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민의 역작 ‘노량 : 죽음의 바다’는 서사(敍事)의 협공과 그 전략이 뛰어난 작품이다. 흔히들 이 영화는 해상 전투 신의 압도적인 비주얼이 최대 장점이자 볼거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총 152분의 러닝 타임 동안 이렇다 할 전투 장면은 70분이 지나가도록 나오지 않는다. 그 비교적 긴 시간을 김한민은 임진왜란 7년의 전쟁이 갖는 의미, 그것이 어떻게 노량의 전투로 이어지는가를 보여 주려 애쓴다. 그건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읽혀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과 생각이 굉장히 중요한데 김한민은 그 ‘논리와 사고’를 위해 얼마나 자신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는가를 촘촘히 보여 주려 애쓴다. 핵심적인 화두는 이순신 역의 김윤석이 해내는 대사이다. 이순신은 조명(朝明) 연합 수군의 명나라 측 총 도독인 진린(정재영)이 이제 그만 적당히 저들, 왜군에게 퇴로를 열어 주자는 제안에 대해 끊임없이 같은 말을 반복한다. “이번에야말로 저들을 완전히 섬멸시켜야 합니다.” 그는 부하들에게도 같은 말을 똑같이 한다. 부하들 중 충성스러운 장수인 송희립(최덕문)마저도 이제 이미 이긴 전쟁이니 더 이상의 희생은 그만했으면 한다. 그런 그에게 이순신은 말한다. “아직도 내 뜻을 모르겠느냐. 이번에 완전히 끝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는 것이느니라.” 관객들 상당수가 놓치고 있지만 엔딩 타이틀이 다 올라간 후에 나오는 일명 쿠키 영상에서는 광해군(이제훈)이 나온다. 노량 앞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권율(남경읍)이 찾아와 “세자 저하. 이제 왜란이 끝났습니다.’라고 말하자 광해는 매우 의미심장한 답변을 한다. “모르겠소? 이건 왜란이 아니외다. 전쟁이었소.” 이 부분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상념에 젖게 한다. 김한민 감독이, 임진년에 일어난 조선과 일본 간의 전쟁을 왜란(倭亂)이라고 하는 건 일종의 비하(卑下)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부분이다. 이때의 전쟁을 ‘왜란이 아니라 전쟁으로’ 잘 이해해야 이후 일본 제국주의와 그 실체인 정한론(征韓論)의 배경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임진년의 전쟁을 국제 정세의 큰 틀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 이번 영화 ‘노량 : 죽음의 바다’의 진짜 내용이고 감독이 짜놓은 서사와 전쟁 신이라는 협공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하려는 메시지의 실체이다. 영화의 오프닝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인 이유가 그 때문이다. 히데요시의 죽음은 일본 내부에 필연적인 권력 다툼을 예고하는 것이고 그 중심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있을 것이다. 히데요시의 세력은 나중에 서군으로(그들의 본거지는 원래 오사카였고 히데요시는 거대한 오사카 성을 축조해 그 안에서 살았다.) 이에야스 파는 동군으로(나중에 에도, 곧 도쿄에 막부를 연다.) 무장하고 세키가하라에서 대 혈투를 벌인다. 지금의 기후 현(県) 일대이다. 기후 현에는 나고야 시가 있다. 이게 1600년이고 노량 해전이 벌어진 때는 1598년이다. 조선 남부에 진을 치고 있던 일본의 두 수장, 소서행장들은 고니시 유키나가(이무생)와 시마즈 요시히로(백윤식)이다. 당연히 둘 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수하들이며 反 도쿠가와 이에야스 파 들이다. 이들 중 세키가하라에서 살아남은 시마즈 요시히로는 나중에 사쓰만의 자기 번에서 세력을 키운 후 그 위의 조슈 번과 동맹을 맺고 이에야스 막부에 맞선다. 이들의 ‘삿초 동맹’은 천황 중심의 실질적 중앙집권 체제의 구축을 계획하는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다. 천황 중심의 친위 쿠데타이다. 이 세력 한가운데의 인물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이다. 임진왜란이 아니라 임진년의 조일 전쟁의 내면에 일본 제국주의의 흐름이 어떻게 조성되고 있었는 가를 아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김한민은 이순신의 대사에 “이번 전쟁은 여기서 반드시 끝을 내야 한다”는 말을 넣은 것이며 이순신뿐만 아니라 총명했던 광해의 입을 통해서도 “아직도 (그 의미를) 모르겠소”라며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행상 전투 신의 극한 체험은 수많은 배가 학익진을 펼치거나, 이순신의 전투 선박들이 일본이 짜놓은 대열의 허리를 끊고 들어가는 장면이거나, 후미를 공격하는 모습이거나 하는 등등이 아니다. 결코 흔히들 생각할 수 있는 CG의 극대화를 통해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김한민이 창조해 낸 해상 전투 신의 진정한 쾌감은 거의 후반 마무리 즈음에 나온다. 조선과 일본 수군은 양측 모두 정면 공격을 감행하고 접선(接船)으로 충돌을 일으킨 다음 양측 병사 모두가 엉켜 어느 쪽이라고 할 것도 없이 양쪽 배 위 모두에서 백병전을 벌이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김한민과 촬영감독 김태성은 ‘원 씬 원 컷 롱 테이크’로 찍어 냈다. 카메라를 한 번도 끊지 않고 하나의 컷으로 이어 가면서도 이를 핸드 헬드(들고 찍기)로 촬영한 것이다. 어마어마한 고난도의 촬영이며 이런 그림을 만들려면 감독의 완벽한 디자인이 사전에 머릿속에서 이미 짜여야 한다. 배우 모두와의 합이 절대적인 건 기본이다. 한 번의 NG는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장면이 좋은 진짜 의미는 ‘무명의’ 병사들이 벌이는 생존의 살륙전을 보여줌으로써 임진 전쟁이 얼마나 잔혹하고 비극적이었는가, 그걸 넘어 전쟁 자체가 갖는 희생이 얼마나 큰 것인 가를 육체의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원 테이크 신’을 보여 준 후 김한민은 그 지옥의 싸움을 내려다보는 이순신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커트한다. 그리고 다시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병사들을 바라보는 이순신의 시점을 쇼트로 커트한다. 김한민은 이순신의 얼굴에 살육의 비극을 바라보는 복잡한 심정의 표정을 담아낸다. 근데 그 표정과 이순신의 반복되는 대사 ‘이번에 이 전쟁을 반드시 끝내야 한다’는 것은 오히려 상충되는 듯 보인다. 살육을 통해 살육을 끝내겠다는 그 이율배반의 철학이야 말로 이순신이 지닌 궁극의 전쟁 철학이었음을 영화는 밝혀 내고 있다. 이순신 노량 해전의 의미는 거기서 나온다. 전쟁으로 전쟁을 끝낸다! 그리하여 전쟁을 할 때는 때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 중도에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곧 전쟁을 끝내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조선 내의 주전론과 화친론 사이의 전쟁 철학의 차이를 그려 내고 있다. 얼마나 윤색이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순신이 전투를 독려하며 치는 북소리는 영화 후반부의 극장 안을 휘어 감는다. 일본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 북소리 때문에 미쳐 간다. 그는 귀를 틀어막으며 ‘누가 저 북소리 좀 멈추게 하라’며 구토를 한다. 이순신의 북소리는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이다. 관객들 역시 영화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귓가를 울리는 그 북소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자신들을 발견한다. 상업영화가 가져가야 할 여운의 극대화를 이만큼 살려 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고 김한민의 노련한 연출은 그 점을 충분히 염두에 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의 흥행이 또다시 성공의 수치로 육박해 갈 수 있다면 그건 순전히 영화 속 이 이순신의 북소리 때문이다. 셋째 아들 이면(여진구)의 죽음과 그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순신의 내면을 담아내는 방식도 특이하다. 이순신은 자주 아들에 대한 꿈을 꾼다. 방 씨 부인(문정희)은 그런 그를 두고 방을 나서면서 말한다. “아들은 죽어서도 아비 곁으로 오는군요. 다음에 또 만나면 이제는 어미한테도 좀 오라고 얘기해 주시구려.” 임진년의 전쟁이 모성과 여성성에 얼마나 큰 상처를 냈는가를 보여 준다. 이번 영화에는 문정희처럼 그렇게 한 신만 나오는 배우들이 적지 않은데 아들 이면 역의 여진구가 나중에 이순신의 환상 속에 나와 ‘아버님 너무 힘들어 하지말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울컥하는 심정이 된다. 이순신 한 명에게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정재영이 맡은 진린의 캐릭터라든가, 항왜 준사 역의 김성규, 송희립 역의 최덕문, 심지어 일본 장수 시마즈 역의 백윤식까지 캐릭터들을 매우 입체적으로 다뤄 냈다는 점은, 이 영화가 균등의 미학에 얼마나 치중했는가를 보여준다. 그 점이 좋다. 김한민의 이순신 3부작 중 이번 노량은 단연 최고의 작품이다. 감독은 영화를 만들면서 자신의 영화를 통해 진화하고 진보한다는 진리를, 김한민은 이번에 톡톡히 보여 준 셈이다. 그의 ‘임진 전쟁’에 대한 행보, 새로운 해석이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해진다. 그것도 매우.
육상효 감독의 신작 ‘3일의 휴가’는 장르상 판타지로 분류돼 있지만 그 내면을 조심스럽게 따라가다 보면 사실은 공포영화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05분의 러닝 타임 내내 극장 안에는 거의 통곡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이 영화를 보면서 울지 않는다면 세상 최고로 무감각한 냉혈한 소리를 듣거나 적어도 자신의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인간이란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심지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인간 소리를 듣게 될 수도 있다. 당신의 돌아가신 엄마가 결국 당신을 버릴 수도 있다. 그건 ‘13일의 금요일’의 아이스하키 복면을 쓴 연쇄살인마에게 쫓기는 꿈만큼 무서운 일이다. 아무리 무심한 인간인들 엄마 얘기에 등을 돌려서는 안된다고, 죽은 엄마에게조차 버림받을 정도로 눈물 한 방울 없는 인간이 돼선 안된다고 우리는 유치원 때부터 들어오며 자랐기 때문이다. 영화 ‘3일의 휴가’는 엄마 얘기이다. 그것도 죽은 엄마다. 자신이 임종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 엄마가, 뒤늦은 죄책감에 빠져 사는 딸아이를 위해 하늘나라에서 3일간 휴가를 받아 자식 곁으로 잠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딸은 엄마를 보지 못한다. 엄마는 살아 있는 딸의 일에 개입하면 안된다. 아이를 만져서도 안 된다. 살아생전 딸은 내내 못되고 모질게 굴었지만 엄마는 죽어서도 그런 딸을 보듬고 싶어 한다. 그런데도 이런 모습을 보면서 당신이 안 울 수 있다고?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차라리 공포이다. 모두들 자신의 엄마에 대한 죄책감, 죄의식을 어두운 극장 안에서 새삼 꺼내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육상효는 2010년 ‘방가? 방가!’와 2012년의 ‘강철대오 : 구국의 철가방’을 만들며 주류 영화계에 안착했다. 그는 그 이전부터 가장 잘 쓰는 시나리오 작가 소리를 들었으며 스스로 개발한 시나리오 작법의 매뉴얼(그는 최근 저서 『이야기 수업』을 냈다)로 영화과 교수 생활을 할 정도였다. 육상효는 어떻게 보면 한국의 로버트 맥키 같은 인물이다. 맥키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훌륭한 시나리오 작가…라기 보다는 가장 훌륭한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을 가르치며 좋은 시나리오와 그렇지 않은 작품을 구별해 주는 인물이다. 육상효는 자신이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 전 임권택 감독의 작품으로 유명해졌다. 임권택의 1996년 영화 ‘축제’가 그가 쓴 각본이었다. 김홍준 감독의 걸작 ‘장미빛 인생(1994)’의 각본 작업에도 참여했으며 김유진 감독의 1995년 영화 ‘금홍아 금홍아’도 그의 시나리오 작품이다. 훗날 2015년에는 임권택 감독의 마지막 영화 ‘화장’을 각색할 만큼 오랜 기간 영화계의 ‘그림자’로 뛰어난 역할을 많이 했던 인물이 바로 육상효이다. 그가 만든 이번의 ‘3일의 휴가’는 놀랍게도 직접 쓴 시나리오가 아니다. 유영아가 쓴 것을 일부 각색과 연출만 맡은 것이다. 유영아는 ‘국가대표 2’와 ‘82년생 김지영’ 등 현재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는 영화 및 드라마 작가로 유명하다. 아마도 짐작컨대 ‘3일의 휴가’가 모녀의 얘기이며 딸의 시선과 정서가 강하게 투영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여성성’의 골간을 꾸린다는 건 장년의 남자 감독으로서는 다소 부담이었을 것이다. 유영아가 쓴 섬세한 글의 맛을 육상효는 능숙하고 능란하게 영상으로, 배우들의 연기로 빚어냈다. 환상의 조합이 이루어진 셈이다. ‘3일의 휴가’는 하늘에서 내려온 엄마(김해숙)가 여전히 딸 때문에 마음고생을 이어 가는 설정으로 돼 있다. 배경은 경북 김천 시이며 여기서도 조금 더 시골 안쪽으로 들어간 허름한 공간이다. 딸(신민아)은 엄마가 그렇게 생고생을 하면서 키워 냈고 그래서 미국 유학까지 보내 박사가 되게 만들었지만 정작 지금은 엄마의 시골집으로 들어앉아 촌부(村婦)로 살아가겠다는 양 속 터진 일상을 이어 가는 중이다. 이 신식의 촌 아낙네는 어깨너머로 기억하는 엄마의 온갖 가정식 음식을 만들어 스스로 해 먹는다. 가뭄에 콩 나듯 찾아 드는 손님들에게 밥도 팔고 동네의 노인들, 과거 엄마의 이웃들과 같이 나눠 먹기도 한다. 죽은 엄마 유령은 딸의 행태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건 동네 이웃 노인들도 마찬가지 심정이다. 그들은 딸에게 어여 너의 길을 가라고, 그게 네 엄마가 원하는 것이라며, 아예 마을을 떠나 다시는 돌아 오지 말라고 윽박지른다. ‘3일의 휴가’는 언뜻 설정을 듣거나 외간을 살짝 엿보기만 해도 도무지 2시간 가까운 시간의 에피소드를 이어 가기가 쉽지 않게 느껴진다. 그렇게 이야깃거리가 많을까. 그런데 육상효는 그걸 해낸다. 현실의 에피소드가 떨어질 만하면 딸의 기억을 통해 어머니의 과거가 펼쳐지며 거기에서 또다시 눈물 한 바가지를 쏟게 만든다. 엄마는 딸을 자신의 동생 집에 맡기고 재가 아닌 재가를 했는데 그건 새로운 남자의 두 아이를 키우는 조건으로 자신의 딸이 다녀야 할 학교 교육비를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가정부 유모 같은 일을 하기 위해 여자는 자신의 딸을 자기에게서 떼어 놓은 셈이다. 엄마는 그게 딸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딸은 끝내 엄마의 선택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3일의 휴가’의 진짜 설정은 여기서 나온다. 영화는, 죽은 엄마가 살아 있는 딸을 멀리서나마 재회하는, 그런 단순하고 진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엄마가 살아 있을 때 딸은 늘 못되고 모질기 그지없으며 엄마는 늘 그런 딸에게 이상하리만큼 쩔쩔매게 된다는 그 고유의 관계 자체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근데 그건 기이한 보편성을 지닌다. 현실에서도, 아니 현실에서는 더욱더 잘 해 주려는 엄마에게 딸은 늘 짜증을 낸다. 그리고 돌아서서는 후회를 하는데 그렇게 후회하는 자신 때문에 더 짜증을 낸다. 그래서 또 엄마를 만나서는 또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부리고 소리를 친다. 그러지 않는 딸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딸이 비로소 짜증 증후군에서 벗어날 때는 엄마가 이미 죽은 후이다. 신의 이상한 장난 같은, 인생의 그런 악습의 굴레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자식, 딸은 한 명도 없다. 영화는 전 극장 안에 그런 후회의 탄식을 쏟아 내게 만든다. 어떤 관객들은 부끄럼 없이 소리 내어 울기도 한다. 육상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치의 용서도 없이 극한의 신파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 한순간도 쉬지를 않는다. 그는 이를 악물고, 자 그러니 다들 울면서 속죄하라고 몰아친다. 그건 하늘의 명을 받고 매몰차게 밀어붙이는 저승사자 같은 느낌을 준다. 그 지속적인 톤 앤 매너를 지켜 간다는 점에서 육상효가 얼마나 구전의 기술력이 뛰어난 감독인 가를 보여 준다. 실컷 울고 나오게 한다는 점에서 ‘3일의 휴가’는 극단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사람들은 이 영화가, 모질고 척박한 세상에서, 모두들 (엄마가 가르쳐 준) 삶의 가치보다 사회가 만들어 낸 성공과 성취의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진정한 자아의 성숙이 어디서부터 시작돼야 하는가를 깨닫게 한다. 그건 일종의 도덕적 깨달음이다. 세상이 구원받는 것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이다. 세상은 모성의 본질을 아는 자들만이 구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3일의 휴가’가 만들어 내는 놀라우면서도 새로운 사회 이데올로기이다. ‘3일의 휴가’는 놀랍도록 극단적인 신파의 영화이다. 그런데 바로 그 극한의 경험이 이 영화에 대한 호평을 이루어 낸다. 육상효는 여전히 이야기꾼으로서의 구력과 기력이 대단한 인물임을 입증해 냈다. 관객은 수백만까지는 들지 못했다. 이 영화는 관객 수가 중요하지가 않다. 사람들은 진심으로 입소문을 만들어 내고 있다. 흥행이 대박은 아니더라도 육상효라는 감독의 존재가 새삼 증명됐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유의미한 작품이다. 그거면 됐다.
넷플릭스 영화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는 명령어이다. ‘세상을 등지고 떠나라’란 의미다. 그래서 영화 속 주인공 가족 클레이와 어맨다 부부, 그리고 이들의 자녀 아치와 로즈 남매는 어느 날 충동적으로 집인 브루클린을 떠나 동부 포인트 컴포트라는 해변 마을로 여행을 온다. 어맨다(줄리아 로버츠)는 비수기를 이용해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에어 B&B를 빌렸는데 집이 꽤나 호화로워서 마음에 들어 한다. 그런데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거대한 유조선이 해변 백사장으로 돌진하는데 항법 장치의 오류 때문이다. 집 앞에는 자꾸 사슴이 나타난다. 처음엔 한 마리, 그리고 점점 더 많이, 나중에는 떼 거지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밤중에 원래 이 빌라의 주인공이라고 주장하는 흑인 남자 G.H.스콧(마허샬라 알리)과 그의 딸이 방문을 하고 시내 곳곳이 정전이어서 하룻밤 ‘자기 집’에 머물고 가겠다고 요청한다. 하기야 모든 인터넷이 끊기고 와이파이는 전혀 작동하지 않으며 당연히 내비게이션의 GPS 등도 다 먹통이 된 상태이다. 와이파이가 전혀 터지지 않고 모바일 폰이 구실을 완전히 못하게 되면 현대인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어맨다의 남편 클레이(에단 호크)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시티 칼리지에서 영어와 미디어를 가르치지만 인터넷이 없으면 당연히 길도 못 찾고, 정보나 뉴스를 볼 수 없으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도 못할뿐더러, 이런 일에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던 사람인지라 온통 혼돈과 혼란 속에서 헤맨다. 그는 사전에 주어졌던 시그널을 전혀 알아 채지 못했던, 그저 모바일 의존증이 절대적이었던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건 어느 정도 어맨다도 마찬가지이다. 16살인 아들 아치(찰리 에반스)는 오직 여자들 몸매에만 관심이 있어 비키니 입은 G.H.의 딸 루스(마이할라 헤럴드)를 몰카로 찍기에만 집중한다. 그나마 핸드폰의 사진 촬영 기능은 인터넷과는 상관이 없는 거라 가능한 얘기이다. 동생인 로즈(파라 맥켄지) 역시 오로지 태블릿PC로 시트콤 드라마 ‘프렌즈’의 마지막 회를 볼 생각밖에 없다. 그런데 인터넷이 안되는 상황이다. 로즈도 ‘멘붕’이 오기 시작한다. 주변은 점점 아수라장으로 변해 간다. 비행기가 떨어지고(당연히 비행 항법 장치가 뒤엉켜 있을 테니) 자율주행차들은 제멋대로 고속도로를 달려가 사고를 낸 후 길을 완전히 막히게 한다. 동물들이 뛰어다니고, 이상한 굉음(혹은 극초단파라 불리는 방사능 소음) 때문에 모두들 귀청이 떨어질 뻔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치는 멀쩡했던 이빨이 다 빠져 버리는데 그게 다 이 이상한 소음 때문이다. 그건 실제로 쿠바 미국 대사관에서 벌어진 일이긴 했다. 아직 그 실체와 배후를 못 밝힌 사건인데 대사관 직원들 상당수가 갑자기 눈이 멀거나 쓰러져 사망했고 그것은 알아챌 수 없었던 극초단파 소음 때문이었음으로 잠정 결론이 내려진 상태다. 미국은 이를 러시아의 공작이었다고 생각했다. 버락 오바마 정부 때의 일이었다. 이때 미국은 60년 만에 쿠바에 대한 경재 봉쇄를 풀고 미-쿠바 간 수교를 맺었다. 1962년 미-쿠바 미사일 사태 이후 처음 있었던 실로 역사적인 일이었지만 극초단파 의심 사건 이후 쿠바 내 미국 대사관은 잠정 폐쇄됐고 트럼프 정부에 의해 수교는 다시 단절됐다. 이번 영화에서 이 얘기가 나오지만 사람들은 잘 알아 채지 못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나마 14살짜리 로즈가 어쩌면 가장 똑똑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아이는 엄마에게 침대에 누워 자기가 본 미드 ‘웨스트 윙’에서의 일화를 소개한다. 엄마가 너 ‘웨스트 윙’도 봐?, 라고 묻자 아이는 아론 소킨이 쓴 회 차만 본다고 대답할 정도로 영리하다. 로즈가 말하기를 한 남자가 있고 그는 기도를 열심히 하며 살아가는데 어느 날 홍수가 터졌지만 하나님이 구해주실 거라고 믿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남자가 배를 타고 와서 구해 주려 했지만 내게는 하나님이 있다며 거부했고 나중에는 헬리콥터가 와서 그를 구하려 했지만 역시 하나님 핑계로 피난을 가지 않았다. 그는 결국 물에 빠져 죽었는데 하나님 앞에 간 그는 왜 자신을 구해 주지 않았느냐고 거칠게 항의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 가라사대, 나는 너에게 배도 보냈고 헬리콥터도 보냈느니라. 로즈는 이 얘기를 엄마에게 자분자분 하면서 “나는 더 이상 앉아서 기다리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 실제 강철 룸으로 돼 있는 패닉룸, 곧 방공호를 발견하는 것은 로즈이다.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영어로 얘기하면 ‘디스거스팅’하다. 욕지기가 날 만큼 자기모멸적이다. 국가 시스템이 붕괴하고 세상이 무너져 내릴 때 사람들, 특히 지식인이라고 떠들며 살았던 사람들, 중산층, 상류 지배층의 사람들은 무능한 것이 아니라 그저 무기력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첨단 기기가 아무것도 제공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는 모든 것이 속수무책일 뿐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들 우리 자신의 여러 측면을 한 가지씩 반영하고 있다. 어맨다는 필요 이상으로 신경질적이고 계산적이며 G.H.의 딸 루스는 그야말로 ‘싸가지가 바가지’여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화가 나게 만든다. 어맨다는 상황이 자기 주도권에서 벗어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루스는 어맨다의 태도를 다소 무조건적으로 (인종) 차별적이라고 받아들인다. 예컨대 이런 대사이다. 풀을 가리키며 “당신은 수영 안 해?”라고 루스가 묻자 어맨다는 너나 하라는 식으로 대답하더니 루스마저 안 하겠다고 하자 이렇게 말한다. “왜? 머리 때문에?” 흑인들의 머리는 물에 젖으면 더 곱슬거리게 되기 때문이다. 투자 분석가이자 미래산업 분석가인 G.H.는 클로이에게 국가 붕괴 3단계를 말한다. 자신의 클라이언트 중에 방산업체 큰 손이 있고 그가 어느 날 가장 가성비가 좋은 프로젝트라며 설명해 준 게 있다는 것이다. 첫째 모든 방송 통신을 해킹으로 끊고 타깃 국가를 고립시킨다. 둘째 국가의 모든 시스템을 하나하나 제거한다. 셋째 자연발생적으로 군사 쿠데타를 유도한다. 영화는 실로 그 과정을 차례차례 보여 준다. 영화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에서 가장 무서운 말은 ‘누군가 국가를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통제할 수 있는 그 누군 가가 존재하지 않을 때가 더 문제’라는 것이다. 최고의 혼돈과 혼란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온갖 가짜 뉴스와 편견이 판을 치게 만든다. G.H의 이웃이었던 대니라는 남자(케빈 베이컨)는 엽총을 들고나와 G.H.와 클로이를 위협하면서 이 모든 것은 한국이 저지른 짓이라고 말한다. 아니면 중국이거나. 영화에서는 그냥 한국이라고 말한다. 북한이나 남한을 구별하지 않는다. 어쩌면 트럼프 류의 극보수 미국인들은 군사와 테러로 위협하는 북한이나 경제와 문화로 우위에 서려 하는 남한이 다 똑같은 존재일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들은 다 어떻게 됐을까. 생존해 낼 수 있었을까. 생존의 가치는 무엇인가. G.H.가 현명한 척 어맨다에게 얘기하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일 것이다. 그는 자신들이, 결국 ‘살아남더라도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맞는 얘기이다. 지금이라도 하루 두 시간 정도는 모바일 폰을 들여다보지 말 것이며 아는 길은 굳이 내비게이션을 보지 말고 이정표와 거리 감각으로 찾아가 보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영화가 주는 아주 간단한 충고이기도 하다.
2007년에 나온 ‘록키 발보아’란 제목의 영화는 다소 말이 안 되는 설정이어서 당시의 평단에서는 애초부터 관심을 못 끌었던 작품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다 늙은’ 실베스터 스탤론이 ‘다 늙은’ 록키 역으로 나와 젊고 탄탄한 몸매의 선수를 상대로 다시 한번 링 위에 올라간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록키 발보아’는 1990년에 나온 ‘록키5’ 이후 17년 만의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 늙은 영화’인 ‘록키 발보아’는, 물론 흥행은 그다지 잘 안됐지만, 그래도 꽤나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단순한 권투 영화라기 보다는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건 상실에 대한 것이었으며 상실감 자체를 극복해 내는 것보다 그걸 어떻게 치유해 내고 무엇보다 그럴 수 있는 사람들과 같이 하느냐에 대한 얘기였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1977년에 나온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 ‘록키1’이 사실은 권투 영화가 아니라 러브 스토리였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록키’ 시리즈는 싸구려인 척 알고 보면 그 내면에 상처와 상실, 사랑, 가족의 연대 같은 주제를 담고 있는 휴먼 드라마였다. ‘록키 시리즈’는 할리우드 프랜차이즈 영화의 시초 격 작품이었으며 실베스터 스탤론은 이것 말고도 ‘람보 시리즈’와 최근의 ‘익스펜더블 시리즈’까지 할리우드의 트렌드를 이어 나가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스탤론의 일대기 아닌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슬라이’에 담겨 있다. 슬라이는 실베스터 스탤론의 닉 네임이다. 일대기 아닌 일대기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생애가 다소 그의 ‘입맛’에 맞춰져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고 늘 그렇듯이 작품의 제작 과정에서 상당 부분 그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 다큐는 그가 어떻게 ‘록키’란 영화로 성공하게 됐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이한 것은 단순한 성공담을 넘어 그의 입지전적인 특성을 제대로 보여 주려 애쓰고 있는데 그건 그가 일종의 싱어 송 라이터로서 각본, 연출, 제작, 주연을 모두 맡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록키 시리즈는 순전히 그가 1인 다역을 맡아 만들어 낸 작품이다. 사람들은 그를 근육질의 액션 스타로만 생각하고, 따라서 거의 대사는 하지 않는, 다시 말해서 머리가 별로 똑똑하지 않은 연기자 아닌(연기파가 아닌) 연기자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다큐 ‘슬라이’를 보고 있으면 오히혀 그가 매우 똑똑한 인물인데다 현명하기까지 하다는 점, 삶의 체험에서 녹여 온 인생철학이 꽤나 두터운 부피감을 지니고 있는 배우임을 알게 한다. 그는 영화 속 캐릭터를 대체로 자신이 겪었던 일에서 가져왔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록키1’에서 복싱 코치가 그의 집으로 찾아와 자신과 함께 훈련을 하자며, 자신이 그를 키워 주겠다고 하지만 록키가 매몰차게 거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코치는 이전에 그를 체육관에서 쫓아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슬라이’에서 스탤론은 그 장면을 회상하면서, 그 씬을 찍을 때 어릴 적 자신을 두드려 패고 못되게 굴었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리허설을 찍었는데 너무 리얼하게 대사와 액션이 나왔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스탤론의 연기가 그야말로 경험과 삶에서 툭툭 튀어나온 것임을 보여 준다. 록키 시리즈의 마지막인 ‘록키 발보아’에서도 아들과 말싸움을 하면서 하는 대사 “이 세상에서 가장 센 건 인생이라는 주먹이야.”도 비교적 애드립처럼 튀어나온 것이다. 실베스타 스탤론이 걸어온 배우 인생, 영화 인생이 꽤나 흥미로운 에피소드들로 가득 차 있음을 나타내는 장면들이다. ‘슬라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46년생인 실베스터 스탤론의 배우 인생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며 그가 아직도 상업적 가치가 높은, 수익성이 있는 스타급 배우임을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그는 2023년 최근까지도 액션 영화 ‘익스펜더블4’를 찍었으며 제작과 주연을 맡았다. ‘익스펜더블’ 시리즈는 그가 60대에 들어서면서 창조해 낸 새로운 시리즈로 나이 든 액션 스타들이 총출연하는 작품이다. 이제 브루스 윌리스는 치매에 걸려 나오지 못하고 있지만 아놀드 슈왈츠네거, 제이슨 스태이덤, 돌프 룬드그렌, 심지어 태국의 ‘옹박’인 토니 쟈까지도 소환시키고 있다. 실로 대단한 섭외력인 바, 그건 어디까지나 스탤론의 아이디어가 좋아서였고 그래서 난다 긴다 하는 액션 스타들이 다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스탤론은 어느 날 한물 간 록밴드 콘서트에 갔다가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한다. 이 지면을 통해서도 소개된 바 있지만 국내 OTT 티빙(TVING)에 탑재돼 있는 ‘파라마운트+’의 시즌 드라마 ‘털사 킹’도 실베스터 스탤론의 최신작이다. 77살인 그의 현재 모습을 볼 수 있는 작품으로 늙고 처졌지만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모든 영화나 드라마는 자신의 삶의 체험과 느낌에 기반하게 한다는 원칙을 강조하듯 이 드라마도 다 늙은 마피아가 새롭게 자신만의 조직을 미국 오클라호마 털사에서 재건시킨다는 줄거리이다. 이 ‘다 늙은’ 마피아는 과도한 폭력을 쓰기보다는 지략으로, 때론 말의 재간으로 상대를 쓰러뜨리고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다. 잃었던 딸과의 관계도 되찾고 가끔 애인과 시간도 보내며 새롭게 만난 젊은이들과 진한 우정도 쌓는다. 그건 마치 실베스터 스탤론 자신이 현재 할리우드에서 다 늙었다고 내쫓겨진 판국이지만 새로운 스태프와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만의 영화를 다시 찍을 수 있다며 속으로 소리치고 있는 얘기처럼 들린다. 스탤론의 영화는 스탤론 자신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의 속마음이 다 들여다 보인다. 다큐멘터리 ‘슬라이’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과연 한 인간을 움직이는 동력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꽤나 성찰적인 작품이다. 스탤론은 무명이었고, 우둔하고 바보 같은 말투에, 포르노 배우를 연상케 하는 새하얀 근육질 몸매를 지닌, 절대 성공할 수 없어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을 캐스팅하지 않는 영화계 시스템에 대항해 자기 스스로 각본을 쓰고 자기 스스로를 주연으로 뽑았다. 일부 제작자들이 시나리오의 값을 높이 쳐주는 대신 감독과 주연은 바꾸고 싶어 했지만 끝까지 거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생이 가장 센 주먹이고 거기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은 한 방 맞을 때마다 견디고, 버텨내고, 받아치고 하는 거야,라는 ‘록키 발보아’ 때의 대사처럼 세파를 견디고, 견디고, 견디어 낸 한 사람의 성공담은 꽤나 인상적일 수밖에 없다. 스탤론은 성공하기 위해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성공한 것이다. 인생은 어쩌면 늘 그 반대편에서 동력이 찾아지며 스탤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엉뚱하게도 끝없는 결핍에서 온 셈이다.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의 원천적인 결핍, 곧 부성의 결핍, 모성의 부재 등등 스탤론의 인생에는 죄 모자란 것 투성이었다. 그렇다면 스타가 된 지금은 넘쳐나고 있는가. 이제는 스러져 가고 있음에 대한 결핍=상실이 그를 움직이게 하고 있다. 다큐 ‘슬라이’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비버리힐즈의 호화로운 저택에서 그가 이사를 나오는 장면이다. 그는 ‘아들과 딸을 위해 마련한 이 큰 집에 이제 모두가 떠나고 혼자 남았다’며 이제는 잃어버린, 헐벚었던 예술가 의식을 되찾기 위해서 동부로 이사를 간다고 말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슬라이’는 우리가 몰랐던 실베스터 스탤론의 진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할리우드에서 스타가 된다는 것, 현대사회에서 성공한 삶을 산다는 것, 진짜 성공이라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 무엇보다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를 반추하고, 사유하며, 성찰하게 한다. 물론 ‘록키’와 ‘람보’ 시리즈의 성공은 레이건 정부가 만들어 낸 우파 보수 주의 시대의 특성과 맞물려 있기는 하다. 이번 다큐에서는 그런 사회정치학은 빠져 있다. 그것까지 기대하면서 볼 다큐는 아니다.
너무 많은 얘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에 같거나 비슷한 맥락의 리뷰일 것 같아 차라리 언급을 피해 왔으나 이렇게 된 이상 인기 분석은 하고 넘어가야 할 판이다. ‘서울의 봄’은 왜 인기를 모으고 있는가. 일단 관객 추이는 이렇다. ‘서울의 봄’은 첫 주 관객 수 약 189만 명을 기록했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 전산망에 기록된 수치이다. 아직 갈 길은 많이 남았다. 이 영화의 관객 수 손익분기점(BEP)은 460만 명이다. 제작비 232억 원, 본전을 채우려면 아직 좀 남았다. 이 계산은 이런저런 할인 비용을 빼고 티켓당 가격을 평균 만 원으로 계산했을 때이다. 극장과 배급사는 매출액을 5대 5로 배분한다. 이 영화의 투자배급사 플러스엠(메가박스) 등이 232억 원을 채운 다음 그래도 남는 수익은 배급간와 제작사(하이브미디어코프)가 다시 5대5로 나누게 된다. 그러니 460만 명을 넘겨야 그때부터 수익금 배분을 시작할 수 있다. 따라서 아직 꽤 걸어가야 한다. 통산, 업계에서는 최종 관객 수를 첫 주 관객 수 곱하기 3으로 본다. 경기가 좋을 때의 얘기다. 어쨌든 그런 식이라면 ‘서울의 봄’은 첫 주 190만 정도이니 최종 600만 관객은 내다볼 수 있게 됐다는 얘기이다. 영화 흥행이 450만을 넘기는 것으로 예측되면 그때부터 관객 수는 다소 ‘고삐 풀린 망아지’ 형국이 된다. 어디로, 얼마나 갈지 예상할 수가 없다. 거기서 멈출 수도 있고 금세 600만 명, 700만 명이 될 수도 있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흥행 예측은 실로 오랜만의 대박이 터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올 한 해 내내 거의 그로기 상태로 비틀거리던 한국 영화계가 비상 약 처방을 받은 셈이 됐다. 같은 배급사 플러스 M의 또 다른 투자 작품 ‘헌트’(감독 주연 이정재)는 430만 명 선을 모았다. 450만의 문턱을 넘지 못했으며 따라서 450만이란 수치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이다. 관객이 이렇게 동원되려면 연령별로 고른 지지를 받아야 한다. 쉽게 말해서 큰 제작비의 영화는 대통령 선거이다. 대통령이 되려면 가능한 전 연령층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대박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남녀 간 지지세도 거의 균등해야 한다. ‘서울의 봄’은 30대가 30%로 가장 높다. 40대가 25%, 20대는 24%, 50대는 17%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의 봄’은 12세 관람가이다. 10대 관객이 4% 선인 이유는 이들이 이해하기에 너무 오래된 역사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12.12 쿠데타는 1979년, 44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 10대 관객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오래되고 무거운 얘기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남녀 관객 비율이 49대 51로 비교적 비등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 관객들이 다소 더 선호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이 차이는 흥행 속도가 붙으면서 조금 더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극장 문화는 여성들이 주도하는 경향이 있고 여성 관객이 많아지는 것은 청신호로 받아들여진다. ‘서울의 봄’은 공개 당시 한편으로 매우 우려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어두운 현대사를 다룬 영화는 웬만큼 완성도가 높지 않고서는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젊은 관객들은 역사를 통해 지금의 현실을 유추해 내거나 상징화 시키는 영화를 철저하게 외면하는 경향을 보인다. 적절한 예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가 흥행에서 철퇴를 맞았던 것은 두고두고 회자될 일로 꼽힐 정도다. 아무리 영화를 잘 만들었어도, 재미가 철철 넘친다 해도, 그 재미와 의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더욱이나 쿠데타, 정변, 정치적 선거를 다루는 영화는 아예 거들떠도 안 보는 상황이다. 정치적 부패에 대한 얘기는 ‘정직한 후보’마냥 완전히 코미디로 만들지 않으면 TV 드라마의 양념 정도로 전락한 소재가 된지 오래다. 코로나 후유증이 남아 있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헌트’가 성공했던 것은 아웅산 테러 사건을 첩보 액션, 특히 액션에 방점을 두고 찍었기 때문이다. 과거사든 현대사든 이를 정면으로 다루는 한 성공하기 힘들다. ‘서울의 봄’의 흥행 요인도 이 점에서 착안된다. ‘서울의 봄’은 12.12 쿠데타의 10시간가량을 시간별로 촘촘하게 따라가긴 하되 이를 선악의 대결 구조로 풀어 낸다. 한편에는 반란군이라는 『악의 무리=(서부극의) 악당들 이미지=(마피아)갱스터=전두광(전두환 당시 보안 사령관) 일당』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이에 맞서는 진압군, 곧 『선한 사람=보안관 이미지=조폭과 싸우는 사람들=이태신(장태완 당시 수도경비 사령관)』이 있다. 선악의 이분법이라는 단순한 서사가 1979년과 1980년으로 넘어가던 복잡한 정치 환경을 한눈에 들어오게 한다. 이 시기를 겪지 않은 젊은 관객들로 하여금 저 시대의 역사를 한 번에 조감하게 하고 유추하게 하며, 추체험하게 만든다. 바로 그 점이 2,30대 관객들을 동원하고 있는 장치 중의 장치이다. 복잡했던 역사를 단순하게 풀어 내는 것. 그 전략과 전술이 잘 들어 맞은 셈이다. 영화적 성공과 성취는 의외로 단순한 데서 온다. 또 하나의 성공 요인은 긴박한 흐름, 그 서스펜스를 2시간 21분의 러닝타임 동안 줄곧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마치 21분 정도가 흐른 것으로 착각할 정도다. 사건이 숨 가쁘게 흘러간다.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이태신 장군(정우성)이 아내(전수지)와 밥을 먹거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불필요하지 않을 만큼만 썼다. 이 영화에는 그야말로 단 한 커트도 버릴 것이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수경사 사령관 이태신의 말대로 ‘수도 서울을 누가, 어느 쪽 병력이 장악하느냐’였다. 실제로도 싸움의 열쇠였다. 그렇다면 영화는 그 ‘장악’의 시도, 동선을 보여줘야 한다. 특전사 휘하의 3공수 5공수가 반란군에 가담해 행주 대교 등 한강을 넘어 육본과 국방부를 치고 들어가려 한다. 9공수만이 국가를 배반하지 않고 이에 맞섰으나 육군 참모차장(유성주)의 우매한 판단(9공수를 물리면 5공수도 물리겠다라는 전두환의 거짓말 협상에 넘어간 것)과 노재현 국방부 장관의 비열하고 비루한 행동 등이 겹쳐 장태완 사령관은 쿠데타 군을 저지하는데 실패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사대문 안 경복궁 내에 있던 수도경비 사령부 휘하의 30경비단 단장의 배반도 치명적이었다. 그 긴장의 흐름, 격렬한 움직임을 영화가 담아내는데 성공한다. 여담이지만 30경비단은 장세동이 지휘관이었다. 장세동은 자신의 직속상관이었던 장태완 장군을 배신하고 쿠데타 군 쪽에 섰다. 반역이 성공한 후 그는 안기부장, 대통령 비서실장 등등 권력을 누렸다. 전두환이 죽을 때까지 그에게 충성을 다했다. 영화 속에서 정우성은 부대 장병들에게 더러운 반역자 장민기(안세호, 장세동)를 체포해 오고 저항하면 곧바로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서스펜스와 미스터리의 차이는 결과나 결말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이다. 책상 밑에 폭탄이 설치돼 있고 그것을 관객들은 아는데 극중 인물들, 특히 주인공만 모르고 있는 상황이 서스펜스이다. 폭탄의 유무를 아무도 모르는데 갑자기 터지는 상황이 미스터리이다. ‘서울의 봄’의 결말, 12.12 쿠데타에서 누가 이겼는지, 그 시대의 폭탄은 누구였는지, 관객들은 이미 다 안다. 때문에 서스펜스의 긴장감으로 극을 채우지 않으면 관객들이 이를 다시 지켜볼 이유가 없다. 러닝 타임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느낌을 주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흥행하고 있는 이유이다. 정우성이 너무 멋있다. 황정민은 미친 듯한 연기를 펼친다. 국방장관 역의 김의성은 너무 비루하다. 특전사 사령관 정병주 소장 역의 정만기는 진정으로 군인답다. 그를 지키다 사살당하는 김오랑 소령 역의 정해인 때문에 관객들은 눈물을 흘리게 된다. 배우들의 투혼 연기, 그 진정성이 영화를 살린 최대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진심이 있는 영화이다. 그 진심이 통하고 있다. 축하할 일이다. 어떤 면에서 영화 한 편이 현시점의 나라를 구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독전 2’는 생각보다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넷플릭스로 직행한 ‘독전 2’는 공개 일주일 만에 세간에서의 평가가 급전직하했으며 이에 따라 인기 순위에는 오르고 있으나 비호감 순위도 아주 높을 것으로 전망된다. ‘독전 2’의 평가는 왜 바닥인가. 그건 아무래도 전편의 인기가 매우 높았으며 그에 따른 기대치가 높았던 것 때문으로 보인다. 요즘의 관객들, 영화 시청층들은 이미 시즌 물에 대한 학습효과가 높은 사람들이다. ‘제이슨 본’ 시리즈는 회를 거듭할수록 심도가 깊어졌다. 주인공 제이슨 본의 감정과 사고, 인간관계에 뭔가가 자꾸 더 생겼다. 그의 행동 동기에 대해 사람들은 점점 더 동화돼 갔다. 그게 2편, 3편, 4편이 나오더라도 사람들이 지루해 하지 않고 계속해서 몰아 보기까지 하게 만든 이유이다. 그에 비해 ‘존 윅’ 시리즈는 철학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이 택한 전법은 액션의 강도, 그 기술력이다. 존 윅은 회를 더 해 갈수록 가장 화려하고 가장 진보된 액션의 기술을 선보였다. 그렇다면 ‘독전 2’는 ‘독전 1’에 비해서 뭐가 더 나아졌는가.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생각은 더 나아진 게 하나도 없다,이다. 그래서 입소문이 안 좋은 것이다. 더 나아진 것이 없으니까. 영화는 늘 더 나아져야 하는 법이니까. 그 한 걸음의 진화에 실패한 점이야말로 ‘독전2’의 가장 큰 패착이다. 패착 1. 결과가 이렇게 된 데에는 이야기의 설정 자체 때문이다. 이건 스포일러라 볼 수 없으니 밝히는 바인데 ‘독전 2’는 전편의 마지막 장면 이후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내용이 아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데 이는 이야기가 진전되는 것이 아니라 복기되는 것을 의미하는 바, 이렇게 되면 얘기가 진화될 수가 없다. 복기는 어쩔 수 없이 동어반복, 중언부언이 된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걸 다시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독전 1’의 마지막 장면은 광역 수사대 조 팀장(조진웅)이 악당 브라이언 이사(차승원)를 마약 라이카 제조 유통 조직의 수괴로 체포하고, 사실은 그가 아니라 서영락 대리(류준열)가 이 선생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가 숨어 있는 노르웨이까지 가서 그와 담판을 벌이고 나온다는 얘기이다. 브라이언을 총격전 끝에 체포해 낸 용산역과 서 대리가 숨어있는 노르웨이로 가기까지 사이에 시간 차가 존재한다. ‘독전 1’은 그래서 뭔가 정리해 내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정리 안 한 느낌을 주고 바로 그 점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냈던 측면이 있다. ‘독전 1’의 역설적인 인기 요인이었다. 그런데 ‘독전 2’는 그 사이의 시간과 공간을 다 까발리는 내용이다. 조 팀장이 스스로 수사를 재개해 용산역 사태부터 노르웨이 담판 때까지 과연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가 노르웨이까지 오는 동안 어떤 일을 겪었고, 과연 이 선생의 정체 하나만큼은 완전하게 파악했는지, 그렇다면 과연 이 선생은 누구인지를 담아내고 있다. 그 이야기의 구술, 전개의 과정이 나름 눈물겹고, 꽤나 고생했지만, 무엇보다 나름 성의가 있었다고 보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그걸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선생은 누구인가. 이 선생은 모두일 수도 있으며 이 선생은 아무도 아닐 수 있다. 그런 식의 태도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이 선생의 실체를 밝히려 한다. ‘독전 2’의 또 다른 패착이다. 패착 3. 이 선생이 누구인지 관심이 없어진 것은 곰곰이 생각하면 진하림이 죽었기 때문일 수 있겠다. 1편에서 가장 처절한 악한의 캐릭터였던 연변 마피아 진하림(김주혁)은 죽었다. 영화 속에서 진하림은 죽었고 현실에서도 김주혁이 사망했다. 아마 그런 점들이 진하림과 김주혁이 좇던 이 선생의 정체’따위’를 사라지게 한 이유일 수 있다. 이번 ‘독전 2’의 시나리오 작가라면 대중 관객들이 갖고 있는 영화에 대한 기억, 추억, 재생의 방식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진화하는 것임을 생각했어야 했다. 이번 ‘독전 2’에서 진하림의 과거 모습은 배우 변요한이 대신한다. 그리고 그의 악랄한 캐릭터는 또 다른 연변 여인, 섭소천, 일명 ‘큰 칼’(한효주)이 대체한다. 김주혁이 변요한으로 바뀌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서 대리 역의 류준열이 배우 오승훈으로 교체된 것이다. 대중적으로 아마 이 부분이 가장 반발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오승훈은 서 대리 캐릭터의 연장을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고 나름 열심히 역할을 소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애초부터 무리한 일이었다. 특히 형사 조 팀장 역의 조진웅과 붙는 신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자꾸 류준열이 생각나게 된다. 사람들은 그 둘을 ‘브로맨스’적으로 바라 봤다. 오죽했으면 이번 2편에서도 브라이언의 입에서 “사랑하는 사람끼리 대화 한번 해 봐요” 식의 이죽대는 대사가 나왔겠는가. 류준열을 교체한 것은 ‘독전 2’의 패착 3이다. 그리고 가장 큰 패착! 기본적으로 ‘독전 2’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예민해졌다. 이상한 것, 자신들의 취향에 좀 맞지 않는 것이 단 하나라도 나오면 그런 생각과 의견을 SNS를 통해 집단화하고 특정 작품, 특정 배우, 특정 인물을 겨냥해 ‘이지메’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회가 극단화되고 있고 점점 더 그 강도가 높아지고 있는 한 가운데에 ‘독전 2’가 놓인 셈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효주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효주의 연기에 말들이 많이 쏟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판의 핵심은 그녀가 이번 영화에서 매우 과장된 연기를 펼쳐 보였고 그게 한효주와 맞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뒷부분, 그러니까 한효주와 맞지 않는다는 점은 아마도 드라마 ‘무빙’에서 선보인, 비교적 착하고 순수한 이미지 때문으로 보인다. 불행하게도 ‘무빙’과 ‘독전 2’는 붙어 있다. 두 작품 사이에 조금이라도 시차가 있었다면 이런 얘기까지는 듣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의 개봉과 공개 시점이 얼마나 민감한 것인 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한효주가 이번 영화에서 심할 만큼 ‘오버액션’을 펼쳤고 그게 눈에 거슬린다는 얘기도 다소 억울한 부분이 있다. 한효주는 김주혁을 따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영화 속에서 그 둘은 오누이 사이이기 때문이다. 섭소천도 진하림만큼 독하고 지랄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런 캐릭터 라이징은 한효주의 선택도 아니었을 것이고 한효주의 탓도 아닐 것이다. 따라서 ‘독전 2’가 보인 몇 가지 패착의 원인은 모두 감독 백종열과 제작사 용필름에게 돌릴 수밖에 없다. 영화의 모든 영광은 감독에게 돌아가지만 모든 비판과 책임을 묻는 것도 역시 감독과 제작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감독 백종열의 가장 큰 실수는 이번 2편을 1편 이상의 재미와 인기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을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해는 가지만 그런 점들은 제작자와 제작사가 좀 더 면밀하게 들여다봤어야 했을 것이다. 1편의 장점은 스타카토 형식으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1편을 ‘유주얼 서스펙트’의 한국판 마약 액션 영화로 새롭게 치장시켰다. 그런데 이번 2편은 모든 걸 다 설명하고 가려 한다. 브라이언 등은 왜 이 선생을 흉내 내려 했는지, 진하림-섭소천 남매는 왜 그렇게 이 선생 눈에 들려고 했는지, 서 대리는 왜 그렇게 모든 기획과 계획을 짜서 이 선생의 뒤를 쫓는지, 형사 조 팀장의 광기에 가까운 추적의 욕망은 어디에 기인하는 것인 지 그 모든 것을 다 설명하려 한다. 그 다변(多辯)의 서사가 이번 2편의 실제 패착이다. 패착 4! 무엇보다 이 선생의 정체’따위’는 설명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럼에도 이번 2편의 시청(관람)은 꽤 높은 수치를 기록하는 것으로 보인다. 넷플릭스의 최근 작품 가운데 ‘노란 문 :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처럼 홀대받는 수작도 있고 ‘독전 2’처럼 대접받는, 망작에 가까운 괴작도 있다. 사람들은 결국 올바른 길을 선택하겠지만 넷플릭스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는 지켜볼 일이다. 하기사 이번 ‘독전 2’를 두고 ‘카터’만큼 엉망이다 라는 얘기까지 나왔었다. 근데 뭐, 거기까지는 아니다. 넷플릭스가 자꾸 한국 영화판을 흐리게 하는 방향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좋아할 일은 아닐 것이다. 실로 다행스러운 일은 2편의 결론을 보고 있자니, 3편은 만들어지지 않겠다는 점이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묘하게도 두 가지 영화를 뒤섞은 듯한 느낌을 준다. 하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이고 또 하나는 마이클 J 폭스 주연의 ‘백 투 더 퓨처’이다. 우주 평행이론과 가족사가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 마히토(산토키 소마)는 현실 경계를 넘어 이(異) 세계를 오간다. ‘인터스텔라’의 매튜 매커너헤이가 우주 공간을 떠돌듯. 마히토는 또 다른 세계에서 어린 시절의 친 엄마를 만난다. 그건 J 폭스가 ‘백 투 더 퓨쳐’에서 그러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마히토의 엄마는 현실 세계에서 이미 죽은 몸이다. 이 영화를 두고 일부 저널들은 (익명의) 대중들로부터 혹평이 잇따르는 양 다소 과장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그 (저널)들은 영화가 불편했다고 덧붙인다. 그런데 그런 비평이 오히려 불편하고 지나쳐 보인다. 이들이 영화가 불편하다고 하는 이유는 영화의 서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지 않아서일 것이다. 물론 이 영화를 두고 재미있다 혹은 재미없다는 식의 취향이 갈리는 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렇다고 대중의 이름을 빌어 영화를 매도하는 것은 다소 지나쳐 보인다. 무엇보다 그 혹평의 근거가 1)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했고 2) 아버지가 처제와 결혼했으며 3) 영화가 친절하지 않다는 등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일부 저널들은 무엇에 기반해서 이 영화가 일본 제국주의를 두둔했다고 판단하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무작정의 비판은 편견이자 왜곡이다. 아마도 그건 주인공 마히토의 아버지가 군수업체 사장이라는 설정 때문일 것이다. 시대는 1942년, 2차 대전이 한창인 때이다. 일본 군부가 미국 태평양 함대가 있는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적으로 공격한 직후이다. 마히토의 아버지 마키(기무라 다쿠야)가 운영하는 공장은 비행기 조종석 덮개를 만들며 호황을 누리는 중이다. 마키는 시골 저택 건너에서 어디론가를 향해 가고 있는 수많은 ‘죽음’을 가리키면서 ‘덕분에 자신은 잘 살게 되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마히토는 그런 아버지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마히토는 아버지가 보란 듯이 자신을 승용차로 데려다 준 학교에서 등교 첫날부터 아이들의 ‘이지메’에 시달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돌멩이로 자신의 머리를 짓이긴다. 아버지는 학교에 돈을 뿌려 가면서까지 범인을 색출하겠다고 부산을 떨지만 마히토는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집 뒤, 거대한 탑이 있는 성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영화는 마히토의 눈을 통해 아버지(세대)의 극악했던 무지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을지언정 그들의 세계관을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태도를 보인다. 다만 그 '톤 앤 매너'가 적극적이고 전투적이지 않을 뿐이다. 영화는 전쟁이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얘기가 중심 테마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얘기인즉슨, 일본 군국주의 시대에 편승한 아버지라 할지라도 아이의 눈에는 ‘아버지는 아버지’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며 특히 자신의 어린 시절이 그랬다는 것이다. 시각이 입체적이지 않다고 해서 거기에 이념의 외투를 씌워 비난할 일은 아니다. 아버지가 엄마의 동생, 곧 처제와 재혼을 한 것을 두고 마치 불륜 관계를 연상하듯, 이 영화의 불편한 점의 하나로 꼽는 것도 올바르지 못한 처사다. 처제와의 관계는 상처(喪妻)를 한 이상 불륜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전에 아버지와 이모의 관계가 묘했다는 얘기일까. 영화에서는 그 전사(前史)를 언급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건 근친 관계도 아니다. 당시와 같은 전쟁의 시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죽고 가족관계가 파괴되는 바람에 그 굴곡의 삶 과정에서 근친이라 할 수는 없지만 가까운 사람끼리의 결합이 많이 이루어지던 시대이긴 했다. 프랑스의 앙드레 말로는 자신의 죽은 형을 대신해 형수와 동거 후 결혼했다. 그렇다면 앙드레 말로도 불편한가. 시대에 대한 내재적 이해, 공감각의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저널이 이런 식의 얘기를 남발해서는 안 된다. 이야기 구조가 난삽하고 캐릭터가 너무 많이 나온다는 등 내용에 대한 불만이 이어지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완전히 이해가 불가능한 지경은 아니다. 1942년이라면 미국이 참전하고 본토와 도쿄에 대한 공습이 줄기차게 이루어진 때이다. 이른바 도쿄 대공습의 전초전이다. 이때 미군은 이후 베트남전에서도 사용해 비난을 샀던 네이팜탄까지 퍼부어 민간인 피해가 극심했지만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는 독일과 일본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치솟았을 때였다. 일본 군국주의자들, 독일의 파시스트들의 만행을 생각하면 그건 일단 당연한 반응들이었다. 마히토의 생모는 이때의 공습으로 죽었다. 마히토는 엄마를 그리워하는데 그의 환영 속의 엄마는 매번 불길에 휩싸여서 애타게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마히토는 불타 죽은 엄마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모이자 새엄마인 나츠코(기무라 요시노)는 엄마와 똑 닮았다는 얘기를 듣지만 마히토는 그런 그녀가 오히려 낯설고 정이 가지 않는다. 마히토는 처음에 나츠코를 딱딱하게 대한다. 나츠코는 마히토를 만나자마자 아이의 손을 자신의 배에 갖다 대며 여기에 새 생명이 있고 너의 동생이 있다며 가까워지려고 애쓰지만 정작 마히토가 그녀를 ‘이모 엄마’라고 부르는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이모 엄마 나츠코는 임신으로 인해 병이 생기고 아픈 몸으로 누어 머리에 큰 상처가 난 아이를 어루만지며 죽은 언니를 무슨 낯으로 보겠냐며 눈물을 흘린다. 둘 사이는 서먹서먹하다. 시간이 한참을 지나서야, 이(異) 세계 속에서 만난 ‘어린 엄마’ 히미(아이묭)로부터 둘의 관계를 ‘허락하는 듯’한 느낌을 받고 나서야 新 모자 관계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궁극으로는 한 소년이 겪는 마더 콤플렉스와 이에 따른 성장기이다. 시대가 불온하고 불안했을 뿐 그건 어느 시대 어느 누구나 겪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의 보편성, 일반성은 여기에 있다. 그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후죽순의 수많은 캐릭터와 그 곁가지를 잘 처리하고 정리해 낼 수 있다. 마히토를 탑의 성, 그 깊은 심연으로 인도하는 것은 왜가리이다. 이 왜가리는 자신 몸속에 있는 못생기고 못된, 또 다른 자기의 왜가리를 부리 밖으로 꺼낸 후 아이를 요리조리 데리고 다니며 교활한 행동을 한다. 왜가리는 마히토의 또 다른 자아(얼터 에고 alter-ego)이다. 마히토의 내면은 충돌하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이모라지만 아빠가 엄마를 잊고 다른 여자한테 가는 게 싫다. 자신의 머리에 돌을 찧지만 그건 아빠에게 하고 싶은 행동이기도 했다. 이모는 엄마를 너무 닮아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다. 자신도 완전히 엄마라는 존재를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히토가 좀처럼 새엄마에게 곁을 주지 않는 이유이다. 그래서 마히토는 자신의 세계에서 가능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의 안으로 더 들어가려 한다. 아이가 기를 쓰고 높은 탑을 지닌 비밀의 성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이유이다. 왜가리는 끊임없이 마히토에게 속삭인다. "엄마는 아직 죽지 않았어" "엄마가 살아서 너를 기다리고 있어" 왜가리에 이끌려 다가 간 성 앞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써 있다. “나를 배우는 자는 죽는다.” 마히토는 성 안에서 일본 군인들을 연상시키는 펠리컨과 잉꼬들의 공격에 시달리지만 결국 어린 엄마 히미의 도움을 받아 ‘(어린) 자신을 죽이고’ ‘(성장한) 자신을 되살리는 데’ 성공한다. 잉태의 방에 유폐돼 있는 이모 엄마도 구출해 낸다. 마히토는 어린 엄마와 각기 다른 문, 현실의 문과 죽음의 문을 각자 열고 가까스로 행복하게 헤어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요시노 겐자부로의 아동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이지만 여기에 하야오 자신의 일대기를 죄다 비벼 넣은 느낌을 준다. 전범국 군수공장 사장 아들이라는 점, 비교적 대저택의 시골에 살았다는 점 등이 그렇다고 전해진다. 전쟁 때문에 빚어지는 비극과 불안이 최고조인 시대였고 어쩌면 그것이 계속 반복되는 지금의 현실에서 하야오는 여전히 삶의 의미와 그 답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야오는, 그리고 그건 결국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 스스로만이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성 안에서 만난 할아버지의 아버지, 태초의 선조 같은 남자는 마히토의 선택을 되묻는다. “혼돈과 혼란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겠느냐?” 미야자키 하야오는 욕된 세상이나마 견뎌내고 지켜내며 늘 새로운 사람과, 그게 바로 이모 엄마 같은 사람이라도, 꼭 나의 친모가 아니더라도, 아버지처럼 시대감각이 둔한, 대책 없는 사람이라도, 다시 사랑하며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노 감독이 은근히 권하는 삶의 방식을 담고 있는 내용의 애니메이션이다. "그대들도 이렇게 살지 않겠는가?"이다. 그 질문을 각자 생각해 볼 일이다.
아마도,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봉준호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이 영화 ‘노란문 :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이하 노란문)’을 만든 감독 이혁래는 이런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봉준호가 옛날에 영화 서클을 했어. 그 이름이 노란문 영화연구소야 등등. 그리고 이런 얘기를 한 사람은 이 다큐멘터리 제작사인 브로콜리 픽쳐스의 대표 김형옥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노란문의 회원이었으며 이번 다큐의 주요 인터뷰어로 나온다. 그래서 처음엔 봉준호를 중심에 놨을 것이다. 봉준호니까! 봉준호의 초창기 시절, 아니 그보다 훨씬을 더 거슬러 올라가 영화적으로 노바디이고 낫씽이었던 그의 시절을 추적하는 얘기가 중심이었을 것이다. 맞다. 봉준호니까! 그러나 영리하게도 이 영화의 제작자와 감독은 어느 순간 스스로 궤도를 이탈했으며 그것이 오히려 지구로 귀환하는(더 좋은 작품이 되는) 항로가 됐을 것이다. ‘노란문’에서 봉준호는 작은 강이다. 더 큰 강은 봉준호를 넘어 노란문 회원 전체이고 그보다 더 넓은 바다는 시네필의 세상에 대한 것이며 그보다 더욱더 깊은 심연은 한국 영화계 그 자체의 역사이자 지금의 모습이다. 그건 마치 이 세상의 역사를 움직이는 동인이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민중들이며 개별이 아니라 전체이고 개인이나 아니라 사회 그 자체라는 얘기와 같다. 이 다큐는 그런 면에서 진보적이다. 그런 세계관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다큐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려고 하는 질문과 답은 다음과 같은 점에 모아져 있다. 노란문 영화연구소와 장산곶매, 청년, 영화공간 1895 등 당시 영화 게릴라(소모임)들이 암약(?)하던 ‘그 위대한 시대’의 한국 영화(인)들, 한국 영화계는 과연 지금 어디로 갔는가. 한국 영화는 1990년대 시네필 시대와 비교할 때 진정으로 진화했는가, 아니면 오히려 퇴보했는가, 그렇다면 그 각각의 이유는 무엇인가 등등이다. 다큐 전체의 톤 앤 매너는 시종일관 유쾌하게 향수에 젖게 하지만(옛날의 동창들이 모이는 것이니까) 그 내면은 다소 아쉽고 씁쓸하며, (모두들 장년과 초로의 나이가 됐으니 너무나 당연하지만) 인생의 뒤안길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만약 이들처럼, 1980,90년대의 시네필 시절을 동시대로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는 다소 슬프게 다가설 것이다. 반면 그 이후의 세대에게는 낯설고 신기하며 역설적으로 매우 이국적인 느낌이 들 것이다. 그 감정의 층위야말로 이 영화가 파고 들어가려 했던 부분으로 보인다. 그 정서의 간극 한가운데에서 영화는 마치 지금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했던 질문 같은 것을 던지고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다큐 ‘노란문’은 생각 이상으로, 그리고 예상 밖으로 매우 세련된 공정 과정을 선보인다. ‘동창회 다큐’치고는 제작비도 많이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바, 예컨대 봉준호의 당시 습작인 ‘룩킹 포 파라다이스’, 일명 ‘고릴라 1, 2’ 얘기와 그에 대한 증언을 전개하면서 그가 히다치 캠코더로 작품을 찍은 공간을 보여 줄 때이다. ‘고릴라’의 로케이션은 당시 봉준호가 살았던 서울 시내 어딘 가의 대림아파트 지하 보일러실이었는데 영화 속의 누군가 얘기하듯이 이 영화에는 봉준호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것을 영상으로 증언해 낸다. ‘고릴라 2’의 지하공간은 이후 김뢰하 주연의 1984년 단편 ‘지리멸렬’의 그것으로 변한다. 그리고 다시 2000년작 ‘플란다스의 개’에서 아파트 경비들의 공간으로 바뀌고, 그리고 또 2003년 영화 ‘살인의 추억’에 나왔던 지하 취조실 공간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2019년의 ‘기생충’에서 반지하의 공간으로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보여 준다. 그 모든 공간을 미니어처로 제작해 병렬로 배치한 후 그걸 레일을 깔고 카메라를 수평으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보여 준다. 그 발상과 시각적 디자인이 발칙하다. 감독 이혁래가 시각효과에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모든 것은 다큐 ‘노란문’이 세공력이 뛰어난 작품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시네필들이 추억담답게 영화 속에는 당연히 주옥같은 영화들의 향연이 중첩돼 있다. 봉준호가 그 어린 시절,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공포의 보수(1953)’를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세미나를 하자고 하니까 누구는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1996)’을 보자고 했고 자신은 ‘공포의 보수’를 가져갔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회원들은 이들 영화를 모두 몇 번이나 재 복사를 한 해적판 비디오로 봤고,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는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 대해 더 집착하고 열광할 수 있었음을 고백한다. 봉준호가 회원들과 공유했던 코폴라 감독의 ‘대부’ 얘기를 주요 장면으로 얘기하는 대목에서 이혁재의 다큐는 쇼트 바이 쇼트(shot by shot)로 분할해서 하나하나 설명하듯이 (마치 봉준호가 영화 강의 하듯이) 보여준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분노의 주먹’도 장면을 잘라 가며 분석해 주는데 바로 그런 것이 당시 노란문 회원들의 공부 방식이었고 또 그렇다면 바로 그 점이야말로 이들이 얼마나 거칠고 척박한 영화 환경 속에서나마 늘 진지하고 학구적인 자세를 지니려 노력했던 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대부’, ‘분노의 주먹’ 등을 언급하는 부분에서의 촘촘한 연출은 이 다큐가 비교적 오랜 연구를 거쳤고, 전체 구성을 짜는 데 있어 나름 심혈을 기울였으며, 무엇보다 그 기간과 노력에 상응하는 제작비를 투여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역설적으로 이 다큐는 그런 조건들을 채울 수 있는 행운을 얻었었다는 얘기인 셈이다. 이 모든 것은 놀랍게도, 그리고 매우 역설적이게도, 그리고 무엇보다 쉽게 인정하고 쉽지는 않지만, OTT 제국주의자인 넷플릭스의 투자가 백업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영화의 제국주의자가 베푼 아량의 결과 같은 것인가, 아니면 이제 넷플릭스 같은 대형 상업영화를 추구하는 세력이 예술적이고 비상업적인 행위까지 포식하려는 취지인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진심으로 독립영화에 대한 관심과 지원, 투자야말로 올바른 영화 환경을 만든다는 자각, 그 정치적 올바름이 구현된 것일까. 그 모든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동한 결과가 바로 ‘노란문’의 탄생일 것이다. 상업영화와 비상업영화, 넷플릭스와 한국 영화계가 적대적으로 공생할 필요는 없다. 세상은 비적대적 모순 관계가 주축이 될 때가 많다. ‘노란문’은 그 표상을 보여 준다. 아이러니한 희망이다. ‘노란문’은 요즘의 다큐멘터리가 추구하는 최상의 모토, 곧 ‘재미’면에서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노란문’은 재미있다. 흥미롭다. 현대 한국 영화 역사의 일단을 잘 정리해 내고 있다. 무엇보다 의미가 있는 것은 한국 영화계가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 ‘따위’가 아니라 영화가 본연의 역할, 곧 시대와 사람을 동반시키려 하는 그 임무를 복원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 시선이 좋다. ‘노란문’이 나오기까지 한국 영화계와 넷플릭스는 올바르게 결합한 셈이다. 자, 정말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너무 고답적인가. 인생은 원래 그렇게, 진부한 것이다.
영화감독에게는 벗어나지 못하는 DNA 같은 것이 있는데 그건 그의 작품에 늘 낙관처럼 찍히는 것이어서 영화를 단 5분만 봐도 이건 누구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런 재능은 축복이자 동시에 저주일 수도 있다. 새 영화 ‘소년들’은 이도 저도 아니고 그냥 딱 정지영 표 영화이다. 그는 줄곧 한국 사회 내의 비리와 불의, 이루어 내야 할 정의로운 무엇에 대해 숙고하게 만드는 내용의 영화를 만들어 왔다. 어떤 때의 대중은 그걸 잘 받아들였고 어떤 때의 관객들은 다소 지루해 했다. 이번 ‘소년들’은 정지영 영화의 분기점이 되는 작품이다. ‘소년들’은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한다. 1999년 전북 삼례의 슈퍼마켓에서 벌어진 3인조 강도 사건의 이야기이다. 강도들이 물품을 터는 과정에서 슈퍼 안 할머니가 질식사하게 된다.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할 요량으로 입과 코를 테이프로 막은 것이 원인이 됐다. 이 사건이 중요한 것은 범행 직후 신속하게 체포된 소년 세 명이 사실은 진범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 점도 중요한 것은 아니다. 진범이 아닌데도, 진범이 아니라는 증거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데도, 사건이 완전히 날조됐다는 것이 알려지고 있는데도, 소년들은 오랫동안 감방에서 나오지 못했으며(최대 6년을 살았다) 사건의 재심은 긴 시간 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니 사실 그 점까지도 핵심이 아니다. 더욱더 기가 막힌 것은 진범의 자기 진술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16년이 지나서야 재심 판결에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더욱더 핵심적인 얘기는 재심 결과 이 사건을 오랜 시간 거짓과 은폐로 오도했건 검찰의 그 누구, 경찰의 그 누구도 징계 받거나 소추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 ‘소년들’은 그전 과정을 수색하고 탐문하되 1999년과 2016년의 시공간을 오가며 이야기를 축약해 낸다. 그 이야기의 리듬이 매끄럽다. 자칫 다큐처럼 흐를 수 있는 구성을 극 영화의 이야기 구조로 적절하게 치환시킨다. ‘소년들’을 만들면서 정지영 감독은 일정한 시간이 흐른 만큼 이 사건이 철저하게 사람들이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대중들은 늘 매우 차갑고 냉정한 편이어서 반짝 관심을 보이다가도 일상을 금세 다른 것으로 덮어 버리고 살아간다. 사람들은 삼례 슈퍼 3인조 강도 사건 ’따위’를 잊은 지 오래다. 이런 사건이 주는 사회적 각성에 대해 무시하고 살아간 지 오래이다. 정지영 감독은 그런 ‘무심한’ 사람들에게 영화적 의미를 올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이야기가 매우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기조, 톤앤 매너는 ‘재미’이다. 영화는 마치 한편의 수사반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서스펜스의 흐름이 만만치 않다. 영화는 실제 사건의 결말을 아는 관객들에게조차 영화 속 소년들이 정당한 판결을 받기까지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마음을 쥐락펴락하게 만든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주인공 설경구의 역할이 컸다. 그가 맡은 황준철이라는 경찰캐릭터의 구축이 올바르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설경구에겐 오랜 시간 강성에다 다소 인공적인 경찰 캐릭터가 고착돼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에겐 ‘투 캅스’의 이미지가 컸다. 이번 영화에서 황준철 경위, 설경구는 그다지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그다지 눈을 부라리지도 않는다. 액션도 그다지 강조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는 지치고 힘들어 보인다. 사건을 두고 16년이 흐르는 동안 황준철이라는 인물 역시 끊임없이 회의했을 것이고(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줄곧 좌절했을 것이다.(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세상은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심리적 노화를 설경구는 입체적으로 잘 표현해 나간다. 설경구의 연기는 뒤로 갈수록 인간적이 돼 간다. 그 비루함을 잘 담아낸다. 황준철은 한때 열혈남아였지만 한직으로 몰려다니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침몰시켰다. 그는 은퇴를 앞둔 시기에 삼례로 돌아와 파출소장을 하며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재심 수사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다 끝난 사건을 다시 다 들춰 내서 뭘 어쩌겠다는 거요?!” 그의 입에서 이런 얘기가 나올 줄은 그 자신도, 그걸 듣는 변호사와 사건 최초 목격자이자 피해자인 윤미숙(진경)도, 범인으로 몰렸던 아이(청년) 세 명도, 무엇보다 이 얘기 전체를 지켜보고 있던 극장 안 관객들까지 추호도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다. 영화 ‘소년들’은 억울한 사람들이 재심을 통해 진실을 밝혀 낼 수 있다는 희망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꺾였던 좌절감을 딛고 어떤 계기로 올바른 분노의 불씨를 다시 살려 내며 또 어떻게 그걸 이어 가느냐에 더욱 집중한다. ‘소년들’이 가장 애썼던 부분은 황준철을 영웅으로 그리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 역시 무수한 실수를 거듭했던 한 인간에 불과하며 사회의 정의는 결코 단 한 명의 영웅담으로 채워질 수 없음을 강조하려 한다. 지치고 늙은 표정의 설경구 연기가 좋아 보이는 것, 그런 톤의 연출이 적절했다고 판단되는 이유이다. 황준철 캐릭터에 그런 방식으로 리얼리티를 부과함으로써 영화는 의도적으로 우회해 가던 척, 오히려 사회적 리얼리티를 부각시키고 배가시킨다. 그 사고의 정교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화 ‘소년들’이 주는 매우 중요한 깨달음은 지금의 이 사회가 검찰 무결점 주의에 의해 오염되고 타락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막무가내의 권력에 지배당할 것이라는 그 예언적 예언에 대한 느낌적 느낌 같은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이 영화는 2020년 코로나 시기에 제작됐으며 오랜 기다림 끝에 만 2년 만에 세상에 나온 것이다. 영화가 만들어지고 영화가 공개되는 사이에 세상의 판도가 바뀌었다. 그 바뀐 세상의 일단을 진단하는 데 있어 ‘소년들’은 검찰과 경찰, 흔히 공권이라 불리는 국가권력이 얼마나 더 무소불위의 것으로 변질됐으며 그것이 얼마나 더 악랄해질 수 있는지를 묵시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영화는 작금의 영화계가 내놓을 수 있는 영화들 중, 최고로 反 정부적이면서도 정부 비판적인 작품이다. 모든 것을 다 떠나서 정부와 정치의 본질을 작렬하듯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소년들’은 검찰과 사법당국의 무결점 주의, 무오류 주의, 아무리 판결이 잘못됐다 하더라도 재심을 받아들이지 않는 광기의 관성, 자신들의 잘못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그래서 일절 사과를 모르는 집단적 환각에 대해 얘기한다. 그건 1999년에도 그랬고 2016년에도 그랬으며 2023년 지금이나 아니면 한동안 꽤 계속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강조한다. ‘소년들’이 역설적으로 다소 오싹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 같은 묵시록적인 예언 때문이다. 나이 탓인지, 오랜 습성 때문인지 정지영이 연출은 중간중간 다소 올드 패셔너블한 부분이 없지 않다. 극 후반의 법정 신은 다소 작화 되고 윤색됐을 것이다. 상업영화의 재미를 가져가야 하고, 피날레의 장면인 만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다만 빌런에 해당하는 인물들, 곧 검사(조진웅)와 사건을 왜곡한 경찰 최우성(유준상)의 캐릭터가 좀 더 입체적이었으면 좋았을 법 했다. 주인공 황준철의 부하 형사인 정규(하성태)의 캐릭터를 일관되게 선하게 그린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악당 전문 연기자인 하성태 이미지를 180도 뒤집은 것이기 때문이다. ‘소년들’은 일종의 캐릭터 영화이다. 캐릭터 영화는 메인 캐릭터와 서브 캐릭터를 어떻게 배치하고 각각의 깊이를 어느 정도 수준으로 만드느냐에 승패가 달린다. 그 고민이 줄곧 보이는 영화이다. ‘소년들’은 정지영이라는 노 감독이 영화를 만든다는 것, 상업영화의 방식으로도 사회의 진실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고민과 고심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 축적된 진심과 진정성이 느껴진다. 대중들의 판결만이 남았다. 재심으로 가는 사건 같은 영화가 되지 않기를, 그 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넷플릭스가 새로 공개한 8부작 영국 드라마 ‘바디스’는 매우 특이한 작품이다. 소재와 설정이 앞선다. 다른 작품에서 흔히 봐왔던 얘기들이 아니다. 봐왔다 하더라도 꽤 영리하게 확장해 냈다. 제목 ‘바디스’는 시체들이라는 얘기이다. 영국 런던의 빈민 지역인 화이트채플의 골목길 롱하베스트 레인에서 시체가 발견된다. 남성이고 알몸이며 이마에 상처가 있고 손목에 뜻 모를 문양의 문신이 있으며 무엇보다 왼쪽 눈에 총알을 맞고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총알이 머리를 뚫고 나간 흔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서 총알은 발견되지 않는다. 총알이 없는 것부터 이 사건은 미궁으로 빠지기 시작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시체가 다른 시대에도 똑같은 장소 똑같은 모양으로 발견돼 왔다는 것이다. 한번은 1890년, 그리고 또 한 번은 1941년, 그리고 현재인 2023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2053년이다. 영화는 이 네 개의 시공간을 오가며 경찰 4명이 각자 사건을 풀어 가는 과정을 추적한다. 사건을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진실에 직면하게 되는 과정인데 그건 당연히 2023년 현재에 이르러서이다. 이 시즌 드라마가 흥미로운 것은, 요즘 그토록 젊은 세대들이 (이유 없이, 그리고 이해할 수 없지만) 싫어한다는 PC, 곧 정치적 올바름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시대에서 수사를 맡는 캐릭터들을 하나같이 소수자를 대변하는 인물로 그린다. 2023년은 사하라 하산(아마카 오카포)이라는 인도계 흑인 무슬림이다. 1941년은 찰스 화이트먼인데 유대인이다. 원래 이름은 칼 화이트먼이었고 독일계이다. 1941년이라면 2차 대전이 한창인 시점이고 런던에 독일 전투기의 기습적인 대폭격이 잦았던 때이다. 1890년의 주인공은 알프레드 힐링헤드(카일 솔러)인데 놀랍게도 게이이다. 빅토리아 시대가 끝나가는 말미이긴 해도 당시는 호모포비아가 극심했던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이트채플 같은 곳은 윤락녀보다 남창(男娼)이 들끓었던 것으로 묘사된다. 힐링헤드는 이들을 풍기문란죄로 체포해야 하는 직무를 행사해야 하지만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만난 ‘더 스타’지의 기자 헨리 에시(조지 파커)를 만나면서 뜻밖의 동성애에 빠진다. 이런 경우 대체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힐링헤드는 드라마에서 가장 비극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2053년 근(近) 미래의 주인공 아이리스 메이플우드(쉬라 하스)는 가녀린 몸매지만 ‘미친개’라 불릴 만큼 사건 해결에 수완을 보인다. 그녀는 사실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이지만 2053년의 신 전자 기술이 그녀를 걷고 뛰게 한다.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 준 신 사회, 새로운 공동체이자 준(準) 국가 조직인 ‘카이알’에 비교적 충성을 다하려고 하고 반 국가 세력을 일망타진하는데 앞장 서려 한다. 하지만 아이리스의 이 같은 행동은 일종의 방어기제이자 자기 합리화인데 그녀는 마음속 무의식 속에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은 차별받고 버려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카이알의 지도자 일라이어스 매닉스(스티븐 그레이엄)에게 충성하는 것은 일종의 생존 본능 때문으로 보인다. 드라마 전편에는 몇 가지 키워드가 나오는데 그중 하나가 미래 세계(라고 해봤자 20년 후인 2053년)에 암약하는 ‘위험한 예배당’이라는 반 카이알 조직, 혹은 반체제 단체이다. 여기에는 게이브리얼 디포(톰 마더스 데일)란 과학자, 양자물리학자가 주요한 역할을 한다. 그가 무엇을 발견한 모양이고 이것이 카이알 조직에게 굉장히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된다. 일라이어스 매닉스가 아이리스 메이플 우드를 조직 내에 침투시켜서 위험한 예배당 일당을 급습하려고 하는 이유로 보인다. 에피소드를 따라가면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 그 점에 대한 일종의 힌트는 왜 아이리스 메이플 우드냐는 것이다. 왜 사하라 하산이며 왜 일라이어스 매닉스냐는 것이다. 그건 힐링헤드에게도 찰스 화이트먼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얘기이다. 왜 다른 사람이 아닌 이들을 콕 집어서 사건이 터졌으며 벌어지게 되느냐이다. 드라마 속에는 누군가 남긴 LP 레코드판이 있고 이건 주로 주인공들이나 주변의 핵심 관계자들에게 남긴 것인데 이들의 앞날을 예견하는 내용이거나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 수행해야 할 임무에 대한 지시사항을 담고 있는 것이다. 왜 이들인가. 바로 그 점이 이 드라마를 이해하고 따라 가는데 있어서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드라마는 일종의 예정론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다소 해묵은 논쟁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세상의 운행 방식, 그 시기와 장소, 인물은 신에 의해 다 정해져 있다는 것이 바로 예정론인 바, 이렇게 되면 모든 계급과 차별도 다 받아 들여야 하는 중세 봉건시대가 되는 만큼 그 해결책의 일환으로 신이 또한 인간에게 준 특권 중 하나가 자유의지인 바 아무리 신이 모든 걸 정해 놨다 해도 인간은 그걸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양쪽 다 그 정도의 문제이다. 신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다 예정하는 것이며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디까지이냐는 것이다. 드라마 ‘바디스’는 이 오랜 논쟁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며 다만 여기서는 신이 양자물리학으로 대체돼 있을 뿐이다. 극중 게이브리얼 디포가 발견한 것은 1:1로 분리돼 서로 정반대로 똑같이 활성화되는 양자의 운동 법칙으로 보인다. 이 운동 법칙 대로라면 버려진 알몸 시신이 네 개의 시대에 똑같이 나타날 수 있다. 시간 이동이 가능해진 것이다. 위험한 예배당이 도전하고 저항하는 대상은 일라이어스 매닉스 지도자 체제이다. 매닉스는 2023년 런던 시내에 핵이 터졌을 때 부패한 정치권을 일소하고 권력을 잡았다. 그의 독재는 일종의 나치의 방식으로 보이는 바 아이리스 메이플 우드와 같은 사회적 루저들에게서 지지를 끌어냈기 때문이다. 위험한 예배당 조직은 20년 전 런던 테러야말로 정작 일라이어스 매닉스가 저지른 범행으로 보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알게 되는 사람이 바로 사하라 하산이며 그녀가 나중에 위험한 예배당의 리더가 되는 이유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정말 헷갈리는 것은 인물들의 관계망이다. 예컨대 1890년의 힐링 헤드가 그토록 아끼고 애지중지했던 딸 폴라가 (정략) 결혼(당)한 상대는 줄리언 하커 경이라는 것이고 이 하커가 모든 음모의 진정한 시작인 바, 일라이어스 매닉스가 그의 직계 증손자가 된다. 그 사이의 계보를 잇는 남자 둘(일라이어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2023년 런던 경찰 내부의 하산의 상사 바버이며 1941년 찰리 화이트먼의 직계 보스인 누군가이다. 모든 관계가 씨줄날줄로 엮여져 있지만 곰곰이 복기해 보면 이 모든 것이 하커 가문(하커 은행으로 명명되는 금융자본가)의 계보에서 파생된 것이다. 복잡한 것 같지만 사실 복잡한 것이 아니며 다만 여기에 우주 평행이론과 시공간의 이동이라는 SF적 요소를 덧붙인 것이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이 드라마가 하고 싶은 얘기 역시 비교적 명료한 편이다. 다소 단순하게 해석하자면 1890년부터 2053년, 그러니까 163년간 3대의 세대가 관통하는 기간 동안 세상은 좋아지고 진화하고 진보했느냐, 혹은 그렇게 될 것이냐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160년간이라고 하면 대체로 자본주의가 산업화와 고도화, 첨단화를 겪는 시기가 된다. 드라마 ‘바디스’는 결국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신박한’ 방식으로, 그리고 우회적으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인간의 삶은 나아지고 있는 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위험한 예배당은 20년전인 2023년으로 사람을 보내 폭탄 테러를 막으려 했던 것은 아닌가. 그 같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환상에 불과한 것일까. 드라마 ‘바디스’가 던지는 예리한 질문이 머무는 대목이다. 인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금 우리에게도 위험한 예배당 같은 저항의 정신이 남아 있는가. 이 드라마를 두고 디스토피아적이라고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