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 셔츠가 걸려 있다 겨드랑이와 팔 안굽이 심하게 구겨져 있다 바람과 구름이 비집고 들어가도 잔뜩 찡그리고 있다 작은 박새도 도로 날아 나온다 저 옷을 벗어놓은 몸은 오늘 밤을 자고 나도 팔이 아프겠다 악착같이 당기고 밀치고 들고 내려놓았을 물건들, 물건 같은 당신들, 벽에 셔츠가 비뚜름히 걸려 있다 오래 쥐고 다닌 약봉지처럼 구겨진 윤곽들, 內心에 무언가 있었을, 內心으론 더 많은 구김이 졌을 구김의 정도에 따라 하루의 성과를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셔츠의 구김살. 매일 입고 벗어 놓는 오늘은 어제와 다르다. ‘현대’라는 셔츠는 구겨질 수밖에 없다. 셔츠의 구김살보다 더 구김이 가는 몸의 구겨짐. 그보다 더 뚜렷한 윤곽으로 남는 마음의 구김에서 생기는 상처들. ‘현대’라는 증후군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모두는 오늘과 다른 푸른 내일이 있기에 아침마다 구김살을 편 새 셔츠를 입는 것이다. /권오영 시인 -문태준 시집 ‘그늘의 발달’ /2008년 / 문학과 지성사
사람의 중년은 참으로 마른 잎 같은 계절일지도 모른다. 제 혀로 제 꼬리의 상처를 핥는 승냥이처럼, 종착점을 앞둔 마라토너의 빈혈이 느껴지는 시편이다. 나이가 들수록 내 몸에 피가 스쳐가는 지점이 선명히 느껴진다. 갈증의 목구멍으로 독주가 내려가듯 그렇게 혈류의 속도감을 느끼며 사는 중년들의 병든 입은 가을날의 병든 잎처럼 마른 혀처럼 시간의 뿌리를 찾아 맑은 피 한 방울을 그리워하며 산다. 상처투성이 인생들이 중년에 그 심장이 더욱 요동치는 것은 빠져나간 생기 때문이 아니라 결핍의 축적이 만들어 낸 시간의 숨 막힘 같은 것이리라. 중년들이여! 그대의 혀가 병든 잎처럼 갈라진다해도 당신의 심장은 더욱 요동 또 요동치리라./김윤환 시인 나는 피가 부족하다 내 피는 모두 가을이 낭자한 숲 속으로 흘러갔다 나무 가지 사이로 검붉은 비바람이 지나가고 피 비린내 나는 흡혈 계곡은 창백한 울음을 쏟아낸다 제 몸의 꼬리를 잡기 위해 제 몸의 둘레를 뱅글뱅글 도는 마른 숲의 갈라진 혓바닥, 종착지를 눈앞에 둔 마라토너처럼 나는 점점 흉흉해진다 마른 가지의 빈혈을 치유하기 위해 뿌리의 혈흔에 탐닉한다 낮달처럼 공허한 단풍의 숲을 통과한 핏덩이의 가을을 꿈꾼다 내 영혼의 동굴
55개의 대표적 부실기업이 시장에서 강제로 밀려나게 됐다. IMF로부터 금융과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조속히 시행하라는 권고를 받아온 우리 정부는 1998년 오늘, 55개의 퇴출대상 부실기업 명단을 발표했다. 명단에는 삼성과 현대, LG 등 5대 재벌그룹의 계열사 20개가 포함됐다. 경제대책조정회의에서 부실대기업 정리방침이 공식 결정된 지 두 달 만이다. 55개 기업은 이로써 은행권의 신규여신 중단과 함께 부도처리에 이은 청산과 3자 인수, 모기업 흡수합병 등 여러 절차를 통해 간판을 내리게 됐다.
1953년 오늘, 이승만 대통령은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중장에게 반공포로들을 극비리에 석방할 것을 명령한다. 자유세계에 남기를 원하는 반공포로들을 남한에서 석방하지 않고 한 달 반 동안 중립국 관리 아래 두기로 한 UN과 북한의 포로교환협정에 반발한 조치였다. 당시 UN군이 남한에서 관리하던 반공포로는 3만5천여명. 수용소에 근무하던 한국군 헌병들은 UN군의 눈을 피해 새벽에 일제히 수용소 문를 열었다. 이때 포로 2만7천여명이 석방됐다. 원래 북한과 휴전협정을 이룬 뒤에 반공포로를 송환할 계획이던 UN은 이날 이승만 대통령의 포로석방 단행에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다.
- 정우영 시집 ‘살구꽃 그림자’ /2010년/실천문학사 나는 이제 문지방을 넘지 못한다. 문지방을 넘기만 하면 낯선 얼굴이 되어 나도 알지 못할 곳으로 떠나버린다. 몇 개의 나를 잃어버린 뒤, 나는 문지방 안쪽에다가 그물을 치기 시작한다. 나는 다만 나를 가둬두고자 할 뿐이나 그물에는 생각지도 않은 것들이 걸려든다. 오래 묵은 바람과 풀죽은 볕을 따라 곰삭은 지린내도 들어와 파닥거린다. 노랑나비 두 마리도 찾아와 나풀나풀 사랑을 나누다가 아예 그물을 찢어놓는다. 야가 자나? 아야, 비 온다. 장독 뚜껑 닫아라. 시간의 주름에 접혀 있던 엄니 음성 풀려나오자 문지방도 그물도 가뭇없이 사라진다. 나는 말짱하게 일어나 부리나케 달려간다. 없는 발, 없는 손으로 재빨리 지금은 없는 장독 뚜껑 닫는다. 허공에 지은 집이 잔상들로 부산한 저 우리는 자꾸만 달아나려는 시간을 잡으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산다. 시간의 어느 한순간 속에 그물을 치다 갇혀 울부짖기도 한다. 과거의 잊히지 않는 상(像)이 기억의 표면을 통과해 시인의 가슴에 내려앉을 때, 한 편의 시는 태어난다. 시인을 통해 시로 재생된 시간은 누군가와 접속한다. 그 순간만큼은 굴절된 시간
1983년 오늘도 독재자 피노체트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는 칠레 국민들의 대대적인 시위가 계속됐다. 연일 이어진 민주화 요구 시위를 칠레 정부는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이 숨졌다. 1973년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는 1980년 신헌법을 만들어 장기집권의 기반을 다졌지만 그의 독재를 반대하는 국민들의 퇴진요구는 더 거세지기만 했다.
1974년 오늘, 소련의 저명한 남녀 무용수 2명이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에 도착한다. 발레의 최고봉으로 꼽힌 키로프 발레단에서 활동하던 발레리 파노프와 갈리나 파노프 부부다. 두 사람은 예술적 자유를 찾아 소련을 떠나 이스라엘로 왔다. 키로프 발레단에서는 1970년대에 두 사람 외에도 루돌프 누레예프와 나탈리아 마카노바, 미하일 바리쉬니코프 등 유수한 발레 명인들이 서방 세계로 떠났다.
벽지가 벗겨진 벽은 찰과상을 입었다고 할까 여러 번 세입자가 바뀌면서 군데군데 못자국이 나고 신문지에 얻어맞은 모기의 핏자국이 가까스로 눈에 띄는 벽, 벽은 제 상처를 보여주지만 제가 가린 것은 완강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못자국 핏자국은 제가 숨긴 것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치열한 알리바이다 입술과 볼때기가 뒤틀리고 눈알이 까뒤벼져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피의자처럼 벽은 노란 알전구의 강한 빛을 견디면서, 여름 장마에 등창이 난 환자처럼 꺼뭇한 화농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금은 싱크대 프라이팬 근처 찌든 간장냄새와 기름때 머금고 침묵하는 벽, 아무도 철근 콘크리트의 내벽을 기억하지 않는다 - 이성복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 2003년 / 문학과 지성사 벽에 거는 것들이 누구에게나 있다. 늘 걸어두고 볼 수 있는 것들 속의 상처는 고스란히 얼룩으로 남는다. 입을 열지 못할만큼의 아픈 상처는 내부에 남아 있다. 치유할 수 없는 상처는 벽지의 표면에 얼룩으로 남아 있지만, 찌든 기름때처럼 벗겨지지 않는 법이다. 태울듯이 켜져 있는 알전구 아래서 침묵하는 벽, 빛을 견디는 상처가 힘이 되는 날, 그 ‘아무도’들은…
2004년 오늘, 오전 9시, 남북 해군 함정들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해상에서 국제공용주파수를 이용해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처음으로 직접 무선교신을 했다. 양측 함정은 연평도, 대청도, 백령도 등 NLL 인근 다섯 개 섬을 다섯 개 구역으로 나눠 제1구역에서 오전 9시부터 15분간 첫 교신을 한 뒤 2, 3, 4, 5구역에서 차례로 각각 15분씩 다시 교신했다.
석문동정수(昔聞洞庭水) 예로부터 들어오던 동정호 맑은 물 금상악양루(今上岳陽樓) 오늘에야 악양루에 올라 보노라 오초동남탁(吳楚東南坼) 오나라 초나라 동남으로 갈라졌고 건곤일야부(乾伸日夜浮) 일월은 밤낮으로 물 위에 떠 있어라 친붕무일자(親朋無一字) 친척과 벗들은 한 자 소식도 없는데 노병유고주(老病有孤舟) 늙어서 병든 몸 외딴 배에 실렸노라 융마관산북(戎馬關山北) 관산의 북쪽엔 전란이 계속되매 빙헌체사류(憑軒涕泗流) 난간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노라 - 杜甫 (두보) 두보를 좋아해서 옥편을 들춰가며 제일 처음으로 읽은 시입니다. 빙헌체사류 <눈물 콧물 함께 흐른다>는 원문해석을 두고 오래 생각에 잠긴 적 있습니다. 왜 두보는 콧물을 말했는데, 우리 선조들은 콧물을 빼었을까. 중국사람들은 원문 그대로 읽을텐데 오래도록 생각을 하다가 깨달았죠. 자의적으로 콧물을 빼 버린 건 아닐까. 눈물 콧물 뒤범벅된 모습이 늙고 병든 두보의 말년에 아주 적절히 어울리는데 말이죠.우리민족이 가지고 있는 정신세계의 단면을 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길성 시인