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반 잔이나 남았다, 반 잔밖에 안 남았다는 식의 얘기거나 세상은 여전히 살만한 것이라거나 아니면 세상은 이미 망했다 식의 얘기처럼 영화란 인간의 삶과 일상에 의미를 주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영화는 아무리 그래도 재미가 먼저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후자의 사람들은 대체로 영화를 코미디 장르로 만들거나 코미디 요소를 강하게 집어넣는 경향성을 보인다. 적어도 이들에게 있어 영화의 재미와 의미의 비율은 6대4거나 7대3이다.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베니니가 그랬고(‘인생은 아름다워’) 작금의 한국 영화계는 바로 감독 강형철이 그렇다. 강형철은 ‘과속 스캔들’과 ‘써니’에서 보여 준 자신의 ‘내추럴 본 코미디’의 자질을 새로 소개된(이라고 얘기하는 이유는 유아인 스캔들로 지난 2년간 공개가 미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 ‘하이파이브’에서 다시 한번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강형철을 코미디 전문 감독이라고만 규정지을 수는 없겠다. 그가 만든 ‘타짜 : 신의 손’(2014) ‘스윙 키즈’(2018) 등의 필모그래피는 강형철의 재능이 코미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스토리텔러로서의 능력이 탄탄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 ‘하이파이브’는 일단 설정이 발칙하다. 국내에 슈퍼 히어로가 암약하며 살고 있었다는 것이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살을 했는데(너무나 강한 책임감 때문에?) 그의 장기가 총 6명에게 이식이 됐고 그 6명 모두에게 초능력이 전이됐다는 설정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 6명 중에 악당이 하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5명의 신입 초능력자와 슈퍼 파워로 영생을 얻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완전히 지배하고 싶어 하는 악당과 선악의 대결이라는 이야기 구조가 설득력을 얻게 된다. 악당의 캐릭터 설정에 있어서도 강형철의 스토리는 너무 나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 역시 특이한 부분이다. 아마도 영화 제작의 시작이 윤석열 시대 시작쯤에 만들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영화에서의 빌런은 정치권이나 재벌 같은 부류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그보다는 이 악당은 이단 종교의 지도자이다. 새신교의 교주 영춘(신구)은 자신이 거짓으로 이뤄 놓은 종교 제국을 ‘즐기기’ 위해 영생과 초능력을 얻으려 한다. 그는 슈퍼맨의 췌장을 이식받고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나며 후계자인 딸 춘희(진희경)의 음모로 다른 초능력자 5명에게서 그들이 이식받은 장기를 뺏어와 1인의 슈퍼 파워맨이 되려 한다. 다른 5명은 이 슈퍼맨 악당을 막기 위해 힘을 합친다. 다른 5명으로는 심장을 이식받아 강력한 파워와 속도를 지니게 된 태권 소녀 완서(이재민)와, 폐를 이식받고 엄청난 폐활량으로 강풍을 일으킬 수 있는 지성(안재홍)이 있다. 안구를 이식받아 인간 해커가 된 ‘양아치’과 남자 기동(유아인)도 있다. 간을 이식받고 치유 능력이 생긴 허약선(김희원)이라는 새신교 신자, 그리고 이 모든 능력을 흡수하고 연결시키는 능력의 김선녀(라미란)가 합세한다. 이들은 각각 나인 걸(구하는 소녀에서 구걸이라고 했다가 나인 걸이 된다.), 탱크 보이, 블루투스 맨, 밧데리 맨, 후레쉬 걸이라는 새로운 닉네임을 갖게 된다. 자신들 팀 이름도 하이파이브로 짓는다. 그러나 곧 하이파이브 멤버들은 사이비 교주 영춘 조직에 납치돼 장기가 적출된다. 영춘은 밧데리 맨 허약선의 간을 탈취해 급속도로 젊은 교주(박진영)로 변신한다. 하이파이브 초능력자 팀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하이파이브’는 기본적으로는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 ‘판타스틱 포’에서 이야기 구성을 가져오고(이들은 우주 비행사로 우주탐사에 나갔다가 초능력을 얻고 돌아오게 된다.) 여기에 잭 스나이더가 만든 ‘저스티스 리그’를 합치되, 소위 ‘빠다 맛’ 그러니까 할리우드 느낌을 완전히 빼버리고 순 한국식의 토종 느낌으로 만든 작품인 셈이다. 이 정도면 모방이 아니라 창작의 수준이다. 특이함이 유별나면 보편적이 된다. ‘하이파이브’는 해외 시장에서도 그리 이상하거나 촌스럽다는 취급을 받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독특하고 재미있으며 경제적인 면에서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을 공산이 크다. ‘저스티스 리그’ 같은 영화는 3억 달러(3563억 원)를 쓰지만 이번 ‘하이파이브’는 150억을 쓴 영화이다. ‘하이파이브’의 손익분기점은 국내 기준으로 290만 관객 선이다. 초능력의 현란한 신세계가 펼쳐지지만 이 영화 ‘하이파이브’의 진짜 미덕은 부성애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연대의 가치가 여전히 이 세상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나인 걸 완서의 아버지(오정세)는 태권도장 관장이다. 아이들에게 댄스에 가까운 태권 품새를 가르치며 살아가고 있고 저녁에는 대리기사를 하면서 돈을 보충해서 번다. 실로 열심히 산다. 오직 딸 완서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아이의 병원비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겠다는 자세이다. 아내도 심장병으로 잃었고 아버지도 심장마비로 돌아갔다. 완서의 아버지는 오직 완서만 바라보며 사는 팔불출이다. 그는 자주 찔찔 짠다. (이때의 오정세 연기는 발군이다.) 그는 아이가 초능력의 소유자가 된 걸 알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발차기만이 완서에게 몰려오는 악당의 수하들을 무찌른 줄 착각한다. 사실은 뒤에서 완서가 도운 것이다. 완서 아버지는 늘 이렇게 호언장담한다. “완서야. 아빠 뒤에 딱 붙어 있어. 아냐 아냐 저기 구석에 가 있어. 거기 가만히 있어. 이놈들은 아빠가 알아서 할게.” 푼수끼가 농후한 아빠지만, 그래서 만화 캐릭터에 가까운 인물이지만 위기에 처한 하이파이브 팀을 최후의 순간에 구해내는 것은 결국 완서의 아빠, 곧 부성애이다. 세상의 아빠는 늘 말한다. 무슨 일 있으면 아빠를 찾아. 아빠를 불러. 그래서 이 영화의 완서도 결국에는 이렇게 외친다. “아빠!” 그 순정의 마음이 가슴을 울린다. 좋다. 하이파이브 팀은 마음이 잘 맞는 팀이 아니다. 늘 말들이 많고 티격태격하기 일쑤이다. 특히 탱크 보이 지성과 블루투스 맨 기동이 그렇다. 그들은 한 살 차이, 혹은 몇 개월 차이를 가지고도 내가 형이네, 네가 동생이네를 놓고 싸운다. 그들은 서로 팀의 주도권을 쥐려고 애쓴다. 그러나 각자의 능력만 가지고는 새신교 교주의 교활한 조직을 일소해 낼 수 없다. 그들은 결국 힘을 합쳐야 하며 프레쉬 걸 선녀를 통해 서로 연결돼야 한다. 연대가 힘이다. 각자 스스로의 잘난 맛을 내려놓고 모자란 것을 서로 보충할 때만이 진정한 슈퍼 파워가 태어날 수 있다. 대중의 집단지성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하이파이브’가 재미를 넘어 추구하는 의미는 바로 이 부분에 있다. ‘하이파이브’는 유쾌하고 따뜻하며 그래도 이 사회와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는 걸 느끼게 해준다. 아직 컵에 물이 반이 차 있다. 물이 반 밖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 ‘하이파이브’의 주제이다.
‘논나’와 같은 뻔한 드라마를, 뻔한 줄 알면서도, 뻔하게 보게 되는 이유는 어쨌든 새출발의 꿈을 가진 사람들, 그 꿈을 이루고 싶어 하는 사람들, 그래서 신의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실종된 단어 혹은 상실된 어휘인 희망과 우정, 화해, 그리고 가족의 화합, 이웃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영화 ‘논나’는 우리가 뭘 잃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코미디의 어법으로, 신파의 논리로 가르쳐 준다. 꽤나 가슴을 적신다. 제목 ‘논나’의 논나는 이탈리아어로 할머니란 뜻이다. 이 영화를 보면 논나는 결국 한 집안에서 내려오는 특유의 음식을 만드는 할머니란 의미이고 이른바 ‘엄마손(맛)’ 할머니들을 말한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개성 만두집, 보쌈 김치집, 통배김치 한정식집 등의 원조 할머니(엄마)를 생각하면 된다. 영화 ‘논나’는 결국 음식 영화이고, 할머니들의 여성영화이며, 가족영화인 데다, 궁극의 휴먼 드라마이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CJ ENM 컴패니가 투자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주인공 조 스카라벨라(빈스 본)는 뉴욕에서 살아가는 엔지니어 노동자이다. 그는 어머니가 죽고 나서 뉴욕 이탈리아계 논나 들을 셰프로 데려와 스태이튼 아일랜드에서 ‘에노테카 마리아’란 이름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열 계획을 세운다. 맨하탄이 아니고 스테이튼 아일랜드라는 게 중요한데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서울 시내 광화문이나 경복궁 혹은 강남의 어디가 아니라 강화도나 영종도에다 식당을 내는 꼴이다. 요리 전문가나 음식 평론가들이 관심을 가질 동네는 아니라는 얘기이다. 에노테카 마리아는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어머니는 조에게 보험금 유산으로 20만 달러를 남긴다. 식당을 연다는 건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세계 그 어디에서나 표준율을 공유하는 나라에서라면 각종 규제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방법도 있고 식품위생법도 있으며 각종의 법을 준수하고 자격 요건을 얻어야 한다. 그뿐이 아니다. 대출 모기지 이자를 내야 하며 매력적인 공간으로 보일 만큼 인테리어를 해야 하는 등 투자할 대목이 많다. 식당을 한다는 건 속된 말로 앞으로 남고 뒤로 손해를 보는 일이 되기 십상이다. 주인공 조는 그 엄청난 장애를 타고 넘어가 어머니의 레시피, 할머니 논나의 레시피를 세상에 내놓으려는 막무가내 모험을 시도한다. 조의 프로젝트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런 류의 드라마는 실패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조가 성공하기까지 무수하게 좌초의 위기를 겪어 가는 에피소드를 이어 나가며 사람들을 쫄깃쫄깃하게 만든다. 사람들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며 안달하게 한다는 얘기이다. 그 과정에서 조는 불알친구 브루노(조 맹갈리에노)와 크게 말다툼을 벌이기도 하며 스테이튼 아일랜드 동네사람들의 텃세에 시달리기도 한다. 주인공 조가 새로 열겠다는 식당 ‘에노테카 마리아’ 자리는 원래 ‘도미니크 스피리토’란 또 다른 이민자가 50년 넘게 식당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라 스태이튼 아일랜드 사람들은 조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 ‘텃세’ 때문에 조의 식당은 조기에 폐업 위기를 겪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논나’가 불굴의 의지 ’따위’를 그려 나가는 드라마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보다는 일상으로부터 얻는 작은 생활의 지혜를 통해 비교적 ‘통 큰’ 성찰을 이어 나가게 하는 내용이다. 그래서인지 생활의 지혜 급에 해당하는 이탈리안 격언들이 많이 나온다. ‘밥상에서는 늙지 않는다’라든가 ‘슬플 땐 배를 채워야 한다’같은 말이 나온다. ‘음식은 사랑’이며 ‘나이는 병이 아니고’ ‘비밀이니까 특별한 것인데’ ‘위대한 것은 늘 세월을 이기는 법’이다 같은 말이 줄줄 이어진다. 그런 대사들, 그와 같은 에피소드들을 보고 있으면 슬쩍 미소가 지어지게 된다. 영화 ‘논나’가 추구하는 것은 폭소가 아니라 잔 웃음이다. 영화 ‘논나’는 ‘미소의 교환’ 같은 작품이다. 논나 셰프들 역으로 네 명의 노년 배우들이 필요했다. 미용실을 하던 지아 역으로 수잔 서랜든이 나오고 실버타운에서 좌충우돌 살아가던 로베르타 역으로는 로레인 브라코가, 나중에 주인공 조의 연인이 되는 올리비아(린다 카델리니)와 서로를 보살피며 살아가는 할머니 안토넬라 역으로는 브랜다 바카로가 나온다. 수녀 출신의 논나, 테레사 역으로는 탈리아 샤이어가 캐스팅돼 있다. 모두가 다 전설의 명배우들이다. 수잔 서랜든의 영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명작들이 많고 로레인 브라코는 마틴 스콜세이지의 ‘좋은 친구들’에서 돈과 마약에 찌들어 가는 갱단의 여자로 나왔었으며 탈리아 샤이어는 '록키'와 '대부' 시리즈의 그 여인이다. 브랜다 바카로를 잘 모를 수 있지만 잘만 킹의 그 유명한 에로 영화 ‘레드 슈 다이어리’의 배우였다. 모두들 대단한 배우들이고 나이들이 로레인 브라코를 제외하고 다 80대 들이다. 브랜다 바카로는 86세, 탈리아 샤이어와 수잔 서랜든 공히 79, 로레인 브라코는 71세이다. 영화 ‘논나’는 이처럼 한편으로는 여성 고령화 사회를 겨냥하고 있는 작품이지만 아무래도 시장성이 크지 않은 관계로 극장용으로는 만들어지지 못했다. 넷플릭스가 제작한 작품이다. 넷플릭스의 유용성이 다시 한번 드러난 작품인 셈이다. 네 할머니들의 티격태격 싸움도 잔잔한 재미를 준다. 안토넬라는 시칠리 출신이고 로베르타는 볼로냐 출신인데 이 두 지역은 우리의 영남과 호남만큼 적대적이다. 지아는 할머니치고 가슴 볼륨이 커서 안토넬라, 특히 로베르타는 그녀를 천박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나중에 지아의 가슴이 할머니치고 풍만한 이유가 유방암 제거 수술 탓이라는 걸 알게 된다. 테레사가 수녀원을 나온 것은 그 안에서 젊은 수녀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음도 알려진다. 네 할머니들이 화해를 이루어 나가는 모습도 이 영화를 보는 잔잔한 재미 중의 하나이다. 이탈리안 음식 이름은 통 알 수가 없다. 카푸젤레가 어떤 음식인지, 주인공 조가 그토록 만들려고 했던 그레이비가 무엇인지, 닭고기 테트라치니, 크랩 케이크, 시금치와 치즈 캐서롤이 대체 어떤 맛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굳이 알아낼 필요가 없다. 음식은 지식이 아니다. 음식은 사랑일 뿐이다. 영화 ‘논나’를 보고 있으면 어머니가 나를 위해 해주시던, 맛을 보라며 떠먹여 주시던 음식이 기억이 난다. 영화 ‘논나’는 그래서 엄마가 보고 싶어지게 만든다. 영화 ‘논나’는 또 그래서, 이상하게 눈물을 훔치게 만든다. 어릴 때 우리가 울면 엄마는 늘 그랬다. 엄마는 먹을 것을 해줬다. 울면서 먹으면 체해, 울지 말고 어여 먹어, 라고 하셨다. 엄마의 손맛과 그 손맛을 지닌 엄마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가 바로 ‘논나’이다. 영화는 때론 소품으로 진심을 나타낸다. 작은 영화가 좋은 건 바로 그 때문이다.
도대체 나미비아는 어디인가. 일본 영화 ‘나미비아의 사막’ 제목을 들으면 응당 들게 되는 생각이다. 근데 나만 모르는 것일까. 사람들은 나미비아란 곳을 알고 거기에 사막이 있다는 것도 알까. 나미비아는 당연히 아프리카에 있는 국가이다. 보츠니아 왼쪽,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북서쪽에 위치한 국가이다. 영화 제목처럼 사막으로 유명한 곳이며 특히 해안가 사막(백사장이 아니고)이 특이한 나라인데 영화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조지 밀러 감독의 영화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가 촬영된 곳으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일본 영화 ‘나미비아의 사막’도 일종의 근미래 SF 액션 풍의 영화인가.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이 영화는 한 일본 여성이 하루 종일, 영화 내내 ‘어슬렁거리는’ 영화이다. 여주인공 카나(카와이 유미)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20대의 여성이다. (영화 중반이 지나 카나는 스물 한살이라는 것이 알려진다.) 그녀의 일상은 나이만큼이나 부정확하다. 하는 일이 무엇인지, 누구와 사는지, 주로 누구와 놀고 누구와 얘기를 하는지,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뭘 하고 싶어 하는 지가 불분명하다. 카나의 일상은 서서히 드러난다. 영화는 그 점이 궁금하도록 서사를 짰다. 도저히 궁금해서 영화를 끝까지 안 볼 수 없게 만든다. 도대체 나미비아의 사막은 어디 있는 것이며 이 영화의 여주인공 카나 같은 젊은 여자, 흔히들 얘기해서 요즘 젊은 (일본)여자애들, 여성들은 뭘 바라며 인생을 사는 것인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궁금하게 만든다. ‘나미비아의 사막’을 만든 감독 야마나카 요코도 28살의 여성감독이다. 이 영화는 엄청난 걸작이거나 수작이어서 흥미로운 것이 아니라 기성의 세대로 하여금 새로운 세대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해 주어서 관심을 기울이게 만든다. 지금의 20대들이 어떤 고민 속에서, 나름 얼마나 치열하고 다이내믹하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느끼게 해 준다. 영화의 첫 장면은 도쿄의 한 대형 버스 터미널을 롱 쇼트로 비교적 길게 보여 준 뒤 저 멀리서 종종 걸음으로 걸어 오는 여주인공 카나의 모습을 그려 나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철저한 익명 속에서, 아주 작은 일개인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의 정체성을 보여 준다. 카나는 카페에서 친구인 이치카를 만나는데 둘은 어릴 때 친구인 사노 치아키가 자살했다는 대화를 나눈다. 치아키는 컴퓨터 충전 케이블을 문손잡이에 걸고 스스로 목을 졸라 자살했다. 카나는 무심한 듯 그렇게도 죽을 수 있다더니 (결국 걔는 그걸 해냈네)라는 투로 말을 받는다. 카나의 뒤에는 그녀 또래나 그보다는 나이가 조금 많은 세 명의 남자들 대화가 큰 소리로 섞이고 있다. 한 남자가 말한다. 노팬티 샤부샤부 집이란 게 있어. 또 한 남자가 그게 뭐냐고 묻는다. 남자가 답한다. 샤부샤부 집인데 여자들이 노팬티로 서빙을 해. 근데 바닥이 거울이야, 라는 식의 대화이다. 영화 ‘나미비아의 사막’은 오프닝 시퀀스부터 꽤나 발칙한 분위기를 이어 갈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주인공 카나는 처음엔 혼다(칸 이치로)라는 착실하고 여성스러운 남자를 애인으로 사귄다. 혼다는 술 먹은 그녀를 챙기고 재워주고 아침밥을 해주고, 꼬박꼬박 피임약도 먹여 주는 착한 남자이다. 그는 직장인이다. 부동산 회사에 다닌다. 그러나 카나는 그런 혼다 몰래 다른 남자 하야시(카네코 다이치)를 만난다. 그러다 하야시에게 점점 빠지게 된다. 카나는 친구 이치카와 함께 호스트 바를 가기도 한다. 이치카 없이도 ‘호빠’를 가곤 한다. 그럼에도 카나의 가장 중요한 일상은 무료함이다. 영화는 그녀의 ‘혼자’를 가장 많이 보여 준다. 카나가 혼자 있을 때 그녀가 뭘 하는지, 뭘 하고 싶어 하는지를 그려 낸다. 카나는 어슬렁거린다. 혼다와 사는 집 근처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그가 출근을 했을 때나, 출장을 갔을 때 그의 집안을 어슬렁거린다. 무료하기 그지없고 무심하고 무상하기 그지없다. 그녀의 삶은 지루한 것이 아니라 지리멸렬한 것인데 자신의 인생이 무엇을 향해 가야 하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근데 20대들은, 20대의 감독들은, 20대들이 만든 영화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반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꼭 삶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해? 무엇을 향해 나아 가야만 해? 목적이나 목표가 꼭 필요해? 인생을 그냥 부유하면 안 돼? 떠돌면서 살면 안 돼, 라고 묻는다. 목적이나 목표는 당신들 거 아냐? 라고도 묻는다. 표면적으로 말하면 카나는 대책 없는 젊은이이다. 그녀가 일하는 곳은 제모 시술 에스테틱이다. 그녀는 시술 보조원이다. 그러나 열심히 일을 하지는 않는다. 맡은 시간에만 가벼운 화장기의 얼굴로 예의 바르게 손님들을 대할 뿐이다. 거기에 비하면 그녀의 다른 일상은 비교적 격렬하다. 혼다와의 동거를 끝내고 하야시와 살면서 둘은 말 그대로 무지하게 싸워 댄다. 젊은이들은 그것을 사랑 싸움이라고 생각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다들 자신이 자신을 이기지 못해 그러는 것일 뿐 사실 뚜렷한 이유는 없다. 정밀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카나는 혼다와의 사이에서 임신을 한 적이 있고 혼자서 중절 수술을 받아 마음의 상처가 있었던 듯이 보이며 현재 동거 중인 남자 하야시가 과거의 여자 카나코(주인공 카나와 이름이 같다.)와의 사이에서 임신과 중절을 겪은 사실을 알게 되고 광분을 한다. 카나는 하야시에게 툭하면 시비를 건다. 뻑하면 그에게 손찌검을 하려고 한다. 그 와중에 전 남자 혼다는 카나에게 와서 울고 불며 한바탕 난리를 친다. 카나는 모든 것, 모든 일상에 다 질려한다. 카나는 에스테틱 일도 그만둔다. 카나가 이유없이 화를 내는(것처럼 보이는) 것은 혼다가 됐든 하야시가 됐든 자신의 트라우마의 원인이 뭔지는 모른 채, 안다고 착각을 한 채, 상처를 줘서 미안해, 라고 얘기하기 때문이다. 미국 생활을 조금 하다 돌아온 하야시의 부모는 일본인들이 미안하다는 말을 습관처럼 하고 산다며 비웃는다. 카나가 느끼는 점도 바로 그런 것이다. 그건 마치 사람들이 끊임없이 제모를 하러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미안하다는 말로 자기의 행동을 ‘제모하지만’ 결코 마음속은 그렇게 ‘제모가 되지’ 않는다. 카나는 결국 인격성 장애이자 양극성 장애자이다. 이런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은 결국 조울증으로 발전한다. 경계성 장애란 옳고 그름의 판단의 경계에서 자신의 결정을 계속 유보하고 억누르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정신 장애이다. 예컨대 자신을 범하려 했던 아버지가 있고(카나의 아버지는 중국인이다. 카나에게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런 그를 최악의 남자라고 생각하며 많은 남자들 또한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지만 일상 속에서는 그런 남자(들)의 또 다른 면을 인간으로서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분노를 억제하게 되면 그 사람의 일상은 돌발적이고 돌출적이 되기 십상이다. 이런 사람의 행동을 두고 보통 그 앞에 ‘미친’이란 형용사를 쓴다. 카나의 행동이 점점 미친x 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나미비아의 사막’은 결국 카나라는 이름의 한 개인의 삶을 통해 인격성 장애를 앓고 있는 일본 사회의 모습을 직시하는 작품이다. 이중인격이 고착화 되어 있는 사회가 각 인격체에게 강제하는 것, 그래서 그 고통이 무엇인지,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상실한 사회의 모습을 보여 주려 한다. 그러니 다들 이제는 나미비아를 찾아가야 한다. 나미비아의 사막 모래를 만져 봐야 한다. 영화의 제목이 암시하는 나미비아는 궁극적으로는 미지의 자신이다. 자신이 몰랐던 자신을 알아내는 것, 그것이 개인의 방황을 그치게 하고 사회가 지닌 정신병적 증후군(노팬티 샤부샤부 같은 일탈적인 성 취향)을 극복하는 길이다. 그런 생각이나 판단까지도 필요 없는 얘기이다. ‘나미비아의 사막’은 그런 생각까지 꼭 해야 해?,라고 묻는 20대 감독의 도발적 시선이 담겨져 있다. 그냥 겪어내고 어슬렁거리며 그 고통의 시간들을 경과시키면 된다고 얘기한다. 그런 식으로 20대들의 생각, 행동의 일단을 훔쳐볼 수 있게 해 준다. 이 영화에 대한 동의나 공감조차 그건 각자의 몫이다. 그 충돌의 정서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일본 영화는 요즘 꽤나 젊어지고 있다. 부러울 뿐이다.
영화 '야당'은 일부의 오해처럼 정치영화가 아니다. 여당이니 야당이니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건 표면적인 것이다. 결국 이 '야당'도 여야의 이야기, 정치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모든 건 다 정치와 연결된다. 특히 한국사회가 그렇다. 한국사회를 그리려는 영화는 어쩔 수 없다. 정치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영화 '야당'에서 야당이란 마약 조직 내부자와 대규모 거래를 위한 판을 짜고, 그 정보를 검찰에 넘기면서 조직 일부는 살리고 조직 일부는 검거하게 하는, 일종의 고도의 밀정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 혹은 단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원래 있는 말이 아니라 마약 범죄에서 쓰이는 은어인 모양이다. 그러니까 '야당질 당했다'는 얘기는 마약 조직 혹은 마약범이 한 사기꾼의 술수에 넘어가 조직이나 돈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야당'은 이강수(강하늘)란 인물을 중심으로 그를 철저하게 이용해 먹고 버리는 간악한 검사 구관희(유해진)와, 구관희에게 뒤통수를 맞고 수뢰혐의로 구속까지 당하는 서울경찰청 마약수사대의, 일명 옥황상제라 불리는 형사 오상재(박해준) 등 세명이 벌이는 삼각 관계의 속고 속이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대통령 후보 아들로 마약 중독자인 조훈(류경수)이라는 파렴치범이 나오고 이 인간 탓에 중독자가 됐다가 추락한 여배우 엄수진(채원빈)이 얽힌다. 잔혹한 마약상 염태수(유성주)가 있고 북한산 마약을 밀매해 들여 오는 김학남(김금순)이란 여자가 활개친다. 인물들이 얽히고 설킨다. 이야기를 풀어 가는 게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영화 '야당'은 일종의 하이퍼 리얼리즘(극사실주의) 계통의 영화이다. 류승완의 '부당거래'(2010),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2013), 우민호 감독의 '내부자들'(2015)과 같은 계보의 작품이다. 하이퍼 리얼리즘 영화란, 사회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 내되, 거의 모사(模寫)에 가까울 만큼 현실성을 극대화하는 작품을 말한다. 그러나 앞선 작품들이 워낙 큰 인기를 모았던 탓인데다, '내부자들'과 '야당'이 같은 제작사인 하이브 미디어코프의 작품 탓이어서인지 마치 자기복제를 한 느낌을 준다. 바로 그 점이 개봉 초기 '그 얘기가 그 얘기 아니냐'는 선입견을 불러 일으켰고 그래서 흥행 조짐이 뒤늦게 불이 붙게 된 작품이 됐다. '야당'은 오히려 개봉 일주가 지난 후, 순전히 관객들의 입소문으로 흥행 바람을 타고 있다. 그렇게 된 데는 같은 맥락의 이야기라도 영화가 지닌 역동성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대중 관객의 만족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야당'은 '내부자들' 류의 영화와 같으면서도 다른 지점에 착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건 대중들이 서있는 위치가 10년 전인 2015년 전후와 지금이 많이 달라져 있다는 '사회학적 요인'도 작동하고 있다. 그간 우리사회는 얼마나 더 뒤틀려졌으며 그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더 시달려 왔는가, 그렇다면 영화는 지난 10년의 일그러진 그 고통을 잘 담아내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따라 대중의 반응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영화 '야당'은 다소 폭력적이고 과장된 비틀림이 있다손 치더라도 지난 몇 년간의 한국사회가 지닌 병적인 욕망, 그 추악한 민낯을 그려내는 데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관객들이 현재 이 영화에 열광하고 있는 것은 과도한 폭력이 주는 기이한 쾌감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이런 내용의 영화야 말로 지금의 사회를 수렁 속에서 건져 내는 밧줄과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감 때문이다. 영화 속 검사 구관희는 끊임없이 머리를 굴린다. 마약 '판'을 짜고 사람을 이용해 먹고 가차없이 잘라 내며 비열한 뒷 공작으로 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워 재판과 투옥이라는 '영혼 털이'를 자행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구관희는 서부지검의 부부장 검사까지 오르고 결국 그 위와 더 그 위로 점차 올라가려 한다. 구관희는 유력 대통령 후보의 아들 조훈이 벌인 마약파티를 은폐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멀쩡한 경찰을 감옥에 보내는 한편, 뇌물 제공 혐의로 구속시킨('구속된'이 아니고) 대기업 오너에게 진술을 달달 외우게 해 상대당 후보에게 몇날 며칠에 돈을 건넸다고 연습 시킨다.(이건 마치 한명숙 총리가 구속됐던 뇌물수수사건의 일부를 연상시킨다.) 구관희는 다그치는 조훈에게 "내가 대통령을 만들 수도, 대통령을 못하게 할 수도 있다"고 큰 소리를 치는가 하면 결국 소변 검사를 위조해 조훈을 석방 시키려 한다. 동시에 상대당 대통령 후보에게 뇌물이 건네졌다는 자신의 각본에 맞춰 여성 대변인에게 구속 '영장을 치겠다'고 말한다. 이쯤 되면 악마의 끝판왕이지만 이런 내용에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는 건 지난 4~5년간 우리 사회 내부에 그런 일이 횡행했었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한국사회가 정치 검찰들의 왕국이었으며 그들이 자행하는 온갖 법기술로 이런 저런 사람들이 난자돼 왔음을 잘 알고 있다. 영화 '야당'은 마약 거래 이야기로 시작해 정치 영화로 끝을 낸다. 그 이야기를 전환시키는 연출 솜씨가 만만치 않다. 영화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 곧 스토리와 스토리 텔링(스토리를 구축하는 방식), 캐릭터 설정 모두에 모자람이 없다. 원숙하고 출중하다. 영화를 만든 황병국 감독은 노장급에 속한다. 그의 데뷔작 '나의 결혼 원정기'(2005)는 발군의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연출 호흡은 너무 더딘 편이어서 '특수본'(2011)이 실패한 이후 연출 대신 수많은 영화의 개성있는 조역으로 영화적 입지를 유지해 왔다. 이번 '야당'은 황병국의 연출 실력이 녹슬지 않았으며 영화적 패기가 죽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유해진의 남다른 연기가 돋보이며 박해준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강하늘은 최선을 다했지만 이번 역에 있어 자신의 연기 톤을 '카우보이 비밥'의 주인공 스파이크 흉내를 낸 것처럼 느껴진다. 그걸 알고 한 것인지 아니면 모르고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강하늘-이강수 캐릭터가 영화 전체를 약간 코미디처럼 만든 부분도 있다. 이건 호오가 엇갈릴 것이다. 영화 '야당'은 어려운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영화가 펼쳐 놓는 여러가지 우리 사회의 모습과 그 해법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영화 '야당'은 이야기와 인물을 여러 가닥으로 꼬아 놨지만 그 매듭의 시작을 알고 나면 그리 복잡한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심사가 꽤나 복잡해진다. 영화 '야당'은 겉으론 꽤나 통쾌하고 대범한 척 한다. 그러나 역시 뒤로 가면 갈수록 이상한 울분이 쌓인다. 영화 '야당'은 알고 보면 겹겹이 주제를 감추고 있다. 양파 껍질 벗기듯 그 하나하나의 주제를 알아채다 보면 이 영화가 꽤나 심지가 있는 작품이란 걸 알게 된다. 올 상반기 한국 영화 중 거의 유일하게 괜찮은 수작이다. 상업영화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 한다.
포르투갈 감독으로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인 미겔 고메스의 영화 ‘그랜드 투어’는 언뜻 보면, 그리고 대중 관객들이 보면, 도통 ‘제멋대로인’ 작품처럼 보인다. 이 ‘제멋대로인’ 작품을 두고 칸영화제는 지난해 왜 감독상을 주었으며 예술영화전문 배급사인 M&M은 무슨 용기로 수입을 했고, 그런 거 다 떠나서 미겔 고메스는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 했던 것일까. 그걸 알아내는 과정이야말로 이 영화 ‘그랜드 투어’가 계획한 장대한 여정 같은 것이다. 시놉시스는 엉뚱하고 '괴랄'하다. 단 몇 줄로 요약된다. 당연히 시놉시스와 영화의 전체 톤앤매너는 매우 다르다. 어쨌든 그 몇 줄은 이것이다. 영국인 에드워드(곤칼로 와딩톤)는 버마의 수도 랭군에서 파견 공무원으로 일을 하고 있는데(아마도 영사관 직원쯤.) 런던에서 약혼녀인 몰리 싱글턴(크리스타 알파이에타)이 결혼을 위해 찾아온다는 전보를 받는다. 에드워드는 몰리를 피해 줄행랑을 치는데 그녀가 자신의 뒤를 쫓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속 거처를 옮긴다. 처음엔 싱가폴로 갔다가 다음엔 방콕, 그 다음엔 사이공에서 마닐라로 갔다가 이후 도쿄까지 간다. 에드워드의 마지막 행보는 상하이를 갔다가 장강을 타고 충징으로 가는 것이다. 에드워드는 거기서 다시 티벳(동티벳=킴티벳)을 거쳐 청두로 간다. 그는 여자를 피해 멀리멀리도 도망을 다닌다. 그렇다면 이건 로맨틱 코미디인가. 로드무비 러브 스토리인가. 특이한 것은 영화의 시대 배경이 1918년이라는 것이다. 1차 대전이 끝난 지 한 해밖에 되지 않았고 제국주의의 광풍은 아직 한가운데에 있던 시대 때의 얘기이다. 그런데 더욱더 특이한 것은 에드워드가 다니는 길, 이후 그의 여인인 몰리가 에드워드를 추적하는 길에서 만나는 풍광은 1910년대 후반이 아니라 지금 현대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방콕으로 가는 기차가 밀림 속에서 탈선사고를 일으키는데 거기서 만난 미지의 여인(나중에 이 여인은 몰리가 만나게 되고 이름은 응옥이다.)의 짐 옆에서 휴대폰이 울리는 식이다. 사이공의 거리는 오토바이가 가득 차 흐르고 있고 상하이에는 고층 빌딩이 즐비하다. 게다가 영화 속 인물들은 다들 각자의 언어로 대화를 한다. 중간중간의 내레이션은 버마 어이거나 태국어 같은 해당 국가의 언어들이다. 이 모든 건 이상한 중첩이다. 이야기와 언어, 시대와 공간이 중층적이고 다층적으로 겹겹이 쌓여 있다. 인물은 과거에 살고 있지만 그 인물이 다니는 공간은 현재라는 것.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 무엇을 상징하고 의미하는가. 에드워드는 도쿄에서 한 고승을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눈다. “그림자는 뭔가 숨기는 게 아니라 드러나게 하는 것이오. 일본인들은 그걸 잘 알고 있어서 도망치지 않고 찾아간다오.” 에드워드는 말한다. “제가 말한 그림자는 그것과 다릅니다. 설명이 안 되는 불편한 현상입니다. 자연법칙은 명료하게 설명돼야 하죠.” 고승이 다시 묻는다. “자연법칙은 어디서 배우셨소? 자연법칙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군요.” 에드워드는 항변한다. ‘사람은 없는데 그림자만 보이면 보통 사람도 불안해지지요.” 고승은 말한다. “산을 오르시오. 원숭이를 잘 봐요. 큰 나무 아래를 걸어 봐요. 세상에 몸을 맡기시오. 세상이 당신에게 얼마나 관대한지 알게 될 거외다.” 이때의 고승은 처음엔 일본어로 얘기하고 나중에는 포르투갈어로 얘기를 한다. 에드워드의 언어는 시종일관 포르투갈어이다. 이 대목이야말로 영화가 그려내는 선문답의 최고봉이다. 물은 물이되 산은 산이로다, 일까? 이 같은 선문답은 에드워드가 청두에서 만나는 시그레이브 영사(주앙 페드루 베나르)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는 지친 표정으로 에드워드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제국의 종말은 필연적이야. 백인들은 아시아를 절대 이해할 수가 없어.” 미겔 고메스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결국 제국(서구의 정신과 이데올로기)의 몰락이며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려 했던 지난 100여 년의 역사 속에서 인류와 세계, 특히 고승이 말한 대로 일본(동양)인들은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찾아내며, 그렇게 세상에 몸을 맡기면서, 세계에 대해 공격적이지 않고 순응적으로 ‘세상이 그래도 관대하다는 것을 깨닫는’ 지혜를 얻었음을 얘기한다. 에드워드는 자연법칙, 일종의 다윈의 법칙을 얘기하지만 시그레이브의 말마따나 그런 법칙을 지닌 제국은 종말이 불가피하며 자신들이 서구의 가치관을 고집하는 한 동양을 이해할 수(지배하거나 교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음을 보여 준다. 서구적 가치 철학이 지난 100년간 철저하게 실패했음을 자인하고 가르쳐 주는 말(대사)들이 아닐 수 없다. 이 영화 ‘그랜드 투어’는 결국 한 서구인의 눈으로 본 지난 100년의 동서양 역사, 그 흔적, 그리고 그것이 현재 어디로 가고 있느냐의 문제를 남녀의 추적 여행기로 그려내고 있는 셈이다. 칸영화제가 이 작품에 ‘다소’ 흥분한 것은 바로 그러한 서구 정신의 몰락을 독특한 여행기로 그려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반부에 에드워드가 보여주는 도망기보다 후반부에 그려지는 몰리의 추적기가 조금 더 리드미컬하다. 몰리가 청두에 이르러서는 명소인 ‘낙산대불’을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는 거의 전부가 흑백이지만 몰리의 에피소드 부분에서는 이상한 채색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영화는 초반부에 버마의 시골에서 회전 대관람차를 인부들이 몸으로 직접 돌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부분과 이후 전통 인형극만이 컬러이다.) 영화는 간간히 컬러 톤을 전체 흑백 화면에 섞어 씀으로써 이 영화가 시공간을 나누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음을 나타낸다. 20세기와 21세기는 과거의 푸티지 화면과 현재의 실사 화면으로 마구 뒤섞인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1918년의 에드워드와 몰리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우리가 머무는 곳은 2025년이고 따라서 그 시대적 이미지는 중첩될 수밖에 없다. 사람의 의식과 관념의 흐름은 그러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의식과 관념을 그리는 영화가 굳이 차곡차곡 색감과 시간, 공간을 나누어서 그릴 필요가 있겠는가. 그게 바로 미겔 고메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몰리는 응옥(랑케 트 란)과 우정을 나누고 샌더스(클라우디오 다 실바)라는 농장주와 싫어하는 척 점점 그에게 빠지게 된다. 응옥은 점술사인 바동에게 몰리를 데려 가는데, 그녀는 불길한 점을 친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녀를 보호하고 있다고 말한다. 몰리에게는 두 명의 남자가 보인다고도 말한다. 몰리는 여행길에 병에 걸리고 샌더스가 치료하지만 점점 더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진다. 제국은 필연적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다면 몰리의 운명도 어느 정도 정해졌다는 것일까. 영화는 점점 기묘한 결론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그랜드 투어’는 결코 쉬운 영화가 아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작품도 아니다. 제목은 여행이지만 물리적인 여행길을 장황하게 보여주는 내용도 아니다. 그보다는 내면과 정신의 여행, 세계 역사가 지나온 흔적과 지금의 모습, 그 미래를 인류학적으로 짚어 낸 작품이다. 이런 작품은 결코 흥행에 성공할 수가 없다. 지식인용 영화이다. 영화가 지식인용으로 쓰여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붙을 수도 있는 작품이다. 영화가 지식인용으로 절대 쓰여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다. 때로 영화는 매우 지적이어야 한다. ‘그랜드 투어’는 때로 그래도 되는 영화 중의 한편이다. 지난 3월 26일에 개봉했다. 전국 14개쯤 분포돼 있는 예술영화전용관에서 상영 중이다.
‘계시록’은 넷플릭스가 가장 사랑하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는 연상호의 신작 영화이다.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연상호가 왜 이렇게 ‘정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상상력의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 냈을까,가 하나이고(원작 웹툰은 연상호와 최규석의 공동저작이다. 아마도 연상호가 스토리를, 최규석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또 하나는 도대체 멕시코의 대표적인 감독 알폰소 쿠아론(‘그래비티’, ‘로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 수상했다.)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이 영화의 기획에 참여했을까 라는 점이다. 뒤의 것은 특히 연상호가 인터뷰를 통해 직접 밝히는 것 외에는 알 길이 없는 내용이다.(공식 인터뷰는 24일 있을 예정으로 이 글은 그 전에 작성된 것이다.) 영화 ‘계시록’은 연상호의 유명 드라마인 ‘지옥’ 시리즈나 ‘방법’같은 작품과는 다른 선상에 있는 것이다. ‘지옥’에서는 지옥의 사자가 나오고 ‘방법’에서는 죽은 자들이 살아나 살인을 저지른다. 극단의 상상력의 캐릭터를 앞세운 작품이라는 얘기이다. 이번 ‘계시록’은 그보다는 현실 세계에 좀더 발을 붙이고 있다. 굳이 말하자면, 대중들에게 다소 외면받았던, 연상호의 저주받은 걸작에 해당하는, ‘염력’이란 영화에 더 가깝게 서 있는 작품이다. ‘염력’은 이른바 용산사태에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진혼곡 같은 내용이었다. 무자비한 철거 전쟁에서 사람들을 살리고자 했다면 차라리 염력을 쓰는 남자가 있었어야 한다는, 연상호 특유의 사회적 상상력과 인간적 고민이 개입된 작품이었다. 이번 영화 ‘계시록’도 같은 선상에 있다. 폭력성이 내면화 될 대로 내면화 돼 있어서 어떻게 손 쓸 재간이 없을 만큼 망가져 있는 지금의 한국사회에 대해 연상호는 그 나름대로의 치유책, 치료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의 사회의식을 한층 더 개입시키고 발전시킨 작품이다. 지옥의 사자나 좀비 같은 캐릭터의 도발성을 없앴지만 사회의식 면에서는 자신이 더욱 도발적인 면을 지니게 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계시록은 요한 묵시록의 다른 이름이다. 성경의 마지막 권이며 총 22장 22절로 돼있다. 사도 요한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규율을 지키지 아니하고 믿음을 저버리면 7년 환난 등이 도래할 것이라는, 다소 무섭고 위협적인 내용으로 돼있다. 흔히들 성경의 종말론으로 해석하고 있어서 교파, 특히 이단들은 이를 예수 재림의 근거로 삼으며 기행과 비행을 일삼는 ‘말씀’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영화 ‘계시록’은 제목만으로도 한국 교회’들’의 비이성적 상황을 설정으로 삼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주요 인물은 세 명이다. 경기도 무산이라는 곳(가상의 공간이다.)에서 개척교회를 일구고 있는 목사 성민찬(류준열)이 있다. 여기에다, 여자나 여아를 유괴납치해 학대를 일삼는 이상성격의 범죄자 권양래(신민재)가 성민찬과 얽힌다. 형사 이연희(신현빈)는 자신이 아끼던 여동생 이연주(한지현)를 권양래에게 잃었다. 이연주는, 권양래에게서 간신히 탈출했지만 법원이 그가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고, 그로 인한 트라우마로 ‘외눈박이 귀신’에게서 정신을 지배받고 있다는 정신과 의사(김도영)의 법정 진술에 따라 가벼운 형을 언도하자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다. 언니 이연희 경위는 복수심에 강력반에 지원을 한다. 그녀는 권양래의 뒤를 좇고, 캐고 있는 중이다. 사건의 발단은 교회에서 벌어진다. 권양래는 범죄 욕구가 다시 도진다. 그는 중학생인 신아영(김보민)의 뒤를 좇아 오다가 교회까지 오게 되고 목사 성민찬의 눈에 띄게 된다. 성민찬은 그가 전자발찌를 차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성민찬의 아내는 목사 부인임에도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성민찬도 그걸 알고 있다. 성민찬은 무산시에 들어설 대형교회의 담임목사 직을 노리고 있어서 아내의 간음 행위에 대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내는 여느 때처럼 동창 모임이 있다며 불륜남을 만나러 나가고 그날 저녁 아이가 사라진다. 성민찬은 그것이 권양래의 짓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추적하다가 천일산 여우고개라는 길목에서 그를 우발적으로 살해(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때부터 이 영화의 드라마는 롤러코스터를 타게 된다. 성민찬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경사 이연희는 권양래를 체포해 없어진 중학생 아이 아영의 행방을 찾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하면서도 종종 환각 속에 나타나는 죽은 동생 연주의 명령대로 가차없이 그를 죽이고 싶다는 욕구에 시달린다. 이 둘과 맞닥뜨리게 되는 권양래는 스스럼없이 둘 다를 향해 자신보다 더 미친 인간이라고 소리지른다. 권양래가 외눈박이 괴물에 시달리는 것과 목사 성민찬이 모든 것을 하늘의 계시라고 부르짖는 것, 형사 이연희가 환각에 시달리는 것은 사실은 모두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이다. 단어는 다르지만 같은 성격의 이상질환이다. 그 모든 것은 개개인 스스로가 무엇인가에 대한 사회적 핑계나 해법을 위해 창조해 낸 것에 불과하다.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잘못된 확신이며 유괴범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목사가 하느님을 내세워 혹세무민 하려는 것, 형사가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모두가 같은 소행이다. 연상호의 영화 ‘계시록’이 보여주려는 주제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연상호는 지금의 한국 사회가 갖가지 이상 징후에 시달리고 있고 그 원인은 개개인 모두 스스로의 환각과 광적인 확신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교회가 문제의 핵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스토리가 다소 극단적으로 포장돼 있지만 연상호가 내리는 진단의 요체는 꽤나 명징한 셈이다. 연상호의 기독교 비판은 일관적이다. 그건 ‘지옥’같은 드라마에서도 두텁게 제기됐던 부분이다. 연상호는 기독교가 사람들을 광적으로 만들고, 잘못된 확신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타락의 최극단에 서있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순전히 사업상의 이익을 위해 신도들을 모으고 결국 대형화의 욕망을 저버리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것도 여전하다. 이번 ‘계시록’ 또한 그 같은 자신의 기독교관을 여지 없이, 과감하게 개진하고 있다. 교회는 위선적이고 타락했다. 연상호가 그려내는 공간 또한 늘, 한국사회만큼 불안하고 불길하기 그지 없다는 것 역시 특징 중 하나이다. 비가 자주 내리고 음습한 산길의 구부러진 길이 종종 부감 쇼트로 보여진다. 이번 영화에서는 특히 그것이 마치 하늘 위에서 누가 내려다 보는 것 같은 시점 쇼트를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폐건물, 남루한 골목길, 영세민의 집안 풍경 등 연상호가 그리는 한국 사람들의 일상은 비루하기 이를 데가 없다. 영화 ‘계시록’이 묵시록이자 종말론의 내용을 암시하는 것인 양 지금의 우리사회가 매우 어두운 지경과 그 위기에 처해 있음을 보여주려 애쓴다. 무섭고 끔찍하며 잔혹한 이미지와 서사를 즐겨 사용함으로써 호러 장르 감독의 카테고리에서 거의 벗어난 적이 없는 연상호는 이번 ‘계시록’에서만큼은 그다지 무섭지 않게 그려낸다. 물리적 폭력이 즐비하게 표현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안의 내면은, 과할 만큼 불길하다. 지금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 얼마나 극단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는지, 또 얼마나 쉽게 그런 생각이나 이념, 종교에 사로잡히게 되는 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연상호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이번 ‘계시록’은 그 어떤 작품보다 한국사회에 대한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 유의미성 만큼은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 때문에 영화가 다소 재미가 없어졌거나 연상호 특유의 감각이 떨어졌다거나, 기이한 ‘글로벌 표준율’같은 작품이 됐다거나 하는 지적은 있을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지옥’의 연상호보다 이번 ‘계시록’의 연상호를 더 지지하게 된다. 넷플릭스에 지난 3월21일 공개됐다. 아직 글로벌 순위에서는 그리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지는 못하다. 호불호가 크게 엇갈릴 것으로 예상된다.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조 샐다나)에 빛나는 ‘에밀리아 페레즈’는 트랜스 젠더에 대한 얘기이다. 이런 소재를 낯설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일 것까지는 아니겠지만 낯설고 기괴한 이야기일 수 있다. 게다가 배경은 멕시코이다. 이국적이다. 해외에서의 반응은 뜨거웠지만 국내에서는 어떨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는 두 가지 점에서 그 ‘전이(trans)’의 욕망이 강하게 드러난다. 하나는 성 전환을 넘어서 트랜스 휴먼, 곧 인간 변이까지를 꿈꾼다는 점이다. 주인공 델 몬테(칼라 소피아 가스콘 1인2역)는 멕시코에서 가장 잔혹한 마약 카르텔의 두목이다. 그가 눈앞에 있다는 것만 해도 사람들은 심장이 떨려 혼비백산할 정도이다. 그는 애초에 얼굴이 알려져 있지도 않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변호사 리타(조 샐다나)를 부른다. 리타는 악덕 로펌에서 일하며 먹고 살기 위해 정의에 눈감고 돈이 되는 사건만을 좇아 살아가는, 자신의 현재적 삶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는 참이다. 얼마 전에도 아내를 때려서 살해한 한 부호 남자의 변호를 맡았으며 증인을 검시관을 매수해 사건을 뒤집기까지 했다. 그런 리타를 델 몬테 부하들이 두겁을 뒤집어 씌워 납치한다. 리타는 그간 델 몬테의 돈 세탁 같은 ‘잡일’을 도왔으나 이번만큼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다. 리타는 곧 델 몬테의 완벽한 신분 세탁, 곧 여성으로 성 전환을 한 이후에 발생할 모든 법적 사회적 문제를 정리하는 일을 맡는다. 당연히 막대한 돈을 받는다. 그녀는 다니던 로펌을 때려 치우고 델 몬테가 스위스에서 수술 후 오랜 치료를 받는 동안 자신 역시 런던에서 새로운 인생을 찾으려 한다. 인간이 성을 바꾸면 본질도 바뀌게 되는가. 외형이 바뀌면 성정이 변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자신 안에 갖고 있던 여성성이 수술까지 결심하게 한 것일까. 그 앞 뒤 전후의 요인은 과연 어떤 것이 정답인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리고 놀랍게도, 사람들을 가차 없이 잔혹하게 살해해 온 델 몬테가 언제부턴가 자신에게 여성성이 있음을 발견했으며 그래서 또 언제부턴가 그 모든 ‘악마의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라이벌 세력이나 경찰의 눈을 피하는, 도피와 은둔을 목적으로 성전환 수술을 꾀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특히 남자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의 성기를 제거하는 수술까지 감행하지는 못한다. 남자에게 있어 ‘거세 공포증’만큼 두려운 것은 없다. 델 몬테는 에밀리아 페레즈(카를로 소피아 가스콘)로 거듭난 후 작정한 듯 자신을 완벽하게 변이시키는 데 성공한다. 델 몬테는 이제 돈이 많은, 풍만하고 매혹적인 여성으로 변신한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가 주력하는 또 다른 전이의 욕망은 영화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것이다. 서사가 지닌 흐름만으로 짐작하기에 이 영화의 장르는 갱스터 무비이다. 물론 델 몬테가 나오는 장면은 그렇다. 그러나 또 한번 놀랍게도 영화는 뮤지컬이다. 노래 장면으로 전편이 이어지지는 않지만 주요 장면 모두가 출연 배우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장면들로 채워져 있다. 한편으로 주인공 에밀리아 페레즈가 자신이 몰래 버린(수술을 하느라) 아내 제시(셀레나 고메즈)와 두 아이들을 되찾아 가정을 복원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가족영화이기도 하다. 페레즈는 중간에 자신이 ‘묻어 버린(살해를 지시한)’ 라이벌 갱단 조직원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육체 관계까지 맺는다. 둘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영화는 러브 스토리로까지 나아 간다. 갱스터 영화에서 뮤지컬 영화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다소 무리하다 싶을 만큼 이야기의 중심을 향해 횡단과 종단을 오간다. 영화를 연출한 프랑스의 유명감독 자크 오디아르(‘러스트 앤 본’ “예언자’ ‘파리, 13구역’ 등)의 목표는 모든 장르를 뒤섞어, 인공적으로 완전히 다른 장르를 만든 후(마치 성전환 수술을 하듯) 매우 새로운 느낌의 영화를 만들어 내겠다는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모든 뮤지컬 영화가 그렇듯이 ‘에밀리아 페레즈’도 놀라우리 만큼 인공적이다. 당연히 작위적이다. 사람이 대화를 하다 말고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춤을 춘다. 전통적 서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어색해 할 만 하다. 그런 장면들을 이어 가다 보니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촬영과 조명에 막대한 공을 들였다. 장면 하나하나가 뮤지컬 무대에서 잘 연습된, 배우들의 군무를 보는 느낌을 준다. 배우들이 춤을 추는 모습은 마치 세계적인 무용가 피나 바우쉬의 작품을 보는 느낌마저 준다. 그렇다면 자크 오디아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영화적 전환을 넘어 변이까지도 이루어 냈는가. 일부는 그렇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는 왜 이 영화가 뮤지컬적인 요소까지 결합했는지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고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오디아르의 영화적 실험이 꽤나 놀랍고 신선하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오디아르는 적어도, 영화가 계속 새로운 지점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그 진보성을 입증해 내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이번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 수상에는 실패했지만(숀 베이커 감독의 영화 ‘아노라’가 너무 강세였고, 결국 주연상은 26살의 신예 마이키 매드슨에게 돌아갔다.) 사실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은 충분히 주연상을 탈만 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가스콘은 이 영화에 나오기 전 카를로스 가스콘에서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으로, 그러니까 남성에서 여성이 됐다. 한번 여성이 된 사람의 경우에는 의도적으로도 자신에게 잔재처럼 남아 있는 남성성을 제거하려 애쓴다. 그러나 가스콘은 이번 영화에 나오면서 턱 수염과 얼굴 근육의 특수 분장을 통해 다시 델 몬테라는 남자로 변신한다. 사전 정보가 충분치 않다면 이 둘을 같은 여자, 혹은 같은 남자였던 사람으로 구분하지 못할 정도이다. 충분히 주연상 감이었지만 SNS에 올린 인종 및 민족 차별적 발언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사람들은 가스콘이 성소수자인 만큼 그녀의 차별 의식에 반기를 들었고 그게 그녀로 하여금 수상권에서 멀어지게 했다. 자크 오디아르가 이루려 했던 영화의 전이, 세상의 전이를 불가능하게 한 요소는 한 개인의 그릇된 판단에서 나왔다. 아이러니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는 인공적이고 그래서 다소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지만 재미있고 격렬하며 섹시한 영화이다. 감독상을 수상한 숀 베이커의 말처럼 ‘극장에서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영화’이며 TV 수상기가 아무리 크게 나온다 한들 이건 극장에서 봐야 할, 전통적 극장주의의 작품이다. 조연상을 받은 조 샐다나의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녀는 드라마 연기에서 노래와 춤 연기까지 영화를 온통 휘젓고 다닌다. 배우란 이런 것이다라는 점을 보여 준다.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는 고매한 성취를 보여 준다. 적어도 이제 우리에게 트랜스 젠더의 존재는 더 이상 부자연스럽지 않게 느끼게 한다. 그게 정말 어디인가.
감독 김대현이 만들고 송귀철 주연(아역 송정빈)의 영화 ‘정돌이’는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이다. 정돌이는 고려대 정경대 건물, 정경관에서 10대 시절을 노숙하며 보냈던 송귀철씨의 별칭이었다. 정경대 아이라는 것이다. 그는 14살 때 집을 나왔는데 그건 어머니가 그에게 500원을 쥐어 주고 집을 나갔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였고 어린 나이에 살아갈 수가 없다고 생각한 이 아이는 집을 나와 청량리를 배회하다가 행정학과 3학년에 다니던 서정만을 만나게 되고 그의 손에 이끌려 고려대 안으로 들어 오게 된다. 서정만은 시위 주동자로 몰려 도피 생활중이었다. 그는 청량리 만화방을 전전하던 중이었다. 정돌이가 정돌이가 된 것은 이 만남이 계기가 됐다. 정돌이는 87년 형 누나들에게 농악을 배워 1992년 필봉농악을 배우기 위해 전라도의 한 지역으로 옮기기까지 5년간 고대 캠퍼스 안에서 풍찬노숙의 생활을 이어 나갔다. 정돌이를 놓고 정경대와 사범대가 양육권 다툼이 벌어진다는 농담이 오갔을 만큼 이 아이는 고대 운동권의 마스코트가 됐다. 한때 정돌이였던 송귀철은 현재 ‘사물놀이 미르’ 대표이다. 영화 ‘정돌이’는 저항과 연대의 기억이자 기록이다. 영화는 정돌이라는 극적인 인물의 생애를 담는 척 사실은 84년 학번을 중심으로 한창의 고대운동권이 형성된 1987년 전후의 학생민주화 시위의 역사를 추적한다. 광주에서 저지른 전두환 학살 사건이 어떻게 광주민중항쟁으로 승화되고 서울대 학생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을 통해 한국의 사회민주화 운동이 어떻게 자기희생을 감행해 나갔는지가 펼쳐진다. 다 아는 얘기지만 새삼 새롭다. 그 사이사이 전개됐던 소위 5.3인천 사태, 건대 사태, 전두환의 호헌 철폐를 위해 벌어졌던 6.10 항쟁 등 실로 뜨거웠던 역사의 기록들을 이어 나간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이른바 386 세대들조차 "우리에게 과연 저런 일들이 있었는가"라는 기시감을 갖게 된다. 우리에게 과연 한때나마 사회민주화를 위한 가열차고 영웅의 시대가 있었는가를 다소 참담하고 자괴스런 느낌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정돌이, 송귀철 씨가 현재의 삶을 이루게 된 데는 정경관에 머물고 숙식을 하면서 그 건너편 학생회관에 있었던 탈사랑우리회, 고대 농악대와 접촉하게 되면서이다. 그는 여기서 장구를 배웠고 지금은 장구 연주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송귀철이란 사람의 인생유전은 드라마틱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이다. 영화 ‘정돌이’는 민주화 투쟁과 정돌이의 성장 과정을 오가며 당시의 시대가 만들었던 역사적 정당성, 그 진심을 알리려 애쓴다. 정돌이는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으로 솟아올랐던 전국 시위에 형 누나들과 함께 참여하게 된다. 한 인간의 정치의식이란 것이 사실은 (거대한 철학 이론에서가 아니라) 얼마나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가를 보여 주는 산증인 같은 사례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영화 ‘정돌이’는 대중적인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건 어쩌면 고대 운동권 학생들만의 얘기일 수 있고, 때문에 너무 특수한 얘기라는 취약성을 지니는 작품이다. 극단적으로 봐서는 고려대가 아닌 다른 전국 대학의 운동권 출신들이 이 영화에 정서적으로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으며 그 차원을 넘어서서 1980년대의 한국 역사를 고려대라는 캠퍼스에만 가둬 놓는 우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대현의 연출은 그 같은 약점을 잘 간파했던 듯이 보인다. 특수가 보편을 만들고 보편이 특수를 만든다는 변증 이론이 영화 곳곳에서 전개된다. 정돌이란 인물에서 당시 학생운동가들에 대한 인터뷰가 빈번하게 교차편집의 방식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정돌이, 곧 송귀철은 자신의 기억으로 80년대를 증언하고 서정만, 김영남, 이윤경, 손병휘, 안태용, 양창욱, 노충관, 임혜숙, 이준영, 강신 등등 다양한 인터뷰어들은 각자 자신이 경험했던 당시 시대에 대한 ‘사회적’ 진술을 이어 나간다. 이들의 증언은 학생운동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지점으로까지 확대된다. 정돌이는 사회의식화가 된 인물로 성장했으며(스스로도 중간에는 자신이 투사가 됐었다고 말한다) 운동권 학생들은 어느덧 늙고 평범한 중년들로 사회에 녹아들었다. 특수에서 보편으로 보편에서 특수로, 그럼으로써 영화는 그 시대에 대한 총체성을 이어 나간다. 그 과정에서 보이는 연출의 고뇌는 충분히 평가할 가치가 높다. 미국의 1960년~1970년대도 뜨겁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학생운동가 톰 헤이든은 격렬한 청춘을 보냈지만 나중에는 제도권 변호사로 안착했으며 제리 루빈이나 에비 호프먼 같은 사회주의적 운동가, 무정부주의자들의 삶도 이후에는 결코 녹록치 않았다. 변질됐다. 할리우드는 그 얘기들을 숱한 극영화로 만들어 왔다. 아론 소킨의 ‘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7’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고대 학생 운동권의 이야기, 나아가 한국의 학생운동가들의 이야기, 더 나아가 한국의 민주화 투쟁의 이야기는 풍부한 드라마, 극영화로 선뜻 만들어 나가기가 힘이 든다. 사실과 진실의 규명이 채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너무도 많으며 여전히 그에 대한 반동적이고 반민주적 행태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 ‘정돌이’는 시의적절한 시기에 개봉이 됐다. 소수이긴 하지만 비교적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가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계엄령 소동 이후 서부지법을 침탈한 난동세력의 젊은이들 모습을 보면서 1980년대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때를 진실되게 살았던 사람들의 얘기는 언제든 환영받고, 공유되며 그럼으로써 새롭고 역사적인 ‘의식화’가 필요한 시기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정돌이’는 정돌이란 인물을 찾아서 긴 여정을 탐색하다가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되짚어 가고, 지금과 같은 왜곡의 시대에 그때의 정신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프로퍼간다(선전선동)' 영화인 듯 보이지만 흔한 프로퍼간다 작품들과는 달리 인간미와 함께, 시대에 대한 진정성이 녹아 있다. 어쩔 수 없이 영화 ‘정돌이’에는 고인이 된 인물들에 대한 기억과 회고가 많이 이어진다.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故 김두황의 경우 강제징집, 곧 강제로 군에 입대한 후 사망을 했고 군에서는 자살로 처리했지만 수많은 의혹이 규명되지 않아 여전히 의문사 소송이 진행 중이다. 영화 ‘정돌이’는 수많은 죽음에 대해서도 비중있게 할애하고 있다. 미국의 노동운동가이자 기자였던 존 리드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취재한 후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라는 르포르타쥬를 썼고 1920년 내전에 휩싸인 혼란의 소련에서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그의 얘기를 다룬 워렌 비티의 영화 ‘레드’는 오프닝에서 8,90대의 늙은 노인들, 부부들을 인터뷰 하는 장면을 보여 준다. 실제로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반에 존 리드와 함께 미국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런 식으로 말한다. “우리에게 그런 날들이 있었나? 그런 날들이 있었다고들 말들은 해? 우린 이제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아” 영화 ‘정돌이’를 보고 있으면 한편으로 영화 ‘레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에게 80년대가 있었던가. 민주화를 위해 싸우고 희생됐던 사람들이 있었던가. 아무도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물론 그 시절이 몽땅 부정되고 있는 듯한 지금의 시대에 영화 ‘정돌이’는 우회적으로 그 정치적 망각을 질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지금의 2,30대 젊은이들이 봐야 할 절실한 작품이지만 그것도 한편의 생각일 뿐일 수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결코 안녕치 않은 것은 그때문이다. 지난 2월12일에 개봉됐으며 전국의 작은 극장을 순회하며 상영중이다.
얼마 전 타계한 전설의 감독 데이빗 린치(LA 산불이 원인이었다)의, 역시 전설적인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23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더라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오랜 세월이 지난 만큼 사람들의 지력도 높아져서 영화의 내용 중 어떤 것이 현실이고 어떤 것이 비현실인지를 구분할 수는 있을 정도가 된다. 영화가 얘기하는 것 중 어떤 것이 실제로 벌어졌고 어떤 것이 벌어지지 않은 일인가. 그 경계를 구분하는 것이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정작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구분이 정말 필요하냐는 것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곧 멀홀랜드 도로는 할리우드 블로바드(대로) 혹은 선셋 블로바드 같은 LA의 주요 거점에서 휴양지인 산타 모니카로 넘어 가는 능선 도로 길이다. 비교적 위험한 산길 도로이고 그 아래 가파른 비탈에는 영어로 할리우드 알파벳 입간판이 크게 설치돼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정상에는 전망대가 있으며 그곳에서 LA 도시 전경과 그 너머의 태평양 바다를 볼 수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전망대에서 보는 LA의 야경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특히 필름 누아르(film noir)나 미스터리 영화에서 많이 쓰인다. 추적 씬, 비밀스러운 만남, 돈 거래, 정부와의 밀회 등등이 다 이곳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찍힌다.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이야기, 서사의 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일단 캐나다 온타리오 딥 리버에서 온 배우 지망생 베티(나오미 왓츠)가 LA 공항에 도착하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베티는 고모이자 할리우드 배우인 루스의 비벌리 힐스 집에 머물 예정이다. 당연히 베티는 꿈에 부풀어 있다. 그녀는 중간에 누군가에게 끌려가 대형 세트장에서 진행되는 오디션 현장을 구경하게 된다. 거기서 나오는 노래가 린다 스콧이 부르는 ‘내가 모든 별들에게 얘기했지(I’ve told every star)’일 정도이다. 그녀는 자신이 무비 스타가 되거나 연기파 배우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티는 고모 집으로 온 첫 날부터 이상한 일에 직면하게 된다. 자신의 이름이 리타라고 하는 여자(로라 엘레나 해링)가 샤워를 하고 있었던 것. 그러나 리타라고 하는 이름도 여자가 벽에 걸려 있는 리타 헤이워드 영화의 포스터를 보고 문득 생각한 것이어서 진짜는 아니다. 아무 것도 기억을 못한다는 리타의 지갑에는 막대한 돈이 들어 있다. 돈에는 피가 묻어 있다. 그녀는 차 사고가 났다고 한다. 다음 날 베티는 리타를 데리고 패스트 푸드 점인 윙키스(Wimkie’s)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리타는 웨이트리스의 이름표를 보다가 자신의 본명이 다이안 셀윈이라는 걸 기억해 낸다. 두 여자는 전화번호부에서 다이안 셀윈의 주소를 알아내고 그녀의 집으로 가게 되지만 놀랍게도 부패되고 있는 한 여인의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 리타인지 다이안인지, 미스터리 여인은 시체를 본 후 머리를 자른다. 그녀는 가발을 쓰고 금발 행세를 한다. 베티는 그런 그녀와 섹스를 한다. 베티와 자던 리타는 잠꼬대를 하는데, 계속 ‘실렌시오’ ‘노 아이 반다’라고 중얼거린다. ‘노 아이 반다’는 ‘밴드는 없다’라는 뜻이다. 이야기의 또 한 축은 아담 캐셔라고 부르는 영화 속 영화감독(저스틴 셔룩스)이 겪는 일이다. 그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갱단인 카스틸리아네 형제에게 쫓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담 캐셔는 또 제작자와 매니저로부터 캐스팅 압력을 받고 있는데 본인이 그다지 마땅지 않게 여기는 여배우 카멜라 로즈를 기용해야 할 참이다. 그는 모든 협상을 거부하고 회의장을 박차고 나온 후 집으로 간다. 집에는 아내가 수영장 관리를 하는 남자와 동침을 하고 있다. 아담은 아내의 남자에게 두들겨 맞고 집을 나온다. 한편 베티는 할리우드의 한 제작사에 들러 오디션을 보고 만족해서 나오지만 다른 여배우에게 이끌려 한 촬영 현장에 가게 되는데 그게 바로 아담 캐셔 감독이 촬영하는 곳이다. 거기서 베티는 카멜라 로즈라는 여배우를 보게 된다. 총 러닝 타임 140여 분, 그러니까 2시간 20여 분 중 2시간째에 이르면 모든 인물이 뒤죽박죽이 된다. 베티는 어느 덧 다이안으로 불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베티가 정작 다이안이라 불렀던 미스터리 여인은 카밀라가 돼 있다. 베티는 리타가 됐다가 다이안으로 된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누구인가. 이것은 한명의 얘기인가 두명의 얘기인가. 이쯤되면 영화의 처음을 떠올려야 한다. 오프닝 타이틀이 뜨기 전 영화는 일군의 젊은이들이 지르박을 추며 신나게 노는 장면을 보여 준다. 장면은 상당히 키치적이다. 유치한 아이들의 모습을 담아 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컷으로 바로 ‘멀홀랜드 드라이브’라는 타이틀이 뜨고 곧 이 도로를 달려 가는 자동차를 보여 준다. 자동차 안에는 리타 혹은 다이안, 나중에는 카밀라라 불렸던 여인이 타고 있다. 여자가 길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운전석의 남자가 돌아 보며 총을 겨눈다. 남자가 뒷 좌석 문을 열고 총을 쏘려는 순간 좀 전에 지르박을 추던 아이들이 두 대의 차에 나눠 타고 과속으로 달리다 여자가 타고 있는 차와 충돌한다. 차는 거의 반파가 되는데 차에서 간신히 기어 나온 여자는 혼이 나간 모습으로 산 아래로 내려 와 어떤 집에 숨어 들어 가는데 그게 베티의 집, 베티 고모의 집이다. 이야기가 도무지 어떻게 되는 것인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영화의 마지막 10분은 모든 것을 정리해 준다. 물론 한번에 깔끔하게 정리되지는 않지만 누가 무슨 짓을 벌였고 누가 현재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게 해 준다. 이 모든 이야기는 누군가 죽어가는 찰라의 순간에 떠 오른 파노라마의 기억이자 환상이다. 영화는 그 순간을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에서 실렌시오 클럽 장면이 매우 중요하다. 실렌시오는 리타=다이안이 베티와 자면서 잠꼬대로 중얼거린 말이다. 두 여자는 실렌시오 클럽에서 마술쇼와 스탠딩 코미디를 본다. 무대 진행자는 계속 떠든다. 노 아이 반다, 노 아이 반다. 밴드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녹음된 것입니다. 저는 불지 않는 트럼본 소리를 좋아 합니다. 그러면 트럼본 주자가 나와 녹음된 음악에 맞춰 립씽크로 연주를 한다. 유명 여가수 레베가 델 리오가 나와 졸란도(Llorando), 곧 크라잉(Crying)을 부르다 졸도를 하기도 한다. 실렌시오 클럽은 일종의 이 영화 자체를 암시하는 메타포이다. 모든 것은 녹음돼 있다. 모든 것은 연출된 것이다. 모든 것은 다 환상이다 라는 것을 말해 준다.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모든 것은 환상이다. 데이빗 린치의 초현실주의적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영화의 스토리 텔링이 지니는 무한한 확장성, 그 상상력의 극치를 보여 준다. 인간은 상상할 수 있고 거짓을 진짜처럼 꾸밀 수 있으며 인간의 삶은 때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것과 다름 아님을 보여 준다. 안젤라 바달라멘티의 음악은, 그의 음악이 린치 영화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인 가, 영화와 영화음악의 조합이 갖는 최고치를 보여 준다.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린치의 죽음을 추모하며 현재 국내에서 특별 상영중이다. [ 경기신문 = 우경오 기자 ]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마음속에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쓰려는 영화 ‘쇼잉 업’은 지난 1월 8일에 개봉해 2주를 못 버티고 전국에서 단 7,949명을 모은 채 종영됐다. 모두 1월 말 개봉을 위해 전쟁을 벌인 국내 영화들 때문이다. ‘검은 수녀들’ ‘히트맨2’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전국 스크린을 장악했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그럼에도 딱히 정곡을 찌를 말이 없어서 하는 얘긴데, 다들 쓰레기들이다. 이런 독설에 너무 마음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차피 돈 벌려고 만든 영화들이니 만큼 저열한 평가를 받은 들 그리 신경 쓸 것까지는 없겠다. 자 어쨌든 그러하니, 이 영화 ‘쇼잉 업’은 이제 볼 수가 없다. 보는 영화가 아니라 읽는 영화가 됐다. 한국의 극장가 현실은 영화를 읽게’만’ 만든다. 근데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이 글은 영화 ‘쇼잉 업’에 대한 스포일러를 잔뜩 뿌려 놓을 것이다. 잘 안다. 스포일러에 과민한 사람일수록 영화를 오히려 더 안보는 사람이라는 걸. 이 글 ‘쇼잉 업’은 그냥 읽으면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 어느 OTT나 케이블TV에서 영화의 제목을 봤을 때는 이미 그 내용을 다 잊어 버렸을 것이기 때이기 때문이다. ‘쇼잉 업’을 두고 많은 기사들, 리뷰들은, 한 공방에서 조각가인 주인공이 일상을 보내는 얘기 정도로 정리한다. 잘못된 얘기이다. 이 영화에는 많은 에피소들이 존재한다. 그것을 어떻게 찾고, 어떻게 느끼며, 그것을 어떻게 자신과 동일화 시키는가가 중요하다. 영화 ‘쇼잉 업’은 그런 영화이다. 주인공은 리지(미셸 윌리엄스) 혼자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리지와 리치이다. 리치는 리지가 키우는 고양이이다. 이 리치가 어느 날 비둘기를 해치려 했고 죽어 가던 비둘기를 옆집 사는 친구 조(홍 차우)가 구해낸다. 조는 주인공 리지에게 붕대를 감아 준 비둘기를 맡기며 아예 돌봐 달라고 한다. 친구 조는 당장 내일이 전시회이기 때문이다. 리지는 조의 쉐어 하우스에 월세를 내고 살고 있다. 조는 핸디우먼이다. 뭐든 잘 고친다. 리지는 조에게 매일같이 샤워기를 고쳐 달라고 한다. 더운 물이 안나오기 때문이다. 리지는 며칠 째 샤워를 하지 못했다. 리지는 조소가이고 사람들의 표정과 모습을 작은 형상으로 조각하는 일을 한다. 그녀의 전시회도 얼마 남지 않았다. 리지는 조각하는 사람의 모티프를 자신이 일하는 교수 연구실 앞 마당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서 얻는다. 그들이 추는 춤의 주제는 ‘생각하는 몸’이다. 리지가 일하는 연구실의 교수는 실은 그녀의 엄마 진(마리안 플러킷)이다. 그녀의 남편이자 리지의 아버지 빌(주드 허쉬)은 한때 도예가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늙은 히피들과 어울리며 살아간다. 리지의 오빠 션(존 마가로)은 천재적인 영감을 가진 작가였지만 지금은 그냥 미친 은둔자이다. 리지는 아빠 빌과 오빠 션의 현재를 걱정하며 엄마인 진에게 종종 의논을 하지만 엄마는 늘 그냥저냥한다. 너는 그냥 여기 있어. 엄마가 션에게 갔다 올께, 하고는 그녀를 끼지 못하게 한다. 리지는 곧 있을 전시에 온통 신경이 바짝 서 있고, 연구실에서 해야 할 잡일도 해야 하는데(그중 하나가 말린 헤이맨이라는 유리공예가의 전시 팜플렛을 디자인하는 일인데 이 여류 작가는 최근 유명 미학잡지인 ‘스컬프’지 표지에 나왔다.) 온수 샤워기 꼭지를 고치는 일로 친구이자 동료 작가인 조와 거의 싸우기 일보 직전이 된다. 날개를 다친 비둘기도 그녀의 걱정 맨 앞 줄에 놓여 있다. 켈리 라이카트라는 이름의, 결코 같이 한 이불 덮고 같이 살기는 어려울 것처럼 보이는 여자 감독의 작품 ‘쇼잉 업’은 밖에서는 트럼프 같은 ‘정신 나간’ 인간이 대통령이 되든, 한국이라는 변방의 나라에서는 계엄령이 터지든 나는 그림이나 그리고, 조각이나 하며, 유리공예나 하겠다는 사람의 얘기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얘기를 거꾸로 하면 이렇다. 트럼프 같은 ‘미친’ 인간이 대통령이 되든, 한국이 정치적 혼란기에 빠지든 말든 일상은 일상대로, 예술은 예술대로, 인생은 인생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모두들 정치만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두들 광장에서 시위만으로 날을 지새울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구는 농사를 짓고, 누구는 음식점을 해서 대중들에게 쉴 곳을 만들어 줘야 하며, 누구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사람들 입에서 ‘와우’ 혹은 ‘원더풀’ 소리가 나오게 해야 한다. 누구는 그런 수준의 영화를 만들어 2시간 가까이 세상의 다른 면에 집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영화 ‘쇼잉 업’은 그만큼 중요한 영화라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예술가들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는 만큼 영화는 내추럴 그 자체이다. 인공조명이 거의 없고 배우들도 분장을 하지 않는 거의 맨 얼굴이다.(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의상도 저런 스타일이라면 제작비가 들 리가 없겠다 싶을 정도이다. 이런 얘기가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켈리 라이카트는 영화 속에 나오는 많은 미술작가들 만큼 ‘또라이’이다. 근데 그런 류의 사람들만이 이런 독창적인 이야기를 영상으로 옮길 수 있다. 아마도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도 대체로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다. “도무지 이 영화에 스토리라는 게 있기는 해?” 미친 천재 여성 켈리 라이카트 감독만큼 이렇게 돈도 안될 것 같은 영화에 제작비를 대고 투자배급비를 댄 ‘누군가’들도 대단한 인물들이다. 세상은, 적어도 영화 세상은 그런 사람들로 인해 망하지 않고 간신히 버텨가고 있는 셈이다. 구약에서 여호와가 세상을 불과 물로 망하게 하려고 할 때 너희들 중 열명의 의인을 찾으면 용서하겠다고 했다. 그걸 현실로 바꾸면 많은 예술가들이 세상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받게 하는 주체들일 것이다. 영화 ‘쇼잉 업’을 보면 바로 그 점이 느껴진다. 영화의 마지막 20분은 주인공 리지의 전시회 장면이다. 영화에 나온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같이 모여서 나오는 장면이다. 리지의 작품들은 영화임에도, 진짜 좋다. 전시를 보러 온 아버지 빌이 작품을 보는 눈빛에서 그게 드러난다. 빌은 영화를 통해 전시된 작품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빌의 입에서는 줄곧 ‘예~(Ye)’ 소리가 흘러 나온다. 정말 작품이 좋다. 좋은 작품들은 작가들의 마음 속 폭풍우가 밑바탕이 된다는 것을 영화 끝에서야 알게 된다. 리지가 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친구 조와 말다툼을 벌이고 아빠 빌, 오빠 션 때문에 마음 졸이고, 고양이 리치한테 화를 내고, 비둘기에게 온통 신경을 쓴 끝에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은 저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며 세상을 예술적으로 만드는 것 역시 저 만큼의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영화 ‘쇼잉업’의 끝에 무릎을 치며 통각(痛覺)하게 되는 건 바로 그 부분이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이 나오기 전에 오프닝 씬만 30초 이상 느릿느릿하게 나오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매우 늦고 더디다. 그 호흡을 답답해 하지 말라. 이 영화는 그 느림에서 깨달음을 주는 작품이다. 영화 ‘쇼잉 업’을 기억해 두시기 바란다. 영화 속 비둘기도 잘 염두에 두기 바란다. 끝에까지 자신의 역할을 다 하는 캐릭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