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고고학은 멀리 있는 듯 사실은 가깝게 있는 개념이다. 고고학하면 카르멘 로르바흐가 쓴 ‘나스카 유적의 비밀’이나 아놀드 C.브랙만의 ‘니네베 발굴기’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페루 나스카 평원에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봐야만 전체가 보이는 물경 45m 안팎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고고학 하면 이런 걸 발견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혹은 앗시리아의 옛 수도인 니네베에 묻혀 있는 4000년 전, B.C.2000년 전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것이거나. 고고학자가 되는 것은 나름 매우 매력적인 일이다. 그래서 인디아나 존스처럼 세계 오지를 떠돌며 인류사의 흔적을 뒤좇고 온갖 모험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다. 시몬 스톤의 2021년 넷플릭스 영화 ‘더 디그’의 주인공 바질 브라운(랄프 파인즈)처럼 고고학자는 끊임없이 파고 또 파고, 쓸고 닦고, 비질과 세척을 반복하는 사람이다. 고고학은 생각지도 못한 예상 외의 ‘막’노동을 요구하며 그러면서도 지질학 같은 별도 학문을 병행시킨다. 고고학자가 된다는 것은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도무지 스윗하지가 않다. 그러기는커녕 이만저만 고생을 시킨다는 면에서 고고학과 진배없다. 사랑의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 그 진실의 땅을 파고 또 파고 또 파게 만든다. 그래서 간신히 뭔가 하나를 발굴했다고 생각하면 이번엔 그것의 겉면을 솔로 빗겨내고 다듬는 과정에서 손상을 입히기 십상이다. 아니 애초부터 수백 수천 년을 땅의 어둠 속에 묻혀 있다가 갑자기 빛을 받은 유적, 곧 사랑의 본질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 가치가 떨어진다. 고고학의 유적이 그렇고 남녀 간의 사랑이 그렇다. 어찌 보면 그냥 파묻혀 있는 게 나은 셈이다. 주인공 영실(옥자연)은 고고학도이다. 순전히 밥벌이를 위해 고등학교 체험 실습 특강 같은 걸 하는데, 거기서 그녀는 어린 학생들에게 자신의 직업에 대해 사명감만 있고 미래 비전은 없으며 절대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가능하면 고고학을 전공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영실은 지금 막 한 남자와의 기이한 동거를 끝내려고 한다. 학교 선배인 듯 보이는 남자는 고고학이라는 학문적 관계와 남녀 간 육체적, 정신적 관계가 혼재된 사이의 상대이다. 당연히 서로가 서로에게 지쳐 있는 상태이고, 남자에게 영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은 ‘이제 그만 내 집에서 나가 줘’이다. 아니면 언제쯤 나갈 거냐고 묻거나.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전셋돈도 자신이 마련했으니, 상대가 나가야 하는데 이 남자 도통 급할 게 없는 태도이다. ‘아 나간다니까’가 그의 말버릇이다. 그런 남자와 좁은 공간에서 같이 살면서 밥도 같이 먹고 샤워도 번갈아 하며, 빨래도 같이해 개어 주기까지 하면서 마치 오래된 부부처럼 혹은 연인처럼 살아가지만, 영실의 일상은 늘 살얼음판이다. 뭔가에 집중하고 자신을 정비해 나갈 수가 없다. 사람을 잘못 만나서 이렇게됐다기 보다는 사람을 만나 지내다 보면 이렇게 된다는 걸, 사랑은 영원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 이 지경이 됐다. 그런 영실은 또 한 번의 연애를 준비한다. 음악을 하는(아마도 방송음악이나 영화음악을 하는 것 같은) 인식(기윤)이라는 남자이다. 인식은 영실에게 어떠한 얘기를 듣더라도 그녀와 끝까지 함께 할 것이며 그녀를 끝까지 지켜줄 거라고 말한다. 영실은 반신반의 하지만, 연애와 사랑이 지니고 있는 선의를 믿고 과거의 남자, 과거의 관계에 대해 알려 준다. 사람이 사는 건 이렇게 저렇게 ‘스몰 월드’인지라 둘이 연결된 이런저런 사람을 통해 인식도 영실이 학교 시절 누구와 어떻게 만나고 어떤 관계를 만들며 살았는지 듣게 된다. 영실의 남자관계가 자유분방했는지 방종했는지 아니면 문란했는지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법. 상대를 하나의 인격체로 얼마나 존중하는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사람들은 의외로 많은 사람과 연애를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런 감정을 교류하거나 그래서 때론 가벼운 육체관계를 맺거나 잠깐이라도 사귀게 된다. 사람들은 스스로들 얘기를 안 하고, 감춰두고, ‘발굴되지 않게끔’ 땅속 깊이 묻어 둬서 그렇지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헤어짐을 반복한다. 인식은 영실을 8년 동안 쫓아다니며 들들 볶는다. 다른 남자를 입에 올리며 그 남자와 잘 때는 어땠느냐 혹은 그 남자한테도 이랬느냐는 둥 천박하고 상투적인 질문 고문을 퍼부어 댄다. 그러고 나서 미안해하기를 반복하고 또 조금 지나서는 온갖 꼬투리를 잡아 대며 영실을 못살게 군다. 영실은 그런 상황을 견디다 견디다 못해 인식을 떠나지만, 종종 전화로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서 섹스해달라는 남자의 요구까지는 거절하지 못한다. 다시는 안 가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영실은 인식을 완벽하게 떨궈 내는데 늘 실패한다. 그것이 8년이 걸린다. 사랑은 고고학의 비질처럼 오랜 시간 살살 다뤄야 한다. 그래서 얻어 내는 유물은 둘 관계의 사랑이 지닌 본체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웬걸 결국 그렇게 어렵게 찾아낸 것은 자기 자신, 곧 자아이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애’라는 위대한 진실의 유물이다. 다른 관계들을 일시적이나마 반복적으로 계속 밀어내면서라도, 자신을 온전히 지켜야만 영원한 사랑을 해 낼 수가 있다. 사랑은 남자나 여자 같은 상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하는 것이다. 영실이 그걸 깨닫기까지 실로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물경 163분 동안 줄곧 목도하게 되는 인식의 광적인 집착, 그 야비한 행태 때문에 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쪼그라든다. 사랑이 지닌 그 비루함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지긋지긋해지는 마음이 된다. 인식 같은 남자를 만나면 후미진 골목길에서 흠씬 패주고 싶지만, 그런 인식의 모습이 우리의 평균치 남성들의 모습과 다름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그래서 역설적이다. 절망적인데 반대로 어떻게든 자신을 되찾아 가는 영실의 모습,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아를 회복해 가는 여자의 모습을 통해 밝고 희망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실제로 영실이 자립을 시도해 가는 모습은 대체로 밝은 야외이다. 친구나 선배와 카페 테라스 같은 데서 커피를 마시거나 호감을 갖게 된 어떤 남자(이 남자는 발굴 현장의 인부인데 조경 일을 하기도 한다)의 나무 재배장 같은 곳에서 얘기를 나눈다. 인식을 벗어나면 영실의 삶을 비추는 조명은 환해진다. 내가 없는 사랑은 없다. 나를 지키지 못하면 상대와의 사랑을 이어 나가기가 힘이 든다. 변하지 않는 사랑도 없다. 내가 변하고 그렇게 변하는 나를 지키면서 변화해 가는 상대를 인정하면, 비교적 지속적인 사랑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무엇보다 사랑이 영원할 수 있다느니 반드시 영원해야 한다느니 하는 강박에서 제일 먼저 벗어 날 수 있어야 한다. 감독 이완민이 남자 인식의 모습을 통해 가장 말하고 싶은 부분일 것이다. 사랑은 고고학이다. 끈질기고 인내심이 강한 자, 자기와의 싸움에 능한 자만이 유적, 사랑의 본질을 발굴한다. 감춰진 진실이다.
다소 으쓱대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넷플릭스 8부작 드라마 ‘외교관’은 이런 부류의 영화, 곧 전문가를 다루는 내용의 작품에 있어 미국, 할리우드가 앞서도 한참을 앞서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여기 나오는 배우들을 실제 외교 현장에 데려다 놓아도 그리 어색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캐릭터 하나 하나가 정교하며 이야기가 갖는 리얼리티가 높다. 이런 부류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최고 급으로 분류되는 영국 드라마 ‘이어즈 앤 이어즈(Years and years)’ 이후 또 한편의 탁월한 국제정치 시즌 드라마가 나온 셈이다. 일단 이런 저런 설정이 현재의 국제 정세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들로 채워져 있다. 무엇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야기가 빈번하게 나오며, 미-러시아의 군사적 갈등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핵심 소재로 등장한다. 여기에 급박한 중동 정세(이란과의 오랜 적대 정책)가 오버랩 되고, 아프간에서 친미국적 활동을 한 사람들을 구해 오지 못한(사실은 구하지 않은) 바이든 정부의 의도적인 외교 참사 같은 것이 여주인공의 행동 동기의 배경으로 자리한다. 잉글랜드로부터 분리 독립하려는 스코틀랜드 및 북아일랜드의 정치상황도 매우 중요한 모멘텀으로 작동한다. 핵 전쟁에 대한 위기감, 러시아가 전술핵 정도는 별거 아니라며 언제든 쏠 수 있을 것이는 발언과 진술 등등은 기본 메뉴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영국의 전함(戰艦)이 정체 모를 미사일 공격을 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불시의 공격으로 영국의 장병 41명이 사망한다. 영국은 이 미사일이 이란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란은 온갖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는 미국을 우회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비열하게도 영국에게 테러를 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그건 미국 백악관도 조심스럽게 동의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중동 전문가이자 뛰어난 현장 요원인 케이트(케리 러셀)가 이런 상황에서 레이번 대통령으로부터 뜻하지 않게 신임 주런던 미국 대사로 발령받는 이유다. 상대가 이란이니 만큼 급한 불을 끄라는 얘기인 셈이다.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자 전문 외교관인 핼(루퍼스 스웰)과 런던에 오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양 불편해 한다. 외교가(街)가 아닌 아프가니스탄에 있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는 런던에 오기 전 카불로 떠나기 위해 막 짐을 싸던 중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극중 내내 파티용 드레스를 입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고 늘 구두를 벗어서 들고 다닐 정도다. 무엇보다 케이트는 남편 핼과 이혼을 준비 중이다. 그런데 정작 레이번 대통령은 케이트를 차기 부통령 후보로 고려 중이다. 현 여성 부통령은 남편의 부패 스캔들이 터지기 직전으로, 사임이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핼은 부통령이 될지도 모를 아내 때문에 혹은 아내를 위해서 이혼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그게 케이트의 정치생명을 위한 것인지, 자신의 정치적 재기를 위한 것인지 다소 모호하다. 케이트에게는 이란에게 대대적인 보복 공습을 생각하는 영국 여론을 달래는 것이 1차 과제이다. 이란이 공격했다는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사일 공격의 주체, 국가 혹은 테러 집단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도 중요한 임무이다. 잘못하면 자칫 엉뚱한 나라를 상대로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게 만약 이란이라면 미국으로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뜩이나 어려운 중동 정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와중에서 또 하나의 국제적 악재를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 영국 총리 니콜이 기름을 붓는다. 그는 정치 지도자로서는 용의주도하지(외교적이지) 못하게, 장병 유가족들 앞에서 이란이라는 국가 이름을 언급하며 피의 보복을 약속한다. 이란과의 전쟁은 일촉즉발 상황에 빠진다. 케이트는 영국의 외무 장관 데니슨(데이비드 기아시)과 교묘하게 협력하며 미영 양국의 강경 노선을 완화시키려 한다. 이 와중에 둘은 주런던 이란 대사로부터 테러의 배후에 러시아가 있고, 용병 군사조직인 ‘렌코프’가 동원됐다는 기밀을 입수한다. 이때부터 상황은 일파만파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기 시작한다. 이제는 상대가 핵 전쟁을 마다 않는 푸틴의 러시아이기 때문이다. 케이트와 데니슨 장관, 교활한 외교적 술수로 유명한 남편 핼, 케이트의 공관 차석인 스튜어트(아토 에산도흐) 그리고 그의 비밀 애인이자 공관 내 CIA 지부장인 에이드라 박(알리 안)은 러시아와의 전면전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그 와중에도 영국 총리 니콜은 이름도 모르는 러시아 한 지역에 대규모 공습을 가할 계획을 세운다. 총리는 스코틀랜드 보궐 선거의 결과로 분리 독립 운동이 거세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대 러시아 전쟁은 다분히 국내 정치용인 면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의 미사일 테러가 정말 렌코프 조직이 일으킨 것이냐는 점이다. 영국과 미국의 동맹 외교는 중차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총 8부작의 결말은 실로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국제 외교와 세계 전쟁에 있어 진짜 적은 누구인가. 어리숙한 정치인들은 외교적 언사를 마다하고 주적(主敵)을 함부로 입에 올린다. 이들이 국익,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데 있어 그 행동 폭을 스스로 좁히는 우를 범하는 이유다. 미국의 국무장관인 게넌(미구엘 산도발)은 영국 총리가 주선한 디너 파티에서(이날 게넌 장관은 니콜 총리가 제안한 리비아 내 렌코프 조직을 제거하는 군사 작전을 거부한다) 아랍 속담을 들먹이며 이렇게 말한다. “제일 좋은 것은 진실을 알고 그걸 말하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진실을 알아도 그냥 야자수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케이트는 강경 영국 총리 옆에 서려는 레이번 대통령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 “정치는 늘 49대 51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주인공 케이트는 한때 전설의 외교관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대사의 ‘부인’이 된 남편 핼과의 사이에서도 외교적(개인적)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케이트는 핼이 자신을 부통령으로 만든 후 막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고 의심한다. 그녀의 그런 생각은 일종의 합리적 의심이다. 그러나 중동을 누비며 같이 활동했던 일이 케이트로 하여금 핼과의 사이를 애증의 골짜기로 밀어 넣는다. 핼은 그녀의 정치적 경쟁자이자 동반자이다. 마치 그건 국가적 동맹 관계와 비슷한데, 영국 총리 니콜은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미국과 손을 잡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 반면에 미국과 등을 지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고.” 레이번 대통령은 영국과의 전통적인 동맹을 운운하는 것에 대해 ‘초등학교 10살 때 했던 약속 같은 것’이라고 경멸한다. 외교를 모르는 인간들이나 동맹을 찾는다는 것이다. 기이하게도 미국 드라마이지만 ‘외교관’은 지금 우리가 처한 국제 정세와 외교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뿐 아니라 어느 국가의 정치외교 상황에도 빗댈 수 있는 보편적인 스토리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야말로 이 드라마의 미덕이다. 누구에게나 반면교사가 되는 드라마라는 말이다. 미숙한 외교 행정으로 빈축을 사고 있는 국가들에겐 꽤 괜찮은 국제정치 교과서가 될 수도 있겠다. 드라마가 현실을 너무나 잘 그리면 종종 그 현실이 갖고 있는 문제의 해법까지도 찾아 내는 경향을 보인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배우라는 이야기는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서였다. 영화 ‘존 윅’ 시리즈의 처음 설정은 그렇게 단순하고 진부한 것이었다. 미스터 존 윅(키아누 리브스)은 전설의 킬러였다. 그는 정말로 무지막지하게 사람을 많이 죽였는데 어느 날 이런 남자라면 늘 그렇듯이 착한 여자를 만나고 개과천선한다. 그러나 그 천사 같은 아내가 강아지 한 마리를 남기고 병으로 죽는다. 그래도 조용히 살려고 했다. 그런데 동네 건달들이 애지중지하는 강아지를 죽인 것이 화근이 됐다. 미스터 존 윅은 다시 ‘업계’로 돌아온다. 이후 그는 온갖 음모와 살해 위협에 시달린다. ‘존 윅 1·2·3’ 편은 대체로 그런 얘기였고, 그래서 당연히 서사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죽고 죽이는 액션만이 중요해 보이는 영화였다. 그런데 미스터 존 윅이 생존해야 하는 이유가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다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게 이제야 밝혀진다. ‘존 윅 4’는 킬러들의 세계에조차 지금과 같은 ‘극히 계급적인 사회 구조=시스템=강고한 조직의 규율과 원칙’이 존재하며, 그것을 지키거나 혹은 위반하는 데 있어서는 확고한 명분이 있어야 하고, 또 그 명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의 철학까지 갈고 닦아야 만이 ‘진정한 킬러=이 세상의 진정한 생존자’가 된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한다. 미스터 존 윅을 둘러싼 업계에는 ‘최고회의’라는 것이 존재하며 모든 킬러는 그 밑에 있고, 그 킬러들의 조직 단위는 패밀리이다. 존 윅은 어떤 패밀리에도 속하지 못한(예전엔 루스카라는 러시아 패밀리 소속이었지만 현재는 파문당한 상태) 프리랜서 킬러일 뿐이다. 최고회의가 제거하려는 것은 존 윅이라는 인물보다는 존 윅이라는 전설 그 자체이다. 존 윅은 이번 4편에서 자신을 제거하려는 최고회의와 그로부터 막강한 지지를 받는 그라몽 후작(빌 스카스가드)의 잔혹한 위협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라몽 후작에게 1:1 결투를 신청해야 하며, 또 그러기 위해서는 루스카 조직을 이끌고 있는 카티야(나탈리아 테나)로부터 패밀리 멤버 자격을 다시 따야 하는데, 또 한 번 또 그러기 위해서는 클럽을 운영하는 악당 하르칸(스콧 앳킨스)을 죽여야 한다. 하르칸을 처리하지 못하면 그라몽 전에 카티야로부터 죽임을 당할 것이다. 여기에 그라몽이 고용한 또 다른 전설의 맹인 킬러 케인(도니 옌·견자단)이 존을 추격한다. 또 여기에 현상금 사냥꾼인 ‘노바디’(세미어 앤더슨)의 추적까지 이어진다. 쫓는 자만 있으면 그나마 얘기가 단순한데, 존 윅을 돕는 자까지 여럿이 등장한다. 일본 오사카의 콘티넨탈 호텔 매니저 시마즈(사나다 히로유키)가 그를 위해 목숨을 걸고, 뉴욕의 콘티넨탈 호텔을 없앤 것에 분노한 매니저 윈스턴(이아 맥쉐인)은 자청해서 존 윅의 후원자가 된다. 뉴욕 홈리스의 왕(로렌스 피쉬번)은 존 윅에게 무기와 최고급 방탄 슈트를 제공한다. ‘존 윅 4’에는 이런 부류의 영화로는 잘 차용하지 않는 과거 할리우드 고전이나 명작들의 장면들이 오버랩된다. 오프닝 장면에서 존 윅이 사막을 가로지르며 말을 타고 총격을 벌이는 모습은 영락없이 데이빗 린 감독이 1962년에 만든 피터 오툴 주연의 ‘아라비아 로렌스’의 시퀀스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맹인 킬러 케인의 모습은 일본의 60년대 영화 ‘자토이치’의 캐릭터에서 가지고 왔으며, 존 윅이 클럽 악당 하르칸과 마주 앉아 카드를 칠 때 케인과 노바디가 옆에 앉아 서로를 겨누고 있는 장면은 쿠엔틴 타란티노가 만든 1992년 영화 ‘저수지의 개들’에 대한 오마주이다. 하르칸과 킬러 셋은 영화 ‘저수지의 개들’의 남자 넷처럼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다. ‘존 윅 4’의 이야기 구조는 결국 1:1 결투를 벌이는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서부극의 그것을 따라간다. 거기에 일종의 아시아적 생산 양식에 해당하는 무협의 서사 구조를 얹히려 한다. 최고회의를 구성하는 패밀리의 존재는 무림의 9대 문파를 닮았고, 이른바 강호의 규칙과 정파(政派)와 사파(邪派)의 논리 등을 끌어다 붙인다. 영화 속에 유난히 동양사상 경구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다. 악당인 그라몽조차 이렇게 말한다. “한 가지를 대하는 태도가 만 가지를 대하는 태도이다.” 일본 사무라이 친구 시즈마는 존 윅의 무모한 삶을 걱정하며 말한다. “좋은 죽음은 좋은 인생 뒤에만 오는 법이네.” ‘존 윅 4’의 액션신들은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최고봉이다. 존 윅은 6시 3분, 일출 시각에 결투 장소인 사크레쾨르 대성당에 도착해야 하는데, 시간을 못 맞추면 패배한 것으로 인정되고 그건 곧 자신과 윈스턴 등등 모두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라몽 일당은 존 윅을 시간 내에 오지 못하도록 파리 시내와 몽마르트르 계단에 엄청난 킬러 군단을 깔아 놓는다. 존 윅이 사크레쾨르 성당에 가기 직전 폐가에서 일군의 킬러들과 근접전을 벌이는 장면은 천정이 없는 세트장에서 부감 샷으로 찍은 것인바, 대체로 원 신 원 컷의 롱 테이크로 찍었다. 그 액션을 디자인한 상상력과 기술, 스턴트의 개인기가 혀를 내두르게 한다. 몽마르트 언덕을 오르는 계단에서 벌어지는, 총격과 근접 무술이 배합된 액션신은 향후 수십 년간 나올까 말까 한 고난도의 기술력을 선보인다. 액션의 정교함도 정교함이지만 그걸 그럴듯하게 찍어 내는 촬영술도 현대 영화의 테크놀로지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가늠하게 만든다. 감독인 채드 스타헬스키는 스턴트 배우 출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윅 4’의 톤앤매너는 끝나지 않는 싸움에 처한 한 킬러의 누적된 피곤함과 그 쓸쓸함에 대한 것이다. 존 윅은 이번에 유난히 힘들고 지쳐 보인다. 그는 자신의 묘비명에 ‘다정한 남편’이라 적히길 원한다. 사람의 야망은 그 사람의 가치를 넘어서서는 안 되는 일이다. 미스터 존 윅은 그걸 깨달은 지 오래다. 이번 ‘존 윅 4’에 나오는 대사이며 주제이다.
영화 ‘길복순’에서 의외로 놀라고 좋았던 것은 (근데 이건 감독을 둘러싼 기이한 논쟁들, 이른바 그의 ‘일베 성향’을 둘러싼 의혹들에 비하면 이상하다고 할 정도) 가상의 킬러들 세계조차 철저한 자본주의 양극화의 구조로 짜여져 있다는 설정이다. 이건 꽤 괜찮은 사회과학적 사고이다. 영화는 이런 패턴의 세계관을 내세우면서 동시에 다소 비뚤어진 지역 감정과 왜곡된 역사의식의 시한 폭탄을 숨겨놓음으로써 논란을 자초했다. 근데 그건 좀 심하게 이상한 일이다. ‘길복순’은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위험성도 지니고 있는 바, 이건 순전히 감독 리스크, 곧 변성현 리스크에 따른 것이다. 변성현은 어쩌면, 세상을 보는 시선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올바른 선생이 없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돈된 역사의식의 가르침이 중요한 이유다. 변성현 리스크는 영화..
미안한 얘기지만 새 영화 ‘나의 연인에게’는 달콤쌉싸름한 연애 얘기가 아니다. 시대가 어두운 만큼 사랑스러운 영화를 기대하는 심리가 높겠지만, 이 영화 ‘나의 연인에게’를 지난 2022년 베를린영화제가 괜히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한 것이 아니다. 단순한 멜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처절하고 비극적이면서도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다. 영화는 살짝 멜로영화의 고전 격인 ‘러브 스토리’(1971) 처럼 시작하는 척, 사실은 드니 빌뇌브의 역작 ‘그을린 사랑’으로 전개되다가 폴 그린 그래스가 만든 ‘플라이트93’의 결말을 향해 가되 그 시선은 친미나 반미가 아닌 중립적인 노선을 취하려 애쓴다. 영화 ‘나의 연인에게’는 매우 복잡한 시선과 감정을 갖게 되는 영화이다. 무엇이 옳은가. 사랑은 옳아야 하는가. 옳지 않아도 사랑을 하면 괜찮은 것인..
스즈메(목소리 역: 하라 나노카)는 규슈 구마모토 현에 살고 있는 소녀다. 16살이며 엄마는 4살 때 실종,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공무원인 이모 타마키(목소리 역: 후카츠 에리)와 단 둘이 살고 있다. 이모는 죽은 언니 대신 스즈메를 키우느라 청춘을 보냈다. 남자를 집에 초대하지도 못했고, 마음 편하게 어디 놀러 다니지도 못했다. 스즈메는 스즈메대로 그런 이모가 한편으로 부담스러운 구석도 있다. 스즈메는 아직도 엄마가 어딘가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꿈을 자주 꾼다. 엄마는 손재주가 좋았는데 책상 의자 같은 걸 직접 만들어 주기도 했다. 사고가 있던 ‘그날’, 의자 다리 하나가 빠졌었다. 스즈메는 그 ‘불량’ 의자를 버리지 않고 간직한 채 살아 간다. 엄마가 남기고 간 것이니까. 스즈메는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모가 차려 준 도시락을 들고 학교로 냅다 달리는 중이다. 그런데 고개 아래 길 맞은 편으로 한 잘생긴 청년(나중에 알고 보니 교원을 준비 중인 대학생), 소타(목소리 역: 마츠무라 호쿠토)를 만난다. 소타는 스즈메에게 “이 근처에 폐허가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 이때부터 스즈메는 소타와 함께, 아니 소타를 ‘갖고’ 다니며 폐허 속 문을 찾아 문단속에 나서게 된다. 소타가 고양이 묘석 다이진의 저주에 걸려 스즈메의 다리 세 개짜리 의자로 변하게 되기 때문이다. 소타에 따르면, 폐허 속 문을 닫지 않으면 대지진이 일어난다. 그의 설명으로는 일본 전역 동서 양쪽에 두 개의 묘석이 박혀 있고 이 묘석이 ‘미미즈’를 가둬 놓고 있는데 미미즈는 대규모 재난을 일으키는 엄청난 에너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알고 보면 소타는 대대로 토지시(閉じ師, 닫는 자) 집안의 사람이다. 소타는 병석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 ‘히츠지로’ 대신 세상의 문단속을 하고 다니는 중이다. 애니메이션 판타지에 걸맞는 동화 같은 얘기지만 이 2D애니메이션의 시나리오와 작화, 연출을 모두 맡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메시지는 비교적 간단 명료하다. 일본에서 더 이상의 재난은 없애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으로?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 같은 것으로. 스즈메 같은 착한 소녀의 염원들을 모아서이다.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같은 소박하고 순수하며 어여쁜 소망이 담긴 작품이다. 이 애니메이션의 ‘착하고 선한’ 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고 이해하는 데는 영화 속 스즈메의 동선을 따라가 보면 된다. 스즈메는 규슈 구마모토에서 출발해 시코쿠 지역의 에히메로 갔다가 혼슈의 고베 그리고 도쿄를 들러서 큰 문단속을 하고 결국엔 고향인 후쿠시마까지 긴 여정을 완성한다. 시코쿠의 에히메는 지난 2021년 기록적인 폭우로 산사태가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던 곳이다. 영화에서도 스즈메가 문을 닫는 과정에서 비바람이 치고 폭우가 내린다. 스즈메는 폐허 속 버려진 한 학교의 교실 현관 문을 닫는데 성공한다. 에히메 산사태 때 학교 학생들의 희생이 컸을 것이다. 고베는 아예 ‘고베 대지진’이라는 말을 모두가 알고 있을 정도다. 1995년 규모 7.3의 대지진이 일어났고, 7000명 가까운 사람이 죽었으며 5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부상을 당한, 대재해였다. 영화에서 스즈메는 의자로 변한 소타와 함께 간신히 이 지진을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한 유원지에 버려져 있는 대관람차 문 하나가 막 열릴 참이었다. 당시 고베에서는 평소처럼 유원지에 놀러갔던 가족 단위의 참사가 컸다. 자, 그리고 스즈메의 마지막 행선지는 도쿄와 후쿠시마이다. 도쿄는 1923년 간토(관동) 대지진이 일어났던 곳이다. 그때 무려 40만 명이 죽었다. 이 간토 대지진은, 직후에 벌어진 세계 대공황과 겹쳐 일본 사회를 극우 파시스트의 사회로 몰고 가게 한 직·간접적인 요인으로 작동한다. 한편으로는 도쿄에서 하급 노동자로 일하던 식민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느니, 방화를 일삼는다느니 해서 집단 학살이 일어났던 때이기도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스즈메와 소타는 요석을 지키는 데 성공한다. 미미즈는 나오지 못한다. 스즈메가 마지막으로 가는 곳은 4살 때 집을 떠났던 후쿠시마다. 12년 전, 그러니까 2011년에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던 곳이다. 규모 9.1이었다. 이 대참사로 18만 명이 매몰됐다. 이어 후쿠시마 원전 사태까지 터졌다. 일본은 아직도 이 동일본 지진의 재난에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벗어나 있지 못한 상황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래서 어쩌면, 신카이 마코토식 일본 대지진의 역사 기록서로 읽히기도 한다. 신카이 마코토의 상상대로 요석이 잘 박혀 있었어야 했다. 하나는 규슈에 또 하나는 도쿄에. 그때나 지금이나 스즈메와 같은 착한 소녀 그리고 소타 같은 불굴의 토지시가 있다면 사람들은 죽지 않았고 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스즈메의 엄마는 살아 있을 것이다. 그날 아침 다녀오겠다며 방글대면서 엄마와 바이바이를 했던 아이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아이들을 무심코 보냈던 엄마들, 가족을 위해 일터로 나갔던 남자들, 그 많은 사람들의 사연. 그 모두와 모든 것이 다 살아 있게 됐을 것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이 목놓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절박감, 그럼에도 그 폐허 위에서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무엇과도 같은 심정인 셈이다. 스즈메는 현재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후쿠시마로 향해, 집이 있었다고 짐작되는 곳에서 폐허의 문을 열고 4살 때로 돌아 간다. 그리고 곧, 꿈 속에서 늘 엄마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엄마처럼 성장한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된다. 스즈메는 비로소 엄마의 죽음을 직시하고 그 죽음의 통과의례를 거쳐 한 단계 다른 차원의 자신으로 성장한다. 스즈메가 커 나가듯 일본 사람들도 죽음의 현실을 받아 들임으로써 그 죽음을 넘어서야 한다고 신카이 마코토는 이야기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난을 그리고 묘사하는 것을 넘어 일종의 재난 철학, 재난에 대한 사상을 따뜻한 감성으로 전하는 작품이다. 재난은 재난을 당하는 과정에서는 분루(憤淚)의 감정에 휩싸이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는 늘 감동의 휴먼 드라마와 눈물 없이 듣고 볼 수 없는 이야기가 펼쳐지기 마련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다. 영화 엔딩에 나오는 밴드 래드윔프스의 노래 카나타하루카(カナタハルカ, KANATA HARUKA)는 많은 것들을 함의하고 있다. 이런 내용이다. 사랑은 혁명도 초조함도 천재지변도 아닌, ‘너’였어/ 몇천 년 후 인류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얼굴로 웃는 너를 보고싶어/ 너와 보는 절망은 네가 없는 희망따위 흐릿하게 빛나게 할테니까 우리는 흔히 일본 사람들, 특히 일본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에 대해 비판적이 되곤 한다. 우파인 자민당 70년 체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느냐고 지적들을 한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는 하루하루 살아낸다는 것, 대자연재해의 트라우마를 견디며 살아간다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일 수 있겠다. 그들은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 셈이니까. 신카이 마코토 이야기는,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면 스즈메처럼 남들을 살리려고 애쓰는 마음 자세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며 사람들 간 연대이고, 세상의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올바른 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결코 혁명도 초조함도 천재지변도 아닌 바로 너, 내 곁에 오늘도 숨쉬고 살아가는 구체적인 사람, ‘너’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하기 전에 자신 곁의 단 한 사람부터 구할 일이다. 세상은 차곡차곡, 한 발 한 발, 매우 구체적으로 바뀌어 나가는 법이다. 세상의 모든 ‘토지시’를 위하여!
Dear Mr. 브루스 윌리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 서울에 사는 사람입니다. 영화 평론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데일리 신문과 방송, 유튜브로 영화를 소개하는 영화 리뷰어입니다. 당신의 최신작, 아니 거의 마지막 작품 격이 될 것 같은 영화 ‘디텍티브 나이트: 가면의 밤’을 소개하려다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한국은 잘 아시지요? 제 기억에는 1995년엔가 서울 강남 논현동이란 곳에 플래닛 할리우드라는 레스토랑을 오픈하면서 그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실베스타 스탤론인지 아놀드 슈왈제네거였는지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함께 한국을 방문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신은 거기에 갔다가 당시 용산 미8군도 들렀었지요. 한 방송사 기자였던 나는 그 과정을 취재했었습니다. 아주 오랜 얘기지요. 플래닛 할리우드는 당신 포함, 세 액션..
알리 아바시 감독의 2022년작 ‘성스러운 거미’는 충격 그 자체의 영화이다. 많은 사람, 특히 무슬림에 대해 일정한 편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경하고, 역설적으로 신선할 정도의 소재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란 사회, 특히 테헤란도 아니고 순교자의 땅이란 뜻의 종교 도시 마슈하드에서 매춘부들이 공존하고 있는 데다 그 여성들 16명을 살해한 연쇄 살인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히잡을 쓰고 몸을 파는 여인들을 쉽게 상상할 수 없다. 그만큼 이란 사회가 종교적으로 폐쇄적이어서 윤락이라는 행위가 절대적으로 허용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적 강직성도 자본주의의 폐해를 막지 못한다. 윤락 여성의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내는 구조적인 문제이지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문제는 아니다.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여자..
다소 요령부득하던 영화는 후반에 이르러 단 한 신으로 모든 걸 정리한다. 아빠(폴 메스칼)는 사람들 틈에서 우스꽝스럽지만 나름 진지하게 춤을 춘다. 주인공 딸 소피(프랭키 코리오)의 눈에는 그때 아빠 모습이 빛과 어둠 사이에서 명멸하듯 깜박인다. 그것은 그 장면을 떠올리는, 이제 31살이 된 소피의 기억과도 같은 것이다. 기억이란 늘 깜박거리며, 그럼으로써 그 사이사이에 놓인 추억을 소환시키는 법이다. 어쨌든 이 장면이 이 영화 ‘애프터썬’의 하이라이트인 이유는 순전히 그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팝 음악 하나 때문이다.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부른 ‘언더 프레셔(Under Pressure)’이다. 이 노래 가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 영화의 주제에 밀물처럼 다가선다. 가사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이 세상이 어떤 건지 안다는 것은 정말 재앙이야/ 계속 사랑으로 극복해 보려 하지만 결국 난도질당하고 찢겨 버렸네/ 사랑은 한낱 철 지난 단어에 불과하지만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꿔 줄 거야/ 우리 스스로를 보살펴 줄 수 있게끔 만들어 줄 거야/ 이게 우리의 모습이지/ 억압 속에서 억압 속에서/ 억압!’ 이 장면과 이 노래가 나오기 전까지 영화는 약간의 착시를 준다. 영화는 소피가 11살이 되던 해, 아빠와 했던 튀르키예 여행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행복했던 유년 시절에 대한 추억담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가 절규했듯이 이 세상이 어떤 건지 알게 되면 재앙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재앙에 대한 얘기일 수 있다. 행복과 재앙 사이에 끼어 있던 어렸을 적 언제쯤에 대한 얘기이다. 소피가 세상을 알게 된 시점은 거슬러 올라가면 이때였던 듯 보인다. 이제 31살이 됐고 레즈비언의 삶을 살아가는 그녀의 일상은 유년 시절의 그때만큼 행복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과연 행복은 무엇인가, 삶의 저 밑바닥에 놓인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런 질문에 끊임없이 휩싸이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20년 간극의 소피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그 방식이 매우 특이하다. 오래된 일은 단편의 기억을 조각조각 이어 붙이게 하는 법이다. 아마도 소피에게는 그것이 ‘애프터썬’을 걱정해, 그러니까 해변에서 햇볕에 그을릴 것을 대비해 아빠가 자신의 어깨와 팔에 살살 발라줬던 선크림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촉감과, 그때의 햇살과 바람과 바닷물의 출렁임이, 연상작용으로 떠올랐을 것이며 어느 순간 그 여행의 전체가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졌을 것이다. 아빠가 그때 내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바꿔 줄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아빠는 나를 사랑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아빠는 그때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지금의 나로 바꿔 냈을 것이다. 소피의 삶은, 우연한 기회(아빠의 캠코더를 발견한 것)에 그 사실을 기억한 지금, 또 다른 영역과 차원으로 넘어갔음을 깨닫게 한다. 영화는 그렇게 인간의 정신적 의식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표현해 낸다. 물질이 의식을 규정하지만, 때론 의식이 물질을 규정한다. 한 번의 깨달음이 세상을 바꾼다. 영화는 정신성(性)이라고 하는 것이 본래 지니는, 그 경이의 순간을 그려낸다. 이 영화가 온갖 평론가협회에서 상찬받은 이유(런던, 전미, 시카고, LA, 보스턴, 뉴욕비평가 협회상)는 그 찰나의 각성을 물리적으로 표현해 냈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는 글이나 문학으로 혹은 음악으로 아니면 그림으로, 더더군다나 한 편의 영화로 표현해 내기가 워낙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에피소드 뒤에 숨어 있는 무섭고 어두운 삶의 오라(aura), 그 고통의 평범성을 끄집어내는 것, 관객이 그것을 느끼게 만드는 것에는 매우 정교한 연출의 과정이 필요한 법이다. 무엇보다 인생의 진실에 대해 꾸준하면서도 진지한 고찰이 이어져 있어야 한다. 감독인 샬롯 웰스에게서 느껴지는 부분이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엄마와 헤어져 살고 있는 데다, 집이 있는 스코틀랜드에서도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아빠는 소피가 11살이 되던 어느 해 둘만의 여행을 계획한다. 아빠와 단둘이 떠나는 여행은 즐겁기도 하지만 어색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여행사 단체 여행과 자유여행을 섞어 튀르키예에 온 첫날부터 아빠는 침대가 하나뿐인 것을 두고 여행사에 항의 전화를 하게 된다. 소피는 이미 잠들었고 아빠는 아이의 신발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 준 후 베란다에 나가 아이 몰래 담배를 피운다. 그는 이상한 몸짓으로 몸을 흔드는지 춤을 추는지 하는데 이때의 롱테이크 장면은 묵음으로 이뤄진다. 완벽한 밤의 침묵. 아이는 침대에서 자고 있고 그 건너 창을 열고 바깥 베란다에 나가 밤하늘을 바라보며 몸을 흔드는 아빠. 이건 아이의 기억인가. 상상인가. 아마도 그건 이 모든 기억을 소생시킨 캠코더 속 장면일 수 있다. 소피가 이 모든 이야기를 스스로 엮어내게 된 건 아빠가 여행 중 찍었던 캠코더 속 영상을 발견했기 때문이니까. 영화는 다소 불길하게 느껴질 만큼 어두운 암시가 중간중간 박혀 있는데, 그건 아빠의 ‘본질이 갖는 무엇’ 때문이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아빠가 자신과 엄마를 버리고 떠난 것은 뒤늦게 발견한 성정체성 때문일 수 있다. 그건 소피 자신이 게이가 돼 있는 장면 같은 것, 어린 소피가 난간 위에서서 아래층 구석의 두 남자가 키스하고 몸을 더듬는 장면을 엿보는 것 등으로 짐작하게 한다. 무엇보다 아빠가 여행 중 줄곧 깔깔거리며 웃고 떠들었던 모습은 딸을 위해 만들어 낸 매우 의도적인 가벼움의 일환일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는 왠지 모를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가 자살 충동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영화는 슬쩍 보여 주는데 소피와 싸운 밤, 아빠는 비교적 거친 파도가 이는 바다로 걸어 들어가려 한다. 이 영화의 전반적인 주조(主潮)는 아빠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고 튀르키예 여행이 아빠를 만난 마지막 때였거나 아빠와의 행복했던 시간의 마지막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아빠는 없다. 그 부성의 상실은 소피 자신에게 끊임없이 채워지지 않은 결핍의 원천 같은 것이다. 상실과 결핍. 인생에서 그것을 알게 되는 것만큼 외로운 것은 없다. 재앙은 없다. 퀸의 가사처럼 아빠는 누군가, 무엇인가로부터 억압받았을 것이다. 게이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다지 풍족하지 않은 경제적 삶, 중하층 계급의 고단한 삶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이 주는 억압은 결코 관념적이지 않다. 무언가 구체적인 사건들이 있었을 것인 바 그 하나하나를 열거하지 않으면서도 그 억압의 실체를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매우 특이한 귀착점을 보여 준다. 단체여행 중에 벌어진 노래자랑에서 아이는 혼자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른다. R.E.M의 ‘루징 마이 릴리전(Losing My Religion)’이다. ‘난 네가 웃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지/ 너의 노래를 들었다고 생각했어/ 네가 노력했다는 걸 알고 있어/ 모든 속삭임, 깨어 있는 모든 순간/ 난 나의 고백의 말을 고르고 있어/ 너의 눈을 맞추려 애쓰면서/ 상처받고 사랑에 눈먼 바보 같은 너’ 어쩌면 소피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이미 11살 때 삶의 진창을 알아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검게 그을린 햇볕의 자국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사랑이 모든 것을 변화하게 할 것임을 그녀는 이제 확실히 깨닫는다. 그건 사라진(혹은 자살했거나 죽은) 아빠가 남겨 준 유산이다. 삶은 재앙이지만 늘 아름다운 것은 사랑 때문이다. 이 말이 단순한 관념의 서사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늘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증명하고 증거해야 하는 법이다. ‘애프터썬’은 그 모호하면서도 상세한 기억의 진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지휘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해야 할 일이 많다. 마스터 클래스에 나가 토크도 해야 하고, 줄리어드 음대 같은 곳에 가서 특강도 해야 한다. 집에 돌아와 아내 혹은 남편에게 약도 먹여야 하고, 아이도 종종 학교에 데려다줘야 하며, 그 와중에 틈틈이 개인 작업실에서 작곡도 해야 한다. 오케스트라 수석 바이올리니스트도 바꿔야 하고, 부지휘자도 선임해야 하는데 단원들의 투표로 결정하는 관례가 있지만 개인의 결정을 관철시키기도 해야 한다. 자신을 이끌어 준 스승과 종종 점심을 먹어야 하고, 후원 재단 대표를 맡고 있는 다른 지휘자와도 연을 쌓아 가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일이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지휘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예술은 예술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일 가운데에서 존재한다. 예술은 독자적인 척, 사실은 매우 관계‘적’인 것이며, 그 관계없이 독자‘적’일 수 없다. 예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비예술적인 것과 함께 해야 하며 그 상관관계를 잃은 예술(인)은 결국 실패하거나 낙오할 수밖에 없다. 토드 필드의 역작 ‘TAR 타르’는 음악영화가 아니어서 안심(?)이 되는 작품이다. 지휘자의 얘기라는 작품 광고에 으레 이 영화는 대중들에게는 낯설고 어려운 클래식으로 범벅된, 클래식 클리셰(cliché)로 가득한 작품으로 예상되기 쉽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오케스트라 곡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과 엘가의 첼로 협주곡 정도이다. 그것도 영화 내내 전곡이 연주되는 적은 한 번도 없다. 이 영화의 음악감독인 힐두르 구드나토르는 화려하고 웅장한, 때로는 섬세한 클래식 선율보다는 차라리 음악의 배제, 때론 배경음악을 완벽하게 삭제하는 쪽을 선택한다. 예컨대 이 영화는 158분이라는 비교적 장대한 러닝 타임에 걸맞게 영화 앞단이 비교적 긴 시퀀스로 이뤄져 있는데, 그 시퀀스도 당연히 롱 테이크로 이어지거나 심지어 원 씬 원 컷으로 이뤄져 있다. 오프닝 장면에서의 마스터 클래스 토크 장면은 10분 가까이 이어진다. 여기서 주인공이자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리디아 타르(케이트 블랜쳇)는 자신의 음악 철학을 꽤 자세하게 설명할 기회를 얻으며, 그를 통해 감독 토드 필드는 영화 ‘타르’가 어떤 행마를 이어갈 것인가를 관객들에게 암시해 낸다. 이 토크 장면이 진행되는 순간은, 당연히, 음악이 없다.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오로지 말과 말,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청중의 숨죽인 고요만이 이어진다. 그다음 장면이 더욱 압권인데, 여기에서도 음악은 완벽히 배제된다. 타르는 줄리아드로 장소를 옮겨 소수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열변을 토해 낸다. 왜 음악을 하는가, 음악의 본질은 무엇인가, 음악가가 이뤄야 할 것과 위대한 음악가(예를 들어, 바흐의 음악과 그의 인생을 어떻게 구별해서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해 얘기한다. 이 장면은 아주 긴 원 씬 원 컷으로 이뤄져 있다. 토드 필드의 카메라는 강의장 무대와 객석을 오가며 열정적인, (학생들 시각에서 보면 어쩌면) 매우 독단적인 예술관을 피력하는 타르를 한 번의 컷 없이 뒤좇으며 롱 테이크로 담아낸다. 이 강의는 나중에 타르의 발목을 잡는 ‘사건’이 되는데, 그녀를 둘러싼 성추문 의혹의 주요 쟁점으로 부각된다. 때문에 이 장면 역시 음악이 없는 건 당연해 보인다. 그래서 이 영화가 음악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음악 영화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 ‘아, 이 영화는 클래식 애호가용이 아니군’이라는 생각을 비로소 갖게 만든다. 영화는 점점 더 다른 이야기, 음악을 뛰어넘는 이야기로 비화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야말로 이 영화를 매우 흥미롭게 격상시킨다. 리디아 타르는 클래식 음악계의 유리 천장을 뚫은 인물이다. 특히 여성이 차별받는 지휘자의 세계에서 당당히 베를린 필하모니의 수장이 됐다. 그런데 곰곰이 들여다보면 타르의 여성성, 여성주의의 완성이 그녀를 마에스트로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만은 아니다. 그녀는 음악적 권력을 얻기 위해 남성주의의 스킬을 구사하고 있거나 그것을 병행해 왔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처럼, 클라우디오 아바도처럼 점철된 카리스마와 완벽주의로 단원들을 이끌어가고 있으며, 음악적으로 자신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래서 자신이 완전한 스페셜리스트가 되면 될수록 다른 모든 문제는 주변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여성성은 오로지 그녀가 레즈비언으로 커밍 아웃한 것뿐으로 보이는데, 바이올리니스트 단원이기도 한 파트너 샤론(니나 호스)과의 관계에서도 동반자라기보다는 가부장적 남편의 위치에 서있거나 그러려고 한다. 타르는 둘이 함께 키우는 딸 페트라가 학교 폭력을 당하자, 가해자 학생에게 찾아가 자신이 아이의 ‘아빠’라고 소개하며 윽박지른다. 또 러시아에서 온 새로운 첼리스트에게 눈길을 주고 그녀를 자신의 자서전 출판 기념회가 열리는 미국 출장에도 데리고 다니는데, 이는 당연히 샤론과의 관계에 균열을 발생한다. 가장 큰 문제는 크리스타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 지휘자가 타르에게서 받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자 그녀와의 그간 관계를 부인하거나 관계의 증거를 없애려고 한다는 데에서 벌어진다. 짐작컨대 타르와 크리스타는 한동안 혼외정사의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타르는 자신을 흠모하는 조수인 프란체스카(노에미 멜랑)에게 크리스타와 관련된 모든 이메일을 삭제하라고 한다. 타르는 말한다. “우리가 불필요한 일에 휘말릴 필요는 없잖아.” 물론 그녀로서는 맞는 말이긴 하다. 도이체 그라모폰과의 리코딩 작업이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로지 자기 음악에게만 열중하기에도 시간이 없을 지경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 역시 자신이 그러는 이유를 받아들여야 하며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후원 재단의 대표를 맡고 있는 지휘자 동료 엘리엇 캐플란(마크 스트롱)이 조언을 구하자 ‘남을 베끼려 하지 말고 자신의 것을 완성하려 노력하라’고 말할 만큼 타르는 스스로가 당당하다고 생각한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모든 것을 커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크리스타의 자살을 둘러싼 의혹이 불거지고 타르는 곧 이런저런 법적, 행정적 소환에 직면한다. 리디아 타르는 그 모든 문제를 이겨 내고 도이체 그라모폰과의 실황 녹음을 완성할 수 있을까. 베를린 필하모니의 수석 지휘자(객원 지휘자가 아닌) 자리를 계속 지켜낼 수 있을까. 타르를 둘러싼 모든 추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니다. 토드 필드 감독이 얘기하려는 것은 사안이 지니는 진실의 절대성이나 상대성 같은 해묵은 주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예술의 독자성과 상대성, 그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쉽게 말해, 위대한 예술가는 그가 이뤘거나 이뤄 내고 있는 예술적 성취와, 자신이 갖는 모든 인간적 약점 가운데에서 어느 지점에 서있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자신의 예술을 완성한 아티스트는 수많은 실수, 위선, 오만함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의 얘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술가는 하나만이라도 잘하려 해야 하는가 아니면 모든 걸 잘하려고 노력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며 이는 곧 스페셜리스트여야 하는지, 제너럴리스트여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사고로 연결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더 확장하면 파시스트가 창궐하는 시대에서 예술가(음악과 미술 영화 심지어 정치까지)는 자신의 작품이 지니는 완성도에 치중해야 하는지 아니면 세상과 일상의 일에도 화답해야 하는지의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그 균형은 어디인가. 예술과 삶의 밸런스는 유지될 수 있는가. 과연 예술과 인생의 위대함은 어디에서 찾아지는 것인가. 타르는 어느 날 자신의 작업실 아파트 건너편에 사는 치매 노인이 휠체어에서 넘어지고 바닥에 똥을 싸 사방이 오물 천지가 되자, 그를 간호하는 지체아 딸을 도와준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온몸을 미친 듯이 닦아 낸다. 타르는 그렇게 인생사가 언제 어느 순간에 똥바다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거나 아예 받아들이지 못한다. 타르 역을 연기한 케이트 블랜챗은 이번 작품에서 영화가 지닌 괴력만큼 엄청난 에너지를 소유한 연기자임을 유감없이 입증해 냈다. 그 구구절절하면서도 막대한 양의 대사는 단순히 외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완벽하게 타르란 인물로 자신의 인성 자체를 전환시키지 않는 한 이런 연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카메라는 시종일관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며 블랜쳇의 모든 표정을 담아낸다. 압도적인 몰입감 없이는 그 부담감을 이겨낼 수가 없다. 영화 ‘타르’는 실제로 케이트 블랜쳇을 위한, 블랜쳇에 의한, 블랜쳇의 영화이다. ‘타르’는 오는 3월 12일에 열릴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은 물론 감독상과 여우주연상, 각본상, 촬영상, 편집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 이런 작품을 두고 명불허전이라 부른다. 소름 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