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국내외 모두에서 흥행에 실패한 실사영화 ‘인어공주’는 몇 가지 지점에서 다른 면을 지니고 있다. 그것도 두드러질 만큼 아주 다른데 짐작하는 것과는 달리 인어공주가 흑인이라는 점이 제1의 요소는 아니다. ‘공주=흑인’은 차이라기 보다 비교적 단순한 특징, 캐릭터의 외모 설정에 불과하다. 인어공주가 흑인이기 때문에 내용이 달라지거나 극 전체의 톤 앤 매너가 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냥 피부가 까매서 처음엔 다소 ‘신기하게’ 느껴지다가도 이내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 걸 알게 된다. 이번 ‘인어공주’가 안데르센의 원작이나 1989년에 나온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와는 궁극의 지점에서 각각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1) 원작과는 결말을 완전히 다르게 갔다는 것이고 2) 1989년 애니메이션과는 왕자의 캐릭터가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이번 실사영화에서 왕자는 ‘백마를 탄’ 이미지가 아니다. 그는 다른 선원들과 함께 갑판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백성처럼, 일반 국민처럼 살아가려는, 그래서 ‘보통 사람의 정치학’을 깨달아 가려는 꽤 괜찮은 덕목의 지도자 청년으로 나온다. 심지어 왕자는 그리 잘생기지도 않았다. 외모상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의도적으로 평범한 인물로 그리려 애쓴다. 덴마크 작가 안데르센의 원작은 비극이었다. 이번 실사 영화는 해피 엔딩이다. 인어공주는 원작처럼 물거품이 돼 사라지지 않는다. 원작에서 왕자는 다른 여자(우아한 옆 나라 공주)를 선택해서 인어를 배신하지만 이번 실사에서는 다시 인어공주인 에리엘(할리 베일리)에게 돌아간다. 왜냐하면 다른 여자가 곧 흉측한 문어 마녀 울슐라(멜리사 매카시)인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이건 꽤나 진부한 선택인데다 안데르센이 지닌 잔혹하고 우울한 취향을 ‘배반한’ 것이어서 작품을 완전히 다른 지점에 갖다 놓은 최고의 동력이 된다. 감독 롭 마샬(뮤지컬 전문 감독으로 ‘시카고’와 ‘나인’, ‘메리 포핀스 리턴즈’를 만들어 성공했다. 최고의 작품은 ‘숲속으로’이다. 극영화로는 ‘게이샤의 추억’이 성공했다.)이, 안데르센은 안데르센이고 자신은 자신으로서 자신만의 인어공주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다면 원작과 다른 결말이야말로 그걸 성공하게 한 요인이 된다. 하지만 이런 결말은 이미 1989년의 애니메이션에서 일정 부분 차용해 온 것이어서 그다지 신선한 것은 아니다. 디즈니는 세계 청소년 관객들을 위해 잔혹한 비극의 결말을 ‘결단코’ 피해 가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 점에서 이번 실사 판 ‘인어공주’는 디즈니의 제작 철학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실사영화에서 롭 마샬이 강조점을 두려 했던 것은 인종 문제, 미국 내 인종차별의식에 대한 비판의식을 고양시키려 하는 것 ‘따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흑인 인어공주’는 디즈니의 얄팍한 상술이자 세계 시장을 겨냥한, 일종의 맥거핀(진짜 이야기의 실체를 드러내는 데 있어 그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앞서 전개시키는 가짜 이야기. 트릭.)이다. 디즈니는 의도적으로 논란을 만들어 냄으로써 최대치의 마케팅 효과를 노린 셈이다. 할리우드는 청년 세대들을 겨냥해 혁명마저 상품으로 내다 파는 진짜 장사꾼들이다. 2011년 뉴욕 증권가 월스트리트에서 벌어진 청년들의 격렬했던 시위 ‘오큐파이 월스트리트(Occupy Wall Street)를 점령하라’ 이후에 나온 영화가 제니퍼 로렌스 주연의 ‘헝거 게임’시리즈였다. 할리우드는 좌파나 우파나 가리지 않는다. 돈만 벌 수 있다면 스스로 게릴라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흑인 인어공주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이번 실사판 ‘인어공주’의 주제는 왕자의 대사에서 나온다. 왕자 에릭(조너 하우어 킹)은 뱃머리에서 저 멀리를 바라보며 신하 그림스비 경(아트 말릭)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저 외부로 나아가야 합니다. 외부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 (섬) 왕국이 살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에릭의 왕국은 여왕(노마 두메즈웨니)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데 여왕은 현재 바다의 신 트리톤(하비에르 바르뎀)과 대립해 싸우고 있다. 트리톤은 여왕의 나라에 의해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를 잃었다. 그는 현재 7대양의 바다에 인어공주 딸 7명을 키우고 있으며 그중 막내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인어공주’의 원제는 the little mermaid, 곧 ‘막내 인어’이다.) 영화 ‘인어공주’의 설정, 곧 섬 왕국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미중 G2의 갈등을 의미하며 에릭은 (트럼프처럼) 장벽을 쌓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일국 자본주의나 자국 우선주의에서 벗어나 공생과 연대의 세계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개방만이, 오픈 마인드만이 살 길이라고 그는 확신한다. 그런 에릭에게 적국의 막내 공주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매우 정치적인 승부수에 해당하는 일이다. 영화는 결국 둘이 결실을 맺게 한다. 그건 세계 평화를 이루어 내거나 이루어 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자는 얘기와 동음이의어이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아들이 러시아 푸틴의 딸을 사랑한다면 두 나라는 전쟁을 멈출 수도 있겠다. 실로 동화 같은 상상이지만 그럼에도 흐뭇해지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어공주’의 진짜 주인공은 인어가 아니라 왕자이며 적어도 각각이 아니라 이 남녀 커플 두 명 모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탈(脫) 인종주의가 아니라 탈 패권주의에 의한 세계 평화와 공존이라는 것이 ‘인어공주’의 핵심 메시지이다. 롭 마샬은 뮤지컬의 대가이고 노래와 춤의 연출에 있어서 전문가 중 최상위 급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당연히 ‘인어공주’의 백미는 주인공 에리얼의 노래이다. 할리 베일리의 노래는 이 영화를 두고 벌어진 이런저런 논란과 논쟁을 잠재울 만큼 최고 수준이다. 영화는 별로지만 베일리 노래 하나는 끝내줘, 라는 식이다. 또는 영화도 괜찮은데 정말 노래가 대단해, 라는 평가도 이어진다. 그만큼 할리 베일리의 음성과 노래 실력은 신의 영역이다. 베일리가 워낙 압도적이라 다른 배우들의 안무와 노래는 빛이 나지 않는다. 그럴 바에야 아예 비중을 줄이는 것이 낫다고 롭 마샬은 판단했고 그 대신 만화 캐릭터인 갈매기 스커틀(아콰피나)과 게 세바스찬(데이비드 디그스), 물고기 플라운더(제이콥 트렘블레이)가 바다속 생물들과 합창을 하는 노래 ‘언더 더 씨’에 각을 줬다. 이 영화의 하일라이트에 해당한다. 굉장히 행복하고 유쾌해 보이는 척, 노래 가사는 참혹한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언더 더 씨’는 영화 ‘인어공주’의 모든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에리얼 내 말 좀 들어 봐 / 인간 세상은 엉망이야. / 바다 밑의 삶이 그 어떤 것보다 낫다구.. /.. 너는 육지로 올라가는 걸 꿈꾸지만 그건 큰 실수야…/…. 저 바다 밑 저 바다 밑…/…저 물가에서는 하루 종일 일하지 / 태양 아래의 노예처럼….』
캄보디아계 프랑스 감독 데이비 추가 만든 ‘리턴 투 서울’은 의도한 건지 오해한 건지, 서울과 한국이라는 공간 그리고 거기에 얽힌 시간을 굴절시킨다. 마치 깨진 거울로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보는 느낌을 준다. 데이비 추는 코끼리 엉덩이를 만지듯 한국의 일상을 담아낸다. 시작부터 김추자의 ‘꽃잎’ 같은 노래를 흘린다. 영화 내내 김추자나 신중현 같은 한국의 올드 팝이 사용된다. 영화 전체적으로는 다소 뜬금없거나 지나치게 감독 개인 취향으로 보인다. 데이비 추는 자신 스스로가 인상 깊었던, 자신이 알고 있는 내에서만 한국의 공간을 그려내는데, 그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보다 정확하게는 맞지 않지만 맞지 않지만은 않다. 아마 사람들 눈에 비친 이방인의 삶은 일정 부분 그렇게 왜곡될 것이다. 이국적이고 이색적일 수 있다. 칸 영화제가 이 작품..
올해 실제 나이 77세(1946년생)인 실베스터 스탤론이 극 중 75세 마피아 역을 맡은 국내 OTT 채널 TVING의 파라마운트 시즌 드라마 9부작 ‘털사 킹’은 미국 털사(Tulsa)를 배경으로 한다. 털사는 미국 중남부 오클라호마주의 두 번째 도시로 인구는 40만이 좀 넘는, 인구밀도가 낮은, 미국 기준으로 보면 이른바 ‘깡촌’ 개념의 지역이다. 인디언 크리크족이 카지노를 운영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며, 이 인디언 후예들도 신종 마피아로 불린다. 털사가 있는 오클라호마주는 위로는 캔사스가 있고 아래로는 텍사스가 있는 지역이다. 소위 바이블 벨트에 속한 지역 중 하나인 곳이다. 바이블 벨트는 미국 중남부에서 동남부에 걸친 기독교 지역으로 대체로 보수적이고(공화당, 심지어 트럼프를 찍고) 동성애에 대한 반대론이 강한 지역이다. 미국 최대 도시인 동부 뉴욕이나 서부 LA 등지에 있다가 이곳 털사로 온다는 것은 한 마디로 좌천이나 유배를 뜻한다. 주인공 드와이트 데이빗 맨프레드(실베스터 스탤론)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뉴욕 마피아 보스 피트 인버니치(A.C.피터슨)의 아들 치키(도미닉 롬바르도치)가 1997년에 저지른 살인사건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25년을 복역한 후 만기 출소한다. 조직 보스 피트와 드와이트는 두목-부하관계라기보다 절친 사이다. 드와이트는 굳게 입을 다문 채 25년을 버틴다. 조직의 비밀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함구한다. 그러나 인비니치 패밀리는 감방에서 돌아온 그를 애물단지로 여긴다. 그냥 두자니 이제 실질적인 보스가 된 치키에게 걸리적거릴 것이고, 버리거나 처치하자니 조직의 룰이나 의리상 그럴 수가 없다. 새 보스 치키는 그에게 털사로 가라고 명한다. 거기서 새롭게 조직을 일구고, 개척하며 살라는 것이다. 이제 드와이트는 인비니치 패밀리의 털사 지부장이 된다. 드와이트는 거칠고 폭력적이지만 나름 지혜롭고 현명한, 게다가 25년의 복역 기간 중 책을 엄청나게 읽어서 꽤 유식하고 지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샐러리맨의 죽음’을 쓰고 마릴린 몬로와 살았던 미국 최고의 희곡작가 아서 밀러를 설명하면서 헨리 밀러와는 다르다는 점을 이야기하는데(헨리 밀러가 쓴 건 ‘북회귀선’이야 라고 말하면서), 털사에서 조직하게 되는 신종 단원 중 그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의 운전기사가 된 25세 흑인 청년 타이슨(제이 윌)은 물론 대마초 판매상 보디(마틴 스타)조차 우드스탁이란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세상은 무식해졌다기보다 바뀌었다. 25년이라는 큰 강이 생긴 것이다. 마피아 깡패 드와이트가 겪는 털사의 삶, 신천지의 인생이 격랑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드와이트는 옛날 방식으로, 25년 전에 맺었던 인간관계의 방식으로(그는 주로 현금을 쓴다) 자기만의 마피아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털사 킹’은 9부 에피소드 내내 다양한 사건과 상황들을 전개시키며 보는 사람들을 TV 앞에 바짝 붙여 앉힌다. 로맨스도 비교적 상당한 분량으로 나오는데, 이 늙은 마피아는 스테이시라는 미모의 중년 여성(안드레아 새비지)을 사귀지만 끝은 그렇게 좋지가 못하다. 그녀는 에피소드 내내 드와이트 옆에서 묘한 관계를 맺는다. 연방 기관 AFT(Bureau of Alcohol, Tobacco, Firearms and Explosives :미국 주류 담배 화기 단속국) 요원인 여자가 남자에게 끌리는 이유는 그가 자신과 같은 처지이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잘 나가던 요원이었던 여자는 9·11의 트라우마를 겪었고 이른바 설리 사건(미국에서 항공기가 허드슨강에 불시착한 사건) 때 큰 실수를 해 털사로 밀려온 인물이다. 스테이시는 드와이트와 동침한 다음 날 그에게 나이를 묻는다. 드와이트는 그녀에게 그렇게 직접적으로 묻지 말고 JFK가 암살됐을 때 몇 살이었냐는 식으로 물어보라고 한다. 그때 몇 살이었냐고 여자는 다시 묻고, 남자가 고등학생이었다고 하자 여자는 혼비백산 바로 옷을 챙겨 입고 호텔 방을 나선다. 나가면서 여자는 이렇게 소리친다. “난 당신이 꽉 찬 쉰다섯인 줄 알았다고!” 드와이트가 정작 마음을 기울이게 되는 여성은 스테이시보다는 나이가 좀 더 든 마가렛 드베로(다나 델라니)라는 인물이다. 목장의 여주인이고 아마도 이번 시즌1보다는 시즌2에서 드와이트를 위해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목장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드라마 내내 늙은 백마 한 마리가 나온다. 파일럿이란 이름의 이 말은 종종 목장에서 탈출해 말발굽 소리를 또각거리며 시내 곳곳을 다닌다. 파일럿은 늙어서 소용없는 말이지만 여전히 품위 있는 자태를 지녔다. 새벽, 차가 비어 있는 거리에서 말갈기를 휘날리며 걸어가는 파일럿의 모습은 주인공 드와이트의 모습과 대구(對句)된다. 드와이트 역시 파일럿처럼 늘 말갈기를 다듬으며(정장으로 빼입으며) 다닌다. 그 역시 외롭고 늙은데다 쓸모가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마피아 패밀리 중간보스로서)품위가 있고 매력적이다. 여자들이 드와이트에게 빠지는 이유이다. ‘털사 킹’은 그래서, 마피아 이야기인 척 마피아 이야기가 아닌 드라마이다. 드와이트는 털사의 터줏대감인 조직 폭력배로 바이크 갱단 카올란왈트립 일당(리치 코스터)과 일전을 벌여야 한다. 그 와중에 AFI와 FBI 양쪽의 추적을 받는다. 왈트립의 수하로 들어간 지역 경찰까지 그를 귀찮게 한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 드와이트가 회복하거나 되찾는 것은 이들을 물리치고 새롭게 건설하는 조직 패밀리 ‘따위’가 아니다. 그가 털사에서 새롭게 얻는 것은 가족관계 같은 파트너들, 젊은이들이다. 드와이트는 실제로 자신의 딸을 되찾기도 한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딸 티나는 오랫동안 범죄자인 그를 증오해 왔지만 결국 아빠 곁인 털사로 오게 된다(이 부분이 다소 억지스럽다). ‘털사 킹’은 갱스터 드라마가 아니다. ‘털사 킹’은 갱스터 드라마인 척, 갱스터 드라마를 변주한 가족 드라마이다. 9개의 에피소드를 흥미 깊게 혹은 주의 깊게 지켜보게 되는 이유이다. ‘털사 킹’은 고령화 사회를 우회적이면서 긍정적인 시선으로 그린 작품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에는 많은 사회적 정치적 메타포가 담겨져 있는데, 드와이트와 운전기사 타이슨의 관계를 통해 신구세대 갈등과 흑백 갈등 문제를 이야기하곤 한다. 세상의 어느 사회처럼 기이하게 부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미국사회에 대해 한 늙은 현자의 안타깝지만 따뜻한 시선을 담아 내고 있다. 드와이트는 자신이 머무는 호텔에서 어두워지는 창밖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린다. “피투성이가 됐지만 패배하진 않았어. 다운이 됐어도 여전히 난 링 위에 서있어.” 미국이 갖고 있는, 올드하지만 여전히 의미있는 자본주의적 가치, 인간이 지니고 있어야 할 존엄성과 품격을 말한다. ‘털사 킹’의 매력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대본, 시나리오가 돋보인다. 현재 미국 할리우드의 가장 잘나가는 시나리오 작가 테일러 쉐리던(‘시카리오’, ‘로스트 인 더스트’, ‘윈드 리버’)이 전편을 썼다. 텍사스 출신인 그는 털사가 고향인 것처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려 낸다. 사실 이 ‘털사 킹’의 제목은 아벨 페라라 감독이 1990년에 만든 ‘킹 뉴욕’에서 가져 온 것이다. ‘킹 뉴욕’은 잔혹했다. ‘털사 킹’은 인간적이다. 세월이 바뀐 만큼 마피아 두목도 폭력배로서만으로는 살아가기 힘든 법이다. 그건 자본주의가 점점 인간적인 얼굴이 돼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마피아적 삶과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것에는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전설의 영화 ‘대부1·2·3’ 시리즈가 오랜 시간 늘 해왔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넷플릭스 신작으로 제니퍼 로페즈 주연의 영화 ‘내 이름은 마더’에 대해 쓰는 이유는 100퍼센트 순전히, ‘영화는 이렇게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 반면교사의 지점을 공유하기 위해서이다. OTT 넷플릭스에 탑재된 수백 수천 편의 영화 가운데 얼마나 ‘사소한’ 작품들이 많은지(영화는 좋은 영화인지 혹은 나쁜 영화인지로 구분되지 않는다. 다만 사소한 영화인지 아닌지로 나뉠 뿐이다)를 유감없이 선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온통 클리셰(clich) 덩어리이다. 설정 자체가 말이 안 되거나 무리한 것이다. 그리고 앞뒤가 안 맞는다. 액션은 이런저런 영화에서 온통 다 끌어다 쓴 것이거나 익숙한 장면들을 이어 붙인 것들이다. 가장 최악인 것은 정치적 올바름과 젠더 이슈에 대한 강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럴 경우 자..
극장에선 조기에 종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영화 ‘무명’이 알 만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모았던 이유는 1930·40년대의 이야기를 다뤘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때가 지금보다 훨씬 멋있었다. 시대도 그랬고, 예술도 그랬다. 패션은 더더욱. 무엇보다 사람들이 멋있었다. 저항할 줄 알았고, 그 와중에 즐길 줄 알았으며, 반드시 사랑들을 했다. 그것도 모두 치열하게. 지금 시대에는 사라진 단어, ‘혁명’과 ‘사랑’이 이 시대에는 존재했다. 영화 ‘무명’이 다루는 이야기는 바로 거기에 있다. ‘무명’은 1941년 상하이에서 암약한 제5열(상대 진영 내부나 후방에서 암약하는 스파이 조직)에 대한 이야기이다. 복잡한 것은 제5열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나 셋이라는 것이며 혹은 제5열 안에 또 다른 제5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중간첩 혹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사람..
사랑과 고고학은 멀리 있는 듯 사실은 가깝게 있는 개념이다. 고고학하면 카르멘 로르바흐가 쓴 ‘나스카 유적의 비밀’이나 아놀드 C.브랙만의 ‘니네베 발굴기’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페루 나스카 평원에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봐야만 전체가 보이는 물경 45m 안팎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고고학 하면 이런 걸 발견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혹은 앗시리아의 옛 수도인 니네베에 묻혀 있는 4000년 전, B.C.2000년 전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것이거나. 고고학자가 되는 것은 나름 매우 매력적인 일이다. 그래서 인디아나 존스처럼 세계 오지를 떠돌며 인류사의 흔적을 뒤좇고 온갖 모험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다. 시몬 스톤의 2021년 넷플릭스 영화 ‘더 디그’의 주인공 바질 브라운(랄프 파인즈)처럼 고고학자는 끊임없이 파고 또 파고, 쓸고 닦고, 비질과 세척을 반복하는 사람이다. 고고학은 생각지도 못한 예상 외의 ‘막’노동을 요구하며 그러면서도 지질학 같은 별도 학문을 병행시킨다. 고고학자가 된다는 것은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도무지 스윗하지가 않다. 그러기는커녕 이만저만 고생을 시킨다는 면에서 고고학과 진배없다. 사랑의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 그 진실의 땅을 파고 또 파고 또 파게 만든다. 그래서 간신히 뭔가 하나를 발굴했다고 생각하면 이번엔 그것의 겉면을 솔로 빗겨내고 다듬는 과정에서 손상을 입히기 십상이다. 아니 애초부터 수백 수천 년을 땅의 어둠 속에 묻혀 있다가 갑자기 빛을 받은 유적, 곧 사랑의 본질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 가치가 떨어진다. 고고학의 유적이 그렇고 남녀 간의 사랑이 그렇다. 어찌 보면 그냥 파묻혀 있는 게 나은 셈이다. 주인공 영실(옥자연)은 고고학도이다. 순전히 밥벌이를 위해 고등학교 체험 실습 특강 같은 걸 하는데, 거기서 그녀는 어린 학생들에게 자신의 직업에 대해 사명감만 있고 미래 비전은 없으며 절대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가능하면 고고학을 전공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영실은 지금 막 한 남자와의 기이한 동거를 끝내려고 한다. 학교 선배인 듯 보이는 남자는 고고학이라는 학문적 관계와 남녀 간 육체적, 정신적 관계가 혼재된 사이의 상대이다. 당연히 서로가 서로에게 지쳐 있는 상태이고, 남자에게 영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은 ‘이제 그만 내 집에서 나가 줘’이다. 아니면 언제쯤 나갈 거냐고 묻거나.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전셋돈도 자신이 마련했으니, 상대가 나가야 하는데 이 남자 도통 급할 게 없는 태도이다. ‘아 나간다니까’가 그의 말버릇이다. 그런 남자와 좁은 공간에서 같이 살면서 밥도 같이 먹고 샤워도 번갈아 하며, 빨래도 같이해 개어 주기까지 하면서 마치 오래된 부부처럼 혹은 연인처럼 살아가지만, 영실의 일상은 늘 살얼음판이다. 뭔가에 집중하고 자신을 정비해 나갈 수가 없다. 사람을 잘못 만나서 이렇게됐다기 보다는 사람을 만나 지내다 보면 이렇게 된다는 걸, 사랑은 영원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 이 지경이 됐다. 그런 영실은 또 한 번의 연애를 준비한다. 음악을 하는(아마도 방송음악이나 영화음악을 하는 것 같은) 인식(기윤)이라는 남자이다. 인식은 영실에게 어떠한 얘기를 듣더라도 그녀와 끝까지 함께 할 것이며 그녀를 끝까지 지켜줄 거라고 말한다. 영실은 반신반의 하지만, 연애와 사랑이 지니고 있는 선의를 믿고 과거의 남자, 과거의 관계에 대해 알려 준다. 사람이 사는 건 이렇게 저렇게 ‘스몰 월드’인지라 둘이 연결된 이런저런 사람을 통해 인식도 영실이 학교 시절 누구와 어떻게 만나고 어떤 관계를 만들며 살았는지 듣게 된다. 영실의 남자관계가 자유분방했는지 방종했는지 아니면 문란했는지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법. 상대를 하나의 인격체로 얼마나 존중하는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사람들은 의외로 많은 사람과 연애를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런 감정을 교류하거나 그래서 때론 가벼운 육체관계를 맺거나 잠깐이라도 사귀게 된다. 사람들은 스스로들 얘기를 안 하고, 감춰두고, ‘발굴되지 않게끔’ 땅속 깊이 묻어 둬서 그렇지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헤어짐을 반복한다. 인식은 영실을 8년 동안 쫓아다니며 들들 볶는다. 다른 남자를 입에 올리며 그 남자와 잘 때는 어땠느냐 혹은 그 남자한테도 이랬느냐는 둥 천박하고 상투적인 질문 고문을 퍼부어 댄다. 그러고 나서 미안해하기를 반복하고 또 조금 지나서는 온갖 꼬투리를 잡아 대며 영실을 못살게 군다. 영실은 그런 상황을 견디다 견디다 못해 인식을 떠나지만, 종종 전화로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서 섹스해달라는 남자의 요구까지는 거절하지 못한다. 다시는 안 가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영실은 인식을 완벽하게 떨궈 내는데 늘 실패한다. 그것이 8년이 걸린다. 사랑은 고고학의 비질처럼 오랜 시간 살살 다뤄야 한다. 그래서 얻어 내는 유물은 둘 관계의 사랑이 지닌 본체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웬걸 결국 그렇게 어렵게 찾아낸 것은 자기 자신, 곧 자아이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애’라는 위대한 진실의 유물이다. 다른 관계들을 일시적이나마 반복적으로 계속 밀어내면서라도, 자신을 온전히 지켜야만 영원한 사랑을 해 낼 수가 있다. 사랑은 남자나 여자 같은 상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하는 것이다. 영실이 그걸 깨닫기까지 실로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물경 163분 동안 줄곧 목도하게 되는 인식의 광적인 집착, 그 야비한 행태 때문에 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쪼그라든다. 사랑이 지닌 그 비루함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지긋지긋해지는 마음이 된다. 인식 같은 남자를 만나면 후미진 골목길에서 흠씬 패주고 싶지만, 그런 인식의 모습이 우리의 평균치 남성들의 모습과 다름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그래서 역설적이다. 절망적인데 반대로 어떻게든 자신을 되찾아 가는 영실의 모습,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아를 회복해 가는 여자의 모습을 통해 밝고 희망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실제로 영실이 자립을 시도해 가는 모습은 대체로 밝은 야외이다. 친구나 선배와 카페 테라스 같은 데서 커피를 마시거나 호감을 갖게 된 어떤 남자(이 남자는 발굴 현장의 인부인데 조경 일을 하기도 한다)의 나무 재배장 같은 곳에서 얘기를 나눈다. 인식을 벗어나면 영실의 삶을 비추는 조명은 환해진다. 내가 없는 사랑은 없다. 나를 지키지 못하면 상대와의 사랑을 이어 나가기가 힘이 든다. 변하지 않는 사랑도 없다. 내가 변하고 그렇게 변하는 나를 지키면서 변화해 가는 상대를 인정하면, 비교적 지속적인 사랑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무엇보다 사랑이 영원할 수 있다느니 반드시 영원해야 한다느니 하는 강박에서 제일 먼저 벗어 날 수 있어야 한다. 감독 이완민이 남자 인식의 모습을 통해 가장 말하고 싶은 부분일 것이다. 사랑은 고고학이다. 끈질기고 인내심이 강한 자, 자기와의 싸움에 능한 자만이 유적, 사랑의 본질을 발굴한다. 감춰진 진실이다.
다소 으쓱대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넷플릭스 8부작 드라마 ‘외교관’은 이런 부류의 영화, 곧 전문가를 다루는 내용의 작품에 있어 미국, 할리우드가 앞서도 한참을 앞서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여기 나오는 배우들을 실제 외교 현장에 데려다 놓아도 그리 어색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캐릭터 하나 하나가 정교하며 이야기가 갖는 리얼리티가 높다. 이런 부류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최고 급으로 분류되는 영국 드라마 ‘이어즈 앤 이어즈(Years and years)’ 이후 또 한편의 탁월한 국제정치 시즌 드라마가 나온 셈이다. 일단 이런 저런 설정이 현재의 국제 정세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들로 채워져 있다. 무엇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야기가 빈번하게 나오며, 미-러시아의 군사적 갈등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핵심 소재로 등장한다. 여기에 급박한 중동 정세(이란과의 오랜 적대 정책)가 오버랩 되고, 아프간에서 친미국적 활동을 한 사람들을 구해 오지 못한(사실은 구하지 않은) 바이든 정부의 의도적인 외교 참사 같은 것이 여주인공의 행동 동기의 배경으로 자리한다. 잉글랜드로부터 분리 독립하려는 스코틀랜드 및 북아일랜드의 정치상황도 매우 중요한 모멘텀으로 작동한다. 핵 전쟁에 대한 위기감, 러시아가 전술핵 정도는 별거 아니라며 언제든 쏠 수 있을 것이는 발언과 진술 등등은 기본 메뉴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영국의 전함(戰艦)이 정체 모를 미사일 공격을 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불시의 공격으로 영국의 장병 41명이 사망한다. 영국은 이 미사일이 이란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란은 온갖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는 미국을 우회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비열하게도 영국에게 테러를 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그건 미국 백악관도 조심스럽게 동의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중동 전문가이자 뛰어난 현장 요원인 케이트(케리 러셀)가 이런 상황에서 레이번 대통령으로부터 뜻하지 않게 신임 주런던 미국 대사로 발령받는 이유다. 상대가 이란이니 만큼 급한 불을 끄라는 얘기인 셈이다.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자 전문 외교관인 핼(루퍼스 스웰)과 런던에 오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양 불편해 한다. 외교가(街)가 아닌 아프가니스탄에 있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는 런던에 오기 전 카불로 떠나기 위해 막 짐을 싸던 중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극중 내내 파티용 드레스를 입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고 늘 구두를 벗어서 들고 다닐 정도다. 무엇보다 케이트는 남편 핼과 이혼을 준비 중이다. 그런데 정작 레이번 대통령은 케이트를 차기 부통령 후보로 고려 중이다. 현 여성 부통령은 남편의 부패 스캔들이 터지기 직전으로, 사임이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핼은 부통령이 될지도 모를 아내 때문에 혹은 아내를 위해서 이혼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그게 케이트의 정치생명을 위한 것인지, 자신의 정치적 재기를 위한 것인지 다소 모호하다. 케이트에게는 이란에게 대대적인 보복 공습을 생각하는 영국 여론을 달래는 것이 1차 과제이다. 이란이 공격했다는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사일 공격의 주체, 국가 혹은 테러 집단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도 중요한 임무이다. 잘못하면 자칫 엉뚱한 나라를 상대로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게 만약 이란이라면 미국으로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뜩이나 어려운 중동 정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와중에서 또 하나의 국제적 악재를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 영국 총리 니콜이 기름을 붓는다. 그는 정치 지도자로서는 용의주도하지(외교적이지) 못하게, 장병 유가족들 앞에서 이란이라는 국가 이름을 언급하며 피의 보복을 약속한다. 이란과의 전쟁은 일촉즉발 상황에 빠진다. 케이트는 영국의 외무 장관 데니슨(데이비드 기아시)과 교묘하게 협력하며 미영 양국의 강경 노선을 완화시키려 한다. 이 와중에 둘은 주런던 이란 대사로부터 테러의 배후에 러시아가 있고, 용병 군사조직인 ‘렌코프’가 동원됐다는 기밀을 입수한다. 이때부터 상황은 일파만파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기 시작한다. 이제는 상대가 핵 전쟁을 마다 않는 푸틴의 러시아이기 때문이다. 케이트와 데니슨 장관, 교활한 외교적 술수로 유명한 남편 핼, 케이트의 공관 차석인 스튜어트(아토 에산도흐) 그리고 그의 비밀 애인이자 공관 내 CIA 지부장인 에이드라 박(알리 안)은 러시아와의 전면전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그 와중에도 영국 총리 니콜은 이름도 모르는 러시아 한 지역에 대규모 공습을 가할 계획을 세운다. 총리는 스코틀랜드 보궐 선거의 결과로 분리 독립 운동이 거세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대 러시아 전쟁은 다분히 국내 정치용인 면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의 미사일 테러가 정말 렌코프 조직이 일으킨 것이냐는 점이다. 영국과 미국의 동맹 외교는 중차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총 8부작의 결말은 실로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국제 외교와 세계 전쟁에 있어 진짜 적은 누구인가. 어리숙한 정치인들은 외교적 언사를 마다하고 주적(主敵)을 함부로 입에 올린다. 이들이 국익,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데 있어 그 행동 폭을 스스로 좁히는 우를 범하는 이유다. 미국의 국무장관인 게넌(미구엘 산도발)은 영국 총리가 주선한 디너 파티에서(이날 게넌 장관은 니콜 총리가 제안한 리비아 내 렌코프 조직을 제거하는 군사 작전을 거부한다) 아랍 속담을 들먹이며 이렇게 말한다. “제일 좋은 것은 진실을 알고 그걸 말하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진실을 알아도 그냥 야자수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케이트는 강경 영국 총리 옆에 서려는 레이번 대통령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 “정치는 늘 49대 51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주인공 케이트는 한때 전설의 외교관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대사의 ‘부인’이 된 남편 핼과의 사이에서도 외교적(개인적)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케이트는 핼이 자신을 부통령으로 만든 후 막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고 의심한다. 그녀의 그런 생각은 일종의 합리적 의심이다. 그러나 중동을 누비며 같이 활동했던 일이 케이트로 하여금 핼과의 사이를 애증의 골짜기로 밀어 넣는다. 핼은 그녀의 정치적 경쟁자이자 동반자이다. 마치 그건 국가적 동맹 관계와 비슷한데, 영국 총리 니콜은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미국과 손을 잡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 반면에 미국과 등을 지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고.” 레이번 대통령은 영국과의 전통적인 동맹을 운운하는 것에 대해 ‘초등학교 10살 때 했던 약속 같은 것’이라고 경멸한다. 외교를 모르는 인간들이나 동맹을 찾는다는 것이다. 기이하게도 미국 드라마이지만 ‘외교관’은 지금 우리가 처한 국제 정세와 외교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뿐 아니라 어느 국가의 정치외교 상황에도 빗댈 수 있는 보편적인 스토리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야말로 이 드라마의 미덕이다. 누구에게나 반면교사가 되는 드라마라는 말이다. 미숙한 외교 행정으로 빈축을 사고 있는 국가들에겐 꽤 괜찮은 국제정치 교과서가 될 수도 있겠다. 드라마가 현실을 너무나 잘 그리면 종종 그 현실이 갖고 있는 문제의 해법까지도 찾아 내는 경향을 보인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배우라는 이야기는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서였다. 영화 ‘존 윅’ 시리즈의 처음 설정은 그렇게 단순하고 진부한 것이었다. 미스터 존 윅(키아누 리브스)은 전설의 킬러였다. 그는 정말로 무지막지하게 사람을 많이 죽였는데 어느 날 이런 남자라면 늘 그렇듯이 착한 여자를 만나고 개과천선한다. 그러나 그 천사 같은 아내가 강아지 한 마리를 남기고 병으로 죽는다. 그래도 조용히 살려고 했다. 그런데 동네 건달들이 애지중지하는 강아지를 죽인 것이 화근이 됐다. 미스터 존 윅은 다시 ‘업계’로 돌아온다. 이후 그는 온갖 음모와 살해 위협에 시달린다. ‘존 윅 1·2·3’ 편은 대체로 그런 얘기였고, 그래서 당연히 서사는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죽고 죽이는 액션만이 중요해 보이는 영화였다. 그런데 미스터 존 윅이 생존해야 하는 이유가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였다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게 이제야 밝혀진다. ‘존 윅 4’는 킬러들의 세계에조차 지금과 같은 ‘극히 계급적인 사회 구조=시스템=강고한 조직의 규율과 원칙’이 존재하며, 그것을 지키거나 혹은 위반하는 데 있어서는 확고한 명분이 있어야 하고, 또 그 명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의 철학까지 갈고 닦아야 만이 ‘진정한 킬러=이 세상의 진정한 생존자’가 된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한다. 미스터 존 윅을 둘러싼 업계에는 ‘최고회의’라는 것이 존재하며 모든 킬러는 그 밑에 있고, 그 킬러들의 조직 단위는 패밀리이다. 존 윅은 어떤 패밀리에도 속하지 못한(예전엔 루스카라는 러시아 패밀리 소속이었지만 현재는 파문당한 상태) 프리랜서 킬러일 뿐이다. 최고회의가 제거하려는 것은 존 윅이라는 인물보다는 존 윅이라는 전설 그 자체이다. 존 윅은 이번 4편에서 자신을 제거하려는 최고회의와 그로부터 막강한 지지를 받는 그라몽 후작(빌 스카스가드)의 잔혹한 위협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라몽 후작에게 1:1 결투를 신청해야 하며, 또 그러기 위해서는 루스카 조직을 이끌고 있는 카티야(나탈리아 테나)로부터 패밀리 멤버 자격을 다시 따야 하는데, 또 한 번 또 그러기 위해서는 클럽을 운영하는 악당 하르칸(스콧 앳킨스)을 죽여야 한다. 하르칸을 처리하지 못하면 그라몽 전에 카티야로부터 죽임을 당할 것이다. 여기에 그라몽이 고용한 또 다른 전설의 맹인 킬러 케인(도니 옌·견자단)이 존을 추격한다. 또 여기에 현상금 사냥꾼인 ‘노바디’(세미어 앤더슨)의 추적까지 이어진다. 쫓는 자만 있으면 그나마 얘기가 단순한데, 존 윅을 돕는 자까지 여럿이 등장한다. 일본 오사카의 콘티넨탈 호텔 매니저 시마즈(사나다 히로유키)가 그를 위해 목숨을 걸고, 뉴욕의 콘티넨탈 호텔을 없앤 것에 분노한 매니저 윈스턴(이아 맥쉐인)은 자청해서 존 윅의 후원자가 된다. 뉴욕 홈리스의 왕(로렌스 피쉬번)은 존 윅에게 무기와 최고급 방탄 슈트를 제공한다. ‘존 윅 4’에는 이런 부류의 영화로는 잘 차용하지 않는 과거 할리우드 고전이나 명작들의 장면들이 오버랩된다. 오프닝 장면에서 존 윅이 사막을 가로지르며 말을 타고 총격을 벌이는 모습은 영락없이 데이빗 린 감독이 1962년에 만든 피터 오툴 주연의 ‘아라비아 로렌스’의 시퀀스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맹인 킬러 케인의 모습은 일본의 60년대 영화 ‘자토이치’의 캐릭터에서 가지고 왔으며, 존 윅이 클럽 악당 하르칸과 마주 앉아 카드를 칠 때 케인과 노바디가 옆에 앉아 서로를 겨누고 있는 장면은 쿠엔틴 타란티노가 만든 1992년 영화 ‘저수지의 개들’에 대한 오마주이다. 하르칸과 킬러 셋은 영화 ‘저수지의 개들’의 남자 넷처럼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다. ‘존 윅 4’의 이야기 구조는 결국 1:1 결투를 벌이는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서부극의 그것을 따라간다. 거기에 일종의 아시아적 생산 양식에 해당하는 무협의 서사 구조를 얹히려 한다. 최고회의를 구성하는 패밀리의 존재는 무림의 9대 문파를 닮았고, 이른바 강호의 규칙과 정파(政派)와 사파(邪派)의 논리 등을 끌어다 붙인다. 영화 속에 유난히 동양사상 경구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다. 악당인 그라몽조차 이렇게 말한다. “한 가지를 대하는 태도가 만 가지를 대하는 태도이다.” 일본 사무라이 친구 시즈마는 존 윅의 무모한 삶을 걱정하며 말한다. “좋은 죽음은 좋은 인생 뒤에만 오는 법이네.” ‘존 윅 4’의 액션신들은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최고봉이다. 존 윅은 6시 3분, 일출 시각에 결투 장소인 사크레쾨르 대성당에 도착해야 하는데, 시간을 못 맞추면 패배한 것으로 인정되고 그건 곧 자신과 윈스턴 등등 모두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라몽 일당은 존 윅을 시간 내에 오지 못하도록 파리 시내와 몽마르트르 계단에 엄청난 킬러 군단을 깔아 놓는다. 존 윅이 사크레쾨르 성당에 가기 직전 폐가에서 일군의 킬러들과 근접전을 벌이는 장면은 천정이 없는 세트장에서 부감 샷으로 찍은 것인바, 대체로 원 신 원 컷의 롱 테이크로 찍었다. 그 액션을 디자인한 상상력과 기술, 스턴트의 개인기가 혀를 내두르게 한다. 몽마르트 언덕을 오르는 계단에서 벌어지는, 총격과 근접 무술이 배합된 액션신은 향후 수십 년간 나올까 말까 한 고난도의 기술력을 선보인다. 액션의 정교함도 정교함이지만 그걸 그럴듯하게 찍어 내는 촬영술도 현대 영화의 테크놀로지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가늠하게 만든다. 감독인 채드 스타헬스키는 스턴트 배우 출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윅 4’의 톤앤매너는 끝나지 않는 싸움에 처한 한 킬러의 누적된 피곤함과 그 쓸쓸함에 대한 것이다. 존 윅은 이번에 유난히 힘들고 지쳐 보인다. 그는 자신의 묘비명에 ‘다정한 남편’이라 적히길 원한다. 사람의 야망은 그 사람의 가치를 넘어서서는 안 되는 일이다. 미스터 존 윅은 그걸 깨달은 지 오래다. 이번 ‘존 윅 4’에 나오는 대사이며 주제이다.
영화 ‘길복순’에서 의외로 놀라고 좋았던 것은 (근데 이건 감독을 둘러싼 기이한 논쟁들, 이른바 그의 ‘일베 성향’을 둘러싼 의혹들에 비하면 이상하다고 할 정도) 가상의 킬러들 세계조차 철저한 자본주의 양극화의 구조로 짜여져 있다는 설정이다. 이건 꽤 괜찮은 사회과학적 사고이다. 영화는 이런 패턴의 세계관을 내세우면서 동시에 다소 비뚤어진 지역 감정과 왜곡된 역사의식의 시한 폭탄을 숨겨놓음으로써 논란을 자초했다. 근데 그건 좀 심하게 이상한 일이다. ‘길복순’은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위험성도 지니고 있는 바, 이건 순전히 감독 리스크, 곧 변성현 리스크에 따른 것이다. 변성현은 어쩌면, 세상을 보는 시선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올바른 선생이 없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돈된 역사의식의 가르침이 중요한 이유다. 변성현 리스크는 영화..
미안한 얘기지만 새 영화 ‘나의 연인에게’는 달콤쌉싸름한 연애 얘기가 아니다. 시대가 어두운 만큼 사랑스러운 영화를 기대하는 심리가 높겠지만, 이 영화 ‘나의 연인에게’를 지난 2022년 베를린영화제가 괜히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한 것이 아니다. 단순한 멜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처절하고 비극적이면서도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다. 영화는 살짝 멜로영화의 고전 격인 ‘러브 스토리’(1971) 처럼 시작하는 척, 사실은 드니 빌뇌브의 역작 ‘그을린 사랑’으로 전개되다가 폴 그린 그래스가 만든 ‘플라이트93’의 결말을 향해 가되 그 시선은 친미나 반미가 아닌 중립적인 노선을 취하려 애쓴다. 영화 ‘나의 연인에게’는 매우 복잡한 시선과 감정을 갖게 되는 영화이다. 무엇이 옳은가. 사랑은 옳아야 하는가. 옳지 않아도 사랑을 하면 괜찮은 것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