 것이 당시 노란문 회원들의 공부 방식이었고 또 그렇다면 바로 그 점이야말로 이들이 얼마나 거칠고 척박한 영화 환경 속에서나마 늘 진지하고 학구적인 자세를 지니려 노력했던 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대부’, ‘분노의 주먹’ 등을 언급하는 부분에서의 촘촘한 연출은 이 다큐가 비교적 오랜 연구를 거쳤고, 전체 구성을 짜는 데 있어 나름 심혈을 기울였으며, 무엇보다 그 기간과 노력에 상응하는 제작비를 투여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역설적으로 이 다큐는 그런 조건들을 채울 수 있는 행운을 얻었었다는 얘기인 셈이다. 이 모든 것은 놀랍게도, 그리고 매우 역설적이게도, 그리고 무엇보다 쉽게 인정하고 쉽지는 않지만, OTT 제국주의자인 넷플릭스의 투자가 백업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영화의 제국주의자가 베푼 아량의 결과 같은 것인가, 아니면 이제 넷플릭스 같은 대형 상업영화를 추구하는 세력이 예술적이고 비상업적인 행위까지 포식하려는 취지인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진심으로 독립영화에 대한 관심과 지원, 투자야말로 올바른 영화 환경을 만든다는 자각, 그 정치적 올바름이 구현된 것일까. 그 모든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동한 결과가 바로 ‘노란문’의 탄생일 것이다. 상업영화와 비상업영화, 넷플릭스와 한국 영화계가 적대적으로 공생할 필요는 없다. 세상은 비적대적 모순 관계가 주축이 될 때가 많다. ‘노란문’은 그 표상을 보여 준다. 아이러니한 희망이다. ‘노란문’은 요즘의 다큐멘터리가 추구하는 최상의 모토, 곧 ‘재미’면에서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노란문’은 재미있다. 흥미롭다. 현대 한국 영화 역사의 일단을 잘 정리해 내고 있다. 무엇보다 의미가 있는 것은 한국 영화계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 ‘따위’가 아니라 영화가 본연의 역할, 곧 시대와 사람을 동반시키려 하는 그 임무를 복원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 시선이 좋다. ‘노란문’이 나오기까지 한국 영화계와 넷플릭스는 올바르게 결합한 셈이다. 자, 정말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너무 고답적인가. 인생은 원래 그렇게, 진부한 것이다.
영화감독에게는 벗어나지 못하는 DNA 같은 것이 있는데 그건 그의 작품에 늘 낙관처럼 찍히는 것이어서 영화를 단 5분만 봐도 이건 누구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런 재능은 축복이자 동시에 저주일 수도 있다. 새 영화 ‘소년들’은 이도 저도 아니고 그냥 딱 정지영 표 영화이다. 그는 줄곧 한국 사회 내의 비리와 불의, 이루어 내야 할 정의로운 무엇에 대해 숙고하게 만드는 내용의 영화를 만들어 왔다. 어떤 때의 대중은 그걸 잘 받아들였고 어떤 때의 관객들은 다소 지루해 했다. 이번 ‘소년들’은 정지영 영화의 분기점이 되는 작품이다. ‘소년들’은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한다. 1999년 전북 삼례의 슈퍼마켓에서 벌어진 3인조 강도 사건의 이야기이다. 강도들이 물품을 터는 과정에서 슈퍼 안 할머니가 질식사하게 된다.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할 요량으로 입과 코를 테이프로 막은 것이 원인이 됐다. 이 사건이 중요한 것은 범행 직후 신속하게 체포된 소년 세 명이 사실은 진범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 점도 중요한 것은 아니다. 진범이 아닌데도, 진범이 아니라는 증거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데도, 사건이 완전히 날조됐다는 것이 알려지고 있는데도, 소년들은 오랫동안 감방에서 나오지 못했으며(최대 6년을 살았다) 사건의 재심은 긴 시간 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니 사실 그 점까지도 핵심이 아니다. 더욱더 기가 막힌 것은 진범의 자기 진술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16년이 지나서야 재심 판결에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더욱더 핵심적인 얘기는 재심 결과 이 사건을 오랜 시간 거짓과 은폐로 오도했건 검찰의 그 누구, 경찰의 그 누구도 징계 받거나 소추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 ‘소년들’은 그전 과정을 수색하고 탐문하되 1999년과 2016년의 시공간을 오가며 이야기를 축약해 낸다. 그 이야기의 리듬이 매끄럽다. 자칫 다큐처럼 흐를 수 있는 구성을 극 영화의 이야기 구조로 적절하게 치환시킨다. ‘소년들’을 만들면서 정지영 감독은 일정한 시간이 흐른 만큼 이 사건이 철저하게 사람들이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대중들은 늘 매우 차갑고 냉정한 편이어서 반짝 관심을 보이다가도 일상을 금세 다른 것으로 덮어 버리고 살아간다. 사람들은 삼례 슈퍼 3인조 강도 사건 ’따위’를 잊은 지 오래다. 이런 사건이 주는 사회적 각성에 대해 무시하고 살아간 지 오래이다. 정지영 감독은 그런 ‘무심한’ 사람들에게 영화적 의미를 올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이야기가 매우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기조, 톤앤 매너는 ‘재미’이다. 영화는 마치 한편의 수사반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서스펜스의 흐름이 만만치 않다. 영화는 실제 사건의 결말을 아는 관객들에게조차 영화 속 소년들이 정당한 판결을 받기까지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마음을 쥐락펴락하게 만든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주인공 설경구의 역할이 컸다. 그가 맡은 황준철이라는 경찰캐릭터의 구축이 올바르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설경구에겐 오랜 시간 강성에다 다소 인공적인 경찰 캐릭터가 고착돼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에겐 ‘투 캅스’의 이미지가 컸다. 이번 영화에서 황준철 경위, 설경구는 그다지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그다지 눈을 부라리지도 않는다. 액션도 그다지 강조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는 지치고 힘들어 보인다. 사건을 두고 16년이 흐르는 동안 황준철이라는 인물 역시 끊임없이 회의했을 것이고(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줄곧 좌절했을 것이다.(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세상은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심리적 노화를 설경구는 입체적으로 잘 표현해 나간다. 설경구의 연기는 뒤로 갈수록 인간적이 돼 간다. 그 비루함을 잘 담아낸다. 황준철은 한때 열혈남아였지만 한직으로 몰려다니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침몰시켰다. 그는 은퇴를 앞둔 시기에 삼례로 돌아와 파출소장을 하며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재심 수사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다 끝난 사건을 다시 다 들춰 내서 뭘 어쩌겠다는 거요?!” 그의 입에서 이런 얘기가 나올 줄은 그 자신도, 그걸 듣는 변호사와 사건 최초 목격자이자 피해자인 윤미숙(진경)도, 범인으로 몰렸던 아이(청년) 세 명도, 무엇보다 이 얘기 전체를 지켜보고 있던 극장 안 관객들까지 추호도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다. 영화 ‘소년들’은 억울한 사람들이 재심을 통해 진실을 밝혀 낼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꺾였던 좌절감을 딛고 어떤 계기로 올바른 분노의 불씨를 다시 살려 내며 또 어떻게 그걸 이어 가느냐에 더욱 집중한다. ‘소년들’이 가장 애썼던 부분은 황준철을 영웅으로 그리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 역시 무수한 실수를 거듭했던 한 인간에 불과하며 사회의 정의는 결코 단 한 명의 영웅담으로 채워질 수 없음을 강조하려 한다. 지치고 늙은 표정의 설경구 연기가 좋아 보이는 것, 그런 톤의 연출이 적절했다고 판단되는 이유이다. 황준철 캐릭터에 그런 방식으로 리얼리티를 부과함으로써 영화는 의도적으로 우회해 가던 척, 오히려 사회적 리얼리티를 부각시키고 배가시킨다. 그 사고의 정교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화 ‘소년들’이 주는 매우 중요한 깨달음은 지금의 이 사회가 검찰 무결점 주의에 의해 오염되고 타락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막무가내의 권력에 지배당할 것이라는 그 예언적 예언에 대한 느낌적 느낌 같은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이 영화는 2020년 코로나 시기에 제작됐으며 오랜 기다림 끝에 만 2년 만에 세상에 나온 것이다. 영화가 만들어지고 영화가 공개되는 사이에 세상의 판도가 바뀌었다. 그 바뀐 세상의 일단을 진단하는 데 있어 ‘소년들’은 검찰과 경찰, 흔히 공권이라 불리는 국가권력이 얼마나 더 무소불위의 것으로 변질됐으며 그것이 얼마나 더 악랄해질 수 있는지를 묵시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영화는 작금의 영화계가 내놓을 수 있는 영화들 중, 최고로 反 정부적이면서도 정부 비판적인 작품이다. 모든 것을 다 떠나서 정부와 정치의 본질을 작렬하듯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소년들’은 검찰과 사법당국의 무결점 주의, 무오류 주의, 아무리 판결이 잘못됐다 하더라도 재심을 받아들이지 않는 광기의 관성, 자신들의 잘못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그래서 일절 사과를 모르는 집단적 환각에 대해 얘기한다. 그건 1999년에도 그랬고 2016년에도 그랬으며 2023년 지금이나 아니면 한동안 꽤 계속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강조한다. ‘소년들’이 역설적으로 다소 오싹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 같은 묵시록적인 예언 때문이다. 나이 탓인지, 오랜 습성 때문인지 정지영이 연출은 중간중간 다소 올드 패셔너블한 부분이 없지 않다. 극 후반의 법정 신은 다소 작화 되고 윤색됐을 것이다. 상업영화의 재미를 가져가야 하고, 피날레의 장면인 만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다만 빌런에 해당하는 인물들, 곧 검사(조진웅)와 사건을 왜곡한 경찰 최우성(유준상)의 캐릭터가 좀 더 입체적이었으면 좋았을 법 했다. 주인공 황준철의 부하 형사인 정규(하성태)의 캐릭터를 일관되게 선하게 그린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악당 전문 연기자인 하성태 이미지를 180도 뒤집은 것이기 때문이다. ‘소년들’은 일종의 캐릭터 영화이다. 캐릭터 영화는 메인 캐릭터와 서브 캐릭터를 어떻게 배치하고 각각의 깊이를 어느 정도 수준으로 만드느냐에 승패가 달린다. 그 고민이 줄곧 보이는 영화이다. ‘소년들’은 정지영이라는 노 감독이 영화를 만든다는 것, 상업영화의 방식으로도 사회의 진실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고민과 고심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 축적된 진심과 진정성이 느껴진다. 대중들의 판결만이 남았다. 재심으로 가는 사건 같은 영화가 되지 않기를, 그 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넷플릭스가 새로 공개한 8부작 영국 드라마 ‘바디스’는 매우 특이한 작품이다. 소재와 설정이 앞선다. 다른 작품에서 흔히 봐왔던 얘기들이 아니다. 봐왔다 하더라도 꽤 영리하게 확장해 냈다. 제목 ‘바디스’는 시체들이라는 얘기이다. 영국 런던의 빈민 지역인 화이트채플의 골목길 롱하베스트 레인에서 시체가 발견된다. 남성이고 알몸이며 이마에 상처가 있고 손목에 뜻 모를 문양의 문신이 있으며 무엇보다 왼쪽 눈에 총알을 맞고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총알이 머리를 뚫고 나간 흔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서 총알은 발견되지 않는다. 총알이 없는 것부터 이 사건은 미궁으로 빠지기 시작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시체가 다른 시대에도 똑같은 장소 똑같은 모양으로 발견돼 왔다는 것이다. 한번은 1890년, 그리고 또 한 번은 1941년, 그리고 현재인 2023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2053년이다. 영화는 이 네 개의 시공간을 오가며 경찰 4명이 각자 사건을 풀어 가는 과정을 추적한다. 사건을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진실에 직면하게 되는 과정인데 그건 당연히 2023년 현재에 이르러서이다. 이 시즌 드라마가 흥미로운 것은, 요즘 그토록 젊은 세대들이 (이유 없이, 그리고 이해할 수 없지만) 싫어한다는 PC, 곧 정치적 올바름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시대에서 수사를 맡는 캐릭터들을 하나같이 소수자를 대변하는 인물로 그린다. 2023년은 사하라 하산(아마카 오카포)이라는 인도계 흑인 무슬림이다. 1941년은 찰스 화이트먼인데 유대인이다. 원래 이름은 칼 화이트먼이었고 독일계이다. 1941년이라면 2차 대전이 한창인 시점이고 런던에 독일 전투기의 기습적인 대폭격이 잦았던 때이다. 1890년의 주인공은 알프레드 힐링헤드(카일 솔러)인데 놀랍게도 게이이다. 빅토리아 시대가 끝나가는 말미이긴 해도 당시는 호모포비아가 극심했던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이트채플 같은 곳은 윤락녀보다 남창(男娼)이 들끓었던 것으로 묘사된다. 힐링헤드는 이들을 풍기문란죄로 체포해야 하는 직무를 행사해야 하지만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만난 ‘더 스타’지의 기자 헨리 에시(조지 파커)를 만나면서 뜻밖의 동성애에 빠진다. 이런 경우 대체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힐링헤드는 드라마에서 가장 비극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2053년 근(近) 미래의 주인공 아이리스 메이플우드(쉬라 하스)는 가녀린 몸매지만 ‘미친개’라 불릴 만큼 사건 해결에 수완을 보인다. 그녀는 사실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이지만 2053년의 신 전자 기술이 그녀를 걷고 뛰게 한다.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 준 신 사회, 새로운 공동체이자 준(準) 국가 조직인 ‘카이알’에 비교적 충성을 다하려고 하고 반 국가 세력을 일망타진하는데 앞장 서려 한다. 하지만 아이리스의 이 같은 행동은 일종의 방어기제이자 자기 합리화인데 그녀는 마음속 무의식 속에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은 차별받고 버려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카이알의 지도자 일라이어스 매닉스(스티븐 그레이엄)에게 충성하는 것은 일종의 생존 본능 때문으로 보인다. 드라마 전편에는 몇 가지 키워드가 나오는데 그중 하나가 미래 세계(라고 해봤자 20년 후인 2053년)에 암약하는 ‘위험한 예배당’이라는 반 카이알 조직, 혹은 반체제 단체이다. 여기에는 게이브리얼 디포(톰 마더스 데일)란 과학자, 양자물리학자가 주요한 역할을 한다. 그가 무엇을 발견한 모양이고 이것이 카이알 조직에게 굉장히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된다. 일라이어스 매닉스가 아이리스 메이플 우드를 조직 내에 침투시켜서 위험한 예배당 일당을 급습하려고 하는 이유로 보인다. 에피소드를 따라가면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 그 점에 대한 일종의 힌트는 왜 아이리스 메이플 우드냐는 것이다. 왜 사하라 하산이며 왜 일라이어스 매닉스냐는 것이다. 그건 힐링헤드에게도 찰스 화이트먼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얘기이다. 왜 다른 사람이 아닌 이들을 콕 집어서 사건이 터졌으며 벌어지게 되느냐이다. 드라마 속에는 누군가 남긴 LP 레코드판이 있고 이건 주로 주인공들이나 주변의 핵심 관계자들에게 남긴 것인데 이들의 앞날을 예견하는 내용이거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 수행해야 할 임무에 대한 지시사항을 담고 있는 것이다. 왜 이들인가. 바로 그 점이 이 드라마를 이해하고 따라 가는데 있어서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드라마는 일종의 예정론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다소 해묵은 논쟁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세상의 운행 방식, 그 시기와 장소, 인물은 신에 의해 다 정해져 있다는 것이 바로 예정론인 바, 이렇게 되면 모든 계급과 차별도 다 받아 들여야 하는 중세 봉건시대가 되는 만큼 그 해결책의 일환으로 신이 또한 인간에게 준 특권 중 하나가 자유의지인 바 아무리 신이 모든 걸 정해 놨다 해도 인간은 그걸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양쪽 다 그 정도의 문제이다. 신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다 예정하는 것이며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디까지이냐는 것이다. 드라마 ‘바디스’는 이 오랜 논쟁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며 다만 여기서는 신이 양자물리학으로 대체돼 있을 뿐이다. 극중 게이브리얼 디포가 발견한 것은 1:1로 분리돼 서로 정반대로 똑같이 활성화되는 양자의 운동 법칙으로 보인다. 이 운동 법칙 대로라면 버려진 알몸 시신이 네 개의 시대에 똑같이 나타날 수 있다. 시간 이동이 가능해진 것이다. 위험한 예배당이 도전하고 저항하는 대상은 일라이어스 매닉스 지도자 체제이다. 매닉스는 2023년 런던 시내에 핵이 터졌을 때 부패한 정치권을 일소하고 권력을 잡았다. 그의 독재는 일종의 나치의 방식으로 보이는 바 아이리스 메이플 우드와 같은 사회적 루저들에게서 지지를 끌어냈기 때문이다. 위험한 예배당 조직은 20년 전 런던 테러야말로 정작 일라이어스 매닉스가 저지른 범행으로 보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알게 되는 사람이 바로 사하라 하산이며 그녀가 나중에 위험한 예배당의 리더가 되는 이유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정말 헷갈리는 것은 인물들의 관계망이다. 예컨대 1890년의 힐링 헤드가 그토록 아끼고 애지중지했던 딸 폴라가 (정략) 결혼(당)한 상대는 줄리언 하커 경이라는 것이고 이 하커가 모든 음모의 진정한 시작인 바, 일라이어스 매닉스가 그의 직계 증손자가 된다. 그 사이의 계보를 잇는 남자 둘(일라이어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2023년 런던 경찰 내부의 하산의 상사 바버이며 1941년 찰리 화이트먼의 직계 보스인 누군가이다. 모든 관계가 씨줄날줄로 엮여져 있지만 곰곰이 복기해 보면 이 모든 것이 하커 가문(하커 은행으로 명명되는 금융자본가)의 계보에서 파생된 것이다. 복잡한 것 같지만 사실 복잡한 것이 아니며 다만 여기에 우주 평행이론과 시공간의 이동이라는 SF적 요소를 덧붙인 것이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이 드라마가 하고 싶은 얘기 역시 비교적 명료한 편이다. 다소 단순하게 해석하자면 1890년부터 2053년, 그러니까 163년간 3대의 세대가 관통하는 기간 동안 세상은 좋아지고 진화하고 진보했느냐, 혹은 그렇게 될 것이냐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160년간이라고 하면 대체로 자본주의가 산업화와 고도화, 첨단화를 겪는 시기가 된다. 드라마 ‘바디스’는 결국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신박한’ 방식으로, 그리고 우회적으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인간의 삶은 나아지고 있는 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위험한 예배당은 20년전인 2023년으로 사람을 보내 폭탄 테러를 막으려 했던 것은 아닌가. 그 같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환상에 불과한 것일까. 드라마 ‘바디스’가 던지는 예리한 질문이 머무는 대목이다. 인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금 우리에게도 위험한 예배당 같은 저항의 정신이 남아 있는가. 이 드라마를 두고 디스토피아적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지난 5월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공식 초청된 영화 ‘화란’의 화란은 네덜란드의 한자어이다. 주인공 연규(홍사빈)는 야구 방망이로 폭력을 일삼는 계부(유성주)때문에 숨 막히는 가정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어 한다. 연규 집은 가난하다. 엄마는 치킨 집에서 일한다. 동네가 다 그렇다. 연규는 동네 깡패 치건(송중기)에게 거기(화란)는 사람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산다고 들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가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연규는 영화 내내 네덜란드에 가지 못한다. 네덜란드 얘기는 영화 속에서 그렇게, 딱 한 번 나온다. 그러니까 영화 ‘화란’은 네덜란드와 사실 하등의 상관이 없다. 그건 영화 ‘암스테르담’이 사실은 암스테르담과 상관이 없는 것과 똑같다. ‘화란’은 액션 누아르이다. 손톱을 펜치로 뽑고 못을 뭉쳐서 얼굴을 후갈기는 등등 폭력이 난무하는 편이다. 동네 깡패들과 지역 정치권이 야합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이 영화에서 좋은 장면은 액션이 아니라 두 개의 대화 장면이다. 치건이 연규에게 너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연규의 온몸엔 학교 애들에게 맞은 구타 자국이 있고 그의 왼쪽 눈 옆은 아버지한테 맞아 죽 찢어진 상태다. 연규는 18살이지만 그의 삶은 마치 50년은 살아온 만큼 구겨지고 닳아 있다. 희망이 없다. 꽤나 절망적이다. 연규는 자신은 아무 데서도 오지 않았다며 자기는 이 동네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동네 밖을 나가 본 적이 없어요.” 그러자 치건이 말한다. “그건 나도 그래. 근데 이 동네, 정말 X 같은 곳이란다.” 치건은 자기 밑에서 험한 일을 배우기 시작한 연규를 데리고 호수인지 저수지인지 모를 어딘 가 건너편에서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물 건너편 방갈로 같은 곳에서는 정치권 인사가 있고 치건 패거리는 거기에 돈과 젊은 여자를 보내 놓은 참이다. 치건은 자신이 어릴 때 낚시를 하던 아버지를 따라 물가에 갔다가 물에 빠졌고, 거의 죽다 살았으며, 그런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바로 지금의 큰 형님인데 숨이 돌아오자마자 허겁지겁 아버지에게 가서 물어 본 말이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 왜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어요,라고 물었어. 근데 아버지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치건의 아버지는 과거에 늘 술에 취해 있었다. 그때도 그랬다고 했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 뭔 일 있었니?” 치건은 덧붙인다. “그때 걔는 죽었어. 이미 죽은 거야.” 피가 낭자한 영화는 사실 속에 목적을 숨기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낭자한 피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렇게 피를 낭자하게 흘리게 만드는 사회와 세상을 지목하고 싶어 한다. 영화가 폭력을 소재나 테마로 하는 이유는 개인의 폭력보다는 공간과 사회구조, 세상이 자행하는 폭력의 강도가 더욱 잔인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이다. 그것이야말로 상충되는 단어가 짝을 이룬 ‘폭력의 미학’이란 말의 의미이다. 샘 페킨파가 서부극에서 보여 준 발레 같은 총격 씬, 박찬욱이 보여 주는 극악한 폭력 심리 등등과도 다 연결돼 있다. 액션 누아르가 찌르고 베이는 장면 너머 뭔가를 지니고 있는가 여부는 작품의 완성도와 연결된다. ‘화란’은 그 지점을 찾아가고 돌파하려 애쓰고 어딘 가엔가 정서적 큰 덩어리를 만들려고 한다. 그 점을 높이 사야 하는 작품인 바, 더욱더 놀랍게도 감독 김창훈은 이번이 데뷔작이라는 점이다. 신인이 놀랄 만한 작품을 만든 셈이다. 영화 ‘화란’에는 두 가지가 부재하다. 하나는 부성이 없다. 영화 속에는 아버지란 존재가 없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있다. 그러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거나 아예 없는 것이 낫다. 그럼으로 부성, 그리고 흔히들 얘기하는 부성애가 없다. 부성만 있으면 기계적이고 폭력적인 가부장의 사회일 뿐이다. 올바른 가부장의 집안 관계, 아버지의 권위가 서 있는 가족이란 부성애가 진실되게 구현되는 관계를 말한다. 툭하면 애들을 때리고 패는 아버지 밑에서는 아이들이 온전할 리가 없다. 그리하여 이 영화에는 부성애가 없다. 진짜 아버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아버지들이 아이를 구하기보다는 위험 지구로 내 모는 형국만 그려진다. 이런 세상은 살만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영화가 절망을 그리고 있다는 이유이다. 영화 속에서 또 하나 없는 것은, 그리고 이건 기이하게도 실재로 한 번도 극 중에서 드러나지 않는데, 공권력=경찰이란 존재이다. 영화 속에서는 그렇게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경찰이나 사법체계가 작동하지 않는다. 영화가 보여주는 경찰이란 실체는 어쩌면 사회 내에 작동하는 부성의 가치관을 대변할 수 있다.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물리적이거나 심리적인 의존성을 갖게 된다. 사람들도 사회 내의 권위적인 무엇(정치, 판사, 경찰 등)에 기대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건 것이 이 영화에는 없다. ‘화란’은 아예 그런 존재를 깔아뭉개려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실제 사회에 그런 카리스마를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극 중 두 인물은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를 의사(擬似, 가짜) 부자 관계로 만들려고 한다. 치건은 자신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연규에게 그렇게 부르지 말고 그냥 형이라고 하라고 한다. 이때부터 연규는 치건을 형이라고 부른다. 그건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고 아빠라고 부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두 단어의 어감 차이는 크다. 그건 애정의 밀도와도 관계가 있다. 치건은 치건대로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경험, 그래서 자신이 죽고, 거꾸로 아버지가 죽어 버린 인생에서 연규를 통해 유사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해내려 한다. 자기 식의 부성의 회복을 통해 역설적으로 자신의 잃어버린 아버지를 되찾고 싶어 한다. 이 영화 ‘화란’은 결국 잃어버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얘기이다. 진정한 의미의 부성의 회복에 대해 얘기하는 영화이다. 영화가 어마어마하게 폼만 잔뜩 잡는 마피아의 세계를 그리는 것도 아니다. 볼 품 없는 지방(예컨대 지금은 지명이 없어진 마산 같은 곳)의 한 작은 동네, 거기서도 오토바이 수리점이나 카센터, 철물점 등이 모여 있는, 다소 빈궁하고 비루한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치건 일당은 거기서 오토바이를 훔쳐서 돈이 궁한 자영업자들에게 되팔고 고리를 뜯는 일로 살아간다. 치건의 뒤에는 큰 형님(김종수)이 있는데 그래 봐야 동네 유지급 작은 세계의 조폭 두목일 뿐이다. 큰 형님은 지역 개발 과정의 이권에 개입하며 그걸 위해 오랫동안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이 될 인물을 키워 왔다. 작은 세계의 범죄이지만 그 룰과 법칙, 과정은 큰 세계, 큰 조직의 범죄, 중앙 정치권과 그리 다르지 않다. 영화는 늘 작은 세상으로 큰 세상을 보여 준다. 그게 맞다. 그게 더 예리하고 정확하며 작은 물이 큰 바다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화란’은 그 정서적 점층법이 좋은 작품이다. 모두들 송중기와 홍사빈의 연기를 두고 얘기하지만 일부 평자의 눈에는 정재광이 보인다. 혹은 정재광만 보인다. 압도적인 연기력을 보여 준다. 그는 치건 패거리의 2인자로 나온다. 살벌하다. 허구헌날 이자 납부 문제로 린치를 당하는 오토바이 일용 배달꾼 역의 홍서백이란 배우도 좋다. 그가 절룩거리며 걸을 때 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절룩거리게 된다. 큰 형님 역의 김종수, 중국음식점 주인 역의 정만식 등등 서브 텍스트를 맡은 배우들의 연기도 한몫한다. 주 조연의 연기가 펄펄 난다. 송중기가 매우 차가운 이미지를 선보인다. 그의 대사가 자꾸 생각이 난다. “할 수 없어. 이건 해야 해. 해야만 하는 거야.” 부드럽지만 비정하다. 가장 무서운 폭력은 친절하고 무서운 법이다. 송중기가 보여 주는 새로운 세계이다.
영화의 화두는 시대에 따라 옮겨 다닌다. 한때는 정치적 난민 문제가 대세였다. 시리아 독재와 내전이 유발한 난민이 어떤 국제 분쟁으로 이어졌고, 자국 내 이민자 문제의 정치 쟁점화로 연결됐으며, 그로 인해 트럼프 식의 극우 정치집단들을 양산해 내는지를 다뤘다. 그러다가 또 언제부터인가 많은 관심이 환경 문제로 옮겨 갔다. 모두들 엘 고어 식 ‘불편한 진실’에 대해 얘기했다. 요즘의 메인 테마는 AI이다. AI 시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를 다룬다. AI라는 초유의 인공지능 기술이 신 제국주의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AI 기술이 앞으로 그야말로 인간 해방에 일조하는 장미 빛 미래가 될 것인지에 대해 분석하고, 걱정하고, 공감한다. 영국 가렛 에드워즈 감독의 ‘뛰어난 지능’이 돋보이는 영화 ‘크리에이터, The Creator’는 AI 얘기를 다룬 것 중 가장 혁신적이면서, 또 가장 정치적인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몇 가지 지점에서 깜짝 놀라게 되는데 1) 배경은 2066년이지만 실제 얘기는 1960년대의 베트남전이라는 것 2) 여기에 9.11 테러의 역사를 얹히되 부시-럼스펠드-딕 체니가 공모한 공작 정치의 이슈였던, 대량살상무기 색출 문제를 소환시켰다는 것이다. 또 3) 이걸 리들리 스콧의 1980년작 ‘블레이드 러너’의 분위기로 만들고 4) 또 여기에다 1979년작인 프랜시스 F.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의 전쟁 액션 영화 같은 분위기를 덧칠했다는 것이다. 이런 걸 두고 역사가 영화가 된 작품이라고 말한다. 그 의식과 관념의 싱크로율이 대단한 작품이다. 1975년생인 감독 가렛 에드워즈가 뛰어난 역사 인식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게 만든다. 영화는 뉴스 릴이 아닌 (연출된) 뉴스 릴로 시작된다. 미국 합참의장인 듯이 보이는 고위급 군 인사가 미 의회 연단에 올라 말한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10년 전 LA 핵폭탄이 터졌다, 인간을 보호해야 할 AI들이 저지른 짓이다, 우리는 끝까지 AI들을 색출해서 제거할 것이다. 또 우리는 얼마 전 AI들의 본거지를 찾아냈으며 곧 노마드(미국이 개발한 일종의 대형 전술핵미사일 시스템 및 무기)를 이용해 그곳을 섬멸할 것이다, 그곳은 뉴 아시안 지역이다, 강조하건대 뉴 아시안 지역에서의 전쟁은 AI를 없애는 것이지 그곳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 드린다, 등등이다. 뉴 아시안 지역은 AI와 시밀러(the similar, 곧 半인半로봇들로 피부 재생과 이식을 통해 얼굴과 외모는 사람 모습이다.)들 그리고 진짜 인간들이 공존하며 살고 있는 지역으로 설정된다. 영화는 종종 이곳을 부감 쇼트로 보여 주는데 마치 북베트남에 있는 하롱 베이처럼 보인다. 베트남이 요즘 할리우드 시각에서 확실한 이머징 국가가 되었음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영화 속 도심은 중국 베이징과 도쿄 올드 타운을 뒤섞은 이미지를 연상시킴으로써 영화가 표방하는 범아시아적 특징을 나타낸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넘어 결국 미 대륙과 아시아 대륙의 경쟁 대립 관계를 상징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인류의 희망은 미국이 아니라 아시아권에서 나올 것이라는 감독의 친 아시아적 특징을 드러내기도 한다. 게다가 주인공은 흑인인데 이름이 여호수아(에수)의 다른 말인 조슈아(존 데이비드 워싱턴)이다. 조슈아가 사랑하는 마야(젬마 찬)는 인도계 아시안처럼 느껴진다. 마야는 하웰 대령(앨리슨 제니)이 지휘하는 미 해병 특수부대원들이 그렇게나 색출해서 없애려는 AI의 정신적 지도자 니르마타이다. 니르마타는 힌두어에서 유래된 듯이 보인다. 둘의 사이에서 태어날 뻔하고 결국 마야가 자신의 아이를 대체할 AI 인간으로 재탄생시킨 알피(매들린 유나 보일스)의 이름이 지닌 의미도 히브리어로 신을 뜻한다. AI 병사들을 이끌고 있는 저항군의 지도자 하룬(와타나베 켄)은 종종 일본 말을 쓴다. 이 모든 것은 영화 ‘크리에이터’가 脫서구화, 비욘드(beyond) 미국화를 겨냥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LA에 터뜨려 순식간에 100만 명을 살상하고 인류를 위협한 AI의 핵폭탄 공격에 대한 얘기나, AI들의 절대적 비밀병기이자 초능력자인 알피의 존재를 찾는다는 명분을 내걸고 벌이는 군사 행동은 과거 부시 행정부가 대량 살상(화학) 무기를 찾아내겠다며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것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부시의 정치군사적 목적은 미국 특히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고 미국식 자본주의를 이식시켜 경제적 이권을 챙기려는 것이었다. 그때도 내세운 슬로건은 군사공격의 대상이 독재자 후세인이지 이라크 민중은 아니라는 식이었다. 문제는 이라크 내에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실상을 담은 영화가 폴 그린 그래스 감독이 2010년에 만든 맷 데이먼 주연의 영화 ‘그린 존’이다. ‘크리에이터’에서 AI의 저항군 지도자 하룬은 주인공 조슈아에게 하소연하듯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화요. 서로 평화롭게 살자는 것이오” 조슈아가 사랑하는 여인 마야는 언제가 노마드의 공격으로 눈앞에서 부모를 잃은 AI 아이의 비참한 모습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는다. 마야는 울먹이며 조슈아에게 말한다. “이제 이 전쟁을 끝내야 해” 조슈아는 니르마타를 잡기 위해 마야에 접근한 언더 커버다. 프락치이다. 그럼에도 그는 마야와 사랑에 빠진다. 그는 오로지 마야밖에 모른다. 니르마타는 잡더라도 마야는 데려오겠다고 생각한다. 순진하다. 잔혹한 하웰 대령의 군사작전에 참여하고 길잡이로 나선 것도 죽었다고 생각한 마야가 AI 지역 뉴아시아 본거지에 살아 있다는 첩보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기 여자밖에 모르던 조슈아는 아이 알피를 만나고 하룬 등과 같이 저항군의 일원이 되면서(하룬은 조슈아에게 말한다. “당신도 이제 우리와 같아진 거야!”)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현실을 바꾸는 개혁에 나서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현실 개혁은 그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현실은 개혁을 위해 존재하며 개혁은 현실 없이는 불가능하다. 변증법이다. 미군의 첨단 헬기가 뉴아시아 존을 공격하기 위해 접근하는 모습은 ‘지옥의 묵시록’에서 나오는 헬기 장면, 바그너의 발퀴레 제3막 ‘발퀴레의 기행’이 깔리는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지상에서 미군과 저항군이 싸우는 모습은 ‘스타 워즈’를 닮아 있다. 할리우드의 수많은 전작들에게서 가져온 엄청난 양의 레퍼런스들은 이 영화를 보는 묘미 중의 하나이다. 미국 영화로 미국 영화를 뛰어넘으려는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새로운 미국 영화는 어쩌면 철저하게 미국적인 것을 답습하는 과정에서 나올 수 있다는 얘기이다. 미래 세계의 모습을, 베트남전 시대로 회귀시킨 역사의식도 남다르게 보인다. 월남전은 미국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이다. 미국은 공산 반군을 없앤다며 베트남 양민들을 학살했다. 영화 속에서 미 해병대들이 AI와, AI와 함께 사는 사람들(마치 1960년대 미국 내 유색인종의 인권을 돕는 백인들처럼)을 공격하는 장면은 거의 명백히 미라이 양민 학살 사건(1968년 캘리 소대가 베트남 미라이 마을 주민 500명을 학살한 사건으로 올리버 스톤의 1986년 영화 ‘플래툰’의 소재가 됐다.)을 모티프로 한 것이다. ‘크리에이터’는 AI 시대에 이르러서도 베트남전의 악몽과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역사적 의지를 보여 준다. 한편으로는 전쟁의 상처란, 족히 100년에 이를 수도 있음을 역설한다. ‘크리에이터’는 SF 영화가 역사영화가 될 수 있음을 여실히 증명한 작품이다. 미래는 현재가 되고 현재는 이미 과거가 된다. ‘크리에이터’는 미래이자 현재이며 과거를 다룬 작품이다. 그 점이 좋은 작품이다. 그것도 아주.
다큐멘터리는 역설적으로 脫다큐적일 때, 다큐처럼 보이지 않을 때 생명의 리듬을 얻는다. 재미와 흥미가 배가된다. 물론 잘 만들었을 때에 한한다. 구성이 돋보이고 주제의식의 심층에 보편타당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무엇을 매달아 놓을 때이다. 요즘의 다큐는 드라마 타이즈 형식으로 전체를 구성하고 역사적 팩트에 대한 해석에 있어 주관적 시선을 강하게 개입시킴으로써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극영화에 가까운 작품일수록 청년 세대들에게 강하게 어필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른바 비정통 다큐멘터리의 정통화인데 최근 개봉된 ‘킴스 비디오’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폭발적 재미를 준다. 동시에 세대 간 단절의 시대에 다리를 놓는다. 밀레니엄 이전과 이후를 이어 간다. 현재의 대중 상업영화가 1970~1990년대의 하위문화, 전위적인 것들과 뿌리를 같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킴스 비디오’는 보기 드문 다큐이다. ‘킴스 비디오’는 우리 말로 하면 김씨네 비디오 가게이다. 미국 뉴욕 맨하탄 이스트 빌리지에 있던 비디오 점이다. 세인트 막스 플레이스(Saint Mark’s Place)에 있었으며 지번으로는 8번가로 세컨드 애버뉴(2nd avenue)와 서드 애버뉴(3rd avenue) 사이이다. 온갖 해적판이 난무하고 칸과 베를린 베니스 영화제 작품들을 다 모은….이 아니고 그런 작품은 오히려 구석으로 밀려난, 그보다는 듣도 보도 못한 세상 구석의 영화제 작품들, 이른바 B 무비로 불리는 모든 비주류 영화들, 아방가르드 작품들, 대학생 영화들로 가득 찼던 가게이다. 새로운 재미와 (세상과 예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영화들에 목말라하는 영화광들이 열광하는 비디오 가게로 엄청난 인기를 모았던 비디오 대여점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와 코언 형제 감독이 단골이었던 곳이다. 코언 형제는 대여 연체료가 600달러나 쌓여 있다고 할 정도였다. 마틴 스콜 세이지, 로버트 드 니로도 자주 드나들었다. 킴스 비디오는 뉴욕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대표했으며 날개 돋친 듯 퍼져 나간 인기로 뉴욕 내에 체인 망 지점을 모두 11개나 열었던 적도 있을 정도다. 이중 몬도 킴스(Mondo Kim’s)가 가장 유명했으며 이 영화가 배경이 된 공간이다. 파트너 관계인 데이비드 레드먼과 애슐리 사번 감독이 공동으로 연출한 다큐 ‘킴스 비디오’는 지금은 사라진 킴스 비디오와 이 가게를 만든 용만 킴(김용만)의 현재를 추적한다. 킴스 비디오는 어디로 갔는가. 그 많던 VHS와 DVD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엔가 소장돼 있는가. 아니면 다 소각되고 폐기됐는가. 양으로만 십 수만 장에 이른다. 그 많은 김씨네 비디오는 어디로 갔는가. ‘킴스 비디오’는 그 추적의 과정에 있어 모든 극영화의 장르적 기법을 동원하고 차용하고 훔쳐낸다. 이 다큐는 그래서 일종의 추적 스릴러이다. 중간중간 갱스터 무비의 분위기를 내기까지 한다. 서스펜스도 있다. 공포영화 같기도 하다. 레드먼&사빈 감독이 얼마나 영화광인지, 그들의 다큐가 얼마나 극영화의 스타일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둘은 자신의 다큐에 지금껏 나왔던 온갖 걸작급 명화(名畵)의 장면들을 영화 곳곳에 박아 놓는다. 그 레퍼런스의 양이 어마어마하다. 예컨대 영화의 시작은 빔 벤더스의 1984년작 ‘파리, 텍사스’이다. 데이비드 레드 먼이 어린 시절을 보여줌으로써 자신 스스로를 설명하는 장면에서는 토브 후퍼의 1982년작 ‘폴터 가이스터’ 장면을 쓴다. 1977년에 나온 샘 워너메이커 감독의 ‘신밧드와 마법의 눈’같은 영화는 우리에게는 아니지만 미국의 영화광들에게는 어린 시절의 고전이었을 것이다. 두 명의 감독은 이런 영화들을 즐비하게 언급해 가며 이 다큐가 자신들과 같은 영화광들에게 경배를 바치는 작품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아마도 이런 다큐의 경우는 원고와 텍스트를 미리 쓰거나 준비하고 뒤에 영상을 갖다 붙이는 방식으로 제작됐을 것이다. 때문에 영화는 의외로 종종 꽤나 문어적(文語的)이며 고답적인데 역설적인 것은 사실 그런 방식이야말로 굉장히 재미있다는 새로운 인식을 요즘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십수 만장 적어도 그 일부인 5~6만 장의 비디오와 디비디의 행방을 이 다큐는 결국 찾아내는데 성공한다. 소장품들 거의 전부가 엉뚱하고 기발하게도 이탈리아 시칠리 섬에 있는 살레미라는 지방 소도시의 성으로 옮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 어떻게 그렇게 됐을까. 그 추적과 추리의 얘기가 펼쳐진다. 현 이탈리아 문화부 차관(우리의 문화재청장) 비토리오 스가르비가 등장하는 것도 흥미롭다. 레드먼의 카메라는 이 부분에서 저널리스트의 끈질긴 투혼으로 전환된다. 스가르비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라는 희대의 이탈리아 총리의 정치적 계보와 관련이 있는 인물로 보이는 바, 베를루스코니가 집권과 실각을 오갈 때 잠시 살레미라는 지방 도시의 시장으로 재직했는데 끊임없이 중앙정치권으로 돌아가려는 욕망이 엉뚱하게도 킴스 비디오가 갖고 있던 장서급 분량의 비디오&디비디를 유치하게끔 하는 결과로 연결된 셈이다. 스가르비 차관 역시 베를루스코니나 다른 이탈리아 정치가 마냥 마피아와의 연결선도 있는 데다 장소가 시칠리였던 만큼 킴스 비디오를 ‘여기로 가져온 것’에는 어떤 흑막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데이비드와 애슐리의 카메라는 거기까지는 나아가지 않거나, 아니면 그 얘기는 이번 다큐 이후의 다른 얘기로 남긴 것처럼 느껴진다. 근데 그 모호함마저 이 작품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킴스 비디오의 김용만 사장도 흥미로운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1979년 23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청과일 가게에서 일을 하며 뉴욕의 한 필름스쿨을 다니기도 했으며(그는 꽤나 수위가 높은 단편 ‘1/3’을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세탁소를 사서 운영하다 가게 한 벽에 해적판 비디오를 팔기 시작한 것이 킴스 비디오의 시작이 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레드먼 감독은 김용만 사장을 오손 웰즈의 걸작 ‘시민 케인’의 케인으로 비유한다. 김용만 사장은 2008년 모든 점포를 정리하고 사라졌으며 현재는 뉴저지에서 다른 사업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 다큐멘터리가 그로 하여금 다시 한번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다. 김용만 사장은 왜 자신이 5만 장이 넘는 작품들을 살레미로 넘겼는지 그 이유와 소회를 밝힌다. 이 다큐 ‘킴스 비디오’는 매우 충격적인 결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이 다큐가 주는 진정한 재미이자 한편으로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깊은 생각에 빠지게 만드는 요소다. 킴스 비디오의 소장품 상당수는 뉴욕의 알라모 극장으로 돌아갔다. 이 과정을 보면서 다큐와 다큐를 만드는 영화감독이 이렇게까지 해도 되는가, 혹은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질 만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다큐의 고전적 정신, 곧 ‘거리 두기’를 의도적으로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과 영화와 범죄에는 공통점이 있다. 예술엔 범죄가 가미된다. 짐 자무쉬는 말했다. “영감을 주는 모든 곳에서 도둑질을 하라”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고 또 무슨 의미일까. 반드시 영화를 보고 직접 확인할 일이다.
강제규의 신작 ‘1947 보스톤’은 잘 숙성된 작품이다. 코로나 3년을 기다렸다. 영화는 보통 사과 같은 과일과 같아서 창고에 오래 두면 부패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1947 보스톤’은 먹기 좋을 만큼 잘 익은 영화가 됐다. 출하시기가 나쁘지 않았던 덕이다. 의외로 시대 상황과 잘 맞는다. 맞춤형 양복처럼 완성도도 좋다. 너무 요란하지도, 너무 투박하지도 않게끔 재단됐다. 테일러의 재봉질 솜씨가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단골손님들을 만족시킨다. ‘1947 보스톤’은 1947년 보스턴 국제 마라톤에 출전한 한국 선수 서윤복의 이야기이자 그를 훈련시킨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의 이야기이다. 손기정은 다 알다시피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대회에서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뛸 수 밖에 없었던 금메달리스트였다. 이때 남승룡은 동메달을 땄다. 손기정이 월계수 화분으로 일장기를 가린 사건, 동아일보의 한 기자가 그렇게 ‘주도한’ 보도사진이 문제가 돼 이후 그는 영영 마라톤을 뛰지 못했다. 1936년은 중일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었고 일 제국주의의 군부는 눈이 미쳐서 돌아갔을 정도로 식민 통치를 강화했을 때였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나라는 독립이 됐다. 손기정은 민족의 영웅이지만 여전히 마라톤을 뛰지 못한 한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체육 선생으로 살아가는 남승룡(배성우)의 제안으로 손기정(하정우)은 달리기에 천부적 소질을 선보이는 서윤복(임시완)을 키우게 된다. 셋의 목표는 그다음 해에 열리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니다. 무엇보다 참가 선수권 자격을 따야 한다.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막대한 비용의 참가비도 마련해야 한다. 마라톤 협회 같은 단체도 없었던 때이다. 모두들 못 먹고 못 살던, 빈궁한 시기였다. 훈련장, 훈련 시설은 기대하기조차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저 고개 마루나 언덕을 다 헤진 운동화를 신고 달리는 게 고작이었던 때이다. 국제 마라톤 대회는 언감생심이었던 시대다. 저개발의 기억이 최고조였던 때이다. 1947년은 1948년 이승만의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이 있기 전인 해이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남북한 모두 미국과 소련의 주둔군(군정)에 의해 ‘통치’되는 민족에 불과했다. 남쪽의 미 군정은 사령관 하지 중장이 통치했으며 남한은 아직 공식 국호가 공표되지 않아 여전히 조선이라 불렸다. 남한의 경우는 어쩌면 여전히 일본의 무단 통치가 연장되고 있었던 셈이다. 제주도에서는 4.3사건이 시작됐으며, 대구에서는 1946년 10월 1일에 노동자들의 총파업과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유혈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나라가 말 그대로 흉흉하기 이를 데 없던 시기이다. 남한 지역은 찬탁 반탁으로 나뉘어 극심한 혼란을 겪던 때이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희망이 필요한 시기였다. 모두들 무엇인 가에 집중하고 매달려야 할 때였다. 현실의 시름을 잊을 수 있는 무엇인 가가 필요한 때였다. ‘1947 보스톤’은 영리하게도 불우하고 불행했던 시대의 이슈들을 영화 이야기의 외곽으로 빙 둘러 병풍을 치는 전략을 짠다. 스포츠 드라마가 갖는 ‘장르적 관습(상업영화의 전형적인 스토리 구조)’을 앞으로 내세우며 시대의 진실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숨긴다. 사회 역사적 리얼리티는 아는 사람들만 알아듣거나 궁금한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가게끔 하게 만든다. 상업영화의 재미로 역사영화의 의미가 지닌 줄기를 더듬게 만든다. 강제규가 잘 하는 연출 수법의 장기이다. 그는 줄곧 전쟁 액션 영화의 방식으로 민족 분단의 이야기와 민족주의의 이슈를 건드려 왔으며(‘태극기 휘날리며’, ‘마이 웨이’) 가족영화의 틀로 분단의 아픔을 제기해 왔다.(‘민우씨 오는 날’, ‘장수상회’) 이번엔 스포츠로 민족과 민족주의의 얘기를 전개해 간다. 강제규의 민족주의는 일종의,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민족주의이다. 지나치게 인위적이거나 강압적이지 않다. 박제화 돼 있지 않다. 그가 생각하는 민족주의는 살아 있는 것, 활기차고 재미있으며 미래세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영화 속에서 보이는 그의 미국관이 그렇다. 전후 세대인 그가 생각하기에, 미국에는 착한 미국인과 못된(차별주의자인) 미국인이 있다는 것이다. 극 중에서는 미 군정 사무국의 여성 스매들리(모건 브래들리)와 하지 중장(론 켈리)으로 대비된다. 스매들리는 차별적 시선 없이 마라토너 셋을 도우려 애쓴다. 하지 중장은 이들 셋에게 선수권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대한문(덕수궁) 앞에 보스톤 마라톤 출정식 겸 기념행사에 모였던 군중들은 그런 (미 군정 사령관의) 태도에 분노한다. 극 중에서 서윤복은 마라토너가 되기 전 온갖 허드렛일을 해 가며 살아간다. 그는 달리기를 잘하는 만큼 배달 일에 능숙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배달하는 음식점의 국수 한 그릇 제대로 사 먹을 돈이 없다. 그에게는 간질환에 걸려 죽어가는 어머니가 있다. 어린 서윤복의 삶은 궁핍하고 비참하다. 그는 종로 거리에서 음식 배달을 하다 부딪힌 미군과 시비가 붙는다. 그는 미군을 상대로 주먹을 날리며 저항을 한다. 그가 미군 얼굴을 한대 치고받을 때 이상한 쾌감이 느껴진다. 소극적인 에피소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이야기들이 얼마나 사실에 근거했는지는 판단하기가 애매하다. 아마도 현대역사를 다룬 많은 영화들의 상당수가 그렇듯이 사실적 자료에 근거를 두긴 했어도 ‘윤색의 윤리학’을 지키는 선에서 살짝 만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건 감독의 시선이 담겨 있다는 얘기이다. 감독이 굳이 캐릭터의 대비(스매들리 여사와 하지 중장)를 만들거나 주먹싸움의 에피소드를 만든 건, 미국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우회적으로나마 담고 싶었던 것이 그 이유였을 것이다. ‘1947 보스톤’이 적기에 출하된 과수원의 사과마냥 시대적 공기에 부합돼 있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나온다. 현재는 한미일 공조다 뭐다 해서 국가 정체성의 균형 추가 많이 기울어진 상태다. 사람들은 ‘1947 보스톤’같은 역사 스포츠 영화에서 미국에 대한 정치적 시선까지 읽어 낼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다. 영화 속에서 손기정 등은 나라가 독립을 했으면 마라톤의 기록도 독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태극기 마크를 가슴에 달 수가 없다. 그들이 보기에 한국=조선은 여전히 독립되지 않았다. 셋은 가슴에 태극기 마크를 달기 위해 이국 만 리 먼 땅 보스톤에 절박한 호소를 쏟아 낸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고 자신들의 나라가 진정으로 독립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영화는 묘하게도 주인공 셋의 그 같은 간절한 소망이 지금 2023년에도 관통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 우리는 진정 독립된 나라에서 살고 있는가. 일본으로부터 과연 진정으로 해방됐으며 미 군정의 종속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가. ‘1947 보스톤’은 기묘한 방식으로, 그리고 돌고 돌아 우회적으로 바로 그 같은 정치적 질문을 쏟아 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7 보스톤’은 영화 곳곳에 재미의 긴장을 마치 사슬의 이음처럼 단단하게 연결해 나가는 작품이다. 중간중간 이런 류의 영화가 갖는 특유의 장면들 마냥 손발이 오그라들 만큼의 민망하고 인공적인 에피소드도 있다. 대체로 그런 부분은 극 전체의 리듬감으로 드라마적 재미를 복원해 나간다. 그 톤 앤 매너가 좋다. 극 후반 30분 가까이 이어지는 보스턴 마라톤 장면은 한마디로 휘몰아친다. 무엇보다 매우 정직하면서도 정통의 기법으로 찍혀졌다. 배우 임시완과 배성우에게 주어진 주문도 서윤복처럼, 남승룡처럼 ‘그냥’ 달리라는 것이었던 셈이다. 후반의 마라톤 시퀀스는 마치 42.195㎞의 마라톤 실제 경기를 축약해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보는 관객들도 마치 자신들이 뛰고 있는 것 마냥 흥미롭다. 스포츠 영화는 스포츠 장면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사명’에 충실한 영화이다. 마라톤 장면만으로도 충분한 볼 거리를 제공한다. 보스턴 마라톤이지만 호주에서 찍었다. 구간구간 보이는 1947년의 보스턴 거리 풍경은 죄 CG이다. 그 기술력과 디테일의 섬세함이 돋보인다. 프로덕션의 세 공력, 곧 미술과 소품, 의상 분장의 역할이 뛰어났다는 것, 그 전체를 디자인한 연출의 섬세함이 남달랐음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영화는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로 구분되지 않는다. 다만 사소한 영화가 있고 사소하지 않은, 그래서 사회적이고 역사적으로 비중이 높은 영화가 있을 뿐이다. 좋은 영화지만 사소할 수 있다. ‘1947 보스톤’은 좋은 영화이면서 동시에 사소하지 않은 영화이다. 역사적 진심이 담겨져 있는 영화이다. 누선(淚腺)을 자극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일본에서 가장 잘 우는 여배우는 안도 사쿠라이다. 그녀는 감정만 살짝 잡아도 눈물을 줄줄 흘리는 놀라운 연기력을 선보인다. 이시카와 케이 감독의 영화 ‘한 남자’에서도 첫 장면부터 안도 사쿠라가 눈물을 뚝뚝 흘린다. 영화 ‘한 남자’는 그렇게 시작한다. 일본의 미야자키(큐슈 내의 지역으로 일본 본토인 혼슈에서 꽤 떨어진 곳이다. 오키나와 다음으로 일본 최남단 지역으로 꼽힌다)에서 세이 분도(誠文堂) 문구점이라는 조그만 가게를 하며 살아가는 타케모토 리에(안도 사쿠라)는 비가 오는 날 가게에서 눈물을 흘리며 홀로 울고 있다가 한 남자 손님을 맞는다. 나중에 타니구치 다이스케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이 남자(쿠보다 미사타카)는 훗날 리에의 일생을 송두리째 흔들게 된다. 리에는 유토란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는 싱글맘이다. 유토 밑으로 료란 이름의 아들이 하나 더 있었으나 2살 때 뇌종양으로 죽었다. 둘째가 죽는 과정에서 남편과 이혼했다. 그녀는 죽은 아이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허전하다. 그래서 종종 혼자 운다. 슬픔에 젖어 사는 리에의 빈 공간을 약간은 과거가 수상해 보이는 남자 다이스케가 스며 들어온다. 그는 주변 벌목 회사에 일하는 노동자이다. 벌목꾼이다. 리에는 다이스케와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먼저 키스한다. 그녀는, 여자의 놀라운 직감으로, 남자가 자신처럼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간파한다. 리에는 다이스케를 안는다. 둘에겐 곧 하나라는 귀여운 딸아이가 생긴다. 다이스케는 의붓아들 유토에게도 지극정성이다. 그렇게 둘은 3년 4개월 동안 그 누구라도 부러워할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간다. 문제는 다이스케가 작업을 하다가 사고사를 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상냥하고 사랑스러웠던 남편이 죽고 나자, 남편이 남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것에 있다. 남편은 타니구치 다이스케가 아니었다. 다이스케는 딴 남자이다. 그는 미야자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군마 현(일본의 수도권 지역이다. 도쿄 위에 있다)의 아키호 온천家에서 살았다는, 사라진 둘째 아들이다. 리에가 오손도손 살았던 다이스케는 전혀 다른 얼굴의 남자다. 이건 간단치 않은 문제이다. 리에에겐 다이스케의 생명보험 문제도 있다. 이카호 온천의 유산 문제도 있다. 리에는 남편 다이스케, 아니 이제는 누군지 모르는 남자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그녀는 첫 남편과의 이혼 때 자신을 도와줬던 인권 변호사 키도 아키라(츠마부키 사토시)를 찾는다. 아키라 변호사는 다이스케란 남자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엄청난 비밀을 하나하나 알아가게 된다. 그런데 그 엄청난 비밀이 대단한 음모나 공포, 미스터리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삶의 진실에 가깝게 된다. 아키라 변호사는 다이스케를 찾아가면서 엉뚱하게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간다. 아키라는 다이스케처럼 자신조차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랐음을 알게 된다. 그는 자이니치(在日. 일본 내 한국인 혹은 그 자손들을 가리키는 말로 대체로 귀화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이다. 그의 장인은 그에게 종종 얘기한다. “자네는 다른 자이니치와 달라. 이 나라는 돈을 잘못 쓰는 게 문제야. 생활 보장 제도가 뭐냔 말이야?!” 늘 그런 식이다. 아키라는 그런 차별 아닌 차별에 묵묵부답 살아왔다. 일본 사회 곳곳에서도 혐오 시위가 한창이다. 그는 변호사로 일본 사회 한 켠에 편입하는데 성공했지만 왠지 아내조차 그런 그를 완전하게 신뢰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아내는 그에게 미야자키로의 출장이 진짜 일 때문이었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의부증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남편의 여자관계를 의심하는 건지 아니면 민족성을 의심하는 건지 살짝 분간이 되지 않는다. 아내는 남편에게 줄곧 우월감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이니치는 결국 어쩔 수 없어, 믿을 수 없는 존재들이야’, 하는 뒤틀린 심사 같은 것이다. 영화 ‘한 남자’는 중첩의 드라마이다. 영화는 곳곳에서 인물을 겹치게 하고 그 내면을 교차시키며 결국 의미를 포개어 나간다. 영화는 한 남자를 찾는 데서 시작해 일본 사회 차별 문제의 대표격인 자이니치 이슈로 나아간다. 그러나 결국 이 영화는 일본인들도 스스로들이 현재 혼미한 사회의 소용돌이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하여 일본인 모두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은 지 오래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다 큰 주제로 밀고 나간다. 영화는 작은 우주에서 큰 우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구성될 때 이야기의 긴장감이 높아진다. 잘 짜인 이야기로 느껴진다. 작은 강물이 큰 바다를 만드는 법이다. 이 영화도 한 남자가 아니라 모든 남자=사람의 이야기로 흘러가며 결국 일본인 전체에 대한 얘기로 퍼져 나간다. 그 스토리의 점층(漸層)화, 세공력이 뛰어난 작품이다. 이 영화가 오프닝 장면으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금지된 재현’을 쓰는 데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 이시카와 케이 감독은 영화 처음부터 자신의 이야기가 어떤 내용과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하고 간다. 인간은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가 없다. 거울 속에 비친 나(한 남자)의 뒷모습은 나의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인생은 예측 불가능한 일 투성이이며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간파할 수 없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진실은 그 일부일 뿐이다. 인간의 사회적 삶이란 그래서 늘 절대적이지 못하다. 상대적이다. 너는 너를 아는가. 나는 나를 아는가. 영화 속 착한 시골 여자 리에는 도시의 자이니치 출신 인권 변호사 아키라에게 묻는다. 저는 그동안 누구의 인생과 함께 살았다는 건가요. 아키라는 정보를 취득할 요량으로 오사카 감방에서 형을 살고 있는 호적 교환 브로커 오미우라 노리오(에모토 아키라)를 만나서도 비슷한 얘기를 듣는다. 오미우라 노리오는 변호사 키도 아키라를 유리 차단벽 너머로 두고 이렇게 이죽거린다. 그는 첫눈에 아키라가 자이니치임을 알아본다. 아키라는 귀화했다고 말한다. “흥! 자이니치답지 않은 자이니치군. 그건 당신이 바로 자이니치라는 얘기요.” 너는 너 자신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인 셈이다. 아키라가 이 범죄자 노인을 만나러 가는 감방의 복도는 긴 터널처럼 되어 있다. 아키라는 처음에 그 터널 안으로 들어간다. 두 번 째 만남에서는 그 터널을 안에서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으로 설정된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극장을 통해 영화가 주는 진실의 안으로 들어가 생각지 못한 또 다른 진실을 깨닫고 극장 밖으로 나온다. 일종의 금기의 재현이다. 르네 마그리트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우리는 어떤 남자, 어떤 사람들과 살고 있는 것인가.
예상 밖 흥행 안타를 치며 여름 영화시장을 간신히 연장전으로 끌고 가고 있는 ‘달짝지근해: 7510’의 콘셉트는 의도된 시대착오성이다. 일단 7510이란 것도 주인공 남녀 이름의 발음에서 따왔다는데 이것조차 일부러 시대착오적인 척 구는 것이다. 주인공 캐릭터는 더할 나위가 없다. 차치호(유해진)는 방안에 수십 개의 자명종을 놓고 살아가는데 1시간 단위로 일정을 기억하고 소화하는 성격이어서 시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차고 다니는 손목시계도 전자시계 카시오이다. 몰고 다니는 차 역시 단종됐어도 한참 전에 없어진 모 회사 브랜드 프라이드이다. 차치호는 과자 회사에서 과자 맛을 내는 연구원이며 집에서는 히키코모리, 회사에서는 ‘왕따’인 인생으로 살아간다. 차치호와 관련된 모든 것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대략 설명되며 영화는 보통 초반에 이야기에 나올 캐릭터를 설명하면서 작품이 나아갈 방향을 관객들에게 사전에 브리핑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영화 만들기의 제1 법칙이기도 하다. 이 영화 ‘달짝지근해: 7510’은 초반부만 보면 영화가 1970, 80년대 배경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공간도 약간은 ‘달동네스러운’ 곳이되 운치가 있으며 다소 서민적이지만 그렇다고 궁색하지는 않은, 그래서 예스럽지만 지금도 볼 수 있는 동네 같은 곳으로 설정하고 들어간다. 혜화동 위쪽 낙산 주변의 산동네로 보이는 영화 속 두 남녀의 공간은(둘이서 카풀 아닌 ‘밥풀’을 할 수 있는 걸 보면 사는 곳이 같은 동네라는 얘기다.) ‘올드&뉴’스럽고 풍족함과 결핍의 중간쯤이며, 행복과 외로움의 그 어디쯤으로 설명된다. 그렇게 공간을 슬쩍 뭉개 놓음으로써 감독과 시나리오를 쓴 작가는 자신들(감독 이한, 시나리오 작가 이병헌)의 이야기가 꽤나 (순정) 만화적이며 판타스틱하다는 암시 아닌 암시를 깔아 놓는다. 그러니 심각한 표정을 짓고 볼 필요는 없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는 결코 사회적 논쟁을 요구하는 작품이 아니며 오히려 그런 논쟁을 좀 피해 가자, 그럼으로써 사회적 피로도를 좀 가라앉혀 보자는 식의 주장을 우회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영화는 종종 가치 지향성 보다 유용성으로 판단되기도 하는데 엄밀하게 적용하면 ‘달짝지근해 7510’은 뛰어나거나 문제적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논할 작품은 아니다. 그보다는 지금 이 시기에 이 영화가 왜 필요한 가, 그 쓰임새의 정도가 높으냐 낮으냐를 두고 판단할 영화인 셈이다. 대체로 앞에 부분은 평론이, 뒤에 부분은 대중들이 결정한다. 이 영화가, 이런 시기(한국 영화가 죄 실패하고 있는 요즘 같은 때)에 100만 이상의 호조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일단 대중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크고 또 그건 그만큼 만족도가 높다는 것을 보여 준다. 복잡하게 얘기할 것 없다. 영화는 어쩌느니 저쩌느니 해도 재미’는’ 있다. 세대에 따라서 꽤나 킬킬대며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 ‘킬킬댐’은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여자관계에 어설픈 차치호는 처음 만난 유부녀 아닌 유부녀, 나이 든 싱글맘(딸이 고등학교 사격 선수다.)인 일영(김희선)에게 이런 질문과 답을 주고받으며 둘이 좋다고 웃어 댄다. 그것도 김밥 집에서. “김밥이 착한 일을 하며 가는 곳은 어디게요?” 나중에는 그 반대되는 질문도 한다. “김밥이 나쁜 일을 많이 하면 어떻게 되게요?” 힌트를 주겠다는 요량으로 차치호는 참기름을 사 와서 테이블에 놓기도 한다. 위의 에피소드는 이 영화가 꽤나 의도적으로 올드 패셔너블한 정서를 자극하고 있으며 그 브릿지, 다리를 통해 컨템퍼러리(comtemporary : 동시대적인) 한 정서를 사냥하고 싶어 한다는 의도를 드러 낸다. 이는 곧잘 만 하면 전 세대를 통틀어 관객을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본 것인 바, 그러기 위해 감독 이한은 더욱더 키치(kitch)적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품위 따위는 벗어던지고 보다 장난스럽고 잔재미 위주로 가야 한다며 작품을 밀어붙였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배치된 것이 서브플롯의 캐릭터들, 조단역의 배우들이다. 동생을 뜯어 먹으며 살아가는 차치호의 형(차인표)이나 일영의 남자이자 딸아이 진주(정다은)의 아빠로 올림픽 기간마다 나타난다는 뱀 장사 남자(정우성)가 양대 산맥이다. 차치호의 회사 상사이자 인사부장 정도로 보이는 남자(진선규)를 비롯해 연구원 선배(이준혁), 영화 내내 한 번도 자리에서 일어난 적이 없는 과자회사 사장(김기천)도 뛰어난 감초들이다. 약국집 약사(염혜란)는 웃기고, 이웃집 ‘썸남’(임시완)과 ‘썸녀’(고아성)은 ‘차라리’ 웃긴다. 이들 모두는 차치호와 일영의 앞뒤를 ‘달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영화적 재미를 백업하려 애쓴다. ‘달짝지근해: 7510’의 진정한 페이스메이커들이다. 이 영화가 재미있어진 것은 순전히 이들 조단역의 역할이 컸다. 영화의 성공에는 물론 유해진의 바보스러운 연기와 김희선의 해맑은 표정이 주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상당히 ‘모험적’ 선택이었는 바, 영화를 본 100만 관객 이외의, 현재의 다른 잠재 관객들 중 상당 수로부터는 이 둘의 캐스팅이 정말 올바르냐고 묻는 질문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유해진과 김희선의 키스신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고들 한다. 한 마디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런데 이런 생각에는 상당히 차별적인 시선이 존재하는 것인 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아 보인다.) 어쨌든 이 부분은 영화를 보면 금방 해소될 안건이긴 하지만 극장에 가기까지 꽤나 높은 ‘허들’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병헌-이한組는 젊은 감독답게 그야말로 ‘파격적인 파격’을 가져오겠다고 생각했고 그 실체가 두 남녀 배우가 갖는 이상(異常)스러운 이상(理想) 적 조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 결단은 옳았던 것으로 보인다. 두 배우의 캐스팅은 결과적으로, 배우 유해진에게는 미안한 표현이지만 (그가 빼어나게 잘 생긴 외모는 아니라는 점에서) 新 미녀와 야수 버전, 중년의 유부녀 미녀와 동정남 야수의 버전, 그리하여 아주 극한으로 밀어붙인 평범한 미녀와 야수의 버전 드라마로 만들어지게 했다. 그 실천적 평범함, 평범의 이데올로기가 나쁘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오며 궁극으로는 이 영화가 꽤나 진지한 선(先)의 의지를 지니고 있음을 공유하게 한다. 그 점이야말로 이 영화가 갖는 최고의 미덕이다. 재미있느냐, 없느냐는 그다음 얘기가 된다. 캐릭터 배치와 공간 컨셉의 설정에서 다소 억지도 있다. 이건 무리다 싶은 부분도 적지 않다. 일영이 일하는 직장은 무슨 캐피털 회사 같은 제2금융권으로 하루 일과가 추심 업무다. 일영은 직장 상사(윤병희)로부터 성희롱을 당하기까지 하는데도 회사의 분위기가 시종일관 밝다. 빚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회사, 그 자본주의의 폭력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차치호의 캐릭터도 너무 바보스러운 ‘영구’처럼 일관한다. 유해진의 연기가 다소 과장스럽게 보이는 이유이다. 톤 앤 매너의 조절이 필요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를 지지한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당신 미쳤어?라고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자신도 공감한다고 할 것이다. 앞뒤 사람들은 영화가 지금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있어 시선이 다르다는 것을 나타낸다. 앞의 사람들은 영화를 논할 때 ‘무엇을 위하느냐’에 비중을 두고 뒤의 사람들은 ‘지금 필요한 것’에 무게를 준다. 현재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극도로 피로한 시기이다. 어쩌면 지금은 영화가 위로와 휴식을 주는 무엇이 되는 때 일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철저하게 휴식 용이다. 그렇다면 ‘달짝지근해: 7510’이 그렇게 섬세하게 전략을 짰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코끼리가 뒷걸음질 친 면이 없지 않다. 뭐 어떻든 좋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랑하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그 이상주의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