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을 포기하고 넷플릭스로 곧장 직행한 아르헨티나 출신 세계적 감독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의 역작 ‘더 원더’는 몇 가지 키워드를 이해하면 훨씬 더 흥미로울 수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1860년대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이런 얘기를 왜 지금 하려 했는지 그 현재성이 느껴진다. 더 나아가 기이하게도 우리는 이 영화가,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보편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키워드는 영국의 산업혁명, 아일랜드 대기근 그리고 크림 전쟁이다. 산업혁명은 대체로 1760년부터 1840년에 이르기까지 진행됐다. 방직기계의 발명으로 공장마다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한 분야의 발전이 연관 산업으로 이어져 경제 시스템의 근대화, 자본주의 경제의 초석이 만들어졌다. 사회는 혁신되었을지 모르지만 빈부격차는 극단적으로 벌어지고, 10세 미만의 아동들이 공장 노..
영화 ‘에브리띵 윌 체인지’의 정체는 극 후반부에서 드러난다. 이건 다큐인가 극영화인가, 환경영화인가 SF인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다가 확연한 깨달음이 오는 순간이 도래한다. 이건 2054년의 세 청년이 해킹을 통해 2022년의 우리에게 영상 자료를 하나 보낸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미래에서 온 영화이다. 미.래.영.화.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미래에서 보내 온 영화라는 설정이 아니라, 단순히 그런 얘기가 아니라, 정말 미래 세계의 누군가가 이걸 보낸 것일 수도 있겠다는. 그런데 기껏해야 32년밖에 안 남았다. 32년 후를 살아가고 있는 세 친구, 곧 남자 둘과 여성 1명은 세상 바깥의 모습은 알지 못한 채 인공 지능과 안구에 장착된 인터넷 베이스의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살아간다. 인간의 생체와 기계가 결합된 트랜..
공포영화는 세상을 읽는 척도다. 공포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 그 표현 수위, 통용되는 방식, 관객의 수용 태도 등등은 그 사회가 지금 어떤 문제의 지점을 관통해 내고 있는 지를 가늠케 한다. 그래서 한때는 공포영화의 그런 진지한 태도가 싫다며 팝콘형 공포영화, 곧 그냥 즐기는 오락 형 공포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스크림’이나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등이 그랬다. 그러나 공포영화는 곧 스스로 자기 길을 찾아 본래적 역할, 곧 사회의 메신저 역할을 해내곤 한다. 영화를 보면 세상이 보인다는 말을 조금 좁게 치환시키면 공포영화를 보면 세상이 잘 들여다보인다가 된다. 감독부터 나오는 배우 대다수가 거의 ‘듣보잡’인 미국 영화 ‘스마일’이 쥐도 새도 모르게 10만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홀연히 극장에서 사라진 것은 마치 공포영화 자체가 그렇듯, 소름 끼치는 일이다. 게다가 절대적 비수기라 불리는 기간에 벌어졌던 일이다. 영화 ‘스마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걸 보는 우리에게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스마일’은 극도의 편집증에 시달리던 사람이 주인공 앞에서 깨진 유리로 목을 그어 자살했는데 그 순간 얼굴엔 기이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그 표정을 목격한 주인공이 어마어마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는 설정이다. 문제는 주인공 자신도 곧 이유를 알 수 없는 편집증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고 그런 증상이 여기저기서 벌어진다. 결국 다들 목을 긋거나 총을 쏘거나 하는 등등 갖가지 방식으로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짧게는 나흘, 길어 봤자 일주일 상관에 벌어진 것들이어서 주인공 로즈(소시 베이컨)도 스스로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에 극도로 초조해 하기 시작한다. 로즈는 과연 어떻게 죽을 것인가. 혹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지는 않을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주인공 로즈와 함께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노이로제를 느끼기 시작한다. 영화 ‘스마일’은 명백히 코로나19의 전이와 전파, 그 전염의 공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동시에 코로나19와는 다른 얘기를 다룬다. ‘스마일’은 코로나19에 대한 얘기인 척, 사실은 하고 싶은 얘기가 따로 있음을 영화 내내 서서히 드러낸다. 영화가 코로나19에서 코로나19가 아닌 얘기로 넘어가는 순간, 바로 그 시점에 ‘스마일’이 지닌 본질적 주제가 담겨 있다. 결국 주인공 로즈의 영화 속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로즈의 생사는 결국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 바, 그건 이 영화를 만든 파커 핀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기 때문이고 또 그가 그러기로 한 것에는 관객 대다수가 동의할 것이라는 스스로의 판단이 작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무지 세상을 살아갈 쉬운 방법이 없음을 다들 인정하게 될 것이다. 영화 ‘스마일’은 한 번도 마음을 풀어 주지 않으며 오히려 공포의 강도를 점층적으로 높여 나간다. 이러한 서술방식이 이 누군지도 모르는 감독과 배우들 모두가 세상과 영화에 대해 꽤 두텁고 정교한 심미안을 지니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영화의 만듦새가 꽤나 좋다. 점점 미쳐 가는, 극도의 정신 분열에 시달리는 연기를 해 낸 소시 베이컨의 연기가 눈에 띈다. 당연히 그런 연기를 뽑아낸 연출의 힘이 평가를 받아야 한다. 당분간 사람들이 짓는 미소나 웃음이, 그 속에 결코 간단치 않은 진실을 담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웃음이 무서운 세상, 미소를 재해석해야 하는 세상은 평화롭고 아늑하며 행복한 무엇과는 담을 쌓은 상태일 수밖에 없다. 이유도 알 수 없고 비교적 급속한 속도로 전염되는 바이러스의 공포는 사실 바이러스 자체에 대한 무서움보다는 그것이 전이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람들의 심리적 위축, 그 확산이 더 큰 두려움을 만들어 냈다. 바이러스로 인해 시작된 공포는 사람들 간의 불신, 정치 사회적 차별과 탄압, 경제의 양극화로 인한 소통의 단절들을 양산해 낸다. 이번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사람들을 극도로 고립시켰는데 영화 속 주인공 로즈의 환자들(그녀는 신경정신과 의사로, 스스로가 상담의이기도 하다)은 대다수 역시 혼자서 이상한 증세에 시달린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존재를 보고 느끼며 결국 그녀나 그도 죽고 자신도 죽게 된다고 반복해서 중얼거린다. 로즈는 전 애인 조엘(카엘 케터)과의 관계 이후 안정적인 남자 트레버(제시 어셔)와 행복한 생활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지만, 트레버는 곧 여자의 기이한 행동들에 질려 하기 시작한다. 로즈의 고립과 고독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아무도 그녀의 공포를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로즈는 어릴 때 자신 앞에서 죽어 간 엄마에 대한 기억을 소환시키기까지 하는데 그녀를 극한으로 몰아가는 건 다른 귀신이 아니라 바로 엄마 귀신이다. 어쩌면 가장 가까웠던 사람. 무조건적인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더욱더 무서운 것은 그 관계의 파탄은 이미 근원적이었고 모든 트라우마와 공포의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엄마는 무서운 형상으로 로즈에게 나타나 왜 ‘그때’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느냐고 힐난한다. 결국 로즈의 심리 밑바닥에 있는 공포, 그녀가 자신 앞에서 목을 그은 여자의 모습을 보고 난 후 겪게 된 트라우마의 정체는 죽어가는 엄마를(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나 공포를) 외면했다는 것이다. 그건 최근 몇 년간의 세상이 사람들로 하여금 각각의 공간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채 타인의 고통, 타인의 죽음보다는 그저 나만 살면 된다는 극도의 이기적 생존 의식과 그 유전자를 확인시킨 공포와 같은 것이다. 인간은 이제 극도로 고립된 상태에서 외롭게 죽어갈 것이다. 자신만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들어주는 사람도 없을 것이며, 그런 심리적 증상을 치유할 방법을 찾아내지도 못할 것이다. 바이러스 치료제가 나온다 한들 그런 세상에 대한 치유제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영화 ‘스마일’이 다루고자 하는 공포의 정체란 바로 그것이다. 세상은 치료될 수 없다는 것, 이제 우리는 치유의 한계에 도달해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줄곧 매우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을 쇼크에 이르게 한다. 그 괴상망측한 존재, 심지어 미소를 띠고 있는 그 기묘한 형상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깜짝 놀라게 한다. 그 존재는 당신이 지금 일하고 있는 데스크나 의자 옆에 붙어 있거나 천정 위에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고 심지어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는 식이다. 영화 ‘스마일’은, 공포영화란 사람들로 하여금 간담이 서늘하게 하는 장면이 세 개쯤 있어야 하고, 끔찍하게 자해하거나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장면이 세 개쯤은 있어야 하며, 사람들의 시체가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게 돼 있는 장면이 세 개쯤 있고, 너무 징그러워서 욕지기가 나오는 장면이 세 개쯤은 있어야 한다는 그 원칙 아닌 원칙에 충실한 영화다. 결론은, ‘스마일’은 꽤 무서운 영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그 스마일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왜 자신을 죽이기 전에 미소를 띠는 것일까. 그건 어쩌면 이제야 마음의 짐, 가슴속 공포를 벗어나게 됐다는 식의 안도감 같은 것 때문일까. 아니면 ‘너도 나처럼 될 것이다’는 식의 저열한 심리의 소산일까. 분명한 것은 그 미소가 매우 기분 나쁘다는 것이다. 극장 문을 열고 나온 후에도 꽤 오랫동안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이다. 돌아가는 길, 차창 속에는 내가 웃고 있는 모습이 비칠 수도 있겠다. 진짜의 나는 전혀 웃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의식 저 밑바닥에는 어떤 죄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가. 길가 골목에서 어처구니없이 죽은 156명의 젊은 아이들을 구해 내지 못했다는 것? 그 죄책감이 나의 이기적 생존 유전자와 연결되고 있다는 것? 영화는 자꾸 거울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내 얼굴이 미소를 짓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마음속 심연 저 한가운데에 있는 괴물을 꺼내게 만드는 세상이다. 영화 ‘스마일’은 그 깊은 우물의 공포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작품이다.
고속도로 가족 장르 : 드라마 감독 : 이상문 출연 : 라미란, 정일우, 김슬기 “우리 여기 너무 오래 있었잖아. 이제는 여행갈 때야.” 빠른 속도로 목적지까지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이용하는 고속도로. 그 바쁜 여정에서 식사와 피로를 풀기위해 사람들은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떠나곤 한다. 그렇게 모두가 스쳐가는 이 휴게소에서 살아가는 한 가족이 있다. “지갑을 잃어버려서 그러는데, 2만 원만 빌려주시겠어요?”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 가족의 이야기. 아빠 ‘기우’는 휴게소를 찾는 사람들에게 2만 원씩 빌려(?) 가족의 생계를 이어간다. 돈을 빌리기가 쉽지 않으면 적절한 때에 어린 아이들이 등장해 “아빠 배고파”를 시전한다. 그 2만 원으로 기우와 딸 ‘은이’, 아들 ‘택이’, 아내 ‘지숙’까지 네 가족은 컵라면을 먹거나 휴게소 식당 메뉴 하나를 오순도순 나눠 먹으며 끼니를 해결한다. 텐트를 집 삼아, 밤하늘의 달을 조명 삼아, 휴게소 곳곳을 캠핑장처럼 활용하는 이 ‘고속도로 가족’의 일상은 자유롭고 낭만적인 삶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그들에게 돈을 내어주었던 ‘영선’을 또 다른 휴게소에서 마주치며 가족의 일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는 기우네 가족을 발견한 영선이 기우를 경찰에 신고한 것. 이 일로 기우와 가족은 헤어지게 되고, 영선은 오갈 데 없는 지숙과 아이들을 거둬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아이들이 눈에 밟혀 그들에게 손을 내민 영선은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이웃이다. 그는 누군가 쓰다 내놓은 가구를 씻고 윤을 내, 새로운 쓰임새를 찾아주는 중고 가구점 사장이자 사회적 재난으로 아들을 잃은 아픔을 가진 인물이다. 작품은 타의로 사회의 안전망 바깥에 놓이게 된 사람들과 슬픔에 잠식된 채 지내는 사람들의 만남을 통해, 존재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문제를 바라보게 만든다. 영화는 배우들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만하다. 라미란은 영선 역을 맡아 그동안의 코믹함을 덜어냈다. 차분하고 진지한 모습이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며 기우네 가족을 살뜰히 보살피는 따뜻함을 보여 준다. 김슬기는 지숙 역으로 분해, 기존의 밝고 통통 튀는 연기와 차별화된다. 무기력해 보이지만 이 가족의 ‘정신적 지주’인 지숙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기우 역의 정일우는 꼬질꼬질한 얼굴, 추레한 차림새로 등장인물 중 외적인 변화가 가장 크다. 극단을 오가는 감정을 표현하며 연기의 폭을 확장한다. [ 경기신문 = 정경아 기자 ]
실연(失戀) 같은, 개인적인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대중가요의 가사가 다 자기 얘기처럼 들린다고 한다.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슈가 커지면 영화의 내용이나 그 안에 나오는 대사가 다 지금의 얘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컨대 이런 대사다. 두 남자가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다. “존, 이곳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 우리가 과연 증오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극복? 맙소사. 심오한 질문이네. 그래. 우리가 피를 많이 흘리긴 했지. 하지만 난 너를 형제라고 생각해. 믿는 건 너뿐이야. 그거면 됐어.” 존이라고 불리는, 질문을 받은 남자는 백인(프랭크 라우텐바흐)이다. 질문을 한 남자는 흑인이다. 이름은 부쉬(모더시 마가노). 여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한 지방 도시이며, 요하네스버그 근처 소도시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국제 러시안 갱들과 연결..
극장가 비수기로 통하는 가을. 지난 26일 두 편의 리메이크 영화가 나란히 개봉했다. 주인공은 ‘리멤버’와 ‘자백’. 각각 캐나다·독일 합작 영화 ‘리멤버: 기억의 살인자’와 스페인 영화 ‘인비저블 게스트’를 원작으로 한다. 개봉과 동시에 실시간 예매율 1, 2위(리멤버 25.2%, 자백 20.6%·26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를 차지한 두 영화는 침체된 극장가 구원 투수가 될 수 있을까. ◇ 평생을 기억해야 했던 아픔…‘리멤버’ “내 이름은 한필주. 뇌종양 말기 알츠하이머 환자입니다. 이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되었습니다.” ‘리멤버’는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80대 알츠하이머 환자 ‘한필주’의 복수극을 그렸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가족이 몰살당한 주인공이 나치 군인을 향해 복수하는 원작 설정을 우리나라 역사에 맞게..
넷플릭스에 올라 있는 ‘아웃핏’을 보는 건 기대를 훨씬 벗어나는 일이다. 이 영화를 보는 당신은 오프닝을 지나치면서 ‘설마 이게 끝까지 이러지는 않겠지’라는 의구심을 살짝 갖게 된다. ‘장르는 갱스터 영화라고 했다. 그러니 더욱더 영화 끝까지 공간 하나에서만 끝나지 않겠지.’ 그러나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카고 어느 골목 끝에 있는 주인공 레오나드(마크 라일런스)의 양복점 안에서 시작해서 양복점에서 끝이 난다. 바깥이라곤 레오나드가 출근하고, 마지막에 자신의 오랜 일터를 떠날 때의 양복점 문밖이 전부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올곧이 세트 촬영 하나로 이야기를 꾸민 셈이다. 영화 ‘아웃핏’의 로그 라인은 이렇게 돼 있다. ‘시카고에 자리 잡은 영국인 양복점 명장이 갱스터들과 엮이면서 겪게 되는 위험한 생존 게임을 다룬 영화.’ 그래서 으레 그렇듯이 총기 난사 장면이 비교적 발레를 보는 마냥 펼쳐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른바 이런 류의 갱스터 영화가 보여주는 ‘총알 발레’의 향연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총알 발레라는 용어는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 이후 나왔다. 총격 신이 마치 한 편의 발레 무대를 보는 마냥 역설적으로 아름답고 부드럽게 묘사됐다는 의미다. 대부분의 총격 신을 슬로 모션으로 처리한 데서 비롯됐다) 그 기대치를 벗어난다. 그런 총싸움 따위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물론 총격 장면이 필연적으로 벌어지긴 한다. 영화 속에서는 두 사람이 죽는다. 그리고 그 사건은 은폐되고 사건의 해결 과정은 치밀한 두뇌게임에 의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이 영화는 ‘시카고 갱단’이란 말과 싸움에 방점이 찍혀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생존 게임’이란 어구에 강조점이 찍혀 있다. 재단사 레오나드는 두 갱단이 조직 싸움 사이에서 살아날 수 있을까. 그가 살아난다면 어떤 재능 때문일까.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었나. 제목의 아웃핏은 옷, 의상, 복장을 말한다. 우리가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재단사와 재봉사의 차이이다. 그건 마치 제빵사와 제과사를 구분하지 않고 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주인공 레오나드는 자신을 재봉사(taylor)라 부르는 사람에게 자신은 재단사(cutter)라고 강조한다. 재단사는 옷을 입는 사람의 직업, 외모의 특성, 캐릭터, 부(富)의 정도에 따라 치수를 재고, 어디를 강조하고 어디를 뺄지를 결정하며 완벽하게 옷과 사람이 한 몸이 되도록 의상의 구조를 짜는 사람이다. 재봉사는 그렇게 재단된 천을 재봉질하고 뜯고 꿰매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다. 둘 다 없으면 안 되지만, 재단사의 위치가 약간 더 우위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때는 두 일을 겸하는 경우도 많다. 재단은 좀 더 창조적이고 재봉은 다소 기술적인 일에 머무르는 경우에 해당한다. 주인공 레오나드는 재단사이다. 물론 재봉 일도 겸하지만 (배경이 1959년이고 전후 경제 시스템이 다시 짜일 때인 만큼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었을 테니까) 자신은 늘 스스로를 재단사라고 생각한다. 재단사는 나름 머리가 비상하되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는 상대가 말하는 것, 상대가 원하는 것을 잘 들어주고 배려해 주는 사람이다. 당연히 눈치가 빠르고 생존력이 강하다. 한 명의 고객에게만 집중하면 결국 단 한 명의 고객도 유지할 수 없는 직업이 이런 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장을 다 고려하고 절충하되 어떤 때는 양쪽에 대해 알고 있는 약점을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는 태세가 돼있는 사람들이다. 레오나드는 선하고 조용한 인물이지만 결국 그가 어떤 생존 능력을 지니고 있었는가를 점차 만천하에 공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폭력의 능력이 아니다. 세상에서 살아남는 자는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지 힘세고 용맹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레오나드의 양복점은 시카고 주류 갱단이 사용하는 일종의 돈세탁 장소이다. 곳곳에서 거둬들인 자릿세를 포함해 각종 이권으로 거둔 수익금이 이쪽으로 모이면 갱단 두목의 아들 리치(딜런 오브라이언)와 두목의 오른팔 프랜시스(조니 플린)가 직접 수거해 간다. 매일매일 이 일은 반복적으로 진행되며 레오나드와 그의 여자 점원 메이블(조이 도이치)은 보고도 모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하며 살아간다. 이 갱단의 두목은 레오나드의 오랜 단골이다. 레오나드 역시 그의 보호 하에 장사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두목은 레오나드가 런던의 세빌로 거리 출신의 재단사임을 인정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이 갱단의 골치는 라퐁텐이라는 이름의, 이 거리의, 일종의 원주민 조직이다. 아들 리치와 그의 파트너 프랜시스는 수거하는 돈들 사이에 아웃핏(미 전역 갱단을 연결하고 이견을 조율하고 관리하는 일종의 감시위원회)의 소인이 찍혀 있는 봉투를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는 녹음용 카세트테이프가 들어 있었으며, 그 테이프에는 그간 FBI가 자신들의 조직을 감청하고 도청한 내용이 담겨있음을 알게 된다. 조직 내 누군가 밀고자가 있고, 그의 도움으로 FBI는 수사 활동을 해왔는데 FBI 내부에도 첩자가 있어 도청 테이프를 한 부 복사해 다시 조직에게 알려 주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조직 내 밀고자는 이 테이프를 상대 조직인 라퐁텐에게 돈을 받고 팔려고 하는 상황. 리치와 프랜시스는 이 테이프를 재생할 수 있는 기계(녹음기)를 구하는 대로 내용을 재생해서 도대체 밀고자가 어디에 도청 장치를 한 것인지,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내려고 한다. (1959년에는 비교적 소형의 카세트테이프가 막 발명됐을 때이다. 이 카세트테이프를 들을 수 있는 레코더는 아직 대중화되지 못한 때이고 영화는 그 부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부터 얘기는 복잡해진다. 음모는 세 가지 조직 사이에서 떠다닌다. 시카고 갱과 라퐁텐 조직 그리고 FBI. 이 세 조직 사이를 오가며 줄다리기를 하는 인간, 밀정, 밀고자, 첩자는 누구인가. 혹시 프랜시스인가. 가만히 보니 리치와 메이블 사이도 심상치 않다. 그렇다면 점원 메이블인가. 아니면 설마 재단사인 레오나드일까. 재미있는 것은 이 모든 등장인물들 각각이 동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레오나드는 아무래도 런던에서의 행적이 수상쩍다. 그는 단순한 재단사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혹시 FBI 요원이 아닐까. 리치도 심상치 않다. 그는 조직의 제2인자이지만 거리에서 아버지가 데려 온 프랜시스에게 밀리는 상황이다. 그는 좀 심약한 편이기도 하다. 거리에서 라퐁텐 조직원에게 총을 맞기도 한다. 혹시 프랜시스를 제거하기 위해 리치가 계략을 꾸미는 것은 아닐까. 프랜시스는 당연히 동기가 충분하다. 그는 조직에 충성을 다하고 있지만 (보스를 위해 총을 6발이나 맞기까지 했다) 리치가 권력을 잡으면 토사구팽 당할 것이 뻔한 것을 안다. 일찍 손을 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메이블은 메이블대로 꿈이 많은 여자이다. 그녀는 언젠가 이 살육의 거리를 떠나 파리에 가서 정착할 생각을 갖고 있다. 당연히 돈이 필요하다. 그녀의 아버지는 과거 갱단 하수인이었다가 살해당했다. 모두들 동기가 있다. 과연 밀고자는 누구인가. 그보다는 과연 이중에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영화 ‘아웃핏’은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아니 그냥 한 편의 연극을 통째로 세트화해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약 3막 8장 정도로 구성돼 있는 연극인 셈이다. 다분히 셰익스피어적인 연극을 아가사 크리스티 버전으로 극화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그만큼 스케일보다는 배우 한 명 한 명의 철저한 개인기와 완벽한 소품과 의상, 분장, 세트 등 미장센의 디테일에 절대적 충일감을 가한 작품이다. 영화가 자본과 규모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런 미학적 디테일에서 비롯된 것임을 유감없이 증명한 작품이다. 인간은 얼마나 지적이며 동시에 그 마음속에는 누구나 위선의 어둠과 이중, 삼중의 과거를 지니고 있는가를 보여 주기도 한다. 당신은 영화의 어느 부분쯤에서 밀고자를 찾아낼 것인가. 영화를 보고 있으면 리치의 애인인 척 메이블이, 사실은 프랜시스와 함께 ‘짜고 치는 고스톱’ 한판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 가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거기까지라도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런 류의 범죄 스릴러를 꽤 많이 본 축에 속한다. 쓸데없는 영화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이번 주는 지적인 소품으로 영화적 쾌감을 느껴 보시기를 바란다. 자, 누군가 밀고자는?
아무리 미장센이 뛰어나고, 배우들 연기가 훌륭한들, 거기다 뭐 연출까지 감각적이네 어쩌네 해도 사랑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 봐야 남녀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시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윽고 눈과 마음에 불꽃이 튀어 서로의 몸을 이리저리 비벼 대고, 같이 자고, 그러다 같이 살게 되는 뻔한 스토리로 이어진다. 자연스럽게 지지고 볶는 싸움과 눈물이 반복되고, 그러다 헤어졌다 다시 만났다 등등을 반복하는 이야기가 바로 러브 스토리 영화들이다.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에는 별다른 미사여구가 필요하지 않다. 사랑이 아름답거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건 그렇게 주입된, 관념과 허상에 불과하다. 현실은 다르다. 그래서 이 노르웨이산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한국어 제목을 아주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된다. 영어 제목, 노르웨이어 원제는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 Verdensverstemenneske’이다. 그냥 ‘최악의 인간’이다. 별 볼 일 없는 사랑 이야기쯤에 불과할 것 같은데 칸영화제 여우주연상과 LA비평가협회상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로튼토마토 지수 96%에다 미국 개봉 당시 최고 오프닝 수익을 올린 영화이기도 하다. 뭐가 있긴 있다는 얘기이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해 총 12장의 단막으로 구성돼 있다. 그렇게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그건 마치 이 영화의 스토리 구조가 아주 탄탄하게 만들어져 있음을 자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무엇보다 문학적 서사가 있음을 드러낸다. 영화는 20대 중반에서 30살로 이어지는 여자 율리에(레나테 레인스베)의 성장사를 그려 나간다. 사랑 이야기인 척 하지만 사실은 한 여인의 자아를 찾아 가는 과정, 그것을 수립해 가는 과정을 한 장 한 장 벽돌을 쌓듯 차곡차곡 보여 준다. 그 이야기 구조가 비교적 빈틈이 없고, 현실적이며, 때로는 코믹하게 때로는 슬프게 구성돼 있다. 사랑 이야기는 어쩌느니 저쩌느니 해도 이야기의 흡입력이 뛰어나야 하는 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그 점에서 점수의 수위를 높게 받을 수 있는 작품이다. 율리에는 의대생이었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마치 인간의 몸을 갖고 일하는 목수 같은 느낌이 든다며)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그 역시 사진을 공부한다며 중간에 때려치운다. 그러다 웹툰 작가 악셀(앤더스 다니엘슨 라이)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무려 20살 연상의 남자이다. 당연히 이런저런 울고 짜고 하는 이야기들이 진행돼야겠지만, 이 영화가 좋은 건 그런 부분을 많이 생략하고 있다는 점이다. 율리에가 악셀을 떠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계속해서 자기 내부에 텅 빈 무엇이 존재하는 것 같아서이다. 다른 이유들은 부차적이다. 예컨대 악셀은 아기를 낳기를 원하지만 율리에는 애를 갖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건 그녀의 아버지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일 수 있다. 아버지는 어릴 때 그녀를 버린 것으로 보이며,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살면서 딸의 생일조차 챙기지 않는다) 생긴 갈등 같은 것이 증폭된 결과는 아니다. 그냥 이렇게 계속 살아가는 자신을 잘 모르겠어서이다. 젊은 나이에 걸맞은 관념 덩어리가 그녀의 애정 행보에 걸림돌이 된다. 다 부질없어 보이는데 그건 영화 속 악셀에게도 율리에가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 제5장 ‘배드 타이밍’에서 내레이션으로 언급되듯이 남녀 간의 사랑 혹은 남자끼리, 여자끼리의 사랑이든 뭐든,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이 인생의 다른 시기에 만났기 때문이고, 결국 서로가 원하는 것, 원하는 미래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걸 맞춘다고 맞추지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며, 그래서 결국 시간이 흐르면 열기가 식고 대화가 줄며 각자 다른 꿈을 꾸게 되고 한 지붕 아래에서도 독자적인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최소한 등을 돌리고 잔다. 결혼한 부부가 이혼을 하지 않았든, 오래된 연인이 동거를 계속하며 사실혼 관계를 이어가고 있든 그렇지 않든 그 사랑은 이미 죽은 것이다. 사랑의 동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사랑의 운명은 늘 실패하는 것이다. 율리에가 악셀의 집에서 뛰쳐나온 것이 에이빈드(헤르베르트 노르드룸)라는 남자를 만나기 전인지 아니면 만난 후인지는 그래서 중요하지가 않다. 율리에는 에이빈드를 만나 아주 잠시나마 다시, 세상의 시간이 온통 정지돼 있는 듯한 황홀경에 빠진다. 둘은 각자의 파트너가 있는 상태에서 만났다. 그것도 누군지 알지 못하는 사람의 파티에서. 율리에는 악셀과 한참 실랑이를 벌이며 살고 있는 중이었고, 에이빈드 역시 나중에 알고 보니 환경 액티비스트이자 요가 선생인 수니바(마리아 그라지오 디 메오)와 살고 있던 참이다. 율리에와 에이빈드는 그래서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는데, 서로 바람은 피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서 바람의 선이 어디까지인지를 두고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서로를 이빨로 무는 것은 바람의 행동인가. 에이빈드가 율리에를 물고 율리에가 에이빈드를 물며 둘은 키득댄다. 서로의 냄새를 맡는 것은 바람의 행동인가. 둘은 서로가 서로의 겨드랑이 냄새를 맡으며 낄낄댄다. 재미있어한다. 거기까지는 바람피우는 게 아니고, 자신들은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며 아침에 헤어지지만 누가 봐도 율리에와 에이빈드의 마음엔 이제 새로운 사람이 들어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은 바람이며, 늘 변화하는 것이고, 그렇게 새로운 사람을 찾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암수의 동물적 욕구이자 사랑의 본질일 수 있다. 자아를 찾는 것이 먼저인가 사랑을 이루는 것이 먼저인가.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던지는 화두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며 멀리 환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을 딛고 서있는 땅 위에 있다는 것이다. 율리에가 사랑하는 것은 악셀이나 에이빈드가 아니다. 율리에가 사랑하는 것은 율리에 자신이다. 바로 그 점이 이 영화의 이야기, 총 12장의 이야기가 귀결되는 부분이다. 사랑은 자기애(自己愛)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거나 그러지 못하는 자는 결국 뜨거운 사랑에 실패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뜨거운’ 사랑이다. 사랑은 실패가 숙명이다. 다만 뜨겁고 달콤한 것을 단 한 번이라도 취해 봤느냐, 그렇지 않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사람들이 늘 목말라하는 것은 그냥 사랑이 아니다. ‘뜨거운’ 사랑이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사람들이 줄곧 궁금해하는 것에 대한 답을 마련하려 애쓴다는 점에서 눈에 띄고 가슴에 남을 작품이다.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의 기술은 무엇인가. 그건 에리히 프롬 같은 오랜 철학자조차 궁금해하고 회의했던 부분이다.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프롬이 가르치려 했던 것은 사랑의 기술이 아니다. 그의 저서의 원제는 ‘The Art of Loving’, 곧 사랑하기의 기술이다. 사랑은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행위의 결과물이라는 얘기이다. 율리에처럼 사랑이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를 주야장천 고민해 봐야 그 기술을 터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율리에가 그런 오류를 숱하게 저지르는 것은 젊고 어리기 때문이다. 치기 어린 나이에는 늘 그렇게, 사랑하기보다는 사랑의 본질부터 찾으려 하기 마련이다. 그건 누구나가 다 그렇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이 만든 이 로맨스 영화가 닿으려고 하는 부분은 거기에 있다. 주연 여배우 레나테 레인스베는 요아킴 트리에의 영화적 화두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연기를 펼친다. 러브 스토리 영화는 스토리가 탄탄해야 하지만 인물(=배우)이 매력적이어야 한다. 레나테 레인스베의 매력은 영화 속에서 차고 넘친다. 당신은 지금 최악의 시기를 겪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사랑에 빠져 있는가. 무엇보다 당신은 지금 ‘뜨거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지만 사랑이 지나고 나면 누구나 최선의 사람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된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후회만 남게 되겠지만 사람들이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이다.
대체적인 사람들, 평균적인 사람들은 ‘미술이요?’하면 ‘아휴, 잘 몰라요’라고 할 것이다. 그건 누군가가 앞에 나타나 쇼스타코비치나 말러의 음악 어쩌고저쩌고할 때 사람들이 가능한 일제히 입을 다무는 것과 같은 분위기다. 그럼 ‘김창열 화백은요?’하면 뭘 그리신 분이냐고 질문이 되돌아올 수도 있겠다. ‘물방울을 그렸지요’하면 ‘아 그 줄곧 물방울만 그리신 분!’이라 할 것이다. 맞다. 1971년부터 2021년 타계하는 날까지 줄기차게 물방울만 그렸던 김창열은 우리가 미술과 예술에 대해서 알 듯 모를 듯하는 만큼, 알 듯 모를 듯하는 물방울 작가이다. 그에 대한 얘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역시 김창열에 대해서, 미술과 예술에 대해서, 인생과 세상에 대해 알 듯 모를 듯 오묘하고 그래서 기이하게도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젊은 사유의 언어가 가득한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흔히들 ‘시네 에세이’라 부른다고 하지만 공식 장르는 아니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엄밀하게 얘기하면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스토리 구성이 인위적으로 착착 이뤄진 이 작품을 만든 감독 김오안은 사진작가이자 화가이고 재즈 아티스트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김창열의 아들이다. 작품엔 그의 탄탄한 사유의 흐름이 담겨 있다. 기이하고 신비스러우며 미스터리스러운 면도 있는데 그건 다분히 이 영화가 영상과 이미지보다(감독은 그렇다고 주장하겠으나) 언어와 문장이 앞서 있는 작품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김오안의, 그의 아버지 김창열에 대한 얘기이고 구술과 대화로 만들어졌을 법한 부자 자서전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책으로도 충분히 나올 가치가 있고 그래야만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영화를 문장으로서 사유하게 하는데, 만약 이 작품을 책과 글로 보고 있으면 이번엔 반대로 이미지와 물방울 그림들이 연속해서 떠오르는 형국이 될 것이다. 이런 느낌, 이런 장르의 작품을 뭐라 불러야 할까. 시각화의 문체화? 다큐의 문학화? 문학의 영화화? 다큐 전편이 불어로 구성돼 있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역설적으로 2022년에 만나는 누벨바그 형 프랑스 영화 같다는 느낌을 준다. 영화는 앞뒤 맥락을 같은 의미로 이어 놓는, 양괄식으로 돼 있다. 거기엔 마치 질문과 같은 종지부 문장이 있다. ‘나의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영화의 오프닝에서 감독 김오안은 아버지에 대해, 어머니가 자신과 자신의 형에게 침대 머리맡에서 돼지 삼 형제 얘기를 해줄 때, (놀랍고 두렵게도)달마 대사 얘기를 하던 사람이라고 했다. ‘달마대사가 말이다. 9년간 벽을 보고 참선을 했대. 면벽수도라고 해. 졸음을 쫓으려고 눈꺼풀을 칼로 잘라내면서까지 수도를 했대. 그리고 결국 9년 후에 진리를 깨달았단다.’ 아들 김오안의 다큐 초반은 김창열이 어린 두 형제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던 아버지였다며, 불길한 시작을 보인다. 이건 아버지 김창열에 대한 트라우마를 기록한 작품인가. 위인과 거장, 위대한 작가의 아들이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프로이트나 칼 구스타브 융 방식의 분석이 들어간 작품인가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의 말미에는 그 모든 것이 그렇지 않다는 종지부의 문장이 두 개 찍힌다. “바로 이것이 부질없이 복잡한 나의 삶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오프닝 때 했던 문장의 반복. “이것이 나의 아버지이다.” 김창열의 물방울 작품을 많이 봐 온 사람들에게도 이 다큐는 꽤 색다름의 미학적 울림을 준다. 김오안은 그걸 이렇게 표현한다. 두 개의 물방울이 있는데 그 둘은 전혀 닮지 않았다. 닮은 물방울은 하나도 없다. 김오안의 속삭임과 그의 카메라는 수도 없이 다른 표현의 물방울에 대해 얘기하고 그걸 그린 김창열의 그림을 보여 준다. 추상적인 물방울도 있고 표현주의적 물방울도 있다는 식으로 물방울의 다양성이 이어진다. 물방울 안에 물방울, 물방울 밖의 물방울, 쓸려가고 밀려오는 물방울, 그저 의미 없이 흘러가는 물방울 등등 물방울 하나나 두 개를 그리는 것은 구상이지만, 100개나 1000개를 그리면 계획이 되고, 만 개와 10만 개를 그리면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며 엄청난 야심이 되기도 하고 신비와 광기가 되기도 한다는 얘기가 이어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결국 김창열의 물방울 작품 하나하나가 얼마나 개체적이고 또 얼마나 전체적인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의 작품이 자신의 고민에서 시작돼 어떻게 세상과 연결돼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 고민과도 결국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의 파장이 이어지게 만든다. 보는 사람들 개개인에게 일종의 깨달음을 스며들게 한다. 각각의 물방울마다 담긴 비명과 울림, 침묵의 극한, 그 의미를 깨닫게 한다. 그런 면에서 이 다큐는 꽤 노자 철학적이다. 노자는 김창열이 물방울을 그리기 위해 9년, 아니 평생을 벽을 보며 얻고자 했던 사유의 기반이다. 결국 부질없이 복잡해지기만 했을 뿐이라고 고백하고 있을지언정 김창열은 궁극적으로 많은 의미가 들어가 있고, 또 드러나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위업이다. 아들의 다큐는 아버지의 생애와 작품이 갖는 위대함을 따라가며 애썼고 그런 부분에서 성공적이다. 예컨대 물방울의 이미지가 쏟아지는 빗물, 소담스럽게 내리는 눈꽃송이, 기와에 점점이 박히는 빗방울 등에서 온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김오안의 카메라가 중간중간 그 같은 이미지를 정성스럽게 담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김창열의 쏟아지는 물방울 작품은 2차 대전 때 노르망디에 쏟아져 내렸던 낙하산 부대의 모습에서 나온 것이다. 김창열의 작품 속에는 전쟁과 죽음, 이데올로기의 갈등, 그 어두운 역사의 내면이 숨겨져 있다. 이 다큐는 그러한 사실을 알게 해 준다. 이걸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꽤 드라마틱하다. 김창열처럼 김오안 역시 다큐란 물방울 하나를 시작한 데뷔 감독이 됐다. 김오안의 이번 시네 에세이는 김창열의 또 다른 물방울이다. 물방울이 물방울이 돼서 만났다. 그 가계(家系)의 이어짐이 감탄스러운 작품이다.
-졸라의 작품 『돈』 ‘사카르’라는 인물은 한때 잘 나갔다가 파산을 한 뒤, 여기저기 사람들을 끌어모아 출자를 통해 신디케이트 회사를 꾸려 ‘만국은행’을 만든다. 그러고 나서는 주가조작을 통해 주식의 가치를 한껏 부풀려 그 차익을 온통 뻥튀기를 하다가 결국 몰락하게 된다. 일확천금(一攫千金)을 노렸지만 망해버린 것이다. 때는 나폴레옹의 조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로 집권했던 프랑스 제2 제정 시기에 속하는 1860년대 말에서 70년의 시기였다. 이 사건은 에밀 졸라의 작품 <돈(L’argent)>의 줄거리에 담긴 내용이다. 자본과 욕망이 한 몸이 되어 유럽의 수도 파리를 휩쓴 광기와 이에 덩달아 놀아나게 된 프랑스 대중들의 모습을 에밀 졸라는 촘촘한 취재와 놀라운 문학성으로 그려냈다. 1871년 <루공 가(家)의 행운(La Fortune des Rougon)>이 그 첫 번째 이야기라고 한다면 <돈>은 20년 뒤 출간된 소설이었다. 19세기 프랑스 사회사를 표현해내겠다는 목적으로 시작한 “루공-마카르 총서(Les Rougon-Macquart)” 가운데 하나였다. 이 총서는 무려 18권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에밀 졸라 문학의 금자탑이었다. <돈>의 주인공 사카르 역시 루공 가문의 일원으로 그의 운명은 프랑스 사회의 적나라한 자화상과 그대로 직결되었다. 이미 19세기 말 프랑스에서도 주가조작과 금융사기가 있었던 건데, 1789년 부르주아 혁명 이후 자본주의의 주도권은 거의 100년이 지나면서 상업자본에서 금융자본으로 넘어가고 있었고 그 자본의 규모는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게 되었다. 제국주의의 세계침탈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만국은행”은 1867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따온 이름으로 만국박람회가 프랑스 제국주의의 위상을 과시했던 것과 그대로 통하는 작명이었다. 소설 <돈>에서도 사카르와 그 일당들은 이른바 ‘동방(東方/Orient)’ 또는 아시아를 겨냥한 해상무역과 철도건설의 구상을 ‘만국은행’의 투자로 기획했던 것이다. 프랑스 제국주의는 프랑스 자본주의의 몸집을 한껏 크게 만들었고 여기에 필요한 자본의 수혈은 금융자본의 급성장을 가져왔던 것이다. 사카르가 신디케이트 금융회사를 차려 떼돈을 벌겠다고 사기 계략을 꾸밀 수 있었던 기본적인 환경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중심은 파리의 증권 거래소 ‘부르스(Bourse)’였다. 그건 뉴욕의 ‘월스트리트’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곳은 자본에 대한 모든 욕망이 몰려드는 현장이었다. <돈>의 첫 문장은 그래서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증권 거래소에서 열한시 종이 울렸을 때”. 프랑스어 원문은 “Onze heures venaient de sonner à la Bourse”로 ‘Bourse’가 명확히 표기되어 있다. 번역했을 때 그 뜻이 월스트리트만큼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증권 거래소’라고 했지만 ‘부르스’라는 말 한 마디로 작품 <돈>의 현장과 앞으로 일어날 역동적인 사태는 예견되는 것이다. -대사기극 사카르는 그가 이 금융사기에 끌어들인 선량한 성품을 가진 카롤린 부인에게 신디케이트 회사 만국은행의 꿈을 이렇게 펼친다. “봐요! 만국은행과 함께 우리는 끝없는 대지, 아시아라는 낡은 세계 위에 진보의 곡괭이로, 연금술사의 몽상으로 돌파구를, 더없이 넓은 지평을 열 것이요. 이 눈부신 정복의 미래 앞에서 당신은 내게 신디케이트를 만들고 신디케이트 구성원들에게 프리미엄을 주는 것을 적법한 것인지 묻는군요.” 금융사기와 아시아를 노린 제국주의가 한 몸이 되는 것을 정복으로 표현하고 자신의 무한한 야망으로 밝히면서 그 방식을 의심스럽게 여기고 있는 카롤린 부인을 설득하는 장면이다. 사실 그 이전에도 이미 사카르의 자금 운영 방식에 의문을 가졌던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카롤린 부인이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은행주식이 발행되기도 전에 그 주식을 나누어 가지기 위해 여러 사람이 결사체를 만드는 것이 합법적인가요?” 그러자 사카르는 공증인 사무실로 가서 사업자 등록증에 서명할 수 있다며 합법적이라고 둘러대자 카롤린 부인은 잇달아 질문을 던진다. “법에 따르면 회사 자본 전부에 기명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사카르는 실명 거래로 누가 회사 설립 전에 이미 주식을 소유하고 있는지, 그래서 내부자 거래가 있는지 없는지를 드러내지 않고 이익을 챙기려 하다가 말하자면 딱 걸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이런저런 구구한 설명과 함께 자신에 대한 카롤린 부인의 호의를 이용해서 넘어가게 된다. 사카르는 이런 식으로 만국은행의 골격을 세워나가고 마침내 크게 판을 벌리게 된다. 사실 이들은 돈도 내지 않고 이미 주식을 소유하는 방식을 취했고 대리인을 통해 실명을 감추고 내부자 거래를 아주 쉽사리 해냈다. 카롤린이 사카르에게 까다로운 질문을 던진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카롤린에게는 아믈랭이라는 엔지니어 오빠가 있는데 그가 이 사업에서 지중해 동쪽 현장 해상무역과 철도구상 작업에 나서게 되는 터라 이 사업의 신뢰성, 투명성, 합법성은 매우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더해 그 자신 또한 지적 수준이 높아 알고 있는 게 있는데, 마음에 걸리는 것을 그대로 넘길 수 없기도 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선량한 양심을 가진 존재로서 쉽게 용납이 되지 않았으나 그녀는 결국 사카르와의 일에 얽히고 만다. -파국의 날 투자가 아니라 투기판, 카지노가 될 것이 뻔한 만국은행 건립계획은 이런 식으로 착착 진행이 되었고 액면가 850프랑에서 시작했던 만국은행 주식은 3천 프랑 이상으로 고공행진을 하다가 결국 팡! 하고 터지는 바람에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사태로 파국을 맞이하고 말았다. 일단 주가가 떨어지면서 증권거래소는 주식을 팔기 위해 몰려드는 군중들의 혼란이 파도처럼 출렁거리며 넘치기 시작했다. 주가조작의 희생자들이었다. 에밀 졸라는 이 현장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마지막 삼십분 동안 패주(敗走)가 점점 심해졌고, 군중은 우왕좌왕 혼잡하게 뒤엉켰다. 극단적 신뢰와 눈먼 열광에 뒤이어 공포의 반작용이 엄습했다. 모두가 늦었을까 두려워하며 주식을 팔기 위해 몰려들었다. 매도 주문이 원형 코르베유 위로 우박처럼 쏟아졌고, 눈에 보이는 것은 이제 비 오듯 내리는 수많은 전표뿐이었다. 분별없이 내던지는 엄청난 양의 주식이 가격 하락을 부채질했으니, 그것은 문자 그대로 대폭락이었다. 시세는 추락을 거듭해서 1500프랑, 1200프랑, 900프랑으로 떨어졌다. 더 이상 매수자가 없었고 포성이 멈춘 전장은 시체로 뒤덮였다. 빽빽하게 운집한 검은 프록 코트들의 머리 위로 세 명의 시세 표지원이 마치 망자(亡者)를 등록하는 시체 안치소의 서기처럼 보였다. 폐장(閉場)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 후 마지막 시세가 830프랑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장내에는 무시무시한 침묵이 감돌았다.” 증권거래소 부르스의 활기는 대재난의 잿더미에 쌓여 질식사를 해버린 듯 하고 돈의 광란에 저도 모르게 함께 춤을 추었던 이들은 모두 빈털터리가 되거나 무지막지한 빚더미에 짓눌리게 되었다. 이걸 미리 예상하고 빠져나간 이들만 돈을 움켜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기민하게 움직였던 작전세력만 부(富)의 정복자가 되어 금융귀족 행세를 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돈이 이끄는 광기에 가득 찬 춤은 거대한 “사탄의 맷돌”처럼, 곡식이 아니라 인간을 으깨어 피를 흘리게 하고 말았다. 금융자본을 굴리는 카지노 판의 주인은 흡혈귀 드라큘라였던 걸 다들 미처 몰랐던 것이다. 한 나라의 경제가 어떤 요소로 인해 파멸적 상황에 몰리는지는 위기국면을 주목해온 정치경제학자들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사실 이렇게 대중의 피를 빨아먹는 경제체제의 시발점은 오래 전 제국주의 체제가 이미 틀을 만들어 놓았고 이후 패권체제가 이를 이리 저리 변형시켜온 것에 불과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정치경제학 입문』에서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구성을 이렇게 정리한다. “현대 교통수단, 원주민 종족 전체의 박멸, 화폐경제와 농민층의 부채, 부와 가난, 프롤레타리아트와 착취, 생존의 불안정성과 공황, 무정부성과 혁명 따위가 운반된다. 유럽 ‘국민경제’는 지구의 모든 나라와 민족을 자본주의적 착취의 거대한 그물망 안에 넣고 목을 조르기 위해 촉수를 뻗친다.” 이 촉수의 확대 재생산체제를 만드는 것이 세계자본주의를 이끄는 기본원리이며 에밀 졸라의 <돈>에 등장하는 사카르는 여기에 달라붙어 피를 빠는 기생(parasite) 계급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체제는 기만과 허구를 자본증식의 테크놀로지로 삼으면서 어느 시점에 이르면 더는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일을 되풀이한다. 그건 숱한 희생자들을 낳고 또 낳고 또 낳는 과정이었다. 막장 뒤에 남은 폐허에서 새로운 방식이 모색되지만 기만과 허구는 여전히 정체를 숨긴 채 가면만 바꿔 쓰고 등장한다. 역사에서 이미 그 정체가 확인된 매우 잔혹한 주역들이기에 위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몰락과 그 경로전환 이런 식의 재난은 이후에도 되풀이되었고 그것은 어느새 금융자본의 이데올로기와 원리처럼 작동해서 한 나라의 금융파국이 아니라 세계적 위기로 터져버린 것이 바로 1930년 대공황이었다. 미국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유럽의 국민경제’를 총합한 것 이상이었다. 그러기 직전의, 상상을 넘는 풍요의 시대가 1920년대로 이때를 이후 진보적 경제사가들은 “위태로운 풍요의 시기 (Era of the perilous prosperity)”라고 부른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게츠비(The Great Gatsby)』가 이 시기를 무대로 펼쳐진 작품이고 작품의 화자(話者)로 등장하는 닉(Nick)은 월스트리트의 증권맨이다. <위대한 게츠비> 역시도 돈의 광란에 휩싸인 한 세대의 욕망과 비극을 그려냈다. 그건 자본의 권력을 충실하게 받든 시장의 몰락과 파국의 역사였다. 결국 시장의 논법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를 막을 수 없다고 깨닫게 된 것이 이후 뉴딜(New Deal)의 해법이었다. 시장에 대한 국가의 공적 개입과 관리가 그 구제책이었고 이에 따라 사회적으로도 계급타협의 정치가 시작되었다. 자본의 욕망이 독점하는 시장으로는 되풀이되는 파국을 막을 수 없고 그에 따라 극단의 불평등으로 삶의 벼랑 끝으로 몰리는 민중들의 저항과 반란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1930년에서 1970년에 이르는 시기는 이 뉴딜의 원리에 따른 국가와 시장의 관계가 만들어진 과정이었다. 그러다가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이 결합된 복합위기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 생겨나면서 금융자본 시스템에 대한 국가관리의 한계가 드러나고 이에 따른 신자유주의 정책이 시동을 걸게 된 것이 레이건 이후의 미국과 세계시장의 변화였다. 신자유주의의 요체는 딱 하나, 자본시장의 권력을 최대한 떠받들고 이 권력이 발휘하는 에너지에 장애가 되는 것은 모두 제거하라는 것이다. 다른 옷을 갈아입고 등장한 “사탄의 맷돌”이었다. 그러나 이 맷돌의 수명도 그리 오래가지 않게 되었다.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는 사카르가 겪은 위기와 형태는 다르나 그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 보통 때 같았으면 대출이 되지 않는 하위 신용등급인 비우량주택담보 대출인 서브 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gage)를 작동시키면서 이런 상황이 부동산 투기와 결합하자 생겨난 금융시장의 팽창은 재앙으로 끝났다. 세계적 투자금융기업이었던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의 파산은 예견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제 중국의 성장은 미국이 주도하는 금융시장의 패권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결국 시장에 대한 국가의 공적 관여가 상대적으로 높아지지 않으면 시장 전체의 질서가 무너지는 상황을 내다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지점에 우리가 놓여 있다. 그런데 윤석열 정권은 그간 나름 만들어온 국가의 뉴딜체제를 전면 제거하고 있는 중이다. 계급정치의 사회적 대타협구도를 파괴하고 있으며 민영화라는 이름 아래 공적 영역을 시장에 내놓으면서 대자본의 활동구역을 확장해주고 있다. 교육까지 시장화하겠다고 한다. 이러면서 정부의 공적 기능은 대자본의 공간으로 되어가고 있으며 국민에 대한 공적 임무는 하나하나 소멸되고 있다. 정부는 대자본의 놀이터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불평등의 구조는 더욱 강화될 것이며 윤석열 정권 자신들이 관련된 주가조작 혐의도 털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본시장에 대한 공적 제동장치는 해체하고 있으니 어떻게 되겠는가. 세계시장의 관리체제는 이제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고하고 있는 판에, 역류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 대한 투자약속으로 얻어낼 줄 알았던 전기차 보조금 철회상황에 직면한 까닭은 바로 이런 흐름의 변화를 투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렇게 자본시장에 대한 국가의 보호막 강화를 통해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보완하겠다는 것은 여러 위기를 역사적으로 체험한 다음의 필연적 결론이다. 이미 생태계의 반란과 도전 앞에서 세계자본주의는 다른 경로를 기획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놓여 있고 불평등의 극단적 현실은 경로변경을 정치의 당연한 과제로 만들고 있다. 자본주의와 생태계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쳐온 존 벨라미 포스터(John Bellamy Foster)가 그의 최근 저서 『인류세 속의 자본주의(Capitalism in Anthropocene)』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세계자본주의는 지구를 공격하는 전쟁을 하고 있는 상태”이니 지구생태계가 인간에게 혜택을 더 나누어줄 리가 만무해지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더는 사카르가 존재할 땅은 없다. 기만과 허구로 기생할 수 있는 체제는 몰락하고 있는 중이다. 작품 <돈>에 등장하는 메생 아줌마는 부실채권 뭉치를 가방에 넣어두고는 뜯어먹을 시신(屍身)들을 찾아 어슬렁거린다. 조작된 시장의 반격으로 타격을 입게 될 이는 단지 사카르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다. 지금 경로 전환의 결단을 내려야 할 사회적 책무가 더는 지연되지 말아야 할 까닭은 분명하다.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지 않으면 공멸(共滅)이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