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일반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내 생애 첫 이사였다. 온 동네 사람들과 가족과 같은 끈끈함이 있던 고향을 떠나 이사를 한다는 것은 현관문을 열고 밟았던 마당 대신 엘리베이터를 밟아야 하는 낯섦 이상으로 가혹했다. 더 이상 할아버지, 동생과 같은 방을 쓰지 않아도 되었고, 연탄을 때던 전에 비해 훨씬 따뜻해진 난방에 모든 환경이 훌륭해졌지만,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새집으로 들어와 가구 정리도 채 되지 않았던 어느 날 밤, 라디오에서 동물원의 '혜화동'이 흘러나왔고, 몇 주 만에 추억이 되어버린 내 동네와 사람들 생각에 눈물이 났다. 옛 동네가 그리웠다. 시간이 흐르고 중학생이 되어 새 친구들도 많이 생기고 새로운 환경에 나름 적응되어 가고 있었을 무렵 다시 한번 내 감성을 주무르는 노래가 나왔으니, 바로 김현철의 '동네'라..
3년전 들떴던 ‘꽃피는 봄날’ 기억을 되살려 본다. 판문점 도보다리에서의 남북정상간 머리를 맞댄 그 긴박했던 순간들. 추억이 아니라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할 기회가 이번 5월에 찾아오고 있는 듯하다. 오는 21일에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될 한미정상회담에 거는 기대가 크다. 문재인-바이든 대통령의 첫 만남인 이번 한미정상회담이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다시 재 궤도에 올릴 절호의 기회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바이든정부의 대북정책 검토 결과의 윤곽, 북한측의 미국과 한국정부를 향한 담화문 발표 내용, 그리고 문재인 정부로서는 마지막 기회일수도 있는 남북관계 재개를 위한 정부의 결연한 의지 등을 종합해 보면 힘들지만 좋은 결과를 기대 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미국의 새로운 대북정책 내용은 트럼프대통령의 빅딜도 아니고 오바마대통령의 전략적 인..
정부와 정치권이 가상화폐 문제를 놓고 엇박자를 내는 사이에 이른바 ‘코인 광풍’이라고 불리는 가상화폐 신드롬의 부작용이 심상치 않다. 정체를 알기 어려운 중소규모 가상화폐 거래소나 불법투자업체의 사기행각에 말려들어 큰돈을 날리는 국민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비트소닉’이라는 가상화폐거래소 하나에서만 130여 명이 75억 원의 손실을 볼 정도로 피해 규모가 막대한 상황이다. 피해를 차단하기 위한 종합적인 대책이 시급하다. 올해 1분기 4대 가상화폐 거래소에 계좌를 새로 개설한 사람은 모두 약 250만 명이고 거래대금도 총 1천486조 원으로 코스피 거래액을 넘어섰다. 그야말로 가상화폐 시장에 ‘미친 바람’이 불면서 국민의 종잣돈, 생활자금, 노후자금이 순식간에 빨려 들어갈 여지가 있는 블랙홀이 등장한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단식 10년 전, 한 단식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오십 대초였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놀라웠다.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도 특별한 도전이었다. 2-30대에 술담배를 과하게 했다. 1년에 한두 번은 탈이 나서든 쉴 목적으로든 1주일쯤 입원하면서 일했다. 듬직하게 살아 있는 게 기적이다. 당시 나의 체중은 80kg, 키는 165cm. 이 숫자들은 몸과 정신상태가 좋지도 옳지도 않았다는 증거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생사의 경계선을 겁도 없이 몰지각(沒知覺)으로 뛰어다녔다는 말이다. 단식 돌입 후 두 달이 되었을 때, 체중은 60kg으로 떨어졌다. 그게 정상이었다. 내 인생 중반에 참으로 쑈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회복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지금은 종종 막걸리 한두병쯤 하면서 살지만, 그때는 담배는 물론 술 한 방울도 안하는 일적불음(一滴不飮)이었다. 그랬더니 머지..
국민의힘 차기 당대표 적합도 조사에서 나경원 전의원이 1위에 올랐다고 한다. 나는 그 분 이름만 들으면 오랜 기억 하나가 소환된다. 그는 2004년 한나라당 연찬회에 올렸던 ‘환생경제’라는 풍자극의 출연자였다. 아들 ‘경제’를 영양결핍으로 잃고 맨날 술만 퍼먹고 허송세월 하는 가장으로 노무현대통령을 묘사했던 연극은 “000달고 다닐 자격도 없는 놈”,“육실헐 놈”,“개잡놈”등 욕설로 비하해 큰 물의를 빚은 바 있다. 그들은 노대통령 임기 내내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으로 규정했고, 언론은 받아 적었다. 노무현대통령 재임시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4.5%였으며 전해 대비 수출증가율은 18.2%에 달했다. 코스피지수는 취임시보다 3배까지 올랐다. 대한민국에서 그런 호경기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들이 정권을 잡기위해 폭망한 경제가 필요했을 뿐이..
촛불의 여망을 업고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임기 1년을 남겨두게 됐다. 문 대통령은 10일 취임 4주년 기자회견을 통해 공정과 통합, 양극화 등 국정 전반에 관해 아쉬움과 소회를 밝혔다. 문 대통령은 4년전 취임사에서 “기회 평등·과정 공정·결과 정의,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천명했다. 최근 발표된 여론조사들을 보면 문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대체적으로 30%대 초중반이다. 한국갤럽에 따르면 4주년 무렵 문 대통령(36%)은 김대중 대통령(33%)과 비슷하고 이명박(24%)·노무현(16%)·김영삼(14%) 대통령 보다는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최근의 여론 흐름이나 4·7 재보선 민심은 4년전 80%대였던 문재인 정부의 시작과는 다름을 경고하고 있다. 일자리와 주택, 북핵 등 경제와 외교·안보 정책 등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여기에 대내외적인 불확..
추운 겨울 잘 견뎌낸 마른 나무에게 몸 숨기기 힘겨웠던 산새들에게 한겨울 목숨 지탱한 뿌리들에게 투정하지 않고 겨울잠 자는 동물들에게 꼬물꼬물 애벌레들에게 고마움으로 보내는 감사의 눈물이다 ▶ 약력 ▶김포 출생 ▶『미네르바』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하얀불꽃』, 『신포동에 가면』 ▶서상만 시인 시비 씀
박근혜 정권 때였다. 지하철 무임승차 단속반이 아내와 나를 가로막았다. 아내가 사용하는 장애인 교통카드 때문이었다. 단속반 완장을 찬 중년 사내는 장애인을 사칭한 무임승차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멀쩡한 사람이 교통비 몇 푼 떼먹으려고 이래서야 되겠냐는 식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았다. 퇴근길에 지친 눈길들이 아내에게 쏟아졌다. 파렴치범을 대하는 눈빛이었다. 찔러오는 눈빛 앞에서, 발가벗겨지기라도 하듯 아내는 장갑을 벗어야만 했다. 엄지를 잃은 손은 어미를 잃은 아이 같았다. 주체할 수 없는 모멸감에 아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엄지손가락을 잃은 아내의 손을 확인하고도 단속반은 죄송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역무원들이 일하는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지만 어느 누구에게서도 정중한 사과는 듣지 못했다. 공공근로..
봄은 꽃의 계절이기 전에 씨앗의 계절이라고 했다. 하나의 예로, 정월 대보름 오곡밥을 지어 먹으며 씨앗을 심기 전 그 씨앗들을 확인하였다. 조상들은 겨울 동안 곡간에 갈무리해 두었던 씨앗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자 일부러 오곡(五穀)밥을 지어 먹었던 것이다. 5월의 숲은 봄의 완성을 위한 녹색 볼륨으로 충만하다.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은 자기 본래의 모습과 체질에 맞게 무성해지면서 커다란 숲 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의 봄은 숲과는 달리 예상치 못했던 질병으로 짙은 안개 속에 갇혀 있다. 우리 집에는 외국에서 사업하던 아들이 코로나로 입국하여 친구 사업을 돕다 발목을 심하게 다쳐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장기간 고생하는 아들을 보면서 삶이란 게 능력과 성실만으로 되는 게 아닌가 싶어 마음 약해질 때가 있다. 서점 나들이를 했다. 아..
태양광 패널을 도심의 건물에 설치할 경우 옥상 이외에 딱히 마땅한 곳은 없다. 건물 벽체에 설치할 시 옥상에서의 발전량 대비 약 78% 정도로 효율이 떨어진다(서울에서 남쪽 방향의 경우). 게다가 인접 건물이 태양 빛을 막는 위치에 있을 경우 효율 저감은 더 급격히 떨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건물 외벽에 태양광 패널을 부착하는 것은 발전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재생에너지 발전 의무화 비율 혹은 계몽적 목적이라 볼 수 있다. 건물 외벽의 검은 패널들을 보면 흰 비단에 검은 패치를 붙인 옷을 입은 신사가 ‘나는 친환경 패션이야’라고 우쭐대는 듯하다. 건축은 그 자체로 문화이며 인간 생활의 그릇이기에 심미성은 그저 장식이 아니고 건물의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만약 나의 옆 건물이 친환경이면서도 보기에 수려하다면 내 건물의 자산 가치는 상대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